강해, 제2과
제 2부: 그 땅을 나누어라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13:1-7약 30분 분량

(13-19)
<여호수아서> 13-19장은 책의 제 2부에 해당합니다. 그 땅을 정복하였으니 남은 과제는 당연히 그 땅을 나누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용이 온통 지명이나 지역, 그리고 경계선 등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들 이름이 현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처음의 독자들에게조차 무슨 의미나 교훈이 되었을까? 만일 그 독자들이 바벨론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의 후손들이라면 이 본문을 통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땅에도 신학이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땅과 관련해서 책의 2부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바가 있다면,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땅을 나누되,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별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땅 전체를 소개하면서 지파별로 일목요연하게 목록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주제가 그 형식을 결정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제 2부의 기술 형식은 그 주제를 충실히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이 당시 그 땅에 살고 있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지나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화자는 외칩니다: “저기 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있고, 우리가 얻게 될 땅은 그야말로 무궁무진 합니다. 그 옛날 ‘여호수아’와 같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다면, 그가 그 땅을 정복하여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광개토 대왕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오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고 있다면 저 넓은 만주 땅도 어렵잖게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평양 감사도 자기가 하기 싫으면 그만” 이라는 우리네 경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 앞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그 땅을 차지하고 싶은 의사가 그들에게 없다면 그 땅은 여전히 남의 것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그가 약속하셨다 하더라도 인격적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를 억지로 꺾어가면서까지 뜻을 관철하시는 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비록 이방에서 유배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나 ‘갈렙’과 같은 탁월한 지도자를 쫓아 기꺼이 순종한다면, “출애굽”의 기적은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차지해야 할 땅은 지천에 널려있습니다.
새로운 ‘여호수아’는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정복할 땅을 사리사욕으로 혼자 취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특정 계급이나 지파에게 특혜를 주지도 않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게 불편부당하게 골고루 나누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모두를 위해서 마련해 두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들은 단지 임차인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어떤 지도자나 왕도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여 이 점을 잊지 말지어다!
제 2부에 들어서도 여전히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책 전체의 모티브나 주제를 계속해서 발견하고 맛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제 16과: 네 가진 나누라
16
네 가진 것을 나누라
(13:1-7)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1절)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7절)
문학과 역사
본문의 문학적 기능은 제 2부 전체에 대한 요약 내지는 개괄적 서술입니다. 우선 내용이 그렇고, 형식상으로도 첫 절에서 새로운 내용이 등장하고 있으며, 본문의 끝에 등장하고 있는 ‘야훼’ 하나님의 일인칭 명령문은 8절의 화자 자신의 진술(역사적 회고)과는 분명하게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8절에서부터 하나님은 삼인칭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단락 구분은 더욱 용이해 집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1절) 제 1절은 형식상 23:1이나 1:1처럼 이야기의 새로운 시작을 알려준다는 데에 있어 아주 유사한 표현 기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1: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23:1).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7절)
이처럼 본문 내용이 전후의 다른 문맥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되기는 하지만, 이 본문이 원래 속해있던 전승과의 연결 고리를 찾아내는 작업은 그렇게 용이하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특히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이 책의 다른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과는 전혀 상이하고, 때로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내용 상 혼란스럽거나 상호 모순되는 내용들을 간추려보면 대략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정복한 땅에 대한 진술과(10:40-43) 아직 남아있는 땅에 대한 진술(11:16-23 및 본문)이 서로 모순을 보이고 있음. 두 본문의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정복한 땅에 대한 진술: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 ‘여호수아’가 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치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고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하니라.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10:40-43); (2) 남아있는 땅에 대한 진술: “‘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남방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의 산지와 그 평지를 취하였으니, 곧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산에서부터 ‘헤르몬’산 아래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 까지라 그 모든 왕을 잡아 쳐 죽였으며,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과 싸운 지는 여러 날이라.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쳐서 취한바 되었으니,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1:16-23).
(2) 정복하지 않고 남아있는 땅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미흡함.
(3) 이야기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곳이 자주 발견됨:
(가) 급하게 재촉하듯 두 번에 걸쳐 땅을 나누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이어(6-7절) 곧바로 ‘요단’ 동편 땅에 대한 회고가 다시 등장하고 있는 점(13:8-33),
(나) 제 2부의 마지막 부분에서(18-19장) 일곱 지파의 땅 분배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등장하고 있음.
책의 제 1부(1-12장)와 제 2부(13-19장)가 각기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면 이런 모순이나 부자연스러움은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버틀러’(C. T. Butler)에 의하면, 제 1부의 내용은 보다 오래된 구두전승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최종적으로는 <신명기>적 편집과정을 통해서 1-12장의 내용의 일부로서 정착되었으며, 한편 제 2부의 출처는 대대적인 편집 작업의 결과로 <신명기>에서 <열왕기>에 이르는(신 1-왕하 25) 보다 광범위한 <신명기> 전승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참고 도서 1, 146-147쪽). 구두 전승의 양식은 그래서 책의 2부에서는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13장은 이 책의 전환점이 되는 곳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고 있는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의 변화는 책의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서도 쉽게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즉 <여호수아>의 서두에서(1장) 처음으로 등장하는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2-12장을 통해서 정복전쟁으로 구체화되고 있으며, <사사기> 1장과 ‘다윗’의 통치 시대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삼상 30; 삼하 5; 8; 10).
각 전승의 문학적인 특징이나 신학적인 강조점이 다르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로써, 13장에 이르면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강조점이 달라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 1부의 주제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싸우고 투쟁하면서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이었다면, 제 2부에서는 그 이후의 문제 즉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문제로 고심해야 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제와 관련하여 책의 구성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고, 복잡한 편집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그 땅에서의 삶에 관한 주제는 책의 후반부를 관통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 주제는 23장부터 시작되고 있어 우리는 그 사이에 10장에 걸쳐서 길고도 지루한 땅의 분배에 관한 내용을 먼저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늙어버린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도 바로 이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처해있는 상황은 옛날 ‘요단’ 동편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며 서있는 ‘모세’의 상황과 흡사합니다. ‘모세’는 그곳에서 고별설교를 했습니다. 설교의 요지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신 33-34). 우리는 그의 설교를 통해서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나라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그 백성을 권면하고 축복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의 설교의 성격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역사적 회고와 전망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0 여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다시금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역할이 있는 바, ‘여호수아’가 그 백성들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더 이상 미래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 그들이 정복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의 관심사는 “내일 그곳에서”에서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문제를 백성들 앞에서 설교할 것입니다(23장). 책의 후반부에 들어오면서 이처럼 달라진 상황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우리를 곧바로 그곳으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그의 고별 설교를 들으려면 열장에 걸쳐(13-22장), 지루하게 소개하고 있는 땅의 분배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만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처럼(각주 4), 이곳 제 2부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들은 일련의 전승들을 바탕으로 한 의도적인 편집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대표적인 전승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르우벤’, ‘갓’, ‘므낫세’ 반)의 정착에 관한 자료(민 32; 신 3:12-22); (2)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의 경계에 관한 전승(민 34; 수 1; 참고, 왕상 8:65); (3) 여전히 남아있는 땅에 대한 전승(삿 1).
그 첫 시작을 읽어봅시다:
1하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6후너는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 7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라(1절후; 6후-7절)
‘여호수아’는 설교 이전에(23:1) 정복한 땅을 먼저 나누어주어야 합니다(14-21).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삶의 자세에 대한 설교를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순서일 것입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의 요지는 대략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현 상황에 대한 진단(1절)
2) 아직 남아있는 땅에 대한 언급(2-5절)
3) 궁극적으로 완성하게 될 땅의 정복에 대한 약속(6절상)
4) 여호수아의 당면한 과제와 즉각적인 수행에 관한 독려(6절하-7절)
신학과 신앙
1. 진단(1절)
화자는 신학적 긴장을 조성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1절)
긴장이라 함은 다름 아닌 <사사기>나 <신명기> 등에서 중심 되는 주제로 발전하고 있는 그 땅에서의 이방인과 더불어 살게 됨으로써 맞이하게 되는 긴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화자는 느닷없이 아직도 그 땅이 완전히 점령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 역사적 사실로써 그냥 선언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강조하고자 바는 다른 데 있어 보입니다. 무엇입니까?
책의 제 1부에서(1-12장) 다룬 바 있는 주제와 동일한 주제를 다시 끄집어내고자 함인데, 다름 아닌 ‘리더십’에 관한 것입니다. 적어도 이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여호수아’에게는 이루어야 할 과업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입니다. 도합 서른 한 명의 왕들을 다 죽이고 그 땅을 완전히 평정했다고 직전의 구절에서 언급하고 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12:24), 이 선언은 분명 앞의 진술과는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여호수아’가 이제 너무 늙어 그 일을 다 이루기에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 전쟁터에서 보냈고(11:18), 하나님께 온전히 충성하였습니다(11:15).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이 있다면 무슨 새로운 과업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이루어 놓은 일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정복한 땅을 나누는 일을 말할 것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다루기 전에 화자는 일단 남은 지역을 언급함으로써 독자의 주의를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 있습니다.
2. 남아있는 땅(2-5절)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보듯이, 남아있는 땅은 크게 지역별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블레셋’ 땅과 그의 남방 동맹국들(2-3절)
(2) ‘시돈’ 등을 포함한 ‘페니키아’ 해변 지역(4절)
(3) ‘레바논’의 북방 산악지대(5절)
그 땅을 이런 식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처음 독자들의 삶의 자리는 ‘다윗’이나 ‘솔로몬’ 왕 재위 당시에 이루어야 할 과업을 반영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블레셋’은 ‘다윗’ 왕 시대에 이르러 모두 정복이 되었고(삼상 27:2; 삼하 8:1; 21:15-22; 23:8-17), ‘페니키아’ 해변을 장악하고 통치하였다는 기록은 <사무엘서>에서만 유일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삼상 24:6-7). 그리고 ‘솔로몬’은 ‘다윗’이 ‘시리아’ 인들과의 전쟁을 통해서 거둔 승리를 바탕으로 ‘레바논’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삼하 8:3-12; 10:1-19).
‘블레셋’ 땅이라 함은 그 주변의 여러 지역을 포함해서 부르는 이름이기도 한데, <사사기>나 이스라엘의 왕정 초기에 이들 족속이 당시 행사했을 정치, 군사적인 영향력을 추측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참고: 삿 3:31; 10:6-7; 13-16; 삼상 4:7; 13-14; 17-19; 23:1-6, 27-28; 27-29; 31:2; 삼하 5:17-25.
<여호수아서>에서도 이들이 여전히 정복되지 않고 남아있었다는 암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11:22).
이들은 원래 “해양 족속”으로서 소아시아 동쪽과 ‘크레테’(Crete) 섬으로부터 이주해 와서 주전 12 세기경에는 다섯 개의 거점 도시에서 정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3절). 그러다가 주전 604년에 ‘느부갓네살’ 2세에 의하여 추방당하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편 ‘그술’ 족은 북방 ‘시리아’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이 지역은 이스라엘의 두 지파 반이 정복한 지역이기도 합니다(신 3:14; 수 12:5; 13:11-13). ‘다윗’은 정략결혼을 통해서 비로소 이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나(삼하 3:3; 대상 3:2), 이후 ‘압살롬’이 반란에 실패한 후 피신처가 되기도 했습니다(삼하 13:37-38).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다윗’이 ‘시리아’ 거민들과 전쟁을 치룰 때, 이 지역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삼하 8, 10). 아마도 사돈뻘이 되었던 족속들이 살던 지역이니 만치 의도적으로 제외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술’ 족도 아마도 이 지역에 살던 거민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보다는 ‘다윗’이 공격했던 ‘블레셋’ 남쪽 지역에 살던 족속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한 듯싶습니다(삼상 27:8). 화자는 ‘블레셋’과 ‘그술’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곧 애굽 앞 시홀 시내에서부터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북방 에그론 지경까지와 블레셋 사람의 다섯 방백의 땅 곧 가사 사람과 아스돗 사람과 아스글론 사람과 가드 사람과 에그론 사람과 또 남방 아위 사람의 땅과(3절)
즉 남쪽으로는 ‘이집트’ 변경 ‘시홀’에서 북쪽으로는 ‘에그론’까지 이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지리를 알기 위해서는 성서지도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사이몬 젠킨스’, 「성경과 함께 보는 지도」, 박현덕 역. 서울: 목회자료사. 1990.
이러한 지역 구분에 따르면 ‘그술’ 족은 ‘가사’ 지역에서 남방 ‘이집트’ 국경까지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화자가 ‘시홀’을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신명기 전승> 내에서 다른 전승들과는 뚜렷이 구분되고, 오직 <역대하>의 기록하고만 연관이 있는 어떤 전승을 인용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참고, 대하 13:5). 이 구절에 따르면 ‘시홀’은 ‘이집트’의 남방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언급의 배경에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이집트’의 국경 내까지 확대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여 집니다. 아무튼 이 지명은 ‘사울’과 ‘다윗’의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수중에 들어오게 됩니다.
한 편 ‘에그론’ 지경에 살았다는 ‘가나안’ 사람에 대한 언급은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원래 이 땅 전역에 흩어져 살던 일곱 족속 전체를 ‘가나안 족속’으로 지칭하기는 했지만(민 13:29; 신 1:7; 수 5:1; 11:3), 한 때 이 해안 지역을 가나안에 속한 것으로 기록한 특별한 한 전승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신명기>-<여호수아> 중에서는 그렇게 흔하지는 않지만, ‘요단’ 서편의 전 지역을 ‘가나안’으로 부른 경우도 있습니다(수 22:9-11, 32). 본문과 일부 다른 곳에서는(신 11:30; 32:49; 수 5:12; 14:1), 이 지역 속에 ‘블레셋’과 ‘그술’까지 포함하여 보다 광범위한 지역을 총칭하는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다만 본문에서는 이 지역을 이스라엘의 영토와 ‘가나안’의 영토로 구분하고 있는 데, 이는 후에 이 두 세력 간의 충돌과 마찰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섯 개의 도시 국가를 중심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 이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가사’는 ‘삼손’ 시대에 ‘다곤’ 신전이 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삿 16:23-30). 원래 이 지역은 이집트의 ‘아마르나’ 왕조 시대에는 그 지역에서 중심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여호수아가 나중에 정복하게 됩니다(수 10:41). 그러나 이후에도 이 지역에는 여전히 ‘아낙’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수11:22). <사사기>에 의하면(삿 1:18), 이 지역은 ‘유다’에게 할당되었으며,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왕상 5:4) ‘가나안’의 서쪽 경계로 굳어지게 됩니다.
‘아스돗’은 오늘날 ‘이스둣’이라 불리는 지역으로 볼 수 있는데, 고대 ‘아스글론’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14 킬로미터, 그리고 현대의 ‘아스돗’으로부터 육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유가리트’ 문헌에 의하면 이 지역은 직물 산업이 번창했으며, 이곳에 있던 ‘다곤’ 신전은 후에 하나님의 법궤로 인하여 큰 수난을 겪게 됩니다(삼상 5:1-9).
‘아스글론’은 ‘가사’와 ‘아스돗’의 사이에 위치해 있고 ‘블레셋’의 도시로는 유일하게 해변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문헌에 의하면 이 도시는 ‘라암세스 2세’가 저주를 내린 여러 도시 중 하나였으며, 이집트의 신 ‘프타’(Ptah)에 대한 제사 의식이 비롯된 곳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아마르나’ 왕조 시대에는 ‘아스글론’ 왕이 ‘바로’에게 전적인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가드’는 오늘날 그 정확한 위치 확인 문제와 관련하여 성서 고고학자나 지리학자들 사이에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지역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참고도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참고 도서 1, 150쪽).
이 지역에서도 하나님의 법궤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삼상 5:8-9). <사무엘서>에 의하면(삼상 7:14), 선지자 ‘사무엘’이 ‘에글론’과 함께 이 지역을 이스라엘에게 복속시켰으며, 이스라엘은 ‘가드’의 ‘골리앗’을 물리침으로써 ‘블레셋’ 족을 그들의 본거지 ‘가드’와 ‘에글론’까지 밀어부칠 수 있었습니다(삼상 17). 다윗은 그가 ‘블레셋’으로부터 ‘시글락’을 선물로 얻을 때까지 ‘가드’ 왕과 함께 지내기도 했으며(삼상 27:1-7), 결국 이 지역을 전쟁으로 차지해 버리고 맙니다만(삼하 21:20-22), ‘블레셋’의 왕은 여전히 ‘솔로몬’ 시대에도 ‘가드’에 남아있었습니다.
‘에글론’ 역시 정확한 위치 확인 문제로 고고학적으로 논란이 많은 지역이기도 합니다. ‘유다’가 이 성을 얻기도 했으나(15:45-46), ‘단’ 지파의 몫이기도 했습니다(19:43).
‘블레셋’에 속한 다섯 도시에 이어 ‘아위 사람의 땅’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신명기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는데, ‘블레셋’에 속한 ‘갑돌’ 사람이 이들을 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신 2:23). 이어지는 설명은 다소 애매합니다:
또 가나안 사람의 온 땅과 시돈 사람에게 속한 므아라와 아모리 사람의 지경 아벡까지와(4절)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가나안’ 사람은 좁은 의미로는 북쪽 해안 ‘페니키아’에서 남쪽을 ‘아벡’까지 이르는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아모리’ 사람의 땅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아모리’ 사람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산악 지대에 살았다고 합니다(민 13:29; 수 5:1). ‘므아라’ 사람이 살았다는 지역의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한 채로 남아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아벡’은 성경에서 여러 지역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1) ‘아셀’ 지파에게 할당되긴 했지만 그들이 정복하지 못한 땅으로서(19:30; 삿 1:31), ‘아코’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2) ‘요단’ 동편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도시(왕상 20:26-30; 왕하 13:14-19, 25); (3) ‘레바논’의 고대 ‘비블로스’로부터 동으로 15 마일 떨어진 오늘날의 ‘아프카’에 해당함; (4) 이 이름으로 가장 잘 알려진 지역으로 ‘샤론’ 평야에 위치했던 한 도시 국가의 이름. 그리고 이어지는 5절은 북쪽 한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 그발 사람의 땅과 동편 온 레바논 곧 헤르몬산 아래 바알갓에서부터 하맛에 들어가는 곳까지와(5절)
이 지역은 ‘그발’에 있는 ‘시돈’ 이북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레바논’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으로서 모세가 일찍부터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땅이었습니다만(신 1:7; 3:25; 수 1:4), 여호수아 당시에도 정복하지 못하고 남아있었습니다(수 11:17; 12:7). ‘솔로몬’ 당시 국경이 북으로 ‘레바논’까지 미쳤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왕상 8:65), 이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영토로 편입된 듯합니다.
3. 약속(6절상)
마지막으로 6절은 그동안 언급한 지역 모두를 요약하고 총칭하는 듯 보입니다만, 실은 고작해야 4-5절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르봇마임까지의 산지 모든 거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6절상)
‘시돈’이라 함은 ‘레바논’ 계곡과 ‘페니키아’ 해변 지역을 일컫는 것이며, ‘미스르봇마임’은 ‘여호수아’가 정복한 북쪽 땅의 한계를 일컫는 것입니다(11:8). 그러나 이 구절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하여 동일한 모티브를 담아내고 있음을 놓칠 수 없습니다.
4. 독려(6절하-7절)
그러나 두 번째 단락의 주제는 ‘요단’ 서편의 땅을 나누는 일입니다. 강의 동편에 사는 두 지파 반은 이미 그들의 몫을 받았으므로, ‘여호수아’가 새롭게 해야 할 일은 서편 땅을 나머지 지파들에게 나누는 일로서, 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찍이 부과하셨던 일이기도 합니다(민 26:52-56). ‘여호수아’가 새롭게 수행해야 할 이 과업이 그 땅을 정복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화자는 반복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너는 나의 명한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하셨더라(6절하-7절)
이 일은 앞으로 천천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임을 문장의 분위기를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화자는 즉각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독자들을 이끌어가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은 요단 동편에 관한 또 한 번의 회고입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교훈과 적용
1.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전쟁은 끝이 났고, 백성들은 승리했습니다. 남은 과제가 있다면 그 땅을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정복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23절).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수행해야 할 숙제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습니다. 즉 아직도 그 땅에는 이방인들이 수두룩하게 여기저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2-6절상). 아직도 이방인들의 수중에 들어있는 땅에 대한 묘사를 보면, 지역별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서쪽 지중해 연안의 ‘블레셋’ 땅과 그들의 남쪽 동맹국들(2-3절); (2) 북서쪽 지중해 연안 ‘시돈’을 중심으로 한 ‘페니키아’ 해변;.(3) 북쪽 ‘레바논’ 산악지대(5절) (지도 참고).
전쟁이 끝났으면 마땅히 적들은 모두 사라지고 이스라엘만이 새 주인이 되어 살고 있어야 마땅할 텐데, 현실이 그렇지가 못합니다. 앞 이야기의 결론과도 맞지가 않습니다. 화자는 이러한 모순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입니다. 그냥 사실로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화자는 마치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은 어떻습니까?: “과연 이스라엘이 적극적으로 이 땅을 계속 차지하고 유지할 의지라도 있었을까?”; “말(馬)을 물가로 데리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평양감사도 저하기 싫으면 그만 일 텐데 하나님의 언약도 그러한 것일까?”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들 질문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루어가는 독특한 방식, 즉 인격적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주제는 하등 새로울 것은 없으나, 그의 뜻을 드러내거나 인도하시는 방식이 인격적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두 권의 탁월한 저서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달라스 윌라드’.「하나님의 음성」. 윤종석 역. 서울: IVP, 2001; (2) ‘게리 프리슨’. ‘로빈 맥슨’. 「하나님의 뜻과 자유의지」. 장동민 역. 서울: 아가페, 1991.
하나님이 인격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납니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권리와 책임을 부여받고 태어난다는 말이겠지요. 마찬가지로 기회도 역시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마지막을 꼭 같이 장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를 어떻게 활용했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쉬운 예로 마라톤 경주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다 같이 출발하지만 일등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꼴찌가 있고, 아예 중도에 포기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물론 각 개인의 타고난 능력이나 체질이라고 하는 선천적인 요소, 즉 다분히 운명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어쨌든 개인마다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습니까? 그 목표지점에 어떻게 당당하게, 멋있게, 그리고 힘차게 도달할 수 있을까(물론 이 질문마저도 천국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자만 묻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이 또한 운명적일까?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일까? 만일 모든 것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면 경기는 처음부터 불공정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천국의 운명을 정해 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흔히 이중적이라고 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약속”과 그리고 “아직 이루어질 약속”이 그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점을 이렇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후)
이 구절의 앞부분은 우리가 “이미 얻은 생명”에 관한 약속이고, 뒷부분은 우리가 “계속해서 얻어야 할 그의 생명”에 관한 약속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자로’의 두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것을 다소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라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 11:25) 하셨을 때, 그들은 분명 “주여,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늦게 오신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모순된 이 여인들의 태도를 대하면서 그들이 부활에 대해서 지극히 단편적이거나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을 갖게 됩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 부활은 죽음 이후에나 맞게 될 미래형 부활이었던 것 같다는 것입니다(요 11:24).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들의 믿음도 역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알고 있는 “생명”은 늘 미래형에 속한 것이지, 현재형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 생명은 항상 현재형 내지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하나님은 “늘 스스로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도 이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나자로야, (지금 당장) 일어나라!”(요 11:43).
이제 다시 <요한복음> 10:10에서 선포하고 있는 유명한 이중적 약속으로 돌아가 봅시다. 약속의 앞부분은 누가 한 것이며, 뒷부분은 누가 한 것입니까? 앞부분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셨고, 뒷부분은 우리가 이루어 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반드시 독재나 전횡(專橫)으로 인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하나님의 방식은 늘 “인격적 방식”입니다. 인격은 강요나, 폭력이나, 또는 억압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내 의사가 무시당하고, 강요당하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독재자를 싫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청소년 시기에는 먹기 싫은 밥을 억지로 먹으라고 강요하거나, 마음에도 안 드는 옷을 억지로 사 입히는 부모님이 혐오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그런 식으로 자식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싫다는 것이지요.
그런대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모순된 태도를 보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싫다는데도,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사코, 억지로 주신다는 잘못된 믿음이 그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주권적으로 나타나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도 그랬고, 구원을 받은 후에도 계속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감격스럽고 고맙기 보다는 귀찮고 짜증스럽습니다. 모태신앙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요? ‘아담’ 역시 모태신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에덴’동산에 잘 차려놓은 그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 가치를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강렬하게 원하던 것을 힘써 구한 것이 아니면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이지요. 우리가 공기나 태양에 대해서 늘 감사하며 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나’ 역시 그랬을 것입니다. 박 넝쿨이 강렬한 태양열 때문에 말라죽어 더 이상 더위를 피할 곳이 없자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이런 추측을 가능케 해줍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살리는 “비인격적인 방법”이란 것도 있습니까? 죽은 사람에게 영약을 투입하여 살려내는 등과 같은 무협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방식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지키며 보호해 주시던 그러한 방식은 어떻습니까? 도움을 받는 사람의 의지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행하는 이런 식의 방식을 “비인격적 방식”으로 불러 마땅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에는 우리가 참여할 필요가 없고, 의견을 말할 필요도 없으며, 우리가 지닌 상상력이나 창조적 사고에 의지하여 모험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고, 그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그는 항상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가시기를 즐겨하십니다. 성취감을 느끼십니다. 그래서 늘 우리의 참여의 몫을 남겨두십니다. ‘바울’은 이런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주 극찬의 칭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조직에서나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이 없는 것을 싫어합니다. 직장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발령은 다름 아닌 “대기발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기발령 상태로 두기 위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대기발령 상태로 지내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2. 네 가진 것을 나누라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어떤 종류의 즐거움이나 성취감을 갖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더 정확하게 질문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떤 성취감이나 풍성한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도록 초청하는 것일까? 원수의 마지막 한 명까지 쳐서 무찌르라고 말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지도자 ‘여호수아’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의 달라진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너무 늙어 전쟁을 수행하기조차 어렵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언제 이처럼 여호수아가 늙어버린 것입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기대할 수 있는 바는, 40년 전처럼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면 될 것입니다(신 31, 34장). 그리하여 새로운 지도자가 이스라엘을 다시 독려하여 남은 전쟁을 마저 수행해 가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현재 이스라엘이 당면한 문제는 새로운 지도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숙제에 관한 것입니다. 새로운 숙제란 그 땅을 공평하게 백성들 사이에서 나누어 갖는 일이며, ‘여호수아’가 그 책임을 맡아서 새롭게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지도자 ‘여호수아’의 헌신이 필요할 때가 왔습니다. 이번에도 요구되는 것은 무슨 새로운 자질이 아니라, 그동안 그가 보여 왔던 그 자질입니다. 일관성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땅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까? 아니 나누어 줄 의사가 있기라도 한 것일까?”
이 질문은 실은 우리가 아니라, 화자 자신이 그의 공동체를 향해서 던지는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까? 다름 아닌 사악한 지도자 밑에서 온갖 고초를 당해왔던 이스라엘의 힘없는 백성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역사상 제대로 한 번도 정의로운 지도자(또는 왕)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왕은 그 땅을 공평하게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빼앗고, 착취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 땅은 백성들의 것이 아니라, 왕이나 특권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왕하 21장). 이 이야기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자유와 해방의 역사가 아니라 독재와 억압의 역사였습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한 결 같이 외치고 있는 메시지가 바로 지도자들의 공평과 공의에 관한 것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예: 에스겔 45장.
이스라엘은 결국 그 땅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마는데, 그 원인은 불순종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지도자들의 잘못으로 그 땅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설교자는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역할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여호수아’입니다. 앞으로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려는 자가 있다면, 교회에서 목자나 목사가 되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여호수아’를 닮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일관되게 충실하여 그 땅을 정복하였고, 정복한 땅을 자신의 전리품으로 가진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쫓아, 전쟁이 끝난 후 지체하지 않고(11:23; 12:7), 모든 백성들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공평하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그 땅에 평화와 안식이 찾아왔습니다(11:23). 그는 정복한 땅을 나누어가지기 위해서, 그 땅의 모든 지역을 한 군데도 빠짐없이 다 정복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이스라엘 역사상 정복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땅은 늘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2장에서 이 문제가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오늘의 교훈을 위해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 얼마나 많은 재물과 시간과 재능이 필요합니까?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합니까? 오늘 당장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의 시간과 재물과 재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그것으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토의 문제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 기능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본문을 통해서 발견하는 내용상의 모순은 무엇이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은 무엇일까요?
3. 본문의 핵심 내용인 땅의 분배와 관련하여 연상할 수 있는 기자의 삶의 자리를 추측해 봅시다. 공동체가 당면한 과제나 문제점은 무엇인지, 오늘 나를 향한 메시지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토의해 봅시다. 나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