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8과
강론(2): 승천과 재림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3:31-14:31약 168분 분량
18
강론(2): 승천과 재림
(13:31-14:31)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13:34-35).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14:1-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예수님의 고별 강연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강연의 주제는 그분의 “승천과 재림”에 관한 것으로서, 그 범위는 “영광의 죽음”에 관한 강론에서 시작하여(13:31-32), 강론 후 다락방을 떠나는 장면까지입니다(14:30-31).

문학과 역사
양식/배경. 강론의 형식적 특징은 제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네 번의 질문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각 질문은 “오해”라는 수사학적 특징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긴 본문 속에 흩어져 있는 다양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주제들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본문 속에는 네 번의 질문과 한 번의 오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베드로’의 질문: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
2) ‘베드로’의 질문: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13:36)
3) ‘도마’의 질문: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14:5)
4) ‘유다’의 질문: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14:22)
5) ‘빌립’의 오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14:8)
본문 자체만을 따로 떼어놓고 볼 때, 그 배경에 관한 아무런 암시도 찾을 수 없습니다만, 첫 번째 강론의 배경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만찬”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듯합니다.
본문의 주제와 관련해서도, 본문 속에 여러 대화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만, 전체를 통해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나 또는 대화의 주제를 찾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핵심 주제가 무엇인지 찾아봅시다.
구조. 본문의 주제를 “승천과 재림”이라는 단일 주제 하에 그 구조를 파악해 본다면, 크게 서론, 본론, 그리고 결론으로 구분하는 가능해 집니다. 그리고 각 부분은 다시 여러 개의 작은 단락들로 세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서론(31-38절)
(1) 인자의 영광(31-33절)
(2) 새 계명(34-35절)
(3) ‘베드로’의 거부(36-38절)
2) 본론-강론(14:1-26)
(1) 승천과 재림 사이(1-3절)
(2) 유일한 길(4-6절)
(3) 유일한 계시(7-11절)
(4) 선교의 동력(12-14절)
(5) 보혜사의 도래(15-17절)
(6) 부활절의 예수(18-20절)
(7) 신자와 예수(21-24절)
(8) 교사 보혜사(25-26절)
3) 결론(14:27-31)
이 단락을 결론으로 취급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서론에서 등장했던 단어들이 이곳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서론(31-38절)
인자의 영광. ‘가롯 유다’가 어둠 속으로 빠져 나간 후 예수께서 보이신 반응과, 그보다 앞서 ‘헬라’인들이 그분을 찾아왔을 때 보이셨던 반응을 비교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참고 12:20-32). 핵심 주제는 “인자의 영광”에 관한 주님 자신의 언급입니다:
31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31-32절)
한 사람은 그분을 떠나고 있고, 또 다른 일단의 무리는 그분을 찾아왔다는 사실은 “종말의 시작”을 알리기에 충분한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다락방 강론의 상황을 더욱 긴박하게 해주는 효과를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헬라’인들을 맞이하시던 그 때도 그랬고, 지금 이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때”를 언급하고 있으며, 이를 “인자의 영광의 때”와 결부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그 때”는 십자가상에서의 죽음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십자가 위로 높이 들리는 것도 의미할 수 있을 것인즉, 이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위로 올라가는 것, 즉 “승천”(昇天)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또한 “이 세상의 지배자”가 보좌 아래로 이끌려 내려지는 것이기도 하며, 신자들이 영광의 자리로 함께 들려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위 두 절에서 시제(時制)는 각기 과거와 미래형으로서, 과거는 “지금”이라는 시점과, 그리고 미래는 “곧”이라는 시점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두 절은 또한 아들과 아버지가 영광을 받는 방식에 대해서도 계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자신을 인류를 위한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을 받으심으로써 그 아들을 영화롭게 하였으며, 아버지는 아들의 절대적이고 완벽한 순종과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를 통해서 영화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두 번에 걸쳐 ‘유대’인들을 향해서, “너희들이 나를 찾겠으나 내가 가는 곳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7:34; 8:21). 두 번 모두 ‘유대’인들은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당황했습니다. 이번에는 사도들을 향해서 같은 말씀을 하시면서, 그들 역시 같은 상황에 놓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33절)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친밀하고 애정 어린 모습이 그것입니다: “작은 자들아.” 이와 같은 호칭은 당시 선생님이 자기 제자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이점에 ‘유대’인들을 대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며, 당연히 제자들이 그를 찾지 못할 것이라거나, 그가 가는 곳에 함께 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약속을 하려는 것임을 이어지는 그분의 강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베드로’에게 “지금은 올 수 없으나 언젠가를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36절), 다른 제자들 역시 지금 그분이 떠나가는 것은 언젠가 아버지 집에서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한 것임을 듣게 될 것입니다(14:2-3). 그들은 조만간 그분을 다시 보게 될 것인즉, 이는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 또한 함께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4:19). 그들이 겪게 될 이와 같은 부활절의 체험은 그분을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까지 확장될 것이며(14:21),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고이기도 합니다(14:23).
새 계명. 이어지는 두 절은 “새 계명”에 관한 강론으로서, 이야기의 주제로부터 일탈(逸脫)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4-35절)
새 계명에 관한 강론은 15:12-17에서 보다 상세하고 발전된 내용으로 다시 한 번 소개될 것이기에, 이 문단을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두 절을 생략한다면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첫 번째 문단의 주제는 세 번째 문단(36-38)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논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곳에 아주 압축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새 계명”은 나름대로 문학적이고도 신학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신약 비평학자들의 용어를 빌자면, 이 “새 계명”에 관한 강론은 “그리스도의 영광”(31-32절), “그리스도의 죽음과 승천”(33절), 그리고 “‘베드로’의 거부 반응”(36-38절) 등과 함께 소위 “예수님의 유훈(遺訓)”으로 불리는 하나의 문학적 단위를 이루어, 다락방 강론의 배경이나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이란 다름 아닌 임박한 종말과 새 질서의 시작과 관련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이제 내가 말하노니”도 이 같은 종말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계명은 전통적인 ‘유대’인에게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참고. 레 19:18).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 즉 이스라엘의 ‘쉐마’(신 6:4)와 연결시킨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계명은 과연 어떤 점에서 새롭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내용에 있어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 질문에 관해서 우리의 화자 역시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제자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질 “새 언약의 시대” 속에 살게 될 것이라는 점일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 즉 “새 언약”이 성취될 것이라는 점이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전래되어오는 핵심 요소이며, 그리고 교회에서 “주의 만찬”을 기념할 때마다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참고. 막 14:24).
“새 언약”이 “새 계명”과 연계되는 방식을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맺어지게 되는데, 이스라엘 편에서 그 언약 즉 “옛 언약”으로 맺어지기 위해서는 율법 즉 “옛 계명”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참고, 출 19:3-6). 따라서 마찬가지로 새 이스라엘 즉 “새 언약”의 백성은 “새 계명”의 요구를 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산상 수훈”(山上垂訓)은 “새 언약”, “새 백성”, 그리고 “새 계명”에 관한 이와 같은 사실들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 마 5-7). 이런 점에서 “산상 수훈”은 ‘시내’ 산의 율법 즉 “옛 계명”과 일종의 문학적 병행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마태 공동체”는 새 신자들을 위한 교육용으로 이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공동체는 산상수훈을 “메시아의 법”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모세’보다 더 위대한 인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전하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도 <구약>의 모든 율법을 이루고 성취하는 최고의 법이 곧 “메시아의 법”으로 요약 및 환원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법”은 두 가지 법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 하나는 이스라엘의 ‘쉐마’이며, 다른 하나는 이곳에서 “새 계명”(34-35절)입니다(참고, 막 12:28-31).
위에서 보듯이 “메시아의 법”은 불가분 “새 출애굽”을 연상시켜주고 있으며, 이는 “첫 출애굽” 이후의 “그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 그 백성을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새 언약”은 새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새 나라에서 새 백성을 날로 새롭게 구원해주는 원리이자 섭리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적 설화>가 <수난설화>와 결합되는 방식도 이 같은 원리에 입각해 있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새 언약”은 단순히 시 시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새 삶”을 위한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리고 “새 삶”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가 “새 계명”의 바탕이자 전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옛 언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단순한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로써 두 언약 사이에는 심각한 충돌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새 언약은 옛 언약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도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새 언약의 토대는 은혜이자 선물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능가하되 훨씬 능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즉 옛 언약에 의하면 내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당위성은 그들이 내 몸과 같기 때문이지만, 새 언약에서는 그 이웃이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대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실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외적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내적 원리로 바뀌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베드로의 항변. “새 계명”에 관한 강론은 ‘베드로’가 중간에 개입함으로써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새로운 주제로 옮아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베드로’의 관심사는 “새 계명”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33절)에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36절)
이어지는 대화의 주제는 분명 “새 계명”에 관한 주제로부터 일탈(逸脫)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37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7-38절)
예수님의 예고와 이에 대한 ‘베드로’의 항변(抗辯)과 헌신과 각오를 담은 예고입니다. 혹자는 이 두절이 두 가지 독립적인 주제를 지닌 별개의 전승이 함께 결합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나는 <성경> 독자들에게 친숙한 내용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있는 ‘베드로’의 태도와 그 자신의 예고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른 전승들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내용으로서, ‘베드로’가 언젠가는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게 될 것이라는 예고에 관한 것입니다. 이중 ‘베드로’의 헌신과 미래의 순교에 관한 내용이 <공관복음>에서는 일치하는 대응 본문이 없습니다만, <요한복음> 내에서는 이를 암시해주는 내용이 이미 등장한 바 있으며(참고. 12:26), 21:18-19 사이에서 보다 상세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헌신을 다짐하고 있는 장면을 예수님의 다른 말씀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다음 본문을 참고해 봅시다: 마 26:31-32; 막 14:27-28; 눅 22:31-38.
아무튼 ‘베드로’의 모습을 볼 때, 그는 예수님께서 이제 곧 아버지 하나님께로 갈 것이라는 사실과, 왜 가려는 것인지를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대가를 치루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그의 태도는 결연하고 단호해 보입니다. 예수님도 이점을 인정하고 계시며,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임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위해서도, 먼저 떠나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은 ‘베드로’의 의지나 능력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목숨을 내 놓겠다”는 ‘베드로’의 충동적인 고백은 실은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려하는 선한 목자에 관한 징표임에 분명합니다(참고. 10:11, 15). 과연 선한 목자인 예수님의 헌신과 희생 덕분에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뒤를 이어 선한 목자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것이었습니다.
2. 본론(14:1-26)
승천과 재림 사이(1-3절). 믿음에 관한 명령과 약속이 다락방 강론 전체를 흐르는 지배적인 주된 내용으로서, 문장은 긍정문과 부정문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절)
즉 “근심하지 말라”는 부정 명령문에 이은 “믿으라”는 긍정 명령문이 뒤따르고 있는 형식입니다. 이 두 명령은 현재 불안과 두려움과 근심 등으로 극심한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는 제자들을 향한 것이긴 하지만, 실은 예수님 자신도 그와 같은 갈등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았을 것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참고로 “심령에 괴로워하다”(13:21)와 “근심하다”는 실은 같은 ‘헬라’어 단어 ‘타랏소’(taravssw)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나 예수님이나 지금 똑 같은 수준의 심리적 동요(動搖)를 겪고 있는 중이라는 암시입니다. 제자들은 상실(喪失)의 슬픔과 불안감으로, 선생님은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베드로’의 다짐은 이와 같은 분위기를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심화시킬 뿐입니다. 즉 이토록 호언장담하고 있는 ‘베드로’도 결국 주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다면, 나머지 사도들이야 더 일러 무엇하겠습니까!
이 같은 상황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그리고 아마도 자신을 향해서도), “네 마음이 요동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고 다독이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믿으라”는 명령도 어떤 새로운 차원의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기보다는 “계속 그 믿음을 지켜라”는 명령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이제 곧 세상은 미쳐 돌아갈 것이고, 제자들을 홍수처럼 집어삼키려 하겠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속에서 버티고 견뎌야 할 것이라는 말이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그렇다 치더라도, “또 나를 믿으라”는 명령은 더욱 따르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따라왔는데, 그가 이제 곧 사람들에게 붙잡혀 법정에서 범죄자로 재판을 받고,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십자가에서 처형을 받게 될 이 선생님을 믿으라는 요구는 이성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불가능한 요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요구는 실은 이전에 ‘아브라함’이 직면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요구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롬 4:18). 현재의 상황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며, 주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믿음도 바로 그와 같은 수준의 것이었다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자신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어지는 두 절에서는 믿음에 대한 이와 같은 요구가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절)
즉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지켜야 할 이유가 이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믿음은 공허한 것이 아니라 약속을 가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단순히 죽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집”(oijkiva, 오이키아)이라 여러 개의 부속 방이 딸린 큰 건물을 말하는 것으로서, 현대적인 의미에서 아파트 정로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집”을 “영적인 집” 내지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려 합니다(참고: 고전 3:16-17; 엡 2:20-22; 벧전 2:5; 요 2:19-21). 그렇다면 이 약속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있어서도 가능하게 될 영적 교제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 육체적으로 떠나지만 조만간 “성령”으로 다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아버지의 집”과 관련해서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비가시적(非可視的)이며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집을 말하는 것으로서, 즉 하나님의 통치와 사랑이 미치는 이 땅과 하늘의 모든 영역과 그곳에서 현재 누리게 될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그것입니다. 다른 견해 역시 비가시적이긴 하지만, 초월적인 의미에서의 집을 말하는 것으로서 문자 그대로 현재 하나님이 계신 그 천국이라는 견해가 그것입니다. <신약>에서 흔히 이 공간을 “하나님의 도성” 내지는 “하늘의 예루살렘”(히 12:22; 계 21:9-22:5)으로 부리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요한’ 화자가 그리는 “집”은 묵시론적이라기보다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전자(前者)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교를 위해서 다음 구절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예수께서 지금 떠나시는 이유도 바로 지금 존재하고 있는 그 집을 마련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사람들”이 자기와 함께 그곳에 머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유일한 길(4-6절). 이 단락에서 예수님은 승천과 재림에 관한 주제를 더욱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아버지 하나님에게로 떠나신다고 했으니 이제 그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관한 주제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4절)
하지만 제자 ‘도마’ 역시 다른 제자들처럼 충성스럽긴 하지만 여전히 지각이 그렇게 뛰어나지 못한 듯합니다. 그의 질문은 조금 전에 ‘베드로’가 물었던 질문과 대동소이하며(13:36), 동료 제자들의 무지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5절)
이 질문 역시 “오해”의 전형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신다는 말을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서 전체적으로 “오해”는 진리를 보다 명쾌하게 드러내게 하는 수사적 장치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도마’의 질문은 예수님에 관한 그 유명한 선언을 낳게 했으니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절)
이 구절은 그 유명한 3:16의 선언과 함께 복음을 가장 탁월하게 드러내는 표현으로서, <요한복음> 구원론의 고전적인 선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6절의 선언은 당연히 <서막>의 선언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서막에서 그리스도는 ‘로고스’ 즉 “하나님의 말씀”이며, “생명”이며 “빛”이라 선언한 바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의 세 용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방점(傍點)은 “길”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 이유로 이 구절은 4절을 설명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로 마무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두 용어, “진리”와 “생명”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두 단어는 예수님이 “길”이라는 선언에 대한 일종의 유사 반복적 선언의 기능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즉 예수께서 “길”이 되는 이유는 그분이 “진리”이기 때문일 것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유사 반복의 형식은 6절 전체적으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6절 후반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는 선언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긍정 선언문을 부정문으로 바꾸어 반복 선언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선언은 기독교를 가장 기독교답게 해주는 지극히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선언으로 간주할 수 있겠습니다만, 실은 전 포괄적인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며, 그 진리와 생명은 예수님 안에서 성육신한 것입니다”(참고. 골 1:19; 2:9).
유일한 계시(7-11절). 예수님이 하나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선언은 그가 곧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의미이며, 따라서 그분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결국 아래 7절의 말씀은 6절에서 긍정과 부정문으로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에 대한 논리적인 귀결이 되는 셈입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절)
제자들이 이 말을 이해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빌립’이 대표 질문자로 나서고 있습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8절)
“우리가 그분을 보았다니?” ‘빌립’의 충격적인 반응입니다. 그의 질문은 이런 것이겠지요: “하나님 아버지를 한번만이라도 보여주기라도 한다면 이 모든 의심과 두려움이 깨끗이 사라질 텐데.” 하지만 이 질문 역시 <요한복음>에서 만나는 전형적인 “오해”로서, 복음의 신비와 진리를 더욱 밝히 드러내게 하는 기능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은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의 의구심을 대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열망을 대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단 한 번이라도 볼 수만 있다면 그를 믿을 수 있을 텐데.” ‘시내’산에서 ‘모세’도 같은 동일한 열망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비록 뒷모습이긴 하지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특권과 영예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21-23절). 아무튼 ‘빌립’은 독생자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해하고 깨닫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겠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그러나 진정 영적 통찰력을 지닌 자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필요하고도 충분한 계시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젊잖게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시 한 번 “요한 계시”의 절정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절)
그리고 이 질책은 단순히 ‘빌립’만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앞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을 향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예수가 존재하는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의미는 그 자신을 드러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안다는 것, 예수와 사귐이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무슨 계시가 필요할 것입니까!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이어지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0절)
‘유대’ 전통에 따르면,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와 동등하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마치 왕의 사신(使臣)이 그 왕을 대표하고 대변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분을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론의 여지가 없는 말이긴 하지만, 10절에 따르면 그보다 더한 근거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예수님과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동등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구절은 <서막>의 선언, 즉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와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여러 차례 주장하신 바 있습니다(10:30, 37-38). 때로 진실은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깊고 높지만,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성호 내재성, 영원한 교제를 이해하기 어려우면 예수께서 하시는 일, 즉 “표적”을 통해서라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1절)
사실 화자가 자신이 소개하고 있는 일곱 개의 기적을 단순히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표적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역의 원동력(12-14절). 다락방 강론 전체를 흐르는 “믿음”에 관한 요청과 권고는 이 단락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에 대한 요구는 위로와 격려와 약속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단락에서 위로가 담긴 예수님의 권고는 가히 충격적입니다. 그 내용 때문입니다.
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2-14절)
여러 학자들이 이 단락의 의미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들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락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몇 가지 분명하게 관찰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즉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의 시제(時制)가 모두 미래형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종말의 날까지 지속될 교회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나를 믿는 자”는 단순히 사도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 즉 모든 신자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둘째, 본문은 단일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하나의 핵심 주제를 전달하고 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곧 다시 언급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내가 하는 일”은 다름 아닌 그분의 “표적” 즉 모든 기적들을 말합니다. <요한복음>만을 볼 때, 이들 표적은 <서막>을 제외한 2-12장 사이에서 보여주고 있는 일곱 가지의 기적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점을 첫 번째 관찰과 연결해서 이해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행하신 그 모든 기적들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뿐 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보다 더 많은 새로운 기적들을 나중에 행하게 될 것이라는 말도 아니고, 그들의 사역에서 예수님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보다 큰 일”이란 표적으로서의 기적, 즉 기적의 목적을 달성하고 성취시키는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며, 아들을 통해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행하신 그 모든 기적들을 행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보다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은 놀랍게도 이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하나님의 사역과 비교하면서 하신 말씀과 기막힌 유사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5:20). 아들이 행한 더 큰 일이란 것이 다름 아닌 아버지가 행하신 모든 일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준 것이라면, 예수님의 제자가 하게 될 더 큰일은 예수께서 행하신 그 모든 일을 세상에 드러내어 세상으로 하여금 보고 믿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일”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즉 죽음과 부활로 가능하게 될 것이었습니다(12절과 13절이 연결되는 방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이것이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근거라면, 체험적이고 실존적인 근거도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 자신의 “기도”입니다(13-14절). 죽음과 부활이 예수님 사역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면, 기도는 제자들이 행해야 할 몫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더 큰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점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이 아닙니다.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죽음과 부활 이전에 시공의 제한 속에서 제자들과 함께 행하시던 예수님의 지상사역과 부활 이후 하나님의 보좌 위에서 제자들을 통해서 행하시는 천상의 사역입니다. “더 큰 일”은 바로 후자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인류에게 열릴 것이며, 온 세상은 구원과 구속의 은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며, 제자들은 능력으로 열방을 향해 사역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능력이라 함은 그들이 조만간 받게 될 “성령”을 뜻합니다만, 아직까지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더 큰 일”은 제자들의 독자적인 사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펼쳐나갈 그분의 지속적인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들 안에 있는 아버지의 영광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해서 드러나고 구현될 것입니다!
제자들의 기도는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 두 절(12-1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기도에 관한 약속은 나머지 한 절(14절)에 이어지면서 그 의미가 더욱 확장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두 경우 모두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되어있지만, 14절에서는 “내게 구하라”고 첨언(添言)하심으로써 묘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굳이 두 기도의 차이를 비교하자면, 전자(前者)의 기도는 성부 하나님에게(13절), 그리고 후자(後者)의 기도는 예수님에게(14절) 한다는 차이입니다. 이처럼 미묘한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기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역할일 것인 즉,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사실입니다(참고. 딤전 2:5).
또 다른 보혜사(15-17절). 이어지는 강론의 주제는 <요한복음>에서 다섯 번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소위 “보혜사 강론”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참고. 14:26; 15:26; 16:7-11, 12-15). 하지만 15절은 전후 단락의 주제와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입니다. 기도와 보혜사에 관한 강론 사이에 “예수님의 계명”에 관한 언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15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5-17절)
여기서 “(예수님의) 계명”은 “(내) 말”, “(아버지의) 말씀” 등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21, 23-24절), 단순한 윤리․도덕적 교훈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참고. 8:31-32; 12:47-49; 17:6),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따라 살아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보혜사”(paravklhto", 파라클레토스)는 “돕는 자”, “중재자”, “변호자”, “위안자” 등을 의미하는데, <한글 개역판>에는 “보혜사(保惠師)”, “대언자”(代言者)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동사적 형용사로 원래 “남을 도우기 위해 부름 받은”이란 수동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점차 능동적인 의미의 “법정에서 도우는 자”, 또는 “변호사” 등을 뜻하는 법률 용어로 발전되었다고 합니다. “보혜사”와 관련된 네 번째 강론에서 이점을 보다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참고. 16:7-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혜사”를 전적으로 법률적인 관점에서만 볼 필요는 없는 것이,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다른 기능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보혜사”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며”, 또한 “이해를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참고. 14:25-26; 16:13-14).
여기서 “성령-보혜사”를 “또 다른 보혜사”로 지칭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예수님도 실은 “보혜사”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리스도-보혜사”는 승천하신 예수님을 일컫는 말로서, 그분은 지금 천국의 법정에서 “자기 사람들”을 위해 변론을 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천국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또 다른 ‘보혜사’로서, 적대적인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돕고 변론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은 지상에서 그분의 “보혜사”로서의 역할을 완수하셨으며, 승천 후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에 이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서 제자들을 위한 동일한 사역을 담당하도록 요청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단락은 또한 “보혜사”를 “진리의 영”으로 지칭하고 있기도 합니다. 혹자는 이 용어를 두고 ‘유대’교나 ‘쿰란’ 공동체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즉 세상에는 “진리의 영”과 이에 대항하는 “악의 영”이 있으며, 세상과 인간은 이 두 영 사이에서 어는 한 쪽을 선택하고 따르는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화자가 의도하는 바, “진리의 영”은 단순히 진리이신 예수님을 대변하고 드러내는 영(靈)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즉 하나님에게 적대적인 세상은 본질상 성령을 받아들일 수도,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신학자 ‘불트만’(Bultmann)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스스로 성령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만일 그렇게 되려면 스스로의 본성을 포기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과 관련해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용어, “영접하다”, “보다”, “알다” 등은 모두 믿음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서, 예수님 안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그와 같은 계시를 거부하기 때문이며,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에 눈이 먼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할은 이와 같은 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지식을 갖도록 하는 데 있다 하겠습니다(참고. 16:8-11). 따라서 누구든 이 증거를 듣고 받아들이면 그들은 새로운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며, 예수님 안에 계시된 성령을 보고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혜사”를 알게 될 것인데, 이는 그가 그들 속에 함께 거할 것이며,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7절).
예수님의 부활(18-20절). 이어지는 단락에서 강론의 주제는 일견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8-20절)
“승천과 재림”에 관해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한 차례 강론하신 바 있기 때문에(참고. 1-3절), 이 단락 역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직전 단락의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한 약속과 연결시켜보면 예수님의 재림은 가시적인 육체로서가 아닌 비가시적인 성령의 형태로 재림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성령의 형태로 다시 올 것이라는 언급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단락은 첫 번째 단락(1-3절)의 주제인 “승천과 재림”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출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18절을 19절의 맥락에서 읽어보면 이점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물론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있든 또는 세상에 남아있든 이 세상은 빛을 거부하므로 결코 그분을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만(참고. 1:5, 10), 제자들은 다시 그분을 보게 될 것인즉, 이는 예수님이 살아계시며 제자들 또한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하게도, 제자들이 보게 될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육체적인 모습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우리는 이 단락에서 다시 한 번 ‘요한’ 화자 특유의 어휘들, 즉 “보다”, “살다”, “알다” 등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 단어가 <요한복음>에서 단순히 표면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영생의 영역에 속한 단어들로서 영적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세상은 그대로 “눈 먼”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지만, 제자들은 새롭게 눈을 떨 것이며, 영적 진리를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그리고 제자들의 하나 됨에 관한 진리가 그것입니다(20절; 참고. 16:16-30).
하지만 부활절이 주는 의미는 단순히 제자들의 변화된 삶에 국한될 수만은 없습니다. 부활절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 즉 예수님이 수시로 언급하신 바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일 것입니다. 이 단락이 종말론적인 어휘들로 채워져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예컨대, 부활 이후의 출현을 뜻하는 “내가 다시 오리라”는 말씀도 넓게는 종말의 재림으로 확대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조금 있으면”(19절)이라는 표현도 종말론적인 의미의 “때가 되면” 또는 “그 날에” 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사 26:20; 합 2:33-34; 히 10:27-28). 또한 “그 날에”(20절)는 “종말에는”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사 2:11; 4:12; 막 13:32).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이자 표적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는 점도 새 시대의 시작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부활하여 자신의 제자들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갈 것인 즉, 그분이 지금 떠나시는 것은 이 모든 일을 위한 준비작업 일 뿐입니다. 어떻게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인지에 관해서 이어지는 단락은 보다 상세하게 설명해 줄 것입니다.
신자와 예수(21-24절).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을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그분의 부활로 이 약속을 지키실 것이었습니다. 부활 이후의 출현으로 그분과 제자들 간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 즉 한 차원 높은 관계로 발전할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관계란 20절에서 천명하고 있는 사실일 것인데, 신자와 예수님과 하나님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며, 제자들은 “보혜사”의 사역으로 이와 같은 새로운 관계를 알고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 내지는 인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단락은 그 일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21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21-24절)
구체적인 설명은 21절에 요약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네 절로 이루어진 이 단락의 형식은 22절의 질문을 제하면 동일한 내용이 긍정문과 부정문으로 유사반복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긍정문으로 이루어진 21절과 23절의 반복에 이어 부정문으로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는 24절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단락의 내용은 15절의 선언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새로운 두 가지 선언이 추가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과, 또 하나는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첫 번째 선언과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만 국한되지는 않겠습니다만(참고. 3:16),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두 번째 선언도 첫 번째 것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아버지를 새롭게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도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 “나타내다”(ejmfanivzw, 엠파니조)는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서 사용한 바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 33:13);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하나님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신약>에서 이 단어의 의미는 더욱 확대되어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마 27:53; 막 16:9; 행 10:40).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이와 같은 약속은 신자 개개인을 향한 것으로서 부활 이후 사도들에게 자신을 보이셨던 사건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을 위한 제한적인 부활 이후의 출현이 모든 신자들을 향한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점을 이해했을까? 다시 한 번 “오해”가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유다’가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사도들의 대표주자로 나서고 있습니다(22절). 그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지금 세상이 깜짝 놀랄 하나님의 또 다른 현현(顯現)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가 기대하고 있는 현현은 출애굽의 계시를 능가하는, 즉 ‘메시야’의 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나타나서 능력으로 나라와 민족을 심판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복음서>에서 “오해”는 항상 진리를 위한 창문으로 기능해 왔다는 사실을 주지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현현은 그런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직전에 하셨던 말씀을 다시 한 번 반복하심으로써, ‘유다’의 오해를 교정해 주십니다. 즉 그분의 말씀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일 것이며,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3절).
여기서 “거처”와 관련한 예수님의 약속은 2절에서도 찾을 수 있어 자연스럽게 두 절이 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단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사뭇 다릅니다. 2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 단어 “처소”는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tovpo")를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 23절에서는 “동거”를 뜻하는 ‘모네’(monh)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두 약속은 다른 시점을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의 약속(2절)이 이미 설명한 바대로, 종말론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면, 이곳에서는 일차적으로 부활 이후의 신자들의 체험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선포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하는 모든 신자들의 삶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신자들의 삶에 내재(內在)하실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이 같은 선언은 일차적으로 ‘유다’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의 형식으로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종말이 또 다른 방식으로 실현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겔 37:26-27; 슥 2:10; 계 21:3).
마지막으로 24절은 이 단락의 결론으로서, 앞선 두 절(21, 23절)의 선언을 부정문으로 다시 한 번 반복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믿음에 대한 호소는 지금까지 하신 말씀에 대한 권위를 더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단락의 전체적인 내용과 관련해서 한 가지 유용한 질문을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그것은 부활 이후 신자의 삶에 내재하실 예수님과 하나님과 보혜사 성령님의 내재 사이의 상호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님의 임재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임재를 실현시키고 구체화 하는 방식이라는 입장이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이해였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초대 교회 교부들은 이 말씀을 삼위의 인격체가 신자의 삶에 내재할 것이라는 약속으로 이해했다고 했습니다. 하기야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께서 보혜사 예수님의 사역을 잇게 될 것이고, 예수님은 항상 성령님의 사역으로 대변될 것이므로, 정확히 두 위격(位格)의 차이는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으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성령님을 영접하는 것과는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사실 여러 <바울 서신>에서도 이점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임재와 그분의 사역을 성령님에 중재하고 전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신학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이 단락은 성령님과 연관 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 보혜사(25-26절). 성령님의 사역은 일부이긴 하지만 이어지는 단락에서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 즉 성령님의 사역은 가르치고 해석하는 자, 즉 선생으로서 역할입니다.
25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25-26절)
여기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다”는 표현은 다락방 강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서, 그 당시의 상황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예. 16:1, 4). 보다 구체적으로는 23-24절의 말씀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너희와 함께 있다”는 말씀으로 미루어 이제 그분은 곧 떠나실 것이며, 보혜사 성령께서 자신의 사역을 이제 곧 수행하게 될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조만간 다락방 강론이 모두 끝나게 될 것이므로(13:31-14:31),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사역도 이제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실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26절).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관해서 늘 “하나님이 보낸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참고. 4:34; 5:23, 24, 30, 37; 6:38-40; 7:16; 8:16, 18, 26; 12:44-49). 예수님은 자신이 그분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며, 아버지를 대변하고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5:43; 1:25). 그런데 성령은 이 단락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왔으며, 예수님의 대변자로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자신의 이름으로 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님 또한 그 자신의 이름으로 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사역은 두 가지로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는 일입니다(26절). 두 사역은 대동소이하면서 상호 보완적입니다.
여기서 “생각나게 하다”(uJpomimnhvskw, 휘포밈네스코)는 <복음서> 전체적으로 이곳에서만 유일하게 등장하는 동사이긴 합니다만, <요한복음>은 다른 곳에서 이와 비슷한 의미의 동사로 “기억하다”(mnavomai, 므나오마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2:17);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2).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며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부활절에 이은 성령 강림 이후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는 자로서의 성령님의 사역의 내용이나 한계가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즉 성령님은 예수님이 가르치지 않으셨던 무슨 새로운 계시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이미 가르치고 설명해준 내용들을 깨닫게 해주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보혜사-성령님을 인격 대명사 “그”(he)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성령님이 하나님이나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인격적 존재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단락에서 다시 한 번 삼위일체의 신학이 불가분 암시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에필로그-평안을 전함(27-31절). 다락방 강론은 이제 처음 시작했던 그곳으로 되돌아오면서 마감을 하고 있습니다. 즉 위로와 확신,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그리고 믿음에 관한 권면과 격려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사실 다락방 강론의 전체적인 결론(15-16장)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이 단락의 내용과 사실 상 동일하다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eijrhvnh, 에이레네)을 약속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절)
“평안을 끼친다”는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안녕”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할 것입니다. 단순한 “평안”이 아니라 “나의 평안”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평안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죽으셨으며, 그리고 다시 오실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 여러 곳에서 ‘메시아’를 평안을 가져다주는 자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참고. 사 9:6-7; 52:7; 57:19; 겔 37:26; 합 2:9; 행 10:36; 롬 14:17).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는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아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현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성공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에스파냐 ·갈리아’ 평정을 기념하여 주전 13년 ‘로마’의 ‘마루스’ 평야에 착공하여 주전 9년에 완공한 소위 “평화의 제단”(Ara Pacis)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제단은 지금도 ‘로마’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만, 그것이 증거하고 있는 것은 세상의 평화가 아니라 황제의 공허한 ‘메시아’적 망상입니다.
강론의 벽두에서부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셨으며, 그 이유에 대해서도 함께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2-3절). 그 이유란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며,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믿는다면 제자들은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이 즐거워해야 할 더 큰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28절)
그것은 “아버지가 나보다 더 크다”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능자 하나님께서 세상만사를 그분의 절대적 통제 아래 두고 계시며, 그분의 의도대로 이끌어가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곧 그분에게 닥칠 폭풍마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제자들은 놀라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강론의 마지막은 이에 관한 말씀이며 예고입니다.
29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29-31절)
여기서 말하는 “그 일”이란 전체적으로 예수님의 체포에서 죽음에 이르는 그 모든 일을 지목하는 것일 테지만, 좁게는 한 제자의 배신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의 배신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참고. 13:19; 막 14:41-42). 다만 다른 곳에서는 구체적으로 ‘가롯 유다’를 지목하고 있는 것에 비해, 여기서는 “이 세상의 임금”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결국 ‘유다’는 악마의 도구에 불과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마귀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는 것이, 예수님 말씀대로 그분은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8:23). 오히려 세상이 알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며, 따라서 세상의 요구에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세상과 마귀에 맞서 싸워,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시며, 그 결과 세상을 구속하실 것이었습니다(참고. 3:16; 10:17-18).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로 하여금 그분과 함께 일어나 대적을 맞으러 나가자고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강론은 결말을 맺고 있으며, <수난 이야기>는 18장에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아들과 아버지, 동일한 영광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영웅 만들기”에 익숙해 있지 않는 듯합니다. 오늘날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이순신 장군만 하더라도 임진왜란 당시에는 칭송은커녕 옥살이까지 치러야 했습니다. 그의 전공(戰功)을 시기하고 질시하는 주변 인물들의 무고와 모함 때문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우리네 속담에도,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외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미국만 하더라도 무수히도 많은 영웅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무명용사에서부터, 정치인, 과학자, 예술인, 사업가에 이르기까지 나라 곳곳에 그들의 동상이나 비(碑)를 건립하기도 하고, 학교나 도서관, 심지어 공공건물에까지 사람의 이름을 붙여 그 공적을 기립니다. ‘할리우드 블루바드’의 “명예의 거리”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곳에 가면 약 5 킬로미터에 달하는 보도 바닥에 미국 영화사에 큰 족적(足跡)을 남긴 배우들의 손바닥 도장이 그 이름과 함께 찍혀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한 영웅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동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부산 용두산 공원에 세워져있는 이수현 동상이 그중 하나입니다. 그는 수년 전 대학생 신분으로 일본을 관광하는 중에, 한 전철역에 떨어진 일본인 승객을 구하고 대신 달려오는 열차에 깔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상은 그의 가족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운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여기에다 세운 것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십여 년이 가까이 됩니다만, 아직도 그 동상을 찾아 헌화(獻花)를 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의 가슴을 감동시키고, 아프게 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가 이곳에서 거의 매일 노숙객들을 위해 무료 식사를 나누어주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라는 생각입니다! 아들 수현이는 죽어서 가문의 영광이 되었고, 그의 어머니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그 희생적인 일로 해서 죽은 아들의 이름을 더욱 영광스럽게 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영광(榮光)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단어의 기원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헬라’어로 ‘독사’(dovxa)라 불립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 단어는 “드러내 보이다” 또는 “입증하다”와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입장을 드러내다” 또는 “견해를 밝히다” 등으로 그 의미가 다소 변천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입장”이나 “견해”에는 선의(善意)의 평가와 악의(惡意)의 평가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어있었는데, 이중 좋은 의미의 평가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영광”의 의미가 “높이다” 또는 “찬양하다” 등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단어의 어원과 관련한 이와 같은 고찰은 <성경>의 용어들을 이해함에 있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컨대, 흔히 말하는 “정통”(orthodox; 오소독스)이란 단어도 결국 “올바름”을 뜻하는 ‘헬라’어 ‘독사’(doxa)와 불가분의 연관성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위 하나님에 관한 “정통신학”이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견해”를 뜻하며, 이는 다시 하나님에 관한 찬양 내지는 높임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어의 “예배” 즉 ‘worship’도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worth)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람이 영광의 반열에 오른다는 말은 무엇일까? 한 가문은 또 어떻게 영예스러운 가문이 될 수 있을까? 그 이름에 충실한 업적 내지는 족적을 남길 때가 아닐까?
아들의 영광. 같은 질문을 인자 즉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인자는 어떻게 “인자의 영광”을 누릴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달리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자는 어떻게 인자로 증명될 수 있을까? 어떻게 인자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로마의 백부장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후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 23:47). 사실 지금 이 순간까지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분의 사도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백부장은 어떻게 그러한 평가를 내릴 수 있었을까? “그 된 일을 보고”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을 보고”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그의 죽음, 즉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지금 다락방 강론에서 이점을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가롯 유다’가 어두운 밤 속으로 떠나간 후에, 비로소 “인자의 영광”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그가 없기 때문에 비로소 마음 놓고 하고 싶은 말씀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런 경험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즉 서로 마음이 통하는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나 나눌 수 있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별로 가깝지도 않은 친구가 곁에 함께 있으면 말하기가 싫은 것처럼 말입니다.
대화의 초점은 “영광”(dovxa; 독사)에 관한 것입니다. 이 짧은 두 절에서 이 단어가 무려 다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하겠습니다(주의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먼저 그분은 “인자의 영광” 즉 “그리스도의 영광”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 증거는 말할 것도 없이 그분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얼마 전 ‘헬라’인들이 찾아 왔을 때에도 주님은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12:20-32). 전혀 상반되는 두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같은 단어 “영광”을 사용하셨다는 말입니다. 한 번은 사랑하던 제자 ‘가롯 유다’가 그를 배신하며 떠났을 때였고, 다른 한 번은 이방인들이 그를 보러 찾아 왔을 때였습니다.
과연 이 두 상황은 어떤 방식으로 함께 어우러져 동일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두 경우 모두 그리스도를 제대로, 그리고 올바르게 보여주고 있으되,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는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지금”이 의미하는 암시하는 바는, ‘유다’가 떠남과 동시에 방아쇠가 당겨졌다 입니다. 즉 체포와, 재판과, 십자가 처형이라는 연쇄 작용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인들의 방문이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방식은 십자가 처형 이후에 이루어진 일들을 통해서입니다. 즉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세상의 주로 등극하게 된 방식을 말합니다.
아버지의 영광. 이와 같은 일련의 연쇄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들의 복종이며, 이 복종이야말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 즉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이며,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17:4).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실로 신성모독적인 발언으로 실로 심각하게 듣지 않을 수 없는 발언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항상 인간의 근접이 불가능한 “빛”으로서, 구름이나 천둥 뒤에 거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마치 태양의 광채가 태양으로부터 나오며 태양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이며, 그분을 떠날 수도 없고, 또한 어느 누가 더하거나 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강론은 사뭇 다릅니다. 그분의 말씀인 즉은 “하나님의 영광”은 성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의존적이며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영광은 아들의 영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아들의 영광과 아들을 통한 아버지의 영광은 너무나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실재(實在)이기 때문에 그 반대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31절). 아버지가 아들과 같이 되지 않고서야 어찌 이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태양과 태양 빛을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 일을 좀 어려운 말로 “아버지의 아들 됨”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함이나, 공의로움이나, 전지전능함 등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영광의 또 다른 얼굴, 즉 겸손과, 연약함과, 철저하게 의존적이며 의타적인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관련된 이와 같은 역설은 강보에 쌓여 속수무책으로 누워있는 아기 예수를 상상해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능자 ‘야훼’의 운명이 연약한 한 소녀의 손에 달려있었다니 말입니다!
모두의 영광. 아들과 아버지의 영광에 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이러합니다: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니”(32절하). 아버지가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았으니, 아버지 또한 아들을 영화롭게 하리라는 뜻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이제 “곧”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즉 내일의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순종의 결과 누리는 축복입니다.
이제 그분은 이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염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일을 이제 기꺼이 즐거움 마음으로 짊어질 각오와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 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하지만 예수님이 간절하게 고대하고 있는 바는 그 이상입니다. 창세 이전부터 누리던 그 특별한 지위와 관계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신 것입니다. 마치 군 복무를 위하여 몇 년을 잠수함 안에서 근무하던 해군 장병이 고향집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요. 예수님은 이 특별한 지위를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영광이라 칭한 바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영광의 자리를 하나님 보좌 우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금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우리는 이를 섭리(攝理)라 부릅니다. 두 가지 영역에서 그분이 섭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는 우주를 질서정연하게 유지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작은 우주 즉 내 영혼을 늘 깨끗하게 유지시켜주는 일입니다. 지금 그렇게 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그리스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셨으므로, 이제 내가 그 영광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는 좋은 소식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은 내가 없이는 영광스럽게 될 수가 없다는 소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나 없이는 정말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하). 모두 곤경에 빠진 하나님을 도웁시다!
2. 새 계명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표지나 상징들을 사용합니다. 십자가로 된 목걸이를 하기도 하고, 타고 다니는 자동차 범퍼 뒤에 물고기 형상이나 기독교 방송국 주파수를 보여주는 스티커를 붙이거나, 거실 벽에 성화나 성구(聖句) 또는 십자가를 걸어두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음식을 앞에 놓고 기도를 하며, 교회에서 찬송과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모습을 통해서 사람들은 우리가 교인임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우리 스스로도 그렇게 보이는 것에 대해서 크게 부담스러워 하거나 거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대해서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만, 예수님께서 그가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의 제자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끝까지 지니고 다니라고 주신 가장 중요한 표지가 하나 있습니다. 그 표지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분의 명령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34-35절).
이 명령은 하나의 조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순종하면 그리스도께서 주신 표지판을 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령이기 때문에 불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요점은 그리스도인이면서 이러한 표지를 보여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기독교인이기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표지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아주 고약한 표지판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 명령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우선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우리 동료 그리스도인입니다. 즉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특별히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도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같은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이 넘치게 하사(살전 3:12)
믿음의 가정이라고 했으니 한 가정 내에서 부모나 자식 간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가족 또는 가정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가정에는 남편과 아내가 있고, 부모와 자식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부터 그분의 신비한 섭리로 하나님의 가정을 이루도록 계획되어 있었습니다(엡 1:4-5). 이 가정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바울’은 힘주어 설교하고 있습니다(엡 5:21-6:4).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다른 그리스도인을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미워할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억압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교단이나 신학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없이 많은 갈등이나 분열과 심지어는 전쟁까지 불사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종교개혁 시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갈등이나 미움은 지금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동방정교회와 로마 카톨릭 사이의 갈등,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 개신교와 러시와 정교회 사이의 갈등, 진보와 보수 사이의 갈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분열과 갈등은 같은 교단에 속한 교회들 사이에서도, 심지어 한 교회 내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 시절 옷 로비 사건으로 국회 청문회에서 서로 비난하며 싸우던 사람들이 모두 한 교회, 한 선교회에서 동역하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본인이 오래 전에 대학교 내에 침례교회를 개척했을 때, 가장 반대하고 핍박하던 사람은 다름 아닌 동료 침례교 목사님들이었습니다. 지방회 가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모순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인정하기 어렵지만 세상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비종교인들을 상대로 향후 종교를 가질 의향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응답자의 70% 정도가 그럴 의향이 없다고 답한 여론 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탈현대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기독교를 비롯한 여타 종교가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고사하고, 짜증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갖가지 반사회적이고 이기적인 교회나 사찰의 행태의 결과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러한 판단을 내릴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만일 내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다른 하나님의 가족들을 사랑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판단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이 오르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도 이 점에 대해서 매우 강력하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 「기독교 교회관」. 박문재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서울). 1995, 207-232쪽.
그가 말하는 요지는 간단합니다. 즉 주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할 말이 있다. 나의 권위에 입각해서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권리를 주겠는데, 어떤 사람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보이는 사랑을 토대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말인데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즉 다른 그리스도들을 사랑하지 못할 때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하거나 판단한다고 해서 화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단지 주님께서 주신 권리를 행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집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그들의 말이 정말인지 아닌지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은 당연히 할 말을 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한 가지 주의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주님에게 나아가 용서와 자비를 구해야 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 각자에게 적용해 봅시다. 내가 동료 그리스도인을 사랑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편리한 자기합리화인가 의아해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세상은 우리를 위선자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부를 수 있을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주신 그 판단의 잣대를 자기 자신이 우리를 향해서 쓰신다면 아마도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놀라운 그분의 자비가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새 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세상이 우리를 판단할 아무 근거나 이유도 갖지 못하게 하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쉐퍼’ 박사는 그리스도인 간의 사랑을 궁극적인 기독교 변증, 즉 복음 전도의 능력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 213쪽.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복음의 주장이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도 없고 거짓으로 판명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의 훼방꾼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정말 깜짝 놀랄 일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어떤 교리나 신학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이나 관심도 없습니다. 오직 그들은 우리가 서로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가만 가지고 복음을 판단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단들도 사랑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서신>이나 <요한서신> 등을 읽어보면 그들을 멀리하라고까지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이들은 일단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시켜도 될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사실 이단들이 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은 지대합니다. 극단적인 신비주의나 현실 도피적인 종말론에서부터 극단적인 현실 참여를 부르짖는 소위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이단들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사회악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본인이 사는 단지 내에 안식교회에 출석하는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실하고 인사성이 아주 밝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 부부와 함께 성경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들의 의도는 선하고 착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만, 과연 이들과 성경공부를 함께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식교의 교리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 교단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새 계명”이 아니라 “옛 계명”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옛 계명”은 이스라엘의 ‘쉐마’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쉐마’를 떠올리면서 한 부자 청년에게 두 번째로 가장 중요한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즉 그들도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는 사람들이 모두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설령 이단에 속한 교인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와 견해를 달리하는 기독교인들이나 더 나아가 타 종교인들과 함께 어울려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성숙은 물론이고 훌륭한 인격을 형성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오히려 극단적이고, 근본적이며, 교조적인 종교인들이야말로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며 긴장과 갈등을 조장하고 증폭시키는 주범입니다. 그런 점에서 <히브리서>의 다음과 같은 충고는 기막힌 생활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본문에서 관심의 대상은 이단이나 믿지 않는 이웃이 아니라, 동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우리의 질문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가족들을 사랑해야 하는가?”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한계를 정해주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34절). 이 한계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스캇 펙’ 박사는 이러한 사랑에 대해서 아주 훌륭한 책을 한 권 쓴 바 있습니다. 스캇 펙, 「아직도 가야할 길 」. 신승철․이종만 옮김. 열음사 (서울). 1995, 207-232쪽.
재미있는 것은 이 분이 참된 사랑에 대해서 정의내리기 전에, 사랑이 아닌 것에 대해서 여러 장에 걸쳐서 예를 들어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곳에서 다 소개할 수는 없고 한 가지 특별히 본인의 마음이 끌렸던 구절이 있었는데, 사랑은 단순한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우리 중에서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고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펙’ 박사는 그것이 곧 사랑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느 술주정뱅이가 가족을 내팽개치고 늘 술에 저려 살면서 이튿날 술이 깨면 가족이 불쌍하다는 생각에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그가 그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펙’ 박사는 사랑은 “의지적인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아무런 감정이나 느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임감으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매 순간 선택해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느낌이나 감정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합니다. 제가 저의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랑의 감정을 가졌던 그 달콤한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특별히 어느 저녁 사랑을 고백하고 첫 키스를 나누었을 때 그 황홀했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27년이 지난 지금 그 감정이나 기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황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나는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서 다른 여자가 아닌 아내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건강할 때나, 아파 병원에 누었을 때나, 수술로 몸이 찢어져 있을 때나, 늘 동일한 선택을 합니다.
영화 <Love Story>에서 여주인공이 백혈병으로 죽어가면서 그의 사랑하는 남자 친구에게,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라고 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미안해, 용서해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그러한 요청을 했을 때 용서하고 싶은 감정이나 느낌이 전혀 없음에도, 나는 미움보다는 용서를 의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쉐퍼’ 박사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 221쪽.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도 이처럼 늘 의지적인 선택 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할 때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쪽을 의지적으로 선택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시고.” 도대체 얼마동안 이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살아야 할까? 주님은 일흔에 일곱 번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용서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참으로 끈질기고 지속적이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평생을 미움과 원망 가운데 살아갈 수도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나는 용서한다”는 의지적인 선택을 매일처럼 반복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3. 베드로의 헌신
지금은 고전이 되어버린 미국 영화 <카사블랑카>에 나오는 남여 주인공의 대화입니다:
“당신 어제 저녁 뭐했죠?” 여인이 묻습니다.
“그렇게 먼 옛날 일은 나는 기억하지 못하오.” 남자의 대답입니다.
“그러면 오늘 저녁 무얼 할 건가요?” 여인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게 먼 장래 일은 예측할 수 없다오” 남자는 그렇게 대답합니다.
이런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예언에 대한 어느 현자(賢者)의 충고가 떠오릅니다: “결코 예언을 하려들지 말라. 만일 당신의 예언이 틀리면 사람들은 당신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고, 만일 맞으면 그 예언을 기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고 있는 대화나, <성경>의 모든 <예언서>들의 핵심 메시지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라는 것이지요.
헌신을 미래에 대한 일종의 예언이라고 본다면, 오늘 ‘베드로’의 놀라운 헌신의 고백도 예언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의 헌신이 내일 어떻게 하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불교계의 거장 승철 스님이 남긴 유명한 법어가 생각납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이 법어는 말할 것도 없이 당시의 어두웠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산을 물이라고 하고, 물을 산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겠죠.
이 말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냥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진리를 진리대로 받아들이며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충고가 아닐까요? 어제가 어떠했고, 내일은 어떠할 것이라는 짐작이나 회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이겠죠. 예수님도 내가 내일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헌신이나 고백을 할 것 없이, 오직 우리의 대답을 “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이유대지 말고 시키면 지금 당장 시키는 대로 순종해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내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학생이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고 졸고 있거나, 딴 생각하고 있으면 엉뚱한 질문을 하게 되는 법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새 계명”을 말씀하시고 있는 이 순간에 그가 제대로 듣고만 있었다면, 그의 질문은 달라야 했습니다. 예컨대, “주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라든지, 아니면 “주님, 우리에게 정말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라고 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왜 나는 지금 갈 수 없습니까?” 영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 질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씀에만 크게 마음이 흔들린 듯합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아무도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자, ‘베드로’는 그다운 헌신과 맹세로써 자신의 충성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37절). 어떻게 보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통제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정녕 잘못된 것일까?
나의 청중이 누구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의 청중이 누군가에 따라 설교의 내용이나 톤이 달라져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마태복음>의 메시지와 <요한복음>의 메시지가 같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놓고 서로가 옳다고 싸우고 있는 모습입니다. 한쪽은 오직 믿음으로, 다른 한 쪽은 오직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내가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다면, 나는 ‘베드로’를 영웅으로 치켜세울 것입니다. 그의 본을 따르자고 웅변할 것입니다. ‘베드로’의 전철을 밟을까 두려워 그냥 그 자리에 꼼짝없이 앉아있어서는 안 된다고 설교할 것입니다. 내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가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라고 강조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무엇인가 해보는 것의 차이는 태초 이전과 이후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할 것입니다.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그 무엇엔가 내 인생을 투자하라고 설득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아무 것에도 부족함이 없는 탈현대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회 말입니다. 열정은 죽었고, 헌신은 사라졌으며, 그래도 이웃에 대해서는 상냥하고, 고상하고, 양순하며, 전투적인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상징입니다. 마치 머리털과 눈알이 다 빠져버린 ‘삼손’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모습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영웅이며, 귀감이며, 역할 모델이어야 합니다!
한편 청년 대학생이 주축이 된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다면 나는 ‘베드로’를 어떻게 그려야 할까요? 나는 직업이 직업이니 만치 젊은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사역의 대상은 주로 청년 대학생들이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성경> 공부도 하고, 설교도 하며, 예배를 함께 드리기도 했습니다. 젊음의 특징은 쉽게 반응하고, 결단하며, 헌신한다는 데 있습니다. 당장 태산이라도 움직일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기도 합니다. 어깨가 축 늘어져 풀이 죽어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조울증과 같은 정신적인 문제까지 지니고 있어, 감정이 극과 극을 왕래하면서 마치 파도치듯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헌신을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런 친구에게는, “전진하라. 헌신하라. 큰 뜻을 품어라” 비전을 가져라” 또는 “더 큰 비전을 가지라” 등과 같은 주마가편(走馬加鞭)은 곤란할 것입니다. 그의 영혼을 오히려 피폐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헌신을 다루는 방식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그분은 오히려 되묻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죽겠다고?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게 될 텐데.” 이 장면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유다’를 비교하기를 좋아합니다. 두 사람 다 몇 년 동안 예수님과 사귀어 왔습니다. 둘 다 그분의 표적들을 보고 진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둘 다를 사랑하셨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고 계셨습니다. 두 사람 다 예수님이 가장 그들을 필요로 했을 때 그분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비탄에 잠기게 했고, 고통을 가중시켰으며, 두 사람의 실패는 모든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구원을, 나머지 한 사람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 많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운명을 이처럼 극명하게 갈라놓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두 사람의 마음과 가슴의 차이라고 ‘바클레이’는 말합니다. 배신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유다’는 처음부터 그것을 계획하고 꾸몄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바꾸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마지막 호소마저 냉정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릅니다. 꿈에도 선생님을 배반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한 순간의 연약함으로 헌신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을 뿐입니다. 엄청난 현실의 광풍(狂風)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뿐입니다.
‘베드로’가 이 역사적인 고백을 드릴 때, 그의 나이가 과연 몇이었을까? 혈기왕성한 20대 후반 내지는 30대 초반 정도? 질풍노도(疾風怒濤)와도 같다는 청년의 때였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그의 연약함을 나무라거나 정죄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못하고 살아온 지난 세월을 후회해야 할 것입니다.
같은 죄라도 고의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도피성(逃避城)의 경우도 이 두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각국은 법으로 이 두 차이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했던 헌신의 약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랐을 뿐입니다. 단지 그는 선생님을 열렬히 사랑했고, 늘 곁에 두고 싶어 했을 뿐입니다.
선생님이 이 사실을 몰랐을까요? 사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가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그의 약점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불같은 충동성이나, 어딘가 안정되지 못한 마음 자세나, 생각하기 전에 불쑥 말부터 먼저 내뱉고 보는 성급함 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갈대에서 바위로 바꾸어 주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충동적인 헌신에 대해서도 바로잡아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베드로’를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가 하는 약속이나 헌신 그 모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충정인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내 아들 학우는 결혼 후 자기 엄마와 같이 살 것이라고 약속한 적이 있습니다. 달우도 그가 나중에 돈을 벌면 엄마에게 우선 드릴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압니다. 이들이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들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엄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기특하고 사랑스러울 뿐인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마음도 이러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 모든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선생님의 뒤를 이어 위대한 순교의 길을 걷게 될 것임을 주님께서는 익히 알고 계셨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찌 그러한 ‘베드로’를 죽도록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베드로’가 순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노력이나 헌신이나 결단의 덕분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로부터 나온 것은 사실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비탄에 잠겨 쓰디쓴 눈물을 흘린 것뿐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용서와 자비를 구하고, 회개와 자책의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었겠지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했을까? 여기서 논점에서 잠시 일탈하여 <Dead Man Walking>이라는 영화 이야기를 회상해볼까 합니다. 방금 던진 질문에 대한 일말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이 영화는 1996년 ‘아카데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으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제목의 뜻은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말입니다. 번역하자면, “사형수 입장이요”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볼 만한 풍경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어두컴컴한 교도소와 허름한 빈민가, 그리고 낡은 ‘카톨릭’ 교회가 배경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사형수와 수녀 두 사람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가는데, 이 두 사람 ‘숀 펜’과 ‘수잔 서랜든’의 연기가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주었습니다. 남자 주인공 ‘매튜’는 어느 날 데이트 나온 십대 청소년 둘을 덮쳐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강간한 후 잔인하게 살해합니다.
그는 경찰에 잡히고 사형 언도를 받게 되자, ‘헬렌’이라는 수녀에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씁니다. 그는 수녀를 만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자 순진한 수녀는 그 말을 믿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구명운동에 나섭니다. 그러나 확실한 물적 증거 때문에 수녀는 그가 살해범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매튜’의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냉소적이고, 거칠고 야비해도,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는 외로움에 사랑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주님의 용서와 관용과 사랑을 전하며, 하나님 안에서 죄를 용서받고 참 안식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사형 집행 하루 전, 그토록 잔인하고 냉정하던 ‘매튜’가 ‘헬렌’ 수녀의 어머니와 같은 한 결 같은 사랑 앞에 비로소 지난날의 모든 잘못을 고백합니다. 생애 처음으로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의 눈에서는 참회의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헬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다고 확신을 준 후, “당신을 세상에서 마지막 보는 것이 웃는 얼굴이기를 바래요” 하며 그의 마음에 안정을 심어줍니다.
다음날 “데드 맨 워킹!” 하는 간수장의 목소리와 함께 ‘매튜’는 사형실로 들어옵니다. 방탄유리 건너편에서는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과, 변호사, 그리고 수녀가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봅니다. 사형집행관들은 그의 팔다리를 벌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벨트로 조였습니다. 그리고 최후로 그는 죽은 아이들의 부모님께 용서를 빌며 수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깁니다. 그의 이 한마디가 모든 이의 가슴을 적실 즈음 그의 혈관에는 마취제가 흘러 들어가고, 뒤이어 독극물이 투입되기 시작합니다. ‘매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잔인한 강간 살인범이었습니다. 순진하기만 한 수녀 ‘헬렌’을 그의 구명을 위해 이용할 만큼 그는 뉘우침 없는 용서 못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 앞에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회개하며 그를 묶고 있던 죄악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8). ‘베드로’가 한 일은, 아니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매튜’에게 하신 것처럼 ‘베드로’에게도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신 것입니다.
나는 교회나 회중을 너무 이상적으로 본 나머지, 조금만 잘못된 모습에도 참지 못하고 더욱 다급한 권면을 자주 합니다. “부름 받은 모습대로 살아야지” 하면서 말이지요. 사실 공동체는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모인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실천에 옮겨야 할 교리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난 뒤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가 먼저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창조하신 것이지, 우리의 헌신을 받기 위해서 조직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고 경건이 부족하며, 아무리 일할 능력이 부족한 공동체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일 것입니다. 그분은 헌신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 즉 응답과 대화를 요구하십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인격적인 인간의 반응을 원하십니다. 마치 늙은 부모가 요구하는 것이 자식의 용돈이 아니라 대화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느냐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만 물으셨습니다. 선하신 목자께서 ‘베드로’에게 자기의 어린 양을 가르치고, 조직화하고, 억지로 끌고 가거나, 무시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냥 양들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유다’가 저지른 실패의 씨앗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과 그분을 배신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도무지 맹세나 약속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직 우리의 대답을 “예면 예, 아니면 아니요”라고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우리는 수없이 공허한 약속이나, 서원이나, 맹세를 남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에 세상 사람들은 역겨움을 느끼며, 위선자들이라고 조롱하고 있는데도, 정작 우리 자신들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배신이자 거부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에게 오는 모든 자에 중에서 한 사람도 내어 쫓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요 6:37).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그분의 무한하신 자비에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브루스 밀른’은 Luci Shaw의 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은을 취하고
몸과 피를 먹으면서
내가 (죄 있느냐고) 물으며
그분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배신자들이기에,
우리 모두가
돌진해 나아가
목매어 죽기는 쉬우리.
하지만 만일 우리가
울며 기다릴 은혜를 발견한다면,
아침의 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비탄케 하기에
충분할 만큼 분명히 우리 귀에 들린 후,
그분은 거기 계서
우리 각자에게 다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리.
4. 승천과 재림 사이
하늘에서 집 채 만 한 바위 덩어리들이 불길에 휩싸인 채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는 광경을 상상해봅시다. 다른 곳도 아닌 내 집 앞마당에 말입니다. 기절초풍을 할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 ‘러시아’ 한 지역에서 실제 일어난 상황이었습니다. 운석 파편들이 지구 중력권 안으로 들어오면서 엄청난 마찰로 차가운 돌덩어리들이 불덩어리로 바뀌어버린 것이지요. 이 사고로 그 지역은 초토화되었으며, 주민 수 천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고, 한동안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운석 폭탄의 규모가 ‘히로시마’ 원폭의 사십여 배에 달했다고 하니 그 피해를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지질학계에서 중생대(中生代)의 그 많던 공룡들이 갑자기 사라진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 가운데 “운석 멸종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운석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론이긴 하지만, 이번 사태를 보면서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번에 피해를 입은 러시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지구 종말이 왔다고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과연 지구 종말의 날이 이와 같을지, 아니면 이보다 더 충격적일지 알 수가 없습니다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종말의 광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날에는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이 목도했던 것과 같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대 격변만 일어날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혼비백산(魂飛魄散)할 일도 일어날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살후 1:7하).
이 표현은 물론 ‘유대’ 묵시문학의 하나의 전형(典型)이긴 하지만,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초자연적인 광경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만일 문자적으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그날에 하늘에서 운석이 아니라, 예수님과 천군천사(千軍天使)들이 내려오는 장면을 목도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기절초풍하여 쓰러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넋을 잃고 두려움으로 벌벌 떨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날에 사람들은 어디로 피해 달아나야 하며, 과연 피난처가 있기라도 할 것인지, 있다면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누구에게 몸을 의탁해야 할 것인지, 정말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종말의 날에는 그래도 피할 동굴이라도 있었고,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方舟)라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나마도 하나님의 백성들에 한해서였습니다.
어떻게 이들이 그 엄청난 격변을 피할 수 있었을까? 사전 정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정보의 ‘메뉴얼’대로 따라했기 때문입니다. 즉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메뉴얼’대로 따라하지 않았던 ‘롯’의 아내는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과 함께 사라졌지요.
이중고(二重苦).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질문 하나를 생각해 봅시다. 만일 종말의 날까지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교회와 의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이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으로부터 받게 될 고통일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 세상과 함께 겪게 될 대 격변의 고통일 것입니다.
이 무슨 가당치도 않는 말입니까? 교회가 세상의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님께서도 이미 예고한 바 있습니다. 예컨대, 롯’이나 ‘노아’는 사전 정보 즉 ‘메뉴얼’에 따라 종말의 날을 예비하고 준비하면서, 허무와 말초적인 세계관으로 가득 찬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겪어야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이나 그날이나 세상은 늘 이렇게 조롱하며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
하지만 의인이 겪게 될 고통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불신과 반역으로 가득 찬 그 세상이 받게 될 고통을 함께 겪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날에 겪을 고통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이별의 슬픔”일 것입니다. 연인이나 가족 간의 이별 말입니다. 그것도 잠시 동안 떨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이별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들어보지요: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0-41).
‘롯’도 종말의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두 사위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노아’의 여덟 가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머지 모든 친척들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과연 어떠했을까? 그래도 나는 살아남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하거나, 아니면 죽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가족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입대하는 아들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아닙니까! 적어도 헤어지는 그 순간만큼은 남은 자나 떠나는 자나 생지옥의 체험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근심하지 말고. 이날 다락방의 분위기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세상을 떠나실 예수님, 그리고 세상 속에 남겨질 자기 사람들. ‘베드로’가 침울한 분위기를 깨고 서로 헤어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결단하고 다짐하지만, 예수님은 크게 감동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말을 일축하고 곧 떠나겠다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온 방은 두려움과 근심으로 불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표현대로 “고아”로 남게 될 것입니다(18절). 그리고 염려가 현실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곧 엄청난 시련이 몰려올 것이며,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노아’의 홍수 때처럼 혼돈과 무질서로 요동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절망과 두려움과 혼란의 바다 한 가운데서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롯 유다’를 따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도피와 회피 말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유다’의 선택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한강이나 높은 건물 옥상에서 투신하거나, 자신의 연구실에서 목을 매달거나, 약을 먹거나, 연탄을 피워놓는 등의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소심하고 심약한 사람은 이와 같은 선택조차 사치스러울 뿐입니다. 그저 ‘욥’의 아내가 충고해주었던 바대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나님을 향해 불평과 욕설을 퍼붓는 일이 고작일 것입니다. 본인도 이런 부류에 속합니다. 일이 힘들거나, 뜻대로 안될 때, 기도가 제대로 응답받지 못할 때, 이 같은 일을 되풀이하곤 합니다. 여전히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살고 있는 것이지요.
또 다른 선택이 있습니다. 즉 이렇게 노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0-11). 이 노래는 물론 사도들의 노래가 아닙니다. 그들은 “고요의 바다”를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풍랑으로 요동치는 배 안에서 죽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이 노래는 시인이 부른 것입니다. ‘노아’와 같은 성숙한 시인이 그의 방주 안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에게 이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의 부정 명령문(否定 命令文)이긴 하지만, 명령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약속이나 위로로 들립니다. 즉 “마음에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약속 같은 것 말입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가까운 사람에게 해주는 위로나 권면의 말이 아닙니다: “괜찮아, 다 좋아 질 거야. 아무 걱정 할 필요 없어.” 그러나 과연 걱정하지 않는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것일까? 누군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면 내 근심은 그대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를 믿으라. 그렇다면 누가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인가? 요동치는 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편안하게 지켜줄 수 있을까? 고통의 원인을 아는 지식일까? 고난을 헤엄쳐 나가는 지혜일까? 친구의 체험이나 간증일까? 역사적 교훈일까? 아니면 정치인들일까?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고, 매 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지금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나란히 언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명령은 허풍이나 과장도 아니고, 오만이나 독선도 아닙니다. 그리고 무슨 새로운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믿음 속에 거하라”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가운데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많은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것도 그가 보여주었던 그 지속적인 믿음 때문이었습니다(롬 4:18). ‘아브라함’의 믿음의 힘이 되었던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소망이었다면, 이들 제자들이 가질 수 있었던 소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제 곧 죽게 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속적으로 지켜줄 수 있는 그 소망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 있는 곳에 너희도. 다시 와서 그들을 데리고 간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절). 이 사실 때문에 함께 계셔야 할 그분이 오히려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지상에서의 삶 너머에 있는 영광스러운 거주지가 없다면, 지금 이들이 잠시 “고아”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그 대가는 영원히 집 없는 고아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한 약속을 한지 수 세기가 지났지만, 그 약속은 분명히 성취될 것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통이기도 하지만, 즐거움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집에 대해서 많은 논란을 벌여왔습니다. 혹자는 입주자의 신분이나 업적에 따라 방의 크기나 등급이 달라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전형적인 ‘유대’ 사상입니다(참고. <에녹 2서-비밀의 책>). 또 어떤 사람은 많은 방들은 천국으로 가는 여러 단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초대 기독교 신학자 ‘오리겐’은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일정기간 머물면서 일련의 훈련과 가르침을 받은 후에 그 다음 단계의 방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이런 뜻으로 “방이 많다”고 하셨을까? 그분의 진의는 단순하고도 간단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한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집이나 여관은 그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곳은 그분의 마음만큼이나 넓고 커서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모여도 다 들어가고도 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방의 상태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려 주시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그 상태란 단지 그분이 계시는 곳에 함께 있는 것이며,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브루스 밀런’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면 거기에 하늘나라가 있다.”
이 엄청난 축복, 즉 하늘에 있는 예수님의 집에서 그분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확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서 우리를 떠나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근심하는 이유들이 죽음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되는 것이라든지, 현실에 대한 환멸이나 절망 때문이라면, 예수님의 이 약속, 즉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셨다는 약속을 믿고 ‘샬롬’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힘든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이 될 수만은 없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즉 현실을 이기고 극복하는 양념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일서>의 말씀입니다: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그러니까 나의 주님께서 하늘에 마련하고 있는 나의 처소는 현실에 대한 도피성(逃避城)이 아니라, 현실을 이기고 풍성하게 살아가게 하는 ‘인센티브’가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임산부가 복중(腹中)의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며, 아기 옷과 침구와 방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마련하듯이, 나의 주님께서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요한일서>와 같은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더 이상 무슨 위로나 격려가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5. 유일한 길-“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가장 심각한 범죄. 최근 미국 판 <Christianity Today>는 재미있는 여론조사 결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 사람들이 가장 심각한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관용”(非寬容)이라고 답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비관용”이라 함은 독단 내지 독선을 의미합니다. 즉 상대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들 미국 사람들의 기준에서 볼 때, 미국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범죄 집단은 누구인지 상상해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다름 아닌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입니다. 한 미국인 작가가 그리고 있는 오늘날 기독교인의 모습은 “편협하고, 비타협적이며, 사사건건 세상과 문화전쟁도 불사하는 코뿔소 같은 족속”입니다. 수 년 전 캐나다에서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동성결혼을 합법화 하는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킨 바 있습니다만, 캐나다의 동성애자들이 바라보는 기독교인에 대한 인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완고하다. 화를 잘 낸다. 무섭다. 증오에 가득 차 있다. 편협하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인터넷을 중심으로 “안티 기독교 클럽”이 결성될 정도로 우리 기독교인들에 대한 감정은 악화일로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사람들 역시 한국 기독교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에 대단히 화가 나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반감 내지는 거부감을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특히 이념갈등이 첨예화 되어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민주 사회의 최대 덕목이라고 하는 것이 관용과 타협일진대, 사람들이 사탄을 숭배한다고 한들 누가 뭐라고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존 스토트’ 목사님이 잘 간파하고 있는 바대로 현대 사회의 특징이 다원화와 상대화, 그리고 세속화에 있으니 만치, 개인의 종교적 신념은 헌법도 관용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관용은 그 속에 위험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모든 진리에 대한 관용은 역설적으로 어떠한 종교도 배타적 진리 선언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왕따”가 되고 싶지 않다면, <요한복음>의 이와 같은 선언은 주장하지 않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만일 이를 어긴다면 흔히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사회적 합의 사항을 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모성애를 거부한다거나, 애국가를 모독하거나, 또는 친일행위를 옹호하는 등의 발언을 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발언으로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셨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은 그 백미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독선도 이만저만 독선이 아니며, 흑백논리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혹시 KBS나 MBC 등에서 누가 이런 발언을 했다면 당장 전국적으로 항의 전화가 빗발 치듯 했을 것입니다(제갈성렬 SBS 해설위원). 이런 발언은 심지어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조차도 실망해서 돌아서게 만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한 술 더 뜨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우리 사회는 관용에 대해서 병적일 정도의 집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옹졸하고 편협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일 텐데, 정치적 성향을 묻는 여론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 절대 다수가 자신을 좌도 우도 아닌 중도라고 대답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하겠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믿고 있는 바에 대해서 진지하고 신실하다면 그가 무엇을 믿든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사람들의 이처럼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종교의 영역에서나 그렇지 일상생활의 다른 영역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사람들은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가 정확하고 철저하기를 원합니다. 그저 신실하게 치료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내가 타고 가는 택시 운전수가 안전하고 정확하게 운전해 주기를 바라지, 그냥 신실하게 운전해 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내 회계사가 세금 정산과 관련해서 정확무오하게 일해 주기를 바라지, 그냥 신실하게 일하는 것으로 관용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왜 우리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의 영역, 특히 인격적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正確無誤함 대신에 신실함으로 대체하려는 것일까요? 논리의 일관성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동기가 결코 자만심이나 우쭐함 에서가 아니라 관심과 애정에서 그렇게 하셨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우리는 다음의 한 예화를 통해서 예수님의 자기주장이 결코 오만이나 허풍이나 또는 속임수가 아니라 진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왕의 잔치.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 아들을 결혼시키는 한 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왕이 베푸는 잔치답게 그 장소도 규모도 대단하고 화려했습니다. 우리가 당시 팔레스타인의 보통 사람들의 형편이 어떠했는지 짐작한다면 이 결혼은 그야말로 초호화판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가난했지만, 그래도 결혼식만큼은 빚을 내어서라도 성대하게 치렀으며, 그것도 일주일에 걸쳐 연회를 베풀었다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왕의 잔치가 어떠했을 지는 쉽게 짐작해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요즘 유명 인사들의 결혼식을 연상해 보면 될 것입니다. 대개 유명 인사의 결혼식에는 누구나 오고 싶어 합니다. 특히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경우라면 어떻게 해서든 와서 눈도장을 찍어두고 싶어 합니다.
이 임금님의 잔치에도 이처럼 모두들 참석하여 눈도장이라도 받아두고 싶어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이를 거절한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지요. 유대인이 누구입니까?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메시아’가 태어날 요람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고, 심지어 그분의 아들이 왔을 때에도 그를 잡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은 모두를 초청했습니다.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고, 가난한 자이든 부자이든 가리지 않았습니다(마 22:8-9). 이처럼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실로 황송하고 경이롭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초청의 조건도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오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시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11-14절). 그처럼 아량이 한이 없으신 임금님이 한 친구가 복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하면서 식장에서 그를 쫓아내어버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초청할 정도로 아량이 넓고 관대한 임금님이 어째서 이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문제 삼아 내쫓을 수 있습니까?
옷 살 돈이 없어 입던 옷을 그냥 입고 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이 사람은 옷이고 뭐고 아무 것도 준비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지요. 왕도 이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루 생활하기도 어려운데 무슨 파티 복을 준비할 수 있었겠습니까? 임금님이 이를 알고 잔치에 참석하는 모두를 위해서 자비로 그 모든 파티 복을 미리 준비해 두셨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위대한 신학자 ‘성 어거스틴’은 “그렇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잔치에서 쫓겨난 이 사람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왕의 호의를 알면서도 무시한 것입니다. 왕의 아량을 무시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고집대로, 자기 소견에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잔치에 참석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잔치에서 파티 복을 입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됩니다.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 내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호의를 입을 자격이 없습니다. 왕이 나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을 거절한 것입니다.
혹자는 모든 종교는 실은 다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맞기만 하다면 어떤 종교를 믿든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진리는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고 말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에는 공통적인 진리 선언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일종의 최대공약수 같은 것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름대로의 배타적이고 유일한 진리 선언을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독교를 가장 기독교 답게 해주는 선언은 무엇입니까?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입니까? “예수는 누구인가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바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인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예수야 말로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합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은 곧 하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그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느낄 수도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만이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은 이에 대해서 다르게 말합니다. 즉 하나님에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하라”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종교가 다르면 구원에 관한 해법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주문을 외우라고 말합니다. 혹은 일련의 음식 목록을 만들어 이들을 먹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혹은 일정한 방향을 바라보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죽음과 환생의 윤회를 거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 모든 시도들은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우리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어느 부자 청년처럼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귀 기울입니다. 왕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분께서 마련해 두신 의복을 입고 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헌신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섬기시고 계십니다. 말씀으로, 성례전을 통해서 말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섬깁니까? 아니면 부모가 섬깁니까?) 우리는 그저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과 법정 스님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죄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인식입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석 달 앞두고 대한불교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는 대한축구협회에 “국가대표 축구선수의 종교행위 개선 요청”이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조계종은 이 공문에서 “국가대표 축구선수는 공인으로서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 표출되는 행위는 타인의 종교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로 최대한 자제해야 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조계종은 또한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SBS 해설위원(제갈성렬)의 종교적 표현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화합과 평화의 올림픽 정신에 어긋나는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며 축구협회에 축구 선수들의 기도 ‘세리모니’에 대한 의견을 밝혀줄 것과 종교행위 자제를 위한 선수∙실무자 대상 종교차별 예방 교육을 수립하고 시행해 줄 것은 요청했습니다.
이쯤 되면 종교평화위원회가 아니라 종교 갈등위원회로 불러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연아 선수가 ‘카톨릭’의 성호(聖號)를 표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왜 이를 문제 삼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는 혐오의 수준을 넘어 타도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불교계와 로마 카톨릭 사이에 종교 간의 화합 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개신교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교회가 특별히 잘못한 짓이라도 했나요? 교회가 무슨 반국가적인 혁명 노선을 부추기기 때문입니까? 개신교가 다른 종교계에 비해서 윤리∙도덕적으로 더 부패했기 때문입니까?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무례하고 오만하기 때문입니까? 이웃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자기네들끼리만 어울려 다니기 때문입니까? 가족이 아니라 교회를 먼저 섬기고 우선시하기 때문입니까?
이들 이유 모두 진리의 일단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다른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른 데서 찾아내야 합니다. 정당하고, 떳떳하며, 결코 기죽지 않는 기독교 변증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예측이라도 하셨다는 듯이 오래 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너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19).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공공연하게, 아무 거리낌도 없이, 적극적으로, 때로는 도전적으로 증거하고 드러내고 다니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는 복음이 그들에게 거침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으나, 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서막에서 사람들의 이러한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이렇게 진단한 바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3);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을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 하였으나”(1:10-11).
기독교 증거. 기독교는 정말 다른 종교와의 마찰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가 배려와 겸손의 미덕을 잃지 않는다면 전혀 충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우리의 태도가 마치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어디 가면 음식을 구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심정이 되면 된다고 말합니다.
환자가 다른 환자에게 어떤 병원이 좋은 병원인지 가리켜 주는 심정이면 족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른 종교를 정죄하거나 비난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정죄는 하나님에게만 속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는 하나라든지 동일하다는 세상의 가르침, 즉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는 관용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좁은 문 좁은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분의 은혜의 섬김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힘든 일입니까 ‘시리아’의 ‘나만’ 장군이 분노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이 너무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6. 유일한 계시-“나를 보았거늘”
‘유대’인 부모들은 자녀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날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는 대신에 무슨 질문을 했느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이들 부모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듣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질문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해 본 외국인 교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좀처럼 질문을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나도 지난 30여 년 동안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해왔습니다만, 회고해 보면 수업 시간 중에 학생들로부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 듯합니다. 내가 너무 강의를 잘했기 때문이었을까? 질문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책에 있는 모든 내용들을 속속들이 알차게 가르쳤기 때문일까? 설사 그랬다고 하더라도 나는 실은 충실한 전달자의 역할을 한 것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그저 일방적으로 책에 있는 내용들을 가르쳤을 뿐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아무리 열심히 배웠다 하더라도 그 책에 있는 내용 이상은 결코 접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대개 질문이 없다는 것은 관심이나 호기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도, “말을 물 가로 데리고 갈 수는 있으나 물을 먹게 할 수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볼 때, 무슨 일에든 관심이나 호기심을 갖는 다는 것은 아주 좋은 습관이며, 자기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결론을 정해놓고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공격적으로 질문하는 자가 아니라면 말입니다(국회 청문회에서 나오는 질문들이 대개 이런 유에 속합니다). 건강한 질문은 자기뿐만 아니라, 이 질문을 듣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끼치게 됩니다. 만일 그들도 동일한 관심을 보인다면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사도들의 오해나 질문은 역설적으로 후대에 많은 유익을 끼쳤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강의를 듣고 있는 사도들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선생님의 강의를 진지하게 듣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수업 시간 중에 보여주는 태도는 영 실망스럽기만 합니다. 예컨대, 선생님의 간절한 초청을 끝까지 거부하고 어둠 속으로 빠져 나간 ‘가롯 유다’는 그렇다 치더라도, ‘베드로’는 자기 기만적인 헌신과 열정으로 선생님의 핀잔을 들었으며, ‘도마’는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 길”이 어디 있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 이번에는 ‘빌립’ 차례입니다. 그의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전에도 한 차례 이 사람의 기질에 대해서 겪어본 적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는 장면에서였습니다. 그는 아주 논리적이며, 합리적이고, 계산에 능한 사람으로 보입니다(현대판 논리실증주의자라 할 수 있을까요?). 그는 그날 그 자리에 모인 사람 모두를 먹이는데 최소한 이백 ‘데나리온’ 가치의 떡이 필요하다는 견적(見積)을 예수님에게 올린 바 있습니다(6:7). 물론 예수님이 이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 물어보았던 것이라고 ‘요한’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만(6:6).
그러나 그가 그날 경험했던 바는 자신이 올린 견적서가 아무 쓸모가 없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이성(理性)이나 논리로써 선생님의 이성과 논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랬던 그가 다시 지금 이 자리에서 그 특유의 기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보지 못하면 믿을 수 없다는 기질 말입니다. 그의 입장을 대변해 보자면 뭐 이런 것이겠지요: “그 자꾸 이상하고 어려운 말씀 하시지 말고,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하나님을 보여만 주신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그들이 하나님을 이미 보았다고 하는데, ‘빌립’은 그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나자로’의 기적”을 포함해서 그동안 보아왔던 그 많은 기적이나 선생님의 말씀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나 봅니다. 예수님도 그에 대한 실망감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의 기억력이나 이해력은 정말 한심한 수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의 요구는 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철학 사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즉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라는 주장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선언은 그 자체로써 하등 나무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내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겨야 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겠으며, 한 번도 가본 적도 없는 곳에 어떻게 사업 투자를 할 수 있겠으며, 사건 현장을 한 번도 방문하지도 않고 어떻게 수사(搜査)를 할 수 있겠으며,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사람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어떻게 수억 원의 돈을 계좌이체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신앙의 영역에서도 같은 원리를 적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온갖 이단들이 난무하는 오늘날, “맹목적(盲目的) 신앙”은 경계 대상 제 1호가 되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맹목적 신앙이란 문자 그대로 보지도 않고 믿는 태도를 말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 화자가 소개하고 있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참고 9장). 그는 한 번도 예수님을 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말만 믿고 시킨 대로 한 결과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맹목적 신앙의 표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로서, 신앙의 전체 영역으로 일반화시키기는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누가 ‘빌립’의 요청을 한심하다거나 어리석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충고에 지극히 충실하고 사려 깊은 자로 오히려 칭찬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질책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보는 것의 한계. 과연 ‘빌립’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출애굽” 당시 ‘이집트’의 ‘바로’ 왕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는 한 번의 기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한 번만 더, 이번 한 번만 더, 하다가 열 번까지 갔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열 번에 걸쳐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시험했다는 말입니다. 본인은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과연 그가 열한 번째의 기적을 보았다면 마음을 바꾸어 이스라엘을 떠나게 했을까? 즉 다시 한 번 더 기적을 목격했다면 생각이 바뀌었을까?”
아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그가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정해놓은 결론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버렸다는 말입니다. 마치 색안경을 쓰듯, 전제(前提)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자신을 포함해서 주변의 어느 누구도 그의 색안경을 벗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치명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마음을 바꾸는 일은 아예 불가능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지요: “그는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렸고, 하나님도 그의 마음을 닫아버렸다.” 그에게는 달리 선택의 기회조차 아예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또 한 번의 기적을 더 본다 한 들 달라질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는 것으로 그동안 없던 믿음이 생길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으로 끝나고 말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보는 것”, 즉 관찰이나 연구나 탐색의 한계가 있다 하겠습니다. 아, 믿음이란 보는 것이 만들어내는 그 무슨 결과물이 아니었던 것이로구나!
우리의 가련한 ‘빌립’! 그 역시 부지불식간에 보는 것의 한계를 스스로 노정(露呈)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한 번 만이라도 보기만 한다면 선생님의 말을 믿을 수 있겠다고 외치고 있습니다만, 이는 결국 그동안의 그 모든 경험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음을 자인(自認)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여전히 새로운 체험이 필요하다고 은연중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도 ‘바로’ 왕처럼, “이번 한 번만 더” 하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설령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더라도, ‘빌립’은 애초에 불가능한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는 지금 ‘모세’의 기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두 사람 모두 경천동지하는 기적들을 수없이 목도했던 장본인들이며, 어느 누구보다도 지근(至近)의 거리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요구에 어떻게 대답하셨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내 얼굴을 보고 살아남은 자가 없다”는 대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보면 믿겠다는 주장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지한 것인지요. 무식하면 용감해지는 모양입니다.
믿는 것이 보는 것. 그런데 무식하기로 치자면 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무엇인가 새롭고 큰일을 시도하려 할 때, 중대한 선택을 앞두고 있을 때, 나도 부지불식간에 ‘모세’나 ‘빌립’처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 하나님 아버지, 무엇인가 좀 보여주시든지 아니면 한 마디로라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믿고 실행에 옮길 수 있겠나이다.” 결정해야 할 일이 중차대할수록, 일이 힘들수록, 나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집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예컨대 이런 약속 말입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 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히 13:5; 신 31:6; 수 1:5).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경> 속의 말씀일 뿐, 어찌 초자연적인 환상이나 꿈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단 한 번의 체험만으로도 모든 의심이나 불신을 다 날려버릴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단 한 번의 체험으로 <성경>의 그 모든 약속들을 다 믿을 수 있을 터이니, 예수님 편에서 보자면 훨씬 남는 장사가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빌립’의 간절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창문 즉 “유일한 계시”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7절). 바로 직전에 ‘도마’가 “그 길”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그를 향해서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에게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6절). 이 두 선언은 실은 같은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즉 “내 말을 믿으면 보게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히브리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증거를 찾음으로써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았거늘. 하지만 ‘모세’나 ‘빌립’은 오늘 우리에 비하면 훨씬 나은 조건 하에 있었습니다. ‘모세’는 비록 뒷모습으로나마 하나님을 볼 수 있었고, ‘빌립’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직접 보았습니다. “독생자”(movnogenhv", 모노게네스)란 말 그대로 “유일한 자식”을 뜻합니다만(참고. 눅 8:42; 9:38; 히 11:17), ‘요한’ 화자가 의미하는 바는 이보다 심오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는 “스스로 태어난”, “유일한”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요한’ 화자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즉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신 모습이자, 마음이자, 흉금이자,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빌립’은 하나님을 (한 번 더)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기 어려우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서라도 믿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세’나 ‘빌립’은 행운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뒷모습도, 예수님도, 그분의 기적도 본 적이 없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며,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그분의 말씀, 즉 <성경>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믿음의 근거이자 통로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과연 <성경>만으로 충분할까? <성경>은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즉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나 목표와 관련해서 <성경>은 그 자체로써 필요하고도 충분하다는 선언입니다. 더 이상 무슨 새로운 체험이나, 환상이나, 꿈이나, 계시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잠깐! 나는 지금 <성경>으로 <성경>이 옳음을 증명하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 전형적인 순환논리(循環論理)의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듯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성경>에 기초한 믿음의 위기와 위험이 있기도 하다는 사실을 솔직히 부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연 <성경>의 자기주장에 대해서 절대적인 신뢰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는 ‘모세’나 ‘빌립’보다 훨씬 더 위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믿음이나 소망에 대해서 묻는 세상에 대해서 대답하고 변론할 준비가 되어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한 번만 보여주면 믿겠다는 그 세상을 향해서 말입니다.
21세기 빌립에게. 오늘날 내 주변에는 너무나 많은 ‘빌립’이 살아가고 있으며,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 주님께서 ‘빌립’을 대하던 방식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 즉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을 향해서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참고. 9절). 그리고 이어서, “그래도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표적은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참고 11절; 10:38; 5:36).
내가 21세기 ‘빌립’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선 그분의 말씀을 들려주는 일입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으니, 그리스도의 말씀 즉 <성경>을 들려주고, 전해주고, 가르치면 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우리를 향해서 우리가 가진 소망에 대해서 묻는 세상에 대해서 항상 대답할 준비를 하라고 권면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표적을 보여주면 될 것입니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표적, 즉 “그리스도의 흔적”을 몸으로 보여주는 일말입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몸으로 보여주는 일을 그렇게 극적이거나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땅 밑으로 내려가거나 하늘로 올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따라 해야 할 일은 그분의 탄생도, 공적사역도, 죽음도, 부활도, 승천도 아닙니다. 이 모든 일들 중에서 내가 본받아 따라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해야 할 그 모든 일들을 불필요 한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가장 주목을 적게 끌었던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지극히 인간적인 그의 일상생활들일 텐데, 이들이야말로 내가 손쉽게 따라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예컨대, 먹고, 자고, 목수일 하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형제들과 화목하게 어울리며, 그리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 말입니다. 일견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것들 말입니다.
우리는 천사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닙니다. 천국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영계(靈界)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냥 인간이지 영과 육체가 따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사역이 있고, 육적인 사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설파했던 대로, 예수님께서 “이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영역이 없다는 것입니다.
‘에릭 포름’은 “가장 비범한 사람은 가장 평범한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일상-하나님의 신비」에서도 저자 ‘마이클 프로스트’는 우리가 그냥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참으로 비범한 통찰력을 발휘하여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시대에 진정한 기적이란 지극히 자연적이고 평범한 “훈련과 의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되 미혹되지 않으며, 귀로 듣되 귀먹지 않으며, 맛을 보되 먹히지 않고, 손을 대되 더럽혀지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시대 우리나라에서 정절을 지키고 정직하게 사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적입니다. 사업하는 기독교인이 제대로 세금 내며 살아가는 것도 기적에 속합니다. 급한 데 새치기 안 하는 것도 기적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늘 교회는 사람들 보고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보고 가는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 행동은 믿지 말고 내 말만 믿으라고 강변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궤변입니다.
복음은 재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로마서>는 선언하고 있습니다(롬 1:17). 재창조 즉 구원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육신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본인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학생들이 “아! 과연” 하면서 따라해야겠다는 학생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나는 축복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베풀며, 비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명예나 부를 챙기지 않으며, 분쟁이나 분열을 조장하기보다는 화합과 협력을 추구하며,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며, 꿈과 비전을 보여주며 살아갈 때 제자들이 행여나 하고 따라해 보지 않을까요?
이것은 정말 엄청난 증거가 아닙니까?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어라”(고전 11:1)고 말합니다. 나도 세상을 향해서 이와 꼭 같은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나를 보았거늘 어찌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고 말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7. 예수보다 더 큰 일을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흉내를 낼 수 있을까?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 있으며, 38년 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수 있으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으며, 물 위를 걸을 수 있으며, 말 한 마디로 풍랑을 잠잠하게 할 수 있으며,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으며,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사람을 살려낼 수 있을까? 이들 중 단 하나라도 내가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나의 대답은 당연히 “할 수 없다”일 것입니다. 나는 왜 그 일을 할 수 없을까요? 내가 예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 화자는 이 모든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사건들을 단순히 “기적”(tevra", 테라스)으로 부르지 않고, “표적”(shmei'on, 세메이온)이라 칭합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이들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께서 하신 이 같은 일들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일. 그런데 어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분은 내가 그냥 흉내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일도 하리니”(12절중).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잠시 정신 줄을 놓았거나, 아니면 그냥 술김에 한 번 내질러 본 것이겠지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이 하도 딱해 보여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전에도 이처럼 말도 안 되는 호기(豪氣)를 부린 적이 있기는 합니다. 즉 그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5:20).
어떻습니까? 뭐 이런 것입니까? “기적을 일으키는 일, 그거 별거 아니야. 나도 할 수 있는데, 너희라고 왜 못하겠어. 한 번 해봐! 너도 할 수 있어.”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것 같지 않습니까? 실의에 빠진 사람을 격려하고 일으켜 세울 때 우리는 이 같이 말합니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긍정적인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만, 때로 진실을 회피하게 만드는 역기능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최근 우리 서점가에 소위 “힐링”(healing)에 관한 책들이 넘쳐나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유의 책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대개 아무런 근거 없는 낙관론이나 근거 없는 대책(對策) 없는 자기 긍정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넌 괜찮아. 너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야. 이 사회가 잘못된 거야. 그러므로 스스로를 자책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성경>은 이점에서 독특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런대로 괜찮은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말합니다. <성경>은 먼저 솔직하게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의 죄 문제를 먼저 다룹니다. 사탕발림으로 우리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약속이 허황되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수표(空手票)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믿는 자는 누구나. 그래서인지 신중한 학자들은 이 약속의 의미를 축소시키거나 제한하려 합니다. 예를 들면, 그분이 지칭하고 있는 “내가 하는 일”이란 것이 문자 그대로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나 “거듭남” 등과 같은 영적 차원의 일이라고 합니다(“중생”은 왜 기적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설령 그 일이 문자적으로 기적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실제 당시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는 사도들이 행하는 엄청난 규모의 기적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앞에서 상세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참고. 신학과 신학). 즉 여기서 “내가 하는 일”이란 것이 문자 그대로 “기적” 즉 “표적”들을 지칭하는 것이며, 약속의 대상도 사도들을 포함해서 “모든 믿는 자들”입니다(참고. ‘헬라’어 본문의 동사 시제가 미래형임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왜 예수님의 흉내를 낼 수 없는 것일까? 내게 그만한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일까?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은 왜 선생님이 행하시는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할 수 없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에게 겨자씨만 한 믿음도 없기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 답하신 적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이러했을 진대, 나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약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편에 있었던 것이지요.
매사(每事)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참 편리하고 홀가분해 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겸손하기까지 합니까! 스스로 믿음이 약하다고 인정하고 나서니 말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흔히 “주의 종”이라 자칭하면서 은근히 큰 기도의 능력을 가졌다고 뽐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 않습니까! 대개 이런 사람들이 타인들을 향해서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연약한 성도들을 닦달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런 식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까? 즉 “나를 열심히 믿는 자”나, 또는 “큰 믿음을 가진 자”는 예수님께서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큰일도 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냥 “나를 믿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분의 제자라면 누구나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큰 믿음을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냥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근거는 믿음의 분량이나 정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므로. 그렇다면 어디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행하신 일에서 해답을 찾으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다락방 강론의 핵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재림입니다. 바로 이들 사역이 내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분께서 이루신 일은 일종의 신용카드와 같다 하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사든, 얼마를 쓰든, 이것으로 결재를 하면 됩니다. 물론 결재 한도 이상은 사용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아직 보혜사 곧 성령 하나님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교회의 탄생과 기독교 선교 사역의 역사적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도들은 그들의 선생님은 한 번도 가본적도 없는 세계의 심장부 로마까지 이르러 하나님 나라를 전할 수 있었으며, 단 한 번의 설교로 수천 명이 회심하는 역사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적어도 물량적이고 공간적인 면에서 볼 때 이들 사도 이후 교회가 이루어 놓은 업적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그분이 계속 ‘팔레스타인’ 땅에 살아계셨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의 능력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벗어나서 역사해왔고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이런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더 큰 일”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5:20).
여기서 아들이 행한 “더 큰 일”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아버지가 행하신 모든 일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준 것을 말합니다. 즉 설명하고 해석해 준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제자인 내가 행할 “더 큰일”이란 예수께서 행하신 그 모든 일을 세상에 드러내어 세상으로 하여금 보고 믿도록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표적으로서의 기적, 즉 기적의 목적을 달성하고 성취시키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예수님보다 더 많은 기적이나, 더 놀라운 기적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재림이 내가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근거라고 한다면, 체험적이고 실존적인 근거도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기도”입니다(13-14절). 죽음과 부활이 예수님의 몫이었다면, 기도는 제자들의 몫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더 큰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두 번에 걸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예수님은 “내게 구하라”라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14절). 그분은 실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입니다( 딤전 2:5).
따라서 여기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점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이 아닙니다. 즉 누가 더 큰 일을 하는가를 비교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죽음과 부활 이전에 시공(時空)의 제한 속에서 제자들과 함께 행하시던 예수님의 지상사역과, 부활 이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제자들을 통해서 행하시는 천상(天上)의 사역입니다. “더 큰 일”은 바로 후자(後者)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인류에게 열릴 것이며, 온 세상은 구원과 구속의 은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며, 제자들은 능력으로 세상을 향해 사역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능력이라 함은 그들이 조만간 받게 될 “성령”을 뜻합니다.
다시 한 번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더 큰 일”은 제자들의 독자적인 사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펼쳐나갈 그분의 지속적인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들 안에 있는 아버지의 영광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해서 드러나고 구현될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할 때마다 후렴처럼 사용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황송하게도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면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14절). 이 약속을 두고 혹자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백지 수표를 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백지 수표란 내가 그 액수를 정하면 됩니다. 얼마를 쓰든지 은행에 가면 그대로 돈으로 교환해 받을 수 있습니다. 실로 엄청난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8. 또 다른 보혜사(1)
이번 설교는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같이 한 번 외워볼까요? 우리는 이 고백 속에서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부(聖父) 하나님의 창조와, 성자(聖子) 하나님의 탄생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재림과 그리고 심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성령(聖靈) 하나님에 대해서는 다소 불분명합니다. 이분에 관해서는 그저, “성령을 믿사오며”가 고작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성령으로 잉태하사”를 빼고 나면 말입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예수님이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소상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령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는 느낌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거의 매 책마다 성령님에 관한 언급이 수없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정체(正體)나 사역(使役)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입니다. 이해는 고사하고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지울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성령님을 거론하기는 하나, 대부분 자신의 관점이나 특별한 체험으로 그분을 인식하고 일반화 하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님을 성령님의 사역과 혼동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성령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가 아니라, 그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역은 존재에서 우러나오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를 바탕으로 사역이 있지 사역을 바탕으로 존재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컨대, 해가 있고 그로부터 햇빛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이 구별되어야 하듯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이 구분되어야 할 것이며, 성령님과 성령님의 사역 또한 구별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 차이를 모르거나, 그 순서가 뒤바뀌면 늘 피곤하고 쓸데없는 혼란만 가중될 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님에 관한 언급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등장하고 있으며, 모두 다락방 강론을 통해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곳에서 성령님에 관해서 체계적이고도 일관성 있는 강의를 하시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작정하고 성령님 특강을 하신 것은 아닌 것 같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다른 주제들에 곁들여서 성령님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문학적인 일관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성령님에 관한 다락방 강론은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곳 다락방 강론에서 성령님에 관한 언급이 그렇게 자주 등장하고 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다락방 강론의 배경이나, 지배적인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락방 강론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가 있다면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이며, 지배적인 분위기는 당연히 침울과 침통, 아쉬움과 서운함, 두려움과 비장함 등일 것입니다. 이별을 앞둔 두 연인(戀人)의 모습을 연상해 보면 될 것이며, 임종 직전 ‘야곱’과 그의 침상 주변에 둘러 서 있는 자식들의 모습이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상상해 봅니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은 원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법이지요. 무슨 특별한 주제가 있어서도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심정 또한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특히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다고 할 때의 기분 말입니다. 나라면 어떤 말을 남기고 떠날 것 같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기대할 수 있는 바대로,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명령이자 동시에 위로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혹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명령하시고, 명령하신 것을 주신다.”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한 언급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본인은 이곳에서 성령님에 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을 쌓으려 하기 보다는 ‘요한’ 화자가 다락방 강론에서 소개하고 있는 방식을 따라, 성령님을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 여러 좋은 책들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최근의 역작으로 ‘제임스 패커’의 <성령님을 아는 지식> (홍종락 옮김, 홍성사, 2002)을 참고하면 아주 유익할 것입니다.
이번 본문이 그 첫 번째입니다.
인격적 존재. 내가 묻고 싶은 첫 질문은 “성령님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입니다. 존재의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인격적 존재이며, 다른 하나는 비인격적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잘 알고 있으며, 어떻게 다르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구별이 명확하지 못하면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일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개나 고양이 등과 같은 소위 반려(伴侶)짐승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그것입니다. 동물 애호가나 동물보호단체 등의 입장을 보면 반려짐승을 거의 인격적 수준까지 올려놓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사람들이 자기가 데리고 있는 짐승들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들어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누이로, 오빠로, 부모로까지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짐승이라고 함부로 대했다가는 사회적인 지탄이나 벌금형은 물론, 심하면 감옥에까지 가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이지도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전 우주에서 인격적 존재는 하나님과, 천사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밖에 없습니다. 사랑과 경외(敬畏)의 대상이 되어야 할 존재는 오직 인격적 존재밖에 없습니다. 본인의 둘째 아들 학우는 어린 시절, 스님을 스님으로 부르지 말고 그냥 “스”로 불러야 한다고 우겨댔습니다. 그가 왜 그랬는지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님”은 존경과 사랑의 표현인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에서 “님”자를 빼고 “하나”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존경하고 따르는 예수님도 그냥 예수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성령님은 어떻습니까? 그냥 성령으로 불러도 좋을까요? 소위 “성령집회”라는 곳에서 부흥강사들이 종종 하듯이, “성령 받아라” 하며 마치 물건 내던지듯 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이러한 행동이야말로 신성모독이 아닐까?
성령님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 소위 ‘내거티브’ 방식을 시도해 보려 합니다. 한 때 유행했던 유명한 한 광고 문구를 떠올려보겠습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저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광고문구인지요! 성령님에 대해서도 이 같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 같다는 생각입니다.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성령님은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은사”도 아닙니다. 성령님은 “중생”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성결”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계시”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내적 충동”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화평”이나 “마음의 평화”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신자 개개인에게 나타나는 무슨 “개성”이나 “기질”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지금까지 열거한 성령님에 관한 목록은 모두 “그것”에 불과합니다. 즉 비인격적 실재(實在)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요한’ 화자는 성령님을 “그것”이 아닌 “그분”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언급하실 때마다, 남성대명사 “그”(ejkei'no", 에케이노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참고. 14:26; 15:26; 16:8, 13, 14). 그리고 성령님을 처음 소개하고 있는 17절에서는 문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중성 대명사 “그”(oJ, 호; aujto, 아우토)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혜사”로 지칭하고 있는데, 이는 “위로자”, “조언자”, “변호인” 등을 뜻합니다. 오직 인격체만이 이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들으시고, 말하시며, 증거하시고, 확신시키시며,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며, 가르치고, 명령하시며, 금지시키시고, 갈망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시며,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 친히 부르짖으십니다(요 14:26; 15:26; 16:7; 행 2:4; 8:29; 13:2; 16:6, 7; 롬 8:14, 16, 26, 27, 갈 4:6; 5:17, 18). 또한 우리는 성령님께 대하여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그분을 근심시킬 수도 있습니다(행 5:3, 4; 엡 4:30). 이 모두 인격체에 대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님이 인격적 존재라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격적 하나님. 그렇다면 어떤 인격체를 말하는 것입니까? 가능성은 세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인간이거나, 천사이거나, 또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단순히 “보혜사”가 아니라 “또 다른 보혜사”(a[llo“ paravklhto”, 알로스 파라클레토스)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르다”가 의미하는 바는 “첫 번째와 같은 두 번째”입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첫 번째 “보혜사”임을 함축하는 말씀입니다. 즉 성령님은 첫 번째 보혜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이은 두 번째 주자(走者)라는 말입니다. <요한일서>는 보다 명시적으로 예수님이 보혜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요일 2:1).
그렇다면 당연히 성령님은 예수님이 가지신 그 모든 인격적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그냥 “영”(靈)으로 부르지 않고 “거룩한 영”(聖靈)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함이 그분에게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컨대,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전지전능(全知全能) 하시며(참고. 고전 2:10-11; 요 1:12-13; 눅 1:35),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십니다(참고. 시 139:7-10). 즉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며, 이는 또한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과 같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신 31:6; 수 1:5; 히 13:5)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또한 성령님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모든 축도와 모든 침례식(또는 세례식)에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부의 이름”으로 행합니다. 마치 이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두고,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성령님은 하나님의 세례명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패커’ 박사는 그의 책에서 성령님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생각하거나 무슨 물건처럼 부르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그것이 아니라 그분이며, 그분은 다른 어떤 분이기에 앞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격적 관계. 인격적 존재는 인격적 관계를 요구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이 없으면 인격적 관계도 불필요합니다. 나와 돼지 사이에, 나와 고양이 사이에, 나와 내 컴퓨터 사이에 인격적 관계는 없으며, 또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인격적 관계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있습니다. 그분과 나의 구별이 있습니다. 인격적 구별이 있는 곳에 교제가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헌신과 순종이 있습니다. 헌신과 순종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힌두교나 불교와 같은 범신론(汎神論)적 세계관에는 인격적인 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신이고, 신은 모든 것”(All is god and god is all)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신과 나 사이에 인격적인 구분도 없습니다. 여기서 구별된 자아(自我)란 벗어던져야 할 환상에 불과합니다. 나를 벗어버리고 신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理想)은 일견 성경적 이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격적 구분이 없으며, 인격적 사랑과 교제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일견 문맥에서 일탈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제 곧 맺게 될 성령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인격적 사랑은 서로를 별개의 인격체로 인정하고 발전해 가는 것이지, 상호 구분을 없애버리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져 내가 그고, 그가 나라는 치매에 빠지게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격적 사랑은 또한 억압하거나 요구하지 않으며,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순종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참된 구속(救贖)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속에서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 속에 거하면,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신 것처럼(참고. 8:31-32),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과 인격적 교제로 그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계십니다(17절).
그러므로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은 ‘패커’ 박사의 말대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나를 소유하고 계신가? 성령님께서 나의 전부를 소유하고 계신가, 아니면 나의 일부분만 소유하고 계신가? 나는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가(엡 4:30), 아니면 그분의 이끄심을 받고 있는가(롬 8:12-14; 갈 5:18-24)? 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우리 이번 한 주 그 해답을 찾아봅시다.
9. 두 부활
<요한복음>의 “다락방 설교”(요 14-17)와 <마태복음>의 “감람산 설교”(마 24-26장)는 둘 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두 설교의 내용이나 분위기가 비슷하게 느껴져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설교를 듣고 있는 제자들의 반응이 두 곳 모두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추측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강론의 벽두에서부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4:1).
즉 사전에 제자들을 미리 준비시키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불안했고 두려웠습니다. 이것이 두 설교에서 느껴지는 지배적인 분위기입니다. “감람산 설교”는 그 내용마저 아주 비장하고, 음산하기까지 합니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 “난리와 난리”; “기근과 지진”; “멸망의 공포”; “시체와 독수리”; “임산부와 아이들에게 미치는 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한 마디로 지구의 종말이 목전에 와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임박한 종말을 대비해야 할 것 만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감람산 설교의 주제가 종말에 관한 것일까? 사실 많은 설교자나 신학자들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람산 설교를 예수님의 재림이나 종말에 관한 설교로 간주하여, 종말에 관한 시간표 짜 맞추기에 온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부분을 <계시록>이나 <다니엘서>와 연계하여 설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감람산 설교의 주제는 한 마디로 어떻게 살아남을까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고 없는 상황에서, 그분의 제자들이 이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관한 설교라는 말입니다.
설교 내용 중에 등장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상황은 “만일”이 아니라, 실제 상황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설교 중에 등장하고 있는 상황들이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북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지옥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말입니다. 만일 기도하는 모습이 공안 당국에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곧바로 처형입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분의 사랑하는 제자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익히고 배워야 합니다. 결국 감람산 설교나 다락방 설교나 모두 마치 전쟁터에서 사랑하는 부하들을 내보내는 중대장이나 연대장의 최후 지시사항과 같은 것입니다.
당연히 분위기는 엄숙하고, 비장하며, 심각하고, 침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휘관이라면 전쟁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총알이나 부비트랩이 그들을 피해가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 아주 솔직한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에덴’동산도 아니고, 정의와 사랑이 충만한 곳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야말로 곳곳에서 전쟁과, 환난과, 기근과, 지진과, 그리고 불의와 거짓이 판치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계속해서 그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은 ‘에덴동산’이 아니라 ‘에덴’의 동쪽입니다.
이 같은 상황은 주님을 믿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은 무엇일까? 가장 좋은 선택은 모든 무거운 짐 훌훌 벗어던져버리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일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말입니다. 마침 그분이 떠나신다고 하니, 나도 함께 데리고 가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 혹시 ‘베드로’가 이 같은 생각을 했을까요? 그는 자기도 선생님과 함께 가겠노라고 의기양양하게 나섰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핀잔이었습니다. 불가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대신에 그가 들었던 말씀은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할 수 없고, 나중에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참고. 13:36-38). 이 무슨 헷갈리게 하는 말씀입니까! 지금 그분이 나를 데리고 갈 수 없다면, 나중에 그분이 가고 없는 세상에서 내가 무슨 재주로 그 선생님을 따라 해 볼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어느 용사가 있어 감히 그분의 길을 따라 걷는 시늉이라도 내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무엇일까? 즉 선생님과 함께 지금 당장 이 세상을 떠날 수가 없다면 남은 대안은 무엇일까? 한 가지 밖에 없는 듯합니다: “선생님이 가고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대단히 절망적이게도 그 길은 없어 보입니다. 알다시피 이 비정한 세상에서 ‘고아’(孤兒)를 위한 가정은 애초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의 단상(斷想)을 정리해 보자면 이런 것입니다: “선생님을 따라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홀로 남아 살아갈 수 있는 길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해답의 단초를 구하기 위해서 방금 물었던 질문으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선생님이 가고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아, 지금까지 내가 선생님의 강의를 건성으로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이 질문의 전제(前提)가 틀렸음을 처음부터 강조하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 한 번도 이 세상에서 고아처럼 내버려진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근심하지 말라. 네 집이 이미 마련되어있다”(참고. 2절). 자기가 살 집이 마련되어있는 고아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역설적으로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남으로써 가능하게 될 일이었습니다. 이별의 유익이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6절). 고아처럼 남겨질 일이란 결코 없을 것임을 보장하는 또 다른 말씀입니다. 이만하면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하셨음인지, 선생님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추호의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8절). 이 말씀은 일견 쓸데없는 반복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의 두 번의 말씀보다 더욱 구체적입니다. 즉 고아라는 말을 사용하고 계시며, 또 다른 보혜사가 아닌 그분께서 몸소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언제를 말합니까? 직전에 언급하신 또 다른 보혜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보혜사의 형태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어지는 두 절(19-20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부활 후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그리고 “그날에는”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있든, 세상에 남아있든 이 세상은 빛을 거부하므로 결코 그분을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참고. 1:5, 10).
제자들의 부활. 그러나 제자들은 다시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 또한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9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제자들이 살아남아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들 또한 살겠음이라”(19절하). 주님은 여기서 두 단계의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즉 주님의 부활에 이는 제자들의 부활 말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보게 될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육체적인 모습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가시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요한’ 화자는 예수님의 부활로 무엇이 달라질 것인지 그 특유의 어휘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보다”; “살다”, “알다” 등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 단어가 <요한복음>에서 단순히 표면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영생의 영역에 속한 단어들로서 영적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세상은 그대로 “눈 먼”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지만, 제자들은 새롭게 눈을 떨 것이며,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될 것이며, 알지 못하던 영적 진리를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그리고 제자들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절). 우리의 화자는 이 지식이 곧 영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마지막 부활. 하지만 부활절이 주는 의미는 단순히 제자들의 변화된 삶에 국한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부활절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 즉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일 것입니다. 다락방 강론이 온통 종말론적인 어휘들로 가득 차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예컨대, “내가 다시 오리라”는 말씀도 넓게는 종말의 재림으로 확대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조금 있으면”이라는 표현도 종말론적인 의미의 “때가 되면” 또는 “그 날에” 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사 26:20; 합 2:33-34; 히 10:27-28). 또한 “그 날에”(20절)는 “종말에는”이라는 의미도 담겨있습니다(사 2:11; 4:12; 막 13:32).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종말론적인 사건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이자 표적입니다. 따라서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이 말씀도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여 그분의 제자들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갈 것인 즉, 그분이 지금 떠나시는 것은 단지 이 모든 일을 위한 준비작업 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지금 선생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나를 향해서 무어라고 외치고 있을까요? 먼저 산 정상에 오른 이들이 힘겹게 뒤따라오는 등산객들을 향해서 무어라고 외칠까?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
10.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본인이 오래 전 박사 학위 과정 중에 있을 때, 내 지도교수께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화학은 머리보다는 손과 발이 부지런해야 하는 거다.” 이 말씀을 어찌 화학에만 국한할 수 있겠습니까! 이공계열의 거의 모든 학문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선언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오랜 과학․기술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구미(歐美) 제국들은 이 원칙에 충실해 왔기 때문에 눈부신 과학․기술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동안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상황이 크게 나아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지금 전국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물리나, 화학이나, 생물 등과 같은 자연과학 분야의 교육에서 실험과 실습은 거의 전무한 실정입니다. 학생들은 이들 과목을 교과서로 배울 뿐입니다. 손과 발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무엇보다 경제적인 원인이 가장 크다 할 것입니다. 실험을 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장비나, 장치나, 시설이나, 재료 등에 필요한 돈 말입니다. 학교나 나라나 재정이 충분치 않습니다. 하지만 실은 이보다 더 큰 원인이 있습니다. 학부모나 학교가 이를 원치 않습니다. 왜일까? 대학입시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머리 싸매고 달달 외우는 공부를 해야 되는데, 한가하게 실험이나 하면서 듣고, 보고, 냄새 맡고, 만져보고 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 자연과학 과목에서 소리와, 냄새와, 색깔과, 감촉이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예컨대, 화학 원소들은 오직 주기율표 안에만 있을 뿐입니다.
대학이라고 형편이 나을까? 중고등학교 시절에 못 해본 실험과 실습을 이공계 대학에 오면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을까? 그렇지 못합니다. 본인이 속해있는 화학과에서도 대부분의 화학 과목들을 순전히 책으로 가르치고 배웁니다. 물론 실험 시간도 있기는 하지만, 실험실이라고 가보면 썰렁하기 짝이 없습니다. 교수나 학생도 실험에 대하여 교실 수업에 비해서 별다른 흥미나 관심이 없습니다. 중고등 학교 시절에 제대로 해 본 적도 없으니, 당연히 잘 하지도 못합니다. 과학은 그저 따분하고 지루할 뿐입니다. 온갖 수식과 외워야 할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수준과, 관심으로 대학원이나 기업에 가면 잘할 수 있을까?
본인도 이런 수준으로 삼십여 년 전에 박사 학위를 따겠다고 외국 유학을 가지 않았겠습니까! 결과는? 처음 한동안은 그야말로 좌충우돌이었습니다. 실험실에 불을 내는 등, 참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사고도 많이 저질렀지요. 내 지도교수께서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보았을까요? 그동안 과학을 순전히 머리로만 해온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손과 발은 그냥 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내 눈과, 코와, 귀는 있기는 했으나 실상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체험과 관련한 논의를 좀 더 진전시켜보기로 하지요. 나는 꿀맛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있을까? 오렌지 맛이 어떠한지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에게 무어라 대답해주어야 할까? 질문은 또 있습니다. 농사를 책으로 지을 수 있을까? 운동을 책으로만 가르칠 수 있을까? 자동차 운전 매뉴얼이 나를 대신해서 운전을 해줄까? 교과서나 선생님이 내 대신 공부를 해줄 수 있을까? 병원이나 의사가 내 병을 대신 감당해 줄 수 있을까? 진열대 위의 식품들이 내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교회나 목사가 내 대신 신앙생활을 해줄 수 있을까? <성경>이 내 영혼을 구원해 줄 수 있을까? 하나 같이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하나의 정답이 있음을 압니다.
약속.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나 지금이나 늘 듣는 이로 하여금 당혹스러움과 불편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 때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강의를 평가절하 하거나, 도전적인 질문으로 일관합니다. 그냥 받아들이면 될 일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처럼 힘든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이지요. 마치 바퀴벌레가 빛을 피하여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도 그냥 달아다는 것이 아니라, 아주 고약한 냄새를 내뿜거나 독침을 쏘면서 달아나듯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왜 이처럼 항상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 가르침을 수용할 의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용할 의사가 없으니, 일견 거룩한(?) 신학적 질문들로 그분을 평가절하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컨대, 이런 식의 질문 말입니다: “당신의 가르침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 맞아?” 이에 대해서 그분은 이렇게 대꾸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7:17).
무슨 말인가요? 이 문장은 조건 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려 하면”. 즉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보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머리로서가 아니라, 손과 발로 체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신학으로서가 아니라 신앙생활을 통해서 더욱 깊어지고, 생생해진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자는 예비 어머니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출산을 통해서 진정한 어머니가 되는 것이지요. 머리로써가 아니라 몸으로써 말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활로 이 약속을 지키실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조만간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인데, 단순히 보는 것 이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게 될 것은 세상이 볼 수 없는 것입니다(19절). 세상은 볼 수 없고 제자들만이 볼 수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제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새로운 관계, 즉 한 차원 높은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 화자에게 있어 “알리라”, “보리라”, “살리라”는 실은 동일한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사도들은 이를 이해했을까? 다시 한 번 “오해”가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유다’가 대표주자로 나서고 있습니다(22절). 그의 질문의 요지인 즉은, “세상은 왜 그분을 볼 수 없습니까?”입니다. 아마도 그는 세상이 깜짝 놀랄 하나님의 또 다른 현현(顯現)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볼 수 있는 ‘메시야’의 출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나타나서 능력으로 나라와 민족을 심판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관계”는 비가시적인 것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 관계란 “대 연합”, 즉 하나님과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절).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 일이 가능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물론 부활의 절정은 최후의 심판 날까지 미루어지겠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나 지금 살아가고 있는 자에게는 이 약속은 이미 성취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실언(失言)을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명. 그 약속이 당시 사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나에게 대해서도 이루어졌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대해서도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을 맛볼 수 있을까?
그분의 약속을 듣고, 읽은 것으로 가능할까? 이 일에 나의 손과 발은 필요 없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예수님께서는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그것도 세 번에 걸쳐 반복해서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두 번은 긍정으로, 한 번은 부정적인 선언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언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즉 과연 무슨 수로 아버지와, 아들과, 내가 하나가 되어있음을 느끼고 확인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번에도 역시 조건부입니다. 즉 “나의 계명을 지키려 하면”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켜보면”입니다. 여기서 계명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하는 자는 새로운 차원에서 항상 새롭게 하나님과 그 아들을 만나고, 알아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습니다만(참고. 3:16),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앞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15절). 그리고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21절). 우리는 이 두 말씀이 결국 같은 것임을 알 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일 것이며,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23절).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선포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하는 모든 신자들의 삶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신자들의 삶에 내재(內在)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매일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만, 우리는 반대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일 사노라.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20절).
이번에는 ‘유다’가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여전히 그는 어둠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나도 익히 알고 있으며, 매일 일상에서 체험하고 있는 그 사실을 대 사도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 못했다니요! 그렇다면 언제 그의 눈이 밝아졌을까요? 이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단락을 통해서입니다.
11. 또 다른 보혜사(2)
“내 그럴 줄 알았어.” 이 말이 딱 들어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 전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대통령 전직 대변인 윤 창중 씨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언젠가 대형 사고를 칠 줄 알았다고들 합니다. 대통령의 대변인은 과연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그는 대통령의 심중이자 입이며, 동시에 한 나라의 입이 되어야 합니다. 대통령과는 지근거리(至近距離)에서 늘 대통령의 일투족 일거수(一投足 一擧手)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가슴과 머리에 새겨두었다가, 그 의미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도 자기 생각이나 말이 아니라, 대통령의 말과 생각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완전히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이 다음 날 미국 의회 연설을 위해서 밤을 새워 준비하며 애를 쓰고 있는 동안에, 그는 술집에서 인턴 여대생을 데리고 술을 마시며 희희덕대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미국에 관광여행을 온 것으로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마땅히 대통령의 독생자(獨生子)가 되었어야 했을 사람이 그처럼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독생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대통령의 의중(意中)이고, 심중(心中)이며, 흉금(胸襟)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부르는 것도 괜히 그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분이 곧 하나님의 심중이자, 의중이며, 흉금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한 번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 스스로도 여러 번에 걸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4:10).
당연히 대변인의 영광은 대통령의 영광이며, 대변인의 수치는 대통령의 수치가 됩니다. 독생자의 영광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도 이점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13:31). 이는 그분께서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아버지의 의중을 드러내셨다는 말입니다. 즉 그분은 하나님의 완벽한 계시였다는 의미입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표현을 빌자면,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 가운데 거하셨다”는 말입니다(참고. 골 1:19; 2:9).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또한 “(우리 믿는 도리의) 사도(使徒)”로 부르고 있습니다(히 3:1). 사도라 함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도들의 사도이기도 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사도이신 예수님과 함께 삼여 년을 보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그리고 배웠습니다. 지금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까지 선생님의 가르침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25절). 이 표현은 다락방 강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서(예. 16:1, 4), 당시의 상황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 너희와 함께 있다”는 말씀으로 미루어 이제 그분은 곧 떠나실 것이며, 조만간 다락방 강론이 모두 끝나게 될 것이었습니다(13:31-14:31). 더 이상의 강의는 이제 없을 것입니다. 이후부터 사도들은 지금까지 그동안 선생님께서 하신 그 모든 말씀 하나 하나를 기억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적용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그들이 가진 소망에 관해서 묻는 자가 있으면, 선생님의 심중이 되고, 의중이 되고, 흉금이 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변인이자 독생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기억의 법칙. 하지만 그 일이 과연 가능할까? 선생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늘 엉뚱한 질문으로 오해와 무지를 드러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시선이 늘 보이는 것들에만 집중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이 같은 일이 과연 일어날까? 이들은 지금 무엇인가 듣기는 하나 귀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온통 선생님이 이제 곧 떠나실 것이라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무슨 새로운 것을 배울 것이며, 배운다 한들 무슨 유익이 될 수 있을까?
관심과 흥미가 없는 곳에 설교는 그야말로 설교에 그칠 뿐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도 별 수 없습니다. 통상 설교는 “잔소리” 내지는 “지겨운 훈계” 등과 동의어로 통용되어왔던 터 아닙니까! 더 나아가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섭리입니다. 스스로 지난 주 내가 들은 설교 내용 중 얼마를 기억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면 쉽게 인정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주장합니다. 설교는 교회 교육에서 가장 비효과적이고, 비생산적인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사도들의 문제가 무엇일지 한 번 짚어볼까요? 관심과 흥미도 없다. 이해도 안 되고,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오늘이 그러할 진대 내일은 더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 이것은 범죄가 아니라 자연법칙이며 순리입니다. 우리가 흔히 “열역학 제 2 법칙”으로 부르는 것이지요. 사도들만 이 법칙의 적용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질병이며, 죽음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냥 거대한 탁류에 밀려 떠내려가고 있는 한 그루 통나무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나마 그 탁류에 떠밀려 내려가고 있는 자신을 볼 수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즉 떠내려가면서도 자신이 떠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어떻게 이 거대한 자연법칙을 거슬리고, 어기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일이 과연 가능할까? 흔히 기적을 자연법칙에 거슬러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면,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기억의 법칙”을 거슬리는 기적 말입니다.
성령님의 법칙. 그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 사도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롬 8:1). 그렇습니다. 그는 기억의 법칙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본문 26절에서 같은 해법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26절상). 이 구절은 참으로 심오합니다. 너무 심오해서, 보다 깊은 묵상을 위하여 잠시 숨고르기를 해야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이 짧은 구절 안에 삼위의 하나님 이름 모두가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 다시 한 번 이 구절을 요약해 보자면,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님을 보내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을 사도로 부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을 늘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그리고 있습니다(참고. 4:34; 5:23, 24, 30, 37; 6:38-40; 7:16; 8:16, 18, 26; 12:44-49).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며, 아버지를 대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5::43; 1:25).
그런데 성령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왔으며, 예수님의 대변자로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자신의 이름으로 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님 또한 그 자신의 이름으로 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왔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과 성령님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왔다면,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수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의 인격”에 이은 “성령님의 사역”에 관한 논의로 넘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르치고 기억시키고.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한 구절(26절)은 성령님에 관해서 가장 짧은 구절입니다만, 성령님의 사역에 관해서 가장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정의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성령님의 사역은 두 가지입니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26절). 하지만 이 두 가지 일은 대동소이하면서 상호 보완적입니다.
“생각나게” 한다는 말은 “기억나게” 한다는 말일 것인즉, <요한복음>은 일찍이 이 단어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2:17);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2).
제자들이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동을 나중에 비로소 기억하고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희미해지고, 사라져가던 사도들의 기억이 되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요?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하던 일이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것일까요?
살다보면 우리는 이런 경험을 자주 하게 됩니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이 이와 같은 것이지요. 예컨대, 어릴 적에 아주 어렵게 느껴지던 책들이 어른이 되어 읽어보면, 저자의 의도까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살아가면서 인생의 경험과, 지식과, 지혜가 쌓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도 이처럼 성숙한 것입니까? 영적인 일들조차 스스로 분별하고 깨달을 있을 정도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영적인 영역에 속하는 일들에 있어서는 지식이나 지혜가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말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9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9-13)
이제 우리는 사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가 찾아왔던 것이지요! 그들 스스로 깨우친 것도, 경험이 그들을 가르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직접 그들을 가르치고, 일깨우며, 기억나고, 생각나게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며, 애매모호하던 것이 분명하게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들 속에서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님의 사역을 신학적으로, “영감”(靈感, inspiration) (또는 “감동”(感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에서는 딱 한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qeovpneusto", 데오프뉴스토스) 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헬라’어 단어 속에 이미 하나님을 뜻하는 접두사(接頭辭) ‘데오’(qeov)를 포함하고 있어, 영감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계시(啓示, revelation)의 한 측면이자 수단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을 지칭하는 것입니다만, 이미 이 구절이 <신약> 속에 들어와 있으므로, 그야말로 “모든 성경” 즉 <성경> 66권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감동”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감” 즉 “성령님의 감동”으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굳이 구분하자면, 성령님을 <성경>의 실질적이고 초자연적인 저자로 주장한다 해서 크게 잘못된 주장은 아닐 것입니다. 예컨대, <신약>의 경우, 사도들이나 그들의 추인을 받는 누군가가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는” 성령님의 사역은 <성경>의 탄생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성경> 탄생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간여해 왔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이 같은 사역을 “조명”(照明, illumination)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의 “조명”은 <성경> 탄생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의 계시의 또 다른 한 측면이자 수단으로 기능해 왔던 것입니다. “영감”과 “조명”의 사역을 시대적으로 구분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영감”을 통해서, 구전으로 전해오던 말씀들을 전하고, 글로 기록하고, 편집하고, 최종적으로 <성경>으로 완성되게 하셨다면, 그 이후에는 “조명”을 통해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진리로 받아들이게 하는 일에 간여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기왕에 하나님의 계시 이야기가 나왔으니, 계시의 또 다른 측면을 알아두면 좋을 것입니다. “현현”(顯現; manifestation)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꿈”이나 “음성”이나, “환상”이나, 기타 초자연적인 “기적” 등이 이에 속한다 하겠습니다. 이들은 주로 언제 나타났을까? 딱히 시대적으로 구분해보자면 현현은 영감이나 조명에 앞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의 수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현현은 <구약>에서는 대부분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그리고 <신약>에서는 주로 <사도행전>에서 마치 폭죽이 터지듯 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시기적으로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바, 이스라엘 즉 교회 탄생 이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탄생 이전에 이처럼 현현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현을 성부 하나님과 연관시킬 수 있다면, “영감”과 “조명”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성령님의 사역은 영감과 조명에 국한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현현이든, 영감이든, 조명이든, 계시의 알맹이 즉 핵심 내용과 궁극적 대상은 그리스도, 즉 성자 하나님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15:27).
범위와 한계. 바로 여기에 “또 다른 보혜사”의 한계가 있다 하겠습니다. 즉 그분께서 “가르치고 생각나게”하는 사역에는 범위와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가르치며, 무엇을 기억나게 하며, 생각나게 한다는 것일까? 전혀 새로운 것들일까? 예수님께서 생전에 가르치지 않았거나, 미처 시간이 없어 가르치지 못했던 것들일까? 그래서 사도들은 소위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선생님께서 말씀하지 않았던 내용까지 추가로 포함시킬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누구나 “성령 충만”(?)을 받으면 늘 새로운 <성경>을 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16:13-14). 더 이상 명쾌하고 분명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가르치고 기억나게 할 것이란 다름 아닌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 그분께서 드러내신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즉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것이야말로 성령 사역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회도 역사적으로 일곱 차례의 공회(公會)를 통해서 엄숙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의 새로운 계시는 필요치 않으며, 없을 것이다.” 참으로 단호하고도 명쾌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신약 교회는 바로 이 고백 위에 서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는 끝난 것인가? 그래서 화석(化石)처럼 <성경> 책갈피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역사적 유물(遺物)과 같은 것인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나의 이해가 “현현”이나 “감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성령님을 통해서입니다. 그분의 “조명”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도 내가 <성경>을 들고 읽을 때, 성령님께서는 이렇게 “조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15:27). 나의 존재의 의미를 상기시켜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일깨우고 가르치는 일말입니다. 나로 하여금 그분의 대변자요, 심중이며, 흉금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제발 윤 아무개 같은 자가 되지는 말라는 경고이자 권면입니다. 헌신합시다!
12.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이 마지막 단락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평안”(平安)을 주제로 한 미술경연대회에서 있었던 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제에 걸 맞는 많은 작품들이 출품되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기대할 수 있는 바대로, 대부분의 작품들이 ‘밀레’의 만종(晩鐘)을 연상시키는 목가적 풍경이나, 아름다운 대자연의 모습 등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최우수작으로 뽑힌 작품은 평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그림을 묘사해 보자면 대충 이런 모습입니다.
거대한 폭포수가 천애(天涯)의 절벽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고, 절벽 중간 어디쯤에 폭포수와 함께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나무 한 그루가 절벽바위 틈새에 뿌리를 박은 채 비스듬하게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 가지 사이로 얼기설기 잔가지들로 이루어진 새 둥지 하나가 있고, 그 안에 새 한 마리가 알을 품고 한가로이 앉아있습니다. 마치 평안을 염원하는 주최 측이나 다른 참가자 모두를 비웃기라도 하듯 말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는데, 이 새는 정녕 그 나무가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으로 순진하게 믿고 있었던 것일까요?
어떻습니까? 나라면 이 그림을 최우수작으로 선정한 심사위원의 결정에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왜일까? 생각해 보면 그 새는 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나무 가지가 부러지든, 나무가 뿌리가 뽑혀 통째로 절벽 아래로 떨어지든,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품고 있던 알도 발톱 사이에 끼고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새에게 있어 평안이란 견고하게 뿌리박고 있는 나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비상(飛上) 능력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가 자신이나 심사위원 모두 이 사실을 간파했던 것일까요?
화평과 평화. 얼마 전 박 근혜 대통령께서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나라 휴전선 150 킬로 지역을 세계 평화공원으로 조성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반도에서 이 지역만큼 평화로운 곳이 있을까 싶습니다. 인적은 물론 도시의 공해와 소음과도 거리가 먼, 그야말로 별천지입니다. 이곳에서 온갖 종류의 진기한 동식물들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곳이 주는 고요와 평화를 한껏 즐기고 있을 뿐입니다. 철책 선을 마주하며 눈을 부릅뜨고 주야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병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말입니다. 이 장면 역시 그림으로 그려 출품한다면 우수작으로 선정될 공산이 커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 동물들이 철책 선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 해도 여전히 이처럼 한가롭게 지낼 수 있을까? 멎었던 총성과 포격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고, 탱크와 군대가 요란하게 들이닥친다 해도 여전히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진정 이들은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과연 이 장면을 평화라 할 수 있을까? 비록 한시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그대로 유지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이 말은 평화의 조건이 휴전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다는 뜻이겠지요. 평화가 나 아닌 어느 누군가에게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그림을 감상해 보기로 하지요. ‘이사야’ 선지자가 소개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양과 염소와 송아지와 암소는 초식동물입니다. 그리고 이리나 표범이나 사자는 육식동물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현실에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겠습니다만, 지금 이곳에서는 평화가 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양과 염소와 송아지와 암소가 헌신적으로 노력한 결과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리와 표범과 사자가 본래의 식성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육식성을 버리고 초식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달리 표현하자면, 이리와 표범과 사자는 자신들의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버리고 양과 염소와 송아지와 암소처럼 살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독사도 스스로 이빨을 뽑아버렸거나, 아니면 독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기로 작정했기에, 어린아이가 마음 놓고 독사 굴에 손을 넣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에서 양과 염소와 송아지와 암소와 어린 아이가 누리고 있는 평화(平和)와 평안(平安)은 실은 화평(和平)의 결과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두 단어는 두 글자의 순서만 다를 뿐이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실로 차이가 큽니다. 화평은 적대적인 관계를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전쟁에서 서로 무기를 내려놓고 강화(講和)하기로 작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평화는 이렇게 해서, 즉 화평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초식동물들의 평화와 안식은 그러니까 자신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육식동물들의 선택에 달려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아, 평화란 내 속에 있었던 것도,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내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로구나!
그리스도의 평안. 그런데 이 그림은 어떻습니까? ‘갈릴리’ 호수 한 가운데입니다. 호수가 워낙 커서 당시 사람들은 이를 바다로 불렀다고들 합니다. 호수는 내륙에 위치해 있어 대개 수면이 잔잔하고 고요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만, ‘갈릴리’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풍랑(風浪)이 다반사로 있었으며, 때로는 그 규모가 너무 커서 노련한 어부들조차 두려워 떨게 했던 것 같습니다.
<공관복음>은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마 8:23-27; 막 4:35-41; 눅 8:22-25).
22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눅 8:22-25)
에피소드의 주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만, 이 그림을 설교 벽두에 소개한 바 있는 “평화 미술 경연대회”에 출품하면 어떨까요? 칠흑같이 어두운 밤, 몰아치는 비바람, 넘실대는 풍랑, 요동치는 일엽편주(一葉片舟), 여기에 풍랑의 소음(騷音)과 요동(搖動)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는 제자들의 야단법석, 그리고 그 안에서 태평스럽게 잠을 자고 있는 예수님. 이 그림은 실로 대조(對照)와 해학(諧謔)의 절정을 담아내고 있는 걸작(傑作)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있었으나 없었습니다. 배 안에는 있었으나,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들 곁에는 있었으나, 그들을 감싸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을 감싸고 있었던 것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었습니다(참고. 창 1:2). 빛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해학이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비바람과, 풍랑과, 요동치는 배와 완벽한 공명(共鳴)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같이 춤추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붙잡고 그분과 함께 스텝을 밟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방주 안에서 방주와 함께 흔들리며 홍수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노아’와 같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나는 지금 제자들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처지가 못 됩니다. 그 배 안에 내 모습도 함께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흔들리고, 고함치며, 불평하며,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내 모습 말입니다. “내가 죽게 되었습니다”고 소리치며 예수님을 내려다보니, 더욱 기막힌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잠을 자고 있습니다! 마치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든 아이가 이처럼 평화로울 수가 있을까요? 이 장면을 묘사하기 위하여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단어들을 생각해 보니 이런 것들입니다: 고요; 잠잠; 태연; 평온; 평안. 이와 같은 대조, 즉 예수님의 안과 밖의 대조가 실로 기막히다는 것입니다.
평안이 하는 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지금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겠다고 하는 “나의 평안”이 한 일입니다. 평안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냥 평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안입니다. 그가 가지고, 누리고 있는 평안입니다. 어느 누구도 만들어낼 수 없는 평안입니다. “평안”, 즉 “평화”(eijrhvnh, 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샬롬’(!/lv;)을 ‘헬라’어로 번역한 단어입니다. 이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 즉 “화평”을 뜻하지 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화평이 이루어내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그야말로 완벽한 조화와, 질서와, 안식이 지배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나는 지금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의 질서가 창조의 결과였듯이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평안”은 현재 있는 상태를 단순히 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지배하고, 정복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날 밤, 그 호수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주님은 자신의 평안으로 그 모든 혼돈과, 흑암과, 공허를 잠잠하게 했습니다. 지배하고, 정복했으며, 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분은 이와 같은 능력을 사도들에게 주시려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있다 해도 누가 찾아 줄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좋은 것을 내가 갖지 누가 남에게 양도하려 하겠습니까! 세상이? 사탄이? 내 이웃이? 모두들 필사적으로 그것을 찾고 있습니다. 그 ‘샬롬’을 누리려고 말입니다. 그날 사도들도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25절).
‘이사야’ 역시, 양과 염소와 암소와 어린 아이가 해(害)를 당하지 않고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갈라지고, 분열되고, 깨어지고, 원수가 되어 혼돈과, 흑암과, 공허로 가득 차 있던 그 모든 관계들이 원상으로 복구가 된 모습입니다. 재창조인 것이지요. 화평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능력 때문입니다. 평안의 능력 말입니다. 이와 같은 재창조의 능력은 단순히 피조물들 사이에 국한된 것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마음마저 돌려놓았습니다. 즉 나와 하나님의 적대적인 관계마저 화평으로 돌려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성령님의 열매. 화평은 성령님의 열매입니다(갈 5:22).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 즉 성령님을 언급하신 직후에 화평을 약속하고 있음이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는 것을 기뻐하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28절). 이제 이 말씀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아들이 자신을 화평의 제물로 아버지에게 드린 후에야,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 역시 아버지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애초에 내 안에 평안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폭포수 절벽의 그 새가 누리고 있는 평안도 실은 평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유심히 살펴보면 그 새는 한 곳에 앉아 있으면서도, 단 한 순간도 고요하게 앉아있는 법이 없습니다. 온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 안에도, 그 밖에도 자신의 안녕을 보장해 줄 그 어떤 것도 없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절대 독재자일수록 더 불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있는 사람일수록 왜 더 갖지 못해 안절부절 일까? 그 속에, 그리고 그 밖에 평안이 없다는 증거이겠지요. 받지를 못했으니 말입니다.
그것은 그저 값없이 얻는 선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칼처럼 사용해야 합니다. 물리치고, 베고, 자르고, 정복하고, 죽여야 합니다. 혼돈과, 무질서와, 불안과, 흑암과, 공허를 말입니다. 그 비결은 이것입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연습과 토의
1. 예수님의 두 번째 강론 (13:31-14:31)의 핵심적인 주제는 무엇입니까?
2. 본문을 구조적으로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3. 본문으로부터 내가 암송할 수 있는 구절을 모두 암송해 봅시다.
4. 베드로의 헌신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5. 본문 중에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서 가장 먼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본인이 행한 설교 중 하나를 참고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6. 선생님의 강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에 대해서 소감과 간증과 구체적인 헌신을 나누어봅시다. “우리가...해야겠습니다.”로 시작되는 간증은 사절합니다. 사돈 남 이야기를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간증은 나의 간증이지 사돈의 간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돈 것은 사돈이 직접 하도록 내버려둡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