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6과
서 론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3:1-20:31약 86분 분량

<요한복음(3)>(13:1-20:31)의 주제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입니다. 화자는 이 두 이야기를 <수난설화>와 <부활설화>의 틀 속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 두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먼저 <다락방 강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상대로 한 강론이라 해서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입니다. 그 범위는 13:1-17:26 사이로서, 화자는 이를 <수난설화> 바로 앞에 배치함으로써, 예수님의 고별 강연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락방 강론”은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주제가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화자는 이들을 “최후의 만찬”이라는 상황(context) 속에서 일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이 모든 주제들을 한 장소에서 한꺼번에 다루신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속에 등장하는 일련의 주제들이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에 여러 시기에 걸쳐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측건대, ‘요한’ 화자는 이들 주제들을 “최후의 만찬”이라는 상황과 결부시켜 한 곳에 모아놓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최후의 만찬”이라는 상황인가? 아마도 <고별강연>은 그 내용 상 공동체를 위한 권면으로서, 서로를 향한 사랑과 희생과 섬김 등의 주제가 핵심을 이루고 있어, 이 같은 상황에서 다룰 수 있는 좋은 주제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주의 만찬”이 주는 분위기를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애나 공동체 내에서의 희생과 섬김, 등등을 이 때 특히 강조하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1. 양식
전체 본문의 문학 양식은 당시 ‘헬라’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던 “고별강연” 또는 “유언집”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양식은 비단 ‘헬라’문학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유언이나(창 49), ‘여호수’아의 고별강연(수 22-24), 그리고 ‘다윗’의 유언(대상 28-29)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신명기>는 가장 중요한 고별 강연의 예가 될 것입니다. 이 경우 고별 강연을 하고 있는 사람은 ‘모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 화자는 이곳에서 예수님의 다락방 강론을 ‘모세’의 그것과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대비를 통해서 그는 예수님을 ‘모세’에 이은 두 번째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 옛날 그들의 선조들이 ‘가나안’의 문턱에서 최후의 설교를 들었다면, 이제 제자들은 바야흐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하기 직전에 비슷한 강론을 듣게 되는 셈입니다. 두 강론 모두 새로운 내용을 소개하기 보다는 익히 알고 있는 말씀들을 재차 당부하는 선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님은 ‘모세’와는 달리 고별 강론 이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계속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2. 구조
전체 강론은 주제에 따라 크게 네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강론 1: 세족(洗足)과 배반(13:1-30)
2) 강론 2: 죽음과 부활(13:31-14:31)
3) 강론 3: 15-16장
(1) 포도나무와 가지(15:1-17)
(2) 예수와 제자들과 세상(15:18-16:4)
(3) 보혜사(16:4-33)
4) 제사장의 기도
다락방 강론의 형식이나 내용과 관련해서 특이한 것 중의 하나는 “보혜사”, 즉 성령님에 관한 다섯 번에 걸친 강론입니다. 그것도 한 번에 걸친 긴 강론이 아니라, 여러 개의 단편적인 강론이 14-16장에 걸쳐 흩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각 단락이 어떤 주제들을 담고 있는지 알아볼 일입니다:
(1) 14:15-17, 25-26
(2) 15:26-27
(3) 16:7-11, 12-15
3. 배경
화자는 그 시기를 “유월절 전”이라고만 밝히고 있습니다(13:1). 아마도 그 전날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화자는 또한 이어지는 진술에서 예수께서 총독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는 날도 유월절 전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진술에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18:28).
그러나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기념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막 14:12; 눅 22:15). ‘요한’ 화자의 진술과는 분명히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차이를 놓고 학자들은 보다 정확한 전승을 취하는 문제를 놓고 이견이 있어왔습니다. ‘요한’의 경우 예수님을 “유월절의 양”으로 그리고 싶은 신학적 의도 때문에(요 1:29; 19:31-37) 의도적으로 날짜를 바꾸어 유월절 전날이라고 썼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만,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17
제 17과: 강론(1)-세족식
강론(1): 세족식
(13:1-30)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4,15).
제 16과에서 살펴본 바대로, 복음서는 이제 가장 중요한 고비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브루스 밀른’에 따르면, 화자는 그것을 세 가지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브루스 밀른’, 259쪽.
첫째, 화자는 먼저 “이제 유월절이 이르렀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화자는 예수님의 사역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시사할 때마다, 새로운 절기를 언급했습니다. 특히 이번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해석하는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19:14, 36).
둘째, 그는 “그 때”가 이르렀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 여러 차례 살펴본 바 있습니다.
셋째, 그는 예수님의 관심이 대중이나 무리가 아니라, “자기 사람들”에게로 집중하고 있으며,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예수님의 사역은 공적 사역이 아니라 제자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다락방 강론도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형식과 구조. 그 유명한 세족식(洗足式)을 포함하고 있는 본문은 크게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 단락의 주인공은 예수님과 ‘가롯 유다’이며, 각 주인공이 보여주고 있는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 이 두 단락이 마치 시적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1) 단락 1: 세족(1-20절)
(2) 단락 2: 배반(21-30절)
첫 번째 단락은 첫 세 절(1-3절)에서 비교적 긴 서론적 도입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브라운’은 특히 1절을 소위 “영광의 책”(13-20장) 전체에 대한 서론으로, 그리고 나머지 두 절(2-3절)을 세족의 의미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서론으로 간주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 세 절 모두를 “다락방 강론” 전체에 대한 서막으로 보되, 동시에 세족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으로 간주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이와 유사한 문학적 기능을 <히브리서> 처음 세 절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이곳에서 기자는 천사보다 더 우월한 예수 그리스도를 문장의 끊어짐이 없이 유창하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다시 두 개의 작은 단락, 즉 세족식(4-11절) 장면과 세족의 의미에 대한 예수님의 해설(12-20절)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세족식이 전하려는 신학적 메시지는 예수님 자신의 설명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하나의 교훈으로서의 기능일 것입니다(참고. 15절).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한 하나의 모범을 넘어서는 보다 깊은 영적인 차원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그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은 비록 짧은 대화로 이루어져 있지만, 극적인 긴장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배반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와, 실질적인 성취가 동시에 드러나고 있으며,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30절) 유다가 예수님의 빵을 받고 곧바로 밖으로 나가고, 그 때가 밤이었다는 언급을 통해서 화자 특유의 수사를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발을 씻기심(1-20절)
도입. 단락의 처음 세 절은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서론적 도입부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이 원래의 전승에 포함되어 있던 것인지, 아니면 후대의 편집적 삽입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보는 근거는 이 문장이 도입부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길고 장황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혹자의 주장대로, 이곳에서부터 복음서 제 2부가 시작되는 곳이니만큼, 위 세 절은 이어지는 전체 내용에 대한 서막으로 간주한다면 그렇게 길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화자 자신의 입장에서도 앞으로 전개될 일련의 사건이 지니는 각별한 의미를 사전에 강조하고, 예고하고 싶어 이처럼 길게 도입부를 쓰고 있을 수도 있다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세 절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에게 친숙한 ‘요한’ 신학의 정수(精髓)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으며, 핵심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그 때”에 관한 예수님의 인식(참고. 12:23; 17:1); (2) 자기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애정(참고. 1:11); (3)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전권(全權) 위임(참고. 3:35); (4) 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참고. 16:28); (5)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일을 ‘가롯 유다’를 통해서 방해하려는 마귀의 공작(참고. 12:31; 13:27).
우리의 화자는 이와 같은 신학적 내용들을 한데 버무려 예수님에 관한 위대한 진실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즉 그분은 ‘가롯 유다’를 도구로 하나님의 계획을 저지하고 방해하려는 마귀를 대항함에 있어,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의존하기보다는 놀랍게도 자신을 겸손하게 낮춤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1-3절)
여기서 “그 때”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이유입니다. 즉 아버지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아들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그 때를 말합니다(12:24-26). 즉 세상을 심판하고, 마귀를 패배시키며, 아들이 들림을 받고 이를 통해 아버지의 거룩한 섭리가 실현되는 그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12:31-32). 따라서 이 때는 아들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17:5).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자기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 사람들”이라 함은 좁게는 그분의 사도들을, 그리고 넓게는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일 것입니다.
아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아버지의 이와 같은 의지와 결단에 맞서는 또 다른 의지가 제 2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들 ‘가롯 유다’를 통해서 드러나는 마귀의 의지가 그것입니다. 일견 ‘가롯 유다’의 의지는 예수님의 그것과는 달리, 마귀가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 자신의 자의적(恣意的) 결심을 의미합니다(참고. 계 17:17).
즉 ‘유다’는 마귀의 감동을 받아 마귀의 뜻을 행하려고 마음먹었다는 뜻입니다. 이 서막에서 화자가 ‘가롯 유다’를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그에 관해서 보다 상세한 이야기를 예고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다른 사람도 아닌 그분의 사도에 의해서 배신을 당했다는 초대 교회의 충격을 드러내기 위함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도구가 아닌 마귀의 도구가 되었던 그리스도의 사도! 극명하게도 엇갈리고 있는 선생과 그 제자의 모습!
섬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행위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이 장면은 노예가 주인의 발을 씻겨주는 것에 대한 하나의 상징입니다.
4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4-5절)
근동 지방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예의에 따르면, 손님들이 먼지투성이의 길을 걸어오느라 발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그가 도착했을 때 그의 발을 씻겨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주인이 아니라 종이나 어린 아이나 여인들이 맡아했습니다. 손님에 대한 예우이기하나 그 일 자체를 비천한 일로 여긴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 남자가 이 같은 비천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은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성경>에 따르면 ‘유대’인은 동료 ‘유대’인을 노예로 삼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레 25:39).
그러므로 아직 발을 씻지 못한 채 식사를 시작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자들 중에서 서로의 발을 씻겨주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화자가 보여주려는 바는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창세기> 21:14에 대한 ‘유대’인들의 <미드라쉬>는 ‘아브라함’이 그의 노예 아내 ‘하갈’을 내쫓을 때, 이혼 증서와 함께 그녀의 허리에 수건을 둘러매어 주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가 노예 신분임을 알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 허리에 수건을 동여매는 행위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세족의 일차적인 의미는 간파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 의미를 충분히 간파한 듯합니다. 그의 충격적인 발언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6절)
원문에 가깝게 이 구절을 번역해 보면 대충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 아니 당신께서... 오, 이런!” ‘베드로’는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충격적인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예고했을 때 ‘베드로’는 격렬하게 반대하고 저항한 바 있습니다(참고. 막 8:32-33).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8절상). 두 경우 모두 예수님의 진지한 말씀과 사도의 몰이해(沒理解)는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세족을 비롯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는 당분간 더 기다려야 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7절)
주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오순절 사건 이후에야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은 지금 그들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장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이번에도 주님은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베드로’를 향해서 다소 충격적인 계시를 들려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절)
이 구절에서 등장하고 있는 ‘헬라’ 단어 “상관”(mevro", 메로스)이 ‘유대’인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기업”, “유업”, “몫” 등입니다. 특별히 이는 약속의 땅에서 차지하게 될 유업과 관련이 있고, 종말론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이 있습니다(참고. 눅 15:12; 마 24:51; 계 20:6; 눅 22:29-30). 하지만 사도의 오해는 계속됩니다.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말씀에 그는 자신의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9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이에 예수님은 이미 몸 전체를 목욕한 사람은 발을 다시 씻을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의 행동은 이제 조금 후 제자들이 경험하게 될 “거룩한 목욕”에 대한 상징으로서, 이 일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제자들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서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이 이 목욕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참고. 17:20). 즉 이들의 죄는 씻겨 지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제자 중의 한 사람은 여기서 제외될 것이라는 암시는 ‘가롯 유다’에 대한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9-11절)
예수님의 행동은 상징일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모범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강론이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분은 자신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설명을 해주십니다.
12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12-16절)
그들이 “선생님”이나 또는 “주님”으로 부르는 분이 노예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자신들의 발을 씻겨주고 있다면, 그들 피차간에 발을 씻겨줄 수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구절은 일종의 괄호의 기능을 하고 있는데, 주님은 여기서 “선생과 제자”를 “주인과 종”, 그리고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로 바꾸어 비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17절의 축복은 15절에서 곧바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절)
여기서 말하는 축복은 종말론적 축복을 말하는 것으로서, 두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아는 것”과 “행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당연히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일 것이며, 후자는 그 지식에 따라 순종하여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에 대한 강조는 비단 <요한복음>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과 <야고보서>는 행함에 대한 강조와 불순종에 대한 저주를 동시에 나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마 7:21-23, 24-27; 마 23:1-3, 13-36; 약 1:22-25).
나눔. 여기까지 말씀하신 예수님은 지금 강의를 듣고 있는 청중이 일반 대중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 즉 “자기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듯합니다. ‘요한’ 화자의 의도로 보아야 하겠지요.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18절)
이 구절의 첫 부분은 10절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입니다. ‘요한’ 화자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 그가 누구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과연 그가 누구이며 어떤 인물인지 <시편>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참고. 시 41:9). 즉 그는 주님과 함께 떡을 나누는 자로서, 그분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적에서 그를 팔아넘길 자입니다. 근동 사회에서 떡이나 소금이 상징하는 바는 사람들을 언약 안에 구속시키는 것으로서, 배신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발꿈치를 드는” 행위는 “모독”이나 “배반”, 또는 “적대감” 등을 드러내는 행위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징을 ‘가롯’ 유다‘에게 그대로 적용해 볼 때, 그가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의 선생님을 얼마나 경멸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크게 놀라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일이 그런 방향으로 전개되리라고 선언하고 계시며, 더 놀랍게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운명을 되돌려놓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19절)
이처럼 일견 초연(超然)해 보이는 예수님의 태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그분께서 스스로 선언하신 바처럼,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3절)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유다’도, 마귀의 권세도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좌절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위는 일차적으로 공동체 내에서 “섬김과 봉사”에 대한 모범이나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에 관해서는 12-20절 사이에서도 반복해서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본질에 관한 두 번째 교훈이 있는바, 이에 관해서는 두 번에 걸친 ‘가롯 유다’에 관한 언급이나 ‘베드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 등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나눔”에 관한 교훈입니다. 여기서 “나눔”이라 함은 본문 중에 예수님께서 언급하고 있는 “상관” 즉 “유업”을 말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요청했던 “깨끗하게 함”을 의미하는데, “구원의 새롭게 함”의 다른 의미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과의 교제를 말합니다. 사도들과 예수님 사이에 이루어진 일차적인 교제는 새로운 교제 즉 사도들 사이의 이차적인 교제로 확대되어가야 할 것입니다. 결국 교회란 하나님 나라의 참여와 나눔, 그리고 그 안에서 섬김과 봉사의 사역을 실현하는 공동체임이 선언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2. 유다를 드러냄(21-30절)
저녁 식사 후 예수님은 보다 구체적으로 그 역사적 “배신”에 대해서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전에 다소 불분명하게 암시적으로 말했던 것을(참고. 18-19절), 이번에는 보다 명시적으로,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21절)
무슨 의도일까? 비록 ‘유다’가 갑자기 예수님을 배신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 자신도 그것을 몰랐을 리도 없었을 텐데도, 그분께서는 깊은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마음이 무척이나 괴로웠다”고 화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타랏소’(tarasso)로서, ‘베데스다’의 연못의 물이 요동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사용했던 단어입니다(5:7).
마귀와 ‘유다’가 계획하고 생각하고 있는 그 일을 모두 알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온하고 초연하게 그를 대면하고 있지는 않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도 분명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워하며 서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을 텐데, 이 침묵을 ‘베드로’가 깨고 나섭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22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22-23절)
이 장면에서 ‘요한’ 화자는 처음으로 “사랑하는 제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제자는 화자 자신 즉 사도 ‘요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혹자는 그를 ‘요한’의 형 ‘야고보’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 제자와 관련해서 적어도 두 가지를 관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그는 ‘베드로’가 그에게 묻는 질문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그는 ‘베드로’보다는 좀 더 호의적으로 그려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베드로’의 명예를 손상시키거나 폄하하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이 제자에 대한 첫 언급은 예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는 점이 아니라 그가 예수님의 품에 의지해 누워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다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와 같은 표현은 당시 ‘유대’인들의 식사 관습을 이해한다면 수긍할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즉 ‘유대’인들의 식사습관은 오늘날처럼 식탁 주위에 둘러앉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과 같은 특별한 시기에는 왼쪽 팔을 기대고 오른 팔을 자유스럽게 한 채, 비스듬히 앉아서 식사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호스트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앞으로 나와 있는 상태일 것이고, 이 사랑하는 제자가 만일 예수님의 오른쪽에 앉아 있다면 그가 예수님께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 얼굴을 돌린다면 이는 마치 그가 예수님의 품에 안겨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방에서조차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랑하는 제자”만이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베드로’의 요청을 받아 이 제자는 주님에게 묻습니다.
24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24-25절)
이 제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상징적이며 암시적입니다. 즉 배신자에게 접시에서 음식을 한 조각 건네줌으로써 그가 누구인지 밝히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26절)
식사 때에 주인이 진미(珍味)를 한 조각 건네는 것은 특별한 호의의 표시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배신자로서 정체를 나타냈을 때마저도 예수님은 그에게 사랑에 찬 우정과 호소라는 결정적으로 놀라운 행동을 보이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가롯 유다’의 의도를 알면서도, “끝까지 책임지려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사탄’ 역시 ‘유다’ 속에 들어가 그의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다’는 자신의 운명을 달리 할 수 있는 기회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의 사랑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아니면 ‘사탄’의 유혹에 순종할 것인가?” 예수님께서도 그의 결정을 재촉하고 계신 듯합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27절)
이 장면에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유다’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셨던 것일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는 재촉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비록 그날 자리에 함께 있었던 제자들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화자는 회고하고 있습니다만(28-29절), 그분은 지금 ‘유다’로 하여금 어두움의 권세에 복종하도록 몰아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행하라는 것이겠죠. 과연 ‘유다’는 어둠을 선택하고 맙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30절)
은혜가 저주가 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쫓겨나고 세상이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커다란 어둠의 공포에 빠질 각오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브루스 밀런’). ‘유다’는 원래 그가 속해 있어야 할 캄캄한 어둠속으로 걸어 들어갔지만, 유월절 전야의 보름달은 오히려 환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자기 사람들
결혼식 날짜를 받아놓은 한 남자가 예비 신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이메일을 보냅니다. 그런데 예비 신부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라, 그동안 알고 지내던 여러 여자 친구들에게도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보냅니다. 단순한 결혼 청첩장이 아닌 연애편지를 말입니다. 이래도 괜찮은 것입니까? 당연하게도 그의 예비 신부가 이 사실을 알고 불 같이 화를 내며 당장 파혼(破婚)을 선언합니다. 나만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모든 여자를 동시에 골고루 사랑하는 것이 진정 파혼의 사유가 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박애주의자(博愛主義者)로 칭찬받을 일이 아닐까? 즉 고지식하게 한 여자만을 편애(偏愛)하지 않고, 모든 여자를 두루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불편부당(不偏不黨)하게 사랑하는 것이 더 의로운 행위가 아닐까?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모든 학생들에게 골고루 좋은 학점을 주고 시상(施賞)을 하는 것과 상위(上位) 성적을 거둔 학생들만 골라 시상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공평하고 정의로운 일일까? 열심히 일하여 좋은 실적을 올린 직원에게 더 좋은 대우와 더 많은 보너스를 주는 일이 정의로운 일일까, 아니면 빈둥빈둥 시간만 허비하는 직원을 포함한 모든 직원에게 골고루 똑 같은 월급을 주는 일이 더 정의로운 일일까?
질문을 좀 더 확대해 봅시다. 하나님은 과연 공평무사(公平無私)하고 불편부당(不偏不黨)하신가?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그러하신가? 모든 인류를 골고루 차별 없이 사랑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택된 일부만 사랑하시기 때문일까? 조종(弔鐘)은 과연 누구를 위해서 울리는 것일까? 조문(弔文)은 과연 누구에게 올리는 것일까? 그리고 “좋은 소식” 즉 복음(福音)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다시 말하자면 <성경>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모두를 위하여. 바야흐로 대선 기간에 접어들었습니다. 대선 후보자들은 국민을 향해서 수 없이 많은 연애편지 즉 공약(公約)들을 쏟아낼 것이고, 그중 일부 사람들에게는 똑 같은 내용의 연애편지를 보낼 것입니다. 예컨대,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돕는다면 장관이나 총리 자리를 주겠다는 등의 약속을 남발합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받은 모두가 그 내용을 알아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그 후보자를 믿고 따를까?
우리는 흔히 <성경>을 하나님의 연애편지라 부릅니다. 전체 66권의 책 중에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책이 없을 정도입니다. <요한복음>에도 그 유명한 메일을 열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로마서>의 다음과 같은 메일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런데 곰곰이 들여다보니 하나님은 이 메일들을 나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감격이 되고 눈물이 흘러나옵니까? 행여 그분의 진정성에 의심이 들지는 않습니까? 과연 그분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것일까? 나만을 말이지요.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하). 이 말씀은 연애편지의 진실성에 대한 우리의 의구심에 대못을 박는 일종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인 셈입니다!
악한(惡漢)도 사랑하는 하나님이라! 이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의롭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실망을 넘어 분노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고 있는 잔인무도한 성폭행 사건을 대하면서, 우리의 분노를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법부의 관대한 판결입니다. 술김에 저지른 우발적인 범행이다, 초범이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 가해자가 깊이 뉘우치고 있다는 등의 이유로 솜방망이 판결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가족 중의 누가 같은 경우를 당한다 해도 같은 판결을 내릴지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악한 자를 처벌하기는커녕 그를 의로운 자와 똑 같이 취급하신다고 하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재판관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똑 같이 다루는가 말입니다. 이 같은 분노는 단순히 투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돌아온 탕자를 동생으로 둔 모범생 형님의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 중 과연 누가 그 형을 속 좁은 자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우리 중 누가 ‘가인’의 분노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요?
얼마 전 한 중학생이 자기 집에다 불을 질렀습니다. 이유인 즉은 자기 부모님이 다른 형제를 편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학생은 부모님의 각별한 사랑을 원했던 것이지, 다른 형제까지 모두 사랑하는 부모님의 사랑, 즉 부모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지요. 사실 모든 사람의 연인은 어느 누구의 연인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도 익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여인의 남편이라!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보편적 사랑이라는 것이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보편적 사랑에 감동하고 눈물 흘리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노벨상을 아무에게나 다 수여한다면 누가 그 상을 가치 있다 여기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말에 크게 감동을 먹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도 사랑하고, 너도 사랑하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고, 나를 성폭행한 사람도 사랑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동은커녕 냉소를 보내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오직 신부만을 위하여. 그러나 과연 하나님은 모두를 똑 같이 사랑하실까? 과연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신 것일까. 우리가 그렇게 받아들여도 괜찮은 것일까? 그리고 이런 생각은 과연 성경적일까?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즉 “모두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푼 왕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참고. 마 22:114). 이 이야기는 물론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비유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두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초청받은 사람”과 “택함을 받은 사람”이 그들입니다. 임금님은 아들의 혼인 잔치에 모두를 “초청”합니다. 이것이 임금님이 “모두를 위해 한 일”입니다. 이것이 임금님이 그들에게 보이신 호의(好意)이자 배려입니다. 그들 모두를 골고루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해둡시다. 하지만 “초청받은 사람” 모두는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청첩장을 가지고 온 우편배달부를 잡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다른 무리에게 눈을 돌렸고, 이 무리는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비록 이들의 숫자는 “초청받은 사람”의 숫자에 비하면 월등히 적습니다만, 임금님은 이들 소수의 무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결국 잔치는 “초청받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함을 받은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임금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 자리를 하나님으로 대신 채우면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모두를 위해 하신 적은 일”이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그 아들을 보내신 일이 그것입니다. 즉 세상으로 하여금 그 아들을 믿도록 초청한 것이었습니다(물론 이 일을 결코 적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세상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참고. 요 3:16).
하지만 세상은 그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은 그야말로 초청으로 끝이 나버린 것입니다. 왜 세상이 초청장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렸을까? 세상 모든 사람이 받는 초청장이라 시시해 보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소도 받고 개도 받는 초청장이라면, 내가 굳이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가는 그 넓은 길을 내가 갈 수는 없다는 특권심리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연애편지, 즉 <성경>은 세상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연애편지는 결국 사랑하는 연인(戀人) 한 사람만을 위해 쓴 것 같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이메일을 열어보지 않는 연인은 연인이라 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연인은 과연 누구일까? 신랑 그리스도의 연인은 과연 누구일까? 그의 신부는 과연 누구일까? 그렇습니다. 교회입니다! 바로 “나”라는 말입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단 한 사람의 신부, 즉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일까?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모두를 위해 적은 일”을 하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여기서 “우리 모두”는 누구입니까? “택함을 받은 사람” 즉 교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곧 성전이고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즉 나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그야말로 “소수 특권층”에 속해 있다 하겠습니다. ‘이사야’는 이 소수의 특권층을 “칠십 인의 남은 무리”로 칭한 바 있습니다. ‘야곱’에게 열 두 아들이 있었으나, 특별한 아들은 ‘요셉’뿐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야곱’은 아들 모두를 똑 같이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를 위한 복음은 없는 것이지요. <로마서>에서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복음은 “모든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개도 받고, 소도 받는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선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행여나 돼지들이 그 목에 진주를 걸게 될까봐, 복음을 항상 비유로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신부의 자격과 특권. 그러나 이번 다락방 강론은 다릅니다. 그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먼 길을 떠나기 전이나, 임종을 앞둔 시점에 유훈(遺訓)이나 유언(遺言)을 남기고 싶어 할 것입니다. 당연히 그 내용도 아주 각별하고 중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락방 강론의 내용도 그렇습니다. 혹자는 이 부분(13-17장)을 <요한복음>의 지성소로 칭하기도 합니다. 그분은 이곳에서 교회에 관해서, 새 언약에 대해서, 성령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서, 제자들 간의 연합에 대해서, 그리고 기도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누가 지금 이 강론을 숨을 죽이고 듣고 있습니까? “자기 사람들”, 즉 사도들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자기 사람들”을 향해서 그동안 숨겨두었던 마지막 유훈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자는 지금 열두 명에 불과한 이 사도들을 “자기 사람들” 즉 예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 사람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원시 초대교회 창립 회원들인 셈입니다.
내가 만일 이 “소수 특권층”에 속해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뽐내고 자랑할 것인가, 아니면 ‘엘리야’처럼 불평을 할 것인가? 오늘 하루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대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이 세상에서 VIP 대접을 받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본인의 교직 경력 30여 년 동안, “왜 나에게만 최고성적 A+를 주십니까?” 하며 항의해 오는 학생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모두들 이 “소수 특권층”에 속하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우리가 죽어라고 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내가 이 소수에 속하지 못하면, 소수 특권층을 미워합니다. 질투인 셈이지요. 대선 후보들도 이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이를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은 소수 특권층 즉 국민의 1%를 위한 대통령이 아니라, 99%를 위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외칩니다. 언필칭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외치면서도, 실은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치 ‘사탄’의 계략을 보는 듯합니다. ‘사탄’도 우리가 소수 특권층에 속해있는 것이 너무 싫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이탈하라고 유혹합니다. “너는 더 각별한 존재가 될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너는 한 신랑의 신부로 만족해서는 안 돼. 두 신랑을 가질 수 있어”라고 꼬입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지위가 별 것 아니라고 꼬입니다.
지금 이 장면에서 마귀가 ‘가롯 유다’에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2절). 그리스도와 자기를 동시에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적 결혼은 일부일처(一夫一妻)입니다. 남편이든 아내든 중혼(重婚)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 남편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나를 동시에 똑 같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떻게 화답(和答)해야 합니까?
2. 사랑하시되 끝까지
‘위키 백과’에서 관상학(觀相學)을 정의한 것을 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인상(人相)을 관찰하여서 사람의 운명을 판단하고 그 얻어진 결론을 가지고 피흉추길(避凶趨吉)의 방법을 강구하는 학문이다. 관상학은 현실에 근거를 두고 통계학적 방법에 따르는 등 과학적인 방법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전해지는 다른 점술(占術)과는 근본적으로 그 유례를 달리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한 사람의 인상을 보면 그가 살아온 지난 세월을 엿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관상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門外漢)조차도 처음 만나는 사람의 인상을 통해서 그 사람의 직업이나 성격 등에 대해서 예단(豫斷)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대부분은 첫인상의 중요성에 대해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관상학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면, 나는 좋은 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매일의 삶에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내 모습은 그동안 내가 살아온 방식이나 태도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도 내 미래를 좌지우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좀 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관상법은 없는 것일까? 추천서(推薦書)를 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를 잘 아는 학교 시절 선생이나, 직장 상관이나, 또는 동료들로부터 그 사람의 지난 행적을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추천서는 대개 천편일률적입니다. 인터넷 상에는 아예 모범 추천서 양식이 널려있어 이들을 적절히 짜깁기 하면 그야말로 완벽한 추천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졸업하는 제자들이 취업할 때 제출하기 위해서 들고 오는 추천서의 내용은 한 결 같습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피 추천인(被推薦人告)이나, 추천인이나, 추천서를 필요로 하는 해당 기관이나 할 것 없이 추천서를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의 요식행위로 보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외국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추천서는 그 사람의 장래를 결정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아무도 대충 추천하는 사람도 없고, 아무에게나 추천을 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습니다. 많은 경우, 아예 정해진 추천서 양식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그 사람의 창의성, 인격, 협동성, 전문성, 친교 관계 등에 대해서 몇 단계로 구분하여 해당되는 곳에 명시를 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본인도 내가 작성하는 추천서가 국내용인지 또는 국외용인지에 따라 대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국내용이면 대충 좋은 말만 골라 씁니다. 하지만 국외용일 경우 아주 세밀하게 엄정하게 하려고 애씁니다.
결론적으로 관상학이든, 추천서든 중요한 핵심은 “과거가 현재를 만들었고, 현재가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는 통계에 바탕을 둔 교훈일 것입니다. 물리학에서는 이를 “관성의 법칙”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즉 정지해 있는 물체는 그대로 두면 항상 정지해 있는 상태로 있으려 하고, 운동하는 물체라면 계속 운동하려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사람도 이 법칙에서 예외가 되지는 않는 듯합니다. 내 생각이나 행동 양식이 세월이 간다고 바뀌거나 나아지는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도 문제인데, 더 큰 문제는 갈수록 상황이 더 나빠진다는 데 있습니다. 자연에는 “관성의 법칙”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름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흔히 “엔트로피 법칙”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자연은 우주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을 소멸시키고, 분해하고, 사라지게 하려는 거대한 힘이나 경향성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사물은 없습니다. 모든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람도 짐승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현상을 일러 무상(無常), 즉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필 추천서.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진정 “무상”은 절대불변의 진리일까?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기대와 예측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추천서를 써줄 수 있을 것인가? 누가 그분의 과거 행적을 통해서 현재와 미래를 예측하고 예단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스스로를 위해서 추천서를 쓸 수는 없습니다. 자필 추천서를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위법이고 반칙입니다. 그러함에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자필 추천서를 쓰고 있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이 추천서 안에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문구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분으로부터 네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던 말이 그것입니다: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참고. 출 3:6, 15, 16; 4:5).
하나님은 지금 ‘모세’를 위해서 자필 추천서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즉 ‘모세’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싶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행하였는지 과거 행적을 통해서 살펴보라는 초청입니다. 오늘의 나에 관해서 알고 싶다면 나의 과거 행적을 통해서 판단하라는 초청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해서 예측을 해보라는 초청입니다. 그것도 어느 한 사람에게만 아니라, 세 사람 모두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세 사람의 증인을 법정에 대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세 사람의 대답이 한 결 같다면, 그 추천서는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 증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은 변화무쌍(變化無雙)하지 않고, 일관되고 한 결 같다고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도 마땅히 ‘야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알려준 그분의 이름, ‘야훼’ 즉 “스스로 있는 자”(우리말 번역)란 결국 “현재의 하나님”, 다시 말하자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베여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머뭇거리고 있는 ‘모세’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자필 추천서였습니다.
요한 화자의 추천서. 우리의 ‘요한’ 화자는 어떻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를 어떤 방식으로 추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필 추천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 역시 과거의 한 시점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즉 그는 다락방 강론을 소개하면서,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으니”(예: Having loved his own who were in the world, he now showed them the full extent of his love-NIV).
선뜻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가 와 닿지는 않습니다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사랑하다”(아가페)는 두 동사의 시제(時制)입니다. 두 동사 모두 과거형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만, 이 번역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먼저 나오는 동사의 시제는 뒤에 나오는 동사에 비해 시간 상 더 이전의 것으로 받아들임이 마땅할 것입니다. 즉 앞의 것의 시제를 과거완료형으로, 뒤에 나오는 것을 과거형으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이전부터 계속 사랑해 오셨으므로,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
이해가 되셨습니까? 화자는 지금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무슨 이유나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전부터 쭉 사랑해왔기 때문에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 그분의 사랑에도 관성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멈출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왜 이유가 없을까? 그분의 이름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하). 사랑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그저 그분의 이름에 충실한 결과였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이름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을 뿐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하겠다”는데 무슨 이유나 조건이 있겠습니까! 그분의 이름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을 과연 얼마나, 언제까지 그렇게 사랑하셨을까? “끝까지”라고 말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아마도 시간적인 의미에서 “세상 끝 날까지”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질적(質的)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즉 “더할 수 없는”, “완전하고 완벽한”, 또는 “변함없는”,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요한’은 훗날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사랑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책임지셨던 하나님의 사랑” 밖에는 없음을 압니다.
나의 자필 추천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 즉 사도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사랑하셨다면,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실까? 확신이 없다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가롯 유다’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에 대해서도 끝까지 책임지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의 발도 씻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싫어 떠나려고 합니다. 그가 속해 있던 공동체를 말입니다. 동료 성도와 자기 목자를 말입니다.
‘유다’의 마음속에 마귀가 들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2절). ‘유다’의 마음속에 마귀가 들어갔다 해서 ‘유다’의 책임을 과소평가 하려는 시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가 악한 자의 손에 볼모로 사로잡혀 어쩔 수없이 배신의 자리로 내몰리게 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현실에서 이럴 경우 법정에서 정상 참작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화자의 표현은 강경하고 단호합니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결심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유다’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귀에게 기회를 주었고, 스스로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브루스 밀른’의 말대로, ‘유다’는 빛에 대해서 마음을 닫고 나서 자신이 어두움의 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이처럼 ‘유다’의 배신에 관한 이야기가 강론의 벽두를 장식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그리스도에게 묻고 싶은 질문에 대한 답을 주려는 의도가 아닐까요? 질문을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자기 사람들” 즉 사도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사랑하셨다면,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실까? ‘가롯 유다’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는 것 같습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네 마음에 달렸다네.”
그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자면, 예수님을 따른다고 고백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다 “자기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발을 씻겨준 사람들 중에서도 여전히 “마음의 씻음”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점 성찬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침례와 성만찬이 헌신한 사람에게는 강력한 은혜의 수단이 되지만, 그것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브루스 밀른’, 261쪽.
즉 전신 목욕을 한 사람은 다시 목욕을 할 필요가 없이 그저 발을 씻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목욕을 하지 않고 단지 발을 씻는 것만으로 목욕을 대신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베드로’가 말하듯이 ‘사단’은 빛에 대해서 마음을 닫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찾고 있습니다(벧전 5:8). 그러므로 계속해서 주님과 가까이 있으면서, 날마다 그분의 말씀의 빛이 우리를 드러내고 바로잡도록 할 때에만 안전할 것입니다. 양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만 안전하듯이 말입니다. ‘아브라함’ 교회를 떠난 성도 ‘롯’의 종말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목자 ‘아브라함’이 목원 ‘롯’을 끝까지 책임지려 했으나, 그는 ‘유다’처럼 이를 거부하고 떠났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말이지요.
그럼에도 목자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끝까지 기도하며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키려 했습니다. 목원 ‘롯’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자 ‘아브라함’은 목원 ‘롯’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기도에 응답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내 목원에 대해서? 내 가족에 대해서? 내 남편에 대해서? 내 아내에 대해서? 내 자식들에 대해서?
3. 제자들의 발을
나는 세족(洗足)과 관련된 두 구절(4-5절)을 약간의 강조를 달리한 채, 두 번 반복해서 읽을 것을 제안합니다. 세족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그리고 종합적으로 감상하기 위해서 입니다. 각 경우 강조를 위해서 밑줄로 나타냈습니다. 감정을 실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니
이번 묵상은 첫 번째 강조에 관한 것입니다. 근동 지방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예의에 따르면, 손님들이 먼지투성이의 길을 걸어오느라 발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종들이 손님의 발을 씻어 주어야 했습니다. 이 일은 너무 비천한 것이어서 ‘유대’인 노예들에게는 요구조차 하지 않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는 없으나, 제자들 중 아무도 발을 씻지 못한 채 식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각자 마음속으로 발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그 일을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발도 씻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어야겠다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동료의 발을 씻기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이 일어나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가 상징하고 있는 바는 무엇일까요?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그의 노예 아내 ‘하갈’을 내쫓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창 21:14). 이 이야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미드라쉬>를 보면, ‘아브라함’이 ‘하갈’을 내쫓으면서 이혼 증서와 함께 그녀의 허리에 수건을 둘러매어 줍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가 노예 신분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 즉 그 허리에 수건을 동여매는 행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의미를 이미 간파한 것입니다. 당연히 ‘베드로’도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의 당황해 하는 모습에서 이를 충분히 확인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는 너무 민망하고 황망합니다. 그의 태도는 뭐 이런 것입니다: “아니, 주님, 당신이 이럴 수가, 오!’ 그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같은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는 정말 겸손하고 예의바릅니다. “내가 어떻게 감히 선생님의 섬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주님과 같거나 더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결코 제자처럼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선생님의 발을 씻겨드리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러나 무엇이 문제입니까?
대선 철만 되면 각 후보들은 현직 대통령 깎아 내리기 경쟁에 몰두합니다. 현직 대통령을 향해서 제왕적이다, 독재적이다, 독선적이다 하면서, 만일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의 절대적 권한을 제한하거나, 축소하겠다는 공약도 함께 내놓습니다. 즉 겸손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공약입니다. 실제로 지난 한 정권 초기에 “당신이 곧 대통령입니다”라는 구호까지 등장한 바 있기도 합니다. 아주 매력적인 구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주 민주적이고 대중적으로 들리는 이 구호에 자기 모순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즉 은연중에 대통령이 일반 국민보다 한 등급 위라는 태도가 그것입니다. 진정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기를 소원했다면, 차라리 “대통령도 한 사람의 시민입니다”라고 했어야 옳습니다. 우리는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을 원하지도 않지만, 헌법이 규정해놓은 대통령의 권위와 책임을 독재와 권위주의로 매도하려는 가식적이고, 대중영합적인 대통령도 원치 않습니다.
대통령은 대통령다우면 그만인 것입니다. 대통령이 겸손해야 할 법적 의무는 없습니다. 오히려 추상같은 자기 절제와, 원칙과 규율로 정부를 이끌고, 법의 한도 내에서만 국민을 섬기면 될 것입니다. 대통령은 사도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니고, 목회자도 아닙니다. 그리고 만백성의 대통령, 백퍼센트 대통령은 있을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연인은 어느 누구의 연인도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베드로’가 만일 대통령이 되었다면 어떤 유형의 지도자가 되었을까? 선생님을 대하는 모습을 보니 아주 예의바르고, 겸손한 대통령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을 것입니다.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합니다만, 한 가지 전제 하에서만 그럴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즉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의 선생님이거나, 또는 주님이라는 단서 하에서만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베드로’ 대통령은 절대 일반 백성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생각대로 선생이 제자의 자리에 내려올 수 없다면, 대통령 또한 한 사람의 시민이 될 수 없습니다. 일반 백성은 고사하고 부하 장관의 발도 절대 씻겨 줄 수 없을 것입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자기 아내나 자식들의 발은 씻겨주었을지.
만일 그가 목사가 되었다면 어떤 목사가 되었을까요? 지금 현재의 인식을 그대로 지닌 채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서 전도사로부터 시작해서 강도사, 그리고 부목사를 거쳐, 목사가 되었다고 가정해 본다면 말입니다. 행여나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신분 상승의 수단 정도로 여기지는 않았을까요? 그리하여 담임목사가 되는 순간부터 교회의 제 일인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제부터 소위 평신도와는 다른 사제(司祭), 성직자, 또는 제사장이 되었다고 스스로를 구별하려들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성직자”의 원래 의미가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분깃” 내지는 “유업”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유업입니까? 모든 평신도들입니다!
나는 여기서 굳이 우리가 얼마 전 읽었던 ‘폴 스티븐슨’ 목사님의 저서, <평신도 신학>으로부터 장황하게 인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 읽어보았을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책의 원제(原題)가 “평신도 없애기”(the abolition of laity)란 점만 상기시켜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여기서 저자가 의미하고 있는 “평신도”란 그야말로 전통적으로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의미로서의 “평신도”를 말합니다. 즉 전문 사역자와 대조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폴 스티븐슨’. <평신도 신학>. 홍병룡 옮김: IVP (2001). 이 책은 <우리교회>의 추천 도서로 선정된 바 있으며, 이 분야에 관한 탁월한 책이니 반드시 일독을 권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와 같은 “평신도”가 실제 교회 내에서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평신도”(헬라어로 ‘라오스’)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총칭(總稱)일 뿐으로서,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는 “하나의 백성” 즉 “평신도”만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 목사가 이 사실을 모른 채, 소위 말하는 “기독교 사역”을 수행하고 있었다면, “평신도” 즉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양(洋만)이 아니라 자기의 양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들의 발을 씻겨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양들이 그의 발을 씻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문 사역을 받는 대가로 말입니다.
그가 만일 오늘 다락방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더 근원적으로는 성령의 체험이 없었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소위 틀에 박힌 목회자로 살아갔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즉 “기독교 사역”에 대한 그의 신학은 지극히 제한되고 편협했을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그는 “기독교 사역”을 “교회 사역”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갔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정리를 위해 다시 질문해 봅시다: “과연 기독교 사역이란 무엇일까요?” ‘스티븐슨’ 목사님은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으니, 다시 한 번 그분의 저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그 유명한 선언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전 우주에서 ‘이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영역은 없다.”
다행히 ‘베드로’는 신학적 거듭남을 체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평신도에 대한 그의 입장 때문입니다. 그는 평신도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즉 평신도란 제사장이며, 성직자이며, 왕 같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때, 제사장이나, 소위 성직자나, 기타 교회 지도자들의 지위나 권위를 위축시키거나 끌어내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그동안 전혀 엉뚱하게 인식해 왔던 평신도의 지위와 특권을 원래의 위치로 끌어올리고, 확장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존감, 특권의식, 사명감, 책임감, 기독교 사역에 대한 정확하고도 투철한 자의식을 갖추자는 것입니다.
예컨대, <성경>은 우리가 서로의 짐을 나누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갈 6:2).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서로를 향해서 제사장이 되고,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책임지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모든 인류를 한 결 같이 다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겸손이란 알아도 모른 체, 있어도 없는 체, 할 수 있어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저 머리 숙이고, 슬슬 기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겸손은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즉 서로에게 제사장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어떻게 돌아가든 나의 관심사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공동체를 위하여 나눌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세상이나 이웃에 대해서는 더욱 인색하고, 옹졸하며, 폐쇄적인, 한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나 세상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신학과 교훈을 지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일깨워주고자 하십니다. ‘베드로’가 당황하여, 겸손하고, 예의바르게, 선생님의 발을 씻겨주려 했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이다”(8절). 여기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은 “아무런 유업 또는 분깃(mevro", 메로스)이 없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보여야 할 참된 겸손은 그가 선생님이신 그리스도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말입니다. 아내나 남편의 발을, 자식들의 발을, 교회 식구들의 발을, 그리고 이웃의 발을... 이처럼 정말 하찮은 일상의 일들이 내 주위에 널려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거룩한 일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일상의 신비인 것이지요.
4. 발을 씻기시니
본인의 아들 달우는 이런 저런 일로 우리 부부에게 부탁을 해 올 때가 많습니다. 자기 하는 일에 대해서 광고 문구를 영어로 작성해 달라든지, 영문 이력서를 만들어달라든지, 음반을 내는데 후원자를 모집해 달라든지, 등등의 부탁입니다. 이럴 때 나는 묻습니다. 그런 일을 해주고 내가 얻는 대가가 무엇인가고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의 효도가 그 대가입니다.”
그는 효도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내가 그의 짐을 덜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물론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결과적으로 내가 그를 섬기고 있는 것이지요. 즉 발을 씻겨주고 있는 쪽은 아들이 아니라 아비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서로의 짐을 나누는 것이라 했으니, 나는 적어도 내 아들에 대해서만큼은 지극히 겸손한 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솔직히 우리 부부는 두 아들의 발을 씻겨주는 일에 있어 부끄럽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우리 부부의 섬김이나 봉사를 받고도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그가 우리들 발을 씻겨주겠다고 나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매 번 발을 내놓습니다. ‘베드로’와는 전혀 딴 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두 질문은 아주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세족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세족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제자들의 발”을 강조할 때 자연스럽게 함께 따라오는 수식어들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자들의 발을”이라든지, “다른 곳도 아닌 발을”, 등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세족은 곧 겸손이나 섬김을 연상시켜줄 것입니다. 교훈인 즉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그렇게 겸손하게 섬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섬김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이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특히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베드로’가 당황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을 만류하며, 자기가 선생님의 발을 씻겨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대응이 의미심장합니다. 그를 겸손하다고 칭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이다”(8절). 그분은 바야흐로 세족의 태도가 아니라, 세족 자체의 의미를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강조는 “제자들의 발”에서 “발을 씻기시니”로 옮아가야 하겠습니다. 기독교 사역의 자세나 태도가 아니라, 그 사역의 내용과 의의(意義)를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이지요. 전자가 교회의 사역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교회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 의미는 그분의 말씀 속에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상관”이라는 단어가 그것입니다. 앞에서 한 차례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여기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은 “아무런 유업 또는 분깃(mevro", 메로스)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세족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있어 “자기 사람들”임을 확인해주는 의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자기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의 발을 씻겨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온 몸이 아니고 발인가?” 이것이 ‘베드로’가 의아해 했던 부분입니다: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9절). 전형적인 오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오해를 부드럽게 고쳐주십니다: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10절). 왜 그렇습니까? 왜 발만 씻으면 충분하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의 도전입니다.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향한 것입니다. 우선 개인적 차원에서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과연 나를 씻기셨는가?” ‘베드로’가 처음 발 씻기를 완강히 거절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리스도의 깨끗하게 함이 없이도 그럭저럭 잘 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임금님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임금님이 나누어주는 예복이 아니라, 자신이 마련한 옷을 입고 연회장에 들어가려다 쫓겨난 사람처럼 내 옷을 입고도 연회장 안을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그 쫓겨난 사람이 입고 있었던 옷은 실은 교만, 즉 자기 의(義)라는 옷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옷을 입고 살아가는 한 나는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옷을 아무리 깨끗하게 달여 입는다 해도, 아무리 많은 선행과, 종교적 훈련과, 겸손과 봉사의 훈장(勳章)으로, 그 옷을 장식한다 할지라도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옷이 아니라 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로 온 몸을 목욕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그리스도인이 될 때, 모든 죄가 심판받고 십자가에서 제거됨으로써 나는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씻김을 받습니다. 하지만 내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때, 죄는 날마다 고개를 내밉니다. 그 죄 역시 날마다 주님에게 내 발을 내놓고 씻겨 주십사 함으로써, 그분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이를 이렇게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따라서 그분께서 내 발을 씻겨주시겠다고 할 때, 기꺼이 발을 내놓는 것은 교만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입니다. 그것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괜찮으니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 하니라”(요일 1:8, 10).
그렇다면 공동체적인 도전은 무엇일까요?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눅 13:26-27).
이 말은 충격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숙식을 함께 하며, 직접 가르치기까지 했는데도,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여기에 이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사람, 즉 “자기 사람들”이 아닌 한 사람이 태연하게 자리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만, 당시 사도들 중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는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한 사람이 있다고 말했을 때조차도, 서로 돌아보며 그가 누구인지 주님에게 물어볼 정도였습니다. 놀랍게도 해당 본인조차도 모르는 듯합니다. 그가 이렇게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마 25:26). 정말 모르고 묻는 것인지, 알고도 뻔뻔하게 아닌 체 하는 것인지, 궁금할 뿐입니다. 알고도 고의로 모른 체 한 것이라면 그는 적어도 자신에게는 정직하고 충실했던 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정말 자신이 당사자인 줄 몰랐다면 이건 정말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발을 씻겨주신다고 했을 때, 그도 발을 내밀었겠지요.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주님이 발을 씻겨주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겠지요. 그 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 엄숙하고도 침울한 자리에서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지금 이 사람을 밀고(密告)하고 그 대가로 받을 보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베드로’와 이야기를 나누시다 말고, 예수님은 느닷없이 ‘유다’의 배신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립니다. 그는 곧 이어 두 번째 단락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것인데도, 왜 이곳에서 미리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가르침을 받고, 심지어 발 씻음을 받는 등,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요!
그의 위장술(僞裝術)이 하도 교묘해서 공동체의 다른 식구들은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료 사도들과 함께 침례를 받았고, 공동체의 회원이 되었으며, 공동체 예배에 참여했고, 기도와 찬양을 했으며, 지금은 성찬식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를 사이비라 의심할 수 있었겠습니까?
초대교회에도 이와 유사한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이들도 여느 교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전답을 팔아 교회에 상당한 액수의 구제헌금까지 내놓았습니다. 이들 역시 아무도 그들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사이비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들 또한 예수님이 보실 때, “자기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회중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진정 그리스도에 의해 온 몸을 씻김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매일 그분 앞에 당신의 발을 내어놓고 있습니까?” 똑 같은 질문을 나는 오늘 나에게도 던져야 할 것입니다. 나는 진정 “자기 사람들” 속에 속해 있는가? 즉 나는 진정 그리스도께서 내 온 몸을 씻겨주는 체험을 했는가?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내 발을 씻겨주고 있는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중요한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진정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고 있는가? 즉 관계 맺기를 통해서 내가 받은 것을 나누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로 내버려두고 우리끼리 만의 세계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는가?”
5. 행복하기를 바라며
예수님의 다락방 강론(요 13-17)과 산상 수훈(마 5-7)은 일맥상통하는 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기야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같을 수밖에 없겠지만 말입니다. 두 강론 모두 핵심은 “행복”입니다: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네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나니.”
아, 그분은 “자기 사람들”이 행복해 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군요! 다른 사람들이 아닌 자기 사람들이 말입니다. 이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 같은데도, 그냥 간과하고 지내온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도 다른 사람이 아닌 나와 내 가족의 행복 때문임을 모르지 않으면서, 주님도 같은 심정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지내온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헌법의 기본 정신은 개개인의 행복 추구권을 인정하고 보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 권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그것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거나 파괴하는 자는 법에 따라 상응하는 벌을 주기도 합니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정상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능적 욕구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국가까지 나서서 행복 추구를 지고(至高)의 권리로 인정해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우리는 막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권리로 주장한다고 해서 누가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 해서 국가나 정부가 그것을 마치 연금 주듯 나누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 내가 일하는 회사나, 학교나, 정부가 마치 월급 주듯 꼬박꼬박 내 통장에 행복을 넣어준 적이라도 있었습니까? 우스꽝스러운 질문이지요.
간혹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 많은 사람들이 그 약속을 그대로 믿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공약(公約)이 그야말로 공약(空約)이 되어버릴 때쯤이면, 크게 실망하면서 다음 선거 때가 되면 이번에는 이전의 후보와는 전혀 다른 색깔의 후보에게 같은 기대를 걸어봅니다. 마치 브랜드만 믿고 물건을 샀다가 써보니 영 마음에 들지를 않아, 다음에는 다른 브랜드의 상품을 사는 것과 같은 행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슨 재주로, 무슨 권리로 자기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런 분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는 건데. 그분의 약속을 다시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절). 이 약속 믿어도 괜찮을까요? 나중에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라고 말하지는 않을까요? 아니면 하다가 영 사정이 여의치 않아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지는 않을까요?
이것을 알고.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들 질문에 대해서 아무도 자신 있게 대답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보증을 설 수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실없는 소리로 무시하거나, 아니면 속는 셈 치고 한 번 믿어 보거나입니다.
그러나 잠깐 믿기 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나중에 일이 잘못되었을 때 보상해 달라는 요구를 할지 모르니 말입니다. 즉 구매자의 실수로 상품이 파손된 경우는 보상을 해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매뉴얼대로 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물건을 조작하다 파손되거나 고장이 날 경우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인지 먼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고 사전 주의를 발합니다. 매뉴얼로 치면 상품을 사용하기 전에 반드시 읽어 숙지해두어야 할 주의사항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16절). “진실로, 진실로”라고 하시니, “이건 정말 치명적으로 중요한 매뉴얼이야”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중요할까? 난데없이 주인과 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주인이고 너희들은 종이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건 사실 뻔한 내용 아닙니까! 즉 “산(山)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것이에요. 조금 덧붙이자면, 자신의 위치나 신분을 망각하지 말라는 요청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아니, 누가 이것을 모른단 말입니까? 제자들 중 누가 예수를 종으로 부리고 있기라도 했습니까?
한 번은 예수님께서 주인과 종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7-10)
무슨 주인이 이렇게 매정하고 야속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루 종일 들에 나가 일을 하고 돌아온 종에게 무슨 칭찬이나 감사는커녕, 돌아오기가 무섭게 주인의 저녁 식사 상을 차리고, 주인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수종을 들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종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대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종이 원래 그런 존재라고 말합니다. 아주 비천하고 무익해서 달리 무슨 가치 있는 일을 맡을 능력이나 재능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주인 밑에서 견딜 수 있는 종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지금 비유 속의 이 종도 얼마나 오래 동안 그 주인을 섬기며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대하는 주인의 태도가 그와 같은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 주인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을 대하는 기본 전제가 바로 그러하다. 나와 너희들 간의 관계가 그러하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나는 하나님이고 너희들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지.”
주인과 종의 관계가 이러하다면, 종이 주인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주인의 선처만 바랄 뿐이지요. 시키는 쪽은 주인이지 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는 늘 내 대학원생들에게 시키는 편이지, 내 학생들이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법이 없습니다. 주객이 전도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분과 나의 관계도 그렇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13절). 지금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서 머리가 그렇게 똑똑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그분의 말씀인 즉은,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쪽은 내가 아니라 그분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잘했다 못했다 평가도 그분이 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내가 무슨 상을 바랄 처지도 아닙니다. 그저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이니 말입니다.
아,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착각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주인 행세를 해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 명령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내가 원하는 시기에 해놓지 않으면, 마구 야단치고, 욕하고, 토라져서 한동안 그 주인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떠날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종이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요? 권위가 무너진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횡포를 부리는 일, 학생이 선생님을 구타하는 일, 군대에서 부하가 상관을 폭행하는 일, 취객이 경찰서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일 등은 그 사회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라 할 것입니다. 종이 주인 행세하는 교회도 결코 정상적인 교회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행하면. 만일 예수님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주인이 저녁 식사를 준비해 놓고 그 종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함께 식사를 나누자고 제안했다면 어땠을까요? 지금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처럼 불필요한 일을 하시는 것일까? 다시 한 번 그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3-14절).
주인이 종의 발을 씻겨준 것은, 주인이 종을 위하여 저녁상을 차려놓은 것은, 모범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롤 모델의 역할을 한 것이지요. 주인이 종이 되었다든지, 아니면 반대로 종을 주인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종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종이 되라는 초청이자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초청은 행복한 삶으로의 초청이고 약속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절하).
흔히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합니다만, 실은 우리는 “행하는 것만큼만 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맥락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7:17).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전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되어보기 전에는 부모의 심정을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이는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그의 교회를 향해서 질타한 바 있습니다(참고. 고전 4:15). 자신의 수고와 눈물로 키운 제자들을 향한 그의 심정이 절절이 베어 나오는 구절인데, 직접 자신의 수고로 전도하여 양육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의 심정을 알 수가 없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고통이자 수고이지만 동시에 축복이지요. 그러므로 “알고 행하는 것이 축복”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순종의 축복 말입니다. 그 순종의 결과가 쓰디 쓴 실패로 끝났을 경우에도 여전히 축복으로 남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설교가 아니라 본인의 체험입니다.
나에게도 철저하게 잊어버리고 싶은 내 인생의 한 시점이 있습니다. <창조교회>를 개척하여 7여 년 동안 사역하던 시기가 바로 그 시기입니다. 처음의 기대와 흥분과는 달리 날로 조금씩 성장해 가던 교회가 몇 년이 지나자 성장은 멈추고, 분위기는 침체해지기 시작하고, 젊은 교인들은 졸업 후에 직장을 찾아 다른 곳으로 이사하거나 유학을 가고, 나는 울분과 좌절로 툭하면 신경질을 부리며 아내와 다투기도 하고, 설상가상 어떤 제자는 우리 부부를 향해서 비난과 실망을 쏟아내며 교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 교회는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계속 유지되었다면 더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를 떠났던 어린 제자들이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여 부모가 되어 자녀들을 키우면서, 실로 인생의 절반을 넘게 돈 후에, 나에게 연락을 해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그들의 신앙생활 중에 가장 강렬하게 그리고 가장 오래 동안 추억의 앨범 속에 내가 남아있다고 말입니다. 특히 교회에서 선배로서, 지도자로서, 어린 영혼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면서 비로소 이전에 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더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고백합니다. 그 젊은 시절, 인생의 진로나 직업 선택이나, 이성 문제로, 방황하고 흔들릴 때, 곁에서 질책하고 훈계해 준 것에 대해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사실 그들의 칭찬과 감사는 그들이 나에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선생님이자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해주고 계신 것이라 믿습니다. 아, 그러니까 정말 무익하고 쓸모없는 이 종이 나의 선생님이 이천 년 전에 하신 대로 한 번 따라 해봤더니, 당연하게 해야 할 그 일을 해봤더니, 이처럼 분에 넘치는 찬사를 받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방금 비유에 나오는 주인처럼 그의 종에게 당연한 일을 했다며, 계속 하던 일을 하라고 압박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치고 넘어져 있는 ‘베드로’에게 ‘갈릴리’ 해변 가에서 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함께 구워먹자고 식사에 초청하시던 것처럼, 나에게도 그렇게 쉼과 안식과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것으로 충성하였으니 내가 큰 것으로 너에게 보답하리라.”
나는 정말 가진 재능이나 은사가 별로 없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나에게 주인 직업이 하나 있습니다. 가르치는 직업입니다. 나는 이것을 갈고, 닦고, 기르고, 연습하고, 훈련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가지고 주님의 흉내를 내어봤더니, 주님은 나의 행위가 동전 세 닢을 헌금함에 넣은 늙은 과부에 버금간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나를 사랑하는 선생님,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에게 자기를 따라 해 보라고 초청하십니다. 초청을 받아들여 택함을 입은 그분의 사도, 즉 “자기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초청 받은 자”로 인생을 마무리 하시겠습니까? 매일 먹고 사는 문제에 코가 꿰여 하늘이 아니라 땅을 내려다보면서 말입니다!
6. 유다도 함께
본인의 아내는 요즘 큰 아들 달우가 어렸을 적에 왜 그렇게 심하게 구박을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종종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작은 아들 학우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관대했음에도 말입니다. 아마도 작은 녀석이 큰 녀석에 비해서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라며, 그래서 애처롭고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최근까지 아내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우리 부부의 이와 같은 심정은 <누가복음> 15장에서 들려주는 세 비유의 주인공들의 심정과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양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심정, 충실하고 성실한 큰 아들이 집에 있음에도 집나간 작은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은전 아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잃어버린 하나를 찾으러 온 집을 뒤지는 한 여인의 심정 말입니다.
왜 이들 비유의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못하고, 없는 것을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 질문은 부질없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식을 키워본 부모라면, 잘난 자식보다는 못난 자식, 똑똑하고 잘나가는 자식보다는 부족하고 모자라는 자식, 착하고 말 잘 듣는 자식보다는 말썽 피우는 자식에 대해서 더 애착을 가지고 안쓰럽게 여겼던 경험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똑똑하고, 말 잘 듣고, 잘나가는 자식은 사실 그냥 두어도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게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자식은 그냥 두었다간 필경 실패자로 끝날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겠지요.
유다에게 빛을. ‘가롯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심정도 이와 같았을까요? 다만 여느 부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미래와 그 종말에 대해서 이미 훤하게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태생적으로 예수 공동체 밖의 사람이었으며, 운명적으로 “자기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예수님 스스로 밝힌 바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절하).
<성경>도 여러 곳에서 그의 운명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고된 것이었으며, 그의 비극적인 종말은 단순히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일 뿐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참고. 행 1:16). 예수님 자신도 같은 말씀을 바로 이 자리에서 하고 계십니다: “내 떡을 먹은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18절). 이런 그가 무슨 다른 선택을 할 기회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던 것뿐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 심히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입니다(21절). 화자의 표현에 따르면, 지금 예수님의 심중은 마치 연못의 물이 요동치듯 격동하고 있습니다. 화자가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타랏소’(taravssw): 참고. 5:7.
화자는 이전에도 한 번 이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성전을 모독할 때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깊은 분노와 동요를 일으켰다고 전한 바 있습니다(2:13-17). ‘유다’에게 닥쳐올 그 엄청난 결과를 미리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지금 안타까움과 고통으로 전율(戰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모순된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미리 결과를 정해놓고 그것을 되돌리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해나 논리의 문제가 아닌 듯싶습니다. 오히려 경험과 감성의 영역에 속하는 듯합니다. 예컨대,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미래에 닥칠 좋지 않은 일을 미리 알고 있다 해서 염려나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수술을 앞둔 환자가 불안해하는 것은 의사를 믿지 못해서이거나, 수술이 잘못될 것이라는 의심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이나 또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냥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너희 중에 나를 배반할 자가 있다”는 선생님의 진단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단순한 예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실 분이 아님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비록 ‘유다’의 운명은 예정되어 있었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바꾸어놓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은 아닐까? 그러므로 ‘유다’에 관한 그분의 그 유명한 역사적인 예언은 사랑하는 친구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의 행동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분은 지금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안 되는 줄 알면서 말입니다. 처음부터 “자기 사람”이 아닌 사람을 제자로 삼아, 그를 “자기 사람”으로 되돌려놓으려 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행여나 돌이켜 회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음일까? 교회의 식구로 함께 살다보면 변화될 날이 올 것으로 기대했음일까? 설교하고, 가르치고, 기적을 보여주고, 희생하고, 그리고 모범을 보여주면 언젠가는 변화될 것으로 기대했음일까? 그러나 결국은 허사로 끝이 날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설교도, 비유도, 헌신도, 기적도, 겸손도, 권면도, ‘유다’를 바꾸어놓는 일에는 실패할 것이었습니다. ‘유다’, 그는 실로 예수님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제자였습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할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나 역시 오래 동안 학교와 교회에서 제자들을 상대로 가르치고 훈련시켜왔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역은 그 자체로서 힘들고 고달픕니다. 배우는 학생이나 제자의 믿음과 순종은 별개로 치더라도, 선생으로서 지치지 않는 열정이 있어야하고,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하여 부단 없이 노력해야 하며,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무나 선생 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참고. 약 3:1).
그런데 선생이 이와 같은 모든 자질이나 필요조건들을 다 갖추었다 해서 제자훈련이 성공할 수 있을까? 배우는 자가 제자가 되고, 영적 자식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실패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예수님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탁월한 선생님으로부터 보았고, 배웠으며, 현장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를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롤 모델’로서의 예수님은 실패했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모범적인 삶이 내 이웃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를 교회에 데려다 예배에 참여시키고, 설교를 듣게 하고, <성경>을 가르치면, 변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교회에서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유다’는 그렇지 않다고 답합니다. 변화는 듣고, 보고, 배움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중생” 즉 “거듭남”의 문제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필요했던 중생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사도는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 영적 자식이라 말합니다. 복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써 자식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나에게도 이와 같이 내가 복음으로 낳은 영적 자식이 있습니까? 즉 사도는 지금 자신과 그들 사이에 동일한 영적 유전자가 있고, 동일한 영적 피가 흐르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영적 대물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생각이 같아지고, 사상이 같아지며, 목표와 비전이 같아지며,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와 순종이 있습니다. 서로를 향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권면이나 질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무어라 말하기 전에 이미 다 해 놓습니다. 마치 성부 하나님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성자 예수님께서 스스로 알아 하시는 것과 같은 관계입니다.
이 말은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과장이나 문학적 수사가 결코 아닙니다. 나의 일상에서도 이 같은 일을 여러 차례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전에 나와 공동체를 함께 했던 나의 제자들은 나를 교수님, 목사님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나를 아버지 또는 선생님으로 부릅니다. 그들이 나를 존경하고, 신뢰하며, 나의 도덕적 자질에 존경을 표하는 말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허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동일한 영적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내가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는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나를 어떻게 부릅니까? 목사님? 교수님? 그렇다면 아직 우리 사이는 교인 관계일 뿐입니다. 그냥 교회에서 서로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목사와 성도 사이일 뿐입니다. 사무적이고 형식적인 관계 말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어떻게 불렀을지 궁금합니다. 예수 목사님 또는 교수님으로 부르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발꿈치를 듦. 어쨌든 ‘유다’는 수년간의 예수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도 거듭나지 못했음을 그의 행동이 보여줍니다. 성령 하나님이 그 안에 없었습니다! 다른 지체들과 함께 배우고, 듣고, 예배와 사역에 참여했음에도 여전히 그는 이방인이었고,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 초청은 받았으나 택함은 받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는 초청을 단순히 거부한 것이 아니라, 청첩장을 들고 온 배달부를 잡아 죽이는 일에 공모했습니다. 선생님의 애틋한 권유에 발꿈치를 드는 것으로 반응했습니다. 근동지방의 풍습에 의하면 빵과 소금을 나눈다는 것은 서로를 계약으로 묶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발꿈치를 든다는 것은 배반의 정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서 벌써 그 계약을 어길 궁리를 하고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단순히 배신을 넘어, 모독과 적개심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거짓이요, 사기(詐欺)입니다. 그는 지금 허위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유다’의 내면세계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내면이 어떠한지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행동은 생각이 나타난 결과일 테니 말입니다. 따라서 그는 단순히 순간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배반의 싹을 키워왔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악마 그 자신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귀가 원래 “속이는 자”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는 마귀가 자기 마음을 빼앗고, 통제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허용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막힌 사실은 남을 속이는 자는 먼저 자신을 속여야 합니다. 즉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먼저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괜찮아,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야.” 하지만 이 같은 자기 합리화는 실은 스스로에게 최면(催眠)을 거는 것, 즉 자기를 속이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똑똑하고 지혜롭다는 마귀, 즉 “속이는 자”가 이런 식으로 자기를 속이고 있었으니, 그는 어쩌면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가 자신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드러난 결과는 그가 바라던 바와는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마귀를 허용하셨을까? 같은 질문을 ‘유다’에 대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유다’를 사도 중의 한 사람으로 삼으셨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두렵게 하는 한 가지 교훈이 떠오릅니다. 교회에 ‘유다’와 같은 회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경고가 그것입니다. 그것도 아무도 그의 실체를 눈치조차 챌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전율하게 합니다.
세상 끝 날까지 ‘유다’는 늘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다’를 가려내고 속아내는 수고는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좋은 씨와 가라지는 늘 함께 자라므로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참고. 마 13:24-30). 예수님의 충고인 즉은, 빈대 한 마리 잡으려다 온 집을 태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밤을 향하여. 지금 예수님 자신도 끝까지 “가라지”, 즉 ‘유다’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고 인내하고 계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를 끝까지 영광의 자리 즉 그분의 옆 자리에 앉혀두고 있었습니다. 다락방에서 제자들은 서로 선생님의 왼편과 오른 편에 앉겠다고 싸웠겠습니다만(눅 22:24), 예수님은 아마 ‘유다’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다’야, 이리 오너라. 내 왼편에 앉아 나랑 이야기 좀 하자꾸나.”
그렇다면 ‘유다’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분의 속삭임, 숨 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주님은 그가 스스로 떠날 때까지 이 영광의 자리를 그에게 내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떡을 떼어주었고, 발을 씻겨주었으며, 겸손과 나눔에 대해서 강의하셨으며, 그의 반응을 인내하며 기다리셨습니다. 오, 주님 어쩌면 이렇게 까지 할 수 있나이까!
그러나 ‘유다’는 전혀 감동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태연하게 다른 제자들처럼 행동했습니다. 입을 벌려 그분의 떡을 받아먹었고, 발도 내어놓았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그에게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단호하게 속삭입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절하). 원래 계획했던 대로 행하라는 것이겠죠. 예수님은 그가 최종적으로 어두움의 권세에 복종하도록 몰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순간 ‘유다’는 화들짝 놀랐겠지요. 그의 속내를 들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떡을 받아먹자 말자 그는 그 자리를 떠납니다. ‘요한’ 화자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30절). <요한복음>에서 빛과 어둠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화자는 서막에서 이렇게 예고한 바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유다’ 자신을 비추고 있는 빛을 버리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선생님이 베푸는 마지막 초청을 걷어 차버렸습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어둠이 올 수 있고,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조만간 어두운 터널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이 통과해야 할 어둠은 ‘유다’가 겪게 될 그 어둠에 비하면 짧고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빛이 그들과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자신이 선택한 그 어둠 속에 갇혀 고통하고 신음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탄식과 후회를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후회는 항상 나중에 찾아오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어른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도 “순종이 예배보다 낫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곧 축복입니다. <히브리서>도 이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그리고 이어서 충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4:1-2).
좋은 말 할 때 듣는 것이 몸에 좋다는 경고로 들립니다.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 가운데 거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것 말입니다.
7. 유다를 회고하며
대개 정상적인 가족이라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공유하기 마련입니다. 자식의 아픔은 부모의 아픔일 것이며, 자식의 기쁨은 부모의 기쁨이 됩니다. 남편의 근심은 아내의 근심이 됩니다. 사제지간(師弟之間)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내 연구실 제자들은 나에 대해서 한없는 신뢰와, 애정과 그리고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구실의 명예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후배들에게 늘 연구실과 지도교수 자랑을 하고 다닙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내 연구실은 대학원생들로 늘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어 왔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누군가 나에 대해서나 내 연구실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하면 그 사람이 설령 교수라 할지라도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또한 같은 연구실 내의 동료 중에서 누군가 연구를 게을리 하기라도 하면, 집단으로 그를 성토하고 따돌려버립니다. 연구실의 명예를 추락시킨다는 것이지요. 혹시 누군가 내 부모님에 대해서 모욕적이거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면, 내 기분이 어떨까요?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에 대해서 누군가 그렇게 대한다면 내 기분은 어떨까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공교육이 무너져 내렸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오늘날 학교에서 선생과 학생은 있으나, 스승과 제자가 없어졌다는 말로 이해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선생과 스승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리고 학생과 제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들 차이를 학원과 학교의 차이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학원은 단순히 전문 지식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러나 학교는 그 이상입니다. 지식에 더하여 인격을 훈련시키는 곳이었습니다.
학원은 학생들의 태만이나 부도덕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교는 이들에 대해서 매를 드는 곳이었습니다. 선생은 분노할 필요가 없지만, 스승은 분노해야 합니다. 선생은 가르치기만 해도 되지만, 스승은 가르친 것을 행하도록 시키고 솔선해야 합니다. 공교육이 무너졌다는 말은 이들 차이가 없어져버렸다는 말이거나, 좀 더 절망적으로 말하자면, 그 역할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말은 아닐까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송아지로 둔갑시켜놓고 예배를 드린답시고 야단법석을 해대던 이스라엘과 대제사장 ‘아론’. 이들을 보고 ‘모세’가 어떻게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성전이 동네 시장바닥처럼 변해버린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거룩한 대제사장과 사제들까지 한 통속이었습니다. ‘모세’나 ‘예수’님이나 아버지를 향한 불의와 모독에 대해서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모세’는 거룩한 십계명 돌 판을 내동이 쳐버렸고,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회초리를 들고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습니다. 시쳇말로 두 사람 모두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린 것이지요.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그분의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을 달래고 진정시켜야 옳습니까? 화를 내는 것은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화는 이분을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 정도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좋고 싫음, 그리고 옳고 그름에 대해서 그분처럼 명쾌하면서도 딱 부러진 태도를 보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의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맛이 없어서 내뱉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맛이 없어도 체면을 봐서 그냥 입안에 넣어두고 있겠다가 아니었습니다. 물이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기 때문에 내뱉겠다고 말합니다. 물맛이 가장 없는 온도가 대략 섭씨 20-30도 정도라고 하는데, 이 교회의 온도가 대략 그 정도였나 봅니다. 그 교회는 얼음처럼 차가운 지성도, 끓는 물처럼 뜨거운 열정도 없었습니다. 아는 것도 알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기도 싫었습니다.
생전에 ‘예루살렘’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7). 이들은 예수께서 왜 즐겁게 춤추며 피리불고 있는지, 왜 슬피 울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 ‘예루살렘’ 교회나 ‘라오디게아’ 교회 모두 죽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어찌 희로애락의 감정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의 ‘요한’ 화자는 한 때 그의 동료였던 ‘가롯 유다’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금 심정은 어떠할까요? 나는 딱 두 가지로 그의 심정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노와 함께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는 심정일 것입니다. 즉 본문을 대하면서 연상되는 화자의 모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동시에 가슴 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느라고 애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유다’를 바라보면서 마치 물이 끓듯 괴로움으로 요동치고 있다고 전하고 있는데, 실은 이 같은 감정은 화자 자신이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느끼고 있는 기분일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감정을 예수님에게로 이입(移入)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화자는 실로 냉정한 지성을 지닌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뜨거운 가슴을 지닌 목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얼음처럼 찼으며, 동시에 끓는 물처럼 뜨거웠습니다.
내 자식이 아무런 꿈이나 계획도 없이 그저 식충(食蟲)이처럼 먹고 노는 일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도, 흥미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가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짐승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아직 철이 없어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내 심정도 같은 심정일까요? 그렇다면 나는 그들의 부모가 아닙니다. 양부모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내 자식이 수시로 학교를 빼먹고 게임방이나 유흥지 등을 돌아다닌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하면서 그저 꾹 참고 기다리겠습니까?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내 자식이 수시로 “주의 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교회를 빠지거나, 맡은 바 책임을 소홀히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식의 편에 서서 그냥 내버려두겠습니까, 아니면 우선순위가 무엇이며 더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주시겠습니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는데, 어릴 때부터 적당주의가 몸에 밴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 버릇을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은 공동체가 따돌려버립니다.
우리 아들 달우가 얼마 전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 음악밴드를 하나 조직했습니다. 구성원은 모두 여섯 명인데, 각자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매달 모여서 새로운 곡을 하나씩 발표하고, 이들을 모아 매년 한 두 개의 CD를 발간하기도 하며, 유명 여행 잡지에 이들 곡을 소개하면서 글도 써 왔습니다. 억지로 참여한 것이 아니고, 밴드의 취지나 목적에 찬동해서 모인 사람들이니 만큼 각자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며 아주 재미있어 한다고 합니다. 더욱이나 그들의 활동이 점차 알려지면서 KBS를 비롯한 여러 방송에 게스트로 초대받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공연도 하고, 수시로 곡을 만들어주어 금전적인 수입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명이 늘 속을 썩인답니다. 매달 곡 하나씩을 발표해야 하니 정기적으로 모여 회의도 해야 하고, 연습도 해야 하고, CD 발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이 친구가 수시로 빠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방송국 출연 등과 같이 유명세를 타는 일이나, 돈 받고 공연을 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자기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고 자기 몫도 챙겨간다고 합니다. 이런 약삭빠르고 얌체 같은 친구를 나머지 멤버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요.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이런 친구는 어디를 가나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친구에게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그들의 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당장 눈앞의 유익이 그것입니다. 희생이나 봉사나 나눔 등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늘 내 일이 우선이고, 내 유익이 먼저입니다. 그는 실로 재치 있고 똑똑한 친구입니다.
과연 그럴까? 과연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을까?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고 있을까? 사람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바보가 있다면 오히려 그 자신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극히 작은 것을 탐하다가 정말 큰 것을 늘 놓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어리석음을 범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롯 유다’야 말로 소탐대실의 전형이 아닐까요? 왜 그는 선생님의 계속되는 권유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일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오랫동안 개인적으로 호소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는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까? 평소 선생님의 말을 귀담아 듣고 실행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히브리서>의 다음과 같은 경고는 마치 ‘유다’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4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유다’는 정녕 예수님마저도 구원하실 수 없었고, 또 구원하시지도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는 자신의 구원에 필요한 그 모든 것을 듣고, 보고, 갖추었기 때문에 다시 새롭게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무엇이 그를 구원할 수 있었을까요? 그를 구원하고자 제자훈련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어야 할까?
대부분의 교회는 회원이 되기 위해서 소정의 새 신자 훈련과정을 거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을 끝내자 말자 교회 출석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버린다면 교회는 그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새 신자 과정을 거치도록 해야 할까? 구원의 확신 가운데 침례를 받은 사람이 다시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면, 다시 한 번 더 침례를 받아야할까?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2)
늘 어린 아이로 남아있지 말라! 늘 발달 장애자로 살아가지 말라! 신병교육대에서 군대생활을 끝내지 말라!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것은 책임감입니다!
토의와 연습
1. 우리는 앞에서 “세족”(洗足)의 의미를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보았습니다. 다시 복습해 봅시다. 핵심적인 두 단어를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우리 교회에 어떤 빛을 던져주고 있는지 토의해 보고, 구체적인 일상에서 적용 가능한 실례를 두 가지씩 적어 한 주간의 헌신 제목으로 선언하고 실천해 봅시다.
2. ‘가롯 유다’의 배신에 너무 많은 교리를 쌓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배신에 관한 이야기를 차라리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현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이야기는 분명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화자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입니다. 나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나누어봅시다. 참고로 <고린도전서> 10:12을 읽어 봅시다.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