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목마른 여인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4:7-15약 9분 분량
‘수가’성 우물 한 쪽 편에 목마른 예수님이 물을 청하며 서계시다면, 그 맞은편에는 목마른 한 여인이 서있습니다. 이 장면은 지극히 목가적(牧歌的)으로 비취기도 하지만,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남자와 여자, 한 번도 결혼을 해 본 적이 없는 미혼 남성과 무려 여섯 번을 결혼한 기혼 여성,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과 도비도적인 사람 등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넓고도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 두 사람 모두 피곤하고 목이 말라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육체적으로만 목마르고 피곤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심신이 공히 피곤하고 아픈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혼이 왜 아프고 피곤할까? 내가 그 답을 알지 못한다면, 우물가의 이 여인과 그 형편이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니고데모’와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예수님은 왜 지금 심신이 피곤하고 목말라 있는 것일까요? 그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볼 일입니다.
목마른 이 여인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 탄생 사건을 “임마누엘”로 부르고 있습니다(마 1:23). 번역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입니다(참고. 사 7:14). <요한복음>은 동일한 이 사건을 가리켜, “(그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참고. 1:14). 여기서 “거하다”는 동사는 직역하자면 “장막을 치다”(to tabernacle)입니다. 즉 <출애굽기>의 “장막”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그 장막은 항상 이스라엘 진중에 머물렀고, 이스라엘과 함께 행군했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 또한 그 백성 중에, 그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요한’ 화자의 의도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단순히 나에게 무엇인가 지시하고, 인도하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교제하기 위해서, 즉 나와 모든 것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기분, 느낌, 그리고 감정까지도 말입니다. 예컨대,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게 하고, 동시에 나와 함께 기도 드립니다. 나로 하여금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나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고통과, 좌절과, 괴로움에 동참하시면서 함께 아파하십니다.
“긍휼” 즉 “함께 아파함”(compassion)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우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바로 이 여인 때문에 울고 계시며, 마음 아파하고 계신 것입니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사마리아’ 광야에서, ‘히잡’(두건, 베일)을 쓰고, 온 몸에 긴 소매, 긴치마를 두른 채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는 이 여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베어 나오는 한숨과, 눈물과,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자기 연민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이름도 알지 못하고, 눈을 마주쳐 본 적도 없지만, 이 여인의 행색(行色)을 보는 순간 예수님의 긍휼지심(矜恤之心)의 본능이 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왜 심신이 피곤하고 목마른 것입니까? 예수님 때문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순전히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바다에서 조난당한 사람이 절대로 금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바다 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할 수 있겠지만,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갈증은 더욱 심해지고 결국 온 몸의 세포가 소금 때문에 말라 죽을 때까지 바닷물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지금 목마른 것은 지난 세월동안 계속해서 바닷물을 마셔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이 어떻게 하다 인생이라고 하는 “고해”(苦海)의 바다에서 조난을 당했는지, 그리고 왜 담수(淡水)가 아닌 해수(海水)를 마셔대고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여기서 그 원인과 이유를 따지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이 여인의 처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비속어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랄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이 여인이 여섯 번씩이나 결혼을 했다고 하지만, 미국의 유명한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대도 사람들은 이 여배우를 정죄하고 거부하기는커녕, 그가 새로운 남편을 맞이할 때마다 온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하곤 했습니다.
‘사마리아’의 이 여인이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인생의 갈증을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바다 한 가운데서 바닷물을 계속 마셔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그녀가 지닌 불세출의 미모로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이 여인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남편을 맞이할 때마다 이웃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았을 것이며, 지금의 남편을 맞이할 즈음에는 아예 사람들이 입에 떠올리기도 싫어하는 기피 인물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나 행위를 정당화 하는 방식 중의 하나로, 세상이나 타인을 탓하고 원망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도 그랬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예컨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곳 우물로 물을 길으러 올 때마다 자기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그 이웃들을 떠올리며 적개심으로 입술을 굳게 닫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저만치서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일단의 남정네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행색을 보아하니 ‘유대’인들 같습니다. ‘수가’성으로 양식을 구하러 들어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것이지요. 하지만 이들은 자기에게 눈인사는 고사하고 마치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여인은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다시 한 번 몸을 떱니다. 그리고 이내 적개심이 속에서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까지 뒤섞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인은 우물가에 도착할 때까지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대 우물가에 도착하자말자 또 한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행색으로 보아 이 사람 역시 ‘유대’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조금 전에 겪은 경험도 있었던 터라 여인은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물을 긷기 위해 매달린 물통을 우물 아래로 내릴 준비를 합니다. 바로 그 때, 이 남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물을 좀 주실 수 있겠소”(7절). 화들짝 놀란 여인은 그러나 짐짓 태연한 채 퉁명스럽게 대꾸합니다. 어찌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게, 그것도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걸 수가 있느냐고 말입니다(8절). 그러나 상대는 더욱 알쏭달쏭한 말로 여인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할 생수”를 주겠다는 것입니다(10, 14절).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여인에게 찾아오셨다는 것 말입니다. 먼저 와서 말을 걸었고 대화를 주도했습니다. 가능한 모든 통로를 이용해서 여인과의 접촉점을 마련했습니다. 때로는 질문을 통해서, 때로는 명령을 통해서, 때로는 다른 사람의 스쳐 지나가는 말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여인이 먼저 그 남자를 찾지 않았습니다. 만일 여인이 하는 대로 그냥 두었더라면, 그녀는 예수님을 우물 맞은편에 영원히 그대로 앉아있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생수”란 문자 그대로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로서 더 좋은 물임에는 틀림없지만, 여인의 영적 수준은 ‘니고데모’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녀는 ‘니고데모’가 그랬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대낮이지만 그녀의 영혼은 ‘니고데모’처럼 한밤중 가운데 있습니다. 여인은 “생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당연히 그것을 어디서 길을 수 있는지 물어봅니다(11절). 근처 어딘가에 “야곱의 우물”보다 더 나은 강이나 시내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짐작컨대, 이 여인은 지금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변을 하고 있습니다. 뭐 내심 이런 식의 항변이겠지요: “아니,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당신의 말은 상당히 불경하게 들리는군요. 우리의 위대한 조상 ‘야곱’이 당신보다 못해서 흐르는 생수를 찾지 못하고 여기다 우물을 팠을까요?” 여인은 이 우물에 대해서 신앙심마저 보이고 있는 듯합니다.
이 여인이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생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 <시편>은 하나님을 시냇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 하나님 스스로도 자신을 “생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그리고 메마른 땅에 물을 쏟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도 하십니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사 44:3상).
그리고 <이사야> 55장에서 하나님의 그 유명한 약속을 만나게 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이뿐이 아닙니다. <에스겔서>나 <스가랴>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으로부터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오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겔 47:1-12; 슥 13:1; 14:8). 이 여인이 <신약>을 알 리야 없겠지만, <계시록>은 종말의 날에 이 약속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7).
이처럼 <성경>은 생생한 그림이나 이미지로 생수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여인은 여전히 목마름 가운데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생수”가 아닌 바닷물로 갈증을 해소하려 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 바닷물 속에는 참 많은 것들이 용해되어 있기는 합니다: 돈이나 명예; 지위; 가까운 친구들; 여섯 명의 남편; 가족; 종교 등. 여인의 허기를 해소시켜주고도 남을 만큼의 다양한 영양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지금 영양실조에 걸린 것이 아니라, 목이 마른 것입니다. 단순히 시원한 물 한 잔이 필요할 뿐입니다.
오, 가련한 여인! “생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생수”를 마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가련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유대’인 남자가 목마름을 무릅쓰고 왜 여기까지 왔으며, 왜 지금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가련한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이미 다니는 교회가 있다고 말합니까? 모태신앙인이라고 말합니까? 즉 ‘야곱’의 우물이 있다고 말합니까? 혹시 목이 마른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픈 줄 알고, 물이 아닌 다른 먹을 것들로 자꾸 배를 채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생수처럼 보이는 것을 찾아 계속 마시기는 하나 늘 남는 것은 공허와 허무와 불만족뿐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 차례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그분은 지금 자신이 우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말합니다. 우물은 덮개를 덮어버리거나, 돌이나 흙으로 막아버리면 더 이상 쓸모가 없습니다. 물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솟아나는 샘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덮고 또 덮어도, 돌이든 더러운 흙이든 상관없이 항상 깨끗한 물이 솟아나옵니다. 나의 의지로 그분의 의지를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 문밖에서 문 두드리는 그분을 몰아내지 맙시다. 내가 아무리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어둠 가운데 혼자 지내고 싶어도 그분은 바람처럼, 공기처럼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분의 은혜 속에 잠겨봅시다. 이 일이 그렇게 힘든것일까요?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