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4과
부활과 생명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1-54약 139분 분량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4-25)

미국의 한 TV 방송국에서 제작한 드라마 <나사렛 예수>에서 본문의 이야기를 재현한 바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필자에게 이 드라마는 감격과 흥분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도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당시 필자가 보았던 그 장면을 회상하곤 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나사렛’의 시체가 놓여있던 동굴 앞으로 가서, “나사렛아, 나오너라!”하고 외쳤을 때, 하얀 세마포로 온 몸이 휘감긴 채 누워있던 그가 컴컴한 동굴로부터 서서히 걸어 나오는 장면은 정말 압권(壓卷)이었습니다.
<성경>의 어디에 이와 유사한 장면이 있을까? 태초에 창조의 순간일 것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창 1:2-3).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분해와 소멸과 혼돈과 어두움 속으로 사라져가던 ‘나사렛’을 향하여 “나사렛아 나오너라”하셨을 때도, 생명과 질서와 빛의 재창조의 역사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현실 앞에 ‘나사렛’의 두 누이와,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리고 수없이 많은 무리들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경악과 충격, 그리고 망연자실(茫然自失)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눈알이 뒤집힌 자는 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적 현장이 아닌 한 낱 드라마를 보고 있었을 뿐인데도, 나는 당시 이렇게 되 뇌이고 있었습니다: “아, 저것이 바로 마지막 날 나의 경험이 되겠구나. 정말 예수 믿기 잘했구나.” 그리고 이것은 일찍이 사도 ‘바울’의 확신이기도 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1-55).
화자가 기록하고 있는 일곱 표적 가운데서 이 마지막 것은 이런 점에서 표적의 절정으로 인정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 중, “빛과 생명의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고 기록함으로써(45절), 표적과 믿음이라는 복음서 특유의 모티브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또 다른 모티브를 지닌 채 반(反) 절정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닌 “불신과 배척”입니다. 예수가 보여주는 그 많은 표적들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유대’ 당국자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장면을 이야기의 결론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45-55절).
문학과 역사
양식: 하나의 <기적 설화>로서 본문은 앞서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다른 기적 설화들과는 그 양식이나 구조면에서 얼마간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앞선 기적 이야기들은 기적 사건에 대한 기술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기적의 의미를 설명하는 강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본문의 경우에는 이야기와 강론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 이 둘을 구분해 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참고. 5, 6, 9장).
배경: <나사렛 이야기>는 그 내용을 통해서는 배경과 시기를 속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화자는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을 수장절(10장)과 유월절(11:55-57) 사이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배치가 화자의 의도를 반영한 것인지, 혹은 연대기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전자(前者)의 경우라면, 이 사건 이후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봄으로써 본문의 신학적 의도를 짐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화자의 신학적 의도를 파악하기 위하여 두 개의 본문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이 사건 직후 ‘유대’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기록이며(참고. 11:46-53), 또 하나는 유월절 기간 동안 ‘예루살렘’을 찾은 많은 순례객들이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를 보려고 모여들었다는 기록입니다(참고. 12:9-10, 17-19).
다만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공회의 결정이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바처럼 유월절 직후에 내려졌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 따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유월절 이틀 전에 예수를 잡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막 14:1-2). 본문의 기록(11:46-53)과는 시기적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어, 마치 ‘마가’와 ‘요한’은 각기 다른 두 사건을 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두 기록이 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라면, 두 화자는 각기 다른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이 사건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요한’ 화자의 의도를 추측해 본다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자 하는 의도일 것인데, 이는 침례 ‘요한’의 증거를 통해서 이미 드러난 바 있습니다(1:29).
<나사렛 이야기>는 내용 자체가 하도 엄청나서 이 사건의 진위 여부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무리가 많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점이 이 이야기의 중요한 한 모티브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논란의 주된 근거로서 세 가지 정도를 거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죽은 지 4일이나 된 자가 소생(蘇生)한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날조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와 같은 엄청난 사건이 <공관복음>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적개심이 이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성전을 숙정(肅靜)한 일 때문에 절정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셋째, ‘나사렛’은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허구 속의 주인공으로서(눅 16:19-31), 그에 관한 이야기를 ‘요한’ 화자가 마치 사실처럼 역사화 시켜 놓은 것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우선 첫 번째 주장, 즉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건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굳이 증명을 시도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과학적 방법론의 영역을 벗어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이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성경>의 다른 기적들도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의 역사성을 증명할 수 있다 하드라도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개인의 의지적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직접 기적을 목도했던 수많은 사람들조차 이 사실을 거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이 기적에 대한 <공관복음>의 침묵에 대해서는, 복음서 화자들의 신학적 관심사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 것입니다. 예컨대, <공관복음>의 관심사는 ‘갈릴리’ 지역인데 반해서, ‘요한’ 화자의 관심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을 <누가복음>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와 연계시키려는 시도는 그 주제나 배경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전혀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구조: 본문의 구조는 여섯 개의 단락으로 비교적 쉽고 뚜렷하게 나눌 수 있습니다.
단락 1: ‘나사로’의 질병과 죽음(1-16절)
단락 2: 계시-부활과 생명(17-27절)
단락 3: 계시자의 분노(28-37절)
단락 4: ‘나사로’의 소생(38-44절)
단락 5: 공회의 결의(45-53절)
단락 6: 피신(54절)
신학과 신앙
1. 나사로의 죽음(1-16절)
본문의 첫 세절은 전체 이야기에 대한 배경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즉 절망 상태에 빠져 있는 ‘베다니’의 ‘나사로’의 질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1-3절)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집”이란 뜻으로서, ‘예루살렘’ 남동쪽 3 km 지점 ‘감람’산 동쪽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이는 ‘요단’ 동편 ‘베다니’(1:28; 10:40)와는 다른 곳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시점, 특히 앞선 이야기와 연대기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화자는 곧바로 이야기의 주인공 ‘나사로’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를 소개하면서 그의 두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를 거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는 오히려 두 누이가 당시 예수님 주변 사람들에게는 더 잘 알려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특히 ‘마리아’에 대해서는 “예수님에게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 발을 씻겨준 자”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야기의 뒷부분에 가서야 이 일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참고. 12:1-8). 이는 일종의 추후 회고담(回顧談)으로서, <요한복음>에서 자주 만나는 화자 특유의 서술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4:2; 6:22-23). 이 외에도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화자 자신의 해설이 담긴 서술이 수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예. 5, 13, 18, 30절).
화자는 ‘마리아’가 누군지 알려주면서, 이들 세 남매가 예수님과 어떤 사이였는지에 대해서도 잠시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던 사람들이었음을 ‘마리아’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절하). 이 장면은 상당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반응을 긴장 가운데 기대하게 하는 일종의 전이 구절 기능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실까?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절)
예수님의 반응은 표적 즉 기적의 목적에 관한 선언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표적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직접적으로는 ‘나자로’의 죽음과 소생을 통해서이겠습니다만, ‘나자로’의 죽음은 그리스도 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이야기 곳곳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암시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8-9절, 16절, 46-53절). 그리고 이어지는 장들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예수님의 죽음 및 부활과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참고. 12:23, 27-28, 31-32; 13:31-32; 17:1). 결국 나자로’의 죽음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 절정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4절은 <나사로 이야기>의 보다 확장된 제목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5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5-6절)
이 두 구절은 그 내용에 있어 상충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일말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6절이 원 이야기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5절의 설명은 추가로 덧붙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그리고 있는 예수님의 행동은 그분의 인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그리고 있는 그분의 인격에 비추어 볼 때 6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분의 행동은 상대적으로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5절과 6절은 시적 대조의 기법에 더하여, 6절의 효과가 더욱 극대화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 들었음에도 즉각 달려가 고쳐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지체하고 있다니!”
이처럼 모순되어 보이는 서술은 나름대로 화자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복음서 전편을 흐르는 일련의 모티브가 여기에서도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지식과 관련한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14절을 통해서 읽을 수 있듯이 예수님은 ‘나자로’의 죽음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다고 했으니(17절), 예수님께서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이미 그는 죽어있었던 것입니다(소식이 오는데 하루, 소식을 들은 후 다시 이틀을 예수님은 그가 있는 곳에 더 머물었으며, 그리고 가는데 하루가 걸렸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과 관련한 메시지입니다. ‘요한’ 화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들과 아버지의 연합이나, 아들의 철저한 순종 등에 대해서 강조해 왔는데, 이곳에서도 그분은 소위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나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도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물었다는 설명이 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참고. 6절). 이는 예수님께서 항상 무슨 행동을 취하실 때,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움직였음을 시사한다 할 것입니다(참고. 2:4; 5:19-20).
그리고 마지막으로, 믿음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제자들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더한층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었습니다(참고. 15절). 이는 죽은 자의 두 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나 인품에 대해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있기는 했습니다만(참고. 21-27, 32절), 어쩌면 오라비의 죽음을 놓고 자신들의 믿음에 대한 시험이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 그리고 이 사건이 예고해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사람에 따라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표적을 믿거나 또는 말거나입니다(45-46; 12:31-32).
7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7-8절)
‘나사로’에 관한 소식을 들은 후 이틀을 그곳에서 더 머무신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유대’로 가자고 요청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에 대경실색(大驚失色)합니다. 불과 얼마 전 수전절에 자신을 잡아죽이려했던 무리들이 있는 그곳에 다시 가자고 했으니 제자들의 반응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10:31, 39). 자신의 목숨을 다시 위기에 내어놓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리고 어차피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4절)! 쓸데없는 짓을 해서 목숨을 위기에 내어놓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에 예수께서는 하나의 비유를 들어 제자들의 질문에 반응하십니다(더 정확하게는 명유(明喩)라 해야 할 것입니다). 비유는 시적 대조반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9-10절)
“낮 열두 시간”은 기회이자 동시에 한계이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 내에 “그 일”을 수행하셔야 하며,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이므로 실족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원리가 예수님에게 적용될 수 있다면, 우리 모두 특히 그분의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한에 있어 결코 실족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그 빛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11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11-12절)
직설적이지 않은 애매모호한 비유는 항상 오해를 불러오게 마련인 법,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요한복음> 특유의 오해를 제자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오해가 갖는 역설적인 기능은 애매모호한 진리를 더 확실하게 드러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죽었음을 비유적으로 알려줍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오해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직설적으로 그의 죽음에 대해서 알려주셔야 할 것입니다(참고. 14절). 사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4절). 사실 “잠들었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된 바 있기는 합니다만 ‘아마샤가 그 열조와 함께 잔 후에’(왕하 14:22).
, 통상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표현은 아니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오해는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신 경우는 ‘아이로’의 딸을 일으키실 때였는데(막 5:39), 이로 인해서 후기 기독교에서 이와 같은 용례가 유행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행 7:60; 살전 4:13). 하지만 이 같은 표현은 죽음에 대한 비유일 뿐이므로, 죽음 이후에도 잠자는 것처럼 모든 의식이 종말에 이른다고 이해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아무튼 제자들의 오해가 갖는 기능이 역설적이라고 했듯이, 자연스러운 잠이 회복에 이르게 하듯이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에 이르게 해 줄 것입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친구였으므로 그의 죽음은 생명에 이르는 문이 될 것입니다.
14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14-15절)
이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그리고 직설적으로 ‘나사로’가 죽었음을 밝힌 후, 그의 죽음으로 오히려 더 기뻐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궁극적으로 ‘나사로’의 죽음은 “좋은 죽음”이 될 것이지만, 제자들은 믿음에 대한 중대하고도 충격적인 이 시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즉 만일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더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고, 영광의 계시를 볼 기회도 갖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16절)
예수님의 초청에 가장 먼저 반응하고 있는 제자는 ‘도마’입니다. 그는 동료 제자들에게 “함께 죽으러 가자”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일견 무모하고도 맹목적인 그의 태도는 헌신에 관한 ‘아이러니’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부지중에 내뱉고 있는 이 말은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것 이상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이번 ‘유대’를 향한 여행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세상을 위한 생명의 여행이 될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권면 역시 이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탄생한 교회도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 죽음을 정복하는 생명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참고. 막 8:34; 고후 4:10). 결국 ‘도마’의 권면은 모든 교회, 모든 독자들을 향한 권면이자 독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계시: 부활과 생명(17-27절)
두 번째 단락은 <나사로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예수님 자신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의 핵심 주제에 관한 계시를 듣게 됩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17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죽자 말자 바로 무덤에 묻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죽자말자 장사를 지내는 풍습은 당시 ‘유대’인의 관습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유대’ 전승에 의하면, 사람이 죽은 지 사흘 동안은 그 무덤을 계속 찾아가서 정말 죽었는지 확인해 보고, 또 사흘째 되는 날에는 크게 애곡을 하라고 쓰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날에 소생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은 자의 얼굴이 변색을 하기 시작하면, 그가 정말 죽은 것이니 희망을 포기하라고 쓰고 있습니다. 죽은 지 나흘째가 바로 그러한 시기입니다. ‘나사로’는 그야말로 확실하게 죽었으며, 사망의 권능 아래 사로잡혀 소생의 희망이 완벽하게 사라졌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8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18-19절)
‘예루살렘’ 근처에서 많은 조문객이 찾아 왔다는 언급은 당시 그들의 관습에서 볼 때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우리나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만). 많은 조문객이 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 자매들은 인근 도시에서 상당히 많은 친구들이 있었던 듯 하며, 상당한 재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브루스 밀런). 그러나 화자의 진정한 의도는 다른 곳에 있는 듯한데, 그것은 이처럼 많은 조문객들이 이제 곧 일어나게 될 일곱 번째 기적의 증인들이 될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증거”에 대한 <요한복음> 특유의 모티브가 다시 한 번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라 할 것입니다.
20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22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0-22절)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두 자매의 반응은 다소 엇갈리고 있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즉시 예수님을 맞으러 달려가는 반면, 좀 더 의존적이고 영적 직관력이 있는 ‘마리아’는 예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말자 탄식하며 쏟아내고 있습니다(21절). 그의 발언은 예수님이 늦게 온 것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처럼 들리기도 합니다만(‘마리아’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은 다소 희망에 찬 어조입니다(22절). ‘마르다’의 고백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다소 어려워 보입니다.
다만 ‘나사로’가 지금 당장 다시 살아날 것임을 확신하는 고백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부활은 마지막 날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며(참고. 24절), 예수께서 동굴 무덤 앞에 놓인 돌을 옮겨 놓으라고 했을 때,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다면 반대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참고. 39절). 더 나아가 이야기의 구성 상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마르다’가 기적이 일어날 줄을 알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이야기의 절정은 그 효과가 반감될 것이며, 결만은 다소 싱겁게 끝나버릴 것입니다. 아마도 ‘마르다’는 엄청난 불행에 직면해 있는 자신들에게 특별한 중보의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여전히 소망을 안겨주실 수 있으리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다시 한 번 애매모호합니다.
23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3-24절)
즉 이제 곧 벌어지게 될 ‘나사로’의 소생을 말하는 것인지, 또는 마지막 날 있을 그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치는 않아 보입니다. 적어도 화자 자신에게는 둘 다를 포함하는 것이겠지만, ‘마르다’에게는 후자(後者)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고백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24절). ‘마르다’의 고백은 당시 ‘사두개’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실로 아름답고 위대한 믿음의 고백이긴 합니다만,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녀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마침내 예수님은 새롭고도 충격적인 새로운 계시를 ‘마르다’에게 드러냅니다. 그 유명한 ‘에고 에이미’ 선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이 새로운 계시는 하나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기도 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Message>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어 쓰고 있습니다: “마르다야, 네가 부활하기 위하여 마지막 날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단다. 내가 곧 부활이고 생명이기 때문이지.” 이 새로운 계시는 물론 ‘마르다’의 고백을 책망하고 고쳐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믿음을 확증해주고, 더욱 굳건히 해주며, 동시에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부활과 생명”의 계시에서 부활의 방점(傍點)이 미래적인 것이라면, 생명의 방점은 현재적인 데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요한복음>에서 생명이 함축하고 있는 차원은 미래와 현재를 공히 포함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적어도 ‘나사로’의 소생과 관련해서 볼 때, 이제 곧 그가 다시 누리게 될 이 땅에서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현재적 삶에 대한 강조는 ‘요한’ 공동체를 향한 화자 자신의 요구이자 목회적 권면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요한’ 공동체는 ‘유대’ 당국의 극심한 탄압과 배척으로 극단적인 종말사상으로 현실도피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마르다’가 얼마나 이해를 했는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제 그녀의 오라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질문이 과연 무엇을 함의(含意)하고 있는지는 파악했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3. 그리스도의 분노(28-44절)
‘마르다’가 방금 예수님의 선언과 질문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은밀히 다가가서 주님께서 그녀를 부르시고 있다고 일러줍니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28절)
이처럼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조용히 다가가 예수님께서 찾고 계신다는 소식을 전한 것은 아마도 조문객이 많이 모여 있는 소란스런 분위기를 피해서 ‘마리아’가 예수님과 단 둘이서만 대면하도록 하려는 배려에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비밀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합니다. ‘마리아’가 급히 예수님께로 달려가는 바람에 사람들도 그녀를 뒤따라갔기 때문입니다.
29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29-31절)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마르다’보다는 좀 더 친밀하고 격렬한 모습입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절)
예수님과 영적으로 좀 더 친밀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참고. 눅 10:39, 42), 자신의 가장 깊은 감정들을 더 자유롭게 나눌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마르다’와 마찬가지로 유감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32절). 그리고는 울음을 터뜨립니다. ‘마리아’도 ‘마르다’만큼이나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 추호의 의심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 이상의 어떠한 기대도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 말입니다. 슬픔이 더 큰 믿음을 가렸다고 해야 할까요?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즉시 ‘마리아’와 함께 눈물을 흘립니다(33절).
이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33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3-35절)
그분의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은 “비통히 여기셨다” 즉 “통분하셨다”(ejmbrimavomai, 엠브리마오마이)입니다. 이 동사가 <성경> 외의 문헌에서 사용될 때에는 “(말이) 콧김을 뿜어내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에 대해 사용할 때에는 예외 없이 “큰 분노”를 의미합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그토록 분노하게 했을까? 학자들마다 아주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워필드’(B. B. Warfield)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감격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브루스 밀런’, 217-218쪽.
마리아와 그녀의 친구들이 비탄에 잠겨 있는 광경은 예수님을 노하게 했다. 그것은 죽음의 악과 부자연함과 광포한 폭정을 그 분의 의식 속에서 뼈저리게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슬픔에서 그 분은 전 인류의 불행을 보고 느끼며, 인간을 억압하는 자에 대한 분노로 불타신다. 그 분이 분노하는 대상은 죽음과 그 배후에서 죽음의 권세를 지닌 바로 그 자이다. 동정의 눈물이 그 분의 눈을 가득 채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 분의 영혼은 분노에 사로잡혀 있으며, 칼빈의 말을 빌면 그 분은 “투쟁을 준비하는 투사”로서 그 무덤으로 나아가신다.
‘워필드’의 말대로, 예수님께서 악과 죽음의 권세에 대해서 분노하신 계시면서 동시에 그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무기력하고 연약한 인간들을 보시고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계시는 모습 또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던 ‘유대’인들은 그 분의 분노를 제대로 이해할 리가 없습니다. 무리들의 전형적인 오해가 다시 드러나고 있습니다.
36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36-38절)
“무지와 의심”의 모티브가 다시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죽은 무리들이 오해했던 바처럼, ‘나사로’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의 비극 앞에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무리의 모습은 예수님을 분노하게 했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이들의 한계를 깨우쳐 줄 것입니다. 그분의 명령입니다.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39-40절)
그분은 무덤가에서 다시 한 번 분노의 격정 가운데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십니다. 이에 대한 ‘마르다’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괜한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이제 우리는 조금 전에 ‘마르다’가 보여주었던 고백의 한계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 점을 재확인시켜 주고 계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 이제 바야흐로 그가 지금 말씀하신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마르다’와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실 차례입니다.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절정, 즉 기적의 순간을 목격하기 위해서 무리들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장면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이 장면은 문학적으로 일종의 숨고르기 내지는 머뭇거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1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1-42절)
그들이 목격해야 했던 것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의미는 예수님 스스로 기도 중에 밝히고 계시듯이 그 자리에 모인 모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42절). 즉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인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놓고 진작부터 기도해 오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41절하). 일부 학자들은 이와 같은 기도 형식은 ‘유대’식 기도의 오랜 관행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컨대 <시편>에서나 <탈굼>에서도 이와 비슷한 기도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시 118:21).
그리고 더 나아가서 기도의 두 번째 문장,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의 영원한 연합 즉 하나 됨에 대한 암시이기도 합니다. 시공의 제한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도할 때와 기도하지 않을 때의 구분이 가능하겠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영원한 교제 가운데 있으므로 특별히 따로 소리를 내어 기도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심전심의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께서 지금 이 순간 목소리를 높여 기도를 하는 것은 아버지에게 들리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무리들이 듣도록 하기 위함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지금 간청이 아니라 감사를 드리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 화자가 기적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즉 예수님은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 가운데 거하시는 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나사로’를 향하여 큰 소리가 외칩니다: “나사로야, 나오라”(43절). 그 동안의 긴 이야기들도 결국 이 짧고도 간결한 절정의 한 마디를 위한 준비 작업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명령은 ‘나사로’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하였고, 동굴 밖으로 걸어나도록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화자가 일찍이 예고한 바 있기도 한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8-29)
또한 ‘마르다’에게 해주셨던 말씀이 진실 되고 참되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24-25절). 여기서 ‘나사로’가 붕대를 온 몸에 걸친 채 어떻게 걸어 나올 수 있었는가에 대한 문제는 이야기의 초점을 흐리게 하는 것으로서,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4. 공회의 결의(45-54절)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항상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은 사람들 사이에서 분쟁과 갈등을 촉발시킵니다. 진리에 대한 사람들의 다른 반응들 때문입니다(예. 6:14-15, 24-33, 66-69; 7:10-13, 30-32, 40-44, 45-52). 그런데 이번 경우는 앞의 여러 경우들과는 사뭇 다른 표현이 눈에 띕니다.
45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45-46절)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이례적으로 매우 강렬했다는 보고가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란 믿음으로서,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호하게 될 것입니다(12:9-13, 17-19).
그러나 대중들의 호의적인 반응은 공회 지도자들을 당황하게 했으며, 드디어 공회가 소집됩니다.
47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47-48절)
엄밀하게 말하자면 공회를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대제사장 뿐 인데, 이곳에서 복수형인 “대제사장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대제사장과 사제계층에 속한 일단의 무리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무리 속에는 당연히 ‘바리새’인들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며, 여기서 ‘바리새’인들이라 함은 주로 서기관들을 이르는 말일 것입니다.
아무튼 이들의 두려움은 결국 예수님에 대한 무지를 반영하고 있다 하겠는데, 이들의 무지는 무리들이 그들을 피해 달아났던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로 했던 것에 상응한다 하겠습니다(참고. 6:15).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들의 거룩한 땅과 우리 민족을 멸망시킬 것”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들의 거룩한 땅과 우리 민족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 공회 지도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나라와 민족이 아니라, 자신들이 로마로부터 누리고 있는 특별한 지위와 권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회의 두려움에 대해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충고는 ‘사두개’인 특유의 거만함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49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49-50절)
사실 그의 충고는 지극히 온당하고 합리적이며,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이것이 ‘요한’ 화자 특유의 수사적으로 역설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야바’를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을 위해서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화자의 다음 말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51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1-52절)
마침내 공회는 ‘가야바’의 충고를 채택하고, 실천계획을 결의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잡아 죽이자는 계획입니다. 재판은 구실에 불과한 것이고 목적은 죽이기 위함입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53절)
이제 남은 일은 예수님이 공회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어떻게 그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를 떠나서 ‘예루살렘’ 근처 ‘에브라임’이라는 마을로 들어가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54절)
이는 피신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것으로서(12장), 그분께서 도피해 계셨던 기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이것으로 예수님의 모든 공적 사역은 끝이 났습니다. 죽음만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교훈과 적용
1.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
우리 부부는 지난 두 주 동안 상당히 우울하게 보냈습니다. 제 아내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아주 불쾌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을 향한 우리 두 사람의 정성과 성의가 무시당하고 배신당했다는 생각 때문에 처음 한 동안은 분노로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분노가 점차 시간이 갈수록 모든 것이 귀찮고 소용없다는 일종의 허무감으로 발전하고, 의욕상실증에 빠져버렸습니다.
우리가 기울인 정성이나 노력이 때로 매끄럽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상대를 불쾌하게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 모든 것이 실은 복음 전도라는 동기도 깔려있었는데 결과가 이렇게 끝나버렸으니 허탈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지요. 내가 예수님만 아니었더라면, 내가 전도자만 아니었더라도, 굳이 이런 일을 겪을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입니다. 딴에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그분 지시에 따라 해본 것뿐인데 영 실망스럽다는 생각이지요. 아직도 내 기분은 여전히 우울하고 잔뜩 찌푸려져 있습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닙니다만 이번에는 특히 후유증이 크고 오래가는군요.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들. 사랑은 이처럼 상처받기가 쉬운 가 봅니다. 특히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세 남매도 같은 심정일 것이라는 심증이 갑니다. 이들도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따랐던 자들이었으니 말입니다.
이들 남매는 예수님 당시나 초대교회 시대에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던 믿음의 영웅으로 통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네 복음서가 모두 한 결 같이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겠습니까(참고. 마 26; 막 14; 눅 10:38-42; 요 12:1-2)!
특히 ‘마리아’의 헌신과 사랑은 예수님마저 감동을 시켜서, 예수님께서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마리아’가 한 일을 함께 들려주라고 당부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무슨 일을 했는지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이곳에서 더 이상 상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아름다웠고, 순전했으며, 성경공부에 열정적이었으며, 가진 것을 아낌없이 주님에게 내어놓았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에 비해 다소 부정적으로 비취기는 합니다만, 그녀 역시 봉사하고 섬기는 일에 있어 탁월함 그 자체였다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무리들을 위한 식사 준비는 항상 ‘마르다’ 소관이었습니다. 다만 열정이 지나쳐 왕왕 우선순위를 놓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성경공부나 예배 시간 중에도 그는 그 일에 열중하지 못하고 부엌으로 넘나들며 식사 준비하는 일에 더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아무도 자기를 도와주러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기도 해서 예수님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연 섬김의 여왕이었습니다. 우선순위만 제대로 되었더라도 그녀는 완벽 그 자체였다 할 것입니다.
‘나사로’는 어떻습니까? 신기하게도 이들 남매가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에서 ‘나사로’가 대화하는 장면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했는지, 예수님께서 그에게 무어라 말했는지 등에 대해서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침묵의 증인임에 분명합니다(J. M. Boice). 그는 죽었다 살아난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존재와 삶 자체가 복음의 능력이자 증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살아난 것을 보았으며, 대제사장들은 바로 그 일 때문에 그를 예수님과 함께 잡아 죽이려고 모의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한 사람들. 그런데 이들 남매는 자신들만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짝사랑을 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역시 이들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당사자들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절). 그들은 서로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토록 총애하던 한 사람이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가혹하게도 말입니다. 그들이 이 고통과 악고(惡苦)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을까요?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오라비가 죽은 지 나흘 뒤에 비로소 알았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나에게 닥치는 온갖 시련과 고통의 의미를 어찌 내가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오든, 왜 오든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우리가 결코 놀라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담대한 사람이라면 아마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욥 5:7). 이어령 박사님의 말대로 어차피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생명의 요람”과 “죽음의 유택”(幽宅) 사이에 걸쳐 있는 다리와 같은 것이라면, 어찌 그 다리가 요동치며 불안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면 그 시련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하나의 도구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 왕이 그랬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아마도 그는 시련을 통해서 <성경>을 더욱 더 잘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시련은 그에게 있어 “위장된 축복”이었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나의 유익뿐만 아니라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도 가끔 허용하시는 듯합니다. 절망하거나 당황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를 학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시련에 놀라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절). 시련이 하나님의 영광, 즉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때문에 놀라워할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혹시 내가 겪고 있는 시련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습니까? ‘마리아’와 ‘마르다’가 이를 어찌 알았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우리는 ‘나사로’를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하며 풍성한 은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날 누군가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이나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환난 중에 기뻐합시다.
이와 같은 때에. 환란이나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성취하려고 의도했든,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자주 자신을 향하여 이렇게 묻습니다: “혹시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나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생각이 신학적으로 옳든 그르든, 만일 우리가 고난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려 할 때, 인격이나 신앙의 성숙에 분명 유익이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은 “축복의 가면” 내지는 “위장된 축복”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감옥이나 병상에 누웠을 때, 싫든 좋든 가장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대개 이 시기에 <성경>을 가장 많이 읽게 될 것입니다. 그 일 외는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월남 이상재 선생을 항일 독립 운동가에서 기독교 민족 계몽 운동가로 바꾸어놓은 것도 그분께서 감옥에 갇혔을 때 읽은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무슨 일이 생깁니까?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비로소 하나님과의 대화가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나는 듣습니다. 동시에 내가 말하고 그분이 듣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내 문제가 그분 앞에 드러나게 됩니다. 비로소 기도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나자로’의 두 누이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들은 지금 자신들의 문제를 예수님에게 가지고 온 것입니다. 환난 날에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예수님에게 찾아온다는 것 말입니다. 나도 과연 이들 두 여인이 했던 것처럼 하고 있는지 물어볼 일입니다. 나는 아플 때나 어려울 때 누구를 찾습니까? <시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하지만 대단히 안타깝게도 대개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그분에게 달려가지 않습니다. 별 도움이 되지 않거나 관심도 없는 주변 사람들을 찾아 나섭니다. 불평이나 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백성의 특징은 지도자를 향해서 불평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도자는 백성과 함께 불평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바로 이것이지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모세’를 향해서 불평을 내쏟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들처럼 할 수 없습니다. 대신 그는 ‘야훼’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참고. 출 15:25). ‘유다’ 왕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산헤립’이 보낸 대사 ‘랍사게’로부터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는 모독에 찬 글을 받아들었을 때, 그는 그 서신을 ‘야훼’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울부짖습니다(참고. 사 37:14). 침례 ‘요한’의 제자들도 그들의 선생이 목이 잘려 죽었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예수님에게 전했습니다(참고. 마 14:12).
우리를 위한 모범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닙니다”(히 4:15상). 왜냐하면 “그분이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기” 때문입니다(히 5:7). 우리가 환난 날에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왜 들으시나? 내가 그분을 잘 알고 있기 때문도 아니고, 내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내가 그분께 무엇인가 드려서 그 대가로 받을 수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마리아’나 ‘마르다’도 예외가 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믿음과 희생에 대한 보상이 없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 하겠습니까! 믿음이란 결국 어느 날 불의에 닥칠 재난 대비용 보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신앙생활을 마치 예수님이나 또는 주변의 누군가를 위해서 해주고 있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사실 나도 그런 적이 있기는 했습니다. 내가 유학시절 개인적으로 잘 아는 한 목사님이 시무하던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교인이라고는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던 교회라 사정이 하도 딱하게 보여 그냥 우리 부부라도 나가 앉아 있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심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의협심이 발동한 것으로 해두겠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지금 인편을 통해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는 두 자매의 모습을 주목해 봅시다: “주여, 보시옵소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절). 그들의 기도는 참 복잡 미묘하게 들립니다. 상당히 당황스러워하고 있으며, 무엇인가 절실히 간청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보시옵소서”가 이 같은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듯합니다. 비록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빨리 와서 고쳐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도 겉으로는 전혀 그런 내색이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간청을 말하는 대신에,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이 한마디로 당시 그들의 심정을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해지는 것은 있습니다. 지금 이들이 구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에 기초한 그 무엇이 아니라(희생이나 봉사 등), 주님의 사랑에 근거한 그 무엇일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시편>의 약속을 익히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내 기도는 어떠합니까? 사실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내가 드리는 무수한 말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기도를 들으시는 것보다, 내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간절한 심정을 보고 계실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고통이나 질병이 물러나고 사라졌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 하루라도 빨리 나를 에워싸고 있는 어려움이 해결되었으면 하는 애절한 마음 말입니다. 내 모든 자랑을 내려놓고, 오직 그분의 사랑에만 의지하는 그 마음 말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기가 어려워집니다. 확신이 없습니다. 이를 누가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사도도 아니고, 대 부흥사도 아니며, ‘나자로’는 더욱 아닙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고, 헌신했으며, 희생했던 ‘마리아’와 ‘마르다’. 예수님께서도 지극히 사랑하셨던 ‘마리아’와 ‘마르다’가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라비가 죽기 전에 빨리 주님께서 오셔서 살려주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그들의 오라비가 죽든 살든 적어도 그들이 알고 있는 주님은 최소한 즉시 달려오는 성의(誠意) 정도는 보여주기를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빨리 달려오기는커녕 오히려 이틀을 더 지체하며 마치 ‘나자로’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그들의 오라비는 죽고 맙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항상 한 발 늦게 도착하십니다. 아무리 급하다고 기도해도 그분의 응답은 때를 놓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 인생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무수히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나는 기도해야 하나요? 사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가 원했던 것처럼 즉각적으로 달려와서 고쳐주신다면, 이 세상에서 질병이나 고통이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무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놀랍게도 우리가 안심하고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즉각적으로 응답해주시기 때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즉각적으로 응답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지각에 뛰어난” 분이시기에 우리가 안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다”함은 그분의 지혜와 지식이 우리의 이해와 상상을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모든 이해와 상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평강”이 때로는 우리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지키실 것이기에 우리가 안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자로’를 사랑하셨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도 사랑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분께서 나도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2. 죽지 않을 병
늘 곁에 두고 읽는 <성경>이 때로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성경>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이야기들이 오늘날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평생 살아도 한 번 경험할까 말까 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니 <성경>을 읽을 때, “아, 이것이 내 이야기구나”하며 감격하고 흥분하기보다는, “뭐,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 때는 그랬겠지. 그런데 오늘 나에게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거야” 하며 오히려 시큰둥해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또 어떻습니까? 예컨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과연 나는 이 약속을 얼마나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내가 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주셨으며, 무엇인가 찾을 때마다 눈에 보였으며, 문을 두드릴 때마다 그 문이 열립디까? 그렇지 않았기에 우리들 대부분에게 이 약속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나마 불신하고 돌아서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가련한 ‘마리아’와 ‘마르다’도 하나님을 불신하고 돌아설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마리아’와 ‘마르다’라 해도 이번만은 달라야 합니다. 그야말로 “하루가 여삼추(如三秋)”같은 심정으로 주님이 오시기를 애타게 기다렸건만, 결국 오라비는 죽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견딜 만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 늦으시는 것이겠지.
그런데 심부름을 보냈던 사람이 돌아와서 한다는 이야기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전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오라비가 죽어버렸는데 이 무슨 한가한 말입니까!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더 한심한 노릇은 오라비의 병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했답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아파 죽은 것이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굳이 불교 용어를 빌지 않더라도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우리 인생이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니 말입니다. 괜스레 하나님의 영광을 들먹여서 하나님의 명예와 신뢰에 오히려 오점(汚點)을 남기게 되어버렸습니다.
예언(豫言)과 예언(預言). 처음 보는 영화나 소설의 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관객이나 독자가 없듯이, 단 한 번 밖에 없는 내 인생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그리고 어떻게 결말이 날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닥치는 온갖 일상사(日常事)들이 아무런 의미나 목적도 없으며, 특히 하나님의 영광과는 더더욱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모든 일들의 과정이나 결말을 알고 싶어 합니다. 특히 시련이나 환난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나 영화를 중도에 그만두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호기심(好奇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중요한 원동력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언(豫言)에 귀가 솔깃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얼마나 모순된 태도입니까! 도대체 누가 예언(豫言)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의 현자(賢者)들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예언을 하려들지 말라. 그것이 맞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며, 틀리면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모순된 태도는 또 있습니다. 우리는 예언(豫言, foretell)은 듣고 싶어 하나, 예언(預言, forthtell)은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가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전자(前者)가 미래를 위한 예고라면, 후자(後者)는 오늘을 위한 경고 내지는 권고입니다. 그러니까 원하는 미래를 위해서 오늘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원하지만 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 속의 모든 <예언서>들이 이 두 기능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만, 강조점은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豫言書>라기보다는 <預言書>로 봄이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설교의 강조점이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이듯이, 선지자들 역시 예고를 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한 것이었습니다. “원하는 미래가 있으면 오늘 그것을 준비하라.” 오늘 우리가 듣는 설교도 이와 같습니다. 때로는 이스라엘을 향한 미래의 심판에 대해서, 또 한편으로는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그렇다면 ‘나사로’의 질병에 대한 예언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랍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사로’의 두 누이도 이번만큼은 그들의 주님이 틀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심정으로 그들의 서운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21, 32절).
그들은 이렇게 따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셨나요? 우리 오라버니가 부활할 것이라고 하셨나요? 당연히 그렇겠지요. 당연히 그 말씀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주님은 충분히 그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영광을 보려면 우리 역시 모두 죽어야만 가능한 일 아닌가요? 너무나 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두 자매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미래의 일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미래에 보게 될 그 영광스러운 날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미래가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지금 당장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큰 위로가 되지는 못한다는 불만이겠지요. 약속과 현실은 이처럼 너무나 멀게만 느껴집니다.
하지만 주님은 주님대로 답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화의 단절을 느끼고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이전에 ‘니고데모’와 이야기할 때에도 이런 기분이었겠지요. 지금 주님은 미래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일이 하나님의 주(主) 되심을 선포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주(主) 되심이란 이런 것입니다. “되어라”하매 그대로 되는 것을 말합니다. “있어라”하매 없던 것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장만큼 이 사실을 웅장하게 보여주고 있는 곳도 드물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이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사실 우리가 이곳에서 목격하게 될 장면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라 부르는 한 존재는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의 생명체는 단순한 유기물질과 무기질로 분해되고 와해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 2절에서 보는 단순한 물질일 뿐입니다. 비인격적이며, 인격적인 의사소통이나 대화가 전혀 불가능한 상태의 물질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형체도 없고 질서도 없는 이 물질을 상대로 명령하고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어라”; “나뉘라”; “열매를 맺어라”; “번성하라”; 등등. 그가 명령하심에 그대로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주되심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통제 하에 놓여있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피조물 두 번째 ‘나사로’가 창조될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어 남겨놓은 아무 형체도 없는 그 물질로부터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단순한 소생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입니다. ‘나사로’를 이루고 있던 그 물질들이 다시 조합되고, 연결되고, 복잡해지고, 생기를 부여받아 새로운 한 인간이 탄생되는 것을 말합니다. 땅의 티끌로부터 ‘아담’이 탄생하였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여기서 그칠 수 없습니다. 이전의 ‘나사로’가 사라지고 새로운 ‘나사로’가 재창조되었으니, 그에 걸 맞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존재가 ‘유대’ 당국자들에게 얼마나 큰 부담과 골칫거리가 되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과 함께 그도 역시 잡아 죽이려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일회성(一回性)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항구적인 빛을 비추게 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 그렇다면 지금 예수께서 함께 언급하고 있는 “아들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나사로’의 질병이 “하나님의 영광” 뿐만 아니라 “아들의 영광”이기도 하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새삼 새롭게 덧붙일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이니, “하나님의 영광”은 당연히 “아들의 영광”이 되어야 할 것이 때문입니다.
‘요한’ 화자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이점을 강조해 왔습니다. 예컨대, ‘가나’에서 첫 번째 표적 사건을 기록한 후 화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2:11). 예수님 스스로도 “아들의 영광”과 관련해서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11:40).
아들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만유의 주(主)가 되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참고. 1:2). 그러기에 ‘갈릴리’ 바다에 몰아치던 바람과 파도를 향해서 그분께서 “잠잠하라”하셨을 때, 바람과 바다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히브리서>의 말대로 “그분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참고. 히 1:2).
이처럼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시기에 ‘나사로’가 아프다는 전갈을 받고도 이틀을 더 지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음으로 끝날 병이 아니다”(4절상). 즉 죽음이 ‘나사로’ 인생의 주인이 될 수가 없다는 선언입니다. ‘나자로’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지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만이 앞으로 일어날 일의 전부는 아닙니다.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줄 또 하나의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곳에서 그 일이 무엇인지 암시를 받은 바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7:39후);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
여기서 그분의 영광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분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일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분의 죽음도 포함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2:16).
‘나사로’의 부활은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초래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적개심이 ‘나사로’의 일로 해서 극에 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이 일을 아셨고, 그 길을 향해서 걸어가셨습니다. ‘도마’의 결단은 이점에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주과 함께 죽으러가자”(16절하).
우리는 모든 일의 진행과 결말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내 존재나 내 모습, 그리고 나에게 닥친 여러 가지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이나 그리스도의 영광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내 인생의 결말이 어떻게 끝날지에 대해서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끝에 대해서 이렇게 큰 소리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1:55)
즉 내 인생이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죽음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전 15:57).
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까? ‘바울’ 사도는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렇다면 나의 존재는 그 자체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있습니까? 내일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말입니다.
3. 지체되는 사랑
적어도 우리의 상식으로 11장 5절과 6절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 동생 나사로를 사랑하셨으나,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즉 예수님께서 세 남매를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연유인지 즉시 달려가지 않고 그 계시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지체하셨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암시하고 있는 사뭇 다릅니다. 즉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세 사람을 사랑하셨으므로,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즉 예수님께서는 세 남매를 사랑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도움을 오히려 더 늦추셨다는 것입니다. 아주 납득하기 어려운 훼괴한 논리입니다. “필요할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금언을 무색하게 만드는 논리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는 새로운 논리를 개발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날 때부터 고아원에서만 자란 아이에게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아무리 가르쳐보아야 크게 감동을 받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냉소(冷笑)만 돌아올 것이 뻔해 보입니다. 사소하고 시시한 일들은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으니 특별히 신경 써서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중요하고 대단한 일은 누가 나서서 선뜻 도움을 준적도 없으니 크게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인생이 그러려니 하며 그저 참고 기다리며 살 뿐입니다. 괜스레 헛된 소망을 가졌다가 십중팔구 상처만 받게 될 터이니 그냥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오래 동안 혼자 살면서 터득한 것입니다. 그러니 언감생심(焉敢生心) “기도의 응답”이니, “하나님의 도움”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감히 꿈이나 꿀 수 있었겠습니까? 입에 올리는 자체가 거북하고 어색할 뿐이지요.
이런 아이에게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그분이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고, 또 지체 없이 달려온다 한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설령 이 아이가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크게 달리 생각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가 오래 동안 출석해 왔던 교회가 고아원과 같은 분위기였다면 말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지만 만약 그가 <나사로 이야기>의 결말을 다 알고 있다면 어떨까? 여전히 같은 생각일까? 즉 그리스도께서 머뭇거리거나, 지체하고 있는 것이 이들 세 남매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또는 다른 일로 바빠서 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할까?
아닌 게 아니라, <누가복음>은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 무심하고 거만한 한 재판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눅 18:1-8). 이 재판장은 사람은 물론 하나님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아주 거만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수시로 찾아가 괴롭히는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재판장이 여인의 기도를 들어줄 리가 없습니다. 이 재판장은 오직 자신의 일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인의 요구는 집요합니다. 매일처럼 찾아와서는 울고 매달립니다. 재판장은 하는 수 없어 여인의 요청을 들어줍니다. 여인의 요청이 옳다거나, 그 처지가 딱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괴롭고 귀찮아서 들어주었을 뿐입니다(5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심은 하나님도 이 재판장과 같다고 말하기 위해서입니까? 우리는 그렇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인의 집요함을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1절).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7절). 그분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오래 참고 지체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경> 속의 말씀일 뿐입니다. 그리고 어쨌든 재판장은 여인을 한동안 기다리게 했던 것은 사실 아닙니까! 우리 대부분이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도 이점에서 재판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거의 매번 늦거나 응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우리의 일에 무관심하지 않다면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를 시작할 때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필경 늦거나 아예 응답조차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예측할 때가 많습니다. 일의 결말을 모르니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마리아’와 ‘마르다’가 원성어린 목소리로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는 것도 일의 결말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들은 이미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한 채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행여나 하나님께서 다른 일로 너무 바쁘셨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실 이 말은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의 거짓 선지자들을 조롱하며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왕과 왕비를 포함해서 온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로 타락해 있을 때,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에게 도전장을 냅니다. ‘야훼’ 하나님과 ‘바알’ 중에서 누가 참 신(神)인지 하나의 표적을 통해서 가려내보자는 도전이었습니다.
표적이란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매달아 놓고, 그 위로 불이 내리도록 기도해서 누가 불로 응답하는지를 가려내자는 것입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으나 아무 응답이 없자, 그들은 제단 위로 올라가 뛰놀기도 하고, 큰 소리로 부르기도 하고, 심지어 칼과 창으로 몸을 찔러 피를 흘리기도 했습니다. 하루 종일 그렇게 했으나 ‘바알’은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 때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이야”(왕상 18:27). ‘바알’이 너무 바빠 기도를 들을 시간이 없는 것 아니냐는 조롱이지요.
물론 ‘야훼’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적어도 ‘엘리야’에게 그분은 무관심하지 않았고, 기도를 들어주지 못할 만큼 바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도 같은 생각일까? ‘마리아’나 ‘마르다’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엘리야’ 당시의 ‘바알’ 선지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엘리야’로부터 받았던 그 수모(受侮)와 굴욕을 되갚아 주려 하지 않았을까? “때는 이 때다”하며 말이지요.
나에게도 이와 유사한 경험이 없지 않습니다. 학위를 받고 귀국은 했으나 한 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해, 나와 아내와 두 아이는 시골 아버님 댁에서 육 개월 가량을 얹혀살아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놀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내 아버님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습니다. 한심하게 보였겠지요. 식사 시간만 되면 내가 기도하는 모습에 언짢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무슨. 일자리도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판에.” 내심 이런 불만이셨겠지요: “너의 그 하나님이 어디 갔느냐?”
당시 내 모습이 영락없는 ‘바알’ 선지자로 비췄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알’ 신이 되어버린 셈이지요. 나의 기도에 아무런 응답조차 없는 그러한 신(神)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늦거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실 수 있다고 말했다면, 내 아버님께서 어떻게 받아들으셨을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실은 나도 그 문제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환경. 정말 이야기 속의 두 자매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체하고 계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실의와 원망이었습니다(21, 32절)! 하지만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사랑하고 계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또한 세 남매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대도 정작 어려움 앞에 서면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왜 이토록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까? ‘보이스’ 목사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환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반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환경을 해석하려하기 때문이다.” 이분은 우리가 쓰고 있는 안경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색안경을 쓰고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색안경을 쓰기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예컨대, 그분에게는 붉은 색이 붉은 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흰색으로 보입니다. <이사야>의 말입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이처럼 하나님의 눈이 적백(赤白) 색맹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붉은 색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붉은 색안경을 쓰고 붉은 색을 바라보자니 당연히 흰색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분께서 쓰고 계신 붉은 색안경은 물론 그리스도라는 안경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는 그리스도의 피로 물든 안경이라 보면 되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운명은 멸절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안경을 통해서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처한 환경이나 주변도 이 안경을 통해서 둘러보면 어떨까? 필경은 다른 모습, 다른 색깔로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려 하지 않을까?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의미나 목적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까? 당장은 무엇인가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해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태도나 훈련은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인지하고 있듯이, 훈련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체질이 되며, 체질은 운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대부분의 덕목(德目)들, 즉 용기니, 인내니, 믿음이니 소망이니 하는 것들은 그저 땅에서 솟아났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즉 정 반대의 상황, 결코 바랄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하고 헤쳐 나온 결과 우리의 인격으로 축적되고 형성된 그 무엇인 것이지요. 예컨대, 용기는 두려움을 통해서, 인내는 시련을 통해서, 믿음은 의심을 통해서, 그리고 소망은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서 얻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체되는 것이 이처럼 결과적으로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께서 항상 한 발 늦게 도착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 65:24)
선지자는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신속하게 응답받고 있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구절은 다분히 공허한 시적 수사(修辭)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질적인 예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라 물위를 걸어보겠다고 나섰던 상황을 <마태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마 14:30-32)
화자의 의도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베드로’가 물에 빠진 것은 주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바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절박한 상황에서 주님은 지체한 것이 아니라,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구원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익사하기를 기다려, 나흘 쯤 뒤에나 물속으로 들어가 건져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마리아’와 ‘마르다’는 기도의 응답을 그토록 오래 기다려야 했으며, 왜 ‘베드로’의 기도는 즉각적으로 응답을 받았는지 우리가 알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다르며,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며, 그분의 시간표가 우리의 시간표와 다르다는 점일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4. 낮 열두 시간
한 미국인 관광객이 멕시코의 작은 어촌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마을의 어부가 잡는 크고 싱싱한 물고기를 보고 감탄을 했습니다. 그는 어부에게 물었습니다.
“그거 잡는데 얼마나 걸렸나요?”
어부 왈, “별로 오래 걸리진 않았습니다.”
미국인 방문객은 재차 묻습니다.
“왜 좀 더 시간을 들여 물고기를 잡지 않습니까? 더 많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부는 자기가 잡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방문자는 다시 묻습니다.
“그럼 남는 시간에는 무엇을 하나요?”
“늦잠 자고, 낚시질 잠깐 하고, 애들이랑 놀고, 마누라하고 낮잠 자고, 밤에는 마을에 가서 친구들과 술 한 잔 하고, 기타 치고 노래하고, 아주 바쁘지요.”
미국인이 그의 말을 막았습니다.
“사실 제가 하버드 대학 MBA입니다. 제 말 들어보세요. 당신은 매일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낚시질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더 많은 수입이 생길 것이며, 더 큰 배도 살 수 있겠지요. 큰 배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배를 몇 척 더 살 수 있고, 나중에는 수산 회사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작은 마을을 떠나 더 큰 도시나 아니면 뉴욕으로 이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어부가 묻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얼마나 걸리죠?”
“20년, 아니 25년 정도요.”
“그 다음에는 요?”
“당신 사업이 진짜로 번창했을 때는 주식을 팔아서 백만장자가 되는 거죠.”
“백만장자? 그 다음에는 요?”
“그 다음에는 은퇴해서, 바닷가가 있는 작은 마을에 살면서, 늦잠 자고, 아이들이랑 놀고, 낚시질로 소일하고, 낮잠 자고, 그리고 남는 시간에 친구들이랑 어울려 마시고 노는 거죠.”
이 이야기는 LG경제연구원에서 발간한 <2010 대한민국 트렌드>라는 책에서 소개한 내용으로서, “느린 삶” 즉 ‘다운 시프트’(down-shift)가 현대 사회의 한 트렌드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야기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들였지만, 이제부터는 시간을 벌기 위해 돈을 쓰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시간이 돈이 아니라, 돈이 시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시간. <신약>의 성도들 특히 우리의 사도들은 종말이 임박했다는 강박감 속에 살다 갔습니다. 우리는 이를 <서신서>의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 역시 공생애 기간 동안 홀연히 임할 종말에 대해서 이런 저런 비유를 들어 여러 차례 경고한 바 있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열 처녀의 비유”라든지 이어지는 “달란트 비유”가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입니다(참고. 마 25:1-13, 14-30).
그러나 오늘날 임박한 종말론을 강조했다간 필경 이단 취급을 받게 됩니다. 범신론적 윤회설이나 또는 무신론적 진화론에 심취해 있는 현대인들에게 종말론자(終末論者)는 어리석고 무지한 종교적 광신도로 비췰 뿐입니다. 이들에게 시간의 역사는 그저 끝도 한도 없을 뿐입니다. 그것이 윤회를 하든, 일직선으로 나아가든 끝이 없기는 매 일반입니다. 당연히 종말론은 무시되고 조롱거리가 됩니다. ‘베드로’ 사도도 종말론의 처지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일찍이 예언한 바 있습니다: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 중에서 다섯 처녀를 어리석은 자들로 규정하고 그들을 바깥 어두움 가운데 내버려두라고 하셨으며, 한 달란트 받은 자를 향해서는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 칭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게으름을 악(惡)함과 동격(同格)으로 놓고 계십니다. 시간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고 허송세월(虛送歲月)한 것이 악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달리 예수님의 공생애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를 시간에 따라 배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창조의 일주일을 보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즉 ‘요한’ 화자는 침례 ‘요한’의 사역을 시작으로,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첫 만남, 제자들의 전도, 예수님의 ‘갈릴리’ 여행, 그리고 ‘가나’에서의 첫 기적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이들 모두를 일주일이라는 시간 안에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일주의 마지막 날, 즉 “제 사흘 째”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진술로 끝맺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 <창세기>의 “창조와 안식의 패턴”이 이곳에서는 “안식과 재창조(구속)”로 바뀌고 있는 장면입니다.
시간에 대한 ‘요한’ 화자의 각별한 관심은 다른 곳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화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한 시기가 “유월절”이라고 밝히고 있으며(2:13), 한 동안 이곳을 떠나 있다 두 번째 방문할 때에도 그 시기를 “유대인의 명절”이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5:1). ‘갈릴리’에서 있었던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 역시 “유월절”에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으며(6:4), 그가 세 번째로 ‘예루살렘’에 나타나신 것도 “초막절” 기간이었습니다(7:2). 그리고 “수전절”이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예루살렘’에 머물고 계셨던 것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10:22).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도 ‘예루살렘’에 계셨으며(12:1), 이번 방문은 네 번째이자 마지막 “유월절”이 될 것이었습니다(12:1).
이처럼 ‘요한’ 화자에게 있어 시간은 실로 의미심장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핵심 단어를 꼽는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관련해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표현, “그 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나이다”(2:4)
(2)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음이러라”(7:30; 8:20)
(3)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
(4)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3:1)
(5)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16:23)
(6)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17:1)
나에게 시간은 과연 어떤 의미입니까? 나는 나에게 필요한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을 얻기 위해서 시간을 대가로 지불하고 있습니까? 내가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지불하든, 또는 다른 그 무엇을 얻기 위해 시간을 지불하든,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과연 그 시간으로 무엇을 하려는가?”
다시 유대로. 나처럼 남은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이 질문은 더욱 중요하고 심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무어라 답하실까? 그분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유대로 다시 가자”(7절후). 이 말씀은 제자들을 위한 초청이자 일종의 중간고사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나사로’를 도우러가자”; “우리가 ‘베다니’로 가자.”
‘유대’로 다시 가다니요? 우리는 여기서 “다시”라는 강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반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항변은 당연하고도 이유 있다 하겠습니다. “다시 그 의미 없는 시간으로 되돌아가다니요? 그건 정말 시간 낭비예요!” 제자들은 그렇게 외치며 시간의 주인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유대’로 돌아가는 일이 왜 의미가 없으며, 쓸데없는 짓일까요?
제자들의 답변을 들어보시겠습니까?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절후). 겨우 위기탈출을 했는데, 다시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려하기 때문입니다. ‘유대’로 다시 돌아갈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제자들 모두 훤하게 알고 있습니다. ‘도마’가 그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절). 그렇습니다. 그들 모두는 선생님과 함께 잡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마치 선문답(禪問答)을 하시듯 말씀하십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9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것일까? ‘유대’로 돌아가는 일, 즉 쓸데없는 일을 다시 반복하는 일과 낮 열두 시간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기에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일까? 그분의 심중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낮이 열두 시간이든, 백이십 시간이든, 다시 ‘유대’로 돌아가서 하려는 일이 무엇이든, 우리 누구나 한 번 실패했던 일은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분의 심중을 헤아리기보다는 내 자신의 처지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합니다. ‘예레미야’가 우리의 심정을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아마 <성경>에서 실패와 배신의 아픔을 최고의 문학적 수사학을 발휘해서, 가장 절절히 들어내고 있는 책을 든다면 <예레미야 애가>일 것입니다.
누가 그를 배신했습니까? 누가 그를 실패자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의 처절한 고통을 들어볼까요?
4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5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6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8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9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 12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13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애 3:4-6, 8-9, 12-13)
그는 지금 단순히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도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화살 과녁으로 삼아 활쏘기 연습을 하듯 그를 고통의 대상으로 삼으셨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억울함으로 몸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세게 하나님을 향해 대들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선지자의 말을 빌면, 하나님에게 속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7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렘 20:7-8)
그래서 그는 다시는 이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굳게 맹세하고 다짐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9절상). 두 번 다시는 속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아무렴요. 당연하지요. 나라도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제자들도 같은 심정입니다: “다시는 ‘유대’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실패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다 수치와 모멸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큰마음 먹고 호의(好意)를 베풀었는데, 돌아온 것은 감사는커녕 비난과 배신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 ‘예레미야’의 편에 서면됩니다. 그리고 손 털고 돌아섭시다: “다시는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다시는 실패의 현장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럴수록 속이 후련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을 계속 들어봅시다.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9절하)
그는 지금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무심한 백성과 적대적인 제사장과 사제들이 있는 그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얻어맞고, 치욕을 당하고, 옥에 갇혔던 그 현장으로 말입니다. 하도 억울하여 나도 선지자의 편에 서자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이런 정신 나간 사람을 따라 나설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나오미’를 따라간 ‘룻’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가슴 아프지만 ‘오르바’를 따라 새 희망을 찾아나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시간의 주인.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9절). 혹시 ‘예레미야’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 말씀을 들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듣기에 따라 이 말씀은 전혀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어떤 이는 “낮이 무려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로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낮이 겨우 열두 시간밖에 없지 않느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즐거운 시간은 짧게, 괴로운 시간은 길게 느껴지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어지는 말씀은 어떻습니까?
9하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9절하-10절)
아, 그분의 방점(傍點)이 여기에 있었군요! 낮의 길이야 춘하추동(春夏秋冬) 수시로 변하는 것이지만, 이 말씀만큼은 너무나 자명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사실 요즈음이야 밤도 대낮처럼 훤하게 밝아 실족할 염려가 거의 없겠지만,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거리는 그렇지 않았겠지요. 전기불이나 무슨 인공적인 조명등이 있지도 않았을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예수님께서 영적 비유를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낮이나 빛에 대해서 그분께서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9:5). 그 자신이 빛이요 낮이라는 선언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시간의 주인이며, 시간을 통제하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지금 우리는 <요한복음> 전체에 대한 주제 선언을 다시 한 번 듣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낮에 다닌다” 함은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다닌다는 말일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있다”(참고. 8:31) 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간이야말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설령 실패의 자리, 죽음의 자리도 되돌아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도마’의 초청은 실로 종말론자의 지혜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나는 매일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며,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나는 시간의 십일조를 그분에게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매일처럼 “아, 내일이면 집 지으리” 노래를 반복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내일이 아니라 오늘 저녁 홀연히 주님께서 오신다면 그 시각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5. 나사로가 죽어 기쁘다
배가 아플 때에는 금식(禁食)이 최고의 약이며, 피로에는 잠이 최고입니다. 두 경우 모두 휴식을 의미합니다. 위(胃)를 쉬게 하는 것이나 심신(心身)을 쉬게 하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인들은 죽음을 가리켜 영원한 안식 즉 “영면”(永眠)이라고 했나 봅니다. 삶이 그만큼 치열하고 고달팠다는 역설인 것이지요. 하기야 인생이 고해(苦海)라고 한다면, 죽음은 그 반대, 즉 안식이 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죽음보다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죽은 호랑이보다 살아있는 개가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고통 가운데 살더라도 죽어서 안식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시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고 있습니다:
사망 중에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 6:5)
시인은 지금 질병 가운데서 살려달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이생에 대한 지독한 집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사로’라면 어떨까요? 그는 죽었습니다. 그가 살아있을 때 무슨 기도를 했는지, 그리고 기도의 응답도 받지 못한 채 얼마나 큰 고통 가운데 죽어갔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조상 ‘아브라함’ 곁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동명이인(同名異人) 거지 ‘나사로’처럼 말입니다(참고. 눅 16:9-31).
그렇다면 이 사람을 다시 이 세상으로 불러내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까? 정말 애매합니다! 만일 ‘나사로’ 본인에게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무어라 할까? 변화산(變化山)에서 ‘베드로’가 했던 말로 대답을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 17:4).
내려가기 싫다는 것이지요. 누가 좋은 자리 버리고 낮고 낮은 그 진흙탕 속으로 다시 돌아 오려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왕궁을 버리고 이스라엘, 즉 교회와 함께 광야로 나갔던 ‘모세’는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을 몰랐던 자라 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 당회 장로의 자리를 버리고 해외 선교사로 자청했던 ‘바울’ 사도 역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의 죽음. 지금 제자들은 ‘나사로’의 답변을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여 (그가)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12절). 물론 이 말은 그가 푹 자고나면 병이 회복될 것이라는 뜻이겠지만, 잠을 죽음 즉 “영원한 안식”에 대한 비유로 받아들인다면 제자들의 말은 진리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한 술 더 뜨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잠이 들어 기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이번에도 잠은 단순한 잠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을 직설법으로 다시 전달하면 이렇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내가 기쁘다.”
이 무슨 심술입니까! 우리는 대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죽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뒈져서 속이 후련해.” 예컨대, 독재자의 폭정과 억압에 시달리는 백성이라면 그 독재자가 죽었을 때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카다피’가 죽었을 때 대부분의 ‘리비아’ 백성들이 환호하던 장면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예수님의 원수가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두 사람은 서로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왜 기뻐하셨을까? 사랑하던 자가 죽어 천국에서 ‘아브라함’ 품에 안겨 안식을 누리고 있어 기쁘다는 것일까? 그분께서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이나 지체하신 이유도 그가 죽어 소생의 기회가 완전히 사라지기를 원했기 때문일까?
아닌 게 아니라,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후에 나타나셨습니다. 나흘이라 함은 ‘유대’ 전통에 의하면, 완전한 죽음 즉 소생(蘇生)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 기간 동안 ‘나사로’라는 한 인격체는 완전히 부패하고 분해하여 단순한 유기물질과 무기 원소들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즉 그야말로 흙으로 되돌아 간 것이지요.
“나흘”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손을 써볼 여지가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암시입니다. 질병의 경우라면 의사의 기술, 좋은 의약, 그리고 환자 자신의 의지가 삼박자 조화를 이루어 치유와 회복의 경이를 이루어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자가 아직 살아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나사로’의 경우는 이 모든 것들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의사의 목소리도, 유족의 통곡도 그를 살려낼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입니다.
제자들을 위하여. 그래서 예수님은 기쁘다는 것입니까? 선생으로서 나는 학생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어 기뻐할 때가 많습니다. 의기양양하게 가르쳐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식구들이 잘 알지 못하거나,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들을 내가 알아서 이를 가르쳐줄 때 아주 의기양양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보다 잘 알지 못해서 기쁠 때가 아주 많은 거예요. 남보다 돈이 더 많아서 기쁘고, 더 건강해서 우쭐해지고, 더 많이 알아서 자랑스럽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이제 내가 보여줄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쁘다는 것입니까? 다시 말하자면 아들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것일까? 아주 유치해 보이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분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기뻐하노니”(15절상).
예수님은 유치할 뿐만 아니라, 침착함을 넘어 아주 냉혹하고 비정하기까지 합니다. 사람이 죽든 말든 자신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한 사람의 죽음조차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권면은 그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은 우리도 종종 이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이나 슬픔을 당한 이웃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위로하고 권면하는 데에는 익숙해 있습니다만, 정작 함께 아파하거나 동참하는 데에는 어색해 하고 낯설어합니다. 그래서 그냥 침묵하고 있으면 될 일을 애써 무엇인가 말하려 하다가 상황을 어색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욥’의 세 친구처럼 말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오히려 기뻐하고 즐기는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그분의 삶의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님 되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만이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이유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분은 왜 기뻐하셨는지 다시 한 번 묵상해 봅시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5절상).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의 방점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 때문에 기쁘다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이 여러 사람들의 믿음을 세워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을 세워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날 주변에 몰려든 많은 이웃들의 믿음을 세워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1상). 하나님께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우리의 믿음이 아닐까요?
대개 고통은 나누고 싶어 하나, 기쁨이나 영광은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하지만 우리는 정 반대로 행동합니다. 우리는 대개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배 아파하고, 우는 자를 고소해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누리고 있는 자신의 기쁨을 우리와 나누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학생을 사랑하는 선생님의 마음입니다. 부하들을 사랑하는 사령관의 마음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그분은 나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됩니까? “아, 그야 그분이 그리스도니까 당연하지.” 이렇게 답하신다면 당신은 아직 기독교인이 누리는 신비하고 황홀한 기쁨을 제대로 체험해 본 적도 없는 아주 슬픈 사람입니다. 나는 어느 누구 때문에 기뻐해본 적이 있습니까? 내 손 떼가 묻은 작품, 즉 내가 키운 제자 때문에 기뻐해본 적이 있는가 말입니다?
없다면 슬퍼하시기 바랍니다. 애통해하고 비통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분노하고 질투하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대해서는 그런 기회조차 부여하지 않으셨단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나의 어디가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그냥 내 멋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셨단 말인가! 이렇게 통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분에게 정말 어떤 존재란 말인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란 말인가?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내가 아끼던 자전거가 탈 때마다 말썽을 부린다면 그 자전거를 어떻게 할까요? 나 같으면 팔아 치워버리든지 아니면 창고 안에 그냥 내버려두든지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창고에 그냥 내버려두기 위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 멋대로 살도록 내버려두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분은 우리를 교회로 불러내십니다.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삶의 목표와 우선순위를 배우고, 자신을 제어하며, 순종의 삶을 살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이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삶이고, 영광스럽고, 황홀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셨던 그렇지 않든, ‘나사로’는 모두의 기쁨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영광스럽게 사용되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의 증거.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는 어떻습니까? ‘갈릴리’의 작은 마을 ‘나인’ 성의 한 과부의 죽은 아들은 어떠했습니까? ‘야이로’의 죽었던 딸은 어떠했습니까? 그 모든 사망의 음침한 세력들이 예수님과 맞닥뜨리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부활과 생명의 주를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나를 만나셨을 때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에베소서>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나 역시 ‘나사로’처럼 이미 죽어있었으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는 지금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부활 때에 내가 살아날 줄을 아나이다”(24절)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 ‘바울’은 마지막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부활의 삶을 누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만 부활의 영광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나도 지금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네가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이 사실을 믿습니까? 내 누이들이 나의 부활을 목격하고 있습니까? 내 가족들이 나의 부활을 목격하고 있습니까? 내 친구들, 내 이웃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나는 그들과 부활의 영광과 즐거움을 나누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생명의 손으로 나를 안수(按手)해 주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6.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왜 사람들은 누군가를 평가함에 있어 그 사람의 업적보다는 실패를 훨씬 더 오래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각 지도자마다 이루어놓은 훌륭한 업적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 사람들 사이에는 그들의 실패가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래 회자(膾炙)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칭찬에 인색하며, 비판에 능수능란한 우리네 자화상(自畵像)일 것입니다.
하지만 가까운 중국만 하더라도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천안문 입구에는 모택동(毛澤東)의 초상화가 그가 죽은 이후 지금까지 걸려있습니다. 여전히 중국 정부가 공산정부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지만, 사실 그가 자신의 동족들에게 저지른 반인륜적인 만행은 문화혁명(文化革命) 하나만으로도 용서받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인민들은 그를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추앙하고 있다 합니다. 그가 남긴 공과(功過) 중에서 과(過)는 잊고 공(功)은 기리고자하는 중국인의 사고 체계가 특이하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 사도를 기억하는 우리 교인들의 인식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항상 그를 부를 때마다 그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이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가 그것입니다. 천국에서 이를 내려다보고 있을 그분의 기분은 과연 어떨까요? 사람들이 나를 부를 때마다 “의심 많은” 아무개 씨하고 부른다면 내 기분은 어떨까?
사실 이 분이 왜 이런 오명(汚名)을 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부활절 이후 그가 보여준 태도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간증, 동료 사도들의 한 결 같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주님의 부활을 결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0:26).
이건 정말 믿기 어려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의 사도가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부활을 가장 먼저 거부하고 부인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사도였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제 정신을 가진 자라면 부활을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요? 모든 논리를 뛰어넘는, 모든 과학적 추론을 거부하는 이 사건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사도 ‘도마’는 의심하기 위해서 의심했던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서 의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 나는 정말 믿고 싶어.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누가 좀 도와주었으면...”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 ‘도마’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소심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장면에서 만나는 그의 모습은 전혀 딴 판입니다. 과격하고, 무모하며, 결연(決然)한 모습입니다. 의심과 회의(懷疑)는 어디다 두고 온 것일까요? 일단 결심이 선 이상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태도입니다. 지금은 생각하고 고민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라고 믿었던 것일까요? 작고하신 ‘존 스토트’ 목사님의 말대로, “신학은 보수적으로 신앙은 과격하게.” 이것이 그의 신앙 모토였을까?
우리도 가자. 혹자는 이런 그를 두고 자포자기(自暴自棄), 즉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도 아닌 ‘도마’ 사도가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 사도들을 향해서도 동일한 헌신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지금, “우리도 가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고 싶으면 혼자 가면 될 것을 왜 같이 가자고 할까? 힘든 일이라 혼자 하기 싫었음일까? 아닌 게 아니라 영광은 혼자 누리고 싶고, 고통은 나누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기는 하지요. 칭찬 받을 일은 “내”가 했다고 하고, 비난 받을 일은 “우리”가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일까! 그는 지금 동료 사도들에게 함께 가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런 태도를 두고 물귀신 작전이라 폄하(貶下)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허나 그가 “우리도 가자”라고 말할 때, 오늘 나도 함께, 그리고 우리 교회도 함께 포함시키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발언이 교회를 향한 권면과 교훈을 담고 있다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주님도 한 분이시고, 성령도 한 분이시며, 이스라엘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의 시인은 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 우리 하나님”으로 불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기도문>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아닌 것이지요.
이 말은 곧 하나님은 교회의 하나님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 나라의 국회의원 개개인은 그 나라의 입법기관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인 개개인은 곧 교회이자 성전(聖殿)인 것이지요(고전 3:16). ‘아간’이 곧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이 곧 ‘아간’이었듯이 말입니다(참고. 수 7:11). 그래서 한 사람 ‘아담’이 범죄했을 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참고. 롬 5:12). 즉 모든 인류가 ‘아담’과 함께 범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김 태정의 범죄는 곧 <우리교회>의 범죄입니다. <우리교회>의 영광은 곧 김 태정의 영광이 됩니다. 우리는 이를 인류의 결속성(solidarity)이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곧 이스라엘이고 교회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스토트’ 목사님이 교회에 대해서 한 유명한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교회에 보내지 않고 구원시킨 적이 없고, 구원시키지 않고 교회에 보내신 적이 없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아.” 이 말은 사실일까요? 거짓말입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 인(一人) 교회는 있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미국의 ‘윌로크릭’ 교회는 자신의 사역을 다음 세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 주를 높인다(Exalt the Savior); (2) 성도를 준비시킨다(Equip the saints); (3) 죄인들을 복음화 한다(Evangelize the sinners). 이들 세 문장을 세 개의 단어로 요약하자면, 예배와 교육과 전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 우리 교회의 <이상과 정신>을 통해서 배웠듯이, “교회의 사역은 관계의 사역”이며, 관계 맺기는 소수 영웅적인 엘리트의 전유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콩가루 집안”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한 집에 살고는 있으나 구성원 각자는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집안을 말합니다. 이 남하 목사님이 오래 전에 간파했듯이, 교회는 콩가루나 콩알이 아닌 메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끈끈하게 하나로 뭉쳐있는 메주 말입니다.
우리교회가 목장 교회를 지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모두의 사역은 나의 사역이 되기 어려우며, 모든 사람의 친구는 어느 누구의 친구도 되기 어렵지만, 불과 몇 사람만이 모이는 목장에서는 콩가루가 아닌 메주가 되는 일이 비교적 쉽기 때문입니다. 메주의 정체성은 “나”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만남 가운데 관계가 형성되고 영적인 쌍둥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요한’ 화자는 ‘도마’를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로 칭하고 있습니다(11:16; 20:24). ‘도마’는 ‘히브리’어 이고 ‘디두모’는 헬라어입니다. 둘 다 “쌍둥이”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지금 ‘도마’ 사도는 “우리도 가자”라고 독려하며 자신의 닮은꼴을 만들려 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대학이 세계 대학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높은 강단 대와 대형 강의실을 없애야 한다고 세계의 우수 대학교 총장님들이 권고하고 있습니다. 교수가 수백 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강단 대 위에서 자신의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방식으로는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개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판단 때문이지요.
교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교회 교육에서 가장 비효과적인 방식이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는 일대 다수의 교육이지요. 하지만 다수를 상대로 한 설교는 어느 누구의 설교도 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청중의 수가 많을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니 모두를 향한 도전이나 권면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굳이 헌신이니 결단을 위해 설교단 앞으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누가 내 대신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저 큰 무리 속에 묻혀 넓은 길을 떠밀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떠합니까? 솔직히 설교를 듣고 삶의 방식을 바꾸었거나, 한 주 간의 삶의 지표로 삼아본 적이 있습니까? 한 주 동안 살면서 지난 주 설교가 생각이 나서 잘못된 버릇이나 습관을 바꾸어 본 적이 있습니까? 모르긴 해도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목장을 하자는 것은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해보자는 것입니다. 모두를 향한 권면과 도전을 나의 것으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설교를 나를 위한 개인적이고 특별한 설교로 삼자는 것입니다. 누가 이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까? 당연히 목자입니다. 목자는 애비이고, 선생이며, 코치이고, 감독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닮은꼴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도마’ 사도가 외쳤듯이, “우리가 가자”라고 강력하게 권고해야 합니다.
목자는 목원(牧員)이 듣기 싫어해도 말해야 합니다.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상대가 듣기 싫어하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계모(繼母)는 전처(前妻) 소생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차라리 없어져주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목자는 양을 위해 울기도 해야지만, 동시에 분노하고, 잔소리도 해야 합니다. 자신의 ‘디두모’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지닌 가장 거룩하고 가장 자랑스러운 특권도 이것입니다. 자신의 분신(分身)을 만드는 것, 즉 교회를 개척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감독이나 집사들은 고함치고 야단쳐야 합니다: “우리도 가자.”
죽으러 가자. 어디를 가자는 것입니까? 단순히 주일 예배에 참석하자는 것입니까? 교회학교 성경공부 하러 가자는 것입니까? 목장 모임에 나오라는 것입니까? 이 모두 시시콜콜한 초청일 뿐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백성이 그까짓 하찮은 일들조차도 힘들고 귀찮아한다면,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정신건강에 훨씬 이로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 받을 일 많은 이 세상에서 종교라는 짐을 하나 더 얹어놓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짐을 던져버리고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침례교 정신을 사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와 책임에 대한 대헌장(大憲章)을 침례교만큼 더 명쾌하게 선언하고 있는 교단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침례 교인이 된다 함은 성숙한 어른이 됨을 의미합니다. 침례도, 교회 회원이 되는 것도 억지가 아닌 자유의사에 의해서 결정합니다. 이모저모 상세하게 따져 본 후에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나 여러분이나 <우리교회> 회원으로 등록하고 헌신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모두 ‘도마’ 즉 쌍둥이가 되겠다는 헌신입니다. 예컨대, 간증 한 번 할 때에도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우리 모두는 한 결 같아야 하며 서로 쌍둥이처럼 비슷해야 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결과는 반복 훈련을 거친 숙달되고 숙련된 자들만이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듣는 이로 하여금, “아, 그 간증 정말 멋져!” 하고 경탄하게 만듭니다.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갑니다. 모두 하나가 되어 어디를 가자는 것입니까? “죽으러 가자”입니다. 아!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결코 듣고 싶지 않은 초청입니다. 나만은 예외이고 싶은 초청입니다. 그런데 ‘도마’는 혼자 가겠다가 아니라, “우리가 가자”고 말합니다. 열심히 살자가 아니라, “죽으러 가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고, 먹고, 쉽니다. 그런데 그는 교회는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이미 죽었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상)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죽은 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를 누가 귀찮게 집적대겠습니까? 죽은 자를 누가 유혹하며 지배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를 누가 종으로 삼으려 하겠습니까? ‘사탄’도, 세상도, 죄도 죽은 자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도마’ 사도가 “죽으러가자”고 했을 때, 바로 이런 죽음까지 의미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는 분명 성숙한 교회가 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숙한 교회 말입니다. 적어도 한 가정의 가장(家長)이라면, 그가 책임 진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려 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위해서 죽겠다고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족이나 가정을 책임 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만을 돌아보면 됩니다. 자신의 꿈과 비전을 위해서 달려가면 됩니다. 허나 어른은 다릅니다. 자식을 위해서 감히 죽을 각오를 합니다. 그것이 어른의 모습인 것이지요.
자식을 위해 죽겠다는 말은 내가 가진 시간(Time)이나, 재능(Talent)이나, 재물(Treasure)을 기꺼이 바치고 버리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결과 감사나 칭송이 아니라, 배신과 모욕과 수치가 돌아오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말입니다. ‘도마’는 어린 아이 즉 초신자(初信者)를 향해서 “죽으러 가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였습니까?
나는 어른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어린아이입니까? 이 질문을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나는 목자입니까 아니면 양입니까? 나는 선생입니까 아니면 학생입니까? 나는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섬김을 받고 있습니까? 젖을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젖을 받아먹고 있습니까?” 일 년이 지나도, 오 년이 되어도, 십년이 지나도, 늘 배우기만 하는 자들로 가득 찬 교회는 유치부 교회이며 실패한 교회입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교회입니다. 아니 교회라기보다는 그냥 사교클럽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운 것을 시험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생기지 않습니까? 자주 만나는 이웃이나,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이나, 직장 동료나, 가르치는 학생들과 내가 가진 것들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까? 아니면 마치 개나 돼지가 코를 땅에다 대고 늘 킁킁거리며 살아가듯, 나 역시 땅에다 온 소망을 두고 살아가느라 위에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주와 함께. ‘도마’ 사도가 “우리도 죽으러 가자”라고 했을 때, “우리끼리 죽으러 가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과연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했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조금 전에 낮이 열두 시간이라 하셨고, 낮에 다니는 자는 실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도마’ 사도는 부지중에, 교회가 사는 유일한 길은 “주와 함께 죽는 것” 뿐이라고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이번 ‘유대’를 향한 여행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세상을 위한 생명의 여행이 될 것입니다. 교회 역시 이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탄생한 교회도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 죽음을 정복하는 생명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그와 함께 죽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7. 마르다의 그리스도
마침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르다’가 그분을 맞으러 달려 나옵니다. 나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요한’ 화자가 제시하고 있는 세 가지 표현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나흘”; “많은 유대인”; “위문.” 도대체 이들 표현들이 서로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들을 색깔로 드러낸다면 무슨 색깔일까? 이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어떤 것이 좋을까?
“나흘”이 주는 메시지는 절망일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사흘 동안은 그래도 일말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사람이 죽은 지 사흘 동안은 그 무덤을 계속 찾아가서 정말 죽었는지 확인해 보고, 또 사흘째 되는 날에는 크게 애곡을 하라고 쓰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날에 소생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은 자의 얼굴이 변색을 하기 시작하면, 그가 정말 죽은 것이니 희망을 포기하라고 쓰고 있습니다. 죽은 지 나흘째가 바로 그러한 시기입니다. 나흘째에는 단순히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패도 함께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그야말로 확실하게 죽었으며, 사망의 권능 아래 사로잡혀 소생의 희망이 완벽하게 사라졌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대결하고 있는 원수가 완전한 권위와 파괴를 휘두르기까지 구원을 보류하신 것입니다. 도전이 클수록 기적도 크며, 그 결과 제자들의 믿음도 더 크게 강화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아버지는 더 큰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물론 그분의 기대는 좌절로 끝나게 될 것이지요.
‘예루살렘’ 근처에서 “많은 조문객”이 찾아 왔다는 언급은 어떻습니까? 이는 당시 그들의 관습에서 볼 때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장례 문화와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화자의 진정한 의도는 다른 데 있는 듯합니다. 그의 기대 역시 예수님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흐르는 핵심 모티브 하나를 이끌어내기 위함이 아닐까? 다름 아닌 “증거” 말입니다. 한두 사람도 아닌 구름처럼 허다하게 모인 이 무리가 이제 곧 ‘나사로’에게 일어날 그 엄청난 기적의 생생한 증인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허나 그의 기대 또한 허망하게 끝나버릴 것을...
구름처럼 허다한 이들 무리가 두 자매를 찾아와서 무슨 말로 위로를 했을까? ‘바울’ 사도는 이렇게 위로하라고 도움을 줍니다.
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8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3-14, 18)
하지만 대단히 안타깝게도 이들 무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 자신이 바로 그 소망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이것입니다: “인생이 다 그런 것이지. 누구나 한 번은 다 겪는 일, 참고 이겨내야지.” 우리가 이 장면에서 받는 느낌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무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위로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역설인 것이지요. 이 많은 조문객들의 위로, ‘나사로’를 살려낼 수 없음은 물론, 그의 두 누이의 기분조차 살려낼 수 없었다는 암시일 것입니다.
믿음의 한계. 바로 이 절망의 현장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하지만 때늦은 등장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르다’에게는 그렇습니다. 열정적이고 다정다감하지만, 바로 그 기질 때문에 쉽게 토라지기도 하는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러 달려 나옵니다. ‘마르다’의 절망과 주님의 기대가 만나는 순간입니다. ‘마르다’의 이성과 주님의 계시가 만나려는 순간입니다.
이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마르다’가 먼저 입을 엽니다.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21절). 원망과 투정입니다. 그녀는 지금 심히 기분이 상해있고, 실망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다’의 이성과 믿음은 자신을 이렇게 타이르고 있습니다: “마르다, 그렇다고 함부로 감정을 쏟아내서는 안되지. 너는 사도들조차 부러워하는 믿음의 사람이 아닌가? 주님께서 얼마나 너를 사랑하고 계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니? 여기 모인 사람들을 봐서라도 네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되지.”
그래서 그녀는 속내를 감추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절). 정말 위대한 믿음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과연 그녀가 말하는 “무엇이든지”는 그야말로 그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는 것일까? 그 속에는 “죽은 ‘나사로’가 지금 다시 살아나는 것”까지도 다 포함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곧 알게 됩니다. 그녀는 ‘나사로’의 무덤을 여는 것을 반대하고 있습니다(39절). 그러니까 그녀가 말하는 “무엇이든지”는 지금 여기서가 아니라, 내일 그곳에서 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단언하자(23절), ‘마르다’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주님은 오늘, 여기를 말하고 있는데, ‘마르다’는 내일, 그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취되고 있는 약속을 말하시는데, 그녀는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현재 진행형을 말하시는데, ‘마르다’는 미래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물론 애매하게 들리기는 합니다. 그가 지금 당장 살아난다는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날 부활한다는 것인지가 분명치가 않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마르다’가 이해하고 있는 바는 분명합니다. 당시 ‘사두개’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믿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실로 위대한 믿음의 고백이긴 하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그녀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새로운 계시. ‘마르다’의 한계를 깨우쳐주기 위함일까요? 주님은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 유명한 선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25-26절).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그의 책 <메시지>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어 쓰고 있습니다: “마르다야, 네가 부활하기 위하여 마지막 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내가 곧 부활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아, 가련한 마르다! 그녀는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줄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녀 안에 와 계신 줄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기를 해방시키고 있는 줄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참고. 롬 8:2).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놀랍고도 새로운 계시이며,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는 선포입니다. ‘마르다’의 고백을 책망하고 고쳐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확증해주고 더욱 굳건히 해주는 계시입니다. 그녀의 믿음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계시인 것입니다. 어디 ‘마르다’ 뿐이겠습니까!
“요한 교회”를 향한 화자의 요구이자, 목회적 권면입니다. 지금 이 교회는 유대교의 배척과 핍박으로 극심한 시련을 겪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참고. 서론). 누구나 현실에서 환난을 겪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우리에게 내일이 있지 않는가! 부활 말이야.” 이 같은 믿음은 그 자체로서 현실의 어려움을 이기고,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나 교회의 소망이 미래에만 있고, 내세에만 있다면, 그 교회는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현실 도피에다 소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그 모든 것들은 교회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아마 모일 때마다 이런 찬송을 부르겠지요: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교인들이 초대 교회 시절에 많이 있었습니다. 임박한 종말론을 맹신하며, 이원론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던 교인들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 교회의 회중들은 늘 천국 갈 준비하느라고 일도 하지 않았고, 모여 기도만 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일도 직장도 가족도 다 내팽개쳐버리고 말이지요. 당장 속은 편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교인들을 향해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훈계하고 있습니다(살후 3:10).
하나님은 어제의 하나님도, 내일의 하나님만도 아닙니다. 항상 오늘의 하나님입니다. ‘모세’가 ‘시내’산 중턱에서 불붙는 떨기나무 사이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처음 만나, 그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나는 야훼다”(출 3:14). 무슨 말입니까? 이것을 <칠십인 역>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니라”로 번역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 구절을 “I am who I am”으로 재번역하고 있습니다.
‘야훼’의 정확한 의미는 알 길은 없으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실 때,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의 하나님”이라 하신 것은 “늘 살아계신 하나님”, 즉 “오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요한 교회> 목사님이 자신의 회중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 이미 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 능력을 실감하고, 체험하며, 드러내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마땅히 그렇게 살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이상하고 신기한 기적인 것입니다.
계시의 도전. 계시는 항상 반응을 요구합니다. 예배에서 설교가 항상 헌신과 결단을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계시와 설교는 학교의 강의와는 다릅니다. 강의는 반응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듣고 받아 적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계시와 설교는 반응을 요구합니다.
설교에 대한 반응은 각양각색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좋았어요”라든지, “심금을 울리는 설교였습니다”라든지, “큰 위로가 되었어요”라든지, “정말 기막힌 성경 해석이었습니다” 등등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훌륭한 설교라면 당연히 이 모든 찬사를 받아야 하겠지요.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반응을 원하셨을까? 그분은 설교 후에 ‘마르다’에게 이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마르다야, 이제 네 기분이 좀 나아졌느냐? 네 말이 위로가 좀 되었느냐? 이제 좀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회복하게 되었느냐?
그분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분은 ‘마르다’가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의 기분이 어떠한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느낌은 어디까지나 느낌일 뿐입니다. 감정이나 느낌만큼 변덕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아침 이슬과도 같고, 요동치는 파도와도 같다 하겠습니다. 왔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다시 찾아오고 하지요.
그래서 <시편>의 시인도 “인간을 의뢰하지 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식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23-25).
그래서 그분은 ‘마르다’의 기분에 대해서 물었던 것이 아니라, “네가 믿느냐?”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도전입니다. “응답하고, 헌신하라”는 도전인 것이지요.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내도 되는 노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들은 것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고 계속 흘려보내기만 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두 아들을 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마 21:28-30).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합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 가겠습니다.” 해놓고서 가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작은 아들에게 같은 주문을 합니다. 작은 아들은 “싫습니다.” 했습니다만, 나중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아버지의 설교에 제대로 반응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큰 아들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로 치자면 교회입니다. 두 아들을 둔 나는 내 자식들이 내말을 듣고 반응하기를 바라는 것이지, 남의 자식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지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그분은 늘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시며, 교회가 그분의 말씀에 반응해 오기를 바라시는 것이지, 이방인들을 향해서 설교하시는 것이 아니며, 이방인들을 향해서 문을 두드리며 열라고 요청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참고. 계 3:20).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하). 예수께서 교회의 문을 두드렸는데, 실제 듣고 문을 열어준 쪽은 엉뚱한 이방인의 문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씨는 내 밭에 뿌렸는데, 열매는 이웃 사람의 밭에서 열린 것입니다. 이거 정말 통탄할 노릇이지요! 헛농사 한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교회 즉 큰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응답, 불순종으로 일관했던 대가가 무엇이었을까? 심판과 지옥이었을까? 그렇습니다. 좀 어려운 말을 빌자면, “실존적 죽음”입니다. ‘아담’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경험해야 했던 바로 그 죽음 말입니다. 단절과, 고독과, 허무와, 무의미의 인생 말입니다.
그저 모든 것들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숙제와 과업으로 다가옵니다. 귀찮고 따분할 뿐입니다. 기도도, 묵상도, 예배도, 나눔도, 봉사도. <성경> 말씀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루라고 했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 것이지요. 손자가 할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할아버지 수염을 뽑게 됩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요청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실천을 해 본 적이 없는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왜 실천이 없었을까? 구체적인 적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도전은 구체적입니다. 그분은 “네가 믿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방금 내가 들려준 그 설교 내용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내용을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성경공부가 지루하고 답답하다. 목장이 늘 그대로다.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 흥분이나 감격이 없다. 만일 이런 생각이 든다면, 진단은 하나입니다. 새 생명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부부에게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것은 두 가지일 것입니다. 낳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에 대한 강렬한 욕구나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기들 직장 다니고 돈 벌고 그 일이 즐겁고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자 하는 강렬한 동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안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한 주 무엇을 할 것인가? 이번 달에 목표는 무엇인가? 그리고 올 한 해에 전도나 봉사의 목표가 무엇인가 목장에서 모일 때 마다 전도의 대상이나 봉사의 대상을 정해 놓고 함께 간곡하게 기도하는 습관부터 기릅시다. 함께 하는 기도를, 그것도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한 기도이니 주께서 분명히 응답하시고, 도우러 달려오실 것입니다. 매년, 매달, 그리고 매주, 모일 때마다 기도제목을 정해놓고 시작하기 전이나 또는 마칠 때 정말 애통하게 기도해 봅시다. 구하면 얻을 것입니다.
8. 예수께서 우시니
설교를 위하여 긴 본문을 택했을 때 설교자는 크게 준비할 것이 없습니다. 본문 자체가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한 두 구절을 설교 본문으로 삼고자 할 때는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까지 덧붙여 말해야 하기 때문에,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전체의 길이는 그렇게 짧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본인은 단 한 절 즉 <성경> 전체적으로 가장 짧은 한 절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셨다”(35절)입니다.
그분은 왜 우셨을까요? 우리는 가진 자나 힘센 자의 눈물은 잘 믿지 않으려 합니다. “악어의 눈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나일’강에 사는 악어는 사람을 보면 잡아먹고 난 뒤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도 <햄릿>이나, <오셀로>나 기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등에서 이 전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악어는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리기는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슬퍼서 흘리는 것이 아니라, 눈물샘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아서 먹이를 삼키기 좋게 수분을 보충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의학용어에도 얼굴신경 마비의 후유증으로 나타나는 “악어 눈물 증후군”(crocodile tears syndrome)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환자들의 침샘과 눈물샘의 신경이 뒤얽혀 마치 악어가 먹이를 먹을 때처럼 침과 눈물을 함께 흘린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어의 눈물은 진짜 눈물이 아니라, 먹이를 잡아먹고 거짓으로 흘리는 눈물이라 하여 위선적인 행위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위정자(爲政者)가 흘리는 눈물이나, 강자(强者)가 약자나 패자에 대하여 흘리는 눈물 등이 악어의 눈물에 해당될 것입니다. 선거에서 이긴 정치가가 패배한 정적(政敵) 앞에서 흘리는 눈물 등도 이에 속한다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눈물. 예수님의 눈물도 그야말로 악어의 눈물이었을까? 어쩌면 두 자매의 이웃들이 흘렸던 눈물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장례 관습 중의 하나가 우리의 오랜 장례 행습과 유사한 점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가급적 큰소리로 우는 것을 죽은 자와 유족(遺族)에 대한 예의로 삼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장례식에 가보면 상주(喪主)들이 조문객이 올 때마다 “에고, 에고”하며 조문객을 맞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없을 때는 그냥 조용히 있다가도 누군가 오면 이렇게 곡(哭)을 하는 것이지요. 가족이 흘리는 눈물을 악어의 눈물로 감히 평가절하(平價切下)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이와 같은 태도는 분명 마음에서 우러나는 슬픔의 태도는 아니라는 것쯤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가족도 이러할진대 아무 혈연관계도 없는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슬퍼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내로부터 늘 인정머리 없다는 평가를 받는 본인의 솔직한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그분은 ‘나사로’에 대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이미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히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하며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사실 그분은 “나사로가 죽어 기쁘다”고까지 하셨습니다(15절)! 그런대도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분은 단순히 슬퍼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요한’ 화자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이웃이 우는 모습을 보며,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마치 “(말이) 콧김을 뿜어내듯”, 아주 격렬하게 반응하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분은 지금 극도로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자들의 말대로, 그분께서 분노하시는 대상은 죽음과 그 배후에서 죽음의 권세를 지닌 ‘사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칼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지금 “투쟁을 준비하는 투사”로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과 한 판 극적 대결을 벌이기 위해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놓고 슬픔과 분노가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이 불의(不義)하게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때가 그런 경우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본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놓고 온 몸이 부르르 떨리도록 슬픔과 분노를 함께 느끼셨는지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도 아닌, 그냥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런 반응이 나와 버렸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는 ‘마르다’가 고백했던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적어도 ‘유대’인들이 학수고대(鶴首苦待)하던 ‘메시아’나, ‘헬라’인들에게 친숙한 최고의 신 ‘제우스’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그는 예수일 뿐인 것이지요.
너무나 인간적인. <성경>을 보면 ‘마르다’가 알고 있던 “하나님의 아들”은 슬퍼하고 분노했던 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 여인의 뱃속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자랐으며, 경험과 훈련을 통해서 지혜와 지식을 쌓아가야만 했습니다. 사막 길을 걸을 때는 목이 말라 ‘야곱’의 우물가에서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여인에게 마실 물을 구해야만 했으며,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고 난 뒤에는 극도로 기진맥진해 있어 ‘사탄’으로부터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유혹까지 받기도 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목마름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부활 이후에도, 그분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먹으며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바람과 요동치는 파도조차도 배 안에서 곤히 자는 그분을 깨우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렇게 약해도 되는 것일까?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세상을 구할 수 있겠으며, ‘사탄’을 대적할 수 있을까! 주변에 몰려 있던 ‘유대’인들의 생각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37절). 이들은 예수님의 눈물을 무기력과 동일시 한 것이었습니다. 즉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그저 속수무책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으니 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영웅이나 지도자는 이처럼 결코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글에서 ‘하이에나’는 평소에는 감히 사자 앞에 얼씬거리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사자가 혼자 있거나, 그가 늙고 힘없게 보이면, 이 녀석들은 득달같이 공격해 옵니다. 우리네 정치판이 그렇지 않습니까. 어떡하든지 상대방의 허점이나 실수를 발견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사실 정치판은 맹수가 사는 정글보다 더 험한 세상이지요. 그러므로 적어도 정치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완벽하고 완전무결해야 함은 물론,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예수는 결코 그리스도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냥 예수로 살아가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가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흘린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었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그는 연약했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했을 뿐만 아니라, 창피하게도 그 같은 모습을 사람들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저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정당은 말할 것도 없고, 차기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분들은 모두 스스로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서민의 대변자로 자처합니다. 그리고 경쟁자를 향해서는 “차가운 얼음공주”, “기득권층의 대변자” 등과 같은 꼬리표를 붙입니다. 그리고 선거운동 기간 중에는 재래시장이나 독거 노인정, 고아원 등을 방문하고, 청년 실업자들을 만나고, 사회 정의를 외치고, 홍보용 사진도 넥타이를 맨 정장이 아니라 하나 같이 가벼운 와이셔츠 차림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도 이와 같은 것일까? 사실 그렇게 생각할 만 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 하는 말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제 곧 엄청난 기적을 행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판에, 눈물은 무엇이며, 슬픔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예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면 그 이유를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당당해 하는 것이 더 논리적으로 합당하다는 생각입니다. 그 모든 슬픔을 한 방에 날려버릴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사건이 곧 일어날 참인데, 그 무슨 눈물이 여기에 끼어들다니요!
결국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그분께서 진정으로 슬퍼하셨다는 것밖에는 달리 없어 보입니다. 불과 몇 분 후에 일어날 환호와 기쁨은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고, 지금 당장 흘러내리는 눈물은 눈물대로 주체할 수가 없는 것이 그분의 성정(性情)이라는 말입니다. 내일 맛볼 즐거움을 생각하다보니 지금 당면한 슬픔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슬퍼하는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거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가슴이 따뜻한 사람임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 동료인간의 슬픔을 보니 나도 모르게 그냥 슬퍼지더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곧 목격하게 될 경천동지(驚天動地)의 기적을 이해하는 우리의 방식도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보여줄 부활과 생명의 영광스러운 기적 때문에 슬픔을 참으신 것이 아니라,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의 기적을 일으켜 주십사고 간청하셨다고 보자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있었던 기적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결혼의 즐거움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동기를 엿볼 수 있으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도, 목자 없는 양처럼 떠돌아다니던 그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었다고 <마가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막 6:34). 그럼에도 나는 이와 같은 기적들을 대할 때, 그 엄청난 결과에 도취되어 기적의 동기에 대해서는 자주 간과해 버립니다.
사랑 때문에. 즉 왜 그리스도가 예수가 되기도 하는지에 대해서 마음으로 크게 와 닿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놓고 우신 것은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인 것으로서, 무슨 계산이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음을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한 결 같이 인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36절).
“독생자”(獨生子)가 의미하는 바가 “스스로 드러냄” 즉 “진심” 내지는 “흉금”(胸襟) 일진대, 우리는 이 장면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진심”을 보고 있다 하겠습니다. 세 남매를 향한 하나님의 진심은 예수, 즉 사랑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왜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유대’ 공회가 그렇게 힘들어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즉 하나님의 진심을 머리로서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마음은 마음으로 통하는 법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도 ‘유대’ 공회만큼이나 힘들어 하기는 매 일반입니다. 그들이 “왜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힘들어했다면, 나는 반대로 “왜 그리스도가 예수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즉 나의 고민은 이것입니다: “과연 그분께서 나를 향해서도 동일한 진심을 지니고 계실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모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일 만나고 보고 있습니다. 교회를 지나칠 때마다, 누군가 전해주는 전도지를 볼 때마다, 정답은 판에 박은 듯이 나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적어도 내 기억이 미치는 한, 어릴 적에 부모님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고, 부모님 품에 안겨본 기억도 없습니다. 물론 나는 지금 내 부모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겠지요. 다만 우리네 어르신들은 사랑의 표현에 서툴렀을 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에 있어 나는 지극히 서툴고 힘들어해왔던 것이지요. 당연히 그리스도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심이 너무나 자주 전율(戰慄)로 다가오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분께서 나를 향해서도 동일한 진심을 지니고 계실까?” “내가 즐거워할 때 그분도 함께 즐거워하실까?” “내가 분노하고 슬퍼할 때 그분도 역시 같은 기분이실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누가 정답을 말해 준다 해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느끼고 체험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그것도 내 주변에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는 일을 통해서 말이지요. 머리로서가 아니라 가슴으로, 생각으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서 말입니다.
9. 일곱 번째 기적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나는 이 장면은 <나사로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전체에 대한 극적인 절정 내지는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 화자가 일곱 개의 <기적 이야기> 중에서 이 이야기를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요즈음에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기독교 신앙 서적에 이런 유의 책이 많이 알려져 있지요),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회당 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이야기는 <공관복음> 모두에서 소개하고 있으며(마 9:18-26; 막 5:21-43; 눅 8:40-56), <누가복음>은 이에 더하여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나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있습니다(눅 7:11-16).
‘요한’ 화자도 이들 이야기를 알고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는 이들 이야기 대신에 <나사로 이야기>를 예수님의 그 모든 기적 가운데서 가장 으뜸 되는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어가던 시체가 되살아났다는 이야기의 내용도 그렇습니다만 (이 점에서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되살아 난 것과는 기적의 규모면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것입니다만), 기적의 시기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배치하여 그분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 즉 <수난설화>와 연계시키고 있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 당국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했던 결정적이고 직접적인 원인도 바로 이번 일 때문이 아니었습니까(11:45-48)!
하지만 <공관복음>은 다르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유대’ 공회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했던 것은 그분께서 성전에 들어가 한바탕 소통을 벌인 것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마치 <공관복음>은 이 사건에 대해서 전혀 알지도 못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왜 <공관복음>은 이처럼 엄청난 사건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지 정말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나사로 기적”의 역사성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의문을 제기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예컨대, 작고한 유명한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W. Barclay)조차도 본문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날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나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중략) 주후 30 년경에 예수께서 한 시체를 실제 되살렸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죽어있는 자들에게 부활과 생명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에 여러 문제점들이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오래 전 그날 ‘베다니’에서 진정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는 여전히 지금도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점이다(<요한복음>에 대한 그의 주석서 중에서).
그는 그날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역사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오늘 나에게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실존주의적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견해로 인해서 그를 두고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으면 보리라. 불행하게도 ‘바클레이’는 그 엄청난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사도 ‘도마’가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참고. 20:25).
그렇습니다. 서양 금언대로,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입니다. 동양에서도 똑 같은 주장이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 사실 이 두 선언은 모든 과학적 탐구와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떤 주장이나 선언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증거를 통해서 확인하고 증명하기 전에는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아니 함부로 믿고 따라서는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믿기 위해서는 증거들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증거들을 모으고, 수집하고, 분석한 연후에야, 어떤 결과나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결과나 결론은 다른 누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기에 같은 실험을 반복해도 매 번 같아야 합니다. 그럴 때, 가설(假說)이나 이론(理論)은 학설이 되고 사실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진화론은 이론이지 학설은 아닌 것입니다. 반복할 수도, 관찰할 수도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와 같은 과정을 소위 “귀납법적 방법론”이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모든 “실험 과학”(operation science)은 귀납법적 방법론에 근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쉽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바클레이’도 ‘도마’도 증거 없이는 믿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경구는 결코 틀렸다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모든 학문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과학적 방법론에는 치명적인 한계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방법론 자체가 지니고 있는 내재적인 한계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찰자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한계가 그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한계와 관련해서, 과학적 방법론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관찰과 반복 실험이 가능한 것들에 국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볼 수도, 만질 수도, 관찰할 수도, 반복 실험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무슨 수로 이들의 존재를 확인해야 하는 것일까요?
두 번째 한계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오류와 편견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컨대, 과연 나는 내가 관찰한 것이 백퍼센트 정확한 것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하더라도 과연 나는 내가 본 것에 대해서 매번 정확무오하고, 공정하며, 객관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의 이성(理性)은 오류와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타락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나 신탁은 어떻습니까? 그 진위여부를 무슨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들은 과학적 방법론의 대상도, 이성적 탐구의 대상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다른 새로운 방법은 없을까?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제시해주고 있는 대안이 그것입니다. 그분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뒤집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보리라”(40절).
즉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히브리서>도 같은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히브리서> 화자의 간증인 즉은 이전에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렇게 보기를 바라던 것들이, 믿음의 창문을 통해서 바라보니 비로소 보이더라는 것이지요. 다시 강조하자면, 화자는 증거들을 통해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믿음은 나에게서 나올 수가 없는 것이지요. <에베소서>의 선언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축복의 자리에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믿는다”고 말하기보다는 “믿어진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믿어지지 않는 그것이, 나에게는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믿어진다는 사실이 축복이자 특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렛’의 시체가 놓여있던 동굴 앞으로 가서, “나사렛아, 나오너라!”하고 외쳤을 때, 그가 하얀 세마포로 온 몸이 휘감긴 채 컴컴한 동굴로부터 서서히 걸어 나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이 장면을 목도하던 ‘마르다’와 ‘마리아’, ‘도마’를 비롯한 사도들, 그리고 수 없이 많은 무리들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충격과 경악으로 눈알이 뒤집혔겠지요. 나는 역사적 현장이 아닌, 한 낱 TV 드라마를 통해서 이 장면을 보았을 뿐인데도 당시 이렇게 되 뇌이고 있었습니다: “아, 저것이 바로 마지막 날 나의 경험이 되겠구나. 정말 예수 믿기 잘했네.”
<성경>의 어디에 이와 유사한 장면이 있을까? 태초에 창조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우리가 보는 창조 직후의 모습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은 바다”로 뒤덮인 세상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그 모든 것을 뚫고 비치기 시작합니다(참고. 창 1:2-3).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분해와 소멸과 혼돈과 어두움 속으로 사라져가던 ‘나사렛’을 향하여, “나사렛아 나오너라”하셨을 때도 생명과 질서와 빛의 재창조가 장엄하게 재현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감히 어느 누가, 어떤 피조물이 이 능력의 말씀에 저항하며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씀의 능력과 피조 세계의 즉각적인 순종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수 10:12-13)
“나사렛아 나오너라.” 이 짧고도 간결한 한 마디 말씀에 그 모든 자연 법칙들이 일순간 작동하기를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나사로’를 구성하고 있던 원소들과 화학물질들이 서로 연락하고 결합되고, 생명의 기운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가 다시 살아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사망이 그 권능을 잃어버리는 순간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세력이 패배하는 순간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희망하고 고대했던 내일 그곳에서의 부활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며칠 후면 ‘나사로’가 아닌 예수님 스스로 다시 한 번 이 엄청난 사건을 재현(再現)해 보이실 것입니다. 그가 보이실 부활은 ‘나사로’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나사로’는 살아난 후 다시 죽어 마지막 날의 부활을 다시 기다려야 할 것이지만, 예수님은 단 한 번의 영원한 부활을 보이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해주는 가장 극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기에 태초의 엄청난 창조의 순간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순간도 동일한 믿음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그려주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1-55).
그리스도의 믿음. 예수님께서는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하셨고, 그분은 그것을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련한 우리 ‘마르다’, 어찌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셨건만(39절상), 그녀는 불가하다고 말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다’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하). 참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무덤을 다시 파헤쳐 시체를 꺼내라는 요구입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오만불손(傲慢不遜)하며, 반사회적이기 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났습니다. 그들 모두 ‘나사로’가 살아 동굴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의 믿음 때문에 이와 같은 영광의 기적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까? ‘마르다’의 믿음도, ‘마리아’의 믿음도, 이웃의 믿음도 아니라면, 과연 누구의 믿음 때문에 이 일이 가능하게 되었단 말입니까?
대답은 한 가지 밖에 없어 보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믿음 때문에 영광의 기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기도를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참고. 41-42절). 감히 어느 누가 이처럼 대담한 기도를 올릴 수 있겠습니까! 철저하게 하나 되고, 친밀하며, 완벽한 믿음이 없고서야 말입니다.
그것도 혼자서 은밀하게,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믿음이 아니라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믿음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예수님의 답변을 들어보지요: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2절).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믿음은 곧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중략)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또는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16-20)
기독교 삶은 믿음의 삶이며, 그러한 삶의 토대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있다는 선언입니다(16절). 믿음의 삶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대한 헌신과 신뢰의 표현이라는 것이지요.
돌을 옮겨놓으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믿음”과 “돌을 옮기는 행위” 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믿음”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라면, 왜 예수님은 쓸데없는 요구를 하시는 것일까? 왜 쓸데없이 “돌을 옮겨 놓으라”(39절상)고 요구하시는 것일까? 선물이면 그냥 주면 될 것이지, 그 선물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요구는 왜 하시는가? 왜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일까? 왜 은혜와 요구가 양립하도록 하는 것인가 말입니다.
기적을 행함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꼭 누군가를 참여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같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하인들로 하여금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물을 채워 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2:7-8). 왕의 신하도, 자기 아들이 죽어가니 와서 고쳐달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아들이 살았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요구하셨습니다(4:50). ‘베데스다’ 연못가의 삼십팔 년 된 병자에게도,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5:8).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도, 제자들을 향하여, “(무리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막 6:37)고 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게는 더욱 황당한 요구를 하신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맹인의 눈가에 진흙을 이겨 바르고서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참고. 9:5-6). 소경에 대한 요구치고는 너무나 가혹하지 않습니까? 그냥 고쳐주어도 될 것을 가지고 말입니다.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 과연 우리의 참여나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복음은 우리가 믿고 순종할 때 비로소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들 질문에 대해서 속 시원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윌터 브루그만’의 말대로,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와 함께, 때로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리고 때로는 우리의 의지에 반(反)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일관성이 없으며, 때로는 상충(相衝)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이성(理性)의 눈으로 바라볼 때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자유나 주권(主權)이 이성의 영역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또한 우리가 “옮겨놓아야 할 돌”, 즉 “무지(無知)나, 오만(傲慢)이나 편견(偏見)의 돌”이 아닐까요?
“돌을 옮겨 놓으라”는 주님의 요구는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적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무리의 순종이 기적의 필요조건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무리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무리의 의지에 반해서 ‘나사로’를 살리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무리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요구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고, 주(主)님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4-35)
10. 그리스도를 어떻게 할까?
미국에서 실재 있었던 일입니다. 1954년 12월 21일 자정에 거대한 홍수로 지구가 멸망한다고 예언한 종교가 있었습니다. 교주는 신도들에게 재산을 모두 자신에게 바치게 하고 멸망에 대비하도록 지시했고, 신도들은 교주의 지시에 따라 모두 한 자리에 모여 12월 21일 자정의 명망을 기다렸습니다. 그날 숨죽이고 기다리던 12월 21일 자정이 되었지만 홍수는커녕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신도들이 속았다고 분노하며 교주에게 달려갔을까요? 교주는 새벽에 신도들에게 새로운 계시를 내립니다: “너희가 간절하게 기도한 덕분에 하나님께서 지구 멸망을 유예하셨다.” 신도들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과 교주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인지부조화. 이것이 그 유명한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이론을 낳게 한 사건입니다.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는 1950년대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가 주장한 이론입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의 태도와 행동 간에 일관되지 않거나 모순이 존재할 때 이러한 비일관성이나 모순을 불쾌하게 여겨 이것을 감소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모순을 줄이기 위해 사람은 태도나 행동을 바꾸려 시도하는데, 태도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지만 행동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으므로, 행동에 맞게 태도를 바꾸게 된다.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도 이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신도들로서는 전 재산을 팔아 바치고 종말에 대비했는데,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불편합니다. 예정되었던 지구 멸망이 연기되었다는 새로운 계시를 믿는 것이 편합니다. 그렇게 해서 인지부조화를 해결합니다.
이 내용은 최근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된 <이기적 진실>에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왜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신도들에게 처음부터 1954년 12월 21일에 대홍수가 일어날 예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믿고 싶은 사실을 선택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사이비 종교 신도들에게만 국한된 현상은 아닙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 인간이 보편적으로 보여 온 일종의 병리 현상인 것입니다.
디지털 혁명이 일어나고 정보가 넘쳐나게 되면 이와 같은 현상은 사라질까? 정 반대라는 것이 저자의 관찰입니다. 즉 정보가 넘쳐날수록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기사나 정보를 접할 수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의 사실에 엇갈린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접하는 사실 자체가 여러 개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지각 능력을 손상시켜버렸습니다.
저자는 미국이 지금 그렇다는 이야기인데, 한국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가 않습니다. 북한의 핵개발은 동족에게 사용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오직 미국을 겨냥한 방어용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북한이 천안함을 격침시켰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국이 미국과 FTA를 체결하면 미국의 식민지가 될 것으로 믿으며, 미국은 광우병 위험이 없는 쇠고기는 자기네들이 먹고 위험이 있는 쇠고기를 수출한다고 믿습니다.
디지털 혁명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속하는 우리나라는 마음에 드는 사실을 뒷받침할 정보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골라잡아 믿고 싶은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객관적이고 엄정한 사실이나 진리? 애초에 그런 것은 없으며 있다 해도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가치 상대주의”가 아니라 “사실 상대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수없이 많은 탈북자들이 북한의 참상(慘狀)에 대해서 한 결 같은 목소리로 증언하고 고발해도, 소위 주사파(主思派) 종북주의자들에게는 마이동풍(馬耳東風)입니다. 이들은 오히려 탈북자들을 변절자라고 하며 미워하고 학대하기까지 합니다. 북한의 인권이나 삼대 세습 등에 대해서 이야기라도 하려하면 이념 논쟁이니 색깔론이니 하며 극렬하게 반응하고 나섭니다. 도대체 왜 이처럼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조차도 애써 외면하는 것일까?
저자는 이들이 소위 “선택적 노출”이라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믿고 싶은 사실에 어긋나는 정보는 무시하고, 믿고 싶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정보만 모으고,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하고만 의사소통을 하는 “선택적 노출”을 통하여 터무니없는 사실을 사실로 믿는 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저자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신병이 다른 신참들과 같은 사단에 배치되었을 때 자신이 전장에서 사울 수 있을 것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신참 병사가 역전의 용사들 틈에 들어갔을 때에는 싸울 수 있다고 느끼는 비율이 두 배에 이르렀다는 조사 결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특정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는 의견이 지배적이면, 그 집단의 믿음이 구성원 각각에게도 엄연한 사실로 자리 잡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 대신에 이념적, 심리적, 감정적, 심미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어울립니다. 즉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정보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선택하는 “선택적 노출”을 통해서 사회 집단을 형성하게 됩니다. 우리말에 유유상종(類類相從)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소위 진영논리(陣營論理)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는 천안 함이 사고나 자작극이라는 망령이 떠돌 듯이, 미국에는 9․11이나 ‘아폴로’선 달 착륙이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망령이 떠돌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미국인의 1/3이 9․11 테러가 미국 정부의 자작극이라고 믿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확인물체”(UFO)에 관한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교회에도 이에 대해서 소위 음모론을 신봉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정보가 넘쳐나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사람들의 편향성은 더욱 심해질 뿐입니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도 인터넷을 뒤져보면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아낼 수가 있으니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그만인 세상이 된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제 세계는 “진실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공회의 인지부조화. 지금 공회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인지부조화라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나사로의 기적>은 ‘요한’ 화자가 기록하고 있는 일곱 표적 가운데서 절정에 해당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 중, “빛과 생명의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날 그 장면을 목격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다고 기록함으로써(45절), 표적과 믿음이라는 <요한복음> 특유의 모티브를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또 다른 모티브를 지닌 채 반(反) 절정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불신과 배척”입니다. 그 엄청난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 일 때문에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공회의 모습은 달리 설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실” 즉 ‘팩트’(fact)는 무엇입니까? “나사로가 되살아났다”입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예수가 나사로를 되살렸다”가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적이고 기대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즉 그 사실을 보았으며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호하게 될 것입니다(참고. 12:9-13, 17-19).
하지만 공회 지도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한사코 진실을 외면하고, 다른 진실을 찾아내려 했습니다. 자신들의 인지부조화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길을 택했습니다(53절). 아시다시피 공회는 무슨 정치 집단이나 사법기관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기관에 가까웠다 할 수 있을 것인즉, 이곳에서 사람 잡아 죽이는 일을 모의하고 의결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나 스님이나 신부님이 살인모의(殺人謀議)에 가담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공회를 구성하고 있는 두 집단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공동의 적을 퇴치하기 위하여 서로 간의 적개심은 일단 덮어두기로 했습니다.
사상이나 이념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판에서도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정치 집단이 아닌 목회자 집단인 ‘유대’ 공회는 그렇게 해서 소집되었고, 하나의 합의사항을 도출해 냅니다. 그들은 언필칭 입만 열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율법을 가르치며, 국가나 민족을 염려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고 ‘사두개’인들이고 할 것 없이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신들의 안위 즉 기득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하여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진영논리였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거만한 충고가 이를 대표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 하는도다”(50절). 지극히 온당하고 합리적인 말 같습니다만, 조직의 보호를 위해서는 한 사람의 희생쯤이야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인 것이지요. 그나마 그 한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인 것을 말입니다!

사필귀정. 이처럼 편향되고 사악하기까진 한 진영논리가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칠 수 있을까요?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은 말할 것도 없고, 내 민족이나 국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갑론을박(甲論乙駁) 논의를 벌이고 있는 공회를 향해서 무슨 대단한 지혜자나 선지자가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고 있는 모습을 봅시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49절).
그 자리에 모인 다른 모든 사람들을 우습게 알지 않고서는 어찌 이 같은 발언을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충고는 참석자들 모두를 감동시켰나봅니다. 그의 설득은 성공했고, 사람들은 그의 제안을 그대로 수용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즉 모두를 위해서 한 사람을 사지(死地)로 내몰기로 말입니다.
공회의 결정은 그 유명한 “아사셀 염소”를 상기시켜주기에 충분합니다. ‘아사셀’이란 “보내다”는 뜻입니다. <레위기>에 따르면(레 16:6-10), 대제사장은 대속죄일에 자신들의 죄를 대신할 속죄 제물로 ‘아사셀’ 염소를 지정하여, 그의 머리에 안수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전가한 후, 그를 광야로 끌고 가서 절대로 돌아올 수 없는 완전 무인지경에 이르러 캄캄한 밤에 버려두고 옵니다. 그 염소의 운명은 굶어죽거나 맹수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제안은 수사적(修辭的)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제안은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공동체는 소수의 희생과 봉사로 유지되고,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조지 바너’(G. Barner)가 그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 통계에 따르면,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도 이런 식으로 유지해 간다고 합니다. 즉 12,000명 회원을 가진 교회에서 실제 120명 정도만이 어떠한 형태로든 직분을 가지고 봉사할 뿐, 나머지는 모두 손님으로 예배만 참석하고 간다는 것이지요.
‘가야바’는 공회를 설득시키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총독 ‘빌라도’를 설득시키는 데에도 성공을 거둡니다. 만일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주면, 자칭 왕이라는 자를 풀어주게 되는 것이니, 이는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에 다름없다고 협박했기 때문입니다(참고. 19:12-13).
하지만 그의 성공은 여기까지입니다. 모두를 위해서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기대였으며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결말은 그가 바라는 바대로 끝나지 않았다는 데 더 큰 역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잡아 죽였고, 예상되는 위험을 사전에 제거하는 데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민중 봉기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이는 ‘로마’의 개입을 부추겼고, ‘예루살렘’은 주후 70년 ‘디도’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철저하게 멸망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유대’ 성전이 있던 땅은 쟁기로 갈아엎어져 이전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공회가 자신과 민족을 구하기 위해 취했던 조처가 역설적으로 정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채 끝이나버린 것이지요.
“만일 예수를 그대로 두면 사람들이 그를 믿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48절)는 것이 공회의 예상이었습니다. 과연 사람들은 그를 믿었고, 그들은 그를 잡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유대’ 땅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온 땅에 퍼지고 된 것은 예수께서 살아있을 때가 아니라 그분이 죽고 난 뒤였습니다.
예수를 어떻게 할까? 이와 같은 역설을 <잠언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가야바’의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선택에 대한 준엄한 대가를 치러야 할 뿐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온 민족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선택으로 온 민족이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시편>의 시인은 공회의 결정을 이렇게 조롱하고 비웃고 있습니다:
2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 2:2-4)
오늘날 나는 그분을 어떻게 하려 합니까? 우리교회는 그분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 자신의 선택의 노예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진리 안에서 자유 할 것인가 두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나사로 이야기>의 핵심 주제를 말할 수 있습니까? 본문 중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해당 구절을 암송해 봅시다.
2. 부활과 생명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이해하고 있던 바는 무엇이었으며, 예수님의 계시는 무엇이었습니까? 답변을 위하여 본 교재 제 1권의 <서론>에서 <요한복음>의 신학을 다시 참고해 봅시다.
3. 사도 ‘도마’의 결단을 통해서 화자 자신이 처해있던 “삶의 자리”를 추측해 봅시다. 오늘 나와 우리교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4. 대제사장 ‘가야바’의 역설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5.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물었던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왜 기도나 헌신이 구체적이고, 점검과 확인이 가능해야 합니까? 예배 시 내가 드리는 대표기도는 어떻습니까? 구체성이 없는 수사(修辭)나, 의미 없는 중언부언(重言復言)의 연속은 아닙니까? 또는 정확하게 무엇을 간청하고 있는지 그 목록을 만들어 나중에 응답 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께 원망이나 또는 감사를 드릴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것입니까? 이번 한 주 적용 목록을 지금 당장 만들어 서로 나누고, 다음 주 확인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