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도마, 믿기 위해 의심하다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20:25약 12분 분량
때로 우리에게는 정직한 회의주의가 필요하다.
마크 뷰캐넌 (Mark Buchanan) April 1, 2009.
하지만, <성경>은 그를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물론 ‘도마’가 다른 날도 아닌 역사적인 부활의 저녁에 이처럼 의심에 가득 찬 발언을 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짧은 한 순간에 불과했으며, 그는 이내 의심을 극복했다. 우리는 그를 의심 많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묘사하고 있지만, ‘도마’의 인간 됨됨이는, 그가 의심했던 그 순간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도마’에게는 감탄할 만한 면모가 많이 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사는 친구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제자들에게 그리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시자, 일부 제자들은 반대한다. “거기서 사람들이 주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대뜸 이렇게 말한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8, 16). 필자는 이전에 그의 이러한 발언을 두고 조급하고도 비관적이며 위기를 앞에 두고 자포자기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설교한 바 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의 이 발언은 상습적으로 의심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순간은, 단지 하나의 사실일 뿐인데도, 끈질기게 강조되면서 ‘도마’에 대한 신화가 되었다. 한 번의 잘못이 그 사람의 성품 전체를 규정하는 특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불행한 일이다. 그렇지만 전적으로 불행한 일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도마’의 의심에는 의미심장함이 있다. ‘도마’의 의심은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다. 우리를 책망하는 의심이다. 세상의 믿음과 의심, 그 사이에 서 있는 의심이다. 좀 어려운 용어를 빌자면 “신앙주의”와 “회의주의” 사이에 있는 그러한 의심이다. 그의 의심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예수님은 정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까?”
“예수님은 정말 죽음을 정복하셨을까?”
“간절히 바라다보니 생겨난 착각이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위로하고, 자신들의 순진한 신앙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닐까?”
“마치 오늘날의 많은 정치인들이나 공무원들처럼 자신이 저지른 비리에 대해서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의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도 이렇게 의심하지 않는가? 바로 이렇게 의심하지 않는가? 꼬박꼬박 십일조를 드리는 경건하고 신실하고 믿음이 충만하며 선한 일을 많이 하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진 성도들마저도 이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한기를 수시로 느끼지 않는가?
신자들은 죽음, 즉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이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든 간에 비 기독교인들과는 다르게 반응한다. 크게 슬퍼하고 염려하기도 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조차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기 직전에 그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 이처럼,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쩔 줄 몰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 우리의 삶과 죽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게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도마’의 의심은 또한 우리의 의심이요, 우리의 대적이자 동반자요, 늘 쫓아다니는 우리의 비밀이다.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 이 말에 핵심이 있다. “내가 확인하지 않고는.” 바로 이 말이 ‘도마’의 믿음과 의심 사이에 있다. 우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개인적 간증과 완벽한 논리와, 경험적 증거를 모두 모을 수 있다. 하지만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하지 않는다면,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곧 증인석도, 실험 보고서도, 현장 보고서도, 내가 직접 보고 만지는 것이 가져다줄 확신의 힘을 대체하지 못한다. “내가 확인하지 않고서는”은 의심하는 자의 주문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기적을 대한다. 오늘날에도 수없이 많은 기적의 소식이나 간증을 대한다. 그리고 솔직히 이들 기적을 모두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싶다. 그렇지만 내 안에서 여전히 주저하는 그 무엇이 있다. 망설임과 유보하는 그 무엇이 있다. 내 속에서 나는 말한다: “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어.”
‘도마’가 믿기를 거부했다고 해서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지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보라(요 20:25). “다른 제자들”이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제자들 말이다. 지난 수년을 동거동락 해 온 동료들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니! 그러나 이들이 누구인가? ‘베드로’? 앞뒤를 가리지 않는 성급함, 발 빠르게 도망치는 비겁함을 가진 불안정한 사람이다. 어떤 일에 돌진해서 뛰어들었다가는 제풀에 나자빠진다. ‘베드로’가 “예”라고 말하더라도, 행동으로는 “아니요”라는 뜻이다. ‘야고보’와 ‘요한’? 성급하고 화를 잘 내는 무모한 성품의 소유자들이다. ‘사마리아’ 마을에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려고 했던 자들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누가 예수님 옆에 앉을 것인지를 두고 말다툼을 벌였던 속 좁은 라이벌이다. 말은 더듬거리고 당황해서 뒤죽박죽이 된 설익은 증언을 숨도 쉬지 않고 쏟아 놓은 자들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다. 사실이 이런대도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는 이들의 간증을 믿으라는 말인가?
우리는 지금 회의의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경신(輕信)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특히 교회 안에서 말이다. 과학주의 열풍이 사라진 자리에 대신 신비주의, 비합리주의, 신앙주의가 들어서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수많은 간증이나 책들을 통해서 이러한 행태들이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목도한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 ‘도마’의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 “내가 확인하지 않고는.” 이러한 의심은 믿음이 결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표현이다. 때로 의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나의 믿음이 마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사나 기적의 간증에서 일종의 향수가 작용하고 있다. <출애굽>이나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저 많은 기적들에 대한 향수 말이다. 이들 기적이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조사하고, 규명하고, 검증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씹어보고 구리인지 진짜 금인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 할지라도, 신학적 및 성경적으로 명확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은 모두 표적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즉 기적의 목적 말이다). 쇠도끼가 떠오른 것이나(왕하 6:1-7), 물이 포도주로 바뀐 일이나,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걷게 되는 일들이 지금도 수시로 일어난다면 인간적인 견지에서만 본다면 결코 유익한 일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영화 <Almighty God>을 생각해 보라.
성경적 믿음은 감상적이지 않고,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고, 모호하지 않다. 그것은 모든 가능성을 포용하고 수용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제하고 있다. 성경적 믿음은 ‘예’와 ‘아니요’, 멈추어야 할 것과 계속 나아가야 할 것, 믿어야 할 것과 의심해야 할 것의 반복적 리듬을 통해 전진한다. ‘베드로’와 ‘도마’는 우리가 가진 유산 중에서 서로 상반 된 것을 대표한다. ‘베드로’는 우리가 가진 유산 중에, “비록 아직 보지 못했지만 믿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을 대표한다. 그러나 ‘도마’는 그 반대편, “내가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부분을 대표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적인 믿음은 그 유산의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쪽에서 이끌어내야만 한다.
“회의주의”는 재미있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 철저히 조사하는 것,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자세하게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교회에는 “회의주의”가 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이 필요하다. 오히려 “신앙주의”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의 ‘베리아’ 교인들처럼 말이다.
“회의주의”자이기 때문에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에게 <성경>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요. 내가 회의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성경을 믿지 않아요.” 이것은 “회의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반(反)회의주의 즉 “신앙주의”이다. 탐구하고 면밀히 조사하고 깊이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무조건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외는 무조건 믿지 않는 다는 말이다.
그것은 게으른 자의 변명이고 책임 회피이다. 정확한 “회의주의”는 증거에 접근하고, 매복하고, 단서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강바닥을 준설하고, 전화선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덫을 놓는, 사냥꾼이자 탐정이다. “회의주의”자는 진리를 발견하는 데 열정적이다. 진정한 회의주의자는 믿기를 원하지만, 그러한 소원이 일으킬 수도 있는 최면에 빠지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한다. 그래서 그들은 테스트를 한다.
‘도마’는 진정한 회의주의자였다. 그는 불신을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굳건한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의심했다. 그는 의심했고, 그래서 그의 믿음은 소문이나 희망적인 생각 이상의 어떤 것에 기초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의심에는 한계가 있다. 의심은 믿음의 강장제, 정화시키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은 쉽게 상하거나 독성을 갖게 되고, 그래서 건강한 조직을 태워버리거나 변이시킬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내가 보지 않고는, 내가 만지지 않고는, 내가 경험하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무익하고 헛된 순환으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다. 너무 오래 그것에 탐닉하다보면, 의심은 그저 의심으로 남게 된다.
<나사로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을 목격했고, 믿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달랐다. 그들은 기적을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를 시작했다(요 11:45-49). <구약>의 많은 기적들도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친밀감보다는 반대로 거리감을 낳았다는 사실도 이를 보여주고 있다. 또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믿었던 사람들도 그분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끝까지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지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의심의 깊이는 대략 믿음의 깊이에 상응한다.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동일하게 강한 의심을 품고 있다. 이 원리는 그 반대로도 입증된다. 진부하고 얄팍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진부하고 얄팍한 의심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의심의 기본적인 결함은 이것이다. 의심은 실제로 결코 만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증거도 완전히, 결정적으로 충분하지 않다. 의심은 언제나 요구만하지,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의심은 끊임없이 시끄럽게 대답을 요구하고, 주어지는 어떤 대답도 듣지 않는다. 의심은 증거를 요구하지만, 정작 증거가 주어지면 그것을 의심한다. 그러고 나면 의심은 불량한 욕망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 욕망은 채우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커진다. 그리스도께서 ‘도마’에게 하신 결론적인 말씀은 순전한 믿음을 추천하신 것이라기보다는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축복받는 길이 아니라는 경고였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그러면 보는 것과 믿는 것에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예수님은 ‘도마’에게 당신을 보여주신 후에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은 당연하게 요구받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요청받는 것이다. 보는 것으로 믿음의 필요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걷는다. 보기 때문에 걷는 것이 아니다.
사탄은 의심의 부재이지.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 폭탄을 감행하게 하고 죽음의 수용소를 세우게 하는 바로 그런 존재라네. 의심은 자네의 저녁 식탁에 웃음을 더해주기도 하겠지만, 살인을 저지르게 만드는 믿음이기도 하지. 사탄이란 의심과 의심의 부재, 둘 다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의심과 믿음, 어느 쪽이든 교만과 섞이면, 그 혼합물은 독성을 갖는다.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고, 자신의 의심을 자랑한다. 둘 다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도마’, 그는 참된 의심의 수호 성자다. ‘도마’의 믿음과 의심은 겸손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마’의 의심과 그리스도의 대답이 우리에게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도마’가 보고 만지고 싶어 했던 것은 결국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것은 무엇인가? 부활의 증거로 ‘도마’가 구한 것은 무엇이며, 그리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무엇인가?
상처였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그리고 예수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신다. “네 손가락을 이리로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긴 승리를 증명하신다. 힘을 과시함으로가 아니라, 더 많은 장엄한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통해서. 못 자국 난 구멍, 창에 찔린 자국으로. 보라,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우리 문화가 상처에 대해서 거북해하면 할수록―죽음을 부정하고, 질병을 감추고, 노인과 약자를 숨기며―우리가 점점 더 부활에 대한 의심으로 괴로워하게 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상처를 피하면, 의심이 번식한다. 그 반대도 진실이다. 상처를 보고, 상처를 만지면 의심이 사라질 때도 있다.
상처를, 진짜 피와 살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고 그것을 예수님의 상처로 보는 소명을 가졌던 테레사 수녀는 결코 부활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 1985년부터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성서비평 연구 모임으로, 역사적 예수의 진위 여부를 색구슬 투표로 결정했다/편주)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먼저 이래야 할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 교의의 역사적 진실성의 진위 여부를 두고 투표하기 전에 먼저 빈민가나 난민 캠프나 무료 급식소에서 적어도 1년은 보내야 할 것이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아라. 내 손을 보아라.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
정직한 의심은, 어떤 것이 진실하고 실제적인 것인지 우리가 그에 대해 지적인 동의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의 삶 자체를 믿고 의탁할 수 있는 것이 무언인지 탐색하게 만든다. ‘도마’의 의심은 이러한 자리로 이끌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상처를 ‘도마’에게 보여주시며 보고 만지라고 말씀하셨다. ‘도마’는 보았지만 만지지는 않았다. ‘도마’는 그 정도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이것이 ‘도마’가 젠체하는 사람이나 단순히 학문적인 유행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는 실제적인 표지다. ‘도마’는 보았고, 그래서 믿게 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예배하게 되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논쟁이 붙은 그 수의가 날조된 것이 아니라고 한들 어쨌다는 것인가? 그 수의를 실제로 예수님의 수의로 입증할 수 있다고 한들, 섬유에 남은 미세한 그을린 자국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특별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여윈 형상이 찍힌 흔적이라고 해서 어쨌다는 것인가? 다시 말해, 믿음이 증거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종종 해온 것처럼, 믿음을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지 않은 자의적인 감상으로 축소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부활은 단지 새로운 삶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것은,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음식 사진을 보여주고 배부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믿음을 단순한 경험주의, 곧 하나의 입증 절차로 격하시키는 것 역시 잘못된 일이다.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부자는 죽어 지옥에 간다. 거기서 부자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나사로를 죽음에서 소생시켜 자신의 다섯 형제들에게 경고하러 보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한다.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한다(눅 16:30-31).
이런 의심이 아니라면, 나는 언제든 도마와 도마의 의심을 받아들일 것이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