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5과
왕의 죽음과 승리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55-12:50약 104분 분량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1:24)
본문은 소위 <기적 설화>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일주일을 보게 됩니다. 그분의 공적 사역을 마감 짓는 일련의 사건들이 이곳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중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역시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입성(入城) 모습은 전쟁에서 승리한 왕이나 장군의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벤허>나 <패튼장군> 등과 같은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승리자의 의기양양(意氣揚揚)한 모습과는 전혀 딴 판입니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예수님의 입성도 이들 왕이나 장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길가에 늘어서 국기나 깃발을 흔들며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 말입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말이나 마차가 아니라 당나귀를 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개선장군이나 왕의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아주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있다 하겠습니다.
승리의 왕이 왜 말이 아닌 당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일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승리는 전쟁이나 무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겸손한 순종 즉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되는 아주 신비한 승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분은 “지는 것이 이기는 곧 이기는 것”임을 잘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화자는 예수님의 입성을 다루기 전에, “‘마리아’의 헌신”을 먼저 소개함으로써, 그분의 헌신과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점에서 이 에피소드는 이어지는 내용에 대한 서막의 기능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화자 자신의 결론적인 해설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공적 사역 내내 뒤따라 다니던 경탄과 환희, 오해와 불신, 증오와 배척 등과 같은 소란스럽기만 하던 분위기도 이제 조용히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대신에 소수의 제자들을 상대로 한 강의 내지는 제자훈련이 핵심 장면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문학과 역사
구조와 배경. 본문은 크게 다섯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단락 1: 마지막 유월절(11:55-57)
(2) 단락 2: 마리아의 헌신(12:1-11):
(3) 단락 3: 예루살렘 입성(12-19절):
(4) 단락 4: 헬라인의 방문, 죽음과 영광(20-36절)
(5) 단락 5: 에필로그(37-50절)
첫 단락(11:55-57)은 앞선 <나사로 이야기>와 12장을 연결해 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기능하는 바는 이어지는 에피소드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단락을 통해서 임박한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두 개의 이야기(narrative)와 한 개의 강론(discourse), 그리고 결말(epilogue)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적설화>의 다른 부분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아무런 기적 사건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곳에서 소개하고 있는 두 에피소드가 표적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 유명한 ‘마리아’의 헌신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가 ‘예루살렘’ 입성에서 보여주는 군중들의 환호를 통해서 입니다. 우리는 이 두 사건이 지니는 상징성을 곧 보게 될 것입니다.
흔히 “‘베다니’의 사건”으로 불리는 두 번째 단락의 내용은 초대교회 당시 아주 유명한 일화(逸話)였던 것 같습니다. <공관복음>에서도 이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막 14:3-9; 눅 7:36-38). <마가복음>은 이 사건의 주인공으로 한 이름 없는 여인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여주인공을 “죄인인 한 여자”라고 소개하면서 이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요한복음>은 이 여인이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라고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차이를 보이고 있는 부분은 여주인공의 이름 외에도 또 있습니다. 예컨대, 여인이 향유를 뿌린 예수님의 신체 부위에 대해서도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무명(無名)의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있다고 전하고 있는가 하면, <누가복음>은 그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 화자는 <누가복음>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으나, 차이가 있다면 여주인공을 무명의 여인이 아닌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차이는 두 번의 다른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른 전승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요한’ 화자는 자신의 서술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 전승을 재구성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레슬리 뉴비긴’, 200쪽).
세 번째 단락의 핵심은 ‘예루살렘’ 입성(12-19절)입니다. 이에 관해서도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차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요한’ 화자는 “왕의 입성”에 관하여 아주 절제된 모습으로 단 세 절로 짧게 처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참고. 12-14절). 그리고는 <스가랴>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슥 9:9), 자신의 해설과 ‘바리새’인들의 반응을 덧붙이고 있습니다(참고. 15-19절).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온 순례객들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있다면 ‘예루살렘’ 성에서 그를 맞으러 나온 무리에 대한 언급만이 있을 뿐입니다(참고. 12-13절). 군중들이 걸어가는 예수님 앞에서 길에 옷을 펼쳐 놓는다든지, 종려나무 가지를 까는 등의 행위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당나귀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 사전에 제자들을 시켜 미리 준비시켜 두었다는 암시는 어디에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군중들이 그를 환영하며 달려 나오기까지 당나귀의 소재에 대해서 알지도 못한 듯 보입니다. “왕의 입성”과 관련하여 이처럼 절제된 묘사를 유지하고 있는 ‘요한’ 화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리고 성 안에서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밖으로 뛰쳐나오는 백성들을 모습을 보여주는 의도는 무엇일까?
네 번째 단락은 에피소드가 아닌 예수님의 강론입니다. 그분의 강론은 ‘헬라’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형식으로 주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20-22절). 난데없이 ‘헬라’인이 등장하여 그를 만나보기를 원한다는 화자의 설명은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놓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이 역시 모든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결코 우연의 사건이 아님을 보여주려 함입니다.
마지막 두 단락은 12장뿐만 아니라, 예수님 공생에 전체(2-12장)에 대한 결론입니다. 다섯 번째 단락은 화자의 해설로서, 그 자신이 <서막>에서 선언한 바 있는 그 내용을 다시 풀어 설명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11).
이스라엘의 불신은 결국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님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것임을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사 53:1; 6:9-10). 마지막 여섯 번째 단락 역시 그동안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 중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화자가 반복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 3:16-21; 5:19-47; 8:12-26).
신학과 신앙
1. 마지막 유월절(11:55-57)
55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56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57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55-57절)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은 축제의 날입니다. 구원과 해방, 자유와 독립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날에 사람들은 목욕도 하고, 새 옷으로 단장을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축제를 벌입니다. 모두에게 즐거운 날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분위기는 전혀 딴 판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긴장감과 두려움이 드리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서 묻고 있는 질문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도 이 축제에 참석할 것인가?” 무슨 좋지 않은 일이 금방이라고 벌어질 것만 같습니다. 또한 축제를 주관해야 할 지도자들은 어떻습니까? 이들의 가슴은 분노나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이 마지막 유월절은 예수님의 전체 생애에서 가장 운명적인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조만간 이 축제의 희생양으로 바쳐질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2. 마리아의 향유(12:1-8)
두 번째 단락의 핵심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뿌리는 장면입니다. <공관복음>에서도 동일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만(막 14:3-9; 눅 7:36-38), 이 일이 일어난 시점(時點)을 달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강조점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즉 ‘요한’ 화자는 <마가복음>과는 달리, 이 일이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일어난 것으로 소개하고 있는 반면, <마가복음>은 그 이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배치하고 있습니다(참고. 막 11:1-11; 14:3-9). 두 기록이 이처럼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각 복음서 화자가 의도하고 있는 바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한’ 화자의 초점은 예수님에게 있는 반면, ‘마가’ 화자는 ‘마리아’의 행동에 방점(傍點)을 찍고 있습니다. 즉 ‘요한’ 화자는 왕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서 영광을 받게 될 승리자라는 점을 이 에피소드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에 있는데 반해, ‘마가’ 화자는 이 에피소드를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공회의 음모와(막 14:1-2) ‘가롯 유다’의 배반 이야기(막 10-11) 사이에 ‘마리아’의 행위를 놓음으로써, 그녀의 헌신을 두 집단의 행위와 대비시켜 상대적으로 그녀의 헌신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요한’ 화자도 ‘마리아’의 헌신에 관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 이 부분에 관한 서술 직전에 공회의 결의와 ‘마리아’의 “과소비”를 질책하는 ‘가롯 유다’를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리아’를 이들 두 집단과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은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에브라임’에서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내려오지 않고 ‘요단’ 동쪽에 있는 ‘베다니’를 다시 방문하셨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합니다. 방문의 목적은 ‘나사로’ 자매를 방문하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1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1-2절)
아무튼 그분의 방문을 맞아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흥미롭게도 <공관복음>은 이 잔치가 나병병자 ‘시몬’의 집에서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참고. 막 14:3). ‘요한’ 화자는 이 부분에 관한 언급은 생략하고 있습니다. 장소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마르다’입니다.
이날이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했으니,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아침까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르다’가 준비하고 있는 이 식사는 안식일 끝날 즉 토요일 저녁에 다시 재개될 것이었습니다. ‘마르다’와 함께 이 장면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은 ‘나사로’입니다. 화자가 그를 이곳에 함께 등장시키고 있는 의도는 본문의 핵심 교훈과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즉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와 예수님 곁에서 기대어 앉아있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적으로 예표(豫表)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이 식사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열렸다면, ‘시몬’은 분명 감사의 표시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가 나병환자라는 언급은 그의 이전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마리아’의 갑작스러운 행동은 식사의 분위기를 깨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3절)
화자가 이 잔치의 주인공으로 ‘마리아’를 등장시키고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마리아’는 이 장면에서 뿐만 아니라, 11-12장 전체에 걸쳐 사실상 이야기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11장에서 ‘나사로’ 이야기에서 ‘마리아’를 소개하면서, 지금 이 식사 장면에서 보여주고 있는 ‘마리아’의 행동을 함께 언급했으며(참고. 11:2), 지금 이곳에서는 반대로 ‘나사로’ 이야기를 회고하면서 두 여인을 소개하고 있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나드’란 향유는 원래 인도 산(産) ‘나드’ 나무 뿌리와 이삭에서 추출한 향유로서, 모르긴 해도 ‘베다니’ 상점에서 파는 지역 산 싸구려 향수는 아니었을 것입니다(‘브루스 밀른’, 231쪽). 향유의 값도 값이지만 그 양도 엄청난 것이었음을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4-5절)
‘나드’ 한 근을 값으로 따지면 삼백 ‘데나리온’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하루 인건비가 한 ‘데나리온’이었으며, 일주일에 엿새를 일한다고 가정한다면, 전체 향유의 가치는 결국 한 사람의 일 년 임금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 위가 아닌 발 위에 쏟아 부었습니다. 화자는 이 사실을 ‘마리아’의 헌신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신 예수님의 헌신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죽음을 통한 구원 역사의 성취가 그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왕이 전쟁에서 싸워 이겨 그 백성을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여 희생시킴으로써 구원을 이루어낼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로 이점이 화자의 주된 신학적 관점이긴 해도, 그는 ‘마리아’의 헌신을 간과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실없는 “과소비”라며 ‘마리아’를 꾸짖고 있는 ‘가롯 유다’를 오히려 꾸짖고 있는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간직했던 그 향유는 어쩌면 가족이 오래 동안 보관해왔던 가보(家寶)였을 수도 있습니다.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6-8절)
‘마리아’는 이처럼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시체에 뿌릴 방부용으로 간직해왔던 것이며, 지금 이 자리에서 그분의 발 위에 뿌림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에 앞서 그 일을 성취한 셈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녀가 자신의 행동을 이해했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만, 이 장면에서 ‘마리아’는 선지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하겠습니다. 마치 ‘가야바’가 자신이 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예언했듯이 말입니다. 물론 두 사람의 예언은 지극히 대조적인 양상을 띠고 있긴 합니다만. ‘가야바’의 예언은 적대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만,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충성과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승리의 입성(9-19절)
‘요한’ 화자가 그리고 있는 “종려 주일”(the Palm Sunday)의 분위기는 흥분과 환호입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나사로 이야기> 직후에 이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9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9-11절)
하지만 <공관복음>는 이 장면에서 사뭇 다른 이야기를 추가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면서 그 도시의 불신앙과 앞으로 다가올 비극적 대학살로 인해 울음을 터뜨리신 것을 기술함으로써, 그 분이 얼마나 무거운 마음으로 그 도시를 행해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셨는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눅 19:41).
유월절에 모인 사람들은 어느 모로 보나 그 수가 엄청났습니다. 순례자들이 ‘팔레스타인’ 전역과 지중해의 모든 지역에서 모여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다니’와 인근 마을에서 예수님과 함께 올라갔으며(17절),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맞으러 ‘예루살렘’에서 나왔습니다(13절). 그들은 행동으로 그리고 말로 그분을 환영했습니다. ‘요세푸스’(Josephus)는 그 당시로부터 약 삼십년 후에는 유월절에 참석하러 오는 사람들의 수가 이백오십 만을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2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2-13절)
‘마카비’ 시대로부터 종려나무는 우리나라의 무궁화처럼 ‘유대’ 국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나무는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해서 혁명적 투쟁을 하는 동안에 주조된 동전과, 혁명이 진압된 후에 로마인들이 주조한 화폐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행동은 뿌리 깊은 민족주의적 열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태극기를 흔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외치는 ‘호산나’는 “지금 구원을 주소서”로서, 초막절에 부르는 <할렐 시편>(시 113-118)의 일부인 시 118:25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할렐의 노래” 중에 ‘호산나’라는 부분에 이르면 남자들은 일제히 ‘룰라’(종려나무에 묶여 있는 한 다발의 버드나무와 도금 문양)를 흔들었다고 합니다. 이에 더하여 무리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절). ‘유대’인 특유의 정치적 ‘메시아’의 소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무리들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물론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화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교정해주고 있습니다.
14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14-15절)
화자가 강조하고 있는 바는 ‘메시아 예수’는 단순히 정치․군사 지도자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대중들이 자신을 그런 방식으로 추대하려 할 때마다 바로 잡으려 하셨습니다. 예컨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려 하자 ‘갈릴릴’에서 산으로 물러난 적이 있습니다(요 6:14-15). 지금 ‘예루살렘’ 입성도 말(馬)이 아닌 당나귀를 탐으로써 그 점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유다 마카비’나(사 31:1-3) ‘솔로몬’(왕상 4:26)도 모두 말과 병거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스가랴>는 왕의 진정한 모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9-10).
따라서 이 왕의 승리는 군사적인 승리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그분의 입성은 화평을 위한 것이며, 이는 그분이 오심으로써 두려움이 도망가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15절).
하지만 사도들조차도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예수는 무력과 정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세상에 화평과 구원을 가져다 줄 왕이라는 점을 그분의 부활 이후에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16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16-18절)
열광하는 무리나 사도들이 왕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서 오해와 무지를 드러냈다면, 공회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 반대의 모습입니다. 열광이 아니라 배척입니다. 그들이 절망 가운데 비통해하는 모습이 주는 교훈은 세상이 하나님의 일을 좌절시키려 할 때, 세상이 먼저 좌절하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19절)
그리고 우리는 이 구절에서 다시 한 번 <요한복음> 특유의 “역설”을 볼 수 있습니다. 역설은 이들의 “온 세상이 그를 따른다”는 예언에 있습니다. 실은 이와 같은 일은 오순절 이후에 일어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가 예언했던 대로,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슥 9:10). 그분은 특정 지역, 특정 민족의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공회조차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그분은 진정 “온 세상의 왕”이 될 것입니다(참고. 19절).
4. 헬라인의 방문, 죽음과 영광(20-36절)
하지만 공회는 오순절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화자는 이들의 예언이 곧바로 성취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헬라’인들의 방문이 그것입니다.
20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20-22절)
화자는 이들을 이방인의 첫 열매로 그리고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아마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나 이후 그분께서 성전 내 이방인의 뜰을 숙정(肅靜)하신 일 등을 통해서 더욱 고조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않고 ‘빌립’을 먼저 만나고 있는 모습은 과연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만나줄 것인지에 관해서 알아보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빌립’ 역시 확신이 없었던지 ‘안드레’와 상의하고 있습니다(참고. 마 10:5-6).
예수님의 대답은 의미심장합니다. 즉 자신의 사역이 이제 절정을 맞이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바, 그 절정의 때는 다름 아닌 이방인들이 자신을 찾고 있는 지금이라는 것입니다(대조를 위해서 7:30과 8:20을 함께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바로 영광의 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절)
이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속에 포함될 것임을 무언(無言) 중에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두 구절을 건너뛰어 27-28절과 연계해서 읽어보면, 그분의 영광의 때는 곧 자신의 죽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물론 그 영광 속에는 죽음뿐만 아니라 승천(昇天)과 부활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참고. 13:31-32; 17:1, 5). 참고로 ‘요한’ 화자는 예수님의 영화(榮華)를 말할 때, 보다 구체적으로 “들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31-32절).
결론적으로 왕의 죽음은 수치스러운 실패가 아니라, 영광이며 이는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실로 신비하고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세 절(24-26절)은 일견 문맥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 같으나, 실은 2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자의 영광이 성취되는 방식에 대한 원리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4-26절)
다시 말하자면 이는 하나님 나라의 법에 관한 주석(註釋)입니다. 즉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원리인데, 이를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비유에 관한 설명은 없습니다만, 의미는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즉 곡식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씨앗이 땅에 떨어져 묻혀야 하는 것처럼, 인자 역시 세상에 생명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2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생명의 원리가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방식은 25절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이는 <공관복음>의 유사한 선언과 병행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참고. 막 8:35; 마 10:39; 눅 9:24). 다만 두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생명의 원리는 그 대상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24절이 타인을 위한 생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면, 25절은 자신의 생명에 관해서입니다. 26절의 말씀 또한 <공관복음>에서 대응되는 표현을 찾을 수 있는데,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으로서, ‘요한’ 화자는 이를 아주 새로운 표현으로 엮어내고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와 교제한다 함은 그분의 고난과 함께 한다는 의미일 것이며, 이는 또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구절은 예수님이 겪고 있는 시험과 고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7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29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27-30절)
아무리 영광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해도, 지금 당장 겪고 있는 아픔이나 괴로움이 약화되거나 가볍게 여겨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요한’ 화자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격랑을 헤쳐 왔습니다. 예컨대, 화자는 ‘나사로’의 죽음과 관련해서 그분이 얼마나 통분하였으며, 괴로워했는지 보여준 바 있습니다(11:33-35). 그리고 앞으로 보게 될 것이지만, ‘가롯 유다’를 집어삼키고 있는 악마의 권세 앞에 전율하고 있으며(13:21), 조만간 그분의 제자들에게 닥칠 대 환란을 예고하며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14:1). <개역성경>에서 “민망하다”(taravssw, 타랏소)로 번역하고 있는 이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그분이 지금 겪고 있는 영적 고통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괴로워하다”, “두려워하다”, “발작하다” 등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분이 드리고 있는 기도,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하소연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 극도로 위축되어 있고, 두려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자신의 존재 이유 즉 소명을 인식하고 있으며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이나 유보(留保)함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바로 이와 같은 순종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본질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이 순종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혹자는 이 문장의 목적어를 예수님의 사역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만(23절이나 31절을 기초로 하여), 정확하게는 “아버지의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통해서 이미 영광스럽게 한 바 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영광스럽게 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무지한 무리들에게는 한낱 천둥소리나 기껏해야 천사의 음성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두 설명 모두 틀린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천둥소리는 종종 하나님의 현현(顯現)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예. 시 18:7-16; 계 8:5; 11:19; 16:18). 예수님도 이점을 인정하시며, 이와 같은 현상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모여든 무리들을 위한 것임을 일러줍니다. “변화 산”에서의 환상도 실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참고. 막 9:7).
예수님의 강의는 계속됩니다. 이번에는 자신의 죽음과 세상에 대한 심판과 그리고 구원에 관한 주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분의 죽음이 주는 이중성, 즉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에 관한 것입니다. 부정적인 측면이라 함은 복음의 저주를 말할 것이고, 긍정적인 측면이라 함은 복음의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31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제)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32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31-33절)
인자의 “들림”, 즉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그의 영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면(참고. 23-28절), 그의 죽음은 또한 세상에 대한 심판과 구원과도 마땅히 연결되어야 할 것입니다(참고. 31-32절). ‘요한’ 화자는 앞에서도 이 같은 방식으로 두 주제를 연결해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참고. 3:14-17). 아래에서 보듯이, 처음 두 절과 나중 두 절이 마치 시적 유사반복을 이루면서, “들림”과 “구원” 및 “들림”과 “심판”에 대해서 이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4-15)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6-17)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31-32절), 화자는 그리스도의 “들림”을 한 번은 심판과(31절), 그리고 또 한 번은 구원과(32절)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과 관련해서 화자가 두 번에 걸쳐 “이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단호한 결심과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극치를 이루었으며, 이를 통해서 사악한 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세상일 수만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세상의 임금”에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화자가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는 다분히 종말론적이며 묵시적이기까지 합니다. <누가복음>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눅 10:18), 보다 거대한 전 우주적인 심판에 관한 그림은 <계시록>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계 12). 우리는 그가 다름 아닌 “용” 또는 “옛 뱀” 즉 ‘사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주적 차원의 크리스마스, 즉 “어린 양”의 탄생과 우주적 전쟁, 그리고 용의 패배와 추락을 봅니다. 이와 같은 설정(設定)은 고대 근동 문학에서는 친숙한 것으로서, <계시록>의 저자는 이를 모티브로 삼아 ‘메시아’의 승리를 그리고 있습니다. ‘요한’ 화자 역시 그러한데,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서는 “어린 양의 피”가 그 성취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 하였도다”(계 12:11). 그래서 반드시 함께 등장하고 있는 장면은 찬송입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 12:10). 따라서 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31절)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들림”으로 인하여 세상의 왕은 왕좌에서 끌어내려졌고, 세상을 위해 죽은 인자가 보좌 위에 앉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들림”이 주는 결과는 이중적이라 했습니다. 하나가 심판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속 즉 구원입니다. 31절에 이어 32절에서 이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가 들림은 단순히 나무 위에 들린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 보좌 위로까지 들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로 모두를 들어 올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보좌로 이끌어 올리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써 자신에게로 모든 구원받은 백성을 데리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속의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는 그분의 구속의 능력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화자는 33절에서 “들림”이 의미하는 바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특별한 죽음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분이 이 세상에서 들림은 천국으로 들리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울 뿐입니다. 이 문제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직면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34절)
무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그들의 <시편>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시 89:37).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다면 그리스도 즉 ‘메시아’ 역시 영원한 존재가 되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할 것입니다(물론 ‘메시아’ 왕국은 한시적이며 그의 죽음과 함께 그 나라와 모든 육체들도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견해가 후대에 널리 퍼지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참고. 에스라 4서 7:28-29). 따라서 이들의 질문은 당연한 것이며, 그가 말하는 인자가 과연 누구인지 따져 묻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 인자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도무지 들어본 적도 그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는가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즉답을 거부하십니다. 물론 인자는 영존(永存)할 것이지만, 그의 죽음과 들림이 하나님 나라와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 지금 이들과 더불어 논쟁을 벌이고 있는 때도 아니고, 또한 이들이 논쟁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는 판단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을 향해서 경고와 함께 호소를 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35-36절)
그리고 이 말씀을 끝으로 그분의 공생애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제 그분은 대중으로부터 자신을 숨겨버립니다. 무리가 다시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 들리실 때가 될 것입니다.
5. 에필로그(37-50절)
이 단락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관한 화자 자신의 요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락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37절)
즉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한 결 같았으며, 그것은 불신이었다는 보고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은 그들의 역사 내내 “그 말씀”을 거부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습니다(1:11). “그 말씀”은 여러 시대, 여러 방법으로 선지자들을 통해서 드러난 것들로서, 특별히 <이사야>에서 성취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그 말씀을 거부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38절)
<이사야>(53:1)에서 인용하고 있는 이 구절은, 사람들로부터는 버림을 받았으나 하나님에 의해 영화롭게 된 “하나님의 종”에 관한 열방들의 충격과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질문의 배경이 되는 앞선 구절들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3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15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사 52:13-15)
‘요한’ 화자는 이 본문을 그리스도를 위한 본문으로 “우화적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우리가 들은 것”을 “그리스도의 말씀” 즉 “복음”으로, 그리고 “주의 팔”을 기적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하고 있는 자는 누구일까? 소위 “소수의 남은 자”들이거나 또는 예수님 자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질문을 하는 자를 예수님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들은 것”은 그분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이 될 것입니다(아래 구절 참고):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3:11)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3:34)
16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7:16-17)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8:26)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12:49)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 화자는 그 이유를 다시 <이사야>(6:10)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풀이하고 있습니다.
39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39-40).
그 이유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눈과 귀와 마음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행여나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아, 돌이켜 회개할까봐 말입니다.
이 선언은 그 유명한 하나님의 “예정론”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비록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은 동전의 양면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우리는 이에 대해서 여러 차례 배운 바 있습니다만, <로마서>(9-11장)에서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예컨대, <출애굽>에서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언급은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다는 언급과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출 4:21//출 8:15, 32). <신명기> 역시 이 두 관계가 일견 모순되어 보임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즉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았다”고 선언하면서(신 29:4),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 29:9)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귀머거리로 하여금 열심히 들으면 들릴 것이라는 난센스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모순은 선지자들을 향한 그분의 명령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선지자 ‘이사야’의 경우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눈과 귀와 마음을 닫고 어둡게 하라고 명령하시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행여나 돌이켜 회개할까 봐 그런다는 것입니다(사 6:9-13). 그렇다면 처음부터 아무 예언도 전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선지자의 수고가 어차피 헛수고로 끝날 텐데 말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전체 사역을 설명하는 방식 또한 이와 같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수수께끼와 같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사람들이 듣고 깨달아 돌이켜 죄 사함을 받을까 봐 그런다는 것입니다(참고. 막 4:11-12). 따라서 이곳에서 ‘요한’ 화자가 동일한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이스라엘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불신의 원인을 하나님의 “예정론”만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예컨대, 동전의 다른 면, 즉 “인간의 책임”을 들어 “예정론”이 극단으로 흐르는 것을 보완할 수는 없을까? 의도적인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의 ‘요한’ 화자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41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41-43절)
즉 그는 이스라엘 전체가 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지도자들 중에서도 믿는 자가 꽤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데 요셉’과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3:1; 19:38). 공회 회원들 중에서도 믿는 자들이 꽤 많았다면, 일반인들의 수는 더욱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정”은 운명처럼 기계적이거나, 획일적이거나, 또는 닫혀 있거나, 일방통행적인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고집스러운 불신(不信)은 자신들의 책임으로 돌려야 마땅하다는 암시일 것입니다. 덧붙여 믿음을 드러내놓고 증거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에 관한 언급은 화자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들 지도자급 신자(信者)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을 더 높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태도를 두고 자신의 공동체를 향해서 도전과 호소를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적극적인 신앙의 삶을 살자는 호소이겠지요.
이제 예수님은 표적(sign)으로 대표되는 공생애 사역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로써 흔히 <기적 설화>로 불리는 <요한복음> 제 2부는 끝이 나고 있습니다. 화자는 예수님 자신의 선언으로 그분의 사역을 요약․정리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복음서 전체를 흐르는 일관된 모티브, 바로 그것입니다.
44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49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44-50절)
선포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44-48절)은 구원과 심판에 관하여, 그리고 후반(49-50)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재 선언 및 최종 선언입니다. 그리고 선포의 형식은 ‘유대’ 문학 특유의 시적 유사 병행을 따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확인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위 단락을 천천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선포의 핵심 주제는 당연히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보냄을 받은 자” 즉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보낸 자와 동일하며, 따라서 예수를 보는 자는 곧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참고. 요 13:20; 마 10:40; 눅 10:16; 막 9:37; 눅 9:49). 그러므로 예수의 말과 행동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 하나님의 말과 행동을 대변하는 것입니다(참고. 3:31-36; 6:36-40; 7:27-29, 33-34; 8:14-17, 28-29, 42-43; 10:34-36).
교훈과 적용
1. 마리아의 향유
<성경> 속에는 이런 저런 유형의 방탕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탕자(蕩者) ‘삼손’, 탕왕(蕩王) ‘솔로몬’과 ‘다윗’, 탕부(蕩婦) ‘고멜’이나 ‘사마리아’의 여인(요 4)과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등이 대표적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탕자(蕩子) 작은 아들을 놓칠 수 없습니다. 또 있습니다. 방탕한 작은 아들을 둔 덕분에 덤으로 방탕한 자의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된 그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를 이름 하여 탕부(蕩父)로 부른 바 있습니다(2011.1.9. 주일설교).
우리가 이 사람들을 탕자 또는 탕녀로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본인은 <돌아온 작은 아들 이야기>를 설교하면서 이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즉 이들은 아무나 조건 없이 사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들까지 마구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절제가 없고, 헤프고,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가 절제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절제함이 없습니다.
탕부(蕩婦) 마리아.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고멜’을 능가했으면 했지 결코 뒤지지 않을 또 다른 탕부(蕩婦)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은 감히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더하여 절제의 미덕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무모했고,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일 년 치 월급을 몽땅 교회에 다 갖다 바쳐버렸습니다!
만일 그녀가 결혼을 한 자라면 이혼을 받아 마땅합니다. 배우자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 모든 일을 처리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법원은 이런 경우 이혼사유가 된다고 판결합니다. 실제 그런 사례가 우리나라에도 종종 있습니다. 교회에 미쳐, 하고 한 날 새벽기도다, 예배다, 전도다 하며 가정도 자식도 내팽개치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이 사회는 정상인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 보면 사랑이나 은혜에 대한 보답은 항상 받은 것보다는 덜하고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자식을 키워본 부모라면 이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거의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지만, 자식은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볼 때, ‘마리아’의 행동은 분명 과격했고, 맹목적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었다 살아난 것도 아니고, 동생이 살아난 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렇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보답으로 그녀는 일 년치 월급을 몽땅 털어 교회에 바쳐버린 것입니다! 정신이 온당한 자라 할 수 없겠지요. 그녀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고, 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렇게 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갈 필요가 없었음에도, 따라가기로 작정했던 ‘룻’만큼이나 정신 나간 선택을 한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광신도”(狂信徒)라 부릅니다. 과연 그날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행동을 그렇게 평가했습니다. 광신적인 과소비(過消費)라고 그녀를 몰아세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이 무슨 쓸데없는 과소비인가!”라며 분노했고, ‘마리아’를 나무랐습니다. ‘요한’ 화자는 이곳에서 ‘가롯 유다’ 한 사람을 특별히 대표적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롯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4-5절).
‘유다’의 말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도처에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널려 있던 그 사회에서, 그 교회에서, 그처럼 엄청난 돈을 구제가 아닌 단 한 사람을 위한 사랑의 표현으로 허비해버리다니 말입니다! 만일 내가 교회의 제정을 맡고 있었더라도 제자들과 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니 ‘유다’의 관심사는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좀 더 은밀하고 음흉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에요.
그는 자신이 맡아있던 교회 헌금을 수시로 횡령하고 있었습니다(6절).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맡고 있었던 것이지요. 향수병을 깨뜨리지 않고 그대로 헌금으로 냈더라면 분명 더 많은 액수를 횡령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게 아깝고 아쉬운 것입니다. 알다시피 좀도둑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도둑질은 ‘유다’의 뿌리 깊은 습관이 되어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원인도 따지고 보면 결국 돈 때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탐욕이 그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죠.
여기서 화자가 ‘가롯 유다’를 지칭하며, “예수를 잡아 줄” 인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마리아’와의 대조를 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아닌 게 아니라,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유다’가 은 삼십 냥에 선생을 팔아넘겼다면, ‘마리아’는 그보다 두 배 반이나 되는 액수를 연인에게 바쳤습니다. 자기 선생님의 가치를 겨우 은 삼십 밖에 보지 않았던 ‘가롯 유다’! 참으로 쩨쩨한 인간이 아닙니까? ‘유다’가 돈 가방을 움켜쥐고 수시로 횡령하고 있었다면, ‘마리아’는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선생님에게 드렸습니다. ‘유다’가 자신을 위해 선생님을 팔았다면, ‘마리아’는 선생님을 위해 자신을 드렸습니다.
‘유다’는 제자로서 선생을 배반하기 전에, 선생님의 신뢰를 먼저 저버렸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자에게 회계를 맡기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문 지식으로 치자면 그보다는 회계사 ‘마태’가 훨씬 더 났지 않았을까요? 그런대도 예수님은 그를 신뢰하고 맡겼습니다.
‘마리아’는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는 일에 있어 하나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브루스 밀런’, 235-237쪽.
예수님께서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리아’가 행한 일도 함께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13; 막 14:9). 이 말은 온 세상이 ‘마리아’가 내뿜는 향기에 취하게 하라는 것이겠지요. 아닌 게 아니라, 벌써부터 그녀의 향기는 온 방을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3절). 이 구절은 하나의 상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녀의 냄새에 취하여, 눈을 지그시 감고 감동에 젖어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복음서>에 등장할 때마다 예수님의 발과 관련되어 등장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누가복음>은 그녀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주의 발아래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눅 10:39). <요한복음>은 그녀가 예수님께 의지한다는 것은 보여주기 위해,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요 11:32). 그리고 지금 이 장면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헌신을 표하기 위해서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대함에 있어 한 결 같았고 일관되었습니다. 겸손과 순종으로 일관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녀의 행동은 돌출적인 것이 아니었고, 어떤 목적을 지닌 것도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그것은 습관의 열매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습관은 우리가 무엇을 언제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며, 머뭇거리게 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바로 이 순간을 위하여 그 향유를 간직해 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만,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지금이야. 지금 하지 않으면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거야.”
<야고보서>는 우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약 4:13-14). ‘바울’ 사도는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권합니다(갈 6:10).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이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므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9:4). 선하고 좋은 일을 차일피일 미루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히말리아’의 새, “아, 날이 새면 집 지으리라”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합니다. 통계를 보면 재능이나 재물을 나누는 일은 평소 하는 사람이 계속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 본 사람이 더 자주, 더 많이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늘 나누는 사람은 더 풍성해지고, 더 넉넉해지게 되는 법입니다. 바로 여기에 나눔의 축복이 있다 하겠습니다. 내 곳간을 퍼낼수록 그 곳간이 비는 것이 아니라, 계속 채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이 역설을 믿습니까? 이 같은 체험을 단 한 번이라도 해 본 적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없었다면 속는 셈치고 한 번 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나의 습관으로 삼아보시기를 권유합니다. 내가 얼마나 넉넉하고, 풍성하며, 그리고 탁월해지는 지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을 기억하라는 것은 ‘마리아’의 넉넉함, 풍성함, 그리고 탁월함을 전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넉넉한 부모 밑에서 넉넉한 자녀가 나옵니다. 늘 보고 배우는 것이 그것이거든요.
그런데 어찌하여 ‘가롯 유다’는 같은 선생님한테 배웠는데도 이처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그의 선생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거대한 산이요, 거목(巨木)이며, 큰 숲이 아닙니까! 이 같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입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 좋은 기회를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그가 선생님을 배반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멋진 인생의 선생님으로부터 무엇 하나 제대로 배운 것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 인생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이런 고민을 해 본 적도, 그리고 늘 가까이 있는 선생님에게 물어본 적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늘 자기 생각, 자기 계획 때문에 선생님의 가르침은 마이동풍이었습니다. 고작 하는 짓이라고는 교회 헌금을 수시로 빼돌려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에 쓰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좀도둑으로 인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지요. 이것이 그의 비극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왜 ‘마리아’를 제쳐두고 ‘가롯 유다’를 사도로 택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와 스승은 각기 반(半) 팔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어떻습니까? 주변에 나를 아끼고, 도움을 주며, 충고를 아끼지 않는 선생이나 ‘멘터’(mentor)가 있습니까? 본인은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훌륭한 부모님과 여러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그분들의 좋은 습관이나 기질을 따라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나이가 들고 난 뒤에는 또 다른 스승들을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었는데, 좋은 책들의 저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나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이들 책으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꾼 한 선생님을 내 나이 삼십대에 만났습니다! 그것은 정말 행운 중의 행운이었습니다. 그분이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이미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예언자 마리아. ‘마리아’는 감히 선생님을 사랑했고, 그리고 그 사랑을 절제하지 못했고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무절제했고 무모(無謀)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녀를 탕녀로 불러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정 반대입니다. 신중하고, 절도가 있고, 계산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를 현자(賢者)로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마리아’는 무모했을까? 단어 “무모”가 의미하는 바는 문자 그대로, “모략이 없다”, “준비나 계획이 없다”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은 그녀의 행동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정된 것이었다(이 구절이 <개역 성경>에는 없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7절).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마리아’의 행동은 실은 사전에 준비된 것이었고 계획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예수님이 장사(葬事)되는 날을 대비해서 그분의 몸을 준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지금 하나님의 신탁(神託)을 말로써가 아니라, 행위로써 그려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마리아’의 모습, 즉 선지자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그림 그려주기는 사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시로 사용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나 ‘이사야’의 기이한 행동들이 다 여기에 속한다 하겠습니다(참고. 사 20; 렘 13).
이날은 “유월절” 전야(前夜)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마지막 유월절인 셈입니다. 과연 ‘마리아’가 자신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유월절”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녀의 행동은 상징이었고, 예언이었으며, 신탁이었습니다. ‘요한’ 화자조차도 그 모든 일이 성취되고 난 후에야 그 사건의 의미를 회고하듯 써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과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녀의 행동은 무모함이 아니라 신중한 통찰력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유월절의 축제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연인(戀人)의 참된 기분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비탄에 잠기신 그분의 기분에 기꺼이 동참한 것입니다(눅 12:50). 그래서 늘 선생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려고 하는데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인다면 나 역시 ‘마리아’처럼 선생님의 기분에 동참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사건이 우리에게 격려를 주는 것은 그와 같은 나의 헌신이 진정으로 “그분을 만족시킨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한 일은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그 거룩한 사역에 자신도 동참하고 봉헌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이 그의 사역에 나를 동참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고, 또 기뻐하신다는 사실은 나를 가슴 벅차게 하는 일입니다. 나는 <성경>을 알고 묵상하는 일에, 그리고 그 말씀을 적용하는 일에 얼마나 시간을 쏟고 있습니까?
나는 세상을 위한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한 예언자요, 선지자입니다. 세상이 나를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해서, 세상이 내가 하는 일을 기뻐하거나, 그 일을 하는 나 또한 늘 기쁠 수만은 없습니다. 그날 ‘마리아’와 함께 식사 자리에 모여 있던 제자들. 왜 이들은 ‘마리아’의 헌신이나 선행을 마음속으로부터 기뻐하지 못했던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일을 다른 사람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다’처럼 현실을 따르는 사람들이나, 기독교 사역을 순전히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우리와 신앙생활을 같이 하는 제자들로부터도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희생정신에 찔림 받아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의 시간이나 재능이나 재물로 자신의 다른 과업을 수행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는 고집스러움과 불굴의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 향기를 맡게 하라. 이처럼 하나의 단순한 행위가 세상의 구석구석에 있는 모두에게 빛이 되고 향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면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한 일은 아무리 시시해도 파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는 상(償)을 받기 위해서 구제하거나 헌금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 새겨진 율법 즉 성령의 법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달라고 떼쓰는 철부지가 아니라, 넉넉하게 주기를 원하는 성인(成人)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가장 아끼는 것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분께서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헌신합시다. 지금 그렇게 합시다.
2. 왕의 입성
사이몬 몬티피오리(Simon Montefiore)는 그의 저서 <예루살렘 전기>에서 ‘예루살렘’ 최후의 날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후 70년 7월 하순, ‘유대’인 달력으로 ‘압’월 8일 ‘예루살렘’을 넉 달째 포위하고 있던 로마의 ‘디도’ 장군은 전 군대에게 새벽 시간 성전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 다음 날은 500년 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총 6만 명의 로마군과 현지 지원군으로 구성된 공격군은 이날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있었다. 성벽 너머에는 50만에서 백만에 가까운 굶주린 유대인들이 생지옥 속에서 살고 있었다. 수천 구의 시체들이 햇빛 아래 썩어가고 있었고, 악취는 진동하였으며, 개와 자칼 떼가 인육으로 만찬을 벌였다. 산 자들은 우분, 가죽, 신발이나 묵은 건초를 먹었으며, ‘마리아’라는 한 부유했던 여성은 돈과 식량이 다 떨어지자, 결국 미쳐서 자기 아들을 죽여 반은 구워 먹고 반은 나중을 위해 남겨두었다. 구미를 당기는 맛있는 냄새가 온 도시에 퍼졌다. 반란군이 냄새를 맡고는 그 집으로 들이닥쳤지만 살인청부업자조차 반 토막만 남은 아이의 시체를 보고는 온몸을 떨면서 물러났다.
저자는 또한 ‘예루살렘’ 점령 이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려주고 있습니다:
모든 죄수나 탈주자는 십자가에 매달렸으며, 매일 500명의 ‘유대’인이 그렇게 처형을 당했다. 도시 주변의 올리브 산과 바위산은 십자가로 빼곡히 들어차 더 이상 십자가를 꽂을 공간도 없었고, 만들 나무도 없었다. (중략) 어느 누구도 ‘예루살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디도’는 수천 명의 ‘유대’인 죄수들이 목숨을 잃을 때까지 야생동물과 싸움질하는 것을 구경했다. 며칠 후에 ‘가이사’의 한 원형 경기장에서는 2,500명이 죽은 것을 구경하고, ‘베이루트’에서 오락삼아 학살을 한 다음 개선식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갔다.
여기서 ‘디도’ 장군은 그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된 인물입니다. 저자의 글에서 보듯이, 개선장군이 점령지에 입성하여 가장 먼저 할 일은 성 안에 남아있는 반군(叛軍)들을 색출하여 소탕하는 것입니다. 즉 그는 살아남은 자들을 죽이기 위해서 입성하는 것입니다. 전쟁 중 반군의 저항이 거세었을수록, 그리고 그 전쟁이 길어 점령군의 피해가 컸을수록 복수는 더욱 잔인해지기 마련입니다.
이 같은 대 참극이 있기 30여 년 전에도 ‘예루살렘’ 입성을 했던 또 다른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왕이었습니다. ‘요한’ 화자는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는 이미 왕이 있었습니다. 그 악명 높은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리파 2세’입니다. 이 사람은 실은 유명무실한 왕이었던 것이, 그는 로마 계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힘을 빌려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대한 항전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 ‘유대’인들을 독려하여 로마에 대항하여 싸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의 편에 서서 반군들을 소탕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었습니다.
말이 아닌 당나귀로. 아무튼 지금 “이스라엘의 왕”이 당나귀를 타고 자기 나라의 수도(首都)에 입성(入城)하고 있는 이 장면은 ‘디도’ 장군의 그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종려주일”(the Palm Sunday)로 알려져 있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분의 탄생과 죽음과 그리고 부활 사건 만큼이나 유명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종려나무(the palm tree)를 들고 나와 그분의 입성을 환영했다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우리의 화자는 ‘예루살렘’ 주민의 편에서 이날의 분위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12절). 아마도 그곳 주민 중의 한사람으로부터 들었던 바를 훗날 그의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기대와 환호 그것이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3절).
과연 어느 시대, 어느 백성이 자신들의 지도자를 이처럼 열렬히 환영할 수 있을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 지도자를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은 대개 기대 반 의심 반일 텐데 말입니다. 오늘날 목사를 바라보는 교인의 마음과 비슷하다 할까요? 왜냐하면 대체적으로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소위 “거룩한 소명”과 “개인적 욕망”을 구별하기가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오스 기니스’가 쓴 <소명>이라는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한 장을 할애하여, “고상한 마음이 짓는 탁월한 죄악”에 대해서 아주 신랄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내가 모두(冒頭)에 소개했던 <예루살렘 전기>의 저자도 ‘예루살렘’에 대해서 평가하면서, 이 도시가 거룩한 도시이긴 하지만 항상 미신과 편협한 신앙이 판을 쳐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진실은 많은 경우 신화(神話)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역사를 두고 이 도시에 관한 사실들을 수없이 왜곡하였으며, 종교적, 민족적 편견을 합리화하고 제국의 야욕을 정당화 하는데 이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인, ‘팔레스타인’인, 그리고 기독교인 할 것 없이 모두 이러한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종려주일, 그리스도의 입성을 환영하고 환호하는 이들 주민인들 무엇이 달랐겠습니까! 과연 그들은 이 초라하고 별 볼 일도 없어 보이는 한 청년이 그들이 기대하던 거룩한 ‘메시아’, ‘이스라엘’의 소명과 기대를 충족시켜 줄 왕으로 믿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기에 성 밖까지 달려 나와 연도에서 그를 그처럼 열렬히 환영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가 자신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주기를 진정 바랬던 것일까? 그들이 외치는 “호산나”의 함성은 실은 “우리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해결해 주십시오”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저 로마 제국주의를 괴롭히고 멸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정말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주십시오”가 아니겠습니까? “이제부터 ‘로마’ 제국이 아니라, ‘이스라엘’ 제국을 세워주십시오”가 아닐까요? <시편>의 시인이라면 이와 같은 기도를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와 유사한 환호를 들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말이지요. 예컨대 이런 것들입니다: “대구를 거룩한 예루살렘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을 하나님에게 바치도록 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그 이후의 대책(對策)이 들리지 않습니다. 나도 왕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까? 우리 역시 당나귀를 탄 임금님 앞에서 종려나무를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는 왕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공관복음>은 이 대목에서 ‘요한’ 화자가 생략하고 있는 다른 이야기를 추가하면서, 이날 ‘이스라엘’의 왕의 기분은 어떠했는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감람’산에 올라 화려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며 우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눅 19:41). 그분께서 얼마나 무거운 마음으로 그 도시를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셨는지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도시의 비극적인 불신앙과 다가올 대학살로 인해 지금 그분은 전율하며 슬퍼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그런데 당나귀에 종려나무라니요! 이 둘은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궁합인 것입니다. 종려나무는 ‘다윗’의 깃발을 휘날리며 승승장구 진격하는 기병부대 앞에서 흔들면 제격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정치 지도자는 힘과 권능을 가진 자로 늘 말(馬)과 병거를 몰고 다니는 자입니다. 정치는 힘이며, 조직이며, 세력이며, 돈입니다. ‘솔로몬’도 말과 병거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지 않았습니까(왕상 4:26)! 훗날 로마에 대항하여 독립 왕조를 세운 ‘유다 마카비’도 그랬습니다.
죽기 위하여. 사실 역사적으로 ‘예루살렘’(넓게는 팔레스타인 전체)은 ‘솔로몬’의 통치를 제외하면 늘 열방들의 힘의 각축장이었습니다. 남으로는 ‘이집트’, 북으로는 ‘시리아’, 그리고 동으로는 ‘바벨론’이나 ‘페르샤’가 주변의 열강들이었습니다. 그 후 로마가 세계의 강자가 되었을 때, 이 지역은 로마 총독의 지배 아래 있었고, 이어서 ‘비잔틴’의 지배는 성지탈환이라는 명목 하에 8차례에 걸친 십자군 운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1517-1917년까지 약 400년에 걸친 ‘오스만 터키’가 지배하고 있는 동안 이 지역은 거의 완전히 ‘이슬람’화 되는 듯 했습니다.
‘이슬람’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7년 “팔레스타인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자인 영국의 ‘알렌비’ 장군과 관련한 일화는 지금도 유명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말을 타고 입성하면서, 예수님이 살아 걸어 다니시던 이 땅을 말을 타고 달릴 수는 없다고 하면서 말에서 내려 걷자, 그를 따르던 병사 모두 걸어서 그 뒤를 따랐다고 합니다. 우습긴 하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의 당나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가랴>가 일찍이 당나귀의 의미에 대해서 예언한 바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당나귀 새끼를 타고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지자는 그 비법이 겸손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예수님은 ‘솔로몬’이나 ‘유다 마카비’나 ‘알렌비’ 장군처럼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개선장군으로 입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 안에서 벌어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입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승리는 적을 죽여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으로써 이루는 승리입니다. 이 원리는 무슨 대단한 신비 같지만, 실은 우리가 일상에서 늘 경험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내가 죽지 않고서는 상대를 결코 죽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 잠언에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상대의 목을 비틀어서, 무슨 논쟁을 통해서, 그를 설득시킬 수도 없고, 마음으로 항복시킬 수가 없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이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가 그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바로 이 악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죽이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유일한 방법이 자신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당나귀를 탄자와 말을 탄자가 싸우면 결과가 어떻게 될 지 뻔 하지 않습니까!
화평을 이룸. 그분께서 죽어서 이루어놓으신 결과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10)
허울뿐인 이름 ‘예루살렘’을 진정한 ‘예루살렘’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샬롬’ 즉 “화평”이었습니다. 성 내 주민들이 그렇게 열렬히 원했던 해방과 구원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움이 달아나고 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의 화자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15절).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에 이루어질 왕의 나라의 성격에 대해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롬 14:17).
그러나 대개 대부분의 진리가 그러하듯이, 하나님 나라의 화평은 좌우에 날이 선 칼과 같습니다. 그분이 가져다주는 “화평”은 역설적으로 분열을 가져오게 하는 화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쟁과 분열을 주기 위해서 왔노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 무리는 일대 항전(抗戰)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왕을 죽이는 것이 곧 자신들을 영원히 죽이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종교인들이 그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프란시스 쉐퍼’가 지적한대로, ‘아담’ 이후 인류의 역사는 분열과 분리의 역사였습니다.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이 두 계보는 타락 이후 지금까지 간단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뱀의 자식이라고 지칭한 ‘바리새’인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가 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19절).
이런 점에서 볼 때, 그 왕은 단순히 이스라엘만의 왕이 아닙니다. <스가랴>가 예언했던 대로,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에(슥 9:10), 팔레스타인의 한 지역, 한 민족의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조차 인정하고 있듯이, 그분은 진정 “온 세상의 왕”이 될 것입니다(19절). ‘헬라’인들이 그를 찾아와 만나기를 간청하고 있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한 암시가 될 것입니다.
예수는 나의 왕입니까? 나는 진정 그분과 화평 즉 화해를 이루었습니까?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나는 지금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나는 사랑하는 자를 살리기 위하여 죽어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매일 그리스도와 싸워 그를 이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3. 그 때가 옴
“미녀일수록 더 자주 열등감에 빠진다.” 이 말은 무슨 잠언 집에서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백설 공주의 계모(繼母)를 생각하며 본인이 만들어 본 말입니다. 이 계모는 단 하루라도 거울이 그녀에게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화가 나고 불안합니다. 말하고 글 쓰는 것을 평생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도 이 계모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늘 청중이나 또는 독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하며 말을 하고 글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의 중에는 행여나 학생들이 잘 알아듣지 못했을까 하여 수시로 질문을 하거나, 질문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는 아주 맥이 빠져버립니다. 질문은커녕 자기들끼리 소근 대며 웃고 낄낄거릴 때에는 화가 치밀어 아예 그들을 강의실 밖으로 쫓아내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미녀에 대한 예의는 아름답다고 칭찬해 주는 것이고, 선생에 대한 예의는 경청하고, 수시로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입니다. 내가 가장 자랑하고 뽐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으면, 서운함을 넘어서 화가 나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어느 한 분야에서 평생을 두고 연구를 했는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느끼는 기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학 교수는 연구 결과를 해당 학술지 등에 논문으로 발표를 합니다. 그 학술지가 세계적으로 유명할수록 내 연구 결과를 인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나를 알아주는 학자들이 늘어갑니다. 이렇게 지명도가 올라가면, 다른 학자들이 발표하는 논문에 대해서 평가를 해달라거나, 또는 내 분야에서 최근 일어나고 있는 연구 방향이나 경향 등에 대해서 총설(叢說)과 같은 글을 써달라는 요청이 오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아예 해당 학술지의 편집위원이 되어 달라고 위촉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본인에게는 아주 자랑스럽고 흐뭇한 일이지요. 세상이 나를 인정하고 알아주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여기 저기 교회에서 설교 요청이 들어오면 사실 싫다는 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설교하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평생을 살았는데, 어느 누구로부터도 설교 요청을 받아 본 적이 없다면 솔직히 인생을 헛살았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요? 이는 마치 개업은 하였으나, 아무도 주문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기분은 어떨까요? 교회를 다닌 지 십 수 년이 넘었는데도 주변 어느 누구로부터도 예수가 누군지 설명 좀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본 적이 없다면 말입니다.
예수를 뵙고자. 여기 ‘헬라인’ 몇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계 ‘헬라’인이 아니라 그야말로 순순한 이방인들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 온 목적은 예배였다고 말합니다(20절).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온 것이지요. 예배라고 한다면 당연히 만남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과 예배를 받는 하나님 간에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를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그 무슨 헌신이나, 결단이나, 희생으로 생각합니다만, 실은 그 반대인 경우가 더 정확하다 할 것입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것이며, 그러므로 예배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지요.
한 예로, 예배 시간에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주셨던 것처럼, 허무와 무의미 속에서 죽어있던 나를 소생시키시며,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양식과 치료제를 제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예배 시간에 일어납니다. 따라서 그 말씀을 제대로 받아먹은 자라면, 당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롭게 헌신하고 결단하는 자리로 나아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섬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주는 음식을 늘 내뱉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나는 어제 살던 모습 그대로 오늘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음식을 집어삼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먹지 않으려는 아이와 먹이려는 부모 사이에 늘 싸움이 있듯이, 나와 그분 사이에도 늘 이기고 지는 싸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기는 쪽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감격이 없고, 새롭지가 않습니다. 먹은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 배고픈 상태로 왔다가 여전히 배고픈 상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먹지 않으려는 것은 그 음식이 맛이 없기 때문입니다. 맛이 없는 것은 어머니가 음식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즉 설교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 더 큰 원인은 다른 가공 음식들에 더 길들여져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영양가가 있고 없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말씀도 정말 재미없습니다. 그게 그 소리 같고, 늘 윤리․도덕적 교훈이나 잔소리 같고, 따분하고 지루합니다. 그리고 실제 살아가는 일에는 별 상관도 없고, 도움도 되지도 않습니다. 이런 음식을 누가 먼저 와서 먹겠다고 조르겠습니까! 진실로 배가 고파 뱃가죽이 등바닥에 달라붙을 정도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갈 때까지 가 본 사람이 아니라면, 잘 찾지 않는 책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 5:3)고 했을까요?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으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라고 했을까요? 지금 이들 ‘헬라’인 예배자들은 몹시 배가 고픈 것입니다. 그들은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21절). 그들은 자청해서 먹을 것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요 축복인 것이지요! 누가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지금 이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 모두는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우리와는 달리 예수께로 직접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뵙기를 원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듯이 직접 찾아가면 될 일을 가지고, 그분의 제자들에게로 갑니다. ‘빌립’과 ‘안드레’입니다. 왜 하필 이 두 사람인가는 문제의 요지는 아닐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지난 번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사도들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로 등장한 바 있습니다.
항상 대답할 준비를. 아무튼 이 두 제자의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화자는 그들이 “예수께 여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22절). 글쎄요, 화자가 여기서 무슨 큰 의미를 드러내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교훈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이 장면을 음미해 보기로 합시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아마도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어볼 요량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통해서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빌립’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가 어떤지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자기가 나서서 설명해 주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동료 ‘안드레’를 찾아갑니다(참고 1:44; 6:5-9).
그런데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만일 이들이 나에게도 같은 요청을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들이 나에게 예수를 만나기를 원한다든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만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기다렸다는 듯이 청산유수(靑山流水)로 그들의 갈증과 목마름을 해결해 줄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그러나 평생을 교인으로 살았는데 아무도 나에게 예수에 대해서 물어보는 자가 없다면, 내가 마땅히 대답해 줄 것이 없다면, 나는 정말 교회 헛 다닌 것은 아닐까요? 이 두 제자가 자신들의 선생님께서 이방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몰랐던 것처럼 말입니다. 평소 선생님의 가르침이나 행동을 통해서 충분히 대답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들의 상상력은 빈약했습니다. 공부를 잘 못한 것이 아니라, 상상하지를 않았습니다.
상상은 모험을 낳습니다. 상상은 도전을 낳습니다. 상상은 심약하고 소심한 나를 뻔뻔하고 건방지게 만듭니다. 상상은 창조하게 합니다. 상상은 공상(空想)을 현실이 되게 합니다. “아직”을 “이미”로 만들어줍니다.
그 때가 옴. 예수님께서 지금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때가 왔도다”(23절). “온 세상이 그를 따르고 있다”고 절규하던 ‘바리새’인들의 예언이 기막히게 적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참고. 19절). 그를 만나고 싶어 찾아온 ‘헬라’인들을 보자, 예수님의 가슴은 요동치고 폭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아니던 그 때”가 이제 마침내 왔고 이제 지나가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마침내 이 책의 중심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때”는 단순히 시간상의 한 시점만을 의미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 기자는 복음서의 중심적인 위기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위기는 20장 중반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이 때란 단순히 시간상의 한 시점만을 의미할 수는 없습니다. “인자가 자신의 원래의 영광을 얻게 되는 그 때”(23절)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신 분, 그리고 자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자신이 먹을 양식으로 삼았던 그분, 바로 그분이 더할 수 없는 순종의 한 행위를 통해서 아버지께 최종적으로 영광을 돌리실 바로 그 때가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의 이러한 행위에 대한 답으로 아들을 영광으로 관 씌우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때를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준비함도 없이, 그저 세월이 지나기를 기다려왔던 것은 아닙니다. 항상 그 나라를 가르쳤고, 전했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앞당겼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선생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무슨 재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한 가지 처방을 내려줍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4. 必死則生, 必生則死
군사 독재 정권 시절에 대학에서 소위 운동권에 몸담았던 학생들 중 상당수가 현재 국회나 사법부에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거나, 아니면 교사가 되어 전교조에서 일종의 정치교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 대한 동기를 물어보면, 그 자리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고 자신의 이상과 정신을 이루기 위해서였다는 대답을 종종 듣게 됩니다.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 필부필부(匹夫匹婦)로 살면서 이런 저런 세상의 부조리나, 부정과 부패, 무사안일과 무능력, 그리고 소위 사회 지도자급 인사들의 권력 남용과 타락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좌절하고 분노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소위 높은 지위나 위치에 올라 이 세상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결국 억울해서 출세해야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동안 억울해서 출세를 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을 터인데, 세상은 크게 변한 것 같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더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대한민국만큼 소위 ‘와이트컬러’ 범죄가 많은 곳도 드물 것입니다. 언필칭 사회 지도층에 속한다는 사람들의 범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비리나 뇌물 스캔들이 신문이나 방송을 장식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우리의 영웅들이 선택하는 대학의 학과들은 소위 인기 학과들 즉 법대나, 의대나, 상경 대학들입니다.
그러니까 통계적으로 보자면 이들 영웅들이야말로 이 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게 해온 주범의 노릇을 해 온 것입니다. 우리의 일그러진 영웅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사실 의사나 변호사들의 탈세는 더 이상의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선진국에서는 탈세를 살인에 버금가는 중죄(重罪)로 다루고 있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탐욕은 탈세를 넘어 살인까지 불사하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개 이들 소위 출세했다는 사람들의 인생 유전을 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수석은 도맡아하며, 그 성적으로 자신의 전공이나 적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법대나 의대에 지원합니다. 졸업 후 일정한 자격시험이나 국가고시를 거쳐 안정된 수입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노력한 결과에 따른 당연한 보상을 받은 것이니 칭찬받고 박수를 받아야 합니다. 한 우물을 열심히 판 결과일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입니다. 목적을 이루었으니 그 정도에서 만족하고 보람되게 살면 좋을 텐데, 그 이상을 원하기 시작합니다. 즉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재력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집니다. 정치야말로 그와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적합한 영역일 것입니다. 수 없이 많은 이익단체들이 국회의원을 상대로 로비를 벌이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 영향력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이 좋아 로비이지 우리나라에서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지는 로비가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입니다. 대개 로비라는 것이 다수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다행이겠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자신만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반칙과 불법이 판을 치게 됩니다.
그나마 이것이 드러나지 않으면 다행이겠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대개의 경우 언론에 알려지고,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가, 재판을 받아, 결국 감옥행으로 끝이 납니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출세는 수많은 경우 감옥행으로 마감하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려다 자신이 바뀌어버린 것이지요. <성경>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를 든다면 ‘모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구하겠다는 그의 동기는 순수했지만, 열정이 지나쳐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 도피로 끝나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도피자로, 살인자로, 실패자로 여생을 보냈겠지요. ‘가인’처럼 말입니다.
영광의 원리. 이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모세’뿐이겠습니까! ‘예루살렘’을 보고 절망하고, 통곡하시던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께서 왜 통곡하셨고 분노하셨습니까? 그 도시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그분의 꿈이었고, 비전이었으며, 소명이었던 것이지요.
‘존 스토트’ 목사님은 “비전은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분노가 없는 사람은 실패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비전은 환상이고 상상입니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는 것을 보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지금 현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현재의 모순, 지금의 내 모습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성경>도 “내 백성이 꿈이 없어 망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족>의 “목회 서신”에서 본인은 현재의 불만을 해결하는 방식에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참고. 제 1권 2호). 예수님은 ‘모세’와는 달랐습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네 이놈들 내가 가서 모두 쓸어버리리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요량이었다면 공회에 들어갔겠지요. 그러나 그분은 말(馬) 대신 당나귀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이방인들을 보고 느닷없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24절).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을 가진 자의 태도로 보기 어렵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분은 이방인들이 찾아온 것을 놓고, “그 때”가 왔으며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23절). 당나귀와 영광, 죽음과 영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궁합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은 궁합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23). 아주 불쾌하고 어리석다는 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내가 살아 있어야 일이 되는 것이지 죽고 나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죽은 호랑이보다 살아있는 강아지가 더 낫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시편>의 시인도 “음부에서 주를 찬양할 자가 누가 있나이까”하고 반문(反問)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희생시켜서 성취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상 없다는 선언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을 개혁하고 바꾸기는커녕 개인의 목표도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방법을 택하는 것이 성공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즉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죽이고 희생시키는 것 말입니다. 즉 나 아닌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희생시키면 됩니다. 그 사람을 충동질하고 부추기면 됩니다. 그 일환으로 단체나 조직을 만들어 그럴듯한 구호를 내세우며, 끊임없이 타도할 적을 만들어 대중의 증오심과 적개심을 유발합니다. 희한하게도 사람들은 여기에 잘 속아 넘어갑니다. 공산혁명이 이와 같은 사례의 전형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경우 이들 지도자들은 혁명이 성공했을 때에는 앞 다투어 영광의 자리를 누리려 하지만, 실패했을 경우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밀알의 DNA, 즉 “영광의 원리”가 그분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우리 모든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어록(語錄)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인류의 보편적 지혜를 담고 있는 금언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임전훈(臨戰訓)에도 등장하고 있는 말입니다. 불과 13척의 전선(戰船)을 이끌고 그 유명한 명량대첩(鳴梁大捷)을 이끌어내기 전에 휘하 장병들을 독려하며 하신 말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우리 역사를 조금만 돌아보아도 이처럼 의로운 죽음을 자초한 분들은 부지기수(不知其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수시로 언론과 방송에서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의로운 행적에 대한 보도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의인들의 면면도 각양각색입니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평생을 염소나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한 할머니에서부터, 유명 연예인이나 체육인 및 사업가나 학자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이분들의 사상이나 종교적 배경도 이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합니다. 무교에서부터, 불교나, 천주교, 그리고 기독교 등 전체를 망라하고 있습니다. 이들 개개인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주는 밀알들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의로운 한국인들은 국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십 년 전 미국의 젊은이들이 평화봉사단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봉사와 희생의 본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대한민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국제 협력단”을 위시한 이런 저런 기관의 이름으로 오대양 육대주에 흩어져 거룩한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활동도 단순한 종교적 선교에서부터, 의료지원, 우물 파주기, 집지어주기, 학교나 도서관 지어주기, 등등 실로 다양하고 광범위합니다. 개중에는 취업을 위한 소위 ‘스펙’ 쌓기로 참여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대부분 그들의 동기는 순수합니다. 나는 바로 이들과 이들의 활동이야말로 미래 한국의 큰 자산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우리의 활동이 지난 세기 열강의 제국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내 것을 강요하고 남의 것을 빼앗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누고, 섬김으로써 세계의 지도자로 부상(浮上)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스스로 낮아짐으로써 높임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대한민국, 특히 청년 한국의 DNA는 지배하고 군림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을 부러워할지언정, 두려워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세계 여러 가난한 나라에서 우리를 배우고 친구가 되고자 속속 방문하고 있습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만 하더라도 그분의 직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이나 갈등, 그리고 지원과 격려가 필요한 곳에는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그의 공적으로 그분은 올해 서울평화상을 받게 됩니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오히려 외국에서 더 잘 알려져 있는 의로운 죽음도 있습니다. 매년 일본에서 열리고 있는 한 추모행사가 그것입니다. 김수현이라 불리는 한 한국인 대학생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추도식입니다. 이 학생은 일본 견학 여행을 하는 중에 한 전철 선로에 빠져 죽음 직전에 있던 한 일본인을 구출하고 대신 열차에 치어 죽었습니다. 한국에서 기리지 않는 죽음을 일본에서 기리고 있다는 사실이 다소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무상이 아닌 유상. 그러면 이들 밀알들이 자신들이 행한 숭고한 행적에 대하여 받는 보상은 과연 무엇일까? 이순신 장군이나 김수현 학생처럼 단순히 후세 사람들의 추앙이나 칭송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할까?
그것도 없는 것보다야 백배 낫다는 생각입니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으니 ‘가롯 유다’로 후세에 길이 기억되기보다는 ‘마리아’로 기억되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이완용으로 기억될 것인가, 아니면 안중근 의사로 남을 것인가의 차이보다 더 크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의 칭송보다 더 큰 보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이 받게 될 보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를 섬기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서 높이실 것이다”(26절). 참 흥미롭고 놀라운 약속입니다. 특히 이 구절의 후반이 그렇습니다.
매년 스승의 날이면 울산에서 과일 농사를 하는 한 부부가 본인이 재직하고 있는 학과의 교수님들 앞으로 과일 한 상자씩을 보내줍니다. 그 부부의 아들이 우리 학과 출신으로서 지금은 졸업하여 모 기업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졸업을 한 지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잘 교육시켜 좋은 곳에 취업하게 해주어 고맙다는 표시이겠지요. 이것이 부모의 심정일 것입니다. 내 자식에게 잘해주는 사람, 특히 내 자식이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힘이 되어주고 함께 어려움을 겪은 사람을 어찌 모른 체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아버지, 즉 하나님도 같은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 아들과 함께 고초를 겪었으며, 그 아들 때문에 이유 없이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예수님의 아버지께서는 그냥 모른 체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중에 아들을 높이는 그 자리에 내 이름도 함께 부르며 높여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높여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황송하게도 나를 존경한다는 말입니다.
혹자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이렇게 비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천국에서 무슨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글쎄요. 나도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이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천국에서의 보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니, 어떤 형태로든 오늘의 행위와 행적에 대한 보상과 평가가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치사하고 쩨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우리 학과 교수님들 중에서 울산에 사시는 그 부모님에 대해서 아무도 치사하다느니, 쩨쩨하다느니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천국의 법칙과 세상의 법칙이 늘상 다른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땅에 떨어지는 밀알”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파할 때 나도 아파한다는 말입니다. 그분께서 분노하고 슬퍼할 때 나도 동참한다는 말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당하는 억울함이 있습니까? 교회나 목장을 생각할 때마나 한숨이 나옵니까? 어느 한 사람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답답함이 있습니까? “내가 왜 이 따위 보잘 것 없는 일에 시간과 돈과 정열을 바쳐야 해?” 이런 짜증과 분노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땅에 떨어지는 밀알”이 되고 있는 중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중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나를 흠모하고 높여줄 준비를 하고 계신 겁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엄청난 약속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내 마음에 깊이 와 닿지는 않습니다. 이는 마치 미래에 내가 받게 될 수십 내지 수백 배의 배당금을 보고 지금 내가 받는 월급의 절반 이상을 뚝 떼어 보험이나 적금에 가입하라는 달콤한 유혹처럼 들립니다. 그 약속이 아무리 사실로 드러난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 그 많은 돈을 따로 떼어놓을 여유가 없습니다. 현실이 너무 각박합니다. 평소 젊어서부터 지속적인 운동을 하는 것이 건강은 물론 장수(長壽)에도 좋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스클럽에 가보면 대부분 나이 든 사람들입니다. 즉 건강한 내일을 위해서 오늘 땀을 흘리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평소 나눔이나, 희생이나, 섬김이나, 봉사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늘 하는 사람들로 한정되어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가수 김장훈과 서경덕 교수는 매년 거금을 들여 미국 뉴욕의 타임스퀘어에 독도 광고를 올립니다. 그 일도 모자란다고 생각했음인지 김장훈 씨는 수시로 수억 원의 재산을 복지재단이나 공익재단에 내놓습니다. 그리고 서경덕 교수는 한국형 뮤지컬 <명성황후> 제작에도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었습니다. 지금은 국내외적으로 유명하게 되었지만, 그 뮤지컬이 처음 제작될 때만 하더라도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이 전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일종의 사명감으로 그 일에 매달렸습니다.
남이 아닌 자신. 도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러는 것일까? 미래의 보상이나 칭송을 기대하며 그랬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한두 번으로 족하지 않을까? 아무리 대의명분이 있는 일이라 해도 그처럼 힘든 일을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선한 일은 늘 하는 사람이 하는 것일까?
이들에게 물어보면 그 일이 즐겁고 기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 말에 따르면, 행위에 따른 보상이 즉각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일 천국에서가 아니라, 바로 오늘 내 안에서 천국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축 늘어져 있던 내 인생에 생기가 돌고, 활기가 넘쳐나고, 새로운 계획과 도전이 끊임없이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우리 누구나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원하는데, 그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희생이니 봉사니 하는 것들이 결국은 자기중심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누구나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이기적이지 않은 존재가 없습니다. 우주의 모든 별들조차도 그 힘 즉 중력(重力)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늙어 피부가 아래로 처지는 것도 지구의 중력이 아래로 즉 그 중심을 향하여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항상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분의 영광, 그분의 이름에 늘 예민하게 반응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을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으로 구분하려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입니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스캇 펙’(M. S. Scott) 박사님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나가려는 의지.”
이분의 정의에 따르면, 우선 사랑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정신적 성장이 그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인격적 성숙과 성장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일방적이 아니라 순환적 과정입니다. 타인의 성장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통해서 나 자신의 한계를 성공적으로 극복해 갈 수 있으며, 이전보다 엄청난 존재로 성장해 나갑니다. 이것이 나 자신을 확대해 가는 과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나는 이미 이전의 내가 아닙니다. 고도로 성숙한 부모가 되어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남을 사랑하는 것과 자신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적 발전에 기여했으니 같은 인간인 나의 성장에도 기여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남을 사랑할 수가 없으며, 자기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녀가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자라도록 훈련시킬 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정신적 발전을 위해서 자신의 정신적 발전을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자기 훈련을 포기하면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훈련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분의 정의에 따르면, 사랑에는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을 하나의 의지적 행동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행동은 단순히 욕망과는 다릅니다. 사랑은 그래서 사랑이라는 행위로 표현되는 만큼만 사랑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의지는 또한 선택을 내포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나는 내 아내를 반드시 사랑해야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가는 그녀를 사랑하기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의지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한 남자에서 남편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두 아이의 애비로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내 인생의 외연(外延)이 그만큼 확대된 것이었습니다.
필요가 아닌 성례. 이것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성례(聖禮)와도 같다 할 것입니다. 성례란 침례와 주의 만찬을 포함하고 있는데, 솔직히 우리는 이들 성례가 우리의 구원에 필요해서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거듭나기만 하면 됩니다. 성례와 주의 만찬이 우리의 구원에 필요해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례는 왜 행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명령이므로? 맞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우리의 인생을 너무 무미건조하게 만듭니다. 매사에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무슨 컴퓨터와 같은 존재로 나를 전락시켜버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행하도록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잿빛 하늘과도 같은 우리 인생에 색깔을 칠해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무성(無聲) 흑백영화와 입체음향 천연색 영화의 차이를 압니다. 사실 두 영화의 내용은 똑 같습니다만, 두 여화를 대하는 우리의 반응이 다릅니다. 우리는 입체음향 천연색 영화를 감상하면서 우리의 지성과 감성은 흥분하고 역동하며 환호합니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이 해마다 유월절을 행하는 것은 ‘야훼’ 하나님의 이름과 행위를 기억하고, 회상하고, 결단하고, 재 헌신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받는 구원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분이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적 있습니다. 우리의 성례가 바로 그러한 목적으로 제정된 것입니다.
오늘 내가 행할 성례란 다름 아닌 “하나의 밀알”로 썩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성례입니다. 무미건조한 내 인생을 활기차고 의미 있게 만드는 성례입니다. 그것이 내 구원에 필요해서가 아니라 매일 매일의 무의미와, 허무와, 상실로부터 벗어나게는 해 줄 것입니다. 즉 매일의 삶에서 나를 구출하고 구원해 줄 것입니다.
5. 에필로그(1)-믿을 수 없는 불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히는 것과 같은 절망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참고 설명하고 또 설명하는 데도 알아듣지를 못할 때가 그런 경우입니다.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이 경우만이 아닙니다. 내 연구실에는 칠판이 하나 있습니다. 대학원생 각자가 매일 수행할 실험 계획을 적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그래서 출근하면 가장 먼저 그날의 하루 계획을 적는 것으로 시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매 주 토요일에는 주간 모임을 통해서 한 주를 정리하고 다음 주 계획에 대해서 발표합니다. 그리고 매 주 화요일에는 전 세계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발표한 연구 논문을 읽고 발표하는 모임도 가집니다.
나는 학생들의 발표나 계획을 근거로 연구의 진도나 진행 방향을 알 수 있고, 더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있어 좋습니다. 물론 가장 큰 유익은 학생 본인에게 있음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수시로 논문을 발표해야 하고, 또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학위 논문도 써서 제출해야 하는 당사자로서는 아무 계획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낼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외국의 경우와는 달리, 그냥 자신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면 졸업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학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졸업한 제자들이 취업을 한 후, 나중에 찾아 와서는 한 결 같이 재학 시절 중의 이와 같은 경험과 습관이 큰 도움이 되더라고 회고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태도나 방법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찾아서 수행함에 있어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없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동료나 상관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때에는 정말 흐뭇하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재학 중에는 이 일이 잘 안됩니다. 물론 몸에 습관으로 굳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간혹 한 번 씩 잊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내가 먼저 가서 물어보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잊고 지나치는 일이 거의 매일처럼 반복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매일처럼 뒤따라 다니면서 앵무새처럼 같은 주문을 반복할 수 있겠습니까? 피차 얼마나 귀찮고 짜증나는 일입니까?
처음에는 좋은 말로 하다가, 점차 짜증 섞인 잔소리로 변하고, 그러다가 고함이 터져 나옵니다. 이럴 때 마음 약한 여학생은 눈물을 글썽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면 다시 마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고무줄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듯,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기억상실증이 반복됩니다. 아, 좋은 습관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지루한 일인지요! 끈기와 인내와 열정이 없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가슴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금언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 이 단락에서 전해오는 화자 ‘요한’의 심정이 바로 그와 같다 하겠습니다. 적어도 본인에게는 그렇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그는 지금 두 번에 걸쳐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자신의 심정을 직접 드러내면서 이스라엘의 불신을 성토하고 있고(참고. 37-43절), 또 한 번은 예수님의 절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의 답답한 심정을 대신 분출하고 있습니다(참고. 44-50절).
하나님의 주권. 사실 우리의 화자는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믿음과 불신의 문제를 마치 동전의 양면을 번갈아 보여주듯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기적설화>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의 탁월한 문학적 솜씨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됩니다.
그는 먼저 이스라엘의 불신에 대해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결론인즉은, 이스라엘의 불신은 참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집요하고도 끈질기다는 것입니다. 매일처럼 일 일 계획 쓰는 일을 잊어버리는 내 제자들만큼이나 집요하고 끈질기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답답하였던지 그는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 하며”(37절). 이스라엘의 불신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도 아닌 이스라엘의 불신을 말입니다. ‘헬라’인들도 만나보기를 원하는 그분을 이스라엘이 배척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현대인들이 복음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도 없고,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그 많은 기적들을 한 번이라도 체험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교회나 교인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그 복음을 듣고 체험할 기회도 거의 없으니, 세상의 불신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달라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과 같은 시대를 살았고, 예수님과 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었으며, 종말에 대한 같은 소망을 지니고 있었으며, 예수님의 하나님이 바로 자신들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달라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는 달랐습니다. 그것도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라, 다름을 인정할 수 없어 죽여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로 달랐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인정할 수 없어 죽였던 것만큼이나 밉고 꼴 보기가 싫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이처럼 한사코 믿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앞에서 우리는 공회 지도자들의 불신과 관련해서 인지부조화 이론이나, 진영논리, 그리고 선택적 노출 등으로 이해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불신의 원인이나 책임을 이스라엘의 편에서 찾아 보려했습니다.
하지만 ‘요한’ 화자는 그게 아닙니다. 그는 우리와는 정 반대편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편에서 그 대답을 찾고 있습니다. 그 대답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불신은 기적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으며, 그 기적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신 것이라는 대답입니다. 예수님이 거부당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이지요.
그 근거로 화자는 그 유명한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40절, 사 6:10).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가 과연 이 본문을 예수님에 관한 예언으로 이해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은 아닙니다. 그리고 과연 ‘요한’ 화자가 <성경>을 올바르게 인용하고, 해석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문제의 핵심은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적어도 ‘요한’ 화자에게 있어서, 이 본문만큼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는 구절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화자의 인식은 극단적인 운명 예정론으로 비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자신도 일찍이 그렇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 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6:44).
이처럼 역사가 하나님의 계시라면 적어도 ‘유대’인들에게는 역사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 화자나 ‘바울’ 사도의 <성경> 인용도 이와 같은 역사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비단 이 두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실은 이스라엘 모두의 역사관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역사란 항상 목적을 지닌, 즉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일어나는 필연일 뿐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그 유명한 선언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역사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 단순한 과거의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있어 “역사란 그의 이야기”(History is His story)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세 가지 구분만이 있을 뿐입니다. 흔히 ‘타낙’이라 부르는 그들의 <성경>은 <오경>과 <예언서>와 그리고 <성문서>의 ‘히브리’어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성경>에는 소위 말하는 <역사서>가 없습니다.
신실한 소수, 침묵의 다수. 여기서 다시 한 번 ‘요한’ 화자가 인용하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절규를 재인용해 봅시다: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38절). 이들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당연히 “아무도 없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화자는 이스라엘 모두가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소수의 충성된 무리”(the faithful minority)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무리 속에는 공회의 지도자들도 포함되어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42절). 어쩌면 이들 중에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도 포함되어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이 누구든 여기서 “신실한 소수”는 이미 이스라엘 일반 대중에게는 친숙한 개념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가 ‘아합’과 ‘이사벨’을 피하여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서 절망가운데 절규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4).
그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하셨습니까? “아니야,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신실한 백성 칠천 명을 남겨두었어”(왕상 19:18)라고 말합니다. 칠천 명은 당시 이스라엘 전체 인구수로 볼 때 지극히 미미한 숫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상징적인 숫자로서, “고작 칠천 명”이 아니라 “무려 칠천 명”이나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필요하고도 충분한 숫자라는 것이지요. “관리 중에도 믿는 자가 많다”는 ‘요한’ 화자의 전언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침묵하는 다수” 이스라엘은 도무지 핑계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불신은 이스라엘의 책임으로 돌려야 한다는 암시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있었다고 해서 “인간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둘은 양자택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동전의 양면의 관계에 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은 것입니다.
‘요한’ 화자가 신실한 소수를 거명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믿음과 희생에 관한 교훈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지자 ‘엘리야’의 경우에서 보듯, 역사 전반을 두고 신실한 자는 항상 소수에 속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 누구나 소수에 속하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침묵하는 다수에 속하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관리들 역시 그랬나 봅니다. 그들도 공동체로부터의 추방, 즉 “사회적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42-43절).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믿음의 대가는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는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의 평가를 더 선호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주님이 내 이름을 불러줄 것임을 기대하고 살아갑니다.
과연 그 일이 일어날까? 과연 내 기대대로 이루어질까? 그런 나에게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가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막 8:38);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눅 12:9).
이 말씀은 듣기에 따라서 현세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들이 훗날 예수님으로부터 받게 될 무슨 보복처럼 들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브루스 밀른’의 말대로,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제자란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즉 현세에서 주님을 부인하거나 침묵하는 사람을 어찌 하나님의 백성이라 인정할 수 있겠느냐는 강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서>는 이를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나는 어느 쪽입니까? 침묵하는 다수에 속해 있습니까? 아니면 소수의 남은 자들에게 속해 있습니까?
6. 에필로그(2)-예수께서 외쳐
이제 우리는 ‘에필로그’의 두 번째 단락을 읽고 있습니다. 앞에서 밝힌 대로, 우리의 화자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마무리하면서 이를 두 단락으로 나누어 요약정리하고 있습니다. 두 단락 모두에서 느껴지는 화자의 심정은 절박함과, 울분과, 그리고 답답함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화자 자신이 직접 이스라엘의 불신을 성토하고 있는가 하면(참고. 37-43절), 이곳 두 번째 단락에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예수님의 대중 집회(부흥 집회라고 할까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울분과 답답함을 간접적으로 분출하고 있습니다(참고. 44-50절).
이곳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대개 과학 논문이나 문학 작품들은 결론 부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소개하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이미 소개했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요한’ 화자 역시 이곳 ‘에필로그’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즉 서막 이후 지금까지 반복해서 강조해 왔던 핵심 주제들을 다시 한 번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며,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요한’ 화자가 여기서 보여주고 있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면 될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복음을 정리할 수 있을까? 이 책의 핵심 주제가 다름 아닌 복음이기에 물어보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며, 복음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스라엘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잘 알고 있었을까? 그들은 <잠언서>에서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두 말 하면 잔소리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잠언서>가 본래 ‘유대’인들의 것이 아닙니까? 그들의 지혜 전승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아무리 엄청난 지식과 지혜를 소유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여전히 미련한 자 일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한 한에 있어 이스라엘을 능가할 인류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자랑스러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자랑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롬 2:17-20).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있는 지식,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과연 타당하고 정확한 것이었을까? ‘바울’ 사도의 태도는 냉소적이고 회의적입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들의 지식은 착각이며 자기기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고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여기서 한 걸음 더나가 이스라엘이 자기도취로 말미암아 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1).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착각 속에 살아왔다고 하겠습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그들은 보았고, 만났다고 자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기껏해야 ‘시내’ 산에서 천둥과 번개 가운데 들었던 음성이 전부였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 19:6).
참으로 역설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름 때문에 볼 수가 없고, 그분의 음성은 기껏해야 나팔소리 정도로 들릴 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기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계시의 역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즉 하나님은 볼 수도, 만질 수도,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 신비에 싸인 분이라는 사실을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계시하셨는가? 그분은 알 수 없는 분이심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보기를 원했던 ‘모세’에게도, “나를 보고 살아남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빛나는 태양을 바라보면 내 눈이 상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겠지요.
이제 이스라엘의 자랑이 얼마나 공허하며, 자기기만적 인지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어떤 하나님을 만났던 것일까요? 혹시 스스로 만들어낸 하나님은 아닐까요? 이런 일은 정말 쉽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책에서 보는 수없이 다양한 형태의 공룡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공룡을 본 사람이 없으니 순전히 추측에 의존하여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니, 이런 저런 취향이나 목적하는 바에 따라 다양한 하나님을 그려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해내는 것이지요.
우리시대의 유명한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도 그의 책 <만들어진 신>에서 비슷한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인 즉은 하나님이나 종교는 우리의 환상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공회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에도 국가나, 민족이나, 교단이나, 교회에 따라 수없이 많은 하나님이 존재하고, 그것도 모자라 계속해서 양산(量産)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이 모두 하나님을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진정한 하나님은 계시는 것이며, 계시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인식할 수 있을까? 즉 들을 수도, 만질 수도, 볼 수도 있을까? 이 질문은 실은 철학에서 중요한 두 질문으로서, 전자를 존재론적 질문, 그리고 후자를 인식론적 질문이라 합니다. <요한일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1-2)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보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으며, 만져보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같은 경험을 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라 함은 교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다름 아닌 “성자(聖子) 하나님”(God the Son),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함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곳에서 동일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44-45 절).
세상의 빛.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선언이 왜 이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그분의 이어지는 선언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46 절). 이는 <서막>의 유명한 선언 중의 하나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빛은 모든 것을 밝히 드러냅니다.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구름 가운데 계시지 않고, 그분의 음성은 무슨 나팔소리나 우레처럼 들리지 않을 것이며, 번개처럼 보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더 이상의 혼란이나, 애매모호함이나, 논쟁이나, 토론이나, 분열과 갈등이 있을 여지가 없어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과 성품을 다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0)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하나님은 환상이 아니며, 우리의 기분에 따라 임의로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도 아니며, 문선명 등과 같은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이비 그리스도도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 누가 자칭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해도 현혹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가 진짜 그리스도라면, 그가 나타나는 그 시점이 곧 종말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말의 시기를 놓고 예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 자신이 종말을 가지고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스도도 가고 없는 이 시점에 말입니다. 흔히 <성경>과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특별 계시라 부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성경>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돌아가셨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만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남아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통해서 이점을 확인하고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빛은 하나님과,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 전체를 밝히 드러냅니다.
그런데 빛이 드러내 주는 것은 또 있습니다. 나 자신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이며, 내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비춰줍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합니다. 이 질문은 철학에서 세 번째 중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흔히 도덕론적 질문이라고도 하지요. 우리가 매일 <성경>을 읽자는 것도 그리스도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자는 것입니다. 그 빛 속에 늘 거하고 어둠속에서 헤매지 말자는 것입니다(46절).
지난 9월의 책으로 소개한 바 있는 <죽기 전에 한 번은 유대인을 만나라>는 책은 그 구성이 참 흥미롭습니다. 작가는 그 책 안에 365가지의 유대적 가치관을 소개하면서, 매일 한 가지씩만 읽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읽은 것은 그날 꼭 실천해볼 것을 종용합니다. 만일 그의 권유대로 365일을 따라하게 되면 일 년쯤 뒤에는 성인(聖人)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대’ ‘랍비’ 정도는 되어있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나도 그 책을 읽으면서 몇몇 군데에서 저자가 시킨 대로 해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하루만큼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나쁜 이야기를 하지 말자”는 것이었는데, 정말 지키기가 힘들었습니다. 하루가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지요. 그러나 참으로 유익한 하루였습니다.
저자는 왜 이런 방식으로 책을 구성해놓았을까?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제 살았던 방식을 오늘도 그대로 따라하려 한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작가 김홍신 교수도 KBS의 “아침마당” 프로에 나와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도전합니다: “사람에게 발전이 없는 것은 어제 살았던 방식대로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내일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보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아주 쉬운 일 같습니다. 특히 우리에게는 말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이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믿는 것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단 하루라도 살아보는 것하고는 엄청난 괴리가 있음을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이 주일에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야고보서>도 이와 같은 괴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겠습니까!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왜 이처럼 행하기가 어려울까? 이 책의 저자 랍비 ‘요셉 텔르슈킨’은 게으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게으름이란 어제와 똑 같이 살고 싶다는 일종의 관성작용(慣性作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 늘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어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이 정지되고 중지되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빛을 받지 못한 자의 특징입니다. 여전히 심판 아래 놓여있는 자의 특징입니다.
누가 그를 심판한 것이 아닙니다. 그 빛이 그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닙니다. 빛 속에는 어둠이라고 전혀 없습니다. 스스로 그 어둠속에 갇혀 있기를 작정한 것일 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47절).
구원은 탈출이고, 해방이며, 독립이고, 광복입니다. 관성의 중력(重力)을 끊고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순리(順理)가 아닌 역리(逆理)입니다. “나는 그냥 편하게 살고 싶다. 어제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싶다.” 이것이 자연법칙이며 순리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결정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심판입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48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다시 한 번 아버지와의 하나 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심판하실 이”와 “내가 한 그 말”을 동격으로 놓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같은 경고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것이 선택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 세상이 처음 창조될 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있었듯이, 앞으로도 영원히 이런 상태로 계속될 줄로 믿으며 살아갑니다: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세상 어디에도 종말의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천재지변이나 기근이나 전쟁을 종말의 징표로 삼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참고. 마 24:6-7). 하지만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이런 것들을 본 것이 어디 한 두 번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래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종말의 징조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더하고 계십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 <디모데후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 같은 현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1-4)
이런 것들이 말세에 나타날 현상이라면, 나는 종말의 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에서 이미 심판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경고를 대하는 내 모습이나 자세가 어떻습니까? 혹시 별 관심도 없습니까? 별 의미가 없이 다가옵니까? 그렇다면 이미 내 속에 종말이 온 것이고, 나는 심판 아래 놓여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하지만 무기력과, 무관심과, 무의미의 관성에 사로잡혀 나에게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쳐 부르십니다. 죽어 썩어가고 있던 ‘나사로’를 향해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은 ‘나사로’를 향해서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야, 너 일어날래?” 그분은 명령했습니다: “나사로야, 일어나라.”
지금 예수님은 복음은 초청이 아니라, 명령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복음은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49-50절).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축복은 계명을 지키는 자의 것입니다. 듣는 자의 것이 아닙니다. 명령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뒤로 미루어 둘 여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사야 할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로 가장 중요한 일을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난 빛 아래 있습니까? 그 빛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내 삶은 살아서 역동하고 있습니까? 지금 헌신하고 결단하며 감사합시다!
연습과 토의
1. ‘마리아’의 향유에 관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 주제를 이끌어낸 바 있습니다. 무엇인지 토의해 봅시다.
2. ‘디도’ 장군의 ‘예루살렘’ 입성과 예수님의 그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3. ‘헬라’인들의 방문을 보고 예수께서, “그 때가 왔다”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이 장면이 복음서 전체에서 극적 절정을 이루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데,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4.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화자의 요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에 대한 언급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선언이 그것입니다. 각각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5. 이 과를 통해서 다음 한 주 동안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교훈 한 가지는 무엇인지 나누어봅시다. 그리고 다음 과를 시작하기 전에 실천한 바에 대해서도 나누어봅시다.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