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목마른 그리스도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4:3-6약 9분 분량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기독교 신앙에 분명 하나의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난은 종잡을 수 없으며, 때로는 특정 개인에게 설상가상으로 집중적으로 찾아오는 것 같아 아주 불공평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고난이 과연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물을 것입니다.
1755년 11월 1일 ‘리스본’은 지진으로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성 축일(聖 祝日) 중의 하나로서 교회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중 서른 개 교회가 파괴되었고 약 1시간 동안 30,00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1994년 3월 28일 미국 ‘플로리다’ 주의 한 감리교회 건물이 무너져 그 안에서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 중 38명이 압사를 당한 바가 있습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는 ‘아이티’는 2010년 벽두에 엄습한 대지진으로 수십만 명이 죽음을 당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자비롭고 정의로우시다면 왜 그의 통치 하에서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분이 선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다는 증거는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 씨름해 왔고, 그 결과 이 문제에 관한 탁월한 저술들이 여럿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루이스’(C. S. Lewis)가 쓴 <고통의 문제>도 고전 중의 하나로 꼽아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훗날 자기 아내가 암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가 쓴 책이 자기 고통을 감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고난에 관한 지식이 고난의 체험을 감면해 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경>도 고난이나 “악”(惡)의 문제에 대해서 완전한 해결책을 전혀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매 장마다 이들에 대해서 언급은 하고 있지만 관심사는 그 기원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극복하도록 권면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로가 될 뿐입니다.
<성경>은 과연 고난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마지막 한 장을 이 문제에 대해서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여섯 가지 가능한 성경적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논증은 가히 고통에 관한 신학적 집대성이라 부를 만합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여섯 가지 해답 중에서 나는 이 자리에서 한 가지만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여섯 번째 논증으로서, 다른 모든 논증들보다 가장 웅장하고 심오하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고난을 하나님의 “연대적 사랑”(solitary love)의 증거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고통 안에서 하나님이 개인적이고 사랑에 찬 연대감을 갖는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주는 진정한 아픔은 그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관심한 듯이 보이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필립 얀시’(P. Yancy)는 그의 책 <내가 고통 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에서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기아나 전쟁이나 지진 등으로 죽어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하늘나라 보좌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그것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 것입니다.
나도 수년 전에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얼마나 많은 불평과 욕설을 내뱉었는지 모릅니다. 그게 버릇이 되어서 그런지 지금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수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도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욥’이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욥 9:23).
하나님에 대한 이런 식의 지독한 풍자는 십자가를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정말 모든 고통으로부터 초월해 계시는가? 정말 우리의 모든 고난에 대해서 무감각하신가? ‘스토트’ 목사님은 상세하고도 철저한 논증을 통해서 결코 그렇지 않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고난 받도록 허용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 받으셨고, 오늘날에도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서 계속 고난 받으신다.” 그가 소개하고 있는 한 촌극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촌극의 제목은 <기나긴 침묵>입니다.
세상 종말에, 수십억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거대한 평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앞에 비취는 눈부신 빛으로부터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맨 앞부분 가까이 있는 몇몇 집단은 격하게 이야기했다. 수치에 움츠러든 것이 아니라 호전적인 태도로.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할 수 있어? 그가 고난에 대하여 어떻게 안단 말이야?” 피부가 거무스름한 건방진 젊은 여자가 눈에 불을 켰다. 그녀는 나치의 강체 수용소에서 문신으로 새겨진 번호를 보여 주기 위해 옷소매를 잡아 뜯었다. “우리는 공포, 구타, 고문, 죽음을 참고 견뎠어!”
다른 집단에서는 한 흑인 소년이 그의 옷깃을 내렸다. “이건 어때요?” 그는 흉한 실 모양의 화상 자국을 보이면서 물었다. “린치를 당했어요. 아무 죄도 없이 다만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다른 무리에서는 우울한 눈빛의 임신한 여학생이 있었다. “왜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해요. 그것 내 잘못이 아니예요.” 그녀는 투덜거리며 중얼거렸다. 평원 건터 편 저 멀리에는 그런 집단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 각각은 하나님께서 그가 이 세상에 허용한 악과 고난에 대해서 불평을 했다. 하나님이 달콤함과 빛만 있는 곳, 눈물이나 두려움이 없고, 배고픔이나 증오가 없는 하늘에 살고 있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도대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견뎌 내야만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기나 할까?
그래서 이 집단들은 각각 그들의 지도자들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가장 많이 고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뽑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 명의 유대인, 한 명의 흑인, 히로시마에서 온 사람, 지독하게 불구가 된 관절염 환자, 날 때부터 기형으로 태어난 한 남자 등이었다. 평원 한 가운데서 그들은 서로의 의견을 들었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의 논쟁을 제출할 준비가 되었다. 그것은 아주 재치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심판관으로서의 자격을 가지려면 인생이 견뎌야 했던 것들을 먼저 견뎌야만 했다. 그들의 결정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고 선고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를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하자. 그의 출생의 합법성이 의심을 받게 하자. 그에게 굉장히 어려운 일을 주어서 그가 그 일을 하려 할 때에 그의 가족들조차 그를 미쳤다고 생각하게 하자. 그가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배반을 당하도록 하자. 그가 잘못된 비난을 받고, 편견에 찬 배심원들에게 재판을 받고, 비겁한 재판관에게 선고를 받게 하자. 그가 고난을 당하게 하자.
“마지막에 혼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가 무섭게 맛보도록 하자. 그 다음에 그를 죽게 하자.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도저히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게 하자. 그것을 입증해 줄 많은 무리의 목격자들이 있게 하자.”
각 지도자들이 자기 몫의 판결을 발표할 때, 모인 사람들의 무리로부터 찬성이 술렁거림이 올라왔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판결을 발표하는 것을 마쳤을 때,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다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갑자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이미 그 형벌을 다 당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의 그리스도” 이야기도 이 촌극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연대적 사랑”에 대한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해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지난 이야기를 회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3-4절). 여기서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했다”는 말이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이 말은 그가 어쩔 수 없이 ‘사마리아’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데에는 두 경로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요단’의 동쪽을 따라 북상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본문에서 보듯 ‘요단’ 서쪽을 따라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경로입니다. 동쪽 편 길이 다소 멀기는 하나, 대부분의 정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피해 가기 위해서 이 경로를 택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통과해야 했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 길을 택했다는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는 상식과 관례를 깨는 행동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 대답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생수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 쓸데없는 여행으로 자신이 먼저 지치고 목이 마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에 그대로 앉으시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6-7절).
이 얼마나 역설적인 장면입니까? 물을 주러 온 자가 물이 필요한 자에게 오히려 물을 달라고 하다니 말입니다! 그는 지금 단순히 한 낮의 뜨거운 햇빛 때문에 지치고 목마른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그는 ‘요단’ 강둑의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피곤하고 목말라 하는 것은 바로 이 여인 때문이 아닙니까? 생수를 필요로 하는 이 여인과 같은 죄인들을 찾아다니느라 지치고 목마르게 된 것이 아닙니까? 이분은 이 여인과 대화의 접촉점을 찾기 위해서 괜히 목마른 척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정말 피곤하고, 지쳐있으며, 목이 말라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는 이 낯선 남자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그가 훗날 햇볕이 뜨겁게 내려쬐는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 위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애절한 상태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절규하게 될 것임을 예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목말라 하게 된 것도 바로 자기를 위한 것임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애타게 목말라 하는 자로부터 구원의 강물이 흘러내릴 것임도 알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이 낯선 남자는 여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치고 목이 말라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능자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 여인이 겪어온 그 모든 것들을 체험하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긴 여행에 지쳐있고, 뜨거운 한 낯의 햇빛으로 목이 말라 있습니다. ‘니고데모’를 위해서, ‘수가’ 성의 여인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는 참 인간이 되신 참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4:15); 8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5:8-9)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나와 함께 고통을 느끼고 계실까요? 이제 질문의 내용을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 고통당할 때 나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느라, 단 한 번이라도 피곤하고 목말라 본 적이 있었습니까?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입니다. ‘도마’는 “내가 손의 못 자국을 보며...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 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도마’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 것을 오늘날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즉 나에게 대해서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신 손에서 못 자국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 맞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그런 사람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장사되었으며,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