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12-14).
다락방 강론의 세 번째 내용 역시 긴 본문입니다. 물론 각각을 별도 취급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주제는 위 제목에서 밝히고 있듯이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1) 포도나무와 가지
2) 세상과 교회
3) 환난과 기쁨
그리고 이 본문에서도 주옥같은 말씀들이 널려있어 우리로 하여금 이들 모두를 암송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합니다. 아래 구절들을 먼저 암송해 보고 해당되는 주제를 밝혀 봅시다.
1) 15:5.
2) 15:13-14.
3) 15:16.
4) 16:9-11.
5) 16:33.
문학과 역사
구조: 첫 번째 단락(15:1-17)은 다시 두 개의 작은 단락으로 구분되겠는데 상호 연관된 주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두 주제는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정확히 단락구분을 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대략 11절에서 구분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주제가 무엇입니까?
처음 여섯 절(15:1-6)은 일종의 비유로 취급될 수 있고, 나머지 7-17절은 이 비유에 대한 설명 내지는 해설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앞선 양과 목자의 비유의 그것과 아주 흡사합니다(참고. 10:1-5 & 10:6-18). 포도와 나무 가지의 비유는 최후의 성찬이라는 상황 속에서 전혀 생소한 비유는 아닌 것이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연상시켜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단락(15:18-16:4a)의 주제는 단연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교회를 향한 세상의 증오에 관한 것입니다. 이 단락 역시 두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만, 보는 이에 따라 구분 방법이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예로써, 18-27절을 교회에 대한 세상의 적개심으로, 그리고 16:1-4a를 이에 대한 교회의 반응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만, 일반적으로 불신자 전체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내용의 전개는 하나의 신학적 주제가 한 단락에서 다음 단락으로 이어지고 있는 형식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컨대, 두 번째 단락의 끝부분에 등장하고 있는 “이것들”(16:1)은 처음 단락에서 등장한 바 있는 내용 전체를 말합니다.
마지막 단락의 강론은 그 내용에 있어서나 표현에 있어서 앞선 두 번의 강론(13:31-14:31)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여기에서도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 번째 단락에서는 세 가지 주제가 동시에 드러나고 있는데, 아래 구절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4b-6; 16-24절.
(2) 4b-24사이의 나머지 구절들: vv 4b-6; 16-24가 원래는 한 단위였으나 이들 사이에 보혜사 성령님에 관한 언급이 세 번 삽입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의 언급을 찾아 적고 각각의 주제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① 7절:
② 8-11절:
③ 12-15절:
(3) 25-33절:
신학과 신앙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1. 참 포도나무(15:1-17)
첫 번째 단락의 전체적인 구성은 비유(parable)와 계명(command)이 상호 연결되어있는 형식입니다. 비유란 예수님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며, 계명은 가장 큰 두 종류의 사랑에 관한 것으로서, 그 유명한 (1) 지상명령(the Greatest Command)과 (2) 지상 위임령(the Greatest Commission)을 말합니다.
비유. 비유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유명한 예수님의 자기 선언, 즉 “나는...이다”(ejgwv eijmi, 에고 에이미)와 관련된 것으로서,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본 복음서에서 화자는 일곱 번에 걸쳐 이 선언을 등장시키고 있다 했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절)
예수님의 자기 선언에 관한 이 비유가 앞선 선언들과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서는 “내 아버지는 농부라”는 추가 선언을 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엄격하게 보자면 이 문장에는 두 개의 비유가 나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비유의 핵심은 “포도나무”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농부의 비유는 첫 번째 단락 전체 내용에 대한 배경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참고. 2, 6, 7-11절). 이처럼 아버지를 비유 속에 함께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충분히 타당하고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아들의 사역은 아버지를 떠나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에 관한 주제는 <요한복음>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곳 포도나무 강론의 형식적 특징은 상징과 그 상징이 반영하려하는 실재(實在)가 하나로 융합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인데, 종종 실재가 상징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봅니다. 예컨대, 첫 번째 단락에서 강조점은 “내가 너희 안에”인데, 이는 엄격하게 따지자면 포도나무 비유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주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곳에서 중요한 질문은 왜 예수님은 자신을 하필이면 “참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즉 왜 그가 참 포도나무인가 하는 점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포도나무를 생명의 나무로 그리고 있는 영지주의(靈知主義) 문헌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습니다만, 포도나무나 포도밭은 <구약>이나 ‘유대’문학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이미지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참고. 호 10:1-2; 사 5:1-7; 렘 2:21; 겔 15:1-5; 17:1-21; 19:10-15; 시 80:8-18).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이들을 비유에 등장시키는 것이 하등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구약>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들 상징을 사용할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해서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1) 1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었도다. 3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4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7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1-7); (2)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렘 2:21).
예수님 역시 부정적인 의미로 포도원을 그분의 비유에 등장시킨 바 있습니다(막 12:1-11). 따라서 이곳에서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는 의도는 건강하지 못한 포도나무, 즉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과 자신을 대비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유의할 점은 예수님은 포도나무를 자신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하고 계신 것이지, 교회를 지칭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또는 신자)는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의도되고 기대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단락이 교회, 즉 “가지”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2-4절)
이 단락에서 가지와 관련하여 언어의 유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1) “제거하다”(ai[rw, 아이로); (2) “깨끗하게 하다”(kaqaivrw, 카다이로). 두 동사 모두 같은 어근(語根)을 가진 단어들입니다. 번역본에 따라 이 두 ‘헬라’어 단어에 대한 번역이 각양각색이며, 두 단어의 의미와 그 구별이 다소 애매해집니다.
우선 첫 번째 단어 ‘아이로’는 다음 네 가지 정도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 들어 올리다; (2) 위로 쳐다보거나 목소리를 높이다; (3) 옮겨 나르기 위하여 주워들다; (4) 제거하다.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는 네 번째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죽어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가지를 잘라 내거나 치운다는 의미입니다. ‘머레이’(G. R. Beasley-Murrey)에 따르면, “죽은 가지를 치워 없애다”(clear away)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해석은 뒤이어 등장하는 6절의 의미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에 적절한 번역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6절). 농부가 말라 죽은 가지들을 모아 불태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이스’ 목사님은 나머지 세 가지 의미도 함께 포함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포도 열매는 속성 상 가지에 매달려 아래로 향하고 있어야 하는데, 만약 가지가 땅을 향하여 아래로 쳐져 있다면, 경험 많은 농부라면 그 가지를 무조건 잘라낼 것이 아니라, 가지가 위를 향하도록 지지대 등으로 받쳐주어서 햇빛이나 공기와 접촉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종 병충해의 피해도 막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농부의 이와 같은 행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격려하고 고무시켜, 자신과 더 밀접한 관계 속에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두 번째 동사 ‘카타이로’는 “깨끗하게 하다” 또는 “순결하게 하다”(참고. 13:10)는 뜻인데, 영어의 “카타르시스”(catharsis)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머레이’( Beasley-Murrey)는 이 단어를 “깨끗하게 치우다”(clear clean)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이 행위는 병충해를 비롯한 포도나무에 해로운 일체의 것들을 제거하여 열매가 잘 맺도록 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라죽은 가지를 제거하는 일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인 즉, 넓게 보면 “가지치기”(prunning)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 “너희는 이미 깨끗하여 졌다”(3절)는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셨으므로, 논리적으로 가지치기의 결과는 가지가 아니라, 포도나무가 깨끗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줄기나 뿌리가 싱싱하고 깨끗하게 되었다면 가지 역시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3절은 이어지는 4절과 함께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한 듯한데, 핵심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4절)에서 볼 수 있듯이, “연합” 즉 하나 됨에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차원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태는 사도들에게 불가능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 이제 곧 그들은 부활하실 주님을 보게 될 것이고, 그들 역시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참고. 19-20절).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을 조건적인 명령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내 안에 거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오히려 격려와 확신을 심어주는 말씀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있다. 그런즉 아무 염려 말고 내 안에 거하라.”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은혜로 믿게 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닌 것입니다. 가지가 줄기를 붙들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론은 이제 상징적인 비유에서 구체적인 적용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상징이 그려주는 이미지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와 열매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긍정과 부정으로 반복 강조하고 있습니다.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5-6절)
예수님 스스로도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일찍이 똑 같은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5:19);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5:30).
즉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결국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인데, 건강한 포도나무가 싱싱한 포도 열매를 맺는 것처럼, 건강한 신앙생활의 증거를 드러내고 구현하는 것을 말한다 할 것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신학자 ‘불트만’(Bultmann)은 포괄적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가장 중요한 두 계명을 말하는 것인데, 9-17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강론으로서, 우리는 흔히 이 두 계명을 각기 “지상명령”(the Greatest Command)과 “지상위임령”(the Greatest Commission)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선교의 열매로 나타나야 할 것인 즉, 사도들은 상호 간에 연합하고 하나가 되어야겠지만, 여기서 머물 수는 없고, 16절에서도 명시되어 있듯이, “가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즉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모든 신자들이 포도 열매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비유는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즉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못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설명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가지치기를 연상시키는 또 다른 단어가 두 번 반복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버리다” 또는 “던지다”(bavllw, 발로). 즉 그와 같은 가지는 “잘려나가서, 시들게 되고, 농부는 이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살라버린다”는 설명은 실제 포도원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사실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설명이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있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만, 무익한 가지를 농부가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와 유사한 설명이나 비유가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1)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2)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 (3)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하지 아니하였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겔 15:1-5).
무익한 가지에 대한 이와 같은 비유나 설명은 일반적인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당시 사도들이나 오늘날 독자들은 ‘가롯 유다’나 훗날 교회 안에서 출현할 많은 “적그리스도”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참고. 요일 2:18-19; 4:1-10).
계명. 비유는 이제 계명으로 보다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계명이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그것은 예수님의 말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유에서의 강조점이 믿음 즉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와 연합하여, 그리스도다운 삶을 사는 것이었다면, 이곳에서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다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절)
하지만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관점에서 보면 실은 하나이자 동일하다 하겠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믿는 자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게 될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14:12-14).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8절)
신자가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 아버지는 그를 통해서 영광을 받을 것이고, 이는 성자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을 통해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를 스승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자라고 정의할 때, 초대교회의 교부 ‘이그나티우스’가 순교를 위해 ‘로마’로 가면서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이 이 정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제 내가 그분의 제자가 되려한다.”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9-10절)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의 일생 동안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를 기쁘게 하며, 그분을 슬프게 하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결국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일 것입니다. 아들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이 복음서 전체에 걸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에게 대하여,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헌신하고 순종했는지에 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으며(예. 4:34; 6:38; 8:29, 55), 순종의 절정은 그분의 죽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10:17-18; 12:27-28; 14:31).
그리고 이처럼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사랑의 관계는 두려움이나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절정으로 이끌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1-12절)
그분은 죽음의 순간에도 이와 같은 기쁨을 체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자들에게도 같은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누렸던 그 기쁨을 제자들도 누리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선생님이 걸으셨던 그 길을 쫓아 걷는다면 말입니다(12:24-26). 그리고 하나 더, 제자들은 서로에게 헌신하고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그 기쁨을 더욱 성숙하게 하고 충만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사랑은 이스라엘의 ‘쉐마’(신 6:4-5), 즉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사랑과 헌신 속에 하나의 전제로 포함되어있으며, 예수님께서도 한 부자 청년을 향해서 선언한 바 있기도 한 것입니다(막 12:29-31, 참고. 레 19:18). 이를 뒤집어 말한다면, 서로를 향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할 것입니다. <요한 일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11-12, 20-21).
여기서 “서로를 향한 사랑”을 수치화 하거나, 계량화(計量化)하고 싶어 하는 제자들을 염두에 두셨음인지,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즉 서로를 향한 헌신과 사랑은 죽음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표준을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표준이 옛 계명에 대하여 “새 계명”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참고. 12:34-35).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3-15절)
동서고금을 통해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행위를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위로 칭송해 왔습니다. 혹자는 ‘요한’ 화자가 친구에 관한 이와 같은 전통적인 사고를 예수님의 계명과 연계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구절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친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성경>의 다른 곳을 기억나게 해주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로 부르고 있으며(사 41:8; 대하 20:7), ‘모세’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출 33:11).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나자로’를 “우리 친구”로 부른 바 있습니다(11:11). 이제 바야흐로 그분의 사도들이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순간이 왔습니다! 종은 주인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며, 친구라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그분의 친구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다락방 강론을 통해서 사도들은 하나님의 깊은 속생각까지 다 들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나 ‘아브라함’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특권은 그들이 지닌 어떤 자질(資質)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6절)
그리고 그 선택에는 반드시 목적이 따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열매 맺는 것”이었습니다. 선택과 목적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레위인을 여호와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안수하게 한 후에”(민 8: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민 27:18);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행 13:47);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사도들이 맺게 될 열매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반복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17절)
단락은 이제 그 시작했던 곳으로 되돌아온 셈입니다. 포도나무 비유의 적절한 결론이라 하겠습니다. 결국 주님의 최대 관심사는 그분의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친구들을 향한 일관된 명령이었습니다.
2. 세상과 교회(15:18-16:4a)
제자들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교회를 향한 세상의 미움이기도 합니다. 즉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므로 그들끼리 더욱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세상이 교회를 미워하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8-19절)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미움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불가분 첫 번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긴 합니다만,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계 때문입니다. 즉 세상은 제자들이 세상에 속해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다른 세상으로부터 왔으며, 다른 세상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 무슨 칭찬이나 격려를 받기를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암시가 깔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20절)
제자들은 이 말씀을 처음 듣는 것은 아닙니다(참고. 13:16). 선생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세상이 어찌 제자들의 말을 들으려 하겠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와는 정 반대되는 말씀도 하신 적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선생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는 약속이 그것입니다(참고. 14:12). 그러나 제자들이 선생보다 더 큰 일을 성취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 바 있습니다(해당 구절 참고). 결국 20절이 시사하는 바는, 교회의 선교 사역에 대한 세상의 반응에 관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지난 날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수행하실 때 겪었던 것과 같은 경험을 겪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21절)
여기서 “이 모든 일”은 18-20절 사이에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서, 세상이 교회를 미워하는 이유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 때문이며, 더 나아가 세상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추가로 더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무지(無知)에 관해서는 이어지는 세 절(22-24절)에서 보다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22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22-24절)
세상의 무지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은, 그것이 그 자체로서 용서받을 수 있는 사항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조점은 세상은 이제 더 이상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예수님을 거부했기 때문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그분을 거절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으므로 하나님을 본 것인데, 세상은 하나님도 아들도 모두 거절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상의 반응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25절)
세상의 “이유 없는 미움”은 <시편>에서 인용한 것인데(35:19; 69:4), 특히 <시편> 69:4는 <신약>에서 예수님의 수난(受難)과 관련해서 수시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단순히 율법이라 말하지 않고, “그들의 율법”이라 칭하고 있는 점이 특기할 만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유대’인들과 대화 중에는 “너희들의 율법”으로 칭하신 바 있기도 합니다(참고. 8:17; 10:34). 율법을 이런 식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으로 차별화 하려는 의도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보다는 ‘유대’인들이 그 율법의 정죄 아래 놓여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참고. 5:39, 45-47). 하나님을 거부했으므로, 이는 오직 그들에게만 주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계시인 율법을 거부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이 너무나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이라는 것이지요.
아래 이어지는 두 구절은 일견 문장의 흐름을 끊는 일탈로 보입니다. 다시 성령님에 관한 언급으로서,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왜 여기서 다시 성령님에 관한 언급이 필요한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26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26-27절)
굳이 이 단락의 주제인 “세상과 교회”와 연결시켜보자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증거와 관련해서 성령님의 사역을 언급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에 관한 두 번째 언급(14:26)에서 그분의 사역을 “교사” 즉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는” 것으로 소개했다면, 이번에는 “증인”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26절에서 성령님에 관한 시적인 유사반복을 볼 수 있는데, 전반 절에서는 성령님의 기원(즉 하나님께서 보낸 자)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후반 절에서는 인류를 향한 성령님의 사역(즉 증인)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성령님의 기원에 관한 언급과 관련해서, 고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일부 교부들이 이해했던 바처럼, 소위 “성령 발출설”(또는 유출설)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성령 발출설”이라 함은 마치 해로부터 햇빛이 흘러나오듯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주장으로서, 다분히 영지주의(靈知主義)적 사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강조점은 성령님도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낸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후반 절에서 보혜사를 다시 한 번 “진리의 성령”으로 부르고 있는데(이 호칭은 14:17에서도 등장한 바 있음), 강조점은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그분의 사역에 있습니다. 즉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으로서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증인으로서 성령님의 사역을 말할 때,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독자적인 사역이 아니라 사도들과 함께,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사역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님은 사도들과 별개로 혼자서 증인의 사역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모든 것들을 보고, 체험했던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서 그 사역을 수행해 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능력도 공동체 안에서 사도들의 선포를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의 선포를 통해서 듣는 이들이 반응하고 순응하며 회개에 이르도록 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성령님의 감동과 조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강론은 누가 들어도 우울하고 무시무시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미리 알고 사전에 준비와 각오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6:1)
여기서 “이것”은 직전 단락(15:18-27)의 내용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는 목적은 사도들로 하여금 실족하여 믿음에서 떠나거나,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참고. 6:61; 요일 2:10; 막 14:27).
이제 곧 사도들에게 닥칠 일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2절)
출교라 함은 공동체로부터 추방을 의미하는 바,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일상적인 전통이었습니다. 복음서 내에서도 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데,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에 대한 공회의 처분이 그것입니다(참고. 9:22). 이 구절의 배경과 관련해서 두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둘 수 있겠는데, 우선 일차적으로 “설화 세계”의 배경으로서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화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당시 기독공동체가 ‘유대’ 사회로부터 받고 있었을 핍박에 대해서 연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출교와 같은 공동체로부터의 배척과 핍박에 관해서는 예수님께서 이들 일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산상수훈 등과 같은 강론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참고. 눅 6:22).
사실 이 구절에서 서론적 역할을 하는 절은, “때가 이르면”인데 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과 마침과 관련해서 이거나(참고. 2:4; 7:30; 8:20; 12:23, 27; 13:1; 17:1), 또는 종말의 때와 관련해서 (참고. 4:21, 23; 5:25; 12:31-32) 수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사도들의 운명과 관련한 언급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교도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대한 당시 ‘유대’ 사회의 인식은 지극히 정당하고 정의로운 일로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민수기>에는 제사장 ‘비느하스’가 동거하는 이스라엘 남자와 이방인 ‘모압’ 여인을 죽이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민 25:13). ‘유대’ 랍비 문헌은 비느하스’의 행위를 두고 이스라엘을 위한 대속적 행위로 평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들의 피를 하나님 앞에 뿌린 행위를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린 행동과 동일한 것으로 규정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행동으로 규정하고 동참한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참고. 행 7).
그 같은 행동은 말할 것도 없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무지 뿐만 아니라,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한 번 그동안의 강론(15:18-25)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3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4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3-4절)
결국 사도들이 겪게 될 환란은 웅변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믿음 때문임을 증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3. 환란과 기쁨(16:4b-33)
세 번째 단락은 그 내용이나 분위기에 있어 14장과 아주 유사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승천과 다시 오시는 것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단락의 시작은 16:5가 아니라 4절 후반부터입니다. 굳이 4절을 둘로 나누어 두 단락의 마지막과 시작으로 삼는 타당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것”(또는 “이 말”)이 회고(回顧)적인지, 아니면 예고(豫告)적인 것인가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16:1) 문장의 시제는 완료형으로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16:1-4b의 내용은 15장의 내용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내가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 한 것은”(16:4b)에서 “이 말”은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것, 즉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예고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4절에서 “이 말”이 두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두 문장에서 시제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4절은 전체적으로 전후 단락을 연결해주는 고리의 기능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강론에서 드러나는 분위기는 위기상황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질책성 질문이 이 같은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5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5-6절)
제자들의 침묵을 나무라고 있는 모습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왜 아무도 묻지를 않지?” 하지만 이 장면은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미 여러 차례 질문을 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베드로’나 ‘도마’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가르쳐 달라고 떼를 쓴 바도 있습니다(참고. 13:36; 14:5). 그리고 그 때마다 예수님은 속 시원한 대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선문답식의 강론을 이어갔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같은 이유 때문에 5절의 질책은 오히려 비합리적으로 들립니다.
이 같은 모순에 대해서 학자들은 다양한 견해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편집설에 입각한 본문의 위치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혹자는 15-16장 전체가 이곳이 아니라 13:30에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일견 내용 전개가 일관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좀 더 과격한 주장은 13-17장 전체를 다음 순서로 재편집해야 한다고 합니다: 17장, 13:31-35, 15-16장, 13:36-38, 14장. 하지만 이들 주장 또한 여러 문제점을 노정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일반적인 지지를 얻고 있지도 않습니다. 두 번째 견해는 ‘베드로’나 ‘도마’의 이전 질문들과 이곳 예수님의 질책성 질문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그분의 목적지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듣고 숙지하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견해 또한 제자들의 두려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사전에 모든 사실을 다 들어 알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겠지요. 세 번째 설명은 다시 편집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즉 다락방 강론은 한 편의 연속적인 설교가 아니라 여러 장소 여러 시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다락방 강론의 상황 속에 편집하여 삽입해 넣은 것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일관성이나 통일성이 결여되거나, 또는 내용의 반복도 있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베드로’나 ‘도마’의 오해 성 질문도 편집자의 의도적인 삽입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4장이 본래의 전승에 속한 것이라면, 15-17장은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아무튼 5절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즉 제자들은 지금 너무나 큰 두려움과 상실감으로 인하여 선생님의 강의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묵상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진단(6절)이 그 점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 마음속에 근심이 가득하다는 진단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단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위기가 있으니 위로가 있어야 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보혜사에 관한 말씀으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7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7-11절)
보혜사에 관한 언급으로서는 네 번째이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참고. 14:15-17, 26, 15:26). 그리고 지난 세 번의 강론에서 당연한 것으로 인식은 되고 있었으나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떠나기 전에는 보혜사가 올 수 없다는 언급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마치 힘주어 강조라도 하듯 세 번에 걸쳐 반복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7절). 마치 예수님과 성령님이 함께 사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마저 들게 합니다. 실제 그런 식으로 이해하려는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시각도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주도적인 사역을 수행하는 한에 있어서는 제자들이 제대로 성숙할 수가 없을 것이므로, 그분께서 떠나시고 보혜사가 와야 했을 것이라는 시각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제자들을 성숙하게 하는 일에 있어서는 예수님보다 보혜사가 더 우수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와 같은 해석들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같은 사역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사이도 아니고,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더 우월한 사이도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셔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들림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일이 이루어진 후에야, 그분의 사역 즉 구세주(救世主)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질 것이며, 그 일은 보혜사의 사역을 통해서 지속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14:17; 15:26)으로서, 세상을 향해서 예수님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지를 계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온전히 성취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보혜사도 그 의미를 완전하게 계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7절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복음서 내의 다른 구절들과 함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참고. 7:39; 12:23, 27-28, 31-32; 13:31-32; 20:22). 더 나아가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도 있는데, <구약>의 여러 곳에서 종말의 때나 새롭게 하는 일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영”을 언급하고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참고. 욜 2:28-32; 사 32:14-18; 11:1-10; 42:1-4; 44:1-5; 렘 31:31-34; 겔 11:17-20; 36:24-27; 37:1-14). 결국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다락방 강론에서 수차례 등장하고 있는 보혜사에 대한 언급은 포괄적이거나 일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에 중심을 둔 <요한복음>의 종말론 강의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보혜사의 사역에 관한 그동안의 강론이 주로 제자들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이번에는 세상을 향한 사역에 방점(傍點)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했으며,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는 그 세상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세상을 향한 보혜사의 사역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언급하십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8절)
그리고 이어지는 9-11절에서, 각각의 죄목(罪目) 즉 죄와, 의와, 그리고 심판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형식 내지는 구조와 관련해서 다양한 해석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이 단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전체적인 맥락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단락의 핵심은 하나님의 법정에 세상을 피고인으로 세우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미 자신의 잣대로 예수님에게 두 가지 죄목을 부과한 바 있습니다. 로마의 ‘시이저’에 대해서는 반역죄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신성모독 죄입니다. 당연히 그는 불의한 자요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네 복음서에서 상세하게 그려주고 있는 바는, 세상은 자신의 법정에서 예수님이 아니라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재판을 유심히 살펴 본 자라면 누구라도 예수님은 무죄(無罪)하며, 무죄한 자를 유죄(有罪)로 선고한 세상은 자신이 내린 행동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보혜사의 역할은 바로 이 같은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면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유대’ 공회와 ‘빌라도’의 재판을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하나님의 법정에 세우는 일입니다. 보혜사는 복음에 나타난 제자들의 증언과, 교회에 나타난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진정한 죄(罪)와, 의(義)와 그리고 심판(審判)의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낼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9절)
이제 그 첫 항목은 “죄”에 대해서입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죄는 단연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참고. 1:11; 3:19; 15:22). 단순히 믿지 않는 것을 죄라 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불신(不信)이 단순히 불신이나 무지(無知)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거부(拒否)하는 것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무지 자체를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여기서 강조점은 세상의 배척과 거부에 대해서입니다. <로마서>도 소극적인 태만 죄가 어떻게 적극적인 범죄 행위로 나아가고 있는지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참고. 롬 1:18-32). 즉 관성의 법칙이 영적인 영역에서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공회와 ‘빌라도’의 재판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몰랐고, 거부했으며, 그리고 그를 잡아 죽였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사랑하려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사랑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선고 내용은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복합적인 것입니다.
두 번째 심판은 의에 관해서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주님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제자들이 그분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점이 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십자가의 형벌”은 당시 불의(不義)한 죄인을 처단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와 같은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불의한 죄인임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은 세상의 그와 같은 판단을 완전히 뒤집는 하나님의 선고로서,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오히려 무죄하며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영광의 주(主)로 앉아계신 것입니다(참고. 12:23; 13:31-32; 17:1; 딤전 3:16).
여기에 더하여,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발언은 다소 놀랍습니다. 이곳에서 보혜사의 사역이 세상을 향한 것이라고 밝혔으므로, 당연히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후 두 절(9, 11절)에서 삼인칭 “그들” 즉 세상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독 이곳에서 “너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십자가 사건이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는 선언 같습니다. 그분은 이제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며,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영광 가운데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이제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일을 증언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증언을 거부하고 예수를 없애버렸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16:20). 그 기쁨은 저주받은 자의 기쁨이 될 것이지만, 제자들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제자들의 기쁨을 공유하는 자들은 택함을 받은 자들일 것입니다.
세 번째로 심판에 대해서라 함은 당연히 세상을 대상으로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고 있으며, 보혜사가 복음을 통해서 세상의 임금을 심판할 것입니다. 세상 임금에 대한 심판과 관련해서 예수께서는 이미 한 차례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12:31). 이 역시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사실과 병행해서 언급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 만왕(萬王)의 왕으로 앉으시는 순간 세상의 왕은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번째 천사의 나팔소리는 이미 성취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 11:15). 그리스도가 만유의 왕으로 통치하게 된다는 말은 세상이 심판을 받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의 임금에게 복종하여 그의 수족과 수단이 되어, 예수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잡아 죽이는 일에 동참했던 그 세상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해보자면, 성령님께서는 복음에 드러난 계시를 통해서 죄와 의와 심판을 조명하고 밝히 드러낼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과연 선생님의 강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파악했을까? 아직도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셨음인지 주님은 다시 한 번 성령님을 언급합니다. 이제 다섯 번째입니다. 마지막이자 절정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12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12-15절)
사역의 대상은 세상이 아닌 제자, 즉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전의 강의들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진리의 성령”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나,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한다”는 점 등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를 것이 많다”든지, “장래 일을 알리실 것이라”는 등의 언급은 두 번째 강론과는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내용들을 성령님께서 추가로 계시해 줄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에 관한 두 번째 강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그리고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15하).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두 강론은 분명 긴장 관계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긴장은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견 모순되거나 긴장 관계에 있는 구절들은 <성경>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외견상의 모순이나 긴장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화자의 의도적인 편집의 결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상충되어 보이는 구절들은 각기 서로 다른 독자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거나, 또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계시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거나 등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에 관한 두 번째와 다섯 번째 강론이 보여주고 있는 긴장과 모순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말씀하신 내용들은 거의 대부분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관한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당연히 제자들의 능력 밖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일이 실제 일어나서 그것을 체험할 때만이, 비로소 지금 듣고 있는 강의의 의미나 충격을 제대로 맛보고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까지 예수님께서 다 이야기해 줄 수는 없을 것이며, 그런 점에서 그것은 미래의 계시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관해서, 그리고 제자들이 무엇을 준비하고 기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모두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분의 계시는 다 끝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 학자는 이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알려주실 장래 일은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이해다.”
새로운 차원의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진리의 성령”께서 담당하실 것입니다(13절). 즉 그분께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인데, 여기서 모든 진리가 의미하는 바가 곧 그것입니다. 즉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아직 말하지 않고 남아있는 진리를 더 일러준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핵심을 깨닫도록 해 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성령님의 계시는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역시 듣게 될 것인 바, 누구로부터 듣고 받게 될 것인지가 이어지는 구절에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14-15절). 계시의 내용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보여주신바 그것이며, 예수님으로부터 듣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분 스스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며,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바 그것을 나누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의 연합과 일치가 강조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는데, 이점은 복음서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예: 3:32-35; 7:16-18; 8:26-29, 42-43; 12:47-50). 이곳에서의 강조점은 성령 하나님의 연합과 일치되는 사역일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은 그리스도, 즉 그분의 공생애와 죽음과 부활에 있을 것인데, 성령님의 계시 또한 동일한 것으로서, 이 계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15절).
성령님에 관한 다섯 번째의 강론이 끝나자(4절후-15절), 예수님은 다시 사도들의 슬픔과 근심에 관한 관심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16-24절). 이렇게 볼 때, 성령님에 관한 언급(7-15절)은 문맥 상 일탈로 간주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내용 상 전혀 무리는 없다 하겠습니다.
16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 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16-19절)
예수님께서 자신이 “조금 있으면” 떠나시겠다고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 한 번, 그리고 사도들에게도 한 번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참고. 7:33; 13:33). 이번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조금 있으면 “나를 (다시) 보리라”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는 점입니다(16절).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사도들은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있으며, 예수님의 대답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17-18절). 예수님 역시 그들의 당혹감과 두려움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모습입니다(19절). 그분께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20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0-24절)
이야기의 내용은 주로 그분께서 떠나고 난 이후의 일에 관한 것입니다. 두 가지 상반되는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는 제자들에게 닥칠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이 보여줄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슬퍼하고 애곡할 것”이며, 세상은 반대로 “기뻐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놓고 보이는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이와 같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인데, 슬픔의 기간은 그야말로 “잠시 후”가 될 것입니다.
고통이 환희로 변하게 될 것임을 보다 실감나게 하기 위함인지 예수님은 짧은 비유를 덧붙이십니다. 산고(産苦)의 고통과 출산의 환희(歡喜)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이 겪게 될 변화가 곧 그와 같을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앞에서 “너희가 다시 나를 보리라”(16절)는 말씀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로 인하여 제자들은 분명 새로운 차원의 영적 수준에 이르게 될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직접 대면하게 될 것이라는 강한 암시가 드러나는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슬픔 대신 환희를 맛보게 될 것인데, 이는 그들을 떠나셨던 주님께서 그들을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아무도 이들의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인데, 부활은 그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20:22).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이들은 이제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주님의 임재와 동행을 체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 이후 그들의 삶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동행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부활이 가져다 줄 새 시대의 환희에 관해서 주님은 두 가지로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새로운 지식(이해)”과 관련해서입니다. 즉 사도들은 이제 더 이상 혼란 가운데서 주님께서 지금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들(16-18절)에 대해서 묻지 않을 것입니다. 물을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부활이 이 변화의 중심에 있을 것이며, 성령님께서 “모든 진리”를 깨우쳐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환희는 “능력의 기도”와 관련해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이며, 하나님은 이를 들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겪게 될 슬픔과 환희에 대한 강론은 이로써 족할 듯합니다만, 그분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더 이해할 것이 남아있었을까요? 어쩌면 그동안 비유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셨음일까요?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25절)
이 말씀에 따르면, 그동안에는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때가 이르면” 평범한 일상 언어로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실 것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두 강론 사이에 무슨 큰 차이라도 있을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것”(정확하게는 “이것들”)이라 함은 예수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들로서, 문맥 상 직전의 단락을 지칭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수수께끼와도 같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절)의 말씀이나, 제자들의 “슬픔과 애곡”에 관한 말씀과 산고에 관한 “비유”(20-21절)가 그것입니다. 물론 이 단락을 예수님의 다락방 강론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결코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비유나 평범한 교훈이나 상관없이 난해하고도 애매모호한 은유로 남아있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화자가 그의 책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하나의 “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야말로 그분이 하나님이 되신다는 “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만,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신비하고 난해한 초자연적인 현상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제자들이 지금 듣고 있는 강의와, 그날 즉 “때가 이르면” 듣게 될 강론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예수님께서 한 차례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 그 차이란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이해의 차이에 있음을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가능하게 될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이해와 기도의 능력과 효력에 관한 언급이었습니다(참고. 23-24절).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계십니다.
26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26-27절)
다만 이곳에서의 강조점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제는 예수님과 지금 누리고 있는 교제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26절). 이 말씀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로서의 예수님의 역할(롬 8:34; 히 7:25; 요일 2:1)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여기서의 강조점은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담대함에 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따라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설득시켜 그분으로 하여금 제자들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도록 설득하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진노를 돌리시도록 간청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친히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27절).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으므로(15:13-15), 이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친구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가 아니라 평범하고 직설적으로 언어로 말씀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다소 무색하게 들릴 정도로 다소 거친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히려 애매모호하게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28절)
하지만 이 부분은 <요한복음>이 전해주는 기독론의 핵심이자 요약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이 구절을 26-27절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자면,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와 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제자들은 과연 이와 같은 예수님께서 평이(平易)한 언어로 말씀하시는 강론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을까요? 즉 새로운 차원의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그들의 반응을 통해서 볼 때, 이제 그 시간이 도래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흥분하고 있습니다.
29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30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29-30절)
그들이 이해한 바는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었습니다. 즉 그분은 사람과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 뿐만 아니라, 심판과 구원과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모든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분의 지식을 시험하거나 질문을 유도하도록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반응은 제자들의 이와 같은 확신에 차물을 끼얹겠다는 듯한 모습입니다.
31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31-32절)
제자들은 이제야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그 때가 이른” 줄 알았는데, 그 때가 이르기 전에 가장 어둡고 혹독한 시기를 먼저 통과해야 하며, 이를 통해서 그들의 연약한 믿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 13:7). 하지만 예수님의 친구들이 그를 버린다 할지라도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이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 하셨느니라”(요 8:29). 예수님의 질문과 이어지는 예고를 통해서,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대조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그들을 향한 정죄나 나무람이 아니라 격려와 위로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
그들이 넘어지겠으나 곧바로 회복하여 일어날 것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근거는 “너희에게 이르는 것(들)”, 즉 그동안 강론을 통해서 일관되게 말씀하신 내용들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미 제자들에게 “기쁨”의 확신을 주신 바 있고(22, 24절), “평안”과 “기쁨”은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핵심 요소입니다. 그것은 미래에 누리게 될 그 무엇이 아니라, 현재 환난의 시기에서도 누릴 수 있는 그분의 선물인 것입니다! “평안”과 “기쁨”이 지금 여기서 제자들이 누릴 수 있는 몫이라면, “환난”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알리는 전주곡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은 승리자가 외치는 최후의 승리의 선포로서,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변함없는 사랑으로 “환난”을 이겨냄으로써, “세상의 임금”(12:31)과 세상의 악을 정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분 안에서 그분이 이루신 승리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포도나무와 농부
우리 부부가 살고 있는 전원주택 단지는 주변이 온통 포도밭으로 둘러 쌓여있습니다. 그리고 포도의 종류도 일반 노지 포도에서부터, 청포도, 그리고 거봉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이들 중에서 맛을 비교하자면 단연 씨 없는 거봉이 으뜸입니다. 특히 근처 교회의 한 장로님이 재배하는 거봉은 전국 유명 백화점에서 판매될 정도로 맛과 품질이 뛰어납니다. 이 포도는 재배자인 장로님의 이름을 따서, “김진수 거봉”으로 불리는데, 국내에서 유명 브랜드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젊은 영농 후계자들이 이분의 거봉 재배법을 배우기 위해서 원근 각처에서 모여들고 있습니다. 아마도 무슨 각별한 비법이 있나 봅니다.
그 비법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지 못하나, 이분이 거봉을 수확하기 까지 기울이는 노력이나 정성만큼은 늘 보아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분의 거봉을 맛보기 전까지는 포도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포도의 독특한 신맛도 그렇고, 껍질과 씨 가려내는 일이 귀찮았기 때문입니다(얄궂게도 포도는 껍질과 씨앗에 좋은 영양소가 다 들어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분의 거봉은 씨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맛도 아주 달고 좋습니다. 알이 하도 커서 몇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여름이면 이분의 포도를 수 킬로 씩 사먹기도 하고, 주변 친지들에게 선물로 사보내기도 합니다. 이 포도를 먹어본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맛있다고 칭찬 일색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택단지 입구 바로 곁에 노지 포도밭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민 중 어느 누구도 이 포도를 사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맛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포도밭 주인이 수시로 농약을 뿌려대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거봉과 노지 포도는 분명 종자부터 달라 맛이 다를 것이라고 기대는 합니다만, 맛의 차이가 단지 종자가 다르기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두 재배자가 기울이는 노력이나 정성도 큰 몫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노지 포도밭 주인이 밭에서 일하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한 번 씩 와서는 농약 뿌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김진수 거봉”이라 해도, 이처럼 주인을 잘못 만나면 필경은 맛없는 노지 포도로 일생을 마감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농부의 일. 묘목이 “김진수 거봉”이라 해서, 그 열매도 무조건 “김진수 거봉”이 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김진수 거봉”이 다른 거봉들과 맛을 달리하는 것은 농부 김진수 장로님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네 잠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습관이나 체질이나 운명을 결정짓는 요인을 놓고 한 때 설왕설래 논란이 많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극단적인 운명론자라면 유전적 요인을 더 중요시 할 것이고, 반대로 극단적인 진화론자라면 환경적 요인을 앞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결국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 잠언이 설파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구슬은 처음부터 이미 구슬이겠습니다만, 이것이 보배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암시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ay)는 단순한 거봉이 “김진수 거봉”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좋은 밭이 필요합니다. 밭은 뿌리가 썩지 않도록 배수 시설을 잘 해주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약간 경사진 곳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포도 순은 옆으로 자라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나무마다 적어도 3미터 간격으로 띄워 심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연한 순들이 아래로 쳐지지 않도록 얼기설기 그물 받침대를 만들어, 순들을 치켜세워 그 위에 걸쳐놓아야 합니다.
또한 나무가 미처 성숙하기도 전에 열매를 맺는 것은 좋지 않으므로, 적어도 처음 삼년은 과감하게 가지들을 잘라주어 성장을 더디게 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삼 년이 지나고 나무가 성숙하여 열매를 맺을 시기가 오면, 12-1월 사이에 가지치기를 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아있는 가지들이 더욱 풍성하게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때 잘려나가는 가지는 당연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재배 과정을 두 개의 단어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 “제거하다”(ai[rw, 아이로); (2) “깨끗하게 하다”(kaqaivrw, 카다이로)(참고. 2절). 일견 두 단어는 의미가 서로 다른 듯하지만, 실은 같은 ‘헬라’어 어근(語根)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포도재배와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계신 것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단어 “제거하다”는 문자 그대로 잘라내는 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은 더 풍성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들어 올리다” 또는 “치켜세우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농부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즉 포도 열매는 속성 상, 가지에 매달려 아래로 향하고 있어야 하는데, 만약 가지가 땅을 향하여 아래로 쳐져 있다면, 경험 많은 농부라면 그 가지를 무조건 잘라낼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위를 향하도록 지지대 등으로 받쳐주어서 어린 줄기가 햇빛이나 공기와 접촉할 수 있도록 해줄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종 병충해의 피해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가지들을 올려주고, 세워주어도 여전히 말라 죽는 가지들이 생겨나게 마련일 것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두 번째 단어, “깨끗하게 하다”가 그 답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영어 단어 “카타르시스”(catharsis)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농부의 행위를 쉽게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카타르시스”는 말 그대로 일종의 정화(淨化) 내지는 배설(排泄)을 의미합니다. 문학에서는 비극을 통해서 정신이나 정서를 정화하고 상쾌하게 해주는 것을 말하며, 의학에서는 하제(下劑)에 의한 배변 작용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정신의학에서도 억압된 정서를 배출시키는 정신요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포도나무의 성장에 해로운 일체의 장애요인들을 제거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넓게 보면, “가지치기”(prunning)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을 포도나무 또는 포도밭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를 심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과연 어떤 품종이었을까? 거봉이었을까, 아니면 노지 포도였을까? <이사야>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1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사 5:1-2상)
포도 종자는 말할 것도 없고, 포도밭도 최고등급이었다고 말합니다. 김진수 장로님이 어찌 노지 포도를 키우겠습니까! 당연히 최상급의 포도주가 나와야 할 것이며, 하나님도 그렇게 기대했다고 말합니다. 오죽했으면 술틀까지 미리 다 만들어놓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요행수를 바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극상품” 거봉 종자를, “심히 기름진” 밭에 심었으니, 그냥 두어도 극상품의 포도주가 될 것으로 기대하며 무위도식(無爲徒食), 공생도사(空生徒死)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느 농부처럼 “망대를 세워”, 늘어지고 처진 포도 순들을 위로 세워 올리는 등 여름 내내 해야 할 일은 다 하며 기다렸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끊임없이 일으켜 세웠습니다. 자기 백성을 격려하고, 고무시켜, 자신과 더 밀접한 관계 속으로 이끌어 올리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까지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그 유명한 노래, “You raise me up”을 떠올려보면 이 단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정성과 열심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히 1:1).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사야>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 5:2하). 헛농사가 되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호세아’도, ‘에스겔’도, 그리고 하나님마저도 모두 실패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모든 선지자들은 포도나무나 포도밭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하나님의 실패한 농사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4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7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4, 7)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렘 2:21)
네 피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겨진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겔 19:10)
최상 등급의 거봉 종자를 심었는데도, 열매는 노지 포도가 되어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나무의 잘못이겠습니까! 농부가 농사를 잘못지은 것은 아닐까요? 시인도 본인의 말에 동의하고 있는 듯합니다.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9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10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시 80:8-10)
시인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포도밭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고, 뿌리는 그 좋은 땅에 깊이 박혀있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지 맙시다. 가지는 엄청난 “백향목” 같았습니다! 우리가 늘 보는 비비 꼬이고 왜소한 가지가 아니라, 거대한 백향목 말입니다. 포도나무가 백향목 같았다니요. 아무리 수사(修辭)라 해도 포도나무가 백향목 같다니요! 그런데 어찌하여 열매는 돌연변이가 태어났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 잘못입니까?
참 포도나무. 예수님은 지금 어느 누구의 잘못을 따지려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내가 참 포도나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덧붙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실패한 농사가 하나님 잘못은 아님을 암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진정한 장인(匠人)은 거봉을 거봉으로 만들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노지 포도를 거봉으로 만드는 자가 아닐까! 탁월한 교사는 우등생을 받아 우등생으로 졸업시키는 자가 아니라, 열등생을 우등생으로 키워내는 자가 아닐까! 꼴지를 받아 일등으로 만들어내는 교사가 진정 탁월한 교사가 아닐까!
이와 관련해서 ‘이사야’는 아주 흥미로운 노래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그는 지금 이스라엘과 관련해서 <시편>의 시인과는 정 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누구입니까? 많은 학자들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며,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모세’도 이점에 동의한 바 있습니다: “야훼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적으니라”(신 7:7). 선지자 ‘에스겔’은 ‘모세’보다 더욱 냉소적입니다:
2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3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4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5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하지 아니하였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겔 15:2-5)
바로 이점이 참 이스라엘의 모습이자 모양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이 노래를 자신에게 적용한다 해서, 전혀 이상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즉 “내가 참 포도나무다”라고 하시는 것은 곧 “내가 참 이스라엘”이다는 선언과 결국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와 같은 포도나무, 즉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며,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포도나무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7:17:5; 막 9:7; 눅 9:35).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며,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노지 포도나무를 이 농부는 왜 좋아하는 것일까? 결과 때문입니다. 그 나무가 거봉을 맺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노지 종자(種子)가 거봉을 맺을 수 있다면, 반대로 거봉 종자가 노지 열매로 일생을 마감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두 경우 모두 인생 역전(逆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문학에서 전자(前者)를 비극(悲劇)으로, 후자(後者)를 희극(喜劇)이라 칭합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극적 반전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이는 정녕 누구의 책임일까? 전적으로 농부나 작가의 책임일까?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예수님의 관심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곳 본문에서는 말입니다. 다만 그분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착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스스로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경고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스스로를 높이지도 말라고 경고하고 있을 뿐입니다. 스스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9:41).
이스라엘도, 교회도 포도나무는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가지일 뿐입니다. 진정한 포도나무, 즉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자신 밖에는 없음을 다시 한 번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 역전의 책임 소재나, 그에 따른 교훈은 이차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가지와 열매
귀신이 들려 눈이 멀고 말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자,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귀신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고 수근댑니다(참고. 마 12:22-24).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3-35)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두 가지 중요한 경험 법칙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이들 법칙은 너무나 지당해서, 마치 공기나 햇빛을 대하듯 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는 “인과율”(因果律)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선언이 그것입니다. 예컨대,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인과율과 함께 또 하나 아주 강력한 경험의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흔히 동일설(同一設)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제반 과학법칙이 동일하고 일관되게 작동하고 있다는 발견입니다. 그것은 이 우주가 일관되게 작동하고 있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즉 인류가 오래 역사를 통해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동일한 원인은 항상 동일한 결과를 가져 오더라”는 것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를 들자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은 그 유명한 ‘멘델’(Memdel)의 유전법칙에 대한 한국판 선언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과학 분야에서는 이를 일반화하고, 보편화하여,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온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파스퇴르’(Pasteur)는 그 유명한 “자라목 실험”을 통해서 이를 처음으로 규명한 바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생명의 “자연 발생설”(自然發生設)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모양입니다.
인과율과 동일설은 우리 인류의 오랜 경험에서 축적된 것으로서, 하도 강력해서 반박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 뿐만 아니라, 실험과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극단적인 회의론자(懷疑論者)나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가 아니라면, 이 두 법칙에 이의(異意)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이나, 또는 자연과학을 막론하고, 학문 연구의 주된 동기나 목적도 드러난 현상이나 사건의 원인을 밝히는데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본능적으로 동일설을 대전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해야 할 것입니다. 한 원인이 시도 때도 없이 그 결과를 다르게 드러낸다면 누가 제대로 된 일관성 있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왜 우주와 자연은 이처럼 일관될까? 이것은 일종의 기원(起源)에 관한 질문입니다. 따라서 <성경> 외에는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곳이 없어 보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그래서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참고. 히 1:3; 벧후 4:4). 이 두 선언에 따르면, 우주와 자연이 일관 된 것은 하나님이 일관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가지. 그런 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불가사의(不可思議) 그 자체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인과율도 동일설도 모두 틀렸음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봉 종자에서 노지 포도가 나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와 버렸다는 말입니다. 속 썩이는 자식을 두고 흔히 부모들이 한탄하며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저런 자식이 나한테서 나왔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다는 사실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참고. 사 5:4, 7; 렘 2:21).
아버지의 자랑이요, 기쁨이 되어야 할 아들이 오히려 수치가 되고 후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생명에서 생명이 나와야 하는데, 생명에서 죽음의 열매가 나와 버렸습니다. 빛에서 어둠이 나왔습니다. 어릴 적에 천재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던 아이가 점차 평범한 아이로 자라가는 것을 자주 봅니다. ‘삼손’도 그와 같았습니다. 특별하게 구별된 아이로 태어났는데, 혈기(血氣)와 주색잡기(酒色雜技)로 청년 시절을 보내다가 허무한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왕자로 태어나 거지로 인생을 마감한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출생이 거룩한 인생을 보장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축소판입니다. <출애굽>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교회를 얼마나 힘들게 개척하셨는지 우리는 압니다. 이스라엘은 그저 공원 산책 나오듯이 한가하고 여유롭게 ‘이집트’를 빠져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밤중에 급하게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과 기사(奇事)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손에서 탈취(奪取)해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힘들게 그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힘든 교회개척이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난산(難産) 끝에 사산(死産)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점이 불가사의하다는 것입니다. 인과율이나 동일설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결코 그럴 리는 없습니다만, 왜 유독 이스라엘에게만 이들 법칙이 작동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일까? 왜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했을까? 여러 가지들 중에서 유독 이스라엘의 가지에만 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야살의 책>에서 노래하고 있는 바처럼(수 10:12-13), 태양이 그 운행을 잠시 멈추었기 때문일까? 처음에 좀 자라다가 말라 죽어버렸기 때문일까? 처음부터 가지가 부러져 있었기 때문일까? 싹수가 노랗다 싶어 농부가 아예 처음부터 꺾어버렸기 때문일까? 다시 한 번 이런 저런 원인들에 대해서 논의를 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원인보다는 오히려 처방에 더 방점(傍點)을 두고 계신 듯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그 처방이 무엇일까? 본문(4-10절) 사이에서 마치 폭죽 터지듯 무려 열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는 한 단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거하다”(mevnw, 메노). 즉 “남아있다”(remain; stay) 또는 “계속 머물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지금 처방만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도 동시에 진단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진단이란 이것입니다: “가지가 말라죽은 것은 나무에 붙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진단은 곧바로 처방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가지가 되려거든 나무에 계속 머물러 있어라.” 즉 “내 안에 거하라”는 처방이 그것입니다. 이는 “새롭게 들어오라”는 초청이 아닙니다. “문을 열고 받아들이라”는 초청이 아닙니다. 그냥 지금 있는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줄기에 붙어있는 가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3절).
외과(外科)적 수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제거수술이고, 다른 하나는 이식(移植)수술입니다. 전자(前者)는 환부(患部)를 도려내고 새 살이 솟아나도록 하는 방법이고, 후자(後者)의 경우는 건강한 새 살을 환부로 옮겨와서 접합을 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식물에도 이와 유사한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지치기”(pruning)와 “접붙이기”(grafting)의 원리가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원리를 이방인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각각 비유로 적용하고 있습니다(참고. 롬 11). 이 둘은 각기 이스라엘 교회와 신약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가지치기”로 잘라내고, 그 자리에 이방인을 “접붙이기”로 이식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정상적인 접붙이기가 아닙니다. 이방인 가지가 건강한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비정상적인 접붙이기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나무의 뿌리와 줄기가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이 나무는 “참 포도나무”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이들 가지들이 어디에서 왔건, 그 수가 얼마이건, 나무줄기에 붙어있는 한, 모두 동일한 열매를 맺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뿌리가 같고, 가지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인과율과 동일설에 따르자면,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열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했으니, “그리스도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요(5절). 열매를 맺기 위해서 무슨 피나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컨대, ‘노아’의 가족이 대홍수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특별한 일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홍수기간 내내 그저 배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 배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무슨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선택된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9절). 이 또한 애매모호(曖昧模糊)한가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0절). 어떤 계명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주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1절). 더 이상 분명할 수가 없는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하지만 우리는 계명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항상 처벌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 TV 드라마에서 이런 대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神)도 완전하지 않아. 왜냐하면 인간이 잘못하면 벌을 주기 때문이지.” 이처럼 신에 관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상은 비단 종교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인류의 보편적 생각 같기도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예수님도 처벌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들립니다:“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 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6절). 일견 잔혹하고 무시무시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약간 다른 각도에서 이 말씀을 이해하자면,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 경고라기보다는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무익한 가지들을 모아다가 불에 사르는 자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그런 식의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잘려나간 포도나무 가지를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집을 짓겠습니까! 울타리로 쓰겠습니까! 큰 불을 일으키는 재목으로 쓰겠습니까! 한 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성전(聖殿)에서 희생제물을 태우는데 필요한 땔감으로 나무를 가져와야 한다는 규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는 여기서 제외되었다고 합니다(W. Barclay). 땔감으로도 적당치 않다는 판단에서였겠지요. 포도나무의 편에서 보자면, 이 얼마나 큰 수치이자 모독입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존재로 취급을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무도 이들 가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여겨 태워 없애버린다는 것이지요. 나는 이것이 6절의 의미이자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식, 대학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교수, 군대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병사, 직장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직원, 교회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교인들이 있을 수 있다는 예언인 것이지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처지를 한심하게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늘어진 개 팔자라며 희희낙락(喜喜樂樂)합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직장이나 군대에서, 편하고 책임질 일 별로 없는 보직(補職)을 원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훈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이 말씀은 그림 하나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호수나 강가의 나루터에 묶여있던 배가 닻줄이 스르르 풀리면서 흘러내려가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대목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유념하라”입니다. 왜냐하면 정작 이 훈계가 필요한 당사자는 지금 자신이 흘러 떠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당시 ‘예루살렘’ 성벽의 처지가 이와 같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성벽이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아주 조금씩, 금이 가고, 그 새로 빗물이 스며들고, 벽은 갈라지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그 사이로 잡초가 자라고, 여우나 다람쥐와 같은 들짐승들이 드나들게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성(城) 안과 밖의 구별이 사라지게 된 것이지요.
주일 예배 참석도, 개인적인 묵상도, 기도도, 성도 간의 교제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어느 날 갑자기 이 모든 것들이 내 일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겪었던 것처럼, 내 영혼의 성벽도 그런 식으로 무너지고 와해(瓦解)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내 모습을 바라보니, 내 안에 잡초가 무성하고, 온갖 들짐승들이 뛰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탄 배는 돛이 풀려 항구를 멀리 떠나 바다 위에서 표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성벽을 다시 세우고 싶다는 의지도, 항구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욕구도, 이미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찾지도, 필요로 하지도, 기억도 하지도 않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열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의 열매”는 내가 이루어야 할 그 무슨 의무나 책임이라기보다는 나에게 그저 값없이 주어지는 보상이요, 유익(有益)인 것입니다! 내 존재를 의미 있게 해주는 보상이자 유익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유익을 말하는 것일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절).
충격적인 약속입니다! 누가 이 약속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무슨 자격으로 이처럼 엄청난 기도를 아뢸 수 있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의 체면이나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누울 자리 보아가며 누어야지요! 정말 그럴까? 정말 나는 무엇이든지 아뢰기 전에, 내 판단에 따라 들어주실 만 한 기도제목들만 골라서 아뢰어야 할까?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예의바른 길이 아닐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주님은 “열매”, 즉 “그리스도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하라는 명령이나, 그에 따른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열매가 주는 유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라면 누구나 누리게 될 결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처럼 담대하고, 무모하게, 그리고 뻔뻔하게, 겁도 없이, 원하는 것을 기도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처럼 뻔뻔하고, 무례하며, 건방지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내 편에서 보자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가 당신에게 영광이 되는 일을 왜 마다하시겠습니까!
본문의 핵심은 “열매를 맺어라”가 아닙니다. “내 안에 거하라”입니다. 열매는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는 이미 깨끗하여 졌느니라.” 나는 진정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3. 노예가 아닌 친구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이어 두 번째 왕으로 일찌감치 점지(點指)가 되어있었습니다. 한편 ‘다윗’은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와 선망을 한 몸에 받으며,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선지자 사무엘이 점지한 인물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왕족 혈통을 이어받아 왕이 될 인물이었고, 또 한 사람은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떠오르는 태양으로 그 명성을 얻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현재의 왕 ‘사울’에게 ‘다윗’은 눈에 가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왕에게 ‘다윗’은 아들의 왕위를 넘보는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나단’과 ‘다윗’은 숙명적으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나 부자(夫子)지간에도 나누어가질 수 없는 것이 권력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니 어느 쪽이든 상대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왕위를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상대가 죽지 않으면, 내 인생의 목적을 이룰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십 수 년에 걸쳐 그토록 집요하게 쫓아다닌 것도, 그의 아들 ‘요나단’이 왕위를 계승함에 있어 아무런 거침이 없도록 하려는 배려심도 깔려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요나단의 친구. 적어도 ‘요나단’이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자라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다윗’을 잡아 죽이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계획을 “친구”에게 미리 알려주어 그로 하여금 피하도록 했습니다. 아버지의 편에 서기보다는 친구의 편에 선 것입니다! 철없는 어린 시절 부모가 싫어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돌아다녔던 기억 한 두 개 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만, 이 두 사람은 지금 철없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어디까지 양보하고, 어디까지 희생해야 하는 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청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나단’의 결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진정 왕이 되기 싫었던 것일까? 친구가 자기보다 더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그에게 당시 왜 그랬느냐고 물어본다면 어떤 모습을 보일까? 뭐 새삼스럽게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조용히 미소만 지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저런 재어보고 따져보고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그의 결정은 이성적(理性的)이고 합리적(合理的)이기보다는 오히려 본능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가 내 친구이기 때문에 그랬다고 말하지 않을까? 필요할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며,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서로 친구하자며 아주 어린 시절에 무슨 도원결의(桃園結義)라도 맺은 것일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친구를 삼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겠습니다. 이성(異性) 간의 교제라면 또 몰라도 말입니다(두 사람은 동성애자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오늘부터 너는 나의 친구야”라든지, “나는 오늘 너를 나의 친구로 삼았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서로가 의기투합(意氣投合) 해야 할 것이며, 그 후에 오랜 세월에 걸쳐 친구가 되어가는 것이지요. 일방통행 식 선포나 선언으로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친구 삼기를 원하는 쪽은 무엇인가 필요가 있는 쪽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친구를 정치나 사업상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이 먼저 ‘다윗’을 향하여 이렇게 말할 하등 이유는 없습니다. ‘다윗’이 먼저 그렇게 했다면 모를까. 왜냐하면 굳이 갑(甲)과 을(乙)의 관계를 따지자면, ‘요나단’이 갑이요 ‘다윗’이 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아쉬운 쪽은 ‘다윗’이지 ‘요나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찌 되었건 친구 사이가 갑과 을의 관계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며, 또한 무슨 의도나 목적이 깔려 있어서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요약하자면 친구 사이란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닌 서로 대등한 관계라야 할 것이고,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는 사이가 아니라, 쌍방 간 속내를 드러내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이며, 무슨 이득이나 목적을 위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면 즐겁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친구.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친구라고 부르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몇 가지만 지적해 볼까요. 우선 친구를 맺는 방식이 일방적입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16절상). 지금 예수님은 사도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너희들은 내 친구야”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다고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친구를 향해서 명령하고 지시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14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17절). ‘요나단’과 ‘다윗’은 서로 친구였지만, 서로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고 지시했다는 기록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意圖)입니다. 즉 그분의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16절). 그냥 친구하자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좀 나쁘게 말하자면 친구를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목적이 선하고 좋은 것이라 해도, 친구를 이런 식으로 이용해서는 곤란합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친구를 삼으려 하시는 것일까? 상대방의 자유의사나 자율권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너는 나의 친구야”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친구가 아니면서 친구인 척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 이들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고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진정한 우정(友情)이란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과연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요나단’과 ‘다윗’사이에 있었던 두 동등한 인격체 간의 우정뿐만 아니라, 결코 동등할 수 없는 두 인격체 간의 우정, 즉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우정까지도 포함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는 방식이 이상하고 거북하게 들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어디까지나 수직적이고, 비인격적이며, 기계적인 주종(主從)의 관계로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흔히 개신교 목회자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수식어가 하나 있습니다. “주의 종”이 그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종은 인격이 없으므로 굳이 인격체로 대우해 주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짐승처럼 살아있는 도구로써 함부로 다루어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이와 같은 대접을 각오하고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왜 스스로를 “주의 친구”로 인식하려 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인격적이며, 역동적이며, 수평적인 친구로 인정하고 사귀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가당(可當)하기라도 한 것일까? 우리 편에서 보자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먼저 인정하고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행위를 “은혜”라 부릅니다. 그분의 길과 우리의 길이 다르고, 그분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며, 우리의 지식으로 그분을 도저히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분이 먼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나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내가 누릴 수 있는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러운 특권입니다! 나는 이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열매. 사도들 말고 하나님께서 친구로 삼은 한 인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인물입니다(참고. 약 2:23; 대하 20:7; 사 41:8). 하나님은 그분의 친구가 누릴 수 있는 특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우리는 아무에게나 비밀을 말하지 않습니다. 친구의 특권은 친구의 비밀과 계획을 사전에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예수님은 이 특권을 행사하라고 말합니다. 누구에게든 먼저 다가가 “은혜”로 친구를 삼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내 자식일 수도 있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일 수도 있고, 내 부하직원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특권과 관련해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열매”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16절).
앞선 설교에서 이 열매를 “그리스도의 열매”라고 했고, 그 열매는 내가 수행해야 할 그 무슨 의무나 책임이라기보다는 나에게 그저 값없이 주어지는 보상이요, 유익(有益)이라고 했습니다. 내 존재를 의미 있게 해주는 보상이자 유익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유익을 말하는 것일까? 다시 한 번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6절). 이와 같은 호사(好事)를 단 한 번이라도 누려본 적이 있습니까? 무엇을 기도하든 그대로 이루어지는 호사 말입니다! 그대로 믿고 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열매”는 결국 “성령의 열매”인 것이지요. “성령의 열매”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이 “사랑”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갈 5:23-24).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능력이자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야곱’이 자신의 나이를 묻는 ‘이집트’의 ‘바로’ 왕 앞에서, 130 년의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회고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창 47:8). 하나님의 교회가 살아온 지난 이천년 역시 그러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는 그야말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내우(內憂), 즉 안으로부터의 근심이라 함은 온갖 형태의 이단과 분열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외환(外患), 즉 밖으로부터 오는 근심은 온갖 형태의 억압과 배척과 조롱과 멸시, 그리고 무관심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들 모두에 대해서 세세하게 알려고 하지는 않습니다만(이에 대해서는 교회학교의 <기독교 역사> 시간에 보다 상세하게 배울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의 교회가 그와 같은 “험악한 세월”을 살아갈 것임을 예고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께서는 마지막 다락방 강론에서 여러 차례 “평안”을 강조하셨고, 제자들로 하여금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격려하시기도 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분의 신부(新婦)가 처음부터 평안과는 거리가 먼 생애를 살아가야 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신부가 과연 누구 때문에 이와 같은 고초를 겪어야 했을까? 그것은 순전히 신랑 때문이었습니다. 신랑을 잘못 만났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5). 이 말씀은 역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세상의 끝 날까지 계속 진행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분의 신부인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었음을 교회사를 통해서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족이 단순히 실족으로 끝나지 않고, 분열과 혼란과 싸움과 전쟁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이 자기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 이 모두 그리스도 때문에 생기게 될 일입니다. 그는 이 땅에 화평의 전도사로 온 것이 아니라, 실로 분열과 갈등의 전도사로 온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신부는 차라리 신랑 없이 혼자 사는 것이 더 편안한 일생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즉 “그리스도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로 간판을 바꾸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그리스도 없는 교회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냥 하나님으로 남아계셨더라면, 즉 예수님으로 성육신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하나님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만들어진 신. 사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신(神), 자신이 만든 하나님을 믿는 일에 있어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다신론(多神論)이 지배하던 세상이었으니, 오죽 했으면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도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신봉(信奉)하고 있는 신의 이름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싸우고 갈등했다는 기록은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설령 내가 믿고 있는 신 때문에 사회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발생하겠다 싶으면, 다른 신으로 갈아타면 그만일 테니 크게 걱정할 일도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그리스도가 없이 오히려 더 평화로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점은 유일신(唯一神)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즉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수천 년 동안 자신들의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일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자기들 사이에서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에 있어 굳이 예수님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야훼’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일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평지풍파를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잔잔하던 물에 돌을 던져 흙탕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할진대 이방인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바울’ 사도는 이들 두 무리의 반응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하나님의 교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이방인들은 그를 조롱하였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지난 이천년 내내 예수님은 늘 신학이나 종교적 논쟁의 한 가운데에 서 계셨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이 성육신하심으로써 자초한 일입니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으니. 과연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할 생각이 있기나 했던 것일까? 설령 있었다고 해도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 방식을 선택하신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방식 말입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넘어진 채로 잠잠히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사람들은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최소한 그 돌부리를 다시 한 번 더 걷어차야 직성이 풀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렇게 해왔다는 생각입니다. 그분은 미움을 받았고, 배척을 받았으며, 조롱과 멸시도 함께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왜 세상은 그분을 이토록 미워하는 것일까? 그냥 모른 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스도가 내편이 아닌 한에 있어 그럴 수는 없습니다(19절). 이 세상에는 중립지대가 없는 듯합니다.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둘 중 하나뿐인 듯이 보입니다. 나에게 동조하는가 여부에 따라 사랑하거나 미워합니다. 세상은 소위 진영논리(陣營論理)에 갇혀있다 하겠습니다. 작금(昨今)의 대한민국처럼 말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가 자기편이 아니기 때문에 적(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 모르겠으면 만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분명하게 제시해 보면 됩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대번에 웃음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종교나 사상에 대해서 관용적이며 중립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조차도 태도가 즉각적으로 돌변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가 배운 자이든 못 배운 자이든, 부유한 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기업 총수든 말단 직원이든, 정치 권력자이든 일개 상인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사람의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리스도, 즉 복음(福音)이 무슨 일을 하기에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는 것일까? 왜 “좋은 소식”이 그야말로 좋은 소식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왜 듣는 이의 심사(心思)를 뒤틀어놓을까? “좋은 소식” 때문에 자신의 치부(恥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를 좋아하겠습니까! 적어도 문명국가라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고 헐뜯는 일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근거 없는 글이나, 사실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글을 올렸다간 명예훼손죄로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부끄러운 부분을 들추어내는 일에 있어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고 공개적이고 직설적입니다. 에둘러 말하지도 않았고, 은유적으로 표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주장하나(참고. 마 11:29),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비타협적이었고, 독단적이었고, 거칠었습니다. 그분은 진정 스스로를 완벽하다 믿고 있었던 것일까요? 누가 이런 자를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당(黨)을 지어 이런 자를 몰아내고 핍박합니다.
그가 무엇을 들추어내었기에 사람들이 그토록 그를 미워하는 것일까? 그것은 “죄”였습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 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22절). 그 죄(aJmartiva, 하마르티아)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원래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화살이 과녁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 함이요”(16:9).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이 드러낸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나쁜 소식”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물론 하나님의 교회, 즉 이스라엘조차 졸지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한 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를 하고 돌아다녔으니 위선자(僞善者)의 낙인도 함께 받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성경> 해석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만든 신, 즉 우상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 기가 찰 노릇이지요.
설상가상 예수님은 말로써 뿐만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도 세상의 분노와 미움을 샀습니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24절). 여기서 “아무도 못한 일”이란 표적 즉 기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행하는 기적 하나 하나마다 참 하나님이 아니라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에, 세상은 상대적으로 무기력(無氣力)하고 무능력(無能力)한 자신과 자신의 신을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은 환호했을까요? 우산(雨傘)을 처음 발명한 사람에게 세상은 상을 주었을까? 삼성이 혁신 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LG’나 ‘애플’이 쌍수(雙手)를 들어 환영해줄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지요. 세상은 그리스도의 “표적”을 대할 때마다, 시기하고 질투하며 그를 잡아 죽일 음모(陰謀)롤 꾸미느라 바빴습니다. 나의 무기력과 무능력을 드러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과, 위선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 “나쁜 소식”, 즉 결국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리스도가 죽도록 미운 것입니다. 달리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25절).
세상에서 택하였으니.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나는 얼마나 엄청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까! ‘유대’인은 그들의 <잠언>에서 “야훼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잠 1:7). 하지만 이 사람들이 자랑하는 지식은 반쪽짜리 지식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을 누리고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존재입니까! 세상의 거침돌이 되었던 그가 나의 모퉁이 돌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감사라고 자랑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이 어찌 이런 나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내가 보기에는 도리어 초라하고 한심하게 보일 뿐입니다. 대단하게 보이나 실은 빈 껍질뿐입니다. 그야말로 외화내빈(外華內貧)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안경을 쓰고 있는 나에게 세상이 그렇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나에게 세상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과, 권세가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참고.히 9:7). 그러니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이는 나 또한 세상에 대해서 거침돌이 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을 누리며 즐기고 있습니까? 즉 “명예의 고립”을 즐겨 선택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모두들 넓은 길을 가고자 할 때, 나는 좁은 길을 선택합니까? 그렇다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9절). 나는 이 미움마저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신랑이자 친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말입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찬송가 430장)
5. 또 다른 보혜사(3)
성령님은 그 분(He)이지 그것(It)이 아닙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14:17). 즉 인격적 존재이지, 비인격적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분은 불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며, 세미한 음성도 아니고, 내적인 확신도 아니며, 무슨 환상이나 꿈도 아니며, 희한한 경험이나 신비한 지식이나 깨달음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흥정을 통해서 사거나 팔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사도들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마술사 ‘시몬’이 돈을 주고 성령님을 사려했다가 ‘베드로’로부터 혼쭐이 납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행 8:20).
성령께서 인격적 존재이니 당연히 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4:26). 한 마디로 그분은 교회학교 선생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육의 대상과, 교육의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는 점 말입니다. 세상이 아닌 교회를 대상으로, 우주의 모든 지식이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그분의 사역입니다. 나로 하여금 <성경>을 이해하고, 기억나게 하는 것이지, <성경>에 없는 새로운 지식을 추가로 가르치거나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상 두 가지 사실이 그동안의 다락방 강론을 통해서 성령님에 관하여 우리가 배워 알게 된 것들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다락방 강론에서 작정하고 성령님에 관해서 주제 강의를 펼치신 것은 아닙니다만(소위 말하는 성령 부흥회), 그분에 관하여 다섯 번에 걸쳐 여기저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떠나시고 난 뒤, 교회시대의 주역은 성령님이 될 것이라는 암시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부이자 친구인 교회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므로(14:18), 성령께서 교회와 함께 그리고 교회 안에서 살아가신다는 사실은 약속에 대한 보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나를 증언할 것이요. 이제 이곳에서 세 번째로 성령님에 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 번째 언급 역시 문맥의 흐름상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이번에는 세상과 교회의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관한 말씀이 있은 직후에 나온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자기에게 속하지 아니 하였으므로 배척하고, 핍박하고, 미워할 것입니다. 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그 이름만 아니더라도 교회는 핍박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와 관계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체질적으로 미워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다르게 행동할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이와 같은 행동은 마치 기계가 처음 설계된 되로 작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본능이고 운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도 이 운명에서 예외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하는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25절). 오호 통재라! 이스라엘 역시 세상과 한 편이 되어 그리스도의 신부를 핍박하고 억압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역시 세상에 속해 있다는 선언이자 판결인 것이지요.
바로 이 대목에서 주님은 갑자기 성령님을 언급하십니다. 무슨 의도일까? 박해와 고난 앞에 선 교회, 주님이 떠나고 없는 교회가 과연 이 박해를 견딜 수 있을까? 덩그러니 이름만 남은 교회가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고난은 의심을 부르고, 의심은 배교(背敎)를 낳을 것입니다. 감옥에 갇혔던 침례 ‘요한’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 우리는 압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는 장면도 등장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 사도들이 혼비백산(魂飛魄散)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 또한 이제 곧 보게 될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 교회가 이렇게 나약한 것입니까!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했던 그 모든 기억, 그리스도의 그 모든 말씀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수 있다는 말일까!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연현상일 뿐입니다. 꽃은 지고 풀이 마르듯,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 그리고 여기에다 어려움이 닥치면, 아름답던 기억도, 사랑하던 사람도, 감동적인 설교도, 경천동지(驚天動地)의 기적도 다 연기처럼 사라질 뿐입니다. 내 속에 그것들이 살아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늘 현재 지금 나의 일부로 호흡하고,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지금 내 속에 있는 것만이 나의 일부로 살아있을 뿐입니다. 기억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그 때 그 사람이 나를 행동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모든 책들이 나를 행동하게 하지 못합니다.
<성경>이라 해서 다를 바 없습니다. <성경> 역시 이 세상의 모든 책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저 세상의 그 모든 책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특별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해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사 이해한다 해도 행동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성경>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the living word of God)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나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인격적인 성령님께서 내 속에서 살아, 끊임없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성령님의 “내적 증거”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이해와 확신과 헌신. 그분이 우리 속에서 증언하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백내장 수술을 받아 본 사람이라면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본인의 아내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수술 전에 그토록 두려워 떨던 사람이 수술 후에 완전히 딴 사람이 된 듯합니다. 흐릿하고 윤곽도 제대로 잡히지 않던 물체들이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이게 되었으니 그 환희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만나는 친구에게 마다 이 놀라운 체험을 자랑스럽게 설명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사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세상이 원래 그렇게 칙칙하고 흐릿한 줄로만 알고 체념하고 살아왔는데, 그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이 장사꾼들로 난장판이 된 것을 보고, 예수님이 채찍을 만들어 난동(?)을 부린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훗날 그분의 행동을 이렇게 회고(回顧)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2:17). 그리고 그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제자 중의 한 사람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1-22).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사라지기 마련인데, 이들 제자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기억의 법칙을 거슬러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철들자 환갑”이라는 우리네 농담처럼, 나이가 들어가면서 성숙하고 철이 든 것이었을까? 당시에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던 일들이,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이해가 된다고 하니 말입니다. 당시에는 희미하던 것들이 이제는 또렷하고 확실하게 보인다고 하니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백내장 수술이라도 받은 것일까?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보혜사의 증언 덕분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26절). 성령께서는 창세 이전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있었으므로, 이분들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인격적 대화를 나누어왔고, 두 분의 계획과 의도를 알고 있으며, 두 분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증인으로서의 지식과 자격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즉 그분은 남에게 주워들은 것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본 것을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보혜사가 증언할 내용은 그리스도입니다(참고. 26절). 조금 풀어 쓰자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즉 복음을 말합니다. 보혜사의 증언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다니던 <성경> 즉 <구약>에 대해서 새로운 차원의 “이해”(comprehension)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구약>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해석”이라 부릅니다. 이와 같은 해석 방식은 ‘유대’인 특유의 “풍유적 해석”의 한 아류로 볼 수 있겠는데,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놓고 이와 같은 풍유적 해석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백내장 수술로 없던 것이 새롭게 나타나 보이는 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던 것이 새롭게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흐릿하게 보이던 것을 또렷하게 볼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보혜사의 증언 역시 그러합니다. 그분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자기가 본 것을 증언할 뿐입니다. 성령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다니던 <성경>에 단지 새로운 차원의 이해를 더하여주었던 것이지, 없는 내용을 더하여 준 것은 아닙니다: “아, 이 구절이 그런 뜻이었구나!”
그리고 “이해”는 단순히 이해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확신”(conviction)으로 나아갑니다. 당연히 <성경>에 대한 확신입니다. 지식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아간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누구나 <성경>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이 책이 과연 거짓 없는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을 담고 있구나.” 이런 고백은 무슨 연구나, 노력이나, 묵상이나, 기도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바람에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그와 같다고 일찍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강의한 바 있습니다(요. 3:8).
다시 한 번 말합시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이해한 사실을 믿기 위해서,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밤새 씨름한 것처럼(창 32:24), 몸부림칠 필요가 없습니다. 입산수도하여 열심히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치열한 몸싸움은 <성경>을 이해하기 까지 필요한 것이지, 일단 이해가 되었다면 믿음과 확신은 그냥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믿음 즉 확신은 보혜사의 증언, 즉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지 나로부터 나오는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지, 믿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겠습니다.
그 믿음의 창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보이고, 나 자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 거룩한 하나님이 보이며, 벌레보다 못한 내 모습이 보입니다. ‘모세’도, ‘예레미야’도, ‘이사야’도, ‘베드로’도, ‘도마’도 다 겪었던 체험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두려워 떨었고,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재주로 이처럼 신비하고도, 위대한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세상은 이런 사람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혜사의 증언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보혜사 즉 “진리의 영”을 받아들인 사람은 비록 <성경>의 모든 내용을 충분하고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아무 의심 없이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보혜사께서 그렇다고 증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보혜사가 그렇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같은 주장과 확신은 참으로 기막힌 순환논리(循環論理)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만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이 그런 것이니까요.
믿음과 확신은 화석(化石)처럼 죽은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서 살아서 파도처럼 요동칩니다. 내 속에 보혜사가 살아 계시다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환상을 보게 하고, 꿈을 꾸게 만듭니다. 그래서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해줍니다. 지금보다 더 풍성한 미래를 갈구하도록 만듭니다. 지식에 목마르게 합니다. 바다에서 표류하는 자가 계속해서 바닷물을 마셔대는 것처럼, 더 깊고 더 넓은 것들을 알고 싶어 안달 나게 합니다. 어렵고, 딱딱하고, 지루하기만 하던 <성경>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놓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을 통해서 우주와 역사, 윤리와 도덕, 학문과 예술의 의미와 목적과 기능에 대해서 새로운 차원의 이해를 하기 시작합니다. 내 속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 보혜사의 증언이 가져다 준 선물이자 은혜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해와 확신은 머리와 가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온 혈관을 타고 손과 발끝까지 확산되어갑니다. 손과 발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해하고 확신하는 바가 마침내 온 몸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지식과 믿음은 이제 하나의 생물이 되어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헌신(獻身)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지식과 믿음과 헌신은 결국 기독교 신앙의 삼위일체라 하겠습니다.
너희도 증언하느니라. 무슨 헌신을 말하는 것인가?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여기 ‘예루살렘’ 예배에 참석하였다가 깊은 감명을 받고 다시 근무지 ‘에디오피아’로 돌아가고 있는 한 내시(內侍)가 있습니다(행 8:27). 예배의 감동을 이어가기 위했음인지, 그는 덜커덩거리는 수레 위에 앉아 <성경>을 펼쳐듭니다. 그가 읽은 본문은 그 유명한 <이사야>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53:7-8).
하지만 그는 이 본문을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궁금합니다: “여기서 그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며, 찾는 자는 찾을 것이라고 주님은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의 자연법칙과도 같은 것이지요. 과연 성령님은 ‘빌립’을 그에게 보냅니다(행 8:29). ‘빌립’을 맞이하는 내시의 태도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이 장면에서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쪽은 성령님이나 ‘빌립’이 아니라 내시인 것처럼 보입니다(참고. 행 9:31, 34).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했으니 이 같은 태도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할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장면이 더욱 인상적입니다. ‘빌립’의 증거를 통해서 내시는 마침내 본문을 이해했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행 8:36). 이것이 헌신입니다! 그는 듣고, 이해한 바를 믿었으며, 믿는 바를 그대로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겼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해는 되지만 믿음이 안 가. 믿어지기는 하지만 글쎄 그대로 따라 하기는 좀... 다음에 하지 뭐.” 이와 같은 태도는 실은 자기기만이고, 비겁함의 극치일 뿐입니다.
보혜사께서 <이사야> 즉 <성경>을 통해서 ‘빌립’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했으므로, ‘빌립’ 또한 내시에게 <이사야> 즉 <성경>을 통해서 복음 즉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이제 내시의 차례입니다. 내시는 그 후 어떻게 살았을까요?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6).“되어라”가 아닙니다. “될 것이다”입니다. 내 속에 성령께서 계신다면 말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6. 또 다른 보혜사(4)
한 편의 강의로서 예수님의 <다락방 강론>(13-17장)은 그 구성이나 내용에 있어 감히 낙제점에 가깝다고 실토해야겠습니다. 그분은 강의 도중 수시로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옮아갔다가 다시 처음의 주제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의의 내용이나, 그분의 태도 또한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듯하다가 책망하는가 하면, 질문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선문답 식의 답변을 하는가 하면, 또한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근심하고 있다고 나무라기도 합니다.
솔직히 평가하자면, <다락방 강론>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즉 이 강의는 신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일관성이나 통일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며, 쓸데없는 반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령님에 관한 유사한 강론도 다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모순은 소위 편집 설에 입각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배운 바 있습니다(참고. <문학과 역사>). 즉 <다락방 강론>은 한 편의 주제 설교가 아니라, 여러 장소, 여러 시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다락방 강론의 상황 속에 편집하여 삽입한 결과로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반복되고 상충되는 내용들이 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14장을 원래의 <다락방 강론> 전승에 속한 것으로 본다면, 이어지는 내용들(15-17장)은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으로 가정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락방 강론의 상황이라 함은 강론 전체를 흐르는 지배적인 분위기를 통해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슬픔과 침통함; 염려와 근심. 왜 그럴까? 주님은 제자들을 적대적인 세상 가운데 남겨두고 떠나야 하고, 제자들은 유일한 희망이던 주님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모두에게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종말의 순간이 오고 있는 것이지요.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다”는 성경적 세계관에 따르면, 이 종말은 창조와 함께 이미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그 순간이 이제 더욱 임박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종말의 징조. 제자들은 이 종말이 영원한 이별, 즉 그야말로 종말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두렵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종말이 진정 종말이 아니라, 앞으로 영원히 종말이 없는 새로운 시작, 즉 “새 창조”라고 말합니다. 다만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지만 말입니다. 여인이 산고(産苦)을 치르지 않고 출산의 기쁨을 누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예수님은 교회가 앞으로 어떠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인지, 그리고 왜 겪어야 하는지를 이미 말씀하신 바 있고(참고. 15:18-25), 이곳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되새겨주고 있습니다(참고. 16:1-2).
<공관복음>은 이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무시무시한 어조(語調)로 예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감람산 강론>이 바로 그것입니다(참고. 마 24:1-28; 막 13:1-2; 눅 21:5-6). 성전은 파괴되고, 교회는 흩어지며, 전쟁과, 난리와, 기근과, 지진과, 사이비 그리스도와, 이단과, 거짓과, 불법이 난무할 것입니다. 대 환란인 것이지요. 이들이 종말의 징조입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한 가지 징조가 있습니다. 우리의 ‘요한’ 화자는 이미 세 차례에 걸쳐 그 징조에 대해서 예고한 바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비교적 길고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입니다.
무엇입니까? 당시 사도들이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들의 <성경> 즉 <구약>에서도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이미 밝혀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종말의 날을 흔히 “그 날”, “주의 날”, 또는 “야훼의 크고 두려운 날”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날이 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한 결 같이 증언하는 한 징조가 있습니다(참고. 욜 2:28-32; 사 32:14-18; 11:1-10; 42:1-4; 44:1-5; 렘 31:31-34; 겔 11:17-20; 36:24-27; 37:1-14). 무엇일까요?
28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8-29)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사 32:15); 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1-2);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42:1-2);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사 44:3)
33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겔 11:19);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겔 36:27);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겔 37:1);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 37:5);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겔 37:14상)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한 결 같이 증언하고 있는 종말의 징조란 다름 아닌 “성령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이 그분의 백성의 마음속에 와 자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최후의 선지자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종말의 징조로 성령님을 언급하고 있다 해서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오히려 사도들은 그분의 강의를 듣는 순간, “옳거니!”하며 무릎을 쳤어야만 했습니다. 제대로 <성경>을 이해하고 있었다면 말이지요. 하지만 이 같은 주문(注文)은 무리한 요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성령께서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기 전에는 보혜사가 올 수 없다는 점은 지난 세 번의 강론에서 당연한 것으로 인식은 되고 있었겠습니다만, 그 사실을 강조라도 하려는 듯 이번에는 세 번에 걸쳐 명시적으로 언급하십니다(7절). 마치 예수님과 성령님이 함께 사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마저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떠나셔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들림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일이 이루어진 후에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질 것이며, 그 일은 보혜사의 사역을 통해서 계속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14:17; 15:26)으로서, 교회로 하여금 복음 즉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세상을 책망함. 자, 그런데 성령님에 관한 네 번째 언급은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8절). 우리는 성령님에 관한 지난 세 번의 강론에서 성령님의 관심의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라고 배웠습니다. 방금 위에서 인용한 바 있는 종말의 징조에 관한 <구약>의 모든 언급도 그렇고, <신약> 어디에도 성령께서 직접 거듭나지 않은 세상을 향하여 무슨 사역을 한다는 언급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성령님께서 세상에 대해서 무슨 관심이 남아있기라도 한 것일까?”
과연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서 무슨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일까? 주님은 성령께서 세상을 “책망”(ejlevgcw, 엘렝코)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 ‘헬라’어 문헌에서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비난하다”, “폭로하다”, “모독을 주다” 등이 그것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드러내는 단어, ‘convict’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법정 용어로서, 피의자(被疑者)에게 유죄판결을 내린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일부 영어 번역본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convince’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예. RSV).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확인시키다”, 또는 “깨닫게 하다” 등과 같은 다소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책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든, 과연 세상을 “책망”하는 성령님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세상의 무지와 불신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내려 마땅한 대가(代價)를 치르게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확신시키고 이해시켜 회개(悔改)하도록 하려는 것일까? 즉 그 의도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적어도 “죄”와 관련해서 볼 때에는 전자(前者)의 설명이 타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즉 세상은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일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유죄판결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9절). 그리고 이에 대한 판결은 최후의 심판 날에 최종적으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와 “심판”에 대한 “책망”은 어떻습니까? 이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할까? 즉 세상이 “의”와 “심판”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해서, 그 세상을 최후의 심판 날까지 그대로 포기하고 내버려 둘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무지한 세상을 “책망”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 경우 “책망”하는 방식은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 그대로 주지시키고, 이해시켜, 확신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께서 “세상을 책망한다” 함은 바로 이 후자의 방식을 따른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비추었으나 세상이 이를 깨닫지 못하므로, 성령께서 이제 그 세상을 대상으로 “책망”의 사역을 수행할 것이라는 선언이 보혜사에 관한 네 번째 강론의 핵심입니다.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면, 관성의 법칙에 따라 나는 계속해서 그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습관이란 이처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계속해서 그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늘 그런 상태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관성(慣性)의 법칙입니다.
보혜사의 사역에 관한 그동안의 강론이 주로 제자들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이번에는 세상을 향한 사역에 방점(傍點)을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했으며,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는 그 세상 말입니다.
죄와 의와 심판. 세상이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죄(罪)와, 의(義)와, 그리고 심판(審判)에 관한 인식이 그것입니다.
그 첫 항목은 “죄”에 관해서입니다. 성령께서는 세상이 죄에 대해서 임의(任意)로 규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책망을 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죄에 대한 선언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를 윤리․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이나 생각과 연관 지으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죄란 행동이나 생각의 문제에 앞서, “무지”(無知)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모르거나 또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죄는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참고. 1:11; 3:19; 15:22). 제대로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믿지 않는 것을 죄라 할 수 있을까? 세상 법정에서도 모르고 짓는 죄에 대해서는 정상 참작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지 않는가! <성경>은 이에 대해서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증거가 온 우주에 넘쳐나서 그를 몰랐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핑계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 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칼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권의 책, 즉 <성경>책과 자연책을 남겨놓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찾고자 한다면 역사나, 교회나, 신자들을 만나보면 됩니다.
불신(不信)이 단순히 불신이나 무지(無知)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거부(拒否)하는 것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소극적인 “태만 죄”가 어떻게 적극적인 “행위 범죄”로 나아가고 있는지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참고. 롬 1:18-32). 즉 관성의 법칙이 영적인 영역에서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르면 배워야 할 텐데,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것으로 하나님을 평가하고 재단(裁斷)하려 한다는 것이지요.
‘유대’ 공회와 ‘빌라도’의 재판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몰랐고, 거부했으며, 그를 잡아 죽였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사랑하려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사랑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자평(自評)하고 만족해했습니다(참고. 2절). 성령께서는 그들의 행동과 지식이 전적으로 착각이라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 책망은 의에 관해서입니다. 의에 관해서도 세상은 나름대로의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의가 윤리․도덕의 문제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가 우리로부터 나온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은 의란 “올바른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관계”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주님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는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제자들이 그분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10절).
이 두 가지 사실이 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한 마디로 <성경>이 말하는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에 의한, 그리스도를 위한 것일 뿐이라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그분이 떠나고 없는 이 세상 인간들 사이에서 의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일 수 있을 뿐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이 점을 상세하게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책망은 심판에 대해서입니다. 심판에 관한 세상의 오해와 무지는 그것이 없을 것이라는 신념입니다. 역사의 종말이니, 최후의 심판이니 하는 것들은 종교가 만들어 낸 하나의 허구일 뿐이라고 조롱합니다(참고. 벧후 3:3-5).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착시(錯視) 현상입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산천이 유구(悠久)하지 않느냐? 만물은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대로 있지 않느냐? 불의는 득세하고 정의는 힘을 쓰지 못하며, 불의한 자가 더 오래, 더 부유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힘센 자가 이기지 않느냐? 어둠은 더 깊어만 가지 않느냐? 심판은 무슨... 있지도 않고, 설령 있다 해도 우리 시대에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야.”
책망의 통로. 하지만 보혜사는 예수님께서 떠나신 지 오십일 후에 약속대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판사가 피의자를 향해 최후 유죄 판결을 내리듯, 세상을 향한 책망을 포효(咆哮)하듯 뿜어냈습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역사적인 오순절 심령 대 부흥회였습니다. 성령님은 그날 사도 ‘베드로’, 즉 교회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자만하던 그 <성경>, 즉 선지자 ‘요엘’의 예언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여기 책망의 마지막 부분만 읽어보겠습니다: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6-38)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진정한 성령 부흥회는 성령께서 선포하시고, 또한 듣는 이로 하여금 반응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세상의 무지와 불신과 무책임함을 책망하실 때, 듣는 이들은 가슴이 찔려왔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질문했습니다: “내가 어찌 해야 할꼬?” 그날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요. 아니 성령께서 그들 마음속에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반응하게 했으니 말입니다! 회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는 단순히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로 돌이키는 것이기 때문에, 오직 성령님을 그 안에 모신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서 세상의 무지와 불신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비를 내리듯, 시내 산에서 구름과 천둥 가운데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4:7).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면, 한낱 울리는 소리에 불과하다면, 나에게는 아직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라 단정해도 괜찮습니다.
오순절 설교를 듣고 반응한 사람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요?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듯 회개하고, 침례 받고, 그리고는 사도들이 한 때 그랬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갔을까요?
7. 또 다른 보혜사(5)
마침내 성령님에 관한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강론에 이르렀습니다(참고. 16:12-15). 이 마지막 강론에서 성령님의 관심은 세상에서 다시 교회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본문 중에 사도들을 지칭하는 “너희”가 여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이 이를 방증(傍證)하고 있다 하겠습니다(12-15절).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이 마지막 강론이야말로 성령님에 관한 전체 강의의 절정에 해당하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지난 네 번의 강의 내용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파했던 것일까요? 아닌 게 아니라, 단 번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두 군데입니다: (1)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니라”(12절); (2)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13절). 이 두 구절은 앞의 내용을 반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예컨대, 두 번째 강론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혜사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그리고 또 다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15하). 요약하자면,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대목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님께서 아직도 못다 한 말씀들이 남아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성령님께서 오셔서 나머지 이야기를 더 들려주실 것인가? 모든 진리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계시와 섭리. 유명한 신약학자 ‘바클레이’(W. Barclay)는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는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적”(漸進的)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계시(진리)는 하나님의 계시(진리)”라는 점입니다. 원칙적으로 이 두 주장은 지극히 성경적인 것으로서, 그 자체로써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이 두 원칙을 본문 해석에 적용하면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본문에 대한 ‘바클레’의 주석(註釋)을 일독해 보시기를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점진적이므로, 늘 현재 진행형이며, 시대를 두고 확장되어간다. 마치 하나님의 계시가 진화론적(進化論的)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듯한 표현입니다. 그는 또 주장합니다. 새로운 계시는 이전 것들을 수정하거나 대체할 수 있으며, 지금도 그러한 작업은 계속되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러한 요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소위 “새로운 계시” 속에는 어떤 내용들이 들어있을까?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므로, 그야말로 모든 영역, 모든 분야를 다 포함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비단 영적인 분야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지적․예술적 활동 영역까지 다 포함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예컨대, ‘헨델’(Handel)의 그 유명한 작품 ‘메시아’(The Messiah)는 성령님의 계시로 탄생한 것이어야 합니다. ‘바클레이’가 근거로 인용하고 있는 ‘헨델’의 회고담이 그와 같습니다: “나는 하늘이 열리고...하나님이 보좌 위에 앉으신 것을 보았다.” 신앙심이 깊은 자라면, ‘헨델’의 간증에 그야말로 ‘할렐루야’로 응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이루어 ‘노벨’ 상을 수상한 사람도, “강남 스타일”의 가수 ‘싸이’도,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도, 모두 같은 고백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님께서 인도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의도가 이런 것이었을까?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攝理)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통한 그분의 “계시”(啓示)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계시란 본질적으로 우리를 향한 것이기에, 그 내용이 분명하고 확실해야 합니다. 애매모호하거나 헷갈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어서도 곤란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클레이’의 이해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계시, 세 가지 방식.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을까? 우리는 이에 대해서 여러 차례 배운 바 있습니다만, 워낙 중차대한 질문이라 복습하는 요량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해볼까 합니다. 다만 이번에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참고. 히 1:1), 편의 상 시대적으로 구분해 보자면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현(顯現, manifastation); 감동(感動, inspiration); 조명(照明, illumination).
우선 “현현”이라 함은 기적이나, 음성, 꿈, 환상 등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칭(通稱)하는 계시의 방식입니다. 이 때 계시의 통로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즉 성부(聖父)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현현은 주로 이스라엘과 교회의 탄생 시기에 집중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와 <사도행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현은 글로 기록된 <성경>이 없던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특별하고도 제한적인 방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방식은 “감동”(感動)(혹은 “영감”(靈感))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의미론적으로 이들 단어는 하나님의 호흡이나 숨결 등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영감”은 ‘헬라’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데오스’(qeov")와 호흡하다는 의미의 ‘프네오’(pnevw)의 합성어입니다.
그리고 이 때 계시의 통로는 성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그분의 감동을 받은 인간입니다. 예컨대, <구약>에서 선지자들의 예언이나 하나님의 감동으로 신탁(神託)을 전하는 행동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을 지칭하는 것입니다만, 이 구절 자체가 <신약>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결국 전체 <성경>을 일컫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시대적으로 영감은 <성경>의 탄생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집니다. 이스라엘이나 교회는 그동안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오던 사건이나 현상, 역사나 이야기, 노래와 시, 그리고 교훈들을 문서로 기록하고, 수집하여 편집하며, 보존하고, 가르치는 그 모든 작업들이 필요했을 것인데,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교회, 특히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사도들을 계시의 통로로 사용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영감”의 시대에 성자(聖子) 하나님, 즉 예수님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성경>은 그분 역시 대제장이요, 사도라고 말합니다(참고. 히 3:1). 계시의 통로라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분은 스스로 계시가 되신 분이었습니다. ‘요한’ 화자는 서막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성부(聖父) 하나님께서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자는 성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헬라’어, “영광”(dovxa, 독사)은 “평판”이나 “명성” 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광을 드러내다”는 말은 “본래의 명성이나 평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온전하게 드러내었다. 즉 그분은 스스로 복음이 되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였다.”
두 번째 보혜사. 이제 계시의 세 번째 방식, “조명”에 대하여 말할 차례입니다. 조명이란 말 그대로 “밝게 비추다”, 또는 “분명하게 하다”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질문은 “누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조명하는가?”입니다. 우선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 예수님은 “두 번째 보혜사”가 “조명”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질문은, “과연 그분이 무엇을 조명하겠다는 것인가?”입니다. 첫 번째 보혜사인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했다면, 두 번째 보혜사는 누구를 계시할 것인가?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14절상). 그렇습니다. 두 번째 보혜사가 계시할 인물은 첫 번째 보혜사, 즉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되게 할 것입니다. 즉 복음을 복음 되게 할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드러내고, 성령은 아들을 드러냅니다. 성부(聖父)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처럼, 조만간 성자(聖子) 하나님께서는 보혜사 즉 성령(聖靈) 하나님을 보내셔서 자신을 계시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지금 그리스도께서 언급하고 계신 “모든 진리”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그 모든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새로운 진리”나 또는 “우주의 모든 진리”가 아니라, 아들에 관한 모든 진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조명”의 방식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낼까? 그것은 당연히 초자연적인 “현현”이나 “감동”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조명”을 통해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계시를 통해서 완성되었다면, 이제 성령께서는 “조명”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완성된 <성경>을 밝게 비추어주어, 교회로 하여금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교회가 그것을 읽거나 들을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조명해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님의 사역은 오늘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아직도 이를 것이 많다”든지, “장래 일을 알리실 것이라”는 등의 언급이 바로 이점을 말하는 것입니다(참고. 12-13절). 이는 예수님께서 미처 말하지 못한 내용들을 성령님께서 추가로 계시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전의 강의에서 분명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즉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는 없다는 점 말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15하).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한 그 모든 진리를 알려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동일한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교회를 가르치고 훈계하며 바르게 하십니다. 본문의 결론을 위해서 캐치프레이즈를 하나 만들어보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은가? 그리스도를 알라! 그리스도를 알고 싶은가? <성경>을 알라!
8. 조금 후, 또 조금 후
2014년 3월에 국내 개봉 예정인 할리우드 영화, <노아>의 광고 포스터는 영화 제목 바로 아래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를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끝은 시작에 불과하다.” 참으로 혜안(慧眼)이 번뜩이는 문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성경>에서 종말은 항상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前奏曲)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종말에 관한 <성경>의 역설은 이것입니다: “모든 시작에 종말이 있고, 모든 종말에 새로운 시작이 있다.”
‘노아’의 “대홍수”가 그 첫 번째 사례일 것입니다. 원(原) 창조, 즉 태초의 창조 이후 세상은 ‘노아’ 시대에 이르러 창조 직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습니다. “혼돈”(chaos)과 “어둠”(darkness)과 “공허”(emptiness)가 그것입니다(참고. 창 1:2). “대홍수”는 그와 같은 세상을 끝장내는 종말의 심판이었습니다. 홍수 기간 내내 온 지구는 어둠과, 혼돈과, 공허로 뒤덮여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새벽의 도래(到來)를 알리는 징조이자 암시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창조, 즉 신세계(新世界)의 시작 말입니다.
‘바벨’탑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들의 지식과 과학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당(黨)을 지어 역모(逆謀)를 도모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함께 역모의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가 올라가자!” 한 마디로 하나님과 맞먹자는 것이지요. 하지만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한들 하늘 아래 뫼!” 하나님은 반역의 탑을 허물기 위하여 손수 내려와야 할 정도로 탑의 높이는 미미하고 보잘 것 없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내려가자” 할 정도였겠습니까!
반역은 실패로 끝났고, 사람들은 서로 간에 갑자기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언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더 이상 역모를 도모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곳에 모였던 자들을 뿔뿔이 흩어버립니다. 그리고 세상은 다시 혼돈과 어둠 속으로 빠져듭니다. 다시 종말이 찾아온 것이지요. 이번에도 다시 새벽이 찾아왔을까요? 한 줄기 빛이 캄캄한 역사의 무대를 다시 비추기 시작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한 사람, ‘아브람’을 통해서 시작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제 고별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이점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두 번째 ‘아담’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화자는 그분을 “세상의 빛”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1:4).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은 첫 번째 ‘아담’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아담’ 한 사람의 반역으로 초래된 혼돈과 어둠과 공허의 세상을 끝장내고, “재창조”(re-creation)의 빛으로 신세계를 시작하려 오셨습니다.
세상은 복음,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야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찬 “신세계”(新世界)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롭게 된 백성들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창조해 나가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종말은 필요 없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것이었습니다. 사도들도 그렇게 기대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모든 것 다 버리고 그분을 따라다녔겠습니까!
조금 있다가.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즉 얼마 안 있어, 모두가 그토록 싫어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종말이 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제 곧 이별을 해야 합니다. 회자별리(會者別離)의 법칙이 이번에도 예외 없이 지켜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별이 단순히 이별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별도 서러운데, 세상은 이 이별을 놓고 박수 치며 환호할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향해 순진하고, 어리석고, 답답하고, 외골수라며 조롱하고, 멸시하며, 심지어 배척하고, 핍박까지 할 것입니다.
인생 역전도 이런 역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박을 기대했다가 쪽박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분은 단순히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자유와, 광복과, 행복과 영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또 믿었던 주(主)님이었고, ‘메시아’였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떠날 것이고, 그분과 함께 시작된 “신세계”도 이제 곧 끝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빛은 사라지고 어둠이 몰려올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과 희망으로 들떠있던 제자들은 다시 혼돈과 공허로 가득 찬 무의미한 일상의 어둠 속으로 되돌아 갈 것이었습니다. 태초의 창조 직전의 모습으로, 대홍 수 당시의 모습으로, ‘바벨’의 반역 직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이었습니다. 혼돈과 어둠과 공허는 다시 세상과 제자들을 뒤덮고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결코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 동안 이 같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할까? 도대체 얼마 동안 나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이것이 종말이라면 새로운 시작이 또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과연 새로운 시작은 과연 있을 것이며, 있다면 언제일까?
계시의 역설. 세상은 그와 같은 시작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지금 괜한 허풍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주만물이나 역사를 둘러보면 그 증거가 너무나 강력해서 거의 대부분의 인생들이 세상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일반계시가 어떻고, 자연계시가 어떻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자연의 계시는 오히려 시간의 역사가 결코 끝남이 없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종말 따위는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과연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이 오면 어김없이 다시 새벽이 옵니다. 어제 떴던 태양은 오늘 다시 떠오르고, 내일 다시 떠오를 것입니다. 인류가 이 땅에 태어난 이래 이 같은 사실은 한 번도 중단되거나 바뀐 적이 없습니다. 이는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만고의 진리이자 법칙입니다. <성경>도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 19:1-2).
유사 반복으로 노래하고 있는 시인의 의도는 물론 다른 곳에 있습니다만(참고. 1절), 나는 여기서 이 노래의 두 번째 구절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는 여기서 단순히 “날은 (그 뒤에 오는) 밤에게, 그리고 밤은 (뒤이어 오는) 날에게”라고 노래하지 않고, “날은 (그 다음) 날에게 밤은 (그 다음날) 밤에게” 말하고 전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는 하나의 전제(前提)를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단순히 반복적인 것을 넘어, 영속적(永續的)이기까지 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반응합니다: “아무렴 역사는 그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지! 역사의 종말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도 우리와 함께 그렇다고 합창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
바로 여기에 “계시의 역설”이 있다 하겠습니다. 차라리 “계시의 함정”이라 부르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 낮과 밤의 순환을 보고 역사는 종말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윤회(輪廻)하고 있거나, 계속해서 발전해 간다고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 번 양보해서 내 인생에 종말은 있을지언정, 우주와 역사에는 결코 종말이 오지 않을 것으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기고 감춘 듯합니다.
이점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강의하실 때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말하지 않고, 알쏭달쏭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숨기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농부가 진정 자기가 가진 보화를 아무나 가져가기를 원했다면 길가 아무 곳에나 두면 될 일이지 굳이 땅에 파묻은 심보가 무엇입니까(참고. 마 13:44)? 그 보화를 누가 가져갈까 두렵거나 싫어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장사를 하려고 가게를 열었다면 간판을 가게 앞에다 내걸어야지, 아무도 못 보게 가게 안에다 다는 주인은 없습니다. 설교를 하는 목사가 교인들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나 방언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그분은 진정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일까? 정말 종말이 없다고 믿도록 함정을 파놓은 것일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理性)에 의지할 때 도달할 수 있는 지식은 그기까지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성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일까? 심하게 오염되고, 타락해있습니다. 그래서 보기는 하나 어렴풋이 보일 뿐이고, 듣기는 하나 희미하게 들릴 뿐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회복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마치 백내장 수술을 받듯이 말입니다. 믿음이라는 선물이 필요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우리에게 들리는 것은 참된 이성의 소리, ‘로고스’ 즉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말입니다.
또 조금 있다가. 그 “말씀”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조금 있으면 내가 너희를 보리라”(22절). “너희가 나를 보리라”가 아니라, “내가 너희를 보리라”입니다. 두 표현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난 후가 아니라, 잠시 잠간 후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그 종말을 끝장내고, 새로운 새벽을 열겠다”는 선포이자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혼돈과 어둠과 공허로 가득 찬 다락방 분위기를 한숨에 날려버리는 우렁찬 호령입니다.
이는 태초의 혼돈과 어둠과 공허를 가르고, “빛이 있어라”(창 1:3)고 호령하시던 하나님의 그 음성이기도 합니다. 이는 홍수 이후 ‘노아’와 그 식구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창 9:1)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는 말씀과 같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라”는 것이지요. 양치기 ‘모세’에게, “이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출 3:10)는 명령과도 같습니다. 이 모두 혼돈과 어둠과 공허를 끝장내는 새로운 창조를 알리는 하나님의 나팔소리입니다.
어둠 가운데서 희희낙락(喜喜樂樂)하던 세상은 이제 곡하고 애통할 것입니다. 반대로 애곡하고 슬퍼하던 제자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역전에 재역전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 말씀은 또한 이렇게 다짐하십니다: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절). 무슨 말씀이신지? 그 기쁨이 이제부터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다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제 더 이상의 종말은 없을 것입니다. 종말의 종말이 올 것입니다. 마지막 새벽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새벽을 위하여 사도들은 얼마를 더 기다려야 했을까? 만일 “내가 너희를 보겠다”는 약속이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그 기간은 불과 사흘이었습니다! 그 사흘은 사도들에게 어쩌면 삼 년과도 같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번에도 역시 혼돈과 어둠과 공허로 가득 찬 ‘마가’의 다락방에서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안을”(“샬롬!”).
만일 “내가 너희를 보겠다”는 약속이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기간은 오십 일입니다. 두 달도 채 안 되는 기간이지요. 배속에 애기를 가진 어머니가 기대와 소망으로 열 달을 기다릴 수 있다면, 오십 일을 어찌 기다릴 수 없겠습니까? 하지만 사도들은 단순히 그 날을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날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함께 모여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모여서 반역의 ‘바벨’탑을 쌓아 올라 간 것이 아니라, 순종의 기도의 향기를 피워 올렸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 향기에 취해 황급하게 직접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 안에 들어가셨습니다! 영원한 새벽으로 자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날 이후 사도들은 전혀 딴 사람들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을 지배하던 혼돈과 어둠과 공허가 혼비백산 달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피해 다니던 그들이 이제 비로소 세상을 향해 호령을 하며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차이가 없었습니다. 종말이 그들 앞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호령하던 세상은 반대로 그들의 말을 들었고, 두려워했으며, 주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역시 혼돈과 어둠과 공허가 사라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만약 “내가 너희를 보겠다”는 약속이 주님의 재림(再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동안 이천 년 이상을 기다려온 우리가 앞으로도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언제일지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에게는 천 년이 하루와도 같다”는 시인의 노래를 듣는 일로 위로를 삼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는다면, 내 편에서 먼저 그분을 만나러 나서는 것은 어떨까! 주님께서 승천(昇天)하실 때, 넋을 놓고 바라만 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그분은 이렇게 질책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행 1:11) 그렇습니다. 나도 하늘만 쳐다보며 그날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두 번째 보혜사께서 이미 내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늘 그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생각나게 하고, 순종하게 하고, 행동하게 함으로써, 주님을 날마다 대면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분의 도움으로 나는 혼돈과 어둠과 공허 속에서가 아니라, 날마다 빛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늘 주님을 대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에게도 진정 다시는 종말이 없는, 종말의 종말이 실현된 것일까? 영원한 새벽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일까? 그렇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9. 새벽이 오면
적어도 다락방 강론 자체만을 드려다 볼 때, 지금은 밤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이 주는 상징이 무엇인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영적 무지(無知)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고별 강연답게 참으로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과연 제자들은 이중 얼마나 제대로 이해를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서로를 향해서도 그렇고, 선생님을 향해서도 이런 저런 질문들을 하고 있는 이들 모습을 통해서 확인해 볼 일입니다:
(1)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 (2)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13:37); (3)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14:5); (4)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14:8); (5)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14:22); (6)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16:17).
이들의 영적 상태 또한 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칠흑 같은 밤이 지나면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새벽의 동이 터오면, 사물의 윤곽이나 색깔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잠자던 것들이 깨어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새벽이 주는 변화일 것입니다. 제자들도 이제 “조금만 있으면, 또 조금만 있으면”, 영적인 새벽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23절).
도대체 새벽이 주는 변화가 얼마나 클 것이기에, 얼마나 엄청난 지식을 갖게 될 것이기에, 더 이상 주님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어진다는 말입니까! 주님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누구에게 물어보라는 말입니까? 누구를 찾아가야합니까? 기도만 해도 그렇습니다. 누구에게 찾아가야 하며, 누구에게 간구를 해야 합니까?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23절하).
내 이름으로.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직접 만나 그분에게 묻고,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나님을 일대 일로 대면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어린 시절 용돈이 필요할 때면, 아버지가 무서워 직접 말씀드리지 못하고 어머니를 통해서 요청을 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 어머님께서는 아버지께 왜 직접 말하지 못하느냐고 나무라곤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26절).
이 말은 그분이 직접 나서서 나의 간구를 하나님에게 말씀드려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직접 아버지에게 요청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특권도 이만 한 특권이 없습니다! 과연 이 같은 일이 가능하기라도 할까? 그렇다면 제자들이 이전에는 하나님에게 직접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주기도문까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까?(참고. 마 6:9-13).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 이름”,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좀 속된 표현을 빌자면, 주님의 이름을 팔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팔면 하나님이 들으실 것입니다.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행여나 신성모독이라 비난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예수님으로 착각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것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예수님의 이름을 팔면 하나님께서 무조건 들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야곱 이야기>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착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삭’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을 큰 아들 ‘에서’로 착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이 요구하는 그 모든 기도를 다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그의 형, ‘에서’의 이름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동생이 형의 흉내를 내며, 형의 이름을 판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도 가끔 그런 착각을 일으키신다고 말합니다. 간혹 색맹이 되어 붉은 색과 흰색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어떻게 이런 일이? 과학적으로 이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붉은 색안경을 통해서 보면 붉은 색이 흰색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착각을 일으키게 한 것일까? 붉은 나의 죄를 덮고 있는 그리스도의 붉은 피를 먼저 보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으니(참고. 롬 8:29), 하나님도 결국 ‘이삭’의 실수를 반복한 셈입니다. 즉 동생의 피를 형의 피로 착각하셨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즉 내가 형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내 목소리를 형님의 목소리로 착각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무엇을 구하든지 항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시는 이유도 그기에 있는 것이겠지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23절하). 이 약속은 실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이와 똑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아버지께서 친히. 이 두 번의 약속에서 똑 같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 중요한 대목이 하나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입니다. 정말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을까요? 행여나 유보조항(留保條項) 같은 것은 없을까? 정말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가 낭패를 보는 것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리가 함부로 기도해서는 안 될 것처럼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주님 스스로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6:33). 이 말씀은 마치 우리가 우선적으로 구해야 할 기도 제목이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야고보서>는 이보다 더 엄격하게 기도 제목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아무리 기도해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또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이 쯤 되면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것 빼고, 저것 제하고, 도대체 무엇을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나는 과연 무엇을 구해야 할까? 정상적인 부모자식 간이라면 아버지 앞에서 이것저것 따져가며 요청하는 자식은 없습니다. 특히 자식이 어릴 때에는 정말 이것저것 체면 차리지 않습니다. 그냥 마구 떼를 쓰고, 울며 보채고, 졸라댑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어떤 기도는 해도 되고, 어떤 기도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졸라댑니다. 적어도 그 부모가 계부(繼父)나 계모(繼母)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비록 나를 입양한 양아버지이긴 하지만,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식으로서의 권한은 친자식의 그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친 아들과 양 아들을 차별하거나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같이 대하고 사랑합니다. 정말 그럴까? 아무도 함께 놀아주려고 하지 않는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모자라거나 못나서도 아닌데 같은 학급 친구들은 그를 멀리 했습니다. 이 아이의 부모는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쓰리고 아픕니다. 그런데 그 학급에 한 학생이 그를 가까이 하고, 어려울 때 도움을 주고, 등하교 길에 함께 하며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가끔 집에 까지 와서 놀다가기도 합니다. 이 외톨이 아이의 부모는 이 친구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심정이 이 부모의 심정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27절). 이것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자 조건입니다. 이제 보니 ‘에서’의 착각과 하나님의 착각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겠습니다. ‘에서’의 착각은 그야말로 착각이었습니다만, 하나님의 착각은 의도적이고 고의적이었습니다. 알고도 모른 채 그냥 눈과 귀를 닫아준 것이었습니다. 그냥 그분 아들의 친구로, 동생으로 받아들여준 것이었습니다. 무근 근거로? 그분 아들을 대하는 우리의 사랑과 믿음이었습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이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에야 아나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야곱’처럼 살아도 괜찮은 것인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부모와 형제를 속이며 곤경에 빠뜨려도 괜찮은 것인가? 사실 이 질문은 <야곱 이야기>에서 핵심 주제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야곱’이 무엇을 위해서 형과 아버지를 농락했을까?”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가 추구한 것은 일상의 하찮은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치하고 시시한 사기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버려야 하고,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로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였습니다. 하찮은 것을 추구한 쪽은 오히려 그의 형이었습니다. ‘에서’는 하찮은 것을 위하여 귀한 것을 버리는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준 자였습니다. 그는 금을 돌 같이 여겼고, 돌을 금 같이 여겼습니다. 오죽했으면 <히브리서>가 그를 “망령된 자”, 즉 “정신 나간 자”로 부르겠습니까(히 12:16).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입니다(참고. 17:3). 가엽게도 우리의 ‘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경멸하고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도들은 이제 “또 조금 있으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이것이 새벽이 가져다 줄 또 다른 극적인 변화가 될 것입니다. 그 때 가서는 주님께서 어렵게 비유로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29-30절).
이제 그들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일대 일로 대화할 것이며, 선생님이 그들을 대신해서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입니다(28절).
“또 조금 있으면”이 의미하는 바가 부활이든,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든, 또는 앞으로 있을 주님의 재림이든, 모두 종말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미래의 사건으로 여전히 남아있긴 하지만, 당시 사도들이나 오늘의 교회는 이미 세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지식(이해)”과 “새로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들이나 오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혼란 가운데서 주님께서 지금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들에 대해서 묻지 않을 것이며, 물을 필요도 없어져버렸습니다(참고. 16-18절). 또한 무엇을 기도하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이를 들으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능력을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까?
10.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마침내 제자들은 선생님의 강의를 이해하게 된 것일까요? 거듭 강조하거니와 <다락방 강론>은 그 형식에 있어 아주 조악(粗惡)하다 하겠습니다. 대개의 경우 강의나 연설은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락방 강의에서 그와 같은 형식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해보입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제들이 여기저기 뒤섞여서 산발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 또한 강론의 일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본문을 읽다보면 주님의 강의는 이제 막바지 결론에 이른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들의 확신에 찬 탄성(歎聲)이 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29-30절). 마침내 사도들의 눈이 밝아진 것처럼 보입니다. 새벽이 찾아온 것이지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들이 지금 무엇을 믿게 되었다는 것인가요?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 즉 예수님의 신적 기원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답변인 즉은, 이제야 비로소 그들의 선생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게 된 데에는 예수님의 비유가 아니라, 평이하고도 직설적인 설명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참고. 29절). 직설적인 설명이란 이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28절).
하지만 이게 무어가 그렇게 새로웠을까? 그동안 선생님과 함께 지내면서 수없이 반복해서 들어왔을 내용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갑자기 이날따라 이 말씀이 새롭게 들렸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사도들은 그동안 무슨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녔단 말인가! 이 새로운 깨달음이 어디서 왔을까? 혼돈과 어둠과 공허 가운데서 전전긍긍하던 그들의 마음속으로 갑자기 한 줄기 섬광(閃光)이라도 비춘 것일까?
이제야 믿나이다. 사실 아무나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나 태도는 ‘니고데모’ 수준에 머무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인류가 본받을 만 한 위대한 스승 정도이지, 하나님의 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가 여러 스승 중의 한 사람은 될지언정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도들의 고백은 탁월하다 할 것입니다. 어디서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잠시 접어두고,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장면을 회고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한낱 낯선 ‘유대’인 남자에 불과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대화를 거듭할수록 여인의 태도는 달라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를 “메시아”로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대화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여인의 간증을 들어보지요: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4:29). 그렇습니다. 이 남자가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던 나의 과거지사(過去之事), 즉 나의 결혼 이력을 훤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다니엘’은 어떻습니까? 그 역시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 어디서 이런 믿음이 생긴 것일까요? 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1:50). 이 말씀은 ‘나다니엘’이 물어보고 싶었을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즉 “나에 대해서 어떻게 그토록 잘 알고 있는지요?”에 대한 답변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도들의 환호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들이 왜 환호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29-30절). 무슨 말씀인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마음속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분은 자신들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알고는 싶은데,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저 가슴 속에만 묻어두었던 것들을 먼저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어찌 이런 분을 하나님께서 보낸 자로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너희가 흩어지리라. 그런데 제자들의 이와 같은 판단에 예수님은 감동을 받았을까요?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당신은 하나님께서 보낸 자가 틀림없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얼마나 감동을 받았을까요? 그분께서는 마치 선문답을 하듯 ‘니고데모’를 향해 이렇게 대꾸하십니다: “당신은 거듭나야 해.” 일종의 동문서답인 셈입니다. 정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이런 식입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와 같은 판단 기준을 가지고서는 내 있는 자리로 한 발자국도 다가올 수 없어.” 전혀 감동을 받지 않았다는 인상입니다.
‘니고데모’는 과연 무슨 근거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자로 판단했을까요? ‘헬라’인은 지식을 구하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했으니, 그 역시 ‘메시아’에 걸 맞는 일련의 기준들을 마련해놓고 있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지금 이곳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니고데모’나 제자들에게나 공통적인 태도가 하나 있습니다. 즉 이런 것입니다: “내가 관찰해 보니, 내가 판단해 보니, 또는 내가 생각해 보니.”
과연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세상이 그리스도에 관한 일련의 규범이나 평가 기준을 마련해도 괜찮은 것일까? 정작 예수님 그분은 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실까? ‘요한’ 화자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23-25)
한 마디로, 세상이 어떤 기준을 어떻게 마련하든, 예수님 자신은 아무런 관심이나 흥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인생들의 환호에 우쭐해 할 것도 없고, 그들이 나를 버리고 떠났다 해서 좌절할 것도 없습니다. 제자들의 확신에 감동은커녕, 그 확신에 찬 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31-32절상).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뭐 이런 뜻이 아닐까요? “마침내 나를 믿게 되었다니! 착각은 자유일세. 자네들의 그 확신이 산산이 흩어지고, 너희 무리 또한 뿔뿔이 흩어지는 시간이 올 걸세.” 사도들은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선생님께서 <스가랴>를 인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눈치라도 챘을까요?: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 13:7).
그러므로 그 날이 현실로 닥쳤을 때, 사도들이 마침내 믿게 될 사실은, “내가 그토록 분명하게 여겼던 그 믿음, 확신에 찬 그 믿음이 실은 자기 과신(過信)이었거나 허세(虛勢)에 불과했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사도들이 혹시 숫자의 힘을 믿고 큰소리를 쳤던 것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혼자 있을 때보다 무리 속에 섞여 있을 때 나도 모르게 힘이 솟고 큰 소리가 나는 법이기도 하지요. 예컨대, ‘다윗’이 하나님께서 시키지도 않았던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도 왕국의 힘이 숫자에서 온다고 은연중에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심도 교회의 규모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수시로 홀로 있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홀로 있을 때의 내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이다.” 나는 왜 수시로 홀로 있을 필요가 있을까?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32절하).
내가 의도적으로 홀로 있기로 작정했든, 또는 타의로 홀로 내버려지게 되었든, 홀로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도 수시로 혼자 있기를 즐겨했고, 이제 곧 타의에 의해 홀로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분과 가장 가까이 계실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전에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 하셨느니라”(8:29).
역사적으로 영국은 한 때, 유럽 대륙으로부터 의도적인 분리와 고립 정책을 펼친 적이 있었는데, 이를 “명예의 고립” 또는 “영광의 고립”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치적 분쟁이나 전쟁의 위험에 빠지지 않고 국가의 안보와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나도 이처럼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평화 즉 ‘샬롬’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 있다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그 비결이란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명예의 고립”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33절).
제자들은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겠으나”, 홀로 남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넘어지겠으나, 곧바로 회복하여 일어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신뢰가 아닌 용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제자들에게 환난을 사도록 요구하겠으나, 주님은 그들에게 평안을 값없이 선물할 것입니다. ‘갈릴리’의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던 주님의 그 평안 말입니다. 주님의 평안은 가만히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평안은 싸워서 무찌르고, 쳐부수고, 이기고, 짓밟아서 쟁취하는 평안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얻는 평안입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하).
나는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을까요?
나의 칼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칼은 무엇입니까?
연습과 토의
1. 다락방 강론에서 등장하는 성령 보혜사에 관한 다섯 번의 강론 내용을 요약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나의 신앙생활에서 그 내용이 어떤 기능을 할 수 있을지 토의해 봅시다. 성령님께서 오늘 나의 삶에 미치는 기능 말입니다.
2. 다락방 강론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배울 수 있는 진리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해서입니다.
3. 다락방 강론은 종말에 관해서 어떤 진실들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종말의 징조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4. 다락방 강론은 교회에 관해서 어떤 진실들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이를 토대로 교회의 본질과 사역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