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4:15-17약 9분 분량
빛이 가진 기능 중의 하나는 “계시” 즉 “드러냄”입니다. 무엇을 드러냅니까? 일차적으로 발광체 그 자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빛을 받는 대상을 드러내 줍니다. 예컨대, 어둠 속에 있는 나에게 한 줄기 빛이 비췰 때, 내가 보게 되는 것은 나를 향해 비취는 그 빛과 그리고 내 모습입니다.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기독교의 계시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첫째,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의 참된 자아를 드러내줍니다. 이 두 계시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의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보지 않고서는 나의 참된 자아를 발견할 길이 없습니다.
‘모세’나, ‘다윗’이나 ‘이사야’나 ‘베드로’가 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보자말자 이내 자신들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자신이 구제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점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예수님 당시 종교인들은 그를 죽도록 미워했습니다. 얼마나 미워했으면 견원지간(犬猿之間)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조차 일치단결하여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겠습니까? 그들은 왜 이토록 예수를 싫어했을까? 자신들의 위선(僞善)이 드러나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향해서 “회 칠을 한 무덤”이니 “독사의 자식”이니 하며 독설을 퍼부어대는 예수를 누가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정은 오늘이라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석 달 앞두고 대한불교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는 대한축구협회에 “국가대표 축구선수의 종교행위 개선 요청”이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조계종은 이 공문에서 “국가대표 축구선수는 공인으로서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 표출되는 행위는 타인의 종교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로 최대한 자제해야 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조계종은 또한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SBS 해설위원(제갈성렬)의 종교적 표현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화합과 평화의 올림픽 정신에 어긋나는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며 축구협회에 축구 선수들의 기도 ‘세러모니’에 대한 의견을 밝혀줄 것과 종교행위 자제를 위한 선수∙실무자 대상 종교차별 예방 교육을 수립하고 시행해 줄 것은 요청했습니다.
이쯤 되면 종교평화위원회가 아니라 종교 갈등위원회로 불러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 교회 언론회는 “스포츠 선수까지 관리하려는 불교계”라는 논평을 내며 조계종 종평위의 요구를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연아 선수가 ‘카톨릭’의 성호(聖號)를 표시하는 것에 눈에 띄었으나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는 혐오의 수준을 넘어 타도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불교계와 로마 카톨릭 교계 사이에 종교 간의 화합 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개신교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특별히 잘못한 짓이라도 했나요? 교회가 무슨 반국가적인 혁명 노선을 부추기기 때문입니까? 개신교가 다른 종교계에 비해서 윤리∙도덕적으로 더 부패했기 때문입니까?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무례하고 오만하기 때문입니까? 이웃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자기네들끼리만 어울려 다니기 때문입니까? 가족이 아니라 교회를 먼저 섬기고 우선시하기 때문입니까? 이들 이유 모두 진리의 일단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다른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른 데서 찾아내야 합니다. 정당하고, 떳떳하며, 결코 기죽지 않는 기독교 변증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예측이라도 하셨다는 듯이 오래 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너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19).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공공연하게, 아무 거리낌도 없이, 적극적으로, 때로는 도전적으로 증거하고 드러내고 다니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는 복음이 그들에게 거침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으나, 위선적인 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우리의 화자도 서막에서 사람들의 이러한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이렇게 진단한 바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3);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 하였으나”(1:10-11).
지금까지 여인도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화의 주제도 그렇게 심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처음 보는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와 당황하긴 했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친절한 이 남자에게 점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생수”가 어쩌고 할 때쯤에는 마치 게임을 하듯 이 사람을 좀 놀려줄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누굽니까? 남자라면 이골이 나있지를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 것이지요.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이 낯선 남자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누구입니까?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 이 순간을 빨리 모면하고 다른 대화로 넘어가야겠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도망치듯 대답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17절). 여인의 메시지인 즉은, “내 과거지사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하던 이야기나 계속 하시지요.”
나는 어떻습니까? 목장이나 예배 시간에 나 자신에 대해서 나누어본 적이 있습니까? 내 실패에 대해서 나누고 도움을 요청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늘 다른 사람 이야기입니까? 성경공부 시간 내내 졸거나 잠잠하다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돌변하여 정치와 시사 문제로 입에 침이 마르듯 신나게 열변을 토하지는 않습니까? 회개의 간증이나 신앙적 결단을 해야 하는 자리에서 설교를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입기 전에 먼저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어려운 말로 표현하자면, “칭의”에 앞서 용서 즉 “화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희생 제사를 드리러 올 때에도 번제단을 항상 가장 먼저 통과해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번제단 위에 먼저 짐승의 피를 흘려 죄 사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에 대해서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히 9:22).
예수님은 여인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했으며, 여인은 다시는 이곳에 물을 길러 오지 않도록 그 “생수”를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15절). 그런데 느닷없이 예수님은 그 여인더러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십니다(16절). “생수”를 주시겠다고 했으니 그냥 주면 될 일이지, 남편은 왜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까? 기어코 이 여인도 번제단을 먼저 통과해야겠다는 것입니까?
여인은 회피하듯 얼른 답하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대답은 솔직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놀랄 일이지요. 지금까지 한 번도 이처럼 솔직하게 내 심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속으로 다음과 같이 되 뇌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지금 남편을 포함해서 남자를 여섯 번이나 바꾸어보았지만, 다 그렇고 그랬지.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 어떤 녀석하고는 채 석 달도 같이 살지 못하고 헤어지기도 했으니 말이지. 지금 이 자도 함께 살고는 있지만 언제 또 헤어지게 될지.”
이 여인의 무질서하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생활은 요즈음 ‘할리우드’ 연예인들을 연상시킵니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얼마 전 한국 계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그레이스 프레슬리’라는 여인과의 삼 개월 동안의 결혼 생활을 끝내야 했습니다. 그가 이혼 사유로 내어놓은 것이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성격상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이미 두 번을 결혼한 상태였고, ‘그레이스 프레슬리’는 세 번째였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의 두 번째 남편은 그 유명한 흑인 가수 ‘마이클 잭슨’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무려 일곱 번인가 여덟 번인가를 결혼한 바 있습니다. 얼마 전 독일의 한 노인은 신문에 광고를 내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기와 잠자리를 같이 해주는 여자에게 수십억의 유산을 주겠다고 하니까 전 세계적으로 수백 명의 여자들이 지원을 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 노인은 그동안 여인들과의 섹스로 평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하기야 ‘솔로몬’도 처가 몇 사람이었습니까? 그럼에도 죽으면서 그가 남긴 말은 원도 한도 없이 살다가 간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덧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진정한 만족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네 남편을 데려 오너라.” 예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해서 던진 그 질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질문이나 모두 죄인을 향한 진단이자 초청입니다. 나로 하여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먼저 들여다보라는 진단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가지고 오라”는 초청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서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상).
내가 예수님에게 데리고 와야 할 내 남편은 누구입니까? 회피하지 맙시다.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 남편을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예수께 나아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이것이 과연 말처럼 쉬운 일일까요?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기독교는 쉬울까, 어려울까?”를 놓고 한 장(章)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다른 그 무엇보다 더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말합니다. 나에게 전부를 다오. 나는 너의 시간이나 돈이나 일을 원치 않는다. 나는 “너”를 원한다. 나는 너의 본래의 자아를 괴롭히러 온 것이 아니라 죽이러 왔다. 미봉책은 필요 없다, 나는 여기저기 나뭇가지를 쳐 내는 것이 아니라 나무 자체를 아예 뽑고 싶다. 이를 뚫거나 씌우거나 막는 게 아니라 아예 뽑고 싶다. 너의 본래의 자아 전부를, 네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욕망이나 죄 없는 욕망을 가리지 말고 전부 내게 넘겨다오. 그러면 그 대신 새 자아를 주마. 내 자아를 주마. 그러면 내 뜻이 곧 네 뜻이 될 것이다.
마치 중고차 수리공이 중고차의 일부를 고치고 바꾸어서 사용할 수 있게 하듯이, 예수님께서도 나를 그런 방식으로 고쳐주기 위해서 자기에게로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는 역설적으로 다른 그 무엇보다 쉽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자아는 나의 옛 자아를 수리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그분의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직접 내 속에 들어오시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쉽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자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자아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자의 한계를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리고 새 자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예수님의 초청은 다음과 같습니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좁은 길이 좁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고달픈 일이 고달프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분의 자아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을 사시기 때문입니다.이것이 믿어집니까? 감사합시다! 그리고 헌신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