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1).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가까이 옴을 아시고 그분의 제자들을 준비시키시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기는 일로 시작해서 이 세상에서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설교를 마치시고 애끓는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이 기도의 배경과 동기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깨닫기라도 한다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부릅니다(엄격한 의미에서 “주기도문”으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주(主)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본인은 물론 제자들과, 신자 모두를 위해서 드린 너무나 간절하고도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흔히 “주기도문”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본문(마 6:9-13)은 실은 “제자들의 기도”로 불러야 마땅할 것입니다. 작고하신 ‘스토트’(J. Stott)목사님은 그의 책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서 교회가 지속적인 갱신을 위한 비전을 가지려면 <요한복음> 17장을 연구해야 한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는 또한 이 장은 <성경>에서 가장 심오한 장들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본문을 놓고 이런 저런 책들을 많이 쓴 것만 보아도 대제사장의 기도가 그 명성이 어떠한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예컨대, 17세기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의 군목이었던 청교도 ‘토머스 맨튼’은 <요한복음> 17장에 대하여 45편의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일랜드’의 목사였던 ‘마커스 레인스포드’는 역시 같은 본문을 놓고 41편의 연속 설교를 했다고 하며, 이 두 사람의 설교가 모두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책의 분량이 모두 450쪽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토트’ 목사님은 <다락방 강론>(13-16장)이 <성경>의 성전이라면, 17장은 그 속의 지성소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17장은 다락방 고별강론이라기보다는 고별기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신을 벗고, 이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가 주님의 기도가 얼마나 심오한 것인지 맛보도록 합시다.
문학과 역사
양식. 본문의 기도문은 일상에서 만나는 통상적인 기도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긴 고별 설교 후에 덧붙이는 일종의 고별기도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긴 설교 후에 고별기도를 덧붙이는 식의 문학적 패턴은 <구약>이나 후기 유대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신명기>는 그 형식에 있어 일련의 고별 설교를 모아놓은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책은 끝 부분에 이르러 <모세의 노래>(32장)와 <모세의 기도>(33장)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전자(前者)는 시(詩)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후자(後者)는 예언의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곳 17장에서 기도에 관한 본문이 갖는 특별한 의미는 의도와 배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이 기도를 드리는 시점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죽음과 부활을 위해 아버지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가기 직전이라는 사실과, 기도의 내용은 이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처럼 본문의 기도가 ‘요한’공동체 내에서 교육적이고도 목회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기독교회 내에서 공공연하게 인식되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교회는 일찍부터 <요한복음> 17장을 기도문의 형식을 교회의 교육용 교재로 인식해왔다는 사실입니다(S. Agourides). ‘나자로’의 무덤에서 주님이 드리던 기도가 주변에 몰려든 조문객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곳에서의 주님의 기도는 그분의 제자들을 위한 것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 17장에 이르러는 주님의 강론(13-16장)이 기도로 바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17장의 이와 같은 문학적 양식과 신학적 의도를 동시에 부각시키기 위해서, 이 본문을 “기도와 신앙 고백과 계시”의 복합체로 보기도 합니다(Westcott). 본문을 “대제사장의 기도”로 지칭하기 시작한 것도 실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같은 입장에 따라 본문의 기도를 승천하신 주님이 드리는 중보 기도의 최고의 모범으로 간주하기도 하는데(예수님의 중보기도에 관해서는 <신약> 여러 곳에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요일 2:1; 히 7:25; 9:14; 롬 8:34), 이는 주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늘에서 기도를 드리기 때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생전에 이 땅에서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입장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물론 이 같은 견해는 나름대로 매력적으로 들리기는 합니다만, 기도문의 첫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지금 어떤 상화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분은 지금 공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와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물론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혹자는 이 기도를 “거룩을 위한 기도”로 불러야 한다고 말합니다(Hoskyns). 거룩에 관한 기도의 핵심은 19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거룩이 주님 자신을 위한 것인지 또는 제자들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기도와 <공관복음>에서 등장하고 있는 ‘게세마네’ 기도문과의 연관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두 기도문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도문을 <요한복음> 내에서 “겟세마네 기도”로 알져져 있는 12:27-28과 비교해 보면, 두 기도문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7장의 기도문은 “겟세마네 기도”를 확장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내에서 “겟세마네 기도”가 어떻게 끝나는지 보면 이점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22:28).
배경. 본 기도문의 작성은 원래(즉 삶의 자리) 초대교회에서 행하던 “주의 만찬”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되어 왔습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그럴싸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 본문에 의하면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이라는 상황 하에서 이 기도를 드리고 있으며, 또한 교회는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고별설교의 내용을 수시로 인용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가 기도의 일부 요소들을 주의 만찬에서 인용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지만, 이 기도문을 있는 그대로 암송하거나 인용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겠습니다. 아마 초대 교회가 발췌 및 인용했을 기도의 일부 요소들은 특히 사도와 교회를 위한 주님의 기도에 주로 국한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내용 상, (1) 적대적인 세상에서 제자들이 믿음을 굳게 지키며, (2)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제자들이 주님의 거룩에 참여하며, (3) 제자들이 주 안에서 하나가 됨으로써 세상이 이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하며, (4) 궁극적으로 제자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하는 부분들일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요소들이 ‘요한’ 공동체가 예배 시에 드렸던 중보기도 내용의 전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궁금한 점은 전체 “주의 기도문”이 <요한복음> 안으로 편입되면서, 과연 어떤 부분들이 누락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조. 본문의 구조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만,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단락 구분은 ‘웨스트콧’(Westcott)이 제안한 세 단락 구조입니다:
(1)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1-5절)
(2) 사도들을 위한 기도(6-19절)
(3) 교회를 위한 기도(30-26절)
이와 같은 단락 구분은 그 형식 상 <구약>에서 볼 수 있는 대속죄일의 제사 진행 순서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Feuillet). 즉 <레위기>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먼저 자신을 위한 제사를 드린 후에 자신의 가족과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제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이 같은 설명은 본문의 형식이나 내용을 지나치게 단순화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6-8절의 경우만 하더라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도들을 위한 기도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첫 번째 단락 안에 포함시켜 각 단락의 분량에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나아보이기도 합니다: (1) 1-8절; (2) 9-19절; (3) 20-26절. 같은 맥락에서 ‘도드’(H. Dodd)는 본문을 네 개의 단락으로 구분하기를 제안한 바 있습니다: (1) 1-5절; (2) 6-8절; (3) 9-19절; (4) 20-26절. 또 다른 일단의 학자들은 다소 다른 방식으로 네 단락의 골격을 제안한 바 있는데,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1) 1-5절; (2) 6-19절; (3) 20-23절; (4) 24-26절(Lagrange, Strathmann) 및 (1) 1-5절; (2) 6-19절; (3) 20-24절; (4) 25-26절(Barrett). 이와 같은 단락 구분은 본문의 내용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일부 학자들은 순전히 기도의 형식적인 특징에 근거하여 보다 객관적인 구조분석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형식적인 특징이라 함은 반복이나 교차대구 등과 같은 것인데, 이 기도문은 전체적으로는 반복을 유지하면서 내적으로 A-B-A와 다시 a-b-c-b-a의 교차대구를 유지하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이 같은 형식에 근거하여 본문은 다섯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1-5절; (2) 6-8절; (3) 9-19절; (4) 20-24절; (5) 25-26절.
이들 외에도 구조분석에 관한 다양한 시도들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기도의 내용과 형식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Schnackenburg의 제안을 채택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도표 참고):
신학과 신앙
1. 아들의 영광을 위한 기도(1-5절)
예수님은 먼저 자신을 위한 기도로 시작하십니다. 일종의 간구이자 명령문의 형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인 기도입니다.
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1-2절)
이 기도문 중에 그 동안 복음서 전체에 걸쳐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모티브들이 있습니다. “아들의 영광”과 “그 때”에 관한 언급입니다. 특히 “그 때”는 주님께서 전 생애를 바쳐 그분의 소명을 이루기 위하여 지금까지 달려온 그 순간이자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영광”을 위한 주님의 기도는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그분의 영광은 자신의 죽음과 직결된 것으로서, 지금 주님은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 한 희생제물(犧牲祭物)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분을 영광의 자리로 올려주시며, 동시에 하나님 자신도 영화스럽게 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의 영광은 인류에게 주는 영생(永生)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이는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가능한, 아들만이 지니고 있는 유일한 권세이자 권위입니다(참고. 5:21-27). 그런 점에서 그분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자, 동시에 인류의 왕이 되십니다. 중보자와 왕의 역할은 상충되거나 최소한 상호보완적입니다. 왕은 다스리고, 통치하며, 심판하는 자이지만, 중보자는 섬기고 위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을 것이므로, 그리스도가 주실 영생의 대상도 당연히 “만민”(萬民) 즉 모든 인류가 될 것입니다(참고. 3:16; 12:31-32). 하지만 동시에 그 “만민”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으로 제한될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이와 같은 역설 내지는 일견 모순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은 아버지이자 심판관이라는 점입니다. 그분은 창조주이면서 동시에 재판관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구원을 얻기를 바라지만, 모두가 다 구원을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양면성” 내지는 하나님 “은혜의 비극”이 상존(常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역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선택(選擇)은 어차피 유기(遺棄)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선언인 셈인데(참고. 롬 9-11), 이는 마치 빛이 있는 곳에는 항상 어둠이 함께 드리운다는 사실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초청이 일방적이며 절대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청에 반응하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생이란 과연 무엇인가? 처음 두 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이어지는 구절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괄호적(括弧的) 설명인 셈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음 말씀은 영생에 관한 정의(定義)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앙고백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절)
<요한복음>에서의 “영생”(또는 “생명”)은 핵심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 이 단어는 <공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의어로 교차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생은 당연히 성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만, 여기서 강조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그분을 떠나서는 영생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뜻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 단어 “알다”(ginwvskw, 기노스코)는 단순한 지적 “이해”(undestanding) 그 이상입니다. ‘히브리’적 사고는 “체험” 내지는 “교제”(fellowship)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이와 관련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무도 아버지 외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또 아들 외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2-14, 20-24, 25-26). 더 이상 친밀할 수 없는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교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만, 아들과 아버지의 친밀한 교제 없이는 상대를 아는 지식이란 있을 수 없음을 시사(示唆)하는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아들의 탄생을 전하러 온 천사에게 자신은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자와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다시 1-2절의 내용으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영광에 관한 기도입니다.
4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4-5절)
형식 상 이 두 절은 1-2절에 대한 유사반복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만, 내용 상 다소 확대되고 있는 양상입니다. 아들이 영화롭게 되어야 할 근거가 마치 조건 절처럼 4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근거란 무엇일까? 세상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으므로, 천국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이르는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참고. 4:34; 5:36). 그 모든 일 중에서 한 가지 남은 일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에게 드리는 일이며(19:30), 이 일도 이제 곧 성취될 것입니다.
따라서 아들의 영광을 위한 기도(5절)는 창세 이전에 아들이 하나님과 누리던 그 영광을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참고. 1:1-5). 이러한 기도는 마치 성육신 이후 아들이 보여준 영광이 창세 이전에 아들이 누리던 영광에 미치지 못하거나 무슨 결함이 있는 것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과연 성육신 이전의 영광과 그 이후의 영광이 다른 것일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우리는 Schnackenburg의 답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두 영광의 차이는 어떤 질적인 차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차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소 어려운 용어로 표현하자면, 아들이 회복을 바라는 창세 이전의 영광은 “초월적인 영광”을 이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세상에 거하시는 동안에는 초월적인 말씀(로고스)이 내재적인 말씀이 된 것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1:14상).
2. 사도들을 위한 기도(6-19절)
기도해야 할 이유(6-11절상): 사실 예수님의 모든 기도가 그분의 제자 즉 교회를 위한 것이긴 하지만, 두 번째 기도의 핵심은 그분의 제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사도들을 위한 주님의 기도는 위 도표에서 보듯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단락(처음 네 절)에서 기도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왜 주님의 중보 기도를 필요로 하는지 그 이유를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6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a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6-11절상).
대략 여섯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2절에서 이미 암시된 바 있었던 것으로서, 이곳 6절에서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께서 이들 제자들을 아들에게 위탁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분을 섬기도록 세상으로부터 택하셨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주님께서 이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드려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속성이나 본질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이름을 의미하는 바, 이곳에서는 “아버지”라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아버지의 호칭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련해서는 더 많은 부분이 드러나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을 지켰으며, 그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았습니다. 네 번째 이유는 그들이 가지게 된 지식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지식이 믿음의 성숙을 가져올 것입니다. 다섯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이 선물은 다름 아닌 그동안 주심께서 그들에게 전해준 “그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았고, 이 말씀이 하나님의 권위 있고, 삶의 규범이 되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섯 번째 이유는 사도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들은 그분이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주님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위하여 기도함이 아니라”는 주님의 기도 내용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사역을 인정한다면 제자들을 위한 기도는 간접적으로 세상을 위한 기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특히 이제 곧 세상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가셔야 하는 시점에 이들 제자들을 위한 기도는 무엇보다 시급하고 우선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보전을 위하여(11하-16절): 기도의 내용은 무엇일까? 가장 시급하고 일차적인 관심사는 제자들을 이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보전”하는 일, 즉 지키는 일입니다. 이 단락에서 예수님은 이 단어를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11하, 12, 15절). 그분께서 이제 곧 떠나실 것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이와 같은 기도 제목은 지극히 당연한 청원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대목이 있는 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아버지”로 부르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절하)
하나님에 대한 이와 같은 호칭은 <복음서>에서는 유일하며, 따라서 아주 각별합니다(참고. 마 11:25). “거룩함”과 “아버지”는 양립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그분의 “초월적”(超越的)이고 “타자적”(他者的)적 존재감입니다. 한편 “아버지”롤 통해서 드러나는 이미지는 친밀하고, 다정다감한 “내재적”(內在的)인 존재감입니다. 이와 같은 호칭은 하나님의 이중적 존재 방식에 대한 균형 잡힌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결국 예수님 자신의 존재 방식에 대한 자기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제자, 즉 교회의 존재 방식 역시 그러해야 함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이와 같은 이중적인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 거할 때만이 가능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름”은 곧 “능력”에 대한 유사반복적 표현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만(참고. 시 54:1),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시 54:1).
이 구절에 대한 보다 적절한 번역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곧 “아버지 안에서”와 같은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 즉, ‘유대’인에게 있어 “이름은 곧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보전되는 방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 거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6절)라고 기도하신 바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는 말은 그분을 계시하셨다는 말인데(참고. 14절), 이는 그분의 말씀을 드러내고 가르쳤음을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구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12절)
지금까지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자들을 지켜왔습니다. 이제 곧 떠날 때가 임박한 시점에서 그분의 간구는 더욱 강렬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떠나고 없는 상황에서 제자들은 더욱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사람은 예외일 텐데, 그는 다름 아닌 ‘가롯 유다’입니다. 하지만 그를 지키지 못한 것은 예수님 잘못이 아니라, 본인의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속에서 작동하고 있던 악(惡)의 결과였습니다. 그의 운명에 관하여는 예수님께서도 이미 한 차례 언급하신 바처럼(참고. 13:18), <성경>의 예언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는 <성경>의 예언을 이루려고 스스로 행동을 취했던 것입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는 절정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만, 예수님의 관심사요 기쁨의 원천은 그가 아버지와 곧 누리게 될 영원한 하나 됨을 제자들도 같은 차원에서 경험하고 누리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13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13-15절)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적대적인 세상에 남겨질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계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았으며,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11절의 간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즉 적대적인 세상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간구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기도는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탈출시켜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적대적인 세상을 구속하려는 아버지의 뜻과는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을 포기하거나 버리는데 있지 않고, 구속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3:16; 12:31-32). 따라서 이 세상에 제자들이 맡은 역할은 이 반역의 세상을 용서하고 생명을 주시되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나누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단락은 이와 같은 제자들의 소명을 언급하고 있으며, 다음 구절은 두 단락을 잇는 연결고리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사옵나이다(16절)
거룩을 위하여(17-19절): 이어지는 기도의 내용은 제자들의 거룩을 위한 것인데, 논리적으로 당연한 흐름이라 하겠습니다.
17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7-19절)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간구는 앞선 기도-“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옵소서”(11절)-를 좀 더 심화시킨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거룩하게 하다”(aJgiavzw)는 동사의 의미는 “성화(聖化)” 또는 “분리”(分離)를 의미합니다. 신학자 ‘불트만’(Bultmann)는 이 단어를 “세속적인 영역에서 신적인 영역으로 옮겨놓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만, 성경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거룩”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윤리․도덕적인 상태라기보다는 “구별하여 봉헌(奉獻)하다”라는 행위에 더 가깝습니다. 특히 <구약>에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집기(什器)나, 물건 등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다”가 의미하는 바는 세상적인 방법이나 기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헌신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진리를 말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구별된 사람들이며, 아버지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낸 것처럼, 그들 역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단락의 나머지 두 절(18-19절)은 시적 유사반복을 통해서 이점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보냈고, 아들은 사도들을 보냈다는 기도문을 유의해 관찰해 볼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셨던 것처럼 사도들 또한 거룩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도들이 거룩하게 될 수 있었던 근거는 이곳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 사실에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한다”고 하실 때, 우리는 <공관복음>이나 사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예수님의 다락방 강론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눅 22:19);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고전 11: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4).
우리는 이 말씀들에서 완전한 의미에서의 거룩의 절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자신의 모든 것(생명까지)을 바치는 행위로서 이는 곧 우리를 위한 것이고, 또한 우리를 대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새로운 “유월절”이며, 이를 바탕으로 “새 언약”이 수립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을 말합니다. 그의 죽음은 알다시피 대속적(代贖的) 희생으로서, <구약>의 희생 제사를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거룩하게 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희생 제사를 드리다”와 동의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참고. 신 15:19, 21). 예수님께서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고 하실 때도 이 같은 관계를 염두에 두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존재 방식도 주님의 존재 방식을 따라가야 할 것이라고 기도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신자들을 위한 기도(20-26절)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사도들을 통해서 믿게 될 신자(信者) 일반, 즉 넓게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20-26절).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20절)
신자들을 위한 기도는 앞서 있었던 제자(사도)들의 연합을 위한 기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참고. 11절하). 특히 신자들을 위한 기도는 사도시대 이후를 미리 내다보는 예언자적인 기도입니다. 당연히 그 첫 출발은 이들 사도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무릇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기독교인이라면 그가 누구를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였건, 복음의 일차적인 전도자들은 이들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믿게 될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사도들의 사역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이 같은 사실은 18-19절에서 이미 암시된 바 있습니다). 신자들을 위한 주님의 기도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그 첫 번째는 신자들의 연합을 위한 것입니다.
신자들의 연합 (20-23). 과연 어떤 종류의 연합을 말하는 것일까? 연합의 성격이나 깊이에 대해서는 21절에서 규정하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절)
신자들의 연합은 아들과 아버지의 연합에 버금가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신자들의 연합은 결국 그들을 아들과 아버지의 연합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와 같은 연합이나 일치는 가능할 것인가?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습니다.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22-23절)
신자들의 연합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우선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선언하고 계신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영광을 예수님께서 신자들에게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영광”이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그분의 “이름”이나 “말씀”일 수 있습니다(참고. 8, 11, 14절). 또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 그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참고. 1:14). 더 나아가, 이 영광은 예수님을 통해서 누리고 있고 앞으로 더욱 풍성하게 누릴 “영생”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것이든 분명하고 평범한 사실은 이 영광은 그저 하나님의 아들이 주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성육신과 죽음과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그저 값없이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신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연합도 바로 이와 같은 값없이 주는 선물 때문에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삼위의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연합을 신자들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을 구속하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루어져 있는 연합의 성격은 이미 앞에서 예수님께서 천명하신 바 있습니다: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4:10-11).
신자들의 영화 (24-26). 이어서 신자들을 위한 주님의 두 번째 기도는 그들의 “영화”(榮華)입니다. 신자들이 누릴 영광의 지위나 특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 구절로 이루어져 있는 이 단락은 “주기도문”의 결론으로서, 그동안의 기도 속에 포함된 주요 내용 전반을 다시 요약 및 정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4-26절)
예컨대, 24절의 신자들을 위한 두 번째이자 마지막 기도는 신자들의 궁극적 상태 즉 “영화”(榮華)를 위한 것으로서, 2절의 기도와 공명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처럼 동일한 내용이 수미상관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주님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단서가 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도문(25-26절)은 보혜사 성령님의 사역에 관한 암시를 엿볼 수 있는 바, 이에 대해서는 추후 설명을 통해서 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주님께서 이곳에서만 다섯 번이나 언급하고 있는 “그들”(본문의 밑 줄 친 부분)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기는 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과연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 것일까? 제자(즉 사도)들이거나 또는 교회 즉 신자 일반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내게 주신 자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앞선 2절에서는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으로 부른 바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이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적어도 24절에 등장하는 “그들”은 모든 신자들(교회로 총칭될 수 있는)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교회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지내면서 그분의 영광을 보고 또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누릴 영광이란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며, 주님의 간절한 간구도 바로 이것입니다(24절). <요한일서>에서도 같은 생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여기서 “장래”가 과연 어느 때인지에 관해서 분명한 언급은 없으나(24절에서처럼), 이 서신의 대상이 교회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분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다락방 강론의 벽두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2-3).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경험하게 되는 일이 단순히 미래의 영역에만 머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미래의 일을 지금 여기서 내가 누릴 수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현재 여기서 보게 될 주님의 영광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그는 계속해서 이와 같은 현재의 경험이 죽음 이후에는 주님이 계신 곳에서 그분과의 직접적인 교제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 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6-8). 그리고 주님의 부활과 재림은 이 모든 일의 궁극적인 완성이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신자들의 영화를 위한 기도가 현실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이어지는 25-26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이 구절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즉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나,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1:18). 바로 이점이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는 유일한 차이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독생자를 통해서 교회와 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더욱 깊고도 풍성한 관계를 이어가고 발전시켜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대목에서 보혜사 성령님의 사역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16:12-1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16:25).
결론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은 교회가 독생자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더욱 자라가고, 깊어져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은 그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영광으로서, 이는 교회가 볼 수 있고 또한 교회로 하여금 아들의 사랑을 소유한 자로 변화시키는 그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그리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가지 그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주님의 기도 (1): 아들을 영화롭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 기도문”은 주님의 기도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제자 기도문”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는 주님께서 드렸던 기도가 아니라,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지에 관한 일종의 표준 기도문으로써,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참고. 마 6:9-13). 그런 점에서 <요한복음> 17장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주 기도문”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을 향하여 긴 설교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이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와 간구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본문을 “대제사장의 기도”로 부르기도 합니다. 기도 내용의 대부분이 제자들과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아론’이나 선지자 ‘모세’의 모습이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명기>의 마지막 두 장은 각각 <모세의 노래>(32장)와 <모세의 기도>(33장)를 모아놓고 있는데, 이들은 ‘모세’의 고별 설교가 끝난 후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다락방 고별 설교도 축도와 기도와 예언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요한’ 화자가 예수님을 ‘모세’에 이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선지자로 그리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제자들을 향한 긴 고별 설교가 있은 후에, 그분은 이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와 간구를 시작합니다. 그분의 기도를 함께 따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참으로 대담하고 격정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가식(假飾)도 없으며, 정직하고, 숨김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오직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서만 있을 수 있는 대화답게 친밀하고, 단순합니다. 도대체 어떤 대화가 이와 같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면 나의 기도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먼저 구함. 아들은 아버지를 향하여, “마침내 그 때가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기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요한’ 화자를 통해서 이 “때”에 대해서 누누이 들어온 바 있습니다. 알다시피 <요한복음>에서 이 “때”는 이야기를 시작에서부터 절정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자 엔진과도 같은 기능을 해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그 의미를 결코 놓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 “때”를 “영광의 때”와 동일 시 하고 있습니다. 그 “때”를 “영광”과 결부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이 “영광” 또한 <요한복음>의 핵심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복음서의 핵심 단어들은 거의 대부분 책의 서막(序幕)에서 마치 폭죽 터지듯 등장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반론(反論)이나, 이의(異意)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먼저 언급하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1절하). “나의 영광”이 우선이며, 아들의 영광 없이는 아버지의 영광도 가능하지 않다는 듯한 태도입니다. 주님의 기도가 과연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요? 주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하라고 가르쳐주신 소위 주기도문과는 전혀 상반된 태도입니다. 주기도문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를 곤란하게 만드는 문제는 또 있습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기도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5절). 그분은 지금 어떤 영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천국에서 아버지와 누렸다는 아들의 영광은 과연 어떤 영광이었을까? 성육신 사건으로 천국에서 그분이 누리던 영광에 무슨 흠집이라도 생긴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이 땅에 계실 때의 예수님의 영광이 천국에서 누리던 예수님의 영광과 무슨 차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제자들이 보고 믿었다는 아들의 영광은 또 무슨 영광이라는 것인가?
그 혼인 잔치 이야기는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 제자들이 표적을 통해서 본 것은 아버지의 영광이었으며, 그렇기에 그들은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결론입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할까? 어떻게 아들이 한 때 누리던 아버지의 영광을 성육신 사건으로 내려놓았다가, 이처럼 표적 사건을 통해서 다시 찾아서 보여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 그분이 간구하고 있는 “아버지의 영광”은 도대체 어떤 영광이라는 말인가?
아버지의 영광.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헬라’ 단어, “영광”(dovxa, 독사)은 원래 어떤 “견해”나 “생각” 내지는 “평가”를 의미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의미가 영어 단어에 그대로 보존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올바른 생각”이나 “정통적인 견해”를 뜻하는 ‘오소독스’(orthodox)나, “다른 생각이나 견해”를 뜻하는 ‘헤테로독스’(heterodix), 그리고 “반대(상충)되는 견해”를 나타내는 ‘파라독스’(paradox) 등이 그것입니다. 이후 이 단어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어, “좋은 생각이나 견해” 즉 “칭송”(praise), “명예”, “명성” 등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왕이나 거룩한 존재에 대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다면, 의미하는 바는 당연히 그 존재가 지닌 어떤 궁극적인 속성이나 본질을 칭송하고 칭찬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노래가 그것입니다:
8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10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시 24:8, 10)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에게만 속한 고유한 속성이나 본질을 그대로 인정하고 평가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기도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4절).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그분은 자신이 하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제자들은 “아들의 영광”을 보았으며, 이는 곧 “아버지의 영광”을 보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아들을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온전히 간직하고 계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분의 기도를 들어봅시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5절). 성육신 이전에 아들이 누리던 영광과 지금 여기서 그분이 보여주고 있는 영광이 다르지 않고서야 어찌 이 같은 요청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영광의 회복. 예수님께서 창세전에 그분이 누리던 영광을 이해하기 위해서, 광복(光復)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광복이라 함은 말 그대로 “빛을 회복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광복절”이라 함은 대한민국의 빛을 회복한 날이라는 뜻입니다. 즉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을 회복한 날이라는 뜻입니다(이것은 단순히 해방(解放)과는 다른 것이라고 오래 전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의미를 예수님에게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에 거하셨던” 예수님께서 무엇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고,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로 지상에 계셨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갈릴리’ 주변을 걸어 다니실 때, 제자들이 보았던 그 모습과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순교 직전에 그 모습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스데반’이 과연 무엇을 보았다는 말일까? ‘스데반’을 죽이는데 참여했던 ‘바울’도 같은 경험을 했으니, 그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그는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행 9:3). 사실 그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냥 빛에 둘러 싸였을 뿐입니다. 누가 감히 빛을 볼 수 있을까!
<계시록>은 이 빛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계 1:13-16). 이게 과연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찬란한 빛에 대한 ‘히브리’적 표현일 뿐입니다.
누가 빛을 정면으로 마주 대할 수 있을까? <계시록>의 화자는 이렇게 에둘러 말합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계 1:17상). 감히 마주 볼 수조차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시내’산 정상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도 그 광채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거늘, ‘스데반’도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영광을 회복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어떻게 제대로 온전하게 묘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화자가 서막에서 그분을 “빛”으로 비유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지금 아들이 간구하고 있는 그분의 영광도 바로 이와 같은 영광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회복의 전제. 이처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찬란한 영광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강렬하게 간구하고 있는 그분의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를 과연 온당하다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내 모습과는 정 반대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늘 이렇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더 오래 여기 머물게 하옵소서.”
한사코 여기를 떠나고 싶어 하는 그분의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일까? 작가 ‘필립 얀시’는 그의 책 <내가 알지 못하던 예수>에서 그분의 심정을 우주복을 입고 우주를 유영(遊泳)하는 우주인의 심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몇 년을 잠수함 안에서 근무하고 있는 잠수부의 심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학위와 연구를 위해서 수 년 간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보았던 나로서는 이 같은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때가 묻고 남루하며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이 땅에서 살아가야했던 예수님의 심정을 말입니다. 그분은 지금 그 옷을 벗어던지고, 눈부시게 빛나는 영광의 새 옷을 입고, 아버지가 앉아계신 그 영광의 자리에 함께 앉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심정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 반대입니다. 그분은 창세 이전의 그 영광을 회복하고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가 있다 하겠습니다. 기도의 근거는 이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4절). 그러니까 그분의 기도는 책임을 다 한 자 만이 구할 수 있는 당당하고도 당연한 권리 청원(請願)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요구는 무례하거나 오만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분의 요구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혼자만이 누리고 싶은 영광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5절하). 아버지 없는 아들이 있을 수 없고, 아들 없는 아버지 또한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아들이 영화롭게 되지 않고서는 아버지가 영광을 받을 수 없고, 아버지가 영광을 받지 못한다면 아들이 영광은 무의미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고백이자 선언입니다.
나도 이처럼 당당하고 확신에 찬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주님의 기도와 나의 기도가 불가분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수밖에 없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겠지요. 그분의 약속을 물고 늘어지면 되지 않을까? 주님께서 한 가지 비법을 우리에게 말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4).
이 약속이 믿기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나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의 기도 (2): 아들의 권세
우리나라의 경우 대통령의 권한으로 임명할 수 있는 새로운 직위나 직책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가깝게는 비서실장에서부터 국무총리와 장ㆍ차관급 인사들, 기타 정부 각 부처 산하기관장에 이르기까지 무려 수천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들 중 중요한 직책들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청문회를 통해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후보자의 적격성(適格性) 여부를 심사하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청문회를 바라보는 일반 시민의 심정은 청문회를 왜 하나 싶을 정도입니다. 청문회를 통해서 드러나는 후보자들의 면면(面面)이 하나 같이 실망스럽기가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 대부분에게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는 과거 전력(前歷)이 있는 바, 위장 전입이나 탈세, 그리고 병역 관련 의문점들입니다. 청문회의 원래 취지가 해당 직책에 대한 전문성이나 신념과 철학 등을 알아보자는 것이었는데, 우리나라 청문회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오직 후보자의 전력과 비리(非理)를 캐내는 일이 주 임무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이런 전력을 가진 후보들이 어떻게 운 좋게 청문회를 통과하여 원하는 자리에 오른다 해도, 조직 구성원들에게 영(領)이 설 리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낙하산 인사의 경우에 더욱 심각합니다. 처음부터 정통성을 상실해 버렸으니, 새로운 사업은커녕 부하 직원들의 비위 맞추기에 더 급급하게 되어버립니다. 예컨대, 공기업의 사회의 통념을 벗어난 과도한 후생 복지 정책 남발(濫發)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니니, 남의 돈으로 인심이나 쓰자는 심사인지 모르겠습니다.
흔히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만, <성경>은 그 반대라고 말합니다. 자리를 주기 전에 먼저 그를 시험해 보라고 충고합니다. 전문성도 도덕성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가 어떤 조직을 맡게 되면, 조직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적으로도 큰 재앙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어물전 망신을 꼴뚜기가 시킨 꼴입니다. 반대로 전문성과 도덕성 및 책임감을 갖춘 지도자가 책임을 맡게 되면, 일차적으로 본인 자신이 큰 명성을 얻게 됨은 물론, 임명권자나 더 나아가 그 직분 자체에 대한 위엄(威嚴)과 권위(權威)가 세워질 것입니다.
예컨대, 장관은 법으로 보장된 권위와 책임을 적절하게 수행함으로써, 자신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당 부처(部處)와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의 권위를 세우고, 영화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사든, 장로든, 목사든, 자격을 갖춘 자가 맡을 때만이, 본인은 교회의 명예와 권위가 제대로 서게 됩니다. 본인도 교회도 하나님도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만유의 왕. 지금 성자(聖子)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구하고 있는 “아들의 영광”도 결국 그분이 받은 직분 내지는 권세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아들이 받은 영광스러운 직분은 과연 무엇입니까?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는, 다른 어떤 존재도 감히 감당하지 못하는 영광스러운 권세를 주셨습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가 그것입니다(2절). 다시 말하자면 아버지는 아들을 “만유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참고. 빌 2:9-11)!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선물입니다.
아버지의 선택은 과연 적절했습니까? 왕은 무엇보다 통치하는 자이며, 그 나라에 속한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 백성의 목숨도 왕의 것입니다. 왕은 백성의 목숨을 임의로 좌지우지(左之右之) 할 수 있습니다. 왕은 주인이며 백성은 노예입니다. 그러므로 백성이 왕을 위해 사는 것이지, 왕이 백성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에 이르러 자신들도 주변 왕국처럼 왕을 갖기를 원했을 때, ‘사무엘’이 한사코 이를 말린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인 이스라엘이 왕을 갖는 순간 왕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기에 한사코 말린 것입니다. 이점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라는 북한에서 과연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유의 왕, 그리스도는 이들 왕과는 다릅니다. 김정은과도 다릅니다. 군림하고 빼앗는 왕이 아니라, 섬기고 주는 왕입니다. 본문에서 “주다”(divdwmi, 디도미)라는 ‘헬라’ 단어가 이곳 2절에서 세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차이를 강조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권세를, 이제 아들은 세상 “만민”, 즉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2절).
영광의 직분. 아들이 나누어주려는 이 권세를 가지고 나누어주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오직 아들만이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영광스러운 권세란 무엇일까? 이곳에서 화자는 그 권세를 생명 즉 “영생”(永生)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왕을 달라는 이스라엘에게 ‘사무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충고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왕은 이웃 국가들의 왕과 달리 백성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주기 위해서 권세를 가지고 통치하는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이 선물은 아들이 누려야 할 권리이자, 행사해야 할 책임이기도 합니다. 만일 아들이 이를 제대로 행사한다면 아들과 아버지 모두에게 영광이 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아들과 아버지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1절과 2절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즉 아들이 만민(萬民)에게 줄 영생을 통해서 아들과 아버지가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그러니까 2절은 1절의 이유이자 근거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인과율(因果律)에 따르면,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따라서 서막(序幕)에서 이미 선언했던 바처럼, 세상의 생명은 생명 되시는 말씀 즉 아들로부터 와야 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참고. 1:4). <사도행전>에서도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 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윤리․도덕적으로나 전문성에 있어 이 아들을 능가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이름을 줄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아들이 곧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딘 가에 불을 붙이려면 다른 무엇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불씨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이 자격을 가진 자가 없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자격이 없는 자를 아들이라고 무턱대고 낙하산식으로 내려 보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요즘 우리나라에서 아들을 후임 목사로 세우는 교회가 많다고 하는데...).
은혜의 비극. 그런데 아들이 영생의 권세를 행사하는 방식이 아주 이상야릇합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2절). 아들이 만민을 다스리는 왕의 권력을 가졌으나, 그분의 생명을 나누어받을 자는 만민이 아니었습니다! 그중의 일부에게만 해당된다고 합니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 국한한다는 것입니다(강조를 위하여 밑줄로 표시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는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잔치에 모두 오라고 초청해놓고, 그중 일부만 연회장에 들여보낸다? 무료입장이라고 해놓고 정작 입구에서는 입장권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기극(詐欺劇)입니다. 이게 전형적인 ‘슈퍼 갑(甲)’의 횡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밭에 숨겨둔 보화는 어떻습니까? 그 보화를 모두가 가져가기를 바란다면 그냥 아무데나 버려두면 될 일이지 굳이 땅 속에다 숨겨놓는 심보는 무어냐는 것입니다(참고. 마 13:44). 천국이 마치 복권 당첨되는 것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어쩌다 운 좋은 사람만 발견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과연 이것을 좋은 소식이라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슬픈 소식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혹자는 이 같은 역설을 두고, “은혜의 비극”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초청은 그야말로 공허한 초청으로 끝나버릴 것이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감히 누가 이 신비한 이중성(二重性)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은혜와 비극, 즉 선택(選擇)과 유기(遺棄)의 이중성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초청이나 선택은 우리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단어들이 아닐까?
나는 초청을 수락할 수도 있고, 반대로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도 그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나를 초청 인사에 포함시킵니다. 그러니까 초청은 늘 거절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초청은 초청이 아니라, 무슨 고지서(告知書)나 영장(令狀)이 될 것입니다. 고지서나 영장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초청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쪽을 선택하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누누이 들어왔던 터이지만,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요소가 있다면 바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J. Stott).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 하겠습니다.
최고 권력자의 문제는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 이상을 행사하려는데 있습니다. 왕이나 대통령은 법에 보장된 권력만 행사할 때 비로소 정의로운 지도자가 되는 법이지요. 이는 하나님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정 하나님 되기 위해서, 스스로를 제한하고 억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言約)이라는 틀 속에 자신을 구속(拘束)하고 제한하셨습니다. 언약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스스로 맹세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대하는 그분의 방식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제우스’가 아니라, ‘야훼’ 즉 언약의 하나님이며,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이 영생의 권세를 행사하는 방식도 일방통행 적이거나, 독재적이 아닙니다(우리는 이런 사람을 혐오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아무 조건 없이 주시지만, 강요하지 않습니다. 요즘 언어로 비유하자면, 그분은 ‘슈퍼 갑(甲)’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을(乙)인 것처럼 행동하십니다.
나의 권세. 적어도 아들의 편에서 보자면 그가 맡은 직분은 엄청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분에 넘치는 지위를 맡으라고 권할 때, 내가 갖게 되는 기분을 상상해 보면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예수님에게 분에 넘치는 직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만).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습니까?
나는 어떠합니까? 이 땅에서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일을 주신 적이 있을까?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내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리고 그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가 나에게 있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허풍을 떨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풀며, 무엇을 맨다는 것입니까? 가장 포괄적으로 이해하자면, 이것은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즉 “관계 맺기 말입니다. 제자 삼는 일이 그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고, 결혼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이웃을 섬기고 돕는 일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능력을 많이 상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왜일까? 교회만이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자꾸만 다른 일을 하려하기 때문은 아닐까? 윤리ㆍ도덕적으로 옳게 보이는 일을 놓고 세상과 경쟁하려하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도 할 수 있는 그 일을 교회가 가로채려하기 때문은 아닐까? 과연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 교회는 진정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3. 주님의 기도 (3): 영생은
2014년 대한민국의 4월은 그야말로 “잔인한 달”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 교회의 수난절은 지난 한 주간으로 끝이 났습니다만, 이 땅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어둡고 긴 고난의 터널은 그 끝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세월 호”의 충격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분노하고, 좌절하고, 수치스러워하고, 또 두려워하면서 대한민국의 민낯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이 문제의 원인을 찾기 바쁘고, 돌을 맞아야 할 누군가를 찾아 나섭니다. 선장(船長)과 승무원, 선주(船主)와 선사(船社), 학교와 교사, 정부와 국회, 공무원과 대통령이 바로 그들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향해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들을 던집니다.
도대체 모두들 왜 그랬을까? ‘요나’처럼 먼저 빠져 나온 선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와 같은 대재난(大災難) 앞에서 왜 모두들 허둥지둥, 우왕좌왕했던 것일까?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었을까? 재난 발생 시에 기댈 매뉴얼이 없었기 때문일까? 있기는 하나, 작정하고 실전(實戰)에 임하듯 제대로 된 훈련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훈련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훈련을 늘 다음으로 미루어두었기 때문일까? 아, 이 무슨 부질없는 질문! 이제 곧 모두들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말 것을.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듯.
이제 나는 이 문제를 영적(靈的)인 영역으로 옮겨오고자 합니다. 영적인 영역에서 나에게 닥치는 재난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과연 언제, 어떻게 찾아오는 것일까? 나는 지난 한 주간 침통하고 우울한 가운데, 이 문제들을 곰씹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세월 호” 침몰을 통해서 드러난 대한민국의 민낯이 실은 나 자신의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찬송가 “물 위에 생명 줄 던지어라”(500장)의 가사를 기억해 내며, 바로 내가 이 세상에서 “세월 호”의 선장 이 준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바다에서 “교회”라는 배를 타고 항해해 가고 있는 선장 말입니다.
선장은 배 안에 탄 모든 생명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선장의 존재 이유와, 보람과, 자랑과, 즐거움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는 이 일을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그가 만약 자신이 하는 일이 싫었다면 명예스러운 선장의 제복과 모자를 다 내팽개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처럼 엄청난 명예를 걷어찰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모든 국가마다 어느 누구도(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선장 석(席)이나 기장 석에 앉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선장이나 기장(機長)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과 영예와 기쁨은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 승객들이 표하는 감사의 인사말이어야 할 것입니다.
피흘림 위에서. 세상의 선장인 나도 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누릴 수 없는 명예로운 특권과 소명이 나에게 있습니다. 세상에 생명을 전하고 지키는 것 말입니다. 세상의 끝 날까지 또는 내 항해가 끝나는 날까지 이 소명은 계속될 것입니다. 나는 생명 즉 영생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또한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 재난용 매뉴얼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나는 선장 이 준석 대신에 배를 몰았다는 왕초보 3등 항해사가 아닙니다. 주님은 그 재난이 어떤 형태로, 어떻게 올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익히 예언하신 바 있습니다(참고. 요 15:18-20, 25; 16:1-2, 20-22; 마 24).
그러나 정작 나는 항해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이 시대의 ‘요나’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세월 호” 선장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생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솔선수범하여 끝까지 책임지는 희생을 토양으로 해서 피어난 꽃과 같다고 말합니다(참고. 4절). <히브리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하). 물론 이 피는 우리 주님의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17-19세기 영국이 제국(帝國)을 건설할 때, 뱃사람들에게 제 1원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배가 침몰하면 여자와 아이들을 가장 먼저 탈출시키고, 그래도 구명보트 자리가 남으면 남자들을 탈출시키고, 마지막에 선원들이 탈출한다고 합니다. 이 원칙을 어기면 그 자리에서 총살을 했고, 선원들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려 침몰하는 갑판에 정렬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 <타이타닉>을 통해서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갑판에 둘러앉아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를 연주하던 승무원들의 애절한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 영화에서 마지막까지 배를 지킨 선장은 “영국인답게 행동하라”(Be British)며 선원들을 격려했고, 침몰하는 배와 함께 선장과 선원은 전원 사망했습니다.
인간을 짐승과 구분 짓는 가장 뚜렷한 구분은 무엇일까? 금치산자(禁治産者)와 정상인을 구별하는 잣대는 무엇일까? 문명(文明)과 야만(野蠻)을 가르는 가장 뚜렷한 경계는 무엇일까? 책임감입니다(J. Stott)!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에는 위기 때마다 종종 책임 있고 힘센 사람들이 먼저 도망치는 불명예스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6.25 전쟁 때 권력층 자녀는 피신가고 서민층 청년들이 전쟁터에 나가 싸웠다고 합니다. 지금도 고위 공직자 아들 중에 군대 면제 비율이 일반인 평균을 훨씬 웃돌고 있다 합니다. 어느 힘 있는 지방 실력자는 하루 5억 원짜리 황제 노역으로 감옥까지 면제 받을 뻔했습니다.
100년 전 영국 선원보다 못한 나라가 문명국임을 자부할 수 있을까? “세월 호”에서도 선장과 항해사, 기관사, 조타수가 일찌감치 떠나고 갓 입사한 말단 신참 박지영 양이 끝까지 배를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책임자들은 도망가고, 보호받아야 할 약자들이 줄줄이 희생되는 나라를 과연 문명국이라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마땅히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졌습니다. 주님은 복음을 진정 복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부활이 진정 모든 이의 부활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 책임을 다하셨던 것이지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하나님께서도 하실 수 없는 일들이 꽤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외람되지만 그분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그분의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지켜보는 것이 아닐까? 세상은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스스로를 구원해 보라고 조롱했습니다. 아무렴은 아들이 죽는데 어찌 아버지가 수수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아들은 물론 아버지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생명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잘못된 전제(前提)는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세상 즉 이스라엘은 아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 즉 자신들의 하나님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은 아니라”고 일축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야훼’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닙니까! 그들의 온 <성경>에 도배가 되다시피 한 이름이 아닙니까! 입만 열었다 하면 불러대던 이름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들이 정녕 알지도 못하는 신(神)의 이름을 불러댔다는 말이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대답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3절을 곰곰이 묵상해 봅시다. 이 구절의 방점(傍點)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일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일까? 만일 독자가 ‘유대’이라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마치 폭죽 터지듯 최소한 열아홉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공관복음 전체적으로 12회 정도만 등장하고 있는) “영생”, 즉 구원은 바로 이 이름을 떠나서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는 것이 화자의 주장입니다(3절을 1-2절에 대한 괄호적인 설명이라고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그분에 관한 지적(知的) 지식이나 정보를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교과서적인 지식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모든 지식이나 지혜를 교과서를 통해서만 얻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대상이 사물이나 짐승이 아니라 한 인격체일 경우에는 직접적인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 상대를 알아갑니다. 단순히 상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알아간다는 말입니다.
‘헬라’적인 배경에서 “안다”는 것은 교과서적인 지식 즉 “(대상에) 관해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유대’적 배경에서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나 만남”입니다.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에게 자신은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이는 남자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되기. 나는 진정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가? 피의 보상금으로 받은 재물은 함부로 쓸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천안 함 피격으로 전사한 장병들의 부모는 정부와 국민들이 보내준 보상금과 후원금을 모두 모아 재단(財團)을 만들어 사회 복지와 장학기금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시 순직한 윤 중사의 어머니는 자신이 받은 보상금을 함대 기관총 만드는데 보태라고 1억여 원의 돈을 해군에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이분들은 진정 고귀한 피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 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 합니다. 예컨대, 지난 날 베트남이나 중동 열사(熱砂)의 땅에서 파월 장병으로 또는 근로자로 파견된 남편이 벌어 보내준 돈으로 흥청망청 다른 남자와 놀아나다 패가망신한 여자들도 많았습니다. 남편이나 자식이 흘린 피를 우습게 여겼던 것이지요. 그야말로 돼지에게 진주를 준 것이었습니다.
나는 내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를 어떻게 보관하고 있는가? 나는 진정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것일까? 그분의 피의 보상으로 받은 영생을 제대로 자랑하며 누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요나’나 이 준석 선장처럼 살아도 사는 것이 아는 비겁하고 한심한 도망자로 아까운 세월이나 축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생이 단지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영원한 생명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누려야 할 그 무엇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하).
오늘 이 잔인한 부활절을 맞아 내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해봅니다: “나는 진정 영생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가? 내가 받은 피 값을 거룩하고 고상한 곳에 사용하고 있는가? 그리하여 날로 그리스도가 되어가고 있는가?” 지난 날 ‘타이타닉’ 호의 선장이 부하 직원들에게 “영국인이 되라”고 했던 것처럼, 나의 주님도 지금 나를 향해서 같은 호소를 하고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가 되라”(Be Christ)?
주님, 간절히 바라옵건대, 나를 이 깊은 어둠에서 구원하여 주셔서, 다시 한 번 독수리 날개 치듯 날아오르게 하소서. 다시 한 번 내게 주신 소명을 일깨워주시옵소서. 내게 주신 그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또 나누게 하옵소서.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되게 하소서. 나를 영화롭게 하셔서 주님을 또한 영화롭게 하소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이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4. 주님의 기도 (4): 내게 주신 자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가 무엇인지, 즉 어떻게 하면 전문가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보여주는 차이는 무엇인지, 본인이 이 자리에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비전문가에게 딱 들어맞는 두 단어가 생각날 뿐입니다. 지난 번 “세월 호 대참사”에서 대한민국이 목도한 바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허둥지둥”; “우왕좌왕.” 사건 규모에 비해 피해가 엄청나게 불어난 것도 바로 재난에 대처하는 대한민국의 비 전문성 때문이었음을 우리 모두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곧 나의 비 전문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곧 대한민국이기 때문입니다.
재난 매뉴얼. <마태복음>의 “감람산 강론”이나 <요한복음>의 “다락방 강론”은 영적인 영역에서 재난이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일종의 “비상 매뉴얼”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 매뉴얼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숙지하고 있으며, 매뉴얼에 따라 연습과 훈련을 거듭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책 속에 그냥 묻어둔 채 살아갑니까? “책은 읽지 않으면 그냥 나무에 불과하다”는 서양 금언이 기억납니다. 나는 물건을 사면 사용 매뉴얼을 제대로 읽지 않습니다. 귀찮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의 평소 모습입니다.
예수님에게 지금 재난과 위기가 닥치고 있습니다. 그분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교회적으로도 그러합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지금 그분은 매뉴얼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나 일견 참으로 한가하며, 위기 해소에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작 기도라니요! 이것도 그분의 매뉴얼에 포함된 것일까요? 그렇다면 참으로 한심한 매뉴얼이 아닙니까.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침몰하고 있는 ‘타이타닉’ 갑판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승무원들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특기할 만 한 점은 두 장면 모두에서 허둥지둥하거나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침착하고 고요하게 요령에 따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타이타닉’ 호에서는 체념과 포기를, 이곳 다락방에서는 단호한 의지와 결단이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기도는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세상의 강력한 힘 앞에 제대로 힘도 써 보지도 못한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위기 시에 사태를 해결함에 있어, 기도만큼 수동적이며 무기력한 대처방법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나의 경험은 어떻습니까? 나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이것은 기도의 응답이었다”고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경험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것을 기억해 내기가 어렵다면 그만큼 나는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문제가 와도 그저 “세월이 약”이겠거니 하며 현명하고(?) 지혜롭게(?) 대처해왔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기도에 대한 나의 기대도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흔히 “기도 좀 해 주세요”는 그저 관심 좀 가져달라는 완곡한 요청으로, 그리고 “기도 하겠습니다”는 “네, 알겠습니다”는 정도로 가볍게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면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정성을 다해 기도해 줄 것으로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며, 이점 나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아, 기도란 말은 그저 공허한 종교적 수사(修辭)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중심적 우주. 다만 기도에 예외적인 경우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죽기 살기로 치열하게 기도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와 내 가족의 문제가 걸린 경우입니다. 나는 전체 기도 시간 중에서 최소한 절반 이상은 나와 내 가족을 위하여 씁니다. 내 가족은 나의 분신이며, 희망이며, 내 이름이자 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땀이 피가 되도록 말입니다. 이러한 나를 누가 자기중심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이 우주에 자기중심적이 아닌 존재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별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태양계의 각 행성의 중력(重力)은 각자의 중심(中心)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구상에서도 물체는 항상 아래로 떨어집니다. 어리석은 가정이지만, 달의 중력이 지구를 향해 있었다면 달은 애초에 지구에 충돌하여 소멸해 버렸을 것입니다.
<아직도 가야 갈 길>에서 작가 ‘펙’(M. Scott Peck) 박사는 사랑도 이와 같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이라는 단어에 이런저런 수식어를 붙여 사랑에도 여러 형태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낭만적인 사랑; 헌신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우리는 이를 불륜이라 부릅니다); 등등. ‘헬라’ 사회에서는 사랑의 상대가 누군가에 따라, “이성간의 사랑”(eros), “형제나 동기간의 사랑”(philos), 그리고 “신적 사랑”(agape)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하지만 ‘펙’ 박사님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신이나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이 같은 정의에 다소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만, 아무튼 사랑에 어떤 목적이 있다는 주장이 생소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다소 거슬리기까지 합니다. 사랑이란 희생적이고, 이타적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목적이란 타인의 성장을 위한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끊임없이 확대시켜야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신의 성장에도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기야 본인의 경우를 돌아보면 이분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즉 나는 교단이나 연구실에서 제자들을 지도하고 가르칠 때, 먼저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설교나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자기중심적(또는 개인적)이라는 것은 이기적인 것과는 다릅니다. 이기적이란 타인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자기중심적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허구이긴 합니다만, 영화 <블랙>에서 두 주인공 ‘미셀’과 ‘시하이’가 보여주고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이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받는 자가 복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당연합니다. 하지만 주는 자가 받는 복은 더 크고, 영속적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이란 아무 조건 없이 주는 것이라는 강박감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야.”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고백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이라 부르고 있습니다(빌 4:1). ‘빌립보’ 교회를 개척하며 쏟아 부은 헌신과 희생이 결국 자신의 유익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고백인 것이지요. 그 유익이란 단순히 미래에 그가 누릴 보상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빌립보’ 교회가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얼마나 헌신적으로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도왔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내 것을 위하여. 다시 예수님의 기도에 주목해 보기로 하지요. 자신의 영광을 위한 기도(1-5절)에 이어, 사도들을 위한 기도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매 절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는 “그들”을 위한 기도입니다(참고. 6-19절).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라고 하십니다(참고. 6, 7, 9, 10절). 그러면서,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9절).
아, 이 기도는 얼마나 실망스러운가! 인류의 스승이자 세상의 구세주(救世主)이신 예수님마저 이 같은 기도를 하시다니! 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 이분도 예외가 아니라니.
하지만 판단은 잠시 유보하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어떨지요. “나는 과연 내 열(熱)과 혼(魂)을 다 바쳐 기도하고 있는 내 분신(分身)이나 면류관이 있는가?” 나는 어머니가 되어본 적이 있는가? 스승이 되어본 적은 있는가? 이번 “사월 호 대참사”를 겪으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은 한 마음으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왜 일까요? 부모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저 묵묵부답(黙黙不答)일 뿐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안쓰럽고 염려가 되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샘물처럼 솟아날 뿐입니다. 왜일까? 예수님의 대답인 즉은 그들이 “나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내 손 떼가 묻는, 내 정성과 땀이 베여있는, 나와 같은 영적 유전자를 가진, 내 자식이고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로서 ‘바울’만큼 고초를 많이 겪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만,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자신이 개척한 그 교회의 영적 부흥과 성장을 위하여 염려하고 기도하는 일보다 더 큰 고초는 없다는 것입니다!
본인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고, 정부 장학금을 받아 지금 ‘하버드’ 대학에 연구원으로 가 있는 제자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는데, 끝 부분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선생님 댁에도 예쁜 꽃들이 피었겠지요? 따뜻한 창가에서 사모님이 해주시던 맛난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먹으며 커피 마시던 그 때가 너무 그립습니다. 선생님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보고 싶습니다.” 이 제자는 이제 나의 영광이고 면류관입니다. 나의 면류관은 또 있습니다. 또 다른 한 제자는 오래 전에 본인과의 성경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된 후 편지를 보내왔는데, 편지 끝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내가 그의 영적 아버지라는 감사의 고백이었습니다.
나를 그리워하며, 나를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는 자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중보의 기도가 가슴에 절절이 와 닿을 것입니다.
5. 주님의 기도 (5): 하나도 잃지 않기를
<다락방 강론>의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먼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기도로 시작하고 있습니다(참고. 1-5절). 그리고 제자들을 위한 기도가 이어지고 있는데, 구체적인 기도 내용에 앞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하여 다시 한 번 상기해 보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를 한다는 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는 마음과 같이 본능적인 것이라 무슨 이유를 찾을 필요가 있겠습니까만, 적어도 세 가지 이유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 주님은 제자들이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기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진정 사랑한다면 아버지의 소유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제자들을 바라볼 때마다 아버지 생각과 모습이 떠올랐나 봅니다.
둘째, 주님은 또한 제자들이 “나의 것”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제자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소유라는 말입니다.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내 것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신적인 기원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주님은 제자들이 그분을 “영화롭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사도들이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해주었을까? 무엇보다도 그들이 아들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들에게 영광이 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이들이 누군가 하면, 세속적 기준에서 보자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학벌이 높은 것도, 돈이 많은 것도, 언변이 유창한 것도, 성품이 고상한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구원의 대열에서 제외되어야 하거나, 대열 안에 포함시킨다 하더라도, 서열 상 가장 밑바닥에 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자들을 구원의 대열에 포함시켰다는 사실 자체가 그분에게 영광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지요.
만일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의 대열에 파묻혀 그냥 세월을 축내며 살아갔다면 영광은커녕 주님을 오히려 욕되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살았던 “구원 이후”의 삶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즉 이 사람들은 “주님의 것”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분신(分身)”으로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가리켜 청출어남(靑出於藍)이 될 자들이라고 예언하시기도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4:12).
성도의 견인. 이들 제자들을 위하여 아들이 아버지에게 드리는 첫 번째 간구는 무엇이었을까? 지금과 같은 상황, 즉 조금 후면 그토록 사랑하는 제자들을 두고 떠나야만 하는 시점에서, 이분이 드려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간구는 무엇이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별을 앞두고 나누는 인사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면 어렵잖게 대답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안위(安慰)와 안녕일 것입니다. 즉 제자들을 이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보전”하는 일, 즉 지키는 일입니다(11하, 12, 15절). 그렇습니다. 구원(救援)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들의 구원을 위한 기도라니요! 이상하게 들립니다. 이들이 다시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최근 “세월 호 대참사”로 속칭 “구원파”가 다시 한 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정확히 모르긴 해도, “구원파”는 구원(救援)에 관하여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주장만으로 볼 때, 구원파의 주장은 “구원파” 만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이는 ‘칼빈’의 오대 강령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파의 주장은 그 자체로서 지극히 성경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동안 여러 차례 그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그리고 이곳 다락방 강론에서도 어김없이 성도의 견인에 관한 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1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파의 주장이 문제가 되는 것은 “구원, 그 이후”에 관한 교리가 이단적이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들 교리에 관하여 설명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주님께서 드리는 중보의 기도는 분명 사도들의 “구원, 그 이후”에 관한 염려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구원이란 하나의 점(點)이 아니라 선(線)이구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 과정이로구나!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구나! 계곡에서 발원(發源)한 물이 시냇물을 만들고, 시냇물은 강을 만들고, 강은 바다를 이루듯 구원은 그렇게 흘러가는 물과 같은 것이구나. 바닷물이 역류하여 다시 계곡으로 되돌아올 수 없듯이, 구원도 그와 같은 것이로구나! 주님의 중보의 기도를 들으면서 이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와 같은 깨달음과 관련해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기도의 한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아버지”로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 복음서를 통 털어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부르고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호칭이 다소 어색하게 들리는 것은 양립하기에 어려운 두 단어가 나란히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과 “아버지”가 그것입니다.
“거룩함”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세상과는 분리된 그분의 “초월적”(超越的)이고 “타자적”(他者的)적 존재감입니다. 반편 “아버지”롤 통해서 드러나는 이미지는 친밀하고, 다정다감한 “내재적”(內在的)인 존재감입니다. 이와 같은 호칭은 하나님의 이중적 존재 방식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결국 예수님 자신의 존재 방식에 대한 자기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제자, 즉 교회의 존재 방식 역시 그러해야 함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중생활은 정말 어렵고 고통스럽습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을 초월해야 한다고 하니 말입니다. 눈은 위를 바라보고 있는데, 몸은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으니 정말 괴롭습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습니다만, 결혼생활에서 배우자 몰래 딴 살림 차려 사는 사람을 상상해 보면 그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늘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나를 볼 때, 늘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한 체 하는데, 실은 행동은 그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같은 자기모순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절규를 들어봅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2-25).
모순도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현실에서는 죄를 섬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해놓고 실은 받은 것이 아니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니 말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바울’의 이와 같은 장탄식(長歎息)은 그가 구원 받기 이전에 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모르긴 해도 속칭 “구원파”도 같은 주장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탓이 아닙니다. 그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그는 진정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처럼 자기모순을 똑똑히 인식할 수 있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인 것이지요. 세상이 그를 가만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으르렁 거리며 그를 유혹하고, 위협합니다. 영하(零下)의 겨울 바다로부터 구조된 사람을 육지에 그냥 올려다 놓는다 해서 살아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바다 속에 있을 때보다 더 빨리 얼어 죽어버릴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두면 그 다음부터 스스로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태어남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신 후에, 거듭났으니 이제부터 스스로 혼자 힘으로 살아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태어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말이지요. 끊임없는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아이를 키워 본 경험이 있는 세상의 모든 부모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장탄식 끝에 그냥 지나치듯 이렇게 말하는 곳이 있습니다: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상). 왜 감사할까? 그 유명한 답변이 곧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이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해를 위해서 두 구절의 순서를 바꾸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12절상);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절).
이 기도는 아들이 제자들을 세상에서 안전하게 지켰던 것처럼 아버지도 이들을 안전하게 지켜달라는 읍소(泣訴)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무슨 수로 이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까? 아들의 기도 속에 그 해답이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참담하게 들리겠습니다만, 이 기도는 마치 아버지가 그 방법에 대해서 모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들이 아버지에게 묘수(妙手) 하나를 일깨워드리고 있는 듯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지켰다! 바꾸어 말하자면,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했고, 그 지식으로 살아가게 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도 같은 방식대로 하시면 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내 기쁨을. 제자들이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아는 지식”으로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 아들이 떠난 후에도 동일한 지식으로 세상 속의 매일의 삶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간구일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과 대적하여 이김으로써 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탈출이 아니라, 대적(對敵)입니다. 즉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데려가 달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15절).
그리하여 예수님이 기대하는 세상 속에서의 제자들의 모습은 “기쁨”입니다. 승리의 기쁨이겠지요. 그것도 그냥 기쁨이 아니라, “나의 기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13절). 이전에 “평안”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단순한 평안이 아니라 “나의 평안”을 준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14:27).
세상이나 우리 스스로가 기대하는 교회의 모습은 흔히 사랑이나, 거룩함이나, 일치와 연합 등일 것일 텐데, 주님께서 교회로부터 “기쁨”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사실 <신약>은 “기쁨”의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약> 속에 이 단어가 “기뻐하다”(caivrw)는 동사형으로 72번, “기쁨”(cara)이라는 명사형으로 60번이나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 합니다. 특히 이 단어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교회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터져나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주변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환경”(環境)은 문자 그대로 “빙 둘러싸고 있는 경관(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이 환경을 돌아보았을 때 무엇이 보였을까? 부활하신 주님이 모습? 아닙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환경 즉 세상 속에서 주님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다는 말이겠지요. <성경>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합니다(참고. 고후 4:18).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그렇다면 어디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 지금 주님께서 “나의 기쁨”을 강조하고 계심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 즉 환경을 돌아보면 기뻐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컨대, “세월 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에서 “기쁨”이라는 단어는 완전히 실종되어버린 느낌입니다. 공공장소나 대중 집회나 예배 시에 어느 누구도 “기뻐하라”고 권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랬다간 대중의 뭇매를 맞을 것이 뻔합니다. 위로를 말할지언정 기쁨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나서서, “이제 그만 되었으니 기뻐하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말하는 순간 그는 공공(公共)의 적(敵)이 될 것이 뻔합니다. 아직도 실종자를 다 찾지도 못한 상황에서 말이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나(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참고. 살전 5:16-18).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나의 기쁨”을 세상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내 속에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밖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내 안에서 나와 끊임없이 교제하면서, 그분의 기쁨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교회가 있는 이유도, 교회가 살아갈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습니다!
6. 주님의 기도 (6): 거룩을 위하여
교황이 한 특정 국가를 순방 할 때, 그 나라에서 의례적으로 행하는 의식이 하나 있습니다. “성인”(聖人) 이나 “복자”(福者) 추대식을 말합니다. 과연 누가 이런 영예를 누릴 수 있을까? 대개 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추대를 받는데, 생전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흥에 큰 기여를 했거나, 순교자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 즉 그야말로 거룩하고 탁월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이 같은 영예를 누릴 수 있습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만이 “거룩한 자”, 즉 성인의 호칭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주님은 기도 중에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한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를 향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상). “거룩”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 가운데 가장 으뜸 되는 속성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거룩하다면 아들도 거룩할 것이며, 아들이 거룩하면 교회도 거룩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위하여 드리는 두 번째 간구의 내용도 그들의 거룩입니다(17-19절).
과연 “거룩”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어떤 지고(至高)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지극히 순결하고, 지극히 깨끗하며, 윤리․도덕적으로 아무런 흠이 없는 그러한 상태 말입니다. 나는 과연 이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기라도 한 것일까? 있다면 무슨 수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수련이나 훈련을 통해서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정해놓은 일련의 규칙이나 규정을 잘 지키면 되는 것일까? <히브리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고 답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썩 고무적이지 못한 말씀 같습니다. 거룩하지 못하면 주님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거룩과 의.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과연 어떻게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을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특히 일부 엘리트 종교 집단은 “거룩함”을 “의로움”과 동일시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거룩함 대신에 의로움을 추구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일련의 기준과 규칙들을 만들어 놓고 그 수준에 이르기 위하여 피눈물 나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과연 성공했을까? 거룩에 이를 수 있었을까?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평가는 아주 통렬합니다. 거룩함 대신에 의로움을 추구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이 무슨 아이러니입니까? 하나님의 의(義)에 이르러 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했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대적하고 불순종하게 되었다니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이 같은 일은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하고 좋은 의도로 시작을 했는데, 결과는 정 반대로 끝나버리는 경우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평가를 곰곰이 새겨보니 비극은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사도의 평가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이들 <성경> 전문가들은 <성경>에서 “의로움”(qd<x, 체데크)은 기본적으로 “올바른 관계”를 뜻하는 것이지, “윤리․도덕적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행위는 대가를 요구하지만, 관계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관계는 무슨 값을 치르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컨대, 돈을 주고 성(姓) 관계를 갖는 것은 매춘행위이며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를 범법행위로 간주합니다. 같은 원리로 아무도 “하나님의 의”를 무슨 값을 치르고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주야로 <성경>만 연구했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처럼 간단한 사실조차 몰랐던 것일까요? 기초가 부실했던 것일까요? 부실한 기초 위에 무엇을 올려놓든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이 속칭 “구원파” 때문에 얼마나 엄청난 폐해를 겪고 있는지 이를 웅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거룩”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도 이와 같은 부실한 기초 위에 이루어진 하나의 돌쌓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카도쉬’(v/dq)로 그리고 ‘헬라’어로는 ‘하기오스’(a{gio") 부르는데, <칠십인역>에서 약 190회 정도 등장한다고 합니다. 의미인 즉은 “따로 구분하다”입니다.
<출애굽기> 40장에서 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광야에 장막을 짓게 한 후에, 그 안에서 사용할 제단(祭壇)을 비롯한 여타 기구들을 별도로 구별해 넣도록 명하셨습니다. 즉 “거룩하게 하라”고 명하셨다는 말입니다. 단순한 나무나, 철기나, 천에 불과한 이들이 그 순간부터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존재가 된 것이지요. 이들에게 무슨 특별한 내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갑자기 이들이 깨끗해졌거나, 광채를 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쓰임새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쓰려고 구분해 놓았을 뿐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거룩의 의미도 이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성자”(聖者)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인들을 향해서도 같은 호칭, 즉 “성도”(聖徒)로 부르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롬 1:7상). 마찬가지로 이곳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9절).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의롭게 하셨다는 말은 자신을 의롭게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스스로를 구별하셨다는 말입니다.
거룩을 위한 기도. 그리고 똑 같은 목적을 위하여 제자 즉 교회도 구별하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대목에서 의문이 한 가지 남습니다. 즉 교회가 이처럼 구별된 즉 거룩한 존재라면, 주님은 왜 지금 다시 이들의 거룩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가 하는 점입니다. 다락방 강론의 벽두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도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베드로가 나서서 자기의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달라고 요청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이미 깨끗하여졌으므로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너희는 깨끗하다”(13: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거룩을 위하여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실 “구원파”의 주장이 이러합니다. 이미 구원을 받아 거룩하게 되었으니,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들 역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만큼이나 신앙이나 신학의 기초체력이 아주 부실하고 위험천만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신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거룩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이나, 제자들의 온 몸이 아닌 발을 씻겨주시는 행위는 전혀 모순이 없으며, 지극히 일관된 것입니다.
왜 제자들은 거룩을 위한 주님의 기도가 필요할까? 왜 제자들은 수시로 발씻음이 필요할까? 수시로 거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수시로 거룩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종교적으로 깨끗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일까? 윤리․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일까? 거듭 강조하거니와 거룩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떤 수준이나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이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러워진 발, 씻어야 할 발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는 이에 대해서 한 가지 힌트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대목은 “흘러 떠내려가다”입니다. 이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이것입니다. 즉 항구에 배를 밧줄로 묶어 정박시켜놓았는데, 이 줄이 스르르 풀려 배가 그냥 떠내려 가버리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 배는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망망대해에서 요동치며 떠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 배와 그 바다는 이제 한 통속이 되고, 한 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교회나 나는 언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될까? 나와 세상이 한 몸을 이루고 한 통속이 되어 어지러이 살아갈 때가 아닐까? 그리하여 세상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고, 세상의 방식이 내 방식이 되고, 세상의 기준이 나의 기준이 되고 세상의 지식이 나의 지식이 되어,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왜 이 세상에 있는지를 알지 못할 때가 아닐까? 즉 내가 더 이상 구별된 존재가 되지 못할 때가 곧 거룩하지 못할 때가 아닐까! 즉 다시 발을 씻어야 할 때가 아닐까! ‘바울’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분들이 스스로를 거룩하다고 자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목적에 충실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거룩은 결국 정체성(正體性)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알지 못할 때 나는 거룩하지 못한 존재가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도 결국 이것이었습니다. 정체성에 충실하라는 것 말입니다. 이점에 있어 가장 끔찍한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중에서 단 한 마디의 칭찬도 받지 못한 교회인데, ‘라오디게아’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냉철한 지성도 뜨거운 감성도 없었다는 것이지요. 스스로 “나는 이만하면 됐다”고 아주 만족하며 살아갔던 교회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인생의 목표가 없다고들 합니다. 혹시 ‘라오디게아’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진리로 거룩함을. 세상은 참으로 영리하고 때로 교활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수시로 촛불집회다 국민 서명 운동이다 하면서 온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마치 이 같은 행사를 주도하지 않거나, 참석하지 않으면 시대의 낙오자나 반역자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꺼이 참석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 합니다. 주장도 다양합니다. 사고의 원인을 밝혀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관련 책임자를 문책하고 처벌해야 한다고도 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모두들 타당하고 지당한 주장들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누가 책임지고 해야 할까. 당연히 정부가 해야 한다고 합니다. 혹자는 대통령이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주장들 가운데 거짓 목자 유병언과 그 자식들을 빨리 잡아들여 처단하라는 구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진리를 왜곡시키고, 혹세무민하여 수십만의 양들의 피를 빨아먹은 흡혈귀 유병언을 잡아들이라는 주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대 혼란 중에 거룩한 교회의 목소리, 교회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을 외쳐야 할까? 교회는 무엇으로 그 거룩함을 드러낼 수 있을까? 교회는 무엇으로 매일 발을 씻어야 할까? 교회를 가장 교회답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교회의 정체성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 주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기도로 대신하고 계십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절).
주님의 이 기도가 지금 대한민국에서처럼 더 절실하게 들릴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라 외칠 수는 없습니다. 안전한 대한민국, 정의로운 대한민국, 부정부패 없는 청정 대한민국, 친환경 대한민국, 에너지 절약 대한민국, 인권 대한민국... 한 번 씩 다 들어보던 구호 아닌가요?
하지만 이들 구호는 교회가 먼저 나서 외쳐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또는 세상이 외친다고 뒤따라 다니며 외쳐야 할 구호도 아닙니다. ‘바울’이 이들 구호를 이방에 전하고 다니라고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신 것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오신 것입니다. 즉 복음의 증인 말입니다. 안전이니, 복지니, 인권이니, 환경이니, 정의니, 민주니, 하는 그 모든 것들은 복음의 결과로 나타나야 할 현상일 뿐입니다.
이제 교회와 나는 기본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해져야 합니다. 즉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전하고, 가르치는 일이 그것입니다.
7. 주님의 기도 (7): 일치를 위하여
자식들은 어릴 시절에 부모에게 평생 바쳐야 할 효도를 다 드린다고 합니다. 우리 큰 아들 내외가 이제 돌을 갓 지난 자기들 아들 대하는 것을 보면 정말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아들 하는 짓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면, 퇴근 후 현관문을 들어설 때 우리보다는 자기 아들에게 먼저 시선이 갑니다. 우리가 그들과 늘 한 집에서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 번씩 방문하는 부모인데, 우리에게 잘 다녀왔다는 인사부터 먼저 하는 것이 도리이거늘, 반갑다고 소리 지르는 자기 아들 안아주느라 우리는 뒷전입니다. 우리는 이게 서운하지요: “우리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허나 그들 하는 모습이 우리 부부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아들 또한 어릴 적에 우리를 얼마나 즐겁고 기쁘게 해주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도 우리 부모님들보다는 늘 아이들이 우선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연히 우리는 이들에 대한 기대로 늘 설렘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언젠가 큰 인물이 되겠거니 하면서 말입니다. 이처럼 부모로 하여금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게 해주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내 자식들은 우리 부부에게 큰 효도를 했다고 인정해야겠습니다. 지금 그들이 장성하여 가정을 가진 후 우리를 어떻게 대하고 있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 두 아들이 완전히 실망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두 아들 내외는 우리를 마음으로부터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저의 아내는 외국에서 살고 있는 작은 아들을 생각하면 늘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고입니다. 그리움과 안쓰러움 때문이겠지요. 어머니로 하여금 그리움으로 눈물짓게 하는 아들은 불효자가 아니라, 효자라고 해야겠습니다. 이번 우리 부부의 밴쿠버 방문 길에, 그곳에 사는 작은 아들이 나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절정에서 새로운 모터를 장착(裝着)하여 열정을 가지고 살기 바란다는 글귀를 덧붙여서 주더군요. 아주 유익하고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참 효자라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들에게 바라는 더 큰 효도가 아직 남아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만큼 받았으면 되었지 또 무엇을 더 바라느냐고 비난받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자식들로부터 마지막으로 바라는 더 큰 효도는 다름 아닌 본인의 부모님께서 생전에 우리 여섯 남매들에게 누누이 부탁하시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얼마나 그것을 간절하게 바라셨으면,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遺産) 문제까지 깔끔하게 정리를 다 해놓으실 정도였습니다. 사회에 환원할 것과, 자식들에게 남겨줄 것 등에 대해서 유언으로 미리 일러두신 것입니다. 유산 문제로 행여 자식들 간에 다툼이 있을까 염려가 되셨던 것이지요. 우리 형제들은 아버님의 유언 그대로 따랐습니다. 선친께서 자신의 유언을 법률적으로 공증을 받은 문서로 남겨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 여섯 남매는 유산 문제로 다투어본 적이 없으니, 부모님 사후에도 사이가 갈라질 일도 없었고, 서로를 원망하며 살아갈 일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형제들은 매년 몇 차례 씩 만나 여행을 함께 하기도 하고, 식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부부동반은 물론 자식들까지 함께 모입니다. 부모님의 기일(忌日)에 만나는 것은 물론, 서로의 생일이나 환갑, 심지어 자식들의 결혼과 출산까지 챙겨주기도 합니다. 육남매가 이처럼 오랜 세월동안 끊이지 않고 우애(友愛)를 이어가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이 같은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본인의 부모님께서 평소에 이에 대해서 자식들에게 특별히 가르치거나 훈계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셨다는 생각입니다. 저의 아버님은 아홉 남매 중의 막내였습니다. 시절이 시절이었던 만큼, 막내로서 부모에게 응석을 부려보기도 전에 층층시하 형과 누이로부터 순종과 복종을 먼저 익혀야 했던 시절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일찍부터 형들은 해외유학이다, 독립운동이다 하며 집을 떠나버렸고, 자신은 소학교도 겨우 졸업해야 했으며, 시골에 남겨진 부모 공양을 비롯한 집안의 대소사는 혼자의 몫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사후 제사 지내는 일도 그 잘나가던 서울의 형들이나 누님들이 아니라, 시골의 못난 막내가 혼자 도맡아 지냈습니다.
그런대도 이분은 자식들 앞에서 단 한 번도 자기 부모님과 형과 누이들을 원망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늘 그분들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했고, 어쩌다 이분들이 고향을 방문할 때면 지극정성으로 대접하였습니다. 방학이 되어 서울에서 공부하던 자기 자식들이 집으로 내려오면 그들을 보기가 무섭게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서울에 사시는 큰 아버님들이나 고모님들께 인사는 하고 왔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손위 형제분들을 공경했으면 이렇게까지 하셨겠습니까!
나는 감히 생각해 봅니다. 이와 같은 부모님의 삶이 자식들의 유전인자로 자리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저와 아내가 우리 두 아들 내외에게 바라는 효도도 바로 이것이라는 말입니다.
일치와 연합. 그것이 무엇일까요? 지금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의 교회에 대해서 간절히 바라는 바로 그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아버지 하나님에게 무려 네 번에 걸쳐 자신의 심정을 호소하고 애원하고 있습니다(20-24절). “그들이 하나 되게 해 달라”는 간청이 그것입니다. 즉 연합과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일까? “교회”입니다: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20절). 여기서 “그들”은 사도(師徒)들일 것이며,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은 신자(信者) 일반, 곧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제 주님은 사도들을 위한 기도에서 그들을 통해서 탄생하게 될 교회, 즉 “성도 일반”을 위한 기도로 옮겨 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도들 역시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다는 점에서 교회의 일부로 보아야 하겠습니다만, 여기서 교회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성도 일반을 의미해야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주적 교회”(Catholic Church)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주적 교회란 시대와 지역의 한계를 초월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우주적 교회가 하나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그 모든 차이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우주적 교회의 일부로 일치와 연합을 이루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주적 교회로 일치와 연합을 이룰 수 있을까? 무엇보다 기구나 조직의 일원화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두 지역 교회를 합쳐 하나의 지역교회로 만들거나, 두 지방회를 합쳐 하나의 지방회로, 또는 두 교단이 합쳐 하나의 교단을 만들면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로마 카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와 ‘영국의 국교회’와 세계의 모든 개신교회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단일 교회 조직을 이루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교회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기구나 조직을 일원화시키면 교회의 연합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래서 일사불란(一絲不亂)한 모습을 보여줄까? 역사적으로 우리 인류는 하나의 교회 즉 강력한 중앙집권적 기독교 왕국을 가져본 경험이 있습니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 중세 천 년을 존속했던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 세상은 물이 바다에 넘침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찼을까? 하지만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후대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암흑시대”(The Dark Age)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보다 더한 조롱과 해학(諧謔)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빛이 아니라 어둠이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온갖 미신과 무지와 폭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무려 십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운동도 바로 이 시기에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일부 엘리트 종교인들의 전유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왕국에서 <성경> 문맹율(文盲率)이 거의 백퍼센트에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성경>은 이들 엘리트 집단의 탐욕스러운 지배의 도구가 되어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기독교 왕국 이전의 수 세대가 훨씬 나았습니다. 여러 지역에 흩어져있던 지역교회들은 조직이나 상호 연결고리는 느슨하고 엉성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고, 배우며, 전하는 일에 있어서 이미 하나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성경>, 특히 <서신서>나 <계시록> 등을 통해서 대략이나마 이들 개 교회의 면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각 지역교회 간에 무슨 연합회니, 지방회니, 교단이니 하는 조직이나 기구가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또 하나 경계해야 할 일치와 연합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외적(外的)으로 보이는 조직이나 기구의 일치보다 더 치명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학이나 신앙의 일치를 말합니다. 신학이나 신앙의 일치는 보다 내적(內的)이며, 비가시적이며, 은밀하기까지 합니다. 성령도 하나이며 교회가 하나이니, 신학이나 신앙도 당연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나름대로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조화나, 일치나, 연합은 아름다운 단어들이 아닙니까!
하지만 신학이나 신앙에서 하나 된 교회가 과연 건강하다 할 수 있을까? 하나 되는 교회를 이루려 하다가 하나 되는 진영이나 집단을 이루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교회가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사상이나 이념 공동체로 전락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곳에는 다양성이나 역동성은 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진영논리(陣營論理)가 판을 칩니다. 또 다른 암흑시대가 도래한 것이지요. “나치 독일”이 그랬고, 북한 세계가 그러하며, ‘바리새’파와 오늘날의 “구원 파”가 그러합니다. 이들에게는 다양한 견해란 조직에 대한 배신이자 반동으로 처단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성경> 해석도 그렇습니다. 오직 한 가지 해석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네들의 진영논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려 했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해석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해석 방식이 수구 보수적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방식은 진보적이며 혁신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해석이 운명론적이고 닫힌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해석은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것이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리새’파가 예수님의 해석을 적대시하고 배척했다면, 예수님은 상대방의 해석을 상당 부분 인정하고 수용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열려 있었으며, 융통성이 있었습니다.
통일성과 다양성. 교회를 비롯한 피조세계는 이상적으로는 <창세기> 1장에서 그리고 있는 천지창조의 모습을 담아내야 합니다. 그 그림은 일치와 연합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곳에는 통일성과 다양성이 아름답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은 각기 나름의 방식대로 날자와 사시(四時)와 연한(年限)을 지시하고 알려줍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가득 메운 온갖 종(種)의 생명체들은 각기 자신의 방식대로 생육하고 번성하되, 자신의 한계 내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창조주의 대리인으로서, 피조세상의 왕으로서, 이들 모두를 자유롭게 다스리고 지배하되, 자신의 자유가 무제한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천지창조의 모습을 마치 아무 의미 없는 ‘레고’의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드러내고 있는 장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통일이 있는 곳에는 체계와 규범이 있고, 질서와 규칙이 있습니다. 결코 깨어지거나 무너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유지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양성이 없는 통일은 획일(劃一)과 전제(專制)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한편 다양성이 있는 곳에는 온갖 종류의 상상과 역동과 창조가 빛을 발합니다. 자유가 춤을 춥니다. 그러나 통일성 없는 다양성은 분열과 혼란으로 끝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삼위일체”의 방식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존재 방식이야말로 통일성과 다양성을 가장 극적으로, 가장 신비한 방식으로 계시하고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해하며, 사랑하고, 대화하며, 강요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영원히 교제를 이어왔습니다. 이와 같은 존재 방식이 천지창조에서 그 결과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그분의 교회 역시 “삼위일체”의 존재 방식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22-23절)라는 기도의 의미도 이런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대로 교회도 상호 간에 그렇게 존재하게 해달라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본인은 지금 교회의 목적이나 “사역”의 방식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 즉 그 본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주님은 교회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 가에 관해서 애절하게 기도하고 있는 중이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간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의 사역, 즉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그 다음 문제일 것입니다.
존재의 이미지들. <신약>은 일련의 알기 쉬운 이미지들을 사용해서 교회의 존재 방식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가장 친숙한 이미지는 “가정”입니다. 교회가 가정이라면 성도는 형제와 자매입니다. <서문>에서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고 있음을 압니다(1:11). 형제들은 성격이 다르고, 은사와 재능이 다르며, 꿈과 소망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만, 정상적인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자라면 이들 차이로 인해서 반목하거나, 갈등하거나, 시기하거나, 훼방 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차이를 기뻐하고 자랑합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교회의 존재 방식에 대한 또 다른 극적인 이미지는 “한 몸”입니다(참고. 고전 12:12-14). 몸이 없이 각 지체만 따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각 지체는 그래서 상호 의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일을 하겠다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나 혼자 몸 전체를 움직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하면 그만입니다. 그것이 크든 작든 말입니다.
우리의 초미니 교회, <늘푸른 교회>의 존재감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는 늘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신랑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자녀이자 백성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 다른 지체의 사역을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나 자신 만의, 나 자신에게 주어진 그 일을 하면 될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방식대로 전투를 수행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그는 패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만의 은사나 재능이나 소명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고 기도하며 물어보아야겠습니다!
8. 주님의 기도 (8): 榮華를 위하여
우리 주변에 이런 저런 분야에서 사람들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바둑의 신동, 피아노 신동, 체조 신동, 등등. 그런데 신기하게도 “인생의 신동”이 났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바둑이나 피아노나 체조를 배우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삶 자체에 비하면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세월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신동이라 해도 젊어서는 깨닫기 어려운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절세(絶世) 미녀였던 미국의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노년에 늙어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세월이 우리에게 참을성을 가르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짧아질수록 기다리는 능력이 커진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다.” 늙어가는 것을 가장 아쉬워하고, 두려워해야 할 미모의 여배우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가 일흔이 넘도록 살지 않았더라면 이런 말을 결코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육체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마음과 생각도 바뀌는 법입니다. 누구나 이 나이에 이르면 철학자가 되나 봅니다. 위 내용은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들>(복거일 저: 도서출판 다지헌, 2014)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위장된 축복. “삶의 지혜”는 그야말로 살아봄으로써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예컨대, 축복에 관한 깨달음만 해도 그렇습니다. 축복이 그냥 민낯으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어서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축복은 때로는 가면(假面)을 쓴 모습으로, 때로는 정 반대의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다가옵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그것이 진정 축복인지 식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축복을 뜻하는 영어 단어 “(to) bless”가 피 흘림을 뜻하는 “(to) bleed”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주장은 그래서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겠습니다. 이 주장에 따르자면, 축복은 온 얼굴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축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불교의 깨달음은 진정 깨달음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기껏해야 절반의 진리만을 터득한 것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불교의 선각자들의 눈에는 넘실대는 바다의 파도와 풍랑만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수없이 많은 생명들은 보지 못했던 것일까요? 일견 헛되고 험한 고해 즉 고난의 바다는 실은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해주는 축복의 겉모습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기는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귀중한 덕목(德目) 중의 하나입니다. 최근 내가 본 영화 속에 “용기는 두려움을 필요로 한다”는 대화가 나옵니다. 온갖 두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용기가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용기가 두려움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두려움을 겪지 않으면 용기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겠지요. 나는 몸이 조금만 아파도 무슨 큰 병에 걸린 것이 아닐까 하고 덜컹 겁을 냅니다. 하지만 본인의 아내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크고 작은 온갖 병을 다 앓아 본 터라, 웬만한 아픔은 아픔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통증 하나도 견디지 못하는 나에 비해, 아내는 매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기 몸에 인슐린주사 바늘을 찔러댑니다.
희망은 또 어떻습니까? 희망은 삶을 견딜 만 하게 만드는 우리 인생의 윤활유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나, 목표를 다 이룬 사람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또한 이것이기도 합니다. 희망은 역설적으로 정 반대의 처지에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목표를 다 이루지 못했다 하여 절망하고 좌절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자살은 이룰 것이 더 없는 사람에게 자주 나타나는 하나의 질병입니다. 그래서 희망은 항상 인내의 모습으로 위장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 역시 인생을 살아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삶의 지혜”라 하겠습니다.
한창 젊은 나이의 혈기왕성한 ‘베드로’에게 이런 지혜는 없었나 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이제 곧 그들을 떠나신다고 하니 물어본 질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사지(死地)로 혼자 가시는 것을 어찌 제자가 그냥 두고만 볼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함께 따라 가겠다고 나섭니다. 우리는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용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 아직은 사망의 두렵고도 음침한 골짜기를 제대로 겪어보지도 않았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의 용기는 진정한 용기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곧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선생님은 그에게 인생을 좀 더 살며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3:38).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떻습니까? 누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흉금(胸襟), 즉 본심(本心)으로 이해했겠습니까(참고. 요 1:18)?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강보(襁褓)에 싸여, 한 어린 미혼모의 품에 안겨 잠들어 누워있는 이 연약한 어린 아이를 누가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 여겼겠습니까! 사실 인류는 전지전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진정 위장의 대가라 하겠습니다.
내게 주신 자. “최후의 만찬”(13장)에서 시작한 주님의 <수난 이야기>는 “다락방 강론”(14-16장)을 거쳐 “주님의 기도”(17장)에서 그 절정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도의 마지막 부분(24-26절)은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이 부분은 교회를 위한 주님의 두 번째 기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실은 주기도문의 정점(頂點)이기도 하고, 그분이 곧 맞이할 죽음의 최종 목적을 드러내고 있는 곳입니다. 이 기도를 엿듣는 순간 우리 모두는 이렇게 탄성을 발합니다: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 이것이 그분의 마음이었구나! 이것을 위해서 죽기로 작정하셨구나!”
과연 이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4절). 그것은 교회의 “영화”(榮華)입니다. 교회의 “영화”란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되어서,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궁극적인 지위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강론의 벽두에서부터 강조한 바 있는데, 그분께서 떠나시는 것도 제자들과 함께 있을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14:2-3). 제자란 주님께서 다섯 번에 걸쳐 언급하고 계신 “그들” 즉 “내게 주신 자들”입니다.
누가 이를 위하여 이처럼 애절하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주인이 노예를 위해서 이처럼 애절하고도 한 결 같은 관심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기업체 사장이 자기 회사에 속한 직원과 그 가족을 위해서 이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친구를 위해서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교인을 위해서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이 자신의 지역구 유권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위해서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또 알게 하리니. ‘요한’은 일찍이 교회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미 보았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1:14). 하지만 이 기도의 방점(傍點)은 지금 여기가 아닌, 장차 그곳에 있습니다. 확인을 위하여 26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6절). 그러므로 이 기도는 희망을 말하며, 기다림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왜 지금 당장 그것을 누릴 수 없나이까하고 보챌 수 없게 만듭니다.
<요한일서>에서도 같은 생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요? 나로 하여금 그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옛적에 한 노예 처녀가 살았는데, 어느 날 주인마님의 안방에 들어가 비단 옷 한 벌을 훔쳐다가 베옷과 바꿔 입었다는 썰렁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생을 비천한 노예로 살면서 입어 본 옷이라고는 베옷뿐이었으니, 비단의 가치를 제대로 몰랐던 것이겠지요. 썰렁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린 시절 집안에 안 쓰고 있는 오래된 놋쇠 그릇을 어머니 몰래 들고나가 엿가락 몇 개와 바꿔먹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썰렁한 사람은 <성경>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데마’라는 사람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렸고”(딤후 4:10). 사도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날이 새면 이 자리에 모인 사도들 역시 사랑하는 선생님을 버리고 모두들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만찬의 추억도, 감동적인 설교도, 그리고 애절한 기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들 각자는 실망과 두려움과 그리고 좌절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고난의 바다”를 항해(航海)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항해를 통해서 그들은 ‘데마’나 비단 옷을 베옷으로 바꿔 입은 처녀가 갔던 길을 걸어가거나, 또는 주님의 “영화”에 참여할 수 있거나 입니다. 어느 쪽이든 살아보지 않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거듭 강조하거니와, “왜 지금은 그 영화를 누릴 수 없나이까?”하고 어린 아이처럼 보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 대답조차도 항해를 통해서 얻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힘들고 고달픈 항해를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수 있을까? 그처럼 힘든 항해라면 누가 감히 시작할 엄두조차 낼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주님의 마지막 기도를 다시 한 번 주목해봅시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또 알게 하리니”입니다(참고. 26절). 무슨 말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알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독생자를 통해서 교회와 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더욱 깊고도 풍성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발전시켜 가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지금 교회의 ‘멘토’(mentor), 즉 보혜사 성령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사역에 관한 강의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16:12-1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16:25).
결론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은 교회가 독생자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더욱 자라가고, 깊어져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은 그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영광으로서, 이는 교회가 볼 수 있고 또한 교회로 하여금 아들의 사랑을 소유한 자로 변화시키는 그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그리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