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믿는 자마다 영생을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20:31약 8분 분량
요 3:16
하나님이 복음의 주체, 하나님의 사랑이 복음의 동기, 세상이 복음의 원인과 대상, 그리고 독생자가 복음의 내용이라 한다면, 영생은 복음의 목적이 되는 셈입니다. 이 목적이 달성되기 위해서 통로 즉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는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과 영생을 말할 때, 이 믿음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믿음. 과연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히브리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히 11:6). <요한복음>에서도 “믿음”은 핵심 단어 중의 하나로서, 전체적으로 무려 98 번에 걸쳐 이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에 화자는 그가 이 책을 쓴 목적도 독자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화자가 이처럼 강조하고 있는 믿음. 과연 그 실체나 본질이 무엇일까? 어떻게 그 믿음이 나를 영생으로 인도해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그 믿음을 행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믿음에 관한 혼란과 오해부터 불식시키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이 단어를 사람들에 대해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믿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개인 간이나 국가 간에 맺어지는 약속이나 계약 또는 조약들은 반드시 쌍방의 날인을 담은 문서로 된 합의문을 필요로 합니다. 상대방의 선의(善意)를 믿고 단순히 구두약속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꼭 무슨 악의(惡意)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서 합의문은 서로를 구속시키는 보장 장치로 보면 됩니다. 결혼 서약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믿음이란 단순히 “선의에 기초한 소망” 내지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믿음에 의지하기보다는 그저 지금 당장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들을 수 있는 것들을 더 선호합니다. 이런 태도는 불신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내에서 유명한 신학자나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믿음에 대한 오해나 변질은 심각했습니다. 소위 “실존철학”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들 실존주의자들에게 믿음이란 진실(眞實)이나 또는 사실(事實)과 관련된 그 무엇이 아니라, 그저 “희망 사항”이나 “막연한 기대” 또는 “그랬으면 하면 바램” 정도일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믿음에 관한 이런 세속적 왜곡이나 변질을 단호히 거부하며, 믿음은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용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관한 성경적 정의(定義)는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우리는 여기서 “실상”(uJpovstasi“, 휘포시타시스)과 “증거”(e[legco”, 엘렝코스)라는 두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실상”이라 함은 구체적인 그 무엇 즉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그 무엇으로서, 믿음은 “실체”(substance)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단순히 “막연한 기대나 희망사항”에 대한 “대체”(substitute)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evidence)라는 단어가 함의(含意)하고 있는 바는, 예컨대, 부모가 자식에게 남겨준 유언장과 같은 것입니다. 또는 어떤 경기나 공연의 입장권에도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즉 그것 없이는 소유할 수 없거나 관람할 수 없는 보증이나 입장권과도 같은 것이지요.
다시 한 번 <히브리서>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 봅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 말씀에 따르면 믿음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입장권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상(償)과 바꿀 수 있는 일종의 교환권 같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의 대상. 그렇다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무엇보다 우리가 결코 믿을 만 한 존재가 못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겠지요.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상대적으로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 선 내 모습은 역겨움 그 자체일 것입니다. 때로 사람들 앞에서 선을 행하고, 이웃을 돕기도 하며, 나름대로 그럴싸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존재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애완견이 사람의 옷을 입고, 온갖 재롱을 다 부린다 해도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개는 여전히 개에 불과합니다.
내가 믿어야 할 사실은 또 있습니다. 나의 이러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사랑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죽도록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16절상). 사람이 간혹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위하여 죽을 수도 있고, 때로 사랑하는 조국이나 연인을 위하여 죽을 수는 있겠으나, 반역자나 죄수(罪囚)를 위하여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참고. 롬 5:7-8). 그것은 정말 무가치한 죽음이며 그야말로 개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위하여 그분의 “독생자”를 내놓으신 일은 무모하거나 무가치한 짓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본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세상이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단지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방금 말한 두 가지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는 내가 믿어야 할 진리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나의 믿음이 그런 수준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어떤 객관적이거나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 수준이 아닙니다. 3장 16절이 말하는 믿음은 어떤 사실이나 사건이 아니라, 한 인격체 즉 “독생자”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믿음을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독생자”야말로 복음의 내용이자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복음은 폐쇄적이며 배타적입니다. “독생자”를 제외한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사실이나 사건도, 그 어떤 행위도 영생을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독생자”를 믿는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입니까? 내 속에서 잉태되고 자란 그 무엇입니까? 아니면 “독생자”와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까? 자연적인 노력이나 훈련의 결과입니까 아니면 초자연적인 은혜의 선물입니까? 이 질문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만, ‘칼빈’(J. Calvin)의 교리에 따르면 믿음 역시 초자연적이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나기 위해서 내가 기여한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을 갖기 위해서 내가 기여한 바도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거듭남”과 “믿음” 사이에는 한 가지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거듭남”이 일회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믿음”은 연속적인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마치 겨자씨나 밀알처럼 싹이 트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는 등 생명 현상을 드러냅니다. <성경>에서 “믿음”을 밀알이나 겨자씨로 비유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 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믿음”을 이처럼 생명현상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앞에 여러 가지 수식어를 갖다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은 믿음”; “산 믿음”; “약한 믿음”; “강한 믿음.”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롬 4:19)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7, 26)
“믿음”이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현상이라면, 그것을 자라게 하고 튼튼하게 해야 하는 일이 나와 전혀 무관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쩌면 전적으로 그 책임을 나에게 위탁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공자(孔子) 선생도 “신체발부는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 지를 교훈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히브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히 5:11-6:3)
나는 이 믿음을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어떻게 행사하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