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과
진군 명령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1:1-9약 34분 분량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1:2, 3).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1:8).
우리는 <서론>에서 “그 땅”이 갖는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특성들에 대해서 개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졌는데, 그 땅이 지니는 성경적인 의미가 그것입니다. 즉 이 땅은 하나님 나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국가의 세 요소로 백성, 주권, 그리고 국토를 듭니다.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과 함께 백성이 형성되었고, 이 백성은 ‘시내’ 산에서 율법, 즉 주권을 부여받았으며, 이제 <여호수아>에서는 국토를 확보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요소 중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이어 <여호수아>가 와야 하는데 <민수기>와 <신명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지 4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민수기>와 <신명기>가 그 중간에 끼어들고 있습니까? 주권 즉 하나님의 법이 제대로 안 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후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이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에 신실했을 때는 그 땅은 항상 그들의 것이었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했을 때는 그 땅으로부터 쫓겨나야 했습니다. <신명기>의 모든 가르침들이 이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 땅”과 “율법”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구약 신학에서 두 개의 큰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수아>에서 또 하나의 축을 만나게 되는데, ‘여호수아’ 자신 즉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보이지 않는 율법에 순종하기 위한 통로이자 살아있는 규범입니다. 요약하자면 이 백성이 그 땅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율법에 순종해야 하며, 눈에 보이는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율법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주제는 영어로 모두 영어 자음 “L”로 시작하는 아래 세 개의 단어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여호수아서>의 신학적 주제는 <신명기>의 그것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흔히 “신명기 사관(史觀)”으로 통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의 핵심 주제어 세 가지를 다시 한 번 요약해 본다면, ‘모세’와 ‘모세’의 율법 그리고 “그 땅”일 것입니다. 이 셋 중에서 첫 두 주제어가 이스라엘에게 있어 “이미”라고 한다면, 나머지 하나는 “아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아직”을 “이미”로 바꾸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어떻게 미래를 현재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 결론은 간단합니다. “현재에 충실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충실해야 할 현재는 무엇인가? “모세의 율법”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어떻게 지키고 순종할 것인가? “눈앞에 보이는 지도자 모세에게 순종하라”입니다.
이들 원리가 책의 전반부(1-12장)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제 1장이 기능하는 바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즉 <신명기>와 <여호수아서>를 잇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책의 전반부의 주제들을 총망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 1장을 다시 그 주제에 따라 세분해 보자면, 크게는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단락은 다시 각기 세 개의 소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도표):
(1) 단락 1: 진군 명령(1-9절)
(2) 단락 2: 명령 체계(10-16절)
자료와 편집. 이상과 같은 단락 구분과 관련해서 Lohfink 등과 같은 일단의 양식비평학자들의 견해를 아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들에 따르면, 본문(1:1-9)은 <신명기>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해설(신 1:37-38; 3:21-22, 28; 31:2-8, 14-15, 23; 수 1:2-9)에 대한 결론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 1장이 기능하는 바는 책 전체에 대한 서막 내지는 전주곡으로서, <오경> 특히 <신명기>의 중요한 모티브들을 등장시키면서 <여호수아서>를 이들과 연결시키는 동시에, <여호수아서>의 구조를 일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후자의 기능과 관련해서 본문은 두 가지 주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요단 서편 땅의 정복(1-12장); (2) 지파들 간의 땅의 분배(13-21장). 이 때 각 부분은 해당되는 주제에 걸 맞는 일련의 독특한 어휘나 용어들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책의 전반부에서 땅의 정복과 관련해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건너가다”(rb'[,아바르) 또는 “들어가다”(a/B, 보)입니다(신 1:38; 3:21, 28; 31:3, 7, 23; 수 1:2). 한편 후반부에서 땅을 나누는 것과 관련해서 핵심어로 등장하고 있는 단어는 “상속하다”(lj'n, 나할)입니다(신 1:38; 3:28; 31:7; 수 1:6).
Lohfink는 이처럼 상이한 두 개의 단어가 본문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는 것에 주목하여 두 개의 양식이 혼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각 단어는 각기 다른 양식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각 양식은 각기 다른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본문의 제목이기도 한 “하나님의 진군 명령”은 군대의 지휘관 ‘여호수아’를 임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는데(2-5절), 이 직책은 <신명기>에서 이미 확립된 바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신 31:23). 지휘관 임명과 관련된 문장은 그 양식에 있어 전형적인 이스라엘의 법률 문서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용 상 세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1) 사실 확인(2절상); (2) 명령(2절하); (3) 명령의 근거(3-5절). 한편 땅을 나누는 일과 관련된 문장(6절, 9절하)의 양식적 특징 역시 <신명기>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는 것으로서(신 31:7-8, 23; 삼하 10:12; 학 2:4; 대하 19:11하), 대략 다음 세 가지 요소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1) 격려와 위로(6절상); (2) 수행해야 할 과업(6절하-8절); (3)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약속(9절하). 이 외에도 <여호수아서>에 대한 다양한 역사비평적 연구가 알려져 있으며, 이들 연구의 핵심은 <여호수아서>와 <오경> 특히 <신명기>와의 자료 및 양식의 유사성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상세한 정보를 위해서 Butler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Butler, 6-8쪽.
이들 연구를 통해서 공통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내용의 결론만 다시 한 번 요약해 보자면, 본문은 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신명기>의 전승을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일반 세속 역사서와 마찬가지로,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서, 즉 사실의 단순한 기록으로서의 역사서란 신명기 학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서>의 모든 역사적 기록도 사실상 신명기 사가(史家)의 “신학화 된 역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본문 중에서 8절 만이 후대 편집자의 손길을 느끼게 하는 곳입니다(참고로 이 구절을 <신명기> 17:18-19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남은 문제는 과연 본문의 최종 편집에 간여한 신명기 학자들의 수가 몇이나 되는가에 있습니다. 본문 3-4절의 내용은 <신명기> 11:24-25에 근거하여 추가 편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4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수 1:3-4)
24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25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신 11:24-25)
그리고 또 한 가지 본문의 양식과 관련하여 제기할 수 있는 한 가지 질문은 7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1:7)
이 구절은 전임 지도자가 후임 지도자에게 남기는 일종의 유훈(遺訓)으로서 그 양식에 있어 격려문에 해당합니다. 이에 상응하는 다른 본문은 <열왕기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2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3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4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왕상 2:1-4)
이 두 문장은 구조적으로 유사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론; 권면; 실질적인 지시 사항들. 두 경우 모두 권면의 초점은 율법에 대한 충성에 맞추고 있습니다. 적어도 신명기 사가들에게 있어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주제로 일관하고 있는데, 그 주제는 다름 아닌 <모세의 율법>입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여호수아’, ‘다윗’, 그리고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평안과 안식을 보장해 주었으며, 반대로 불순종은 ‘여호수아’로부터 ‘솔로몬’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남북조 왕국의 파멸을 가져왔습니다. 두 경우 전임 지도자는 각기 ‘모세’와 ‘다윗’이며, 이들의 후임은 각기 ‘여호수아’와 ‘솔로몬’입니다. 따라서 전임 두 지도자는 율법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후임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하달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두 지도자 ‘여호수아’와 ‘솔로몬’은 이 점에 있어 명암이 갈리고 있는데, 전자가 이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그 약속의 땅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후자는 그렇지 못하고 왕국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관한 7절의 권면은 “신명기 역사”의 골격을 형성함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율법에 관한 권면은 따라서 <언약>의 형식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서도 그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8절을 제외한 본문의 나머지 부분은 그 속에 등장하고 있는 어휘나 용어, 구조나 형식, 그리고 그 신학적 목적에 있어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 할 것입니다.
형식과 수사. 본문의 형식적 특징으로 “반복과 모순”을 꼽을 수 있을 것인데, 이를 통해서 이 단락의 신학적 사상을 강조하려는 것 같습니다.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나 어휘는 <신명기> 31장에서 이미 진술한 바 있는 여호수아의 소명에 관한 것으로서, 이곳에서 반복하고 있는 단어나 용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모세”(1, 2, 3, 5, 7절); (2) “주다”(2, 3, 6절); (3) “모두”(2, 3, 4, 5, 7상, 8하, 9하); (4) “너와 함께 하리니”(5, 9절); (5) “격려의 말”(6, 7, 9절). 이들에 더하여 비록 다른 표현이긴 하나 결국 같은 사상을 드러내는 부분도 있습니다: (1) “성공적인 정복에 관한 약속”(3상, 4, 5, 6, 7하, 8하, 9하); (2)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5하, 9상). 그러나 이처럼 본문 중에 표현이나 용어들이 반복되고 있다고 해서 화자의 의도가 단순 명료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학적인 논증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예컨대, 1-3절의 경우만 하더라도, 약속의 수혜자이자 중재자이기도 한 ‘모세’가 죽었으므로, 이제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는 일견 모순된 진술처럼 들립니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서, 1절과 7절에 따르면, ‘모세’는 죽었지만 율법과 후임 지도자를 통해서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상충되는 진술은 3절과 6절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모세’에게 말한 바대로 모든 것을 다 주었다고 했지만(3절), 실은 그 약속은 ‘모세’가 아니라 족장들에게 한 것입니다(6절). 승리에 대한 약속도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만(3-9절), 그것은 싸워 쟁취해야 하는 것이며(2, 3, 5절), 그나마도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7-9절). 약속의 땅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지만(4절), 발바닥으로 밝는 곳만이 그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3절). 승리는 분명한 것이지만, 지도자의 담대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5-9절).
본문의 신학적 의도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또 한 가지 대조를 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형식과 관련된 것입니다. 본문 속에는 명령문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2하, 5하, 6, 7, 8절). 그러나 신학적인 의도는 명령문이 아니라, 오히려 의문문을 통해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의문문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하신 지도자의 반응과 대응을 요구하는 수사적 질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명령문은 즉각적인 반응이 나올 정도로 그렇게 위압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대화를 통해서 하되 위압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설득과 유도를 통한 명령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거룩한 명령: 그 땅으로 가라(1:1-2)
본문의 첫 번째 단락은 ‘모세’와 ‘여호수아’ 두 사람에 대한 서로 다른 호칭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모세’는 ‘야훼’의 “종”(db,[, 에베드)으로, 그리고 ‘여호수아’를 ‘모세’의 “시종”(또는 “수종자”)(tr'v,샤라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1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1:1-2)
이로 미루어 이 단락의 핵심 관심사가 지도자에 있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서>가 두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은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만, 특히 ‘모세’를 “야훼의 종”으로 부르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를 바라보는 화자의 입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호칭은 <오경>의 다른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출 4:10; 14:31; 민 11:11; 12:7-8). 이 두 호칭은 <출애굽> 1-14장과 신학적으로 연결되면서 <오경> 전체의 신학적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경>의 기원이나 편집과 관련해서 다양한 견해가 알려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튼 <출애굽> 1-14장이 편집의 손길에 의하여 보다 큰 단위 속으로 나중에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시기적으로는 ‘히스기야’ 재위 기간 동안 ‘야훼 기자’의 작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적 주제 그 자체는 선지자 “이사야 학파”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이사야> 7장과 <출애굽> 14장은 그 형식에 있어서나 주제에 있어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탁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부분에 있어서 두 책은 아주 유사한 주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출애굽> 4장에서 ‘모세’의 소명과 관련된 부분 역시 유사한 패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민수기> 11-12장에서도 핵심 내용은 ‘모세’의 선지자적인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민 11:23; 12:6-8). 결국 ‘야훼’의 종으로서의 ‘모세’에 관한 ‘모티브’가 나타났던 시기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늦어도 ‘히스기야’ 시대에 이미 형성된 것으로 보아집니다. <신명기> 사가(史家)들은 바로 이 모티브에 입각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술했을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근거해서 ‘모세’나 ‘모세’의 말에 대한 진정성이나 권위가 확립되었습니다(신 34;5; 수 1:1, 2, 7, 13, 15; 8:31, 33; 11:12, 15; 12:6; 13:8; 14:7; 18:7; 22:2; 4-5; 왕상 8:53, 56; 왕하 18:12; 21:8).
호칭의 한 쪽 편에 ‘야훼’의 위대한 “종” ‘모세’가 있고, 또 다른 한 쪽 편에 그의 시종(내지는 부관) ‘여호수아’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이런 식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이곳과 <오경> 전체적으로 단 세 곳에 불과합니다(출 24:13; 33:11; 민 11:28). ‘여호수아’의 호칭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 “시종”이 의미하는 바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운 신분의 “젊은 부관” 내지는 “견습생”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와 관련된 이런 호칭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출애굽> 24:13에서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났다가, 다시 32:17-18에서 홀연히 등장해서는 이스라엘 진중에서 일어나고 있는 “싸우는 소리”에 관한 정보를 ‘모세’에게 전해주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적어도 문학적으로 24:13은 32장과 연결시키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도 잠간, 그의 모습은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33:11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그가 하고 있는 역할은 ‘모세’의 수종을 들며 “회막”을 지키는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민수기>에서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이 갑자기 등장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회막”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자격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예언하는 일과 관련해서 ‘모세’에게 이를 보고하면서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간청하는 장면을 말하는 것입니다(민 11:26-30). 이곳에서도 출 32:17-18에서와 마찬가지로 ‘모세’는 그의 말을 묵살함으로써 그를 잠잠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면과 관련해서 어떤 문학적 기원이나 모티브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어쩌면 이 책 외에서는 이런 장면이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호수아> 1장외에, ‘여호수아’를 “모세의 시종”으로 부르고 있는 경우는 두 번 모두 제의 적인 상황, 즉 “회막”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다룰 때입니다(위 내용 참조). <신명기>에서도 ‘여호수아’를 “회막”과 관련해서 언급하고 있으며(신 31:14), <민수기> 11장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보다 더 구체적으로 한 특정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민수기> 11장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진중에서 예언하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서, 이 본문의 자료적 기원이 선지자 학파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를 상전과 시종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역시 같은 자료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설이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것이, ‘모세’와 ‘여호수아’가 함께 등장하고 있는 에피소드를 보면, ‘여호수아’는 항상 파괴하고 저주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용맹스럽지만 무지한 전쟁광(戰爭狂)으로 그리고 있는가 하면, ‘모세’는 이러한 그를 제지하고 억제시키는 상관으로 그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자료>에서는 ‘여호수아’를 “모세의 시종”으로 칭할 때, ‘여호수아’를 그처럼 단순 무식한 자로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모세’의 부하이기는 하나 무식한 것이 아니며, 그의 자발적인 순종은 오히려 그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여호수아’를 어떻게 그리든 이 책의 중심 사상은 수차례 언급한 바 있듯이, 그 땅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고, ‘여호수아’가 정복한 그 땅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강대국들의 존재를 상상해 볼 때, 이스라엘이 그 땅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그 땅은 원래는 ‘가나안’ 족속들의 것이었거나(창 11:31; 12:5; 신 1:7), 또는 그 이전부터 살던 여러 족속의 원주민들의 것이었습니다(출 3:17). 이스라엘이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있다면, ‘야훼’께서 그곳 주민들을 심판하기로 했다는 사실입니다(창 15:16; 신 9:4-5). 하나님은 그 첫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하신 바 있습니다.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땅이라는 ‘모티브’는 이후 <오경>를 관통하는 신학적 연결고리로 작동하고 있습니다(창 50:24; 출 3:8; 6:4; 13:5, 11; 32:13; 33:1; 민 11:12; 14:16, 23-24; 32:11-12; 신 1:8; 4:38; 6:3, 10, 등). 땅과 관련한 <오경>의 이러한 신학 사상은 “신명기 사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들 사상의 편집과 관련한 신학적 작업 또한 주로 “신명기 학파”의 손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 주제를 이어받고 있으며, 그 신학적 근거 또한 <신명기>에 두고 있으며, <신명기>가 그 땅에 대한 약속을 다루고 있다면, <여호수아>는 약속의 성취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고, 그 땅의 주민들은 심판을 받았으며, <오경>의 희망은 성취되었고, ‘야훼’의 유업은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2. 거룩한 약속: 그 땅은 어디 있나?(1:3-6)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신 그 땅은 어디에 얼마만큼 있습니까? 이어지는 두 절은 이에 대한 답변입니다:
3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4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3-4절)
이 두 구절을 통해서 두 번째 단락의 관심사가 자연스럽게 그 땅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두 종류의 국경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백성들이 “실질적으로 살고 있는 “현실의 땅”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상의 땅”입니다. 전자(前者)와 관련해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단순하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삼하 24:2-8, 15; 왕하 4:25; 신 34:1-3)만, ‘요단’ 동편도 간혹 포함하기도 합니다(삼하 24:5-6). 한편 “이상의 땅”의 경계는 남북으로는 “이집트 하수”에서 ‘유프라데스’ 지역까지이며, 동서로는 ‘요단’ 강에서 지중해 연안까지를 포함합니다(창 15:18; 출 23:21; 민 13:21; 34:1-12; 신 1:7; 11:24, 왕상 5:1; 8:65; 왕하 14:25; 암 6:14; 대상 13:5; 대하 7:8). <여호수아>는 이 두 경계를 모두 인식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 책에서 정복한 땅은 “현실의 땅”일뿐입니다만(10:41; 11:17, 22; 13:2-7), “이상의 땅”은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것입니다. 이 책에서 이 두 가지 경계에 대해서 언급할 때마다, 나름대로 역사적 현실이나 배경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언급할 때, 그것은 이스라엘이 실제 정복하였고 후대의 왕들이 지배하고 있는 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상의 땅”과 관련된 표현은 주전 13-14세기 경 “이집트 문헌”에서 ‘가나안’ 땅을 지칭하면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것을 후대 이스라엘 전승으로 채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후자의 전승에 따르면, ‘요단’ 동편에 살던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약속의 땅” 밖에서 살고 있으니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수 22:9-34). 이스라엘이 그 땅 즉 흔히 “이상의 땅”으로서의 그 땅을 지배하여 이들 지역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했던 적이 간혹 있기는 했습니다(왕상 5:1).
<신명기>에서 땅에 대한 ‘모티브’로서 “유업”(נחלה)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신명기 사상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이 단어의 동사형이 의미하는 바는 “정착하다”, “차지하다” 등입니다. <신명기>에서 특별히 이 땅을 한 개인이나 지파의 거주지로 인식하기보다는 모든 이스라엘의 거주지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간혹 예외적인 용례(用例) 없는 것도 아닙니다(예. 믹 2:2; 왕상 21:3; 민 16:14).
따라서 “신명기 신학 사상”에 의하면, 이 용어는 전체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어주는 조국, 즉 이전에 방랑과 유목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한 번도 체험해 본 적이 없는 고향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용어는 그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장과 관련해서 제한적인 의미도 드러내주고 있기도 합니다. 즉 그 땅은 이스라엘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땅도 아니고, 한 개인이나 국가 권력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 땅의 신학과 관련해서 또 다른 “신명기적” ‘모티브’가 있는데, “모세의 신탁”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3절하). 물론 예언의 성취와 관련해서 “신명기” 특유의 사상으로 볼 수만은 없을 것인즉, <족장 이야기>의 여러 곳에서 이에 관해서 암시하고 있으며, ‘나단’ 이후 선지자들의 글에서는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만 <신명기 전승>에서는 하나님의 신탁과 그 성취를 이스라엘의 역사의 핵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 독창적인 기여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3절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사실 “모세의 예언”의 성취와 관련해서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당연히 이 구절은 이전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부여한 특별한 소명을 상기시켜주고 있는데, 이는 오직 <신명기>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신 3:21, 28; 31:3-8).
땅에 대한 약속과 성취에 관한 모티브가 두 번째 단락의 절반(3-4절)을 이루고 있다면, 나머지 절반(5-6절)은 또 다른 ‘모티브’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모티브’가 그것입니다:
5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1:5-6)
이 ‘모티브’는 이스라엘의 유목 생활, 특히 <족장 이야기>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족장들이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여행을 시작할 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은 이들 이야기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예. 창 28:15; 31:3; 출 3:12).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한 이러한 표현은 <여호수아>에서는 하나의 전형이 되어 이스라엘이 앞으로 수행하는 모든 소위 “성전”(聖戰)의 ‘모티브’로 굳어지고 있습니다(삿 6:11-16; 민 14:43; 삼상 17:37; 삼하 7:9). 따라서 이 ‘모티브’는 이스라엘의 믿음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믿음이란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과 동행하며, 인도하고, 보호하며, 적에 대항해서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처럼 아주 오래된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나 <출애굽기>의 <모세 이야기>에 등장하던 ‘모티브’를 ‘여호수아’ 당대의 삶을 위한 새로운 ‘모티브’로 재포장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다름 아닌 ‘모세’와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3. 거룩한 성취: 그 땅을 어떻게 차지하나?(1:7-9)
<여호수아> 제 1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모티브’와 관련해서 볼 때 처음 두 단락(1-6절)이 “그 땅”과 “지도자”에 관한 것이라면, 이 마지막 단락의 관심사는 “율법”에 있습니다:
7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이 “율법”은 물론 이전의 지도자(선지자) ‘모세’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후 모든 <선지서>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기도 합니다(예 18:18; 겔 7:26; 호 4:6). ‘이사야’는 그의 제자들에게 ‘토라’를 가르쳤으며(사 8:16), 이스라엘의 현자들 또한 ‘토라’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잠 13:14). <잠언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토라’는 그 내용으로 볼 때 그 유래를 가정교육의 필요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참 1:8; 4:4, 11). <호세아서>는 ‘토라’로 불리는 일단의 전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호 4, 8장), 이들 역시 <오경>의 그것들과 동일한 전승에 바탕을 두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거룩한 명령: 그 땅으로 가라(1:1-2)
첫 두 절은 첫 번째 주제, 즉 땅을 정복하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서, 거룩한 진군 명령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땅으로 가라.” 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입니까! 그동안의 여호수아의 마음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다면, ‘절치부심’(切齒腐心) 바로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의 시계를 40년 전으로 잠시 되돌려, <민수기> 13장의 현장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가데스바네아’에서 행한 운명의 선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백성은 선택의 기로에서- 즉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동료 인생들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을 믿을 것이냐-의 기로에서, “오, 통재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인생은 늘 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버립니다. 가장 큰 힘이 필요할 때, 그 힘을 버리고 나 자신의 연약한 힘에 의지하려 합니다. 이처럼 절대 다수의 지극히 민주적이고,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선택으로 말미암아 청년 ‘여호수아’는 지난 40년을 분노와 눈물로 허송세월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초로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민수기>는 그의 분노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3:6-9).
그러나 이 백성은 이들을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그들은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것입니다! 이리하여 ‘여호수아’는 ‘갈렙’과 함께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참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추측컨대 이 두 사람은 그날 이후 매일처럼 만나 함께 위로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오지 않았을까? 바로 오늘 이 순간까지 말입니다. 나는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가 확신하는 바를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이 곧이듣기는커녕 오히려 냉소하며 나를 잡아가두려 할 때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이 진군명령을 곰곰이 상고해 봅시다. 아주 흥미로운 표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이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입니다. 물론 이 표현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엉뚱한 해석을 가해서는 안 되겠지만, 여전히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이 말은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요, 구원자였던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부터 배제당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필자의 묵상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를 버리신단 말인가? 그가 얼마나 억울해 했을까? 지난 40년을 죽을 고생해가며 이 백성을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사실 그는 자기도 그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다시는 내게 말하지 말라”(신 3:26). 내가 ‘모세’라면 어떠한 기분일까?
‘모세’는 왜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신명기>는 여러 곳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는 합니다만(신 3:23-27; 32:48-52; 31:23; 34:5), 흔히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므리바’의 물 사건일 것입니다(민 20:2-12). ‘가데스바네아’ 근처에서 백성들이 물이 없어 불평하자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바위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했습니다만, ‘모세’가 홧김에 혈기를 부려 바위를 지팡이로 두 번 쳐서 물을 내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만일 이 일이 화근이 되었다고 설명하다면, 궁색한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정도의 실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하나님이시라면 천국에는 사람 하나 없는 황량한 곳이 되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설명은 없을까? 오히려 그 운명의 기로, 즉 ‘가데스바네아’에서의 ‘모세’의 마지막 선택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궁금증은 이런 것입니다. 즉 그 결정적인 순간에 왜 ‘모세’는 ‘갈렙’과 ‘여호수아’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을까?” 그는 백성의 편을 들었거나, 아니면 우유부단(優柔不斷)함으로 결정적 패착을 둔 것으로 보이기에 해보는 말입니다. 지도자의 선택, 그것은 백성들의 그것과는 판이한 것이라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모세’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해도,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신명기>도 ‘모세’만한 지도자가 이스라엘 역사상 나타난 적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신 34:10-12).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전형 내지는 원형입니다. 본문에서도 그를 “야훼의 종”으로, ‘여호수아’를 그의 “시종”으로 부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분명 ‘여호수아’가 정치 및 군사적으로 ‘모세’보다는 열등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더더욱 궁금해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도 있었을 것이고, 백성의 잘못도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몰라도 ‘모세’만큼은 그 땅에 들어가야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그 첫 번째 대답은 정치, 군사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분명 새 시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지도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겨져야 하듯이 이제 이 민족은 새로운 지도자의 부상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도 한 때는 ‘이집트’의 노예였습니다. 그의 이름이 “구원”을 뜻하는 ‘호세아’였던 것도 그의 이런 신분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민 13:8). 나중에 ‘모세’가 그 이름을 ‘예수’ 즉 ‘여호수아’로 바꾸어 주었습니다(16절). 그는 ‘에브라임’ 지파 소속으로, ‘눈’의 장자였습니다(대상 7:20-27). 이 말은 그의 생명이 유월절 날 밤에 위태로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집트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모든 기적과 이사와 능력을 다 목격했습니다. 그는 또한 용맹스러운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 공적은 ‘아말렉’ 군대를 무찌르는 것이었는데(출 17:8-16), ‘출애굽’ 이후 두 달 만의 일이었습니다. 혹시 그도 ‘모세’처럼 ‘바로’의 궁전에서 군인으로 복역하고 있다가 그의 군인이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군인이 되기 위해서 그 모든 보상들을 거절하고 ‘모세’를 따라 나온 것은 아닐까요? 청년 ‘여호수아’가 다시 등장하는 곳은 ‘출애굽’ 이후 ‘시내’ 산 정상입니다. 이때에는 ‘모세’의 부관으로서 그와 함께 산 정상(頂上)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습니다(출 24:13). 그리고는 하산하여 그 유명한 금송아지 사건에서 ‘모세’와 함께 분노하면서, 그 백성들의 타락을 목도했습니다(출 32:17 이후). 이 장면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영광은 물론 그가 섬기고 있는 상관 ‘모세’를 위해서도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뽑은 70명의 장로 및 유사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 다른 장로들과는 달리 회막에 있지 않았던 두 사람 ‘엘닷’과 ‘메닷’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자 이때에도 그는 분연히 일어나 그들이 예언하는 것을 중지시키라고 ‘모세’에게 간할 정도로, ‘모세’의 권위와 지도력을 위해서 “질투”하고 “시기”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13장에서 그는 정탐꾼으로서의 믿음과 헌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그의 모습은 마치 도도히 흐르는 세상의 탁류를 거슬러 좁은 길을 혼자서라도 걷기를 원하는 외롭지만 헌신된 사나이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관 ‘모세’가 우유부단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를 격려하여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실패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잘못된 결정으로 백성들의 손을 들어 주자 그는 순순히 따르고 순종하기로 결정하는 겸손한 모습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 이 시점에서 그가 차세대 지도자로서 낙점을 받은 것은 아닐런지요: “내가 어찌 이런 아들에게 차세대 지도력을 맡기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모세’가 대표하고 있는 세대는 바로 불신과 불순종의 구원 1세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들과 함께 동일시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이다”하시면 “나도 ~이다”로 일관했던 ‘여호수아’에게 새 시대를 열도록 특권을 주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대답은 없을까? 영적이면서 종교적인 차원에서 두 번째 대답을 찾아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지닌 상징성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는 것인데, 이 두 사람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동전의 양면으로 간주하자는 것입니다. <신약>의 용어를 빌자면 “구원”과 “성화”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의 역할을 “구원” 즉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역할로 본다면, ‘여호수아’의 역할은 죽음 가운데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우리의 승리의 삶의 원동력이 되시는 성령 하나님으로서의 역할로 보자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은 모름지기 과거에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확신만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모세의 구원”은 과거의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오늘의 구원, 즉 “여호수아의 구원”도 필요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두 번째 단락이 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줄 것입니다.
2. 거룩한 약속: 그 땅은 어디 있나?(1:3-6)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신 그 땅은 어디에 얼마만큼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만큼 예정해 두셨습니까? 이어지는 두 절을 봅시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3-4절).
우리는 여기서 소위 “이상(理想)의 땅”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 두 절은 실은 같은 약속을 유사반복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땅”의 한계란 없다는 신학적 진술입니다. 기막힌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예정된 땅은 이스라엘의 노력과 의지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약속의 땅은 그들이 차지하고 싶은 만큼 예정되어 있다. 뭐 이런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발로 밟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이 약속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 백성의 운명을 기계적으로 결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어 두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듯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은 이스라엘의 무기력이나 운명론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무한한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만큼 실현할 수 있는가는 그들이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는가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이런 점에서 소위 ‘블루오션’(blue ocean)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신약>에도 이와 병행하는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10:10).
3. 거룩한 성취: 그 땅을 어떻게 차지하나?(1:7-9)
그러나 하나님의 ‘블루오션’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입니까? 마지막 단락은 이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떻게 그 “땅”을 획득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취에 관한 해답인 셈입니다. 그 대답은 율법(토라)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답은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볼 때 썩 적절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전쟁의 유일한 대안이자 궁극적인 선(善)은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전쟁을 앞둔 마당에 한가한 성경공부라니요! 인생의 위기 앞에서 <성경>을 읽으라는 충고와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 ‘여호수아’에게 필요한 것은 ‘기드온’이 바라던 그것입니다. 즉 용감한 군사와 뛰어난 작전, 그리고 첨단 무기 장비들 말입니다.
이 충고는 정말 믿어도 괜찮은 것일까?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선택을 놓고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교회의 지도자란 사람이 와서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 해결이 될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이와 유사한 질문 하나 더 생각해 봅시다. 나는 인생의 중요한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에게 찾아갑니까? 대개는 혼자 고민하거나 또는 가까운 친구를 찾아가리라 생각합니다. 친구가 좋은 것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같이 해주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학생들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선생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동료 학생을 찾습니다. 필자도 학생 시절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교인도 목사나 다른 지도자를 찾기 보다는 다른 지체들을 찾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그 대상이 누구든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시편>은 “인간의 구원은 다 헛것이라”고 노래하고 있고, ‘베드로’ 사도 역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거듭남을 예수께서 해주셨다면, 그 이후의 삶도 마땅히 그분께서 해주시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연약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자신 즉 그분의 말씀일 것입니다. 인생의 ‘가데스바네아’에 도달했다 싶으면 늘 찾아가서 물어야 할 상대가 바로 이 하나님입니다. 탁월한 스승을 만나면 탁월해 집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들은 세 가지 충고를 귀담아 들어 볼 일입니다. 첫째, “네 입에서 율법이 떠나지 않게 하라”입니다. 율법을 매일처럼 말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암송입니다. 둘째,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라”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되 뇌이고 연구하라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탐구와 추론을 말합니다. 필자도 때로 설교 준비를 하면서 본문의 특정 구절을 놓고 씨름할 때가 많습니다. 예컨대, 이번에는 “모세가 죽은 후에...”였습니다. 한 구절을 놓고 계속 묵상하다보면 놀라운 깨달음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경험해 보시길. 셋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입니다. 즉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고 실천해 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가 하고 말입니다.
과연 ‘여호수아’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이 말씀에 순종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진정한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적을 믿습니까? 누가 기적을 일으킵니까? 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까? 누가 ‘나만’ 장군의 문둥병을 치유했습니까? 이 모두 순종 없이는 불가능했던 기적들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딥니까? 약속의 땅 밖, ‘가네스바네아’입니까? 아니면 그 땅입니까? 내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 만큼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계속 간구하며 찾고 있습니까? 내 발로 확인해 볼 일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모세의 하나님”이며, “여호수아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직접 나타나셨고,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마 28:20).
연습과 토의
1. 제 1장의 문학적인 기능은 무엇입니까?
2. 제 1장에는 책 전체를 통해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일련의 모티브들이 있습니다. 찾아보고 책 전체의 신학적 주제를 이끌어내 봅시다.
3.왜 모세가 아니고 여호수아입니까?
4.그 땅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그 땅은 천국입니까?
5.하나님의 약속과 예정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약속의 땅의 범위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습니까?
6. 그 땅은 어떻게 차지할 수 있습니까?
7.나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만족하십니까?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