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18:38).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9:26-27).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9:30).
1. 머리 말
다른 복음서에서도 그렇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들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수난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는데, 그 첫 부분이 그 동안 공부해 왔던 고별설교(편의상 수난설화(1)이라 부릅시다)와, 세 단계의 설화 구조를 지니고 있는 수난설화(2)가 그것입니다. 그 세 단계란 다음과 같습니다: 배반(18:1-11); 재판(18:12-19:16); 십자가상에서의 죽음(19:17-42)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배신 장면은 간략하게 표현되는 반면에, 재판은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재판에서도 그러하듯이 재판 장면은 사실상 드라마의 무대 위에 올려지는 것과 같으며, 분위기도 온갖 소리들로 난무합니다: 의심의 소리, 모욕, 부인,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요구하는 소리, 등등.
우리 주님의 수난 이야기는 각 복음서들의 절정이자 성경 전체 이야기의 절정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이 이야기는 성경 문학의 나머지 부분들이 향하고 있는 중심점입니다. 이 이야기는 구약성경의 예법과 예언들, 구약성경의 표본들, 그리고 고난받는 종에 대한 성경적 원형을 이행하고 완성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소 길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가 주는 극적 효과를 맛보기 위하여 요한 해설자의 의도대로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취급하여 다루어 보기로 합시다.
2. 양식/구조/배경
1) 양식: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의 내용은 그 출처가 서로 다른 일련의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 다른 양식이 발견되고 있는데 시적 찬미로 이루어진 서언(1:1-18)과 설화양식으로 이루어진 표적 이야기(2:1-12:36)와 역시 설화양식인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13:1-20:31)가 그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이 수난 설화의 기본 골격은 초대교회 시절 사도들의 케리그마(즉 선포나 설교)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복음(예: 고전 15:3-4)들로부터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이런 것 몰라도 됨. 그러나 알아서 손해 볼 것은 없는 것들임).
2) 배경: 이 설화의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 자신의 삶의 자리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만 그러나 모든 성경 이야기가 다 그러하듯이 그 이야기가 처음으로 들려지던 당시의 삶의 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설화자(내포 저자)의 삶의 자리를 추측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물론 요한공동체의 삶의 자리이기도 합니다(우리는 요한 공동체의 삶의 자리에 대해서는 요한복음(1)에서 이미 다루었습니다).
3) 구조: 이 부분의 구조는 아주 명확한 것이, 위에서 밝힌 바처럼 크게 배반-재판-죽음의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단락은 다시 일곱 개의 작은 단위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전개 방식은 한 방향을 향해서 연속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래에 다소 인위적이다 싶을 정도의 단락 구분을 해 놓았으니 각 소 단락의 제목들을 달아보시기 바랍니다:
(1) 제 1단락: 체포및 대제사장 앞에서의 재판(18:1-27)
① 1-3절:
② 4-9절:
③ 10-11절:
④ 12-14절:
⑤ 15-18절:
⑥ 19-24절:
⑦ 25-27절: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2) 제 2단락: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18:28-19:16a)
① 28-32절::
② 33-38a절::
③ 38b-40절::
④ 19:1-3절::
⑤ 4-7절::
⑥ 8-12절::
⑦ 13-16a절::
(3) 제 3단락: 처형과 재판과 장사(19:16b-42)
① 16b-18:
② 19-22절:
③ 23-24절:
④ 25-27절:
⑤ 28-30절:
⑥ 31-37절:
⑦ 38-42절:
3. 주 석
3-1. 제 1단락(18:1-11): 체 포
1) 1-2절. 주님의 수난을 알리는 첫 두 구절은 이 이야기가 앞의 고별 기도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2절 후반에서 언급되고 있는 장소는 특히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유월절 밤을 수시로 보내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3절. 이 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때와 등장인물들과 소품들이 주는 효과를 감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분명 마가가 그리고 있는 동일한 이야기(막 14:43-50을 함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에 대한 해설자 자신의 신학적 재해석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상호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4-6절. 요한 해설자의 의도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이 단락에서 묘사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동에 관한 표현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공관복음의 그것과 상이한 점을 발견하실 겁니다. 당신은 분명 당신이 발견한 새로운 깨달음에 탄복하실 겁니다: “아니, 이렇게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을 줄이야...역시 성경은 대충대충 읽을 것이 아니구먼...” 다음의 구절들은 저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좋은 힌트가 될 것입니다:
(1) 요 6:20; 8:28; 8:54:
(2) 겔 1:28; 단 10:9; 행 9:4; 계 1:17;
(3) 시 27:2; 34:4; 56:9;
4) 7-9절.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는 해설자의 의도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17:12와 관련해서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5) 10-11절. 글쎄요, 너무 지나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겠지만 요한 해설자는 공관복음 기자와는 달리(막 14:47-), 베드로와 말고의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혹자는 이를 두고 요한 공동체가 베드로 등과 같은 사도적 전통을 고의로 낮추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알 길은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수난의 의미에 대해서 대 사도 베드로의 무지입니다.
이 본문이 당시 요한 공동체를 향한 메시지가 있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인 바, 당신의 적용점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의 질문을 토대로 해서 피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옥죄어 오는 어둠의 연합 전선은 없는지, 있다면 그에 대한 나의 대처는 무엇이었는지...
3-2. 제 2단락: 안나스 앞에서의 심문과 베드로(18:12-27)
이 단락은 앞선 구조 분석에서는 첫 번째 단락에 포함시켰던 것입니다만 이 부분이 주는 내용의 흥미진진함으로 인해서 별도 단락으로 취급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단락을 통해서 요한 해설자의 문학적 천재성의 일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뛰어난 구성과 수사(역설, 대조 등)가 그것입니다. 무엇과 무엇이 대조되며 무엇이 역설인지 심도 있게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배경부터 간단히 살펴봅시다.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어떠한 무리들이 동원되었는지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체포에 직접적인 책임을 맡았던 자들은 성전의 치안을 담당했을 “유대인의 하속”들이었으며,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소요사태에 대비해서 로마 군대가 함께 출동했을 것입니다(18:12). 예수께서 붙잡히시자 로마 군대는 돌아가고 성전지기들은 예수님을 우선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에게로 끌고 왔습니다. 주님께서 안나스에게로 먼저 끌려 왔다는 사실은 요한복음에서만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가 당시 대제사장도 아닌데도 왜 하속들이 주님을 그에게로 먼저 끌고 갔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전직(주후 6-15) 대제사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한동안(주후 17-41년) 그의 아들들이 계속해서 제사장직을 독점하였고, 당시 제사장 역시 그의 사위인 가야바로서 그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수난설화(2)의 제 2막의 흥미진진한 내용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1) 12-14절. 본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사건이 있고, 이 사건은 다른 두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무엇이며 상호 대조되는 두 장소는 어디입니까?
두 사건의 주인공의 이름은 무엇이며 이들을 심문하는 자는 누구이며 또한 이들 두 주인공의 태도는 어떻게 대조되고 있습니까?
2) 15-16절. 15절은 베드로와 또 한 사람-또 다른 제자-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입니다. 왜 베드로의 이름은 드러내 놓고 있는 반면 이 제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능한 이유 중의 하나가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이 요한 공동체의 삶의 자리와 밀접히 연관된 그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대조에서 드러나는 어떤 역설(irony)을 감지할 수 있겠습니까?
3) 17-18절. 공관복음에서는 베드로에게 그의 신분에 대해서 물었던 자가 한 소녀라고만 쓰고 있는데 반해서, 요한기자는 그녀가 문지기 하녀라고 상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제자가 그녀에게 부탁하여 베드로를 집안으로 데리고 오도록 하고 있습니다.
4) 19-24절. 여기서 심문자는 안나스이고 피심문자는 물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일 뿐이고, 이 심문 사건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내포독자들에게 거짓 심문자로 고발당하고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습니까? 아는 바대로 열거해 봅시다.
이것이 바로 내포저자가 노리는 수사적 효과인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 은밀히 가르치는 것이라면, 거짓 제사장의 특징은 은밀히 재판하는 것입니다(신 13:1-10). 이러한 효과가 우리에게 적용 내지는 교훈은 이겁니다: 세상의 잘못된 판단에 대하여 우리의 올바른 증거와 행동은 세상을 정죄하는 효과를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5) 25-27절. 이제 다시 한 번 장소가 안에서 바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장소는 안나스의 바깥뜰인 반면 공관복음에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누가 누구를 심문하고 있습니까? 피심문자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역시 앞에서 했던 대로 이 이야기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내포저자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는 교훈적인 적용점은 무엇인지. 각자 나누어 보되 구체적인 헌신과 각오의 내용을 한 가지씩 피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소감:
(2) 적용:
3-3. 제 3단락: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18:28-19:16a)
예수님에 대한 재판 과정을 공관복음 기자와 요한 기자는 다소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 복음서에서는 공회와 가야바 앞에서의 재판 과정이 생략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안나 앞에서의 재판 과정 역시 아주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대조적으로 빌라도 앞에서의 이 재판은 비교적 상세하고도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공관복음서에서의 기록과 다른 점은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가 먼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점입니다(33절). 바로 이 점이 요한 기자가 계속해서 의도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계시이자 선언인 것입니다. 이 선언은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처럼 이방인 빌라도의 질문과 예수님 자신의 답변에 의해서 선언되고 계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이 단락이 갖는 수사적 기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죠?
1) 빌라도에게 넘겨짐(18:28-32)
(1) 28절. 28절과 31절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들의 정체는 아마도 유대 공회원들인 것같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예수님을 로마 관청에 데려가는 그들의 신속함과 결연함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이처럼 나쁜 일에는 아주 잘 헌신되어 있습니다. 참 이상하죠? 사람을 미워하는데도 역시 그렇습니다. 한 번 사람에게 실망하여 돌아서면 좀처럼 회복하여 돌아오기 어려워집니다. 그 이유는 그가 헌신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님을 빨리 처단하고 돌아가 유월절 행사를 기념하려고 했던 것. 그래서 그들은 로마 관청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28절). 왜 그럴까요? 이방인의 처소이기 때문에 불결하여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민 9:6-12을 참고해 봅시다.
자,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참으로 기막힌 해학과 역설을 만나게 됩니다.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한 번 추측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동원되는 자신의 불결함이나 사악함에는 아무런 개의함이 없으면서, 이방인의 처소에 들어가 자신을 불결하게 함으로써 유월절 축제에 참석을 못하거나 또는 최소한 한 달 후에나 참가할 것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걱정하고 있는 이들을 봅시다. 오늘 우리는 어떤 비슷한 실수를 저질러지는 않습니까?
바로 이러한 모순된 그들의 태도는 이 재판 장면을 아주 흥미롭게 두 장면(관청 안과 밖)으로 분리해 놓고 있습니다. 재판관이 그래서 그 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진풍경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장면은 설화의 극적 효과를 고조시켜 준다는 점도 있지만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빌라도와 예수님 사이에서 오고가는 중요한 계시적인 대화로부터 유대인들이 배제되고 있다는 수사적 기법 그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솜씨입니까! (아니 그렇게 깊은 의미가 있을 줄이야!!! 과연 김태정 전도사님은 도사이십니다.)
(2) 29-30절. 이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그들(정확히 누구인지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에게 예수님에 대한 기소 이유를 묻습니다. 글쎄요, 혹시나 빌라도가 그들의 편에 서서 순순히 재판도 없이 그들 손을 들어줄 줄 알았다면 크게 당황스러운 질문이 되었겠죠? 유대인들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3) 31절. 그러나 이에 대한 빌라도의 대응은 어떻습니까?
아주 해학적이고 모독적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법을 어겼다면 그것은 그들의 법대로 다스리면 될 것을 왜 자기에게 가져왔느냐는 물음이 될 것이고, 반대로 그가 죽을죄를 지었다면 그를 죽일 권한은 유대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 당국에 있느니 만치 그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는지를 분명하게 밝혀달라는 요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소 당황스럽고 멋쩍은 질문이겠죠? 짜아식들, 괜히 죄없는 사람 잡아다가 죽일 궁리를 하고 있으니...
(4) 32절. 요한 해설자도 저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32절의 해설을 한 번 일어 보세요. 대 제사장은 분명히 예수님이 어떤 숭고한 대의명분을 지닌 순교자의 죽음을 당하는 자로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는 자로 알리고 싶은 것인데, 해설자는 분명히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인류의 구원자로서 죽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5) 33절. 다시 장면은 바뀌어 빌라도가 관청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직접적인 심문을 시작합니다. 제 1차 재판인 셈입니다. 심문의 첫 질문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무엇입니까?
여기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은 물론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위한 번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공관복음서에서는 즉각적인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기자는 그 대답을 37절까지 미루어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34-36절에서 소개되는 대화는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6) 34-36절.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그 질문이 누구에게서 나온 것이냐고 묻습니다. 피고석에 앉은 자가 이런 질문해도 괜찮은 겁니까? 아마 이런 의도겠죠. 즉 “네가 묻는 질문이 네가 정말 나를 그렇다고 인정하고 하는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유대인들의 나에 대한 기소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냐?” 이에 대한 빌라도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당신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살려서 35절을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연극 대사를 외우듯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사람의 상대에 대한 의도나 저의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혹시 아시겠습니까? 나름대로 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36절에서 먼저 예수님의 의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정에서의 단순한 피의자 진술로 보기에는 너무나 큰 빛이요 계시입니다. 빌라도가 알기를 바라는 것이죠. 일견 그에게 지금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피의자가 재판관에게 기회를 준다? 이 얼마나 멋진 역설입니까? 무엇에 관한 계시가 어떻게 주어지고 있습니까?
따라서 예수님의 이러한 진술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도전이요 초청인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초청의 형식을 갖추든 않든 그것을 듣는 자에게는 양단간 선택을 요구하는 일종의 도전이요 초청인 것입니다.
(7) 37절. 이러한 진술을 통해서 빌라도가 예수님이나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해서 갖게 되는 느낌은 어떠한 것일까요? 37절의 그의 질문을 중심으로 추측해 봅시다. 실은 질문이 아닙니다만...
이러한 빌라도의 자기 확신에 예수님의 답변이 주어집니다. 보다 명시적이고 긍정적인 선언인 셈입니다. 그 나라의 특징이 무엇이라고요?
(8) 38절. 하나님 나라에로의 초청을 결국 빌라도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같습니다. 그의 그 유명한 질문 “진리가 무엇이냐?”는 실은 모든 불신자들을 대표해서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하는 자나 또는 이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갖고 있지 못한 자는 결국 그 나라에 속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재판을 통해서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서나 또는 그 나라에 대해서 내리게 된 한 가지 결론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2) 빌라도의 무죄 선언(1차)(18:38b-40)
(1) 38-39절. 다시 빌라도는 관청 바깥으로 무대를 옮깁니다. 유대인들에게 그의 결론을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그가 들을 수 있는 반응은 단지 오직 한 가지 소리뿐입니다. 그것도 한결같이 말입니다. 다음 구절들을 소리내어 읽어봅시다: 40절; 19:6, 12, 14, 15. 그리고 당신의 소감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반응에 대해서 빌라도가 제시했던 한 가지 묘책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소심함이나 유약함이 엿보이는 곳이기도 합니다만. 이러한 그의 타협안은 무엇이었으며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러나 유대인들의 머리는 그의 머리를 앞지르고 있습니다. 괜히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고, 또 공자 앞에서 문자 쓰다가 혼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오히려 더 큰 곤궁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불법자를 방면하고 의법자를 처단하라는 요구 아닙니까? 요즈음 우리 나라 처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법 제대로 지키는 사람 치고 손해 안보는 사람 별로 없다 이겁니다. 그건 그렇고 유대인들의 이러한 요구가 갖는 역설은 그 불법자의 이름 역시 바라바(= 아버지의 아들)로서 예수 바라바(= 아버지의 아들 예수)와 그 이름이 동일하다는 것인데, 나자렛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 예수를 그들은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채찍질과 조롱(19:1-3)
(1) 1절. 빌라도의 행위에 어딘지 미심쩍은 데가 있습니다. 분명히 그는 자신이 심문한 바에 의하면 피의자가 아무런 죄가 없음을 알았는데도 그를 채찍질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참고로 막 15:15와 눅 23:16을 함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면 그냥 풀어놔 주면 될 것을 괜한 짓을 하고 있는 이 자도 참 한심한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람 때리는데 무슨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이건 분명 예수님을 방면해 주려는 그의 두 번째 시도라고 보아야겠죠.
(2) 2-3절. 이어지는 야단법석을 관찰해 봅시다. 얼마나 잔인하고 가혹한 짓들을 로마 병정들이 저지르고 있는지 말입니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예수님은 지금 분명 왕의 모습으로 좌정하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면류관, 왕의 홍포. 그리고 열방들이 와서 그에게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하면 인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왜입니까?
4) 빌라도의 반복되는 무죄선언과 유대인들의 거부(19:4-7)
(1) 4-5절. 글쎄요,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현재 몰골이 말이 아니었겠죠. 만왕의 왕이시며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왕의 홍포를 입었어나 군병들에게 조롱 당하고 얻어맞아 머리는 풀어지고 얼굴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형색은 꽤재재하고 어깨는 축 늘여뜨려진채 병사들에 의해 붙잡혀 나오는 장면을 한 번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얼마나 희극적 묘사입니까! 그래서 빌라도가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세요. 무어라고 외치는지... 그의 두 번째 확신에 찬 선언이자 애원이고 호소에 가까운 절규가 아닐까요? 당신 자신이 말로 감정을 섞어 그의 선언을 재구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2) 6절. 그러나 그의 작전은 다시 한 번 좌절을 맛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을 적어 보세요.
이에 빌라도는 자포자기 내지는 화가 치밀어 오른 것같습니다. 아니 도대체 점령지의 지배자가 말하는 소리에 아랑곳없이 한결같이 그를 알기를 우습게 알며 주장을 굽히지 않는 이들 피지배자들의 당당함과 당돌함에 뿔다구 나지 않을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이러한 그의 기분을 그의 선언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의미인지... 그가 진정으로 유대인들에게 사형 집행권을 주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도 발견해 봅시다.
(3) 7절. 이에 대해 유대인들을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새로운 기소 내용으로 대항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것은 분명 심각한 신성모독 행위입니다. 그가 단순히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고 선언한 것도 심각한 죄이거늘,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오늘날 유대인들은 바로 이 점을 아직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5) 빌라도의 두 번째 심문(19:8-12)
빌라도는 할 수 없이 그의 관저로 들어가 다시 한 번 그의 재판을 시도합니다. 이 심문 과정에서도 여전히 첫 번째의 그것(18:33-37)과 같은 주제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예수님의 기원과 권위 등에 관한 것들). 차이가 있다면 이 두 번째 심문과정은 첫 번째에 비해서 보다 포괄적이라는 것입니다.
(1) 8절. 유대인들의 새로운 기소(7절)를 듣고 빌라도가 더욱 두려워했다는데 왜일까요? 그는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했을까요?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지만 혹시 다음과 같은 당시의 일반적인 믿음의 결과 때문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① 행 14:11;
(2) 9절. 그의 질문을 통해서 이 점을 알 수 있겠죠?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마치 사 53:7을 연상케 하는 장면인데, 왜 예수님은 묵묵부답이었을까요?
(3) 10-11절. 그러자 빌라도는 갑자기 두려움에서 불안함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여태 여러 사람들을 심문해 보았지만 이 피의자처럼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당돌한 자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겠죠. 그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과시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의 그러한 말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같습니다. 어차피 자신의 해야 할 일을 알기 때문이겠죠. 목표의식이 뚜렷하면 다 이렇게 되는 법인가 봅니다. 나는 아직 이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해서 간혹 헷갈리는 짓을 하기도 합니다.
(4) 12절. 빌라도는 분명 예수님과의 계속되는 대화를 통해서 무언가 깊은 영향을 입은 것같습니다. 보세요. 그를 방면해 주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번에는 무슨 명분으로 그를 놓으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으니 요놈의 유대인들의 카드는 무궁무진합니다. 이번에는 무슨 카드로 빌라도를 압박해 옵니까?
아주 사악한 자들입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자들 치고 제대로 되먹은 자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가 막힌 역설을 보게 됩니다. 점령지의 지배자요 통치자가 오히려 피지배자들의 공격에 속수무책 당하고 잇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6) 빌라도의 선고: 십자가형(19:13-16a)
빌라도의 재판은 이제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19:4-7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상황은 급박하게 돌변하여 빌라도는 자신의 입지마져도 위협받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이 일단의 사악한 유대인들에게 철저한 패배의 수모를 맛보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모독적인 일입니까?
(1) 13-14절. 그러나 빌라도는 그냥 호락호락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 자신의 보복의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는 중입니다. 그가 거쳐가고 있는 절차를 우선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빌라도가 아니라 내포저자(요한기자)가 그 작업을 대신하고 있습니다만. 우선 이 재판이 모든 비방자들과 고소자들 앞에서 공식적인 위엄을 갖추고 진행되는 재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의도는 뭐 이런 거 아닐까요?: “온 동네 사람들아 와보라, 이 사람들의 하는 짓을...” 그들이 하는 짓이 무엇입니까? 이 재판의 일시와 장소와 시간까지 정확히 해설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적어 보세요.
이 시각에(정오)는 유대인들은 모든 일을 멈추고 집에서 무교병을 꺼내오고, 유월절 양을 도살하여 사실상의 유월절 행사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역사적으로 바로 이 시점에 그들은 출애굽의 엄청난 은혜를 목도하고 체험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시각에 그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을 유월절 제물로 바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얄궂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까? 그래서 이 날은 제 2의 출애굽 사건이 될 것이었습니다.
빌라도의 최후 선언을 통해서 드러나는 요한기자의 고소를 들어보세요. 아주 뜻밖의 선언입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극적인 효과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선포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의 주제 바로 그것 아닙니까?
(2) 15절. 유대인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빌라도의 반응은 또 어떠합니까? 감정을 섞어 다시 적어 보세요. 이러한 그의 질문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기자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어지는 유대인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이 선언에서 느껴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3) 16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Ibis in crucem!”
3-4. 제 4단락: 십자가와 죽음과 장사(19:16b-42)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네 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상당한 차이가 발견됩니다. 크게 두 가지 정도의 놀라운 사실이 있는 바, 첫째는 네 기록이 가지는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이 그것이고, 둘째는 요한복음서만이 갖는 독특한 묘사가 그것입니다.
마가에서 발견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요한에게는 없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이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의 예수님에 대한 조롱(막 15:29-32); 온 땅에 임한 어두움(15:33)에 대한 기록; 유기의 절규(15:34); 성전 휘막이 찢어지는 사건(15:38);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백부장의 고백(15:39). 이 기록들은 마태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것들입니다. 누가는 이 외에도 몇 가지를 더 추가하고 있습니다: 골고다 상에서의 여인들의 울음(눅 23:27-31); 원수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23:34); 십자가상에서의 두 강도와의 대화 및 한 강도의 회개(23:39-43); 사람들의 애곡(23:47-49).
요한복음에만 고유한 기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십자가상에 새겨논 글귀(19:19-22); 예수님 자신의 성경 인용(24, 28-29, 36-37절); 어머니를 맡기신 일(25-27절); 마지막 절규(30절); 옆구리를 찔리신 일(31-36절). 적어도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상당히 선택적으로 그의 자료들을 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 개의 기적 사건들도 역시 그러했습니다만. 이러한 선별적인 자료들의 선택을 통해서 그가 의도했던 바는 역시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는 그의 죽음에 관한 이상하리 만치 간단한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8절을 단 세 단어로 이루어진 종속절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못박을 새...” 복음서 기자들의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애써 설명을 덧부치면서 그 의미를 심화시키려고 노력해 왔던 기독교 사가들이나 오늘날의 설교자들의 태도와는 지극히 대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처참한 죽음을 어쩌면 그렇게 간단히 세 단어로 기술해 버리고 말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도 품을 수 있는 한 가지 의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 십자가의 처형의 잔인성이나 참혹성을 제대로 체험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독자들에게는 이 세 단어의 의미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가장 강력하고도 끔찍한 표현이자 묘사였을 겁니다.
1) 처형(19:16b-18)
(1) 16b-17. 여기서 “저희”는 유대인들이라기보다는 처형을 담당할 네 명으로 이루어진 로마군병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23절). 그들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의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할 것입니다. 당시 모든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자기의 십자가(실은 완성된 십자가라기 보다는 십자가를 만드는데 필요한 나무틀 같은 것들이겠죠)를 메고 형장까지 걸어가야 했다고 합니다(역사가 플루타크에 의하면).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십자가의 수평 부분의 나무 위에 죄수를 눕혀서 팔을 벌려 손바닥 위에 못을 박은 다음 일으켜 세운 다음 그것을 메고 처형장까지 걸어가서 그곳에 늘 세워져 있는 십자가의 수직 부분에 해당되는 나무 막대 위에 매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골고다 언덕에는 항상 그러한 나무 막대가 서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누가 죄수의 십자가를 대신 메고 가려고 하겠습니까? 로마군병들이요? 다른 죄수들이요? 요한도 이 점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공관복음의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예를 들어 마가는 예수님 대신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억지로 이긴 하지만 대신 진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막 15:21 이하).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시렵니까? 전통적으로는 예수님께서 골고다를 향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중간에 쓰러져 대신 시몬이 진 것으로 조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눅 23:26에 대한 해석도 시몬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전혀 무리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러면서도 요한 해설자의 의도도 감지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의도가 있을까요? 앞선 18:1-12 사이에 드러난 기자의 의도를 여기서도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자는 이 본문 속에 “이삭의 모티브”도 들어있다고도 합니다. 그럴 듯 합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이 오늘날 제자도와 관련하여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요?
(2) 18절. 요즈음 회교권 국가에서도 그러하듯이 당시 로마에서도 범법자를 처형할 때 많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공공 장소(성벽이나 도심지)에서 행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로마의 황제 디도는 공개적인 처형장소로 성벽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요한 해설자는 그 장소로 골고다를 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 사람들이 예수께서 들리시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려는 듯 합니다. 마가에 의하면(막 15:27) 좌우에 함께 처형당하는 사람들은 도둑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들은 아마도 바라바와 함께 당시 자유와 해방 운동을 벌이던 투사들이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요한이 그리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의 전통에 의하면 가운데 자리는 항상 가장 중요한 자리로서, 특히 그가 범법자들의 가운데서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요한기자에게는 어쩌면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보였을 것입니다(사 53;12).
2) 십자가의 패와 유대인의 거부(19:19-22)
(1) 19-20. 당시에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는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 처형 이유를 적은 패와 함께 달려 죽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가 왜 죽는지를 알도록 하려 함이겠죠. 예수님의 경우는 무엇이라고 적혀 있었습니까?
자, 그런데 이것을 본 유대인들이 그냥 있을 리가 없겠죠? 이 팻말은 그들을 자극하며 그들에게 치욕감을 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을 보세요. 뭐라고 하는지.
그러나 빌라도는 이제 처음으로 자신의 고집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빌라도의 의도적인 계략입니다. 그 동안 그가 이들에게 당해오지 않았습니까? 마지막으로 보복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 ,이놈들아 엿먹어라!”
그러나 실은 보다 심오한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서 전체적으로 예수님의 신분에 관한 일관된 모티브를 이제 절정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내포저자 요한의 의도가 그것입니다. 그것을 그는 빌라도를 통해서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3) 예수님의 옷을 찢어 나눔(19:23-24)
(1) 23-24절. 죄수들의 옷은 형집행관들의 소유가 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일종의 노획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지니고 있었을 소유는 겉옷과 속옷, 허리띠와 샌들, 그리고 아마도 머리 위에 쓰는 두건이었을 겁니다. 병사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찢어 나눌 수 없어 그대로 가지려고 병사들 간에 제비뽑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은 지금 이 장면을 시편을 인용하면서 구약의 성취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약간의 본문 변형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시 22:18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장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해 왔습니다만, 다 기억할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비유적이라 상고할 가치를 느끼지는 않습니다만, 한 가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은 그 자신이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뺏기고 헐벗긴 채 그의 목숨마저도 이제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잠시 멈추고 십자가 위에 매달려 있는 그의 알몸을 쳐다봅시다. 그리고 그에게 속삭여 보세요: “주님, 정말 당신이 이렇게 된 것이 저를 위해서란 말입니까? 당신이 죽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저의 죄악이 그토록 심각했습니까? 주님, 도대체 제가 무엇으로 이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당신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들은 대로 적어 봅시다.
4)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김(19:25-27)
(1) 25절. 제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절에서 병사들과 여인들이 대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찢고 제비뽑아 서로 가지려고 법석을 떨고 있을 때, 이 여인들은 그저 멀리서 안타깝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기막히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거명되고 있는 여인은 본문에 의하면 4명으로 보여집니다. 두 쌍의 여인이 마치 짝을 이루듯 거명되고 있는데 전자는 무명으로 후자는 그 신원이 밝혀진 채로 입니다. 확인해 보세요 누구누구인지.
그리고 이들 이름을 공관복음서의 그것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막 15:40;
마 27:55-56;
눅 23:49;
공관복음서에서는 이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요한은 아주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글쎄요. 구태여 설명을 하자면 처음에는 멀리 서 있다가 주님의 죽음이 가까워 오자 가까이 다가왔다고 보면 되겠죠.
(2) 26-27절.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시콜콜한 것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십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그 사랑하는 제자에게 그의 어머니를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십자가상에서 처형당하는 자는 최후의 유언을 하도록 특권을 부여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금 그러한 관례에 따른 것인지, 마지막 유언을 남기시고 있다 이겁니다. 당신은 이 유언의 의미를 인식하고 계십니까? 그의 육친의 동생들도 많이 있었을 텐데 왜 그의 제자에게 이 힘든 부탁을 했을까요?: “여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나이다. 아들아, 너의 어머니니라.” 우리는 이 구절의 의미를 밤새워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카톨릭 학자인 레이몬드 브라운 박사는 이 중요한 구절을 오히려 반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바로 이 점이 어쩔 수 없는 그의 한계인 듯 합니다). 즉 제자를 어머니의 보호 아래 둔다는 것이죠. 이 말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고 하면, 교회를 대표하는 제자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보호와 권위 아래 둔다는 말로서, 카톨릭의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권위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영 어색한 해석입니다.
5) 죽음(19:28-30)
(1) 28-29절. 예수님에게 마실 것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다른 공관복음서에도 공히 기록되고 있는 사실인데(막 15:22), 이 경우는 사뭇 다른 이야기로서 그 경우는 처형 전에 여인들에 의해서 고통을 완화시켜주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누가 역시 비슷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로마 병정들에 의해서 조롱 받고 있는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이 경우 마실 것이란 아주 값싼 포도주였을 것입니다(23:36). 마태와 마가는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 유기의 절규를 외치신 직후(막 15:34-36)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받는 인상은 아마도 구경꾼들이 예수님께서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착각하여 정말 그가 오는지 안 오는지를 보기 위하여 예수님에게 마실 것을 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어쨌건 우리가 이 구절에서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이 역시 요한에 의하여 구약의 성취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 69:22;
막대기 끝에 솜을 달아 포도주를 적셔 주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로부터 높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잔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을 마신 후 그의 마지막 말, “다 이루었다”는 것은 원 의미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일을 완성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인지?
6) 옆구리를 찔리심(19:31-37)
(1) 31-35절. 이 장면은 유대인들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이 날은 유월절 전 날로서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서 여러 날 동안 그대로 방치해 두면 그 땅을 더럽힐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신 21:22,23). 왜냐하면 대개는 죽은 시체를 그대로 몇 날이고 두어서 나중에는 독수리 때들이 와서 그 시체를 파먹을 때까지 내버려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리를 꺾어서 빨리 죽게 하자는 것이겠죠.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날은 안식일이자 동시에 유월절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율례를 지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 잡아 죽이는 녀석들이 법은 무슨 법을 그리 잘 지키겠다고....
그런데 병정들이 보아하니 이미 죽은 것 같으니 다른 두 사람의 다리는 꺾었으나 예수님은 그대로 두고 대신에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다고 합니다. 이건 또 무슨 짓입니까? 아니 죽었으면 그대로 두면 될 것을 하릴없이 옆구리는 왜 찌르느냐 이거요. 심심풀이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아마 이 때 물과 피가 솟구쳐 나왔겠죠. 혹자는 바로 이 점이 요한이 노리는 신학적 의도라는 것입니다. 즉 당시 가현설(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의 아류)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라는데, 그럴 듯도 합니다만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35절은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듯 합니다.
(2) 36절. 이 이야기와 관련하여 구약의 세 절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음의 구절들을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출 12:46; 민 9:12; 시 34:20.
물론 이 세 절 중 어느 하나도 정확히 요한의 그것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요한은 이것마저도 구약의 성취와 관련해서 보고 싶은 것입니다.
(3) 37절. 이 점을 재차 강조하고 싶었을까요? 스가랴서를 다시 인용하고 있습니다: 슥 12:10.
7) 장사(19:38-42)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와 관련한 이야기가 흔히 말하듯 그의 인성을 증거하기 위한 의도로 쓰여진 것이라면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없을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또다른 중요한 두 등장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누구입니까?
공관복음은 아리마대 요셉과 관련하여 요한보다는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가 공회원이며(막 15:43),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고 있었던 자라는 점입니다(막 15:43; 눅 23:51). 그리고 그는 부유한 자였으며(마 27:57), 공회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공회를 대항하여 섰던 자입니다(눅 23:50-51). 더 나아가 마태는 그를 예수님의 제자로 그리고 있습니다(마 27:51). 그런데 지금 본문에 의하면 요한만이 요셉이 유대인을 두려워하는 자로 그리고 있습니다. 무슨 의도일까요? 만일 우리가 12:42-43에 근거해서 평가한다면 이 자는 아주 겁쟁이이고 사람들의 영광을 더 좋아하는 자로서 그는 지금 요한에 의해서 비난받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볼 수만은 없는 것이, 그는 지금 범죄자의 시체를 빌라도에게 요구하는 용기를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일견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나 실은 대단한 행위입니다. 왜일까요? 유대인들은 지금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그를 그대로 버려 두자니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형국이 되고, 내려달라고 요구하자니 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사형수를 그네들의 가족 묘지에 장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그를 도시 밖의 공동묘지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셉이 그의 시체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용기있는 행동입니까?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모친이나 그 가족들조차도 그의 시체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당신의 소감을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1) 39-40절.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할 인물은 니고데모입니다. 그가 행하고 있는 장례 의식은 유대적인 관습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가 가지고 온 엄청난 양의 몰약과 향입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써도 괜찮은 겁니까? 그리고 이 두 사람이 행하고 있는 장례의식을 엄숙하게 지켜봅시다. 그들이 얼마나 정성을 들이고 있는지 말입니다.
(2) 41-42절. 요한만이 골고다 언덕 근처에 동산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추론컨대 이 장소는 바로 예수님이 묻히신 곳이며 또한 부활하신 곳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곳에 묻히셨다는 기록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첫째는 유대인 중 아무도 그가 일반인들의 묘지에 묻히는 것을 그대로 둘 리가 없었을 것이 때문이며, 둘째는 바로 이러한 사실 역시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보통 사람들의 죽음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신학적 의도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었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무조건 “예”입니까?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입니다만.
4. 결론
1) 이 과의 주제를 당신은 어떻게 요약하시겠습니까?
5. 교훈
1) 본문을 통해서 당신이 받은 소감은 무엇입니까? 본문에 등장한 사람들 중에서 아무나 한 사람을 당신의 적용을 위해서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죽음 직전 그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맡기시는 주님이 당신의 교훈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또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행동을 예를 들 수 있을 것이고, 베드로의 한 행위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며, 더나아가 “저 놈 죽여라”하면서 자신의 생명의 은인 대신 도적 바라바를 선택하는 저 한심한 무리들이 당신의 교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감을 써서 헌신 예배시에 간증문으로 대신하고,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제 22과: 부활설화
22
부활 설화
(20:1-31)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27-29).
우리가 성경과 관련하여 자주 듣는 질문들의 한 형태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인가?”입니다. 예를 들어 “창조는 역사적 사실인가?”, “노아의 홍수는 역사적 사실인가?” 그리고 오늘의 본문 속에 나타난 도마의 경우처럼 “부활(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 등일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의 배후에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사실들이 과연 합리적이고도 객관적이며 과학적인가?” 라는 동기가 깔려 있겠죠. 글쎄,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어쩔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름 데로의 헌신 또는 의사 결정을 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상하게도 과학자들의 이러한 질문이나 관심사에는 감질나고도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서 어떠한 증명을 시도하기는커녕, 아예 관심을 보이고 있지도 않은 것 같다 이겁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식에 관한 유대인들의 사고 때문이라고 볼 수 있죠. 이 차이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미 익히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차이가 있다고 했죠?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지니고 있는 바 믿음에 대해서 항상 변증하고 간증하도록 요구받고 있으며, 또 늘 그러한 준비를 하도록 명령받고 있기도 합니다. 성경 어디에 그러한 말씀이 있죠? 찾는 사람 10,000원 준다.
그러면 우리가 내세울 가장 강력한 기독교 변증(apologetics)은 무엇일까요? 부활입니다! 부활은 물론 단순한 소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 또는 두 번째 창조를 말한다. 생물학적으로 새로운 유전인자의 형성으로 완전히 새로운 생물학적 구조를 지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부활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접근방식이 있습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즉 당신이 만일 다른 누군가로부터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해 달라고 할 때 어떻게 다루겠습니까? 이러한 접근 방식은 비단 부활에 국한된 것만은 아닙니다. 기독교 진리 전반에 걸쳐서 공통된 방식이 있습니다. 당신 자신의 방법을 제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사도 바울이 늘 이런 방식을 택했음을 압니다. 고전 15장을 참고하여 적어도 세 가지 접근방식을 기술해 봅시다:
오늘의 본문에서 요한 해설자가 제시하고 있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의 문학과 신학적 의도는 무엇인지 잘 음미해 봅시다. 우리는 부활의 신학적 의미 등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룰 것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단지 요한 해설자가 그것을 증거하는 수사적 기법이나 의도 등에 대해서만 연구할 것입니다.
2. 양식/구조/배경
1) 양식: 요한복음의 부활 이야기는 전체 5막으로 구성된, 아주 정교하면서도, 예술적으로 잘 짜여진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요한해설자는 이곳에서 그가 이 복음서 전체에서 보여주려고 의도하고 있는 주제를 아주 극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부활 이야기는 따라서 다른 복음서에서와 같이 전체 예수 이야기의 절정에 해당된다. 그가 이곳에서 드러내려고 하는 그 주제란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고, 분명 장사되었다가, 그리고 부활한 그 예수가 곧 메시야, 즉 그리스도,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의 구성은 어떠합니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의 궁극적 승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그의 유일무이함과 신성의 증거, 죽음을 통하여 새 생명으로 가는 문학적 원형의 도입으로 U字형의 구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라는 단어는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구성(plot)은 편편하면서도 일직선으로 된 도로는 물론 아닙니다. 플롯이 무엇인지 아시죠?
그리고 이 부활설화에 사용되고 있는 일련의 수사적 기법들에 대해서도 이제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것입니다.
2) 구조: 앞에서도 말한 바처럼 이 부활 이야기는 전체 5막으로 구성되어 연대기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각 막의 이야기는 독립적으로 취급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서막(prolog)(vv 1-10); 빈 무덤의 증거/ 부활절 여명의 사건
(2) 1막(vv 11-18); 막달라 마리아와의 조우/부활절 아침의 사건
(3) 2막(vv 19-23); 제자들과의 만남 /부활절 저녁의 사건
(4) 3막(vv 24-29); 도마와의 만남/일주일 후의 사건/절정
(5) 종막(epilog)(vv 30-31); 결론- 믿음의 본질
3) 배경: 이 설화의 배경은 예루살렘인 것으로 보입니다. 빈 무덤에 관 언급이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했다는 이야기 등을 통해서 부활사건의 지리적 위치가 밝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주 석
3-1. 서막(vv 1-10)
1) 1절. 때에 대한 언급을 주목해 봅시다. 언제라고요?
이것은 성경의 다른 곳을 통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죽은 지 삼일 만에...”라는 표현과는 다른 것입니다. 일부 학자는 요한의 이러한 표현은 후자의 표현보다 이전에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유포되다가 점차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삼일만의 부활로 대체되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다음의 구절들을 참고로 상상해 봅시다: (1) 막 8:31; (2) 호 6:2.
2) 2절. 무덤 가에는 막달라 마리아 혼자만 있었을까요? 1절은 그런 것처럼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2절의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라는 표현을 볼 때는 다소 애매해 집니다. 참고로 공관복음서 기자는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쓰고 있습니까(막 16:7이후)?
그러나 이 두 절이 강조하려고 하는 바는 누가 그 자리에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 장소의 상황에 대한 묘사입니다: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것이 부활사건과 관련하여 해설자가 강조하고 있는 첫 번째 변증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소극적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에 내포된 하나의 모티브는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유포되던 소위 “도난설”(마 28:13-15)에 대한 강력한 반증입니다. 사실 당시 로마 황제의 칙령(복사 본이 나자렛에서 발견되기도 했음)은 무덤을 도굴하는 행위는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형을 무릅쓰고 이러한 짓을 할 자가 없다는 것이죠.
3) 3-7절. 마리아의 보고를 듣고 달려가는 두 제자는 누구입니까?
이 장면 역시 위에서 언급한 “도난설”의 모티브에 대한 강력한 반증이 되고 있는 셈입니다. 왜일까요? 이들이 달려가는 것에 대한 묘사가 차이가 있습니까? 있다면 어떤 특별한 이유라고 있을까요? 특히 7절을 보세요.
그리고 여기서 다소 부차적이긴 하지만 마리아의 보고를 듣고 달려가는 두 제자에 대한 언급이 차별화 되고 있습니다. 달려가는 속도라든지, 누가 먼저 무덤에 들어갔는지에 관한 언급이라든지, 또 그들이 발견한 상황에 대한 이해 여부에 대한 언급이라든지 말이죠. 우선 이러한 차이점을 발견해 보시고, 이들이 지니는 의미가 있었을까요?
4) 8절. “사랑하는 제자”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며, 이 발견을 통해서 얻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역시 본 단락에서 계속 강조되는 빈 무덤의 증거와 관련된 변증입니다.
5) 9절. 이어지는 9절의 설명은 8절과는 논리적으로 일견 상충되어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는 그들의 믿음의 결여라기보다는 성경적 지식 내지는 확신의 결여라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다음의 구절들을 참고해 봅시다: 눅 24:25-27, 32
이러한 성경에 대한 몰이해는 두 제자가 마찬가지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전히 강조되고 있는 바는 두 사람의 차이입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성경적 지식의 중요성과 관련한 한 가지 교훈적 메시지를 얻게 됩니다:“알아야 면장을 하지...” 말해 봅시다.
6) 10절. 10절의 표현 역시 재미있습니다. 아니 이 중요한 발견을 하고도 그냥 집으로 돌아가다니! 그 이유에 대한 당신의 카텐자를 집어넣어 보세요.
3-2. 1막(vv 11-18)
1) 11-12절. 마리아가 계속 울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이 장면이 진행되는 동안 서서히 새벽이 밝아 오고 있겠죠? 이것은 마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그러한 것처럼 점차 강력해지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을까요?
2) 13-16절. 천사는 즉각적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이 질문은 당신에게 어떻게 들립니까? 마리아가 그가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이는 엠마오의 두 제자나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지금 예수께서 이렇게 당신에게 질문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그런데도 당신은 마리아처럼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3) 17절. 드디어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어떻게 알아보았을까요? 이게 중요합니다.
그리고는 그녀는 너무 너무 좋아서 그냥 그 발아래 구부려 그의 발을 잡는 것이었다! 아주 황홀했겠죠. 혹시 이 중에서 김태정 전도사를 오랜만에 보고 이렇게 할 사람 있습니까? 들리는 바에 의하면 요즈음 문순 자매가 그렇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남편 상길 형제를 누가 소개해 주었죠?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달 이상 못 보아도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글쎄요 과연 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지...
마리아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서 전체적으로 가장 난해한 구절입니다. 그를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간지럽다, 얘야...거, 쑥스럽구먼... 이런 뜻은 분명 아닐 거고), 그리고 그가 아직 아버지에게 가지 않았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지 정말 헷갈립니다. 마리아는 만져서 안된다면 왜 도마는 나중에 만져보라고 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를 우습게 알았을까요? 연구해 봅시다. 괜히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김태정 전도사는 사람들에게 자기만이 알고있는 지식을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아주 교만한 사람입니다.
3-3. 2막(vv 19-23)
1) 19절. 이제 부활절 저녁입니다. 이 장면에서 해설자는 대조의 기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변론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대조되고 있는지 파악해 봅시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부활에 대한 어떠한 면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첫 인사 내지 메시지 “샬롬”이 주는 효과를 음미해 봅시다.
2) 20절. 이 절에서 드러나는 모티브가 있을까요? 이 본문 전체에 걸쳐 세번 반복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만...
3) 21절. 이 절은 실로 교회의 선교적 사명에 관한 위대한 선언입니다. 선교의 동기와, 권위와, 방법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말해 보세요. 물론 예수님의 선교와 우리의 그것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4) 22-23절. 이 두 절은 교회의 선교와 관련하여 또 다른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논의해 봅시다.
3-4. 3막(24-29절)
1) 회의와 두려움(어두움)(24-26절)
요한 기자는 도마가 부활절 저녁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성격의 일단을 보여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그의 일면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그리 많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두어 군데 기록이 있습니다.
(1) Jn 11:46 - “우리도 죽으러 가자.” 이러한 태도는 일견 아주 용기 있는 것 같으나 실은 그의 조급하고도 비관적인 성격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우리도 얼마나 그와 같습니까! 쉽게 자포자기하고 자기 연민에 자주 빠지는 것이 말입니다. 진리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성경공부 하다 모르는 것 만나면 여기저기 책을 찾아봅니까? 당신은 당신이 갖기를 원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인내하며 끈질기게 투자합니까? 당신이 선택하고 있는 학과목의 리포트 제출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혹시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부산의 버스 종점 근처에 사는 어느 여인 이야기를 아십니까? 동네 버스정류장의 소음 문제로 그 회사를 상대로 끈질긴 3년동안의 법정 투쟁 끝에 승소를 받아낸 여인 말입니다.
(2) Jn 14:5 -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나이까?” 이해가 상당히 늦으나 그러면서도 질문은 빨리 해대는 역시 비교적 조급한 그의 모습을 봅니다. 또한 다소 비관적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상당히 합리적인 질문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이곳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태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주 합리적이고도 과학적인 태도가 그것입니다. 요한기자는 세번에 걸쳐 도마의 질문을 반복함으로써, 다시 한 번 3이라는 숫자의 수사적 패턴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1)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2)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3)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 드러나는 모티브는 무엇입니까?
다소 과장된 것처럼 보이나, 실은 요한복음서 전체에서 마치 배경음악처럼 내내 깔려 오던 “의심과 회의”라는 모티브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제자들의 의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니라(요 4:48).”
따라서 도마의 의심도 이러한 선언의 한 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앞선 제 4막에서도 드러난 제자들의 의심을 다시 한 번 과장되게 표현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마리아의 증언이었습니다. 그 효과는 무엇입니까? “아니, 제자들마저도 그랬단 말인가?”
그의 이러한 질문은 실은 도마 혼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계몽시대 이후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소위 “과학적 합리주의”라는 인류의 최대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지극히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이 바로 “이성과 합리” 아닙니까! 특히 학문의 영역에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태도를 갖도록 교육받아 오지 않았던가! 객관적이고도 가치 중립적인 자세는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추구하고 지녀야 할 덕목입니다. 그런데 이 이성과 합리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도마의 질문의 성격부터 분석해 봅시다.
먼저 그의 질문이 그렇다면 과연 합리적인가부터 따져 보죠. 과연 그러한가?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첫째, 그는 이미 많은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서입니까? 마리아로부터, 그리고 그의 동료 사도들로부터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지난 3년동안의 체험을 토대로 충분히 논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말입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는 수없이 많은 기적들이 예수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는 것을 목격도 했고, 그리고 그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이죠. 그가 성실한 학생이기만 했더라도 충분히 그의 체험을 통해서 예수의 부활의 당위성을 논리적으로 꺼집어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동료들을 믿지도 않았고, 그 자신의 체험으로부터도 아무 것도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앞뒤가 꽉 막힌 돌대가리였던 것입니다. 全 아무개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로 그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소위 과학지상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과학의 영역을 혼돈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과학에는 두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재현 불가능한 사건을 다루는 소위 기원과학의 영역이고, 또 하나는 실험과 반복이 가능한 그래서 귀납적인 추론이 가능한 소위 실험과학의 영역이 그것입니다. 그는 지금 재현 불가능한 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결코 믿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겠죠. 당신은 6.25사변을 역사적 사실로 믿습니까? 어떻게 보지도 않았는데 믿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다시 재현해 낼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것을 사실로 맏아들이고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세 번째 그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성의 능력을 과신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수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헤밍웨이 역시 이 점에 있어서 일찍이 동의한 바 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한 가지 질문을 해 봅시다. 만일 그에게 그가 원하는 증거들이 제시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가 믿을 수 있을까요? 그는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즉 그는 그가 만일 부활한 그 예수를 확인하기만 한다면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그의 착각입니다. 안다는 것하고 믿는다는 것하고는 전혀 별개의 것임을 그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는 지난 3년을 예수의 제자로 12명 속에서 살아 왔으면서도 한 번도 그 풍성한 의미를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자였습니다. 그래서 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두려움과 불안과 초조 등에 둘러싸여 고민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도대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전해 줄 수 없는 운명 가운데 살아 갈 수 밖에 없었을 거란 말입니다: (예) 내 제자 천은우 등 (소위 모태 신앙). 이처럼 우리가 예수에 관한 모든 역사적이고도 과학적인 지식과 자료들을 다 소유한다 할지라도, 이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그 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2) 은혜와 계시(26후-27)
그러면 무엇이 해결책입니까? 인격체간의 만남은 단순히 그 상대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고 부릅니다. 그 자신의 이성적 탐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먼저 와서 보여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왜 은혜입니까?
첫째,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평(peace with God)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히브리어로 우리가 잘 아는 샬롬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이 말은 그냥 “안녕”하는 정도의 인사말에 지나지 않지만, 그 날만은 예외였습니다. 부활절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봅시다, 다시 세번의 반복적인 인사가 주어지고 있는 것을!(19, 21, 26절) - 반복해서 읽어봅시다.
도대체 무슨 평강입니까? 그것은 화평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외치신 “다 이루었다” 라는 선언의 보충적 설명입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그 자신의 진노와 노여움을 스스로 먼저 다 풀었다는 의미입니다. 노여움을 풀다니요? 우리가 언제 그와 원수가 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두 말하면 잔소리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진노를 그냥 혼자서 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대신 피를 보게 함으로써 진노를 푸셨다는 말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즉 그 자신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강은 세상이 주는 그러한 종류의 정전 협정이나 로마가 이룩한 평화, 즉 Pax Romana 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 모든 곳에서 항상 이 단어를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세세토록 영원무궁할 지어다.”
두 번째, 이 평강은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오는 마음의 평화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평강(peace of God)인 것입니다. 이것이 왜 은혜입니까? 이것은 그 모든 두려움을 우리로부터 쫓아내기 때문입니다. 26절의 무대 장치와 분위기를 다시 봅시다: “문들이 닫혔는데...” 무슨 색깔인가요?
이 문은 무슨 문입니까? 그것은 문자적으로는 고독과 두려움의 문입니다. 19절을 봅시다. 그리고 보다 영적으로는 나는 이 문을 자기 자신의 이성과 합리의 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지금 이 우물에 갇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이 어두움을 몰아내는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말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증거들이 있다 해도,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지식들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를 결코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가지고 예수에 대해서 연구는 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또 그에 대해서 밤새 논쟁을 벌일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그를 만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가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으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요청합시다! 겸손히 요청합시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러나 주님은 도마가 개인적으로 이러한 요청을 하기 전에 이미 와 계셔서 그의 손을 뻗어 그를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의심하는 도마야, 네 손을 뻗어 나를 만져 보라(27절).”
도마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문제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증거 부족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바로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문제를 누가 해결해 주었습니까? 그가 증거를 제시받음으로서 입니까? 일견 그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가 예수를 만나서 만져 보고 확인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부활한 예수의 현존과 그의 말씀에 이미 압도되어 버린 것입니다. Let me repeat: 그의 말씀에 압도된 것입니다!
3) 의심에서 찬양으로(28절)
(1) 28절. 28절의 선언은 무엇입니까? 아, 역시 예수는 부활했구나! 사실 확인입니까? No, No, No, No,... 이것이 바로 요한 기자가 처음부터 일관되게 드러내려고 했던, 그러나 그 동안 계속해서 우회적으로 암시적으로만 드러내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오히려 감질나게 해왔던, 그 한 가지 주제가 지금 거대한 화산처럼 폭발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가장 의심 많던 제자의 가장 위대한 고백이 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찬양과 경배입니다!!! 그는 지금 예수는 주이고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이 찬양은 세상을 향해서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아니고,
오직 그가 발견하고 발견되어진
그의 주, 그의 하나님을 향한 외침이요 찬양인 것입니다!
그는 지금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로서의 부활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에게 체험되어 지고 있는 그 부활의 능력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마의 이러한 체험은 그 만을 위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도마 이야기를 듣고 있을 요한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추정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이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까요? 혹 지체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적으로 목격하지도 못하고, 의심하고, 반신반의하며 회의와 의심 가운데서 다시 한 번 그 자신 그러한 체험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며 신앙생활을 하기도 했을 것이며, 또 혹자는 믿지 않는 다른 이웃들로부터 예수의 부활을 증거토록 요구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즉 공동체의 목회자가 목회적 목적을 위해서 쓴 글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19절);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절)".
4) 결론 -믿음의 본질(30-31)
그 외의 목적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글이 지니는 선교적 차원의 목적입니다. 설령 처음부터 그러한 목적이 없었다고 하드라도, 우리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 결론에서 충분히 그러한 목적을 꺼집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읽는 모든 자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이를 믿고 생명을 얻어라.”
우리가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를 맛본다는 것이다. 그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를 순종하고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르쳐 지켜 행하게 하라.”
4. 결론
1) 본문의 핵심적 주제는 무엇입니까?
2) 본문의 단락 구분을 통해서 이 주제가 어떻게 발전되며 보강되고 있습니까?
3) 이러한 주제를 위하여 본문에서 도입되는 문학적 기법(수사, 모티브, 상징, 등등)들이 있습니까?
5. 교훈
1) 도마의 체험을 중심으로 당신의 소감을 나누어 봅시다. 드리고 싶은 기도가 있습니까?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까? 당신에게 부활의 체험과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겠습니까? 특히 이번 한 주 생활가운데서 말입니다.
제 5부: 에필로그
제 5 部
에필로그
제 23과: 교회와 사도와 선교
23
교회와 사도와 선교
(21:1-2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21:15-17).”
1. 머리 말
호진이나 상길이처럼 성경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독자들은 요한복음 20장을 마치면서 “휴, 그 지긋지긋하던 요한복음 공부가 다 끝났구나!”하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것입니다. 특히 상길형제는 공부시간 중에 자주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는 훌륭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합니다. 내가 너무 심했나? 이제는 홀몸도 아닌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공부시간 내내 지겨워했던 것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의 마지막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제 20장의 [도마의 발견], 즉 늘 회의와 자기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그가, 마치 알렉스 헤일리의 힛트작「뿌리」의 주인공이 오랜 노력 끝에 드디어 자신의 혈통의 뿌리를 발견하고, “내가 드디어 찾았구나!”(원 대본에는 영어로, “I found it!"으로 표현되어있음)하며 내뱉던 것과 같은 환희의 절규를 뿜어내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그들도 내심 가슴이 찡하는 감동도 받고, 나름 데로 헌신의 결심도 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기쁨은 드디어 공부가 끝났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라, 그런데 아직 한 장이 더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실망하는 모습이란.
그런데 이들이 이처럼 착각을 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 말씀입니다. 사실 20장은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요한복음 전체의 클라이맥스가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그 동안 복음서 전체에 걸쳐 계속 등장하던 모티브나 주제들이 다시 한 번 요약적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복습하는 셈치고 그곳으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부활절 첫 날의 이야기라든지, 도마의 고백 등을 면밀히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도마 이야기의 교훈은 이 이야기를 읽는 당대나 후대의 독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누구나 도마처럼 영생을 누릴 수 있다.”
따라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20장에 더할 이유나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20:30-31을 읽은 다음 21장을 읽어보면 어딘지 어색하고 연결이 잘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장이 왜 더하여 졌을까요? 해설자가 더 할 말이 있었을까요? 도대체 21장의 목적이나 기능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곳에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공부할 것이지만,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브루스 밀론이 말한 바처럼, 21장의 내용은 앞에 나온 장들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전체의 적절한 마무리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장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전개된 제자(즉 교회)들의 선교적 사명이라는 주제와는 너무나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호스킨스는 이 점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통찰력있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명령에 의해, 그리고 그 분의 권위아래 수행되는 선교에 관한 진술로 끝나야 적절하게 끝나는 것이다.” 자, 이제 이 장을 보다 상세하게 다루어 봅시다.
2. 양식/구조/배경
1) 양식: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21장은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기를 일종의 부록 내지는 後記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어떠한 의도로 이러한 부록을 더하였을까 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는데, 아직 정확하게 일치된 견해는 없는 실정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21장의 해설자(그가 누구든)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무언가 감지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강조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과 사도들의 역할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교회가 드러내야 할 “표적”(sign)(그리스도의 표적이 아니라)의 의미가 포함되고 있습니다. 다소 어렵습니까? 참고 기다립시다.
2) 구조: 본문의 구조는 비교적 명확합니다.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구분됩니다. 각 단락마다 적절한 제목을 정해 봅시다.
(1) 제 1단락(21:1-14):
(2) 제 2단락(21:15-23):
① 15-17절:
② 18-19절:
③ 20-23절:
(3) 21:24-25:
그런데 우리가 21장을 읽다보면, 이야기가 마치 연속해서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는데,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20장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주제의 전개를 위해서 연결해서 편집해놓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1-14절의 이야기조차도 한 단위로 볼 것인가 또는 두 개의 단위로 볼 것인가에 대한 견해가 분분한 실정입니다. 이러한 자료비평적(무슨 말이고?)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나마 마음잡고 끝까지 견디기로 작정한 호진이와 상길이가 도망가면 안되니까.
3) 배경: 이왕 자료비평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만 심심풀이로 공부 좀 해봅시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단락의 배경과 관련한 것입니다. 첫 번째 단락의 상황은 분명 갈릴리 바닷가입니다. 위의 풍경 사진에서 보듯이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곳에서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를 못합니다(4, 7절). 그런데도 14절은 이 만남이 부활 후 세 번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렇지, 어찌 세 번씩이나 만나고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이거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만남이 세 번째가 아니고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이에 대한 문제는 잠시 후 논의하기로 하겠습니다. 사실 누가나(눅 24:34) 사도 바울의 증언(고전 15:5) 등에 의하면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그리고 여인들과 함께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두 차례나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시기는 부활 후 첫 날 빈 무덤가나, 엠마오로 가는 도중이었거나, 또는 예루살렘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언급(21:14)은 정확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15-17절의 상황은 이 세 번째 만남보다 시기적으로 먼저 일어난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즉 이 두 번의 만남 중의 한 상황에서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18-19절의 상황도 그 부활절 기간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의 순교에 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사건은 한참 후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는 합니다만. 20-23절의 핵심은 역시 22절로서, 이는 요한공동체내에서 별도로 회자되고있던 자료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4-25절은 복음서 전체의 대미를 장식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서 전체에 대한 신빙성 내지는 권위를 드러내려는 목적이 엿보입니다.
3. 주석
3-1. 제 1단락(1-14절): 교제와 회복
1) 1-3절. 배경은 갈릴리 호수로 알려진 디베랴 바닷가입니다. 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니고 이곳이라 제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으면,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지, 왜 본업으로 돌아가 있느냐는 이유 때문입니다. 특히 3절의 베드로가 한 말,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를 놓고 아마도 고기잡이가 이 때만큼 혹독하게 비난받은 적도 없었을 겁니다. 도대체 이럴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가면 자기 혼자 갈 것이지, 왜 다른 사도들마저 꼬셔서 함께 헷갈리게 하느냐 이거죠. 불순종과 배교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실 그 동안 이 구절에 대한 설교의 대부분이 이런 식이었습니다. 당신도 동의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 비슬리 머레이가 이들 제자들을 두둔하여 쓴 글을 읽어봅시다:
그들의 심리적, 정서적 안정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오랫동안 익숙한 갈릴리 바다에서 낚시 여행을 하는 것도 이상적인 치료요법이었을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은 정서적으로 동요하는 기간이었다. 단 한 주일 동안에, 그들은 종려주일이라는 아찔하게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가 성금요일의 완전한 절망의 수렁으로 급강하했으며, 다시 부활의 영광에 의해 하늘 끝까지 휘몰아쳐 올라가는 것을 모두 경험했다. 심야의 낚시질은 아마도 의사가 지시했을 만한 안정책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비록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물고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밤을 그들이 택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않는가!”
정말 그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3절을 베드로가 실의와 절망 가운데 본업으로 되돌아가면서 무심코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이들이 지금 왜 이곳에 왔으며, 그리고 여기서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가능한 한 가지 대답은 막 14:28 이나 16:7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서 그들을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셨고, 따라서 이들은 지금 주님의 그 말씀을 상기하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왜 그를 이곳에서 기다려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글쎄요, 이제 바야흐로 주님께서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이곳에서 펼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도 했을 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3절에서 나타난 사도들의 이러한 지극히 평범한 행동(즉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행동)을 어떻게 이해함이 바람직할까요? 역시 비슬리 머레이가 제의한데로, 우리는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이들 사도들의 행동을 이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에 관해서 많이 듣고 배워서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당시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했던 사도들보다 오히려 더 큰 믿음을 소유한 듯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솔직히 부활은 예수님을 제외하고 나면 온 인류가 역사상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유일무이한 사건 아닙니까? 항차 당시 지극히 제한된 지식과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을 사도들에게 있어서야 두말할 나위도 없었을 겁니다. 그들이 믿는 부활에 관한 지식이래야 겨우 죽음 이후의 부활 정도였을 겁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고백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더더구나 이들이 부활의 의미, 특히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에 대해서 체계적인 신학적 지식을 소유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갈릴리는 또한 어떤 곳입니까? 이 모든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기에는 가장 부적합한 시골 아닙니까? 예루살렘이라면 또 몰라도... 이런 곳에서 다시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그 의미에 대해서 강의를 듣게 될 줄이야 어찌 꿈엔들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이들이 비록 부활하신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목격하고서도, 실의와 좌절은 아니더라도 무언가 혼란스럽고, 그래서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이곳에서 바야흐로 주님으로부터 보다 체계적으로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에 대해서 강의를 듣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들을 나무라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이들을 나무랄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이 만일 부활하신 주님이라면 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겠습니까? 사실 이 주제야말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핵심이 됩니다. 나중에 다시 논의할 것입니다만.
2) 4절. 날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번의 만남이 처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부활하신 주님의 변화된 모습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겠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당신은 지금 주님께서 오신다면 금방 알아볼 수 있을까요?
3) 5-6절.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호숫가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질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얘들아, 뭐 좀 잡았느냐?” 이거 아니겠습니까? 드디어 주님께서 제자들의 고기잡이로부터 무언가 영적인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준비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이 질문은 이 단락의 기능을 결정해 주는 효과를 지닙니다. 무슨 기능일까요?
따라서 이 질문은 그 질문을 듣고 있을 (내포)독자들 역시 바짝 긴장하게 하는 효과를 지닙니다. 당신도 긴장이 됩니까? 아니면 아무 생각도 없습니까?
호진이의 독백: “긴장은 무슨 얼어죽을...” 이러면 안됩니다. 왜냐? 제자들도 그렇고, 독자들 역시 이 밤은 이상하게 일이 잘 안 풀리는 날이었습니다. 이들 노련한 어부들이 밤새 고기 한 마리 못 잡다니 영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브루스 밀론은 이 질문을 나름 데로 다음과 같이 효과를 넣어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어이, 친구들, 자네들 고기라곤 한 마리도 못 잡았지?...오른쪽으로 한 번 그물을 내려보게나, 그러면 조금 잡을 수 있을 걸세!”(5-6절)
밀론의 말대로 확실히 주님의 말에는 무언가 거절할 수 없는 힘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누군가 땅에서 그들을 향해 이런 충고를 했다면 “웬 미친 녀석 이람”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킨 대로 그물을 오른쪽으로 담갔더니, 아니, 이게 웬 일입니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단지 왼쪽과 오른쪽의 차이에 불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동안 복음서 자체도 그랬지만 독자들 역시 온통 그리스도의 표적에만 몰두해 온 나머지, 이 기적은 사람들의 주목을 별로 끌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복음서 내의 일곱 가지의 기적을 말할 때, 이 기적은 포함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은 사도들의 표적, 다시 말하면 교회의 표적이 됩니다. 보다 영적인 의미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이처럼 놀라운 표적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4) 7절. 제자들의 반응은 거의 본능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충고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부활하신 주님일 줄이야! 예수께서 사랑하던 그 제자가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일러주자 베드로도 금새 알아버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주님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기적을 감히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이 누구입니까? 서당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이들도 이젠 이런 류의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주님의 손길과 향기를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게 제자훈련의 성공사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척하면 삼척이라, 스승의 눈길만 보아도 그 속마음을 알아보는 제자 말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사람 많습니다. 김태정 전도사의 마음을 한 길 물 속처럼 훤하게 꿰뚫어 보는 제자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다름 아닌 최 아무개, 서 아무개, 그리고 이 아무개 등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이야기가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베드로의 이어지는 행동을 관찰해 봅시다. 과연 베드로는 베드로입니다. 그가 지금 보이고 있는 반응은, 이보다 며칠 전 부활의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그에게 달려와 “주님을 보았다”고 전했을 때 그가 보인 반응, 즉 무덤을 향해서 미친 듯이 달려갔던 그 반응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습니까(참고: 요 20:4-8)? 이 두 이야기의 해설자가 동일인인 듯 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반응을 보는 당신의 소감은 어떻습니까?
“야, 저기 우리 전도사님이 오시는구나” 하면서 막 달려오는 최 아무개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5) 8-11절. 뒤이어 다른 제자들이 작은 배를 타고 생선이 든 그물을 들고 왔습니다(8절). 와보니 주님께서 이미 불을 지펴놓고 생선구이와 떡을 준비해놓으신 겁니다(9절). 물론 소주도 있었겠죠? 참 기똥찹니다! 이 얼마나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장면입니까? 그런데 분위기에 취해서 “玉의 티”를 어찌 놓칠 수 있을까 보냐. 따질 것은 따져야죠.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는 여기서 소위 [자료비평]이라는 작업을 한 번 해봐야 되겠다 이 말씀입니다. 여러분 9절과 10절을 함께 읽어보시면, 어딘지 석연찮은 곳이 있습니다. 9절에서는 이미 생선이 구워져 있는데, 10절에서는 다시 주님께서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연결이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이겁니다. 그래서 비슬리 머레이는 8절을 10-11절로 바로 연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9절을 빼고 8-11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6) 9, 12-13절. 자,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을 식사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어라.”(12절) 고기와 빵과 식사라! (그리고 쏘주라) 그래서 알랜 쇼는 이 장면이 [교회의 성만찬]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이 6:11과 너무나 흡사한 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발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주님께 “당신은 누굽니까?”하고 질문하는 제자들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12절). 물론 이들은 이 사람이 누군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묻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감히 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죠. 이 점은 엠마오의 두 제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부활하신 주님과 이들 사이에는 이제 도무지 건널 수 없는 일종의 벽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벽은 이내 주님 자신에 의해서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봅니다. 식사에의 초대죠.: “와서 조반을 먹어라.” 물론 주님 자신은 식사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들을 식사로 초대하면서 부활하신 주님과 이 땅에 육체로 속한 채로 살아가는 제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 엄청난 분리가 메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장면이 그려주는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왜 주님께서 이들을 만나고 계신지 알 듯 합니다. 아름답고도 한적한 새벽의 갈릴리 호숫가에서 서로 마주 앉아 식사를 나누며, 친밀하면서도, 진지한 대화를 통해서 이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새롭고도 더욱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확립코자 하는 것이 우리 주님의 계획이자 의도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이제 우리의 해설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도전과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고기가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오늘 주님과 함께 조반을 나누셨습니까? 당신의 어제의 하루는 어떠했습니까? 지난 한 주간은 또 어떠했습니까? 진정 매 순간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대화하며 식사를 함께 나누셨나요? 혹시 지금도 이들 사도들처럼 엉뚱한 곳에서 자아의 그물을 늘어뜨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하루하루를 감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그물을 던져두고 부활하신 주님에게로 달려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기 바랍니다. 이제 그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한 번 들어보고 싶지 않습니까?
[복음산책]: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좀 합시다. 그러나 대개 공부 잘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더 흥미진진해 합니다(예: 김호진). 무엇인고 하면 잡은 물고기의 숫자(153마리)에 관한 것입니다. 왜 하필 153마리냐 이거죠. 이 점에 대해서 교부시대 이후 여러 사람들이 아주 요상한 해석들을 많이 내놓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만 소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① 제롬(4세기 교부): 153 종류의 물고기로서, 사도와 교회의 열방을 향한 선교적 사명에 대한 비유 내지는 상징이다.
② 어거스틴(제롬의 친구): 153은 1부터 17까지의 숫자의 총합으로서, 점으로 표시하면 삼각형을 이룬다. 그리고 17 = 10 + 7이며, 이중 10은 십계명을, 7은 성령의 일곱 위를 나타낸다. 어쨌든 10과 7은 유대교의 중요한 완전수들이다. 예: 창조의 열 말씀;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10대 계보;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의 10대; 아브라함이 거친 열 가지 시험; 애굽에서의 10 가지 기적; 등등.
③ 시릴(Cyril): 153 = 3 x 50 + 3; 삼위의 하나님의 숫자.
④ 현대의 발견(gematria): 구원; 또는 예수 그리스도(a=1, b=2, c=3, 등등).
이 모든 발견들... 한 마디로 말짱 황입니다. 왜요?
3-2. 제 2단락(15-23절): 교회의 표적
바로 그 계획이 이곳에서 놀랍게 펼쳐질 참입니다. 그래서 21장의 핵심은 이 두 번째 단락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 1단락은 일종의 도입부였습니다. 제자들은 이곳에서의 경험-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보다 깊은 영적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셈입니다.
독자들 역시 그렇죠. 그 동안 우리들은 “왜 자꾸 이야기가 겉돌고 있을까?” 하고 궁금해했습니다. 그 궁금해하던 것을 이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할 참입니다. 조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입니다. 듣는 이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그러한 힘과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새로운 소명이 그것입니다. 한 마디로,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 즉 교회의 표적에 관한 것입니다.
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17절)
(1) 15절. 그래서 그 전에 먼저 확실히 해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의 세 번에 걸친 확인 질문이 그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일 수도 있고, 또는 “네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질문은 베드로 자신의 앞선 세 번의 否認과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Gaechter같은 학자는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세 번의 질문은 근동을 비롯한 동양적인 관습에서 나온 것으로서, 중요한 서약을 할 때나 법을 제정하고 선포할 때, 세 번에 걸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관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개회나 폐회를 공식적으로 알릴 때, 의사봉을 세 번 두드리는 행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러한 세 번에 걸친 질문은 베드로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동시에 그의 사도적 권위를 확립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습니다. 즉 실패를 용서해 주는 문제와, 그러한 실패자를 다시 지도자로 세우는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진정으로 베드로에게 확인시키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참고로 고전 13:1-3도 함께 읽어봅시다.
그런 연후에 주시는 소명은 무엇입니까? 순서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 질문과 소명의 관계, 즉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양을 먹이는 사역과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한 교훈은 없습니까?
(2) 16-17절.
이 세 번의 질문은 분명 베드로를 아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베드로는 지금 주님께서 자기의 존재의 깊은 곳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와 유사한 체험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세 번의 질문의 각각의 의미가 무엇인지 따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각기 다른 단어를 주님께서 쓰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양을 치는 것과 먹이는 행위도 다르게 볼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구별은 정말 할 일없는 자들의 질문입니다. 오히려 베드로와 주님과의 관계와 베드로의 소명을 강조하기 위한 해설자의 수사적 의도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합니다. 이 세 번의 질문을 통해서 베드로의 고통은 무엇이었으며, 그리고 그의 고백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러한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예수님과 베드로의 내면 세계를 잠시 훔쳐봅시다. 도대체 무슨 생각들이 오가고 있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이니 베드로의 속마음을 아마도 훤하게 들여다보고 계셨을 것이고, 베드로 역시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기에 어디로 그의 감정을 숨기거나 모면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복음산책]: 이 단락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 있습니다: “왜 하필 베드로에게 이 모든 사역을 맡기실까?” 이 역시 공부 잘 못하는 사람들이 묻는 질문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이 장면을 통해서 베드로의 특별한 역할을 강조하려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단락에 와서 갑자기 달라진 배경의 변화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이곳에서는 앞에서 등장했던 다른 사도들은 사라지고, 베드로만이 주님과 홀로 대화하고 있습니다. 단지 “주님의 사랑하던 제자”가 나중에 잠시 등장할 뿐입니다. 아마 이 이야기는 앞선 그것과는 출처가 다른 자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크게 두 종류의 답변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적 답변과 개신교적 답변이 그것입니다. 우선 로마 카톨릭적 답변은, 이 소명이 베드로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간주하고, 주님께서 그에게 교회의 首長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이 단락은 마 16:18-19와 함께 金科玉條같은 곳입니다. 기억해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도 하나요, 감독도 하나”임을 주장하는 입장이라 이러한 해석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사실 구약에서 목자(shepherd)는 왕 내지는 통치자의 의미가 있기는 합니다(예: 삼하 5:2).
개신교적 해석은 이와 전혀 다릅니다. 보다 포괄적이라고나 할까요. 우선 목자의 의미와 범위부터 다릅니다. 신약에서 목자는 장로(elder)나 감독(bishop)의 의미도 아울러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자신은 주님을 “우리 영혼의 목자이자 감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벧전 2:25). 또 한 교회 내의 장로들을 가리켜 “함께 장로 된 자”라고 합니다(예로써, 벧전 5:1). 그리고 그 장로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합니다(벧전 5:3). 이 점은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성령께서 감독자가 되도록 맡기신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권합니다(행 20:28).
이렇게 볼 때, 이 대화는 베드로 개인의 목자직분에 대한 소명이라기보다는 목자 직분이 갖는 권위와 대표성에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 말이 났으니 말인데, 양 무리가 주님의 양 무리이지 어디 베드로의 소유입니까? 주님께서는 스스로를 선한 목자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고(요 10:11), 또한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림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도 했습니다(요 15:13). 그런데 어떻게 베드로가 통치하고 지배하는 목자(또는 감독)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우리의 해설자는 그의 사랑하는 공동체의 목자나 회원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사실 이곳에서 주님은 내포저자요, 베드로는 내포독자의 역할을 맡고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양 무리를 먹이고, 치려는 회원 여러분, 또한 새로운 양들을 전도하여 가르치려고 하는 회원 여러분, 당신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찬송가 102장을 불러봅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끊임없는 영적인 공급과 회복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여러분들을 목장모임에 불러 먹고 마시라고 권합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이 이 단락의 주제이자 오늘을 위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너는 돌이킨 후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후).
2) 나를 따르라(18-19절)
이제 주님은 비로소 베드로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무엇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18절의 예언은 15-17의 내용과는 별도의 전승으로 초대교회 안에서 여러 사람들 사이서 膾炙되고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베드로의 순교에 관한 이러한 예언은 앞의 단락과 적절히 연결되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바로 이게 목자의 운명 아닙니까? 목자의 운명과 관련해서 주님께서 일찍이 유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0:11과 15:13을 찾아 적어봅시다. 18절과 연결이 잘 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죽음의 방식과 관련해서도 18절은 많은 추측을 낳게 했습니다. 특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의 표현이 그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베드로가 십자가상에서 거꾸로 달려 순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트만은 한 잠언 경구를 이용해서 이 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릴 때는 자기 마음대로 다닐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그가 원하지 않는 곳에도 끌려 다녀야 하는 법이야.” 버나드도 이와 유사한 설명을 덧부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활기에 넘쳐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젊음과 연약하고 무기력한 늙음을 대조시킨 것이다... ”네 팔을 벌린다“는 표현도 늙어 타인의 부축을 받아 이끌려 가고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해석들을 토대로 이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해 보면, 베드로의 (영적) 젊은 시절의 자유분방함은 (영적)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순종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명령의 끝은 어디입니까?
이제 요한 공동체의 목자는 다시 그 회원들에게 마지막으로 권합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목자의 사명이자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어디까지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까? 그가 “너는 나를 따르라” 할 때 당신은 어디까지 따를 생각을 합니까? 우리의 사도 베드로는 어디까지 갔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의 순종의 끝은 죽음이었습니다. 나도 그럴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이 좁은 길을 걸어갑시다.”
참고로, 이 구절이 기록될 즈음에는 베드로는 이미 순교의 인생을 마감한 뒤였을 확률이 큽니다.
3) 네게 무슨 상관이야?(20-23절)
(1) 20절. 그러나 혹시 마음이 썩 내기키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왜 하필 나만?” 하고 회의가 듭니까? 이어지는 단락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곳입니다. 이제 해설자는, 베드로가 그토록 궁금해했던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본문은 아무런 언급은 없지만, 앞에서 베드로의 운명에 대해서 언급한 후에 곧바로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분명 두 사람의 운명은 상당히 대조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요한 공동체는 익히 알고있는 듯 합니다.
대개 우리는 열심히 교회에서 사역할 때, 은근히 화가 치밀 때가 있습니다: “다른 놈들 다 오데 갔노?” 평소에 열심히 사역하던 사람들은 이런 질문 잘 하지 않는데, 어쩌다가 개떡같은 마음이 생겨 한 번 큰 마음먹고 소매 걷어 부치고 뭐 좀 하려는 사람은 꼭 이런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언제 이런 질문 합니까?
(2) 21-22절. 베드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글쎄요, 그가 화가 났다는 암시는 없지만, 어쨌든 이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궁금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질문을 감정을 넣어서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21절). 이러한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22절)? 그 의미를 간단히 요약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이 사람이 베드로보다 더 편한 길을 걷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베드로가 간여하고 관심 가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만일 이 제자가 혹시 요한복음의 내포저자이기라도 하다면, 그는 분명 상당한 고심 끝에 이 구절을 추가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도 베드로는 순교하고 없는 지금, 자기는 여전히 살아있으니 혹시 그의 독자들이 자신의 목자로서의 자격이나 헌신에 회의를 품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더나아가 베드로의 이러한 질문을 삽입함으로써 행여나 대 사도 베드로를 비난하고, 흠집 내려는 의도로 비췰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22절은 주님의 입을 빌어서 해설자 자신이 그의 사역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라면 22절에 덧부쳐 당신의 입장을 설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기독교 사역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서 당신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게 하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도대체 기독교 사역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3) 22-23절. 그러나 22절의 설명은 공동체 안에서 엉뚱한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오해도 그렇고, 또 이제자의 운명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억척이나 추측들이 가능할까요? 한 예로서, 만일 이들이 이 제자가 주님 오실 때까지 살 것이라고 믿고있었는데, 주님은 오시지 않고 그 제자는 죽어버렸다면 종말에 대해서 이들이 상당히 실망했을 것입니다. 요즈음에도 이런 무리들 많이 있습니다.
수년 전 나와 성경 공부하던 한 학생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수 개월 동안 자취를 감춰버린 것입니다. 그러다 약 일 년 후 그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내용인 즉은 그 동안 그는 주님이 그 해 10월 24일에 오시는 줄로 믿고 열심히 기다렸는데, 그 날이 지나도 오지 않아서 실망하여 성경 공부를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한심한 친구였습니다. 나는 절대로 “다미선교”를 가르친 적이 없는데, 이 친구는 그 동안 나랑 공부하면서도 또 다른 선생으로부터 그 고약한 가르침을 계속 배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이 친구를 우연히 학교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뭐 하는지...
그래서 23절의 정정은 이런 점에서 상당히 적절한 것이라고 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3. 제 3단락(24-25절): 大尾
이 마지막 두 문장은 두 가지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21:1-23의 이야기를 분명히 “사랑하는 제자”가 썼음을 증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복음서 전체의 마지막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24절과 25절이 각기 다른 출처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24절 후반의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의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1) 24절. 비슬리 머레이는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능한 답변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에베소 장로들: 24절을 19:35와 비교해 볼 때, 분명 복음서의 내포저자 자신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일인칭 단수형”의 문장으로 표현되어있는 25절은 사도가 이처럼 말하는 것을 들은 자들입니다.
(2) 내포저자 자신: 복음서 자체의 공적인 신임도나 권위를 더하기 위해서 “우리”라는 복수형을 썼습니다. 특히 “증거”나 “증인”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는 항상 그러했습니다.
(3) 제 3의 인물: 복음서를 읽고 이해하고 있는 자들 중의 한 사람.
(4) 내포저자와 교회
(5) 단순한 표현 상의 문제: (예) 잘 알려져 있듯이
2) 25절. 이 마지막 문장은 내포저자의 결론인 20:30-31과는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섯 가지 정도 될겁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이 마지막 문장의 수사적 기법(과장법)은 당시 헬라 작가들에게는 익숙한 것입니다. 하기야 이러한 과장이 아니더라도 창조와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신실하신 헤세드에 대해서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다같이 불러봅시다.
4. 결론
1) 본문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이 주제에 맞는 핵심성구를 암송해 봅시다.
2) 그 주제가 어떠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본문의 단락을 따라 순서대로 설명해 봅시다.
3) 교회가 보일 수 있는 부활의 표적은 과연 무엇입니까?
5. 교훈 및 적용
1) 창조교회 각 회원의 궁극적인 비전은 우리 주보나 또는 교재(# 100)에서 밝혔듯이 자신의 목장을 갖는 것입니다. 즉 목자가 되는 일입니다. 오늘 베드로에게 주어진 소명과 비교해 볼 때, 과연 이러한 비전은 성경적입니까? 그리고 실현 가능한 비전입니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2) 당신은 이러한 비전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신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계획을 지금 어떻게 이루어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