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과
그 땅 이야기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4:22약 11분 분량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1:3, 4)
<여호수아>는 새 출발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 땅”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땅의 책>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책 전체적으로 무려 87회에 걸쳐 이 단어가 등장하고 있고, 신명기에서도 200여 회 나타나고 있으며, 그 중에서 50여 회가 “차지하다”는 단어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땅이 갖는 의미는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땅, 즉 <가나안>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훨씬 이상입니다. <에스겔>은 이 땅을 가리켜 세상의 “중앙”(겔 38:12)으로, ‘예루살렘’을 열방의 “중앙”(겔 5:5)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이 중앙이라는 말의 ‘히브리’ 단어는 “배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 말은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이 세상을 잇는 “생명선”이라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입니다(요 4:22).
‘제임스 브라운’(J. Brown)도 그의 책 <The Land in Between>에서 이 점을 기막히게 간파하고 있습니다. 즉 이 땅은 대륙과 대륙 사이, 역사와 역사 사이, 문화와 문화 사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에도 ‘예루살렘’에 세계의 3대 종교가 혼재해 있는 것을 보면 이 표현은 결코 과장된 것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유대교에 있어서 이 도시는 이 역사의 마지막 날에 대망의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역사를 펼쳐갈 ‘시온’ 성이 될 것이며, 기독교에 있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향이자 기독교의 발원지이며, ‘이슬람’교도들에게 있어 ‘메카’이자 ‘알쿠드’(거룩한 도성)입니다. 이제 ‘브라운’이 간파한 대로 이 땅이 갖는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본 후, <여호수아>에 담긴 신학적 메시지를 파악함으로써 이 책에 대한 여행을 떠나보고자 합니다.

1. 대륙과 대륙 사이
이스라엘이 지리적으로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을 中東이라 부르는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본 강해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앞 페이지에 지도를 첨부했습니다.
중세의 유럽인들은 지도 작성 시 ‘예루살렘’을 먼저 종이 위에 그려놓고, 그것을 중심으로 다른 지역들을 그려나갔다고 합니다. 필자가 수년 전 학회 참석자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받은 감회와 흥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가 8월이라 시기적으로 기후는 건기에 속해 있어, 구름 한 점 없는 산뜻한 지중해 날씨가 주는 이방적인 분위기에는 이미 익숙해 있었던지라 별로 새로울 게 없었으나, 정작 나를 흥분시키고 들뜨게 했던 것은 바로 주님이 태어나셨고, 걸어 다니셨으며, 그리고 돌아가셨던 그 땅을 나도 밟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흥분은 내가 이곳에 오는 동안 겪어야 했던 여러 가지 불편함을 씻기에 충분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으로 오는 직항로가 없었던 관계로, 파리 공항에서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무비자 통과를 원칙으로 하고 있던 파리 공항조차도 이스라엘 방문객에 대해서만은 철저한 검문검색을 거친 후에야 탑승을 허락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불편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군사, 외교적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 이스라엘 당국이 또한 계산에 넣고 있는 점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여 관광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이 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것이 보다 큰 수확이었습니다. <에스겔>의 말에 절로 동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명을 듣는 동안 절로 “과연 이스라엘은 세계의 중심이구나”하고 소리 지르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때 곁에 선 외국인 교수들이 아주 한심하다는 듯이 필자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야 그 사실을 알았느냐는 뜻이었겠죠.
2. 역사와 역사 사이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세계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늘 중심 무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이 땅이 지리적으로 대륙과 대륙 사이에 있다는 전략적 중요성의 당연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중요한 예를 들어봅시다. 수년 전 백악관에서 주 이스라엘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는 발표가 있자 ‘아랍’ 제국들은 이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미국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겠다는 외교적 결정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밝혔듯이 이 지역은 어느 특정 민족이나 종교의 영향력 아래 둔다는 것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팔레스타인’은 ‘솔로몬’ 왕 통치를 제외하고는 늘 열방들의 힘의 각축장이었습니다. 구약시대 이 지역의 역사는 남으로는 ‘이집트’, 북으로는 ‘시리아’, 그리고 동으로는 ‘바벨론’이나 ‘페르샤’의 끊임없는 침략과 정복의 악순환의 역사였습니다. 그 후 로마가 세계의 강자가 되었을 때는 이 지역은 로마 총독의 지배 아래 있었고, 이어서 ‘비잔틴’의 지배는 성지탈환이라는 명목 하에 8차례에 걸친 십자군 운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그 후 1517-1917년까지 약 400년에 걸친 ‘오스만 터키’의 긴 지배가 있는 동안 이 지역은 거의 완전히 ‘이슬람’화 되는 듯 했습니다. ‘이슬람’의 이러한 지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7년 “팔레스타인 전쟁”입니다. 이 전쟁의 승자인 영국의 ‘알렌비’ 장군과 관련한 일화는 지금도 유명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말을 타고 입성하면서, 예수님이 살아 걸어 다니시던 이 땅을 말을 타고 달릴 수는 없다고 하면서 말에서 내려 걷자, 그를 따르던 병사 모두 걸어서 그 뒤를 따랐다는 일화입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이 지역은 다시 한 번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 이 전쟁의 두 영웅, 독일의 ‘롬멜’과 영국의 ‘몽고메리’가 ‘사하라’ 사막에서 운명의 한 판 승부를 위해 이 지역을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어 왔습니다. 멋진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곧 <성경>의 예언이자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세상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났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가 태어나던 당시의 상황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지배하던 상황으로, 문화적으로 언어가 하나였고, 정치 군사적으로 통일 국가를 이루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동일 화폐 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을 “때가 찬 경륜”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갈 4:10). <로마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새로운 시대의 도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 3:21).
3. 문화와 문화 사이
이 땅의 특징은 또 있습니다. 이 땅은 서로 다른 문화와 기후가 만나는 곳입니다. 서로 다른 두 기후라 함은 동으로는 ‘아라비아’ 사막의 건조하고 뜨거운 대륙성 기후와, 서쪽으로는 온난다습 한 지중해성 기후를 말합니다. 이 두 기후의 규칙적인 순환은 이 지역의 문화나 제반 경제 활동들을 결정해 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한 해의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지중해성 기후가 지배하는 시기로서, 제반 농작물 경작이 이 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건기 시에 필요한 물을 확보해 두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4월에서 9월까지는 대륙성 사막기후가 이 지역을 뒤덮어 모든 식물들은 다 말라 죽어버립니다. 따라서 이 지역 주민 치고 이때를 잘 구별 못하면 한 해의 농사는 물론 제반 경제생활이 아주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천기(天期)를 잘 구별함으로써 자연의 탁월한 해석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갈멜’ 산에 올라 서편 지중해 하늘을 관측함으로써, 하나님의 ‘메시지’를 ‘아합’ 왕에게 전달했던 ‘엘리야’의 일화를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왕상 18:43)? 이 점을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의 영적 무지를 들어 비유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마 16:1).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예로, 오늘의 북한의 산하를 관찰함으로써 그들의 현실과 미래를 쉽게 진단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땅의 문화는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의 영향은 그들의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가나안’ 땅의 정착민들을 농경의 신 ‘바알’을 섬기고 있었는가 하면, 이스라엘은 그 땅에 정착하기 전에는 사막의 유목민이었고 그들의 신은 장막과 함께 이동하는 ‘야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그들이 그 땅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그 땅 거민 들의 신, ‘바알’을 함께 숭배하는 배교와 혼합의 타협을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은 원래는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 땅의 신학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이 그 땅의 주인이시며, 그의 백성들이 마땅히 그 땅에 살아야 함을 ‘여호수아’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그 군대는 하나님께서 400여 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땅에 처음으로 들어가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백성이 그 땅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신학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이 땅과 관련해서 <여호수아서>는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실은 이 책의 구조적 원리가 되기도 합니다.
1. 그 땅을 소유하라
첫 번째 사실은 그들은 그 땅을 소유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땅에 산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땅에 들어가라는 말은 죽어서 훗날 들어가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금 당장 싸워 쟁취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네 찬송가에도 나타나 있듯이 이 땅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그러한 천국의 예표가 아니라, 지금 현실에서 획득해야 하는 우리의 당연한 삶이자 권리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전쟁에서는 이기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싸워 빼앗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약의 성도에게 “그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통한 승리하는 삶, 즉 “성령 충만한 삶”을 의미합니다. ‘바울’도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가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단지 차이가 있다면 우리의 싸움은 이 세상 권세 잡은 마귀와의 싸움이지, 사람들과의 싸움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는 칼과 방패가 아니라 성령의 칼,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다면, 늘 패배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 점 ‘여호수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매사에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준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2. 그 땅을 나누어라
두 번째 그 땅과 관련해서 상기해야 할 사실은 그들이 차지한 땅을 서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승리를 나누라는 것이죠. 사실 이 역시 신약의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 학교에서나 목장에서 만나는 목적 중의 하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나누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리하여 우리가 서로간의 믿음으로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 치고 아무도 공동체 밖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싫든 좋든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성경>은 바로 교회를 위한 책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겠다는 주장은 자기 기만적인 것입니다.
3. 그 땅에서 살아라
이 세 번째 관점은 일견 중복되는 사상처럼 보이나, 실은 그 땅을 소유하고, 나누기 위해서 요구되는 일종의 대전제라고 보면 됩니다. 이 전제란 말할 것도 없이 이 책 전체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기도 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다 상세하게는 “율법의 삶” 또는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설교에서 계속해서 말씀드릴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한 책의 세 가지 핵심 주제를 알기 쉽게 정리해 보면 아래에 도시한 바처럼 영문 이니셜 “L”로 시작되는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여호수아>서는 새 출발의 책입니다. 승전가는 언제 부릅니까? 승리하고 난 뒤라기보다는 승리를 간절히 사모할 때입니다. 언제 천국을 간절하게 그릴까요? 천국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실의와 환멸을 느낄 때입니다. 이 책은 누구에게 필요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책을 모두 마친 후에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겠지만, 오래 된 공동체나 인생의 사추기(思秋期)에 접어들어 이제 더 이상 낙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이스라엘의 지도는 ‘바벨론’도, ‘이집트’도, 광야도 아닌, “그 땅”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살도록 따로 마련해 두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 땅에 살 때만이 진정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긴 해도,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땅을 싸워서 뺏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승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할 때만이 보장되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이 땅은 “하나님의 나라”로 그 의미가 확장되면서 더욱 풍성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그 모든 시간과 공간”을 말합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여호수아’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엡 1:3).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이 사실을 확인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과거 이스라엘처럼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만 그의 약속을 풍성히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거한다는 말은 그의 말씀에 순종함을 말합니다. 나의 지도는 지금 어디입니까?
연습과 토의
1. 국가의 삼 대 요소는 무엇입니까?
2. 이스라엘이 이 세 가지 요소들을 다 갖추기까지 얼마나 걸렸습니까? <오경>을 이 세 요소들이 갖추어지는 순서대로 구분해 보시기 바랍니다.
3. 학자들은 “땅에도 신학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리고 신약에서는 이 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