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부활(5): 나도 너희를 보내노니!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20:21-23약 13분 분량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서>는 이것을 조금 다른 말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그러나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오히려 정 반대로 행동한 전형에 속한다 하겠습니다. 그들이 ‘욥’의 즐거움에 얼마나 참여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그의 슬픔에는 득달같이 달려와 함께 아파하기는커녕 그의 상처를 더욱 아프게 후벼 파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추측해 보건대, 이들 친구는 ‘욥’이 잘나가던 시절에는 그와 함께 즐거워했던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질시하고 투기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원인도 알지 못하는 병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고생하던 한 환자가 우연히 한 병원에서 완치를 경험했다면, 다른 환자들에게 그 병원을 소개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인심 좋은 “맛 집”을 알게 되었다면, 내가 아는 친구들에게 널리 소개해 주고 싶은 것이 정상이겠지요. 물론 사람들이 알고 몰려오면 나에 대한 대접이 소홀할 터이니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만. 나 혼자만 그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비유에도 이런 사람이 등장하기는 합니다. 그는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고는 이를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버립니다(마 13:44).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비유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 친구는 자신의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지 않아 합니다.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적인 체험을 한 제자들, 그야말로 기뻐 어찌 할 줄 몰라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샬롬’을 전하면서, 그 기쁨을 세상과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른 바 “대위임령”(the Greatest Commission), 또는 “지상 선교명령”이라 부릅니다. 명령이라고 하니 솔직히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기쁨을 세상과 나누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도 마지막은 항상 대위임(委任)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만, 그 형태는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각 복음서의 공동체가 처해있는 상황과 형편이 다르거나, 또는 각 <복음서>의 화자가 지니고 있는 복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인식이나 통찰력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경우는 이 위임의 말씀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 비교적 짧고 간략하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선교에 대한 강조점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거나 약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나도...한다”는 표현 때문입니다(참고. 21절).
사실 <요한복음>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 중의 하나도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에 보낸다”입니다(참고. 17:18). 이 주제는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와 사실 상 같은 권위를 같는다”라는 ‘유대’의 일반적인 사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는 이를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골 1:19). 즉 아버지이 속성이 아들의 말과 행동과 인격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히 3:1).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실 때, “너희는 세상을 향한 사도이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는 세상을 향한 화목 제물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낸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동일한 화목제물로 보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드러내신 것처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곧 예수님의 현현(顯現)이 될 것이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시적인 모습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분처럼 생각하고, 그분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능력을 드러낼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영접하는 자는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이는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이 되는 때가 온 것입니다(참고. 13:20).
성령을 받으라. 하지만 기쁨이나 슬픔은 누가 나누라고 강요하거나 명령한다고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자발적이며 충동적인 것입니다. 순전히 내적 동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내적 동기입니다. 사실 우리가 겪어 보아서 알지만 기쁨이니, 감격이니, 슬픔이니 하는 그 모든 감정들이 한낱 아침 이슬 같지 않습니까! 지금 제자들에게 찾아온 부활의 감격도 신혼의 감격처럼 조만간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겠지요.
어떻게 하면 그 감격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22절).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그 대답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성령께서 내적 동기가 되어 자신의 일을 수행해 갈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를 예수님에게 방점을 두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겠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참고. 마 28:20).
하지만 이 두 표현은 결코 다를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일생 역시 “성령 충만”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고(마 1:18), 침례를 받으실 때도 성령께서 그분 위에 내리셨으며(마 2:16), 광야로 나가 마귀와 대적을 하실 때에도 성령께서 함께 하셨으며(마 4:1), 이후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그 모든 순간에 성령께서 늘 함께 하셨습니다. <신약>은 우리 또한 “성령의 전”이라고 말합니다(고전 6:19).
적어도 지금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주시는 목적은 선교를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참고. 22절). 아닌 게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승천을 앞둔 시점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여기서 “숨을 내쉬다”는 표현은 당연히 문자적으로 이해해야겠지만, 하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도 하등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입니다. 무슨 상징일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호흡”(즉 생기)은 생명의 창조나 소생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살아있는 생명으로 만들었습니다(참고. 창 2:7). 그리고 선지자 ‘에스겔’은 바람으로 하여금 죽은 자들에게 들어가 다시 살아나게 한 바 있습니다(참고. 겔 37:9-10). 특히 <에스겔>의 이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서부터 이스라엘의 고토(故土) 회복을 예고하는 환상입니다. 여기서 생기(즉 성령)는 예루살렘 귀환(歸還)을 자극하고 재촉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볼 때, 예루살렘 귀환은 이스라엘, 즉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을 상징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생기를 부활과 관련해서 사용한다 해서 전혀 놀랄 일은 아닐 것입니다. 즉 새로운 시대를 맞아 성령님을 통해 생명을 전가하는 행위에 대한 상징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종말의 시대에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새로운 창조는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드러나고, 또 성령님에 의하여 구체화되는 사건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참고. 고후 5:17).
그런데 “성령을 받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 질문을 낳게 합니다. 하나는 “누가 받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언제 받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선 첫 번째 질문에 관해서는 큰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이 그날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더 넓게는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 즉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다락방 강론에서 약속하셨던 보혜사 성령님이 열두 사도들에게만 국한될 수 없듯이, 성령님을 통한 제자들의 사역 또한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교회의 사역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21-23절).
문제는 두 번째 질문입니다. 즉 당시 제자들은 과연 언제 성령을 받았을까요?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성령 강림은 오순절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참고. 행 2장). 그렇다면 “성령을 받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실제 많은 학자들도 22절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칼빈’(Calvin)도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날 마치 세례식에서 머리 위에 물을 뿌리듯 성령을 부분적으로 받았을 뿐이며, 완전하고도 충분한 형태의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칼빈’이라도 우리는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아니 한 분 인격체이신 성령님을 부분적이고도 점진적으로 받다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할부 대금 납부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칼빈’은 이 구절을 왜 이런 식으로 해석했을까? 추측건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의 두 기록 사이에 쐐기를 박아 차별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즉 부활절과 오순절을 두 개의 별개의 사건으로 기계적으로 구분하면 이와 같은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요한복음>은 부활절에, 그리고 <사도행전>은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과연 성령 강림과 관련된 이들 두 기록은 전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일까?
두 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성령강림을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즉 ‘요한’ 화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각기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의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성령 강림도 이들 세 사건이 부활절이라는 상황 안에서 한데 어우러져 일어난 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승천만을 따로 떼어내어, 부활절 40일 후에 일어난 별개의 사건으로 보면서, 이날(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한 것으로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두 기록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성령이 두 번에 걸쳐 강림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두 기록 중 한쪽이 다른 한 쪽의 기록을 수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거니와, ‘요한’ 화자는 <부활 이야기>를 들려줌에 있어, 부활에서 오순절까지의 전체 사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시간대 별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다만 네 개의 에피소드를 선별하여 부활 후 일주일을 추적하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도 정확한 시간 순서를 따르고 있지도 않습니다. 추측건대, ‘요한’ 화자도 <사도행전>에서 기록하고 있는 오순절 사건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부활 이야기> 속에는 정확하게 언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서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는 어차피 필수적인 일일 것이므로, 굳이 다시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사하면. 이제 마지막으로, 대위임과 관련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23절). 사실 이 구절은 대위임의 내용에 관한 것으로서,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천명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두 구절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내용 상 이들 구절은 모두 대동소이하여, 원래 같은 전승에서 유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 <복음서>에서 이들이 등장하고 있는 시점이나 상황은 분명 다릅니다. 두 경우 모두 제자나 사도들이 수행해야 할 사역의 성격이나 내용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를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상황에 적용하고 있으며, <마태복음>에서는 그 이전의 상황, 즉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제자들에게 위임된 사역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매다”와 “풀다”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 두 행위는 재판관의 판결 행위를 연상시켜주는데, 범죄 혐의(嫌疑)를 받은 피의자(被疑者)를 “구속”(拘束)하거나 또는 “방면”(放免)하는 행위입니다. <마태복음>의 상황에서 보면, 재판관은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제자)로 이해할 수 있으며, “매고 푸는” 행위는 “죄 사함”이나 또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 둘은 복음의 메시지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서, 사도들의 권위와 직결되어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권위는 예수님 공생애 당시나 부활 이후가 다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마태복음>에서는 위임의 말씀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 중에 있었던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 이후에 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주목할 대목은 성령님에 대한 언급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대위임(大委任)은 별개의 것이라기보다는, 동일한 사역의 연장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에게 방점을 두고 있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성령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특히 성령님을 통한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께서 다락방 강론에서 이미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15:25-26; 16:8-11). 물론 <공관복음>도 성령님을 모독하는 행위와 관련하여 치명적인 경고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마 12;31; 막 3:29; 눅 12:10).
이처럼 성령님의 “매고 푸는” 사역은 이중적인 상황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중적인 결과도 수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일견 모순되는 복음의 양면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9:39).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끝나고 있는데, 그분의 죽음은 곧 “이 세상과 세상의 임금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참고. 12:31). 심판이 그리스도를 죽인 자의 편에 서있는 모든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라면, 용서와 구원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는 모든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음의 이중성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고 그들 안에서 그들과 함께 사역하는 성령님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매고 푸는” 제자들의 권세와 관련해서 남은 질문은 그 적용 대상과 범위에 관한 것입니다. 예컨대, 교회가 예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이 권한을 세상에 대해서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만, 과연 교회 안의 다른 지체들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신자들이라 해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테니, 죄를 범한 신자들에 대해서 교회가 이 권세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할 것처럼 여겨집니다(현대적 용어로 이와 같은 권세를 治理權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누가 이 권세를 행사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가 이 권리를 행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참고. 행 5:1-11). 그리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범죄 한 영혼에 대해서는 교회가 그를 치리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참고. 고전 5:1-5). 이후 교회가 점차 조직화 되면서, 이른바 임명받은 성직자들이 점차 사도들의 직분을 대신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로마 카톨릭’ 교회는 위 <성경>의 사례들을 근거로, 사제들에 의한 고해성사(告解聖事) 제도로까지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이 제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 내에서조차 목회적 차원에서 죄의 용서나 심판에 관한 목회자의 권위 있는 훈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교회는 지체 상호 간에 피차 배우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