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18:38);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9:26-27).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9:30).
네 복음서 중에서 <수난 설화>와 관련해서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책은 <요한복음>입니다(13-19장). 이를 편의상 다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인즉, 제 1부는 “최후의 만찬”-“다락방 강론”-“최후의 기도”로 이루어져 있으며(13-17장), 제 2부 역시 아래 세 개의 에피소드를 포함하고 있는 일종의 직선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배반(18:1-11);
(2) 재판(18:12-19:16);
(3) 죽음(19:17-42)
이 중 첫 번째 에피소드는 비교적 간략하게 그리고 있는 반면에, 재판은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에피소드를 지배하고 있는 분위기는 오늘의 재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흡사합니다. 즉 온갖 소리들로 가득 찬 시끌벅적한 시장바닥과 같은 분위기입니다: 의심의 소리, 모욕, 부인,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요구하는 소리, 등등.
주님의 <수난 이야기>는 각 복음서들의 절정이자 <성경> 전체 이야기의 절정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수난설화>는 성경 문학의 나머지 부분들이 향하고 있는 중심점입니다. 이 이야기는 구약성경의 예법과 예언들, 구약성경의 표본들, 그리고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성경적 원형을 이행하고 완성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소 길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가 주는 극적 효과를 맛보기 위하여 화자의 의도대로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취급하여 다루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양식. <공관복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은 기본적으로 그 출처가 다른 두 가지 정도의 다른 양식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시와 찬미(1:1-18)
2. 표적 설화(2:1-12:36)
3. 수난/부활 설화(13:1-20:31)
이중 <수난 설화>를 이루고 있는 기본 양식은 흔히 ‘케리그마’(kerygma)로 부르는 것으로서, 초대교회 시절 사도들의 선포나 설교를 지칭합니다. ‘케리그마’는 초기 형태의 복음 선포로 볼 수 있는데, 예컨대, 가장 짧게 요약된 형태의 복음 선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관련 구절(롬 3:25; 4:25; 고후 4:19; 벧전 3:18, 22).
이와 같은 선포,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선포는 내용 상 복음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기는 합니다만, 보다 세부적인 설명이나 해설을 덧붙이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베드로’가 행한 그 유명한 오순절 설교가 될 것입니다(행 2:14-36). 사도는 이 연설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성령 강림과 연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 화자 역시 초기 ‘케리그마’에 추가적인 해설과 설명을 덧붙여 <요한복음> 특유의 “수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요한’ 화자의 <수난 이야기>와 관련해서 본 교재의 <수난설화(1)>의 서론 부분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경. “수난 이야기”의 일차적인 배경은 예수님 공생애의 마지막 기간이었다는 사실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다만 모든 성경 이야기가 다 그러하듯이 그것을 회고하며 들려주는 설교자나 교사는 훗날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그렇게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와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이 세상을 향한 사역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자라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섬김”으로서, 특히 그분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류에 대한 섬김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모든 인류에게 전해질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요한’ 화자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난도 바로 그 운명의 “때”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 같은 인식 하에 예수님의 마지막 시기의 행적 하나하나를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과 동 시대의 사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든 시대의 모든 인류를 위하여 논문을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는 당시 예수님의 수난에 버금가는 억압과 환난을 거치는 중이었고, 그들의 믿음은 시련의 한 가운데 놓여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요한’ 공동체는 자신의 “수난 이야기”를 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교회 핍박의 주역은 물론 ‘유대’ 공회였습니다만, 오늘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공회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시야’ 내지는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하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처단한 당사자가 ‘유대’ 공회와 당시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그리고 왜 죽었는지에 관해서 <탈무드>의 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야에 예수는 나무에 달렸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이미 예고되어있었던 바, 다음과 같은 포고(布告)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었다: “이 자는 미신을 행하고 이스라엘을 배교에 빠뜨린 죄로 곧 돌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누구든 이 자의 편을 들고 싶은 자는 당당하게 나와 그를 위해 변론을 해보라.” 그러나 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결국 유월절 전야에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탈무드>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몰아 처형했다는 유대 전승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던 한 이방인 ‘셀수스’(Celsus)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어느 유대인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를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듣기로 그는 자신이 선언한 그 어떤 것도 이루어놓지도 못했으며, 우리가 그를 기소하여 처형하려 했을 때에는 자신을 숨겨 도망하려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가 자신의 제자로 부르는 사람들의 배신으로 체포됐다는 사실이 정말 창피한 일이 아닌가! 그가 진정 하나님이었다면 도망하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붙잡히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공유했던 제자들, 그를 구세주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요 사자로 떠받들던 그 제자들이 어떻게 그를 곤경에 내버려두고 달아날 수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은 생각은 ‘셀수스’ 시대 이전부터 유대인들 사이에 회자(膾炙)되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G. Richter). ‘요한’ 화자 역시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수난 이야기” 속에 이 같은 소문을 반박하고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컨대, 그는 예수님께서 그를 잡으러 오는 자들로부터 도망을 하기는커녕 반대로 그들 앞으로 먼저 나아오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8:4).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피하여 도망을 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정반대였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가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또 있습니다. 즉 예수님과 그를 잡으러 왔던 로마군대와 성전 치안요원들이 마주쳤을 때에, 두려워 떨었던 쪽은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 체포 조였다는 것입니다(18:6).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도 공포 가운데 흩어져 달아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은 그냥 가도록 내버려두라고 하셨으므로 그들은 단순히 그 자리를 떠난 것이었습니다(18:8-9).
예수님에 대한 평판에 흠집을 내려는 유대인들의 “악성 루머”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던 것 같은 것이 이들 역시 ‘요한’ 화자의 <수난 이야기>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12:27-28)이나,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고 절규하는 모습이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발언 등은 유대인들의 조롱감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한’ 화자는 예수님의 그 모든 발언이나 행동을 <성경>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반박하고 있습니다(19:28). 이는 마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유대인들의 조작된 소문을 반박하는 기사를 덧붙이고 있는 모습과 흡사합니다(참고. 마 28:13-15).
구조. 이 부분의 구조는 아주 명확합니다. 이야기의 흐름은 예수님의 체포(18:1-11)에서 대제사장의 심문(18:12-27), ‘빌라도’의 재판(18:28-19:16a), 죽음과 장사(19:16b-42)의 순서로 단계 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체포와 대제사장 ‘안나스’에 의한 심문 이야기를 하나의 단락으로 묶는다면, 전체 이야기는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단락은 다시 일곱 개의 작은 단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요한’ 화자가 전체 이야기를 이처럼 반복되는 일곱 개의 단락에 따라 구성했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만(<계시록>에서도 숫자 일곱의 구도가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구도는 적어도 독자들에게는 이해하기 쉬운 구도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예수님의 체포와 대제사장의 신문(18:1-27)
① ‘유다’가 로마 병사들과 유대 성전 치안 요원들을 이끌고 오다(1-3절)
② 예수님께서 체포 조와 맞서다(4-9절)
③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 맞서다(10-11절)
④ 예수께서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끌려가다(12-14절)
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부인하다(15-18절)
⑥ 예수님에 대한 ‘안나스’의 신문(19-24절)
⑦ ‘베드로’가 예수님을 두 번 부인하다(25-27절)
빌라도의 재판(18:28-19:16a)
①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넘겨지다(28-32절)
② ‘빌라도’의 첫 번째 訊問(33-38a)
③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하다(38b-40절)
④ 병사들이 예수님을 때리고 조롱하다(19:1-3)
⑤ 예수님을 자칭 왕 및 무고한 자로 선언하다(4-7절)
⑥ ‘빌라도’의 두 번째 신문 및 무죄 방면을 시도하다(8-12절)
⑦ 예수님에 대한 사형 선고 및 십자가 처형(13-16a절)
처형과 죽음과 장사(19:16b-42)
① 십자가 처형(16b-18)
② 십자가에 걸린 예수님의 직함 및 유대인들의 반대(19-22절)
③ 예수님의 못을 찢어 나누다(23-24절)
④ 예수께서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위탁하다(25-27절)
⑤ 예수께서 돌아가시다(28-30절)
⑥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다(31-37절)
⑦ 예수님을 장사지내다(38-42절)
신학과 신앙
“체포와 신문”(訊問)에 관한 에피소드는 문학적으로 하나의 이야기 단위 속에 포함되어야겠습니다만(참고. <문학과 역사>), 각각의 에피소드가 흥미진진한 내용으로 인해서 별도의 이야기 단위로 다루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1) 체포(18:1-11); (2) 신문(18:12-27).
독자들은 이곳에서 ‘요한’ 화자의 문학적 천재성을 다시 한 번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조와 대칭, 그리고 역설과 해학. 이 단락의 독서 포인트는 바로 이들 문학적 장치들을 제대로 감상하는 데 있다 하겠습니다.
1. 체포(18:1-11)
단순히 연대기적인 계산에 따르면, <수난 이야기> 제 2부(18-21장)는 14:31에서 연결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14:31)
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2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18:1-2절)
이렇게 볼 때 15-17장의 내용은 화자의 추가적인 삽입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최후의 만찬에 이은 다락방 강론의 내용은 확장되었으며, 주님의 기도가 덧붙여졌습니다. 어찌되었든 화자의 의도인 즉은, 주님은 다락방 강론과 기도를 마치신 후 제자들과 더불어 그 집을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후 예수님 일행이 머문 곳은 “동산” 내 한 장소로서, 평소에도 자주 찾던 곳이었으며(참고. 2절후; 눅 22:39), 여기서 ‘유대’ 축제 기간 내내 머물었던 것 같습니다(유월절의 경우 ‘유대’인들이라면 ‘겟세마네’를 포함한 도시 경내(境內)에 머물러야 했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요한’ 화자는 이 장소를 그냥 “동산”으로만 지칭할 뿐, 구체적인 지명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에피소드를 전하는 <공관복음>은 이곳이 ‘겟세마네’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참고. 마 26:36; 막 14:32). 다만 네 복음서 화자 중 아무도 “겟세마네 동산”으로 부르고 있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 ‘요한’ 화자가 전하는 “동산”은 ‘겟세마네’ 지역 안에 있는 한 동산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가롯’ 유다도 이곳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가 로마 군대와 성전의 치안요원들과 함께 이곳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3절)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과 함께 3-9절의 내용이 <공관복음>에서 전하고 있는 동일한 내용을 신학적으로 왜곡시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예. 막 14:43-50).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로 3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은 ‘가롯 유다’의 우월적인 지위에 관한 언급 때문입니다. 즉 <마가복음>에 따르면, ‘유다’가 로마 군대와 성전 치안요원들과 함께 그 동산에 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만, ‘요한’ 화자는 이곳에서 ‘유다’가 이들 체포요원들을 “취하여”(lambavnw), 데리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유다’가 이들 군대의 인솔자 내지는 지휘관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이 가능했을까? 과연 ‘유다’가 예수 체포 조를 선발하여 지휘하고 인솔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읽을 때 그와 같은 해석이 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며, 현실적으로도 가능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그리고 ‘요한’ 화자 또한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자의 의도는 오히려 다른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화자의 의도인 즉은 <공관복음>의 기록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 화자가 이 복음서 벽두에서부터 보여 온 이원론(二元論)적 세계관에 따르면, ‘유다’는 여전히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대적하는 어둠의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배교한 제자로서, 로마 군대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어둠의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세상의 빛에 대항하고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들 세력은 상징적으로 악의 삼위일체 행세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화자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 내지는 조작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탈(脫) 역사화 하고 일반화 하는 방식으로 빛과 어둠의 긴장과 대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수난 설화>를 <공관복음>의 동일한 이야기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예컨대, “배반과 체포”에 관한 ‘요한’ 화자의 기술(記述)에서도 그의 문학적 거장(巨匠)다운 면모를 읽을 수 있는데, 화자는 이곳에서 <공관복음>과는 아주 상반된 방식으로 예수님과 다른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즉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은 어둠의 세력이 계획하고 주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으며, 이는 <성경>의 예언을 응하게 하려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요한’ 화자는 자신의 수난 이야기를 “그리스도의,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에 의한” 이야기로 들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요한’ 화자가 들려주는 <수난 설화>를 읽을 때, 바로 이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상황을 주도하고 통제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4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4-6절)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 때”를 미리 정해놓으신 줄을 익히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잡고 있습니다. 자신을 잡으러 오는 무리를 향해서 먼저 주도적으로 나아가서 “누구를 찾느냐고?”고 묻습니다. 극적인 효과를 위함인지 우리의 화자는 그 유명한 ‘유다’의 “배반의 입맞춤”은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이 장면에서 아예 생략해버립니다. ‘나사렛 예수’를 찾고 있다는 무리의 말에 예수께서는 “내가 그다”(ejgw eijmi)라고 답하십니다. 이 답변은 그냥 단순히 자기의 신분을 알리는 대답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일곱 번에 걸쳐 등장하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그 유명한 선언인 것입니다. ‘유다’나 성전 치안 요원들이 이 선언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무리의 반응이 이를 증거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즉 그들은 “물러나 땅에 엎드러”집니다. 이들은 지금 예수님의 대응에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단순히 뒤로 물러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현현 앞에 공포와 두려움으로 땅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 사람들이 두려워 떨고 장면은 <성경> 여러 곳에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단 10:9)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9:4)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계 1:17)
일찍이 성전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성전 요원들도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 적이 있습니다: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7:46). 무리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 모습은 실로 역설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로잡힐 자가 아니라, 사로잡으러 온 자들이 오히려 두려움에 휩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로마 병사들도 놀라고 두려워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요한’ 화자는 무리의 반응을 그리면서 아마도 <시편>의 해당되는 구절들을 상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시 27:2)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 34:4)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시 56:9)
예수님은 무리들 앞에서 자신의 권위와 엄위를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목자(牧者)로서 양들에 대한 관심과 염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분의 제자들은 그냥 가도록 내버려두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로 규정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7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 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7-9절)
하지만 여기서도 화자가 독자들의 주목을 요하는 대목이 있는바, 예수님께서 여전히 상황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즉 주님은 무리들에게 사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하고 있으며,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한 행동이라는 설명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통제하고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현장에 있던 다른 사도들도 주님의 말씀과 행동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이어지는 단락은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0-11절)
여기서 화자는 ‘말고’의 귀를 벤 자가 ‘베드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만, 그에게 이 사실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그의 충성스러운(?) 행동은 가증스러운 “유다의 키스”만큼이나 의미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를 이루는 일에 있어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점잖은 꾸짖음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 하겠느냐”는 말씀에서 다시 한 번 <수난 이야기>의 진정한 저자(著者)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해줍니다.
2. 신문: 유대법정(18:12-27)
앞선 “체포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동원된 인물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와 로마 병사들과 그리고 성전 치안요원들입니다. 이들 체포 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몽둥이와 무기를 들고 출동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체포 작전은 염려했던 바와는 달리 별 희생 없이 완벽하게 마무리되었고, 예수님은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끌려 왔습니다.
12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12-14절)
흥미롭게도 유일하게 ‘요한’ 만이 주님께서 ‘안나스’에게로 먼저 끌려 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안나스’는 당시 현직 대제사장이 아니었는데, 성전 치안요원들은 왜 주님을 그에게 먼저 데리고 갔을까? 역사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안나스’는 전직(주후 6-15년) 대제사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한동안(주후 17-41년) 그의 아들들이 계속해서 제사장직을 독점해 왔으며, 예수님 체포 당시 현직 제사장은 그의 사위인 ‘가야바’로서, ‘안나스’의 영향력이 아주 대단했음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안나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바클리에’(W. Barclay)의 주석서에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고도서 5.
이 세 절은 “신문 이야기”의 배경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에 대한 간단한 역사적 사실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문 1. 이제 바야흐로 예수님에 대한 일련의 신문이 시작될 텐데, ‘요한’ 화자는 이와 함께 또 다른 신문이 진행되고 있는 장면을 번갈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두 신문이 두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한 무대 위에서 두 개의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모습입니다(또는 회전 무대의 앞뒤를 번갈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15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7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15-18절)
두 장면 모두 ‘안나스’의 저택 안으로서, 한 곳은 그의 집무실쯤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한 곳은 그의 “집 뜰”입니다. 각 장면에서 다른 한 쌍의 신문자/피의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 쌍은 ‘안나스’/예수님이고, 다른 한 쌍은 ‘베드로’/무명의 여종입니다. 이처럼 두 신문을 나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등장인물들에 대한 절묘한 대조와 대비를 보여주고자 함일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문학적 대가로서의 ‘요한’ 화자의 탁월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화자는 예수님에 대한 신문이 아니라, ‘베드로’에 대한 신문부터 먼저 시작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또 다른 제자”는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로서, 다수의 학자들은 이 인물이 화자 자신일 것이라는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관심의 초점은 단연 ‘베드로’입니다. 그의 이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 유명한 ‘베드로’의 “부인”(否認)을 부각시키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는 과연 무엇을 부인했을까? 네 복음서 모두 그의 모습과 태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요한’ 화자의 강조점은 다소 다른 데 있는 듯합니다. 즉 ‘베드로’가 부인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는 점을 부인했다는데 있습니다.
아무튼 화자가 이곳에서 ‘베드로’의 이름은 드러내 놓고 공개하면서, 그를 ‘안나스’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간 “또 다른 제자”의 이름은 무명으로 남겨놓고 있는 사실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알다시피 그는 ‘니고데모’나 ‘아리마데 요셉’의 이름까지도 실명으로 소개하고 한 바 있습니다.
이곳에서 신문자는 무명의 “문지기 하녀”입니다. <공관복음>이 그를 한 소녀라고만 밝히고 있는데 반해, ‘요한’ 화자는 조금 더 구체적입니다. “또 다른 제자”가 그녀에게 부탁하여 ‘베드로’를 ‘안나스’의 저택 안으로 들어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녀가 ‘베드로’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도 예수님의 제자인지 물었던 곳은 문 입구였지, 불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은 ‘베드로’가 불가에서 불을 쬐고 있을 때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 14:67; 눅 22:55). 이와 같은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베드로’가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얼버무렸다는 점일 것입니다. 닭이 울기 전에 그의 첫 번째 “부인”입니다.
신문 2. 이제 무대는 한 바퀴 돌아 다시 ‘안나스’의 집무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문자와 피의자는 ‘안나스’와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서 관객들은 이와 같은 구도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일 뿐이며, 실은 정 반대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즉 불법을 행하고 있는 자는 피의자가 아니라 신문자라는 역설을 알게 될 것입니다.
19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20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19-21절)
‘안나스’가 행한 불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그가 신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현재 민주 국가에서 지니고 있는 것과 거의 대등한 수준의 사법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 사회의 사법 체계에 대해서는 “교훈과 적용”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재판관은 피의자에게 일체의 질문을 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증인의 배석 하에 그 증인에게 질문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피의자는 자신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일체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할 의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판결은 증인의 증언에 달렸으며, 두 증인의 증언이 일치하는 부분에 대해서만 판결이 유효하며, 이 경우 피의자의 항변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같은 배경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피의자(?) 예수님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피의자인 내게 질문을 하느냐? 증인들이 있을 테니 그들에게 물어보라”(참고 21절). 그러니까 지금 피의자가 신문자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제대로 된 법적 절차를 따르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아마도 ‘안나스’는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몰아가려 했던 것 같은데,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은밀하게 백성들을 호도하여 배교에 빠뜨리는 것으로서, <신명기>는 이런 자는 돌로 쳐 죽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 13:1-10). ‘안나스’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는 예수님은 자신은 한 번도 은밀하게 가르친 적이고 없고, 성전과 회당에서 대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20절). 결국 ‘안나스’의 계획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즉 은밀하게 가르치는 자가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라면, 거짓 제사장의 특징은 은밀하게 재판하는 자라는 등식이 성립할 것인데, ‘안나스’가 이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학이자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22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2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4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22-24절)
‘안나스’의 불법을 질타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문제 삼아 한 관리가 예수님을 칩니다. 대제사장에 대한 태도가 불손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를 향해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이 재판의 불법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 말한 것이 있으면 그 증거를 대라”는 것입니다. 즉 그 어떠한 은밀하고도 체제 전복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음을 밝히면서, 동시에 공개적인 법정에서 증언할 증인들을 제시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예수님은 지금 적법한 절차에 따른 공개 재판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안나스’는 이에 굴복하여 비밀 재판을 중단하고, 그를 ‘가야바’에게 보냅니다. 그가 어떤 처분을 내릴지 보고 싶은 것이겠지요.
신문 3. 무대는 다시 한 번 돌아서 ‘안나스’의 바깥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장소가 안에서 바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이곳을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로 그리고 있습니다.
25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25-27절)
피의자는 ‘베드로’, 그리고 신문자는 함께 불을 쬐던 “사람들”(25절)입니다. 여기서 “그들”이라 함은 성전 치안 요원들과 ‘안나스’ 집안의 하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마가복음>에서는 첫 번째 질문을 했던 “하녀”와 동일 인물로 소개하고 있고(막 14:69), <누가복음>에서는 “다른 사람”(남성)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눅 22:58). 그리고 ‘베드로’에게 세 번째 질문을 한 사람은 다소 애매모호합니다. <누가복음>은 그를 “또 한 사람”으로 그리고 있는가 하면(눅 22:59),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공히 “곁에 서 있는 사람들”로 부르고 있습니다(막 14:70; 마 26:73). 그러나 ‘요한’ 화자는 분명하게 그 사람이 누군지 밝히고 있는 바, 그는 ‘말고’(‘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자)의 친척입니다(요 18:26). 그리고 바로 이 자가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세 번째로 부인하게 했던 사람입니다.
3. 신문: 로마 법정(18:28-19:16a)
예수님에 대한 재판 과정 역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다르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 화자는 공회법정 즉 ‘가야바’와 공회 앞에서의 재판 과정을 생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나스’ 앞에서의 재판 과정 또한 아주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대조적으로 로마법정 즉 ‘빌라도’의 재판은 비교적 상세하고 길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재판 과정 역시 <공관복음서>의 기록과는 사뭇 다르게 전하고 있는데, <공관복음>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하는 것으로 재판이 시작하고 있는데 반해, 이곳에서는 ‘빌라도’의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절)?
이는 ‘요한’ 화자 자신이 그동안 일관되게 강조해왔던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계시이자 선언으로서, 이번에는 이방인 ‘빌라도’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긍정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판은 단순히 재판이 아니라, 복음의 계시이자 선포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빌라도에게 넘겨짐.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들은 아마도 유대 공회원들인 것 같습니다(참고. 31절).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28절)
이른 새벽부터 예수님을 로마 관청에 데려가는 이들의 신속함과 결연함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빨리 처단하고 돌아가 유월절 행사를 기념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관청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행사를 앞둔 시점에 이방인의 처소에 들어가 자신을 불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禁忌)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방인의 거주지는 불경하다”는 나름대로의 당시 사회의 사회적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조산(早産)이나 사산(死産) 등으로 죽은 아이들의 공동묘지를 이방인 거주지 근처로 삼았기 때문에 그 지역을 불결하게 여겼던 것도 사실입니다. <민수기>에서도 누구든지 시체를 만졌거나 접촉한 자는 적어도 한 주일 동안 유월절 행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기도 합니다(민 9:6-12).
<레위기>의 정결(淨潔) 규례를 근거로 해서 볼 때, 당시 이들 제사장들의 행동은 이해할 만도 하지만, 이들의 극단적인 태도는 오히려 기막힌 해학과 역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면서, 이방인의 처소에 들어가 자신을 불결하게 함으로써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그토록 “유월절의 양”을 먹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실은 “하나님의 어린 양”의 죽음을 요구함으로써,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유월절의 의미를 성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그 양의 피가 주는 혜택에서 스스로를 배제시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종교인들의 위선(僞善)과 외식(外飾)을 이처럼 확연하게 드러내는 사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청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이들 종교 지도자들의 결정이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는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화자는 지금 ‘빌라도’의 재판 모습을 관청 안과 밖의 두 장면으로 분리해 놓고, 재판관 ‘빌라도’가 그 둘 사이를 왕래하는 진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설정은 이야기의 효과를 극적으로 고조시켜 주고 있습니다만,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빌라도’와 예수님 사이에서 오가는 중요한 대화, 즉 화자가 드러내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계시로부터 ‘유대’인들이 배제되고 있음을 수사적으로 그려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들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듣지를 못했던 것이지요. 이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그들(아마도 공회원들)에게 왜 예수님을 기소하는지 그 이유를 묻습니다. 재판관이 피고소인에게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고소인을 향해서 먼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29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30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 하였겠나이다(29-30절)
행여나 ‘빌라도’가 자신들의 편에 서서 재판도 없이 순순히 자신들의 손을 들어줄 줄 알았다면 크게 당황스러운 질문임에 틀림없습니다. 공회는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기 전에 최소한의 협의 정도는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빌라도’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 같은 질문이 아니라 공회가 예수님에게 덮어씌운 혐의를 그대로 인정해주고 재판을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공회의 기대와는 달리 ‘빌라도’는 마치 처음 이 사건을 맡은 사람처럼 예수님에 대한 혐의가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마치 ‘빌라도’ 스스로 신문과 재판을 진행시키겠다고 결심한 듯합니다. 사실상 ‘빌라도’는 새로운 재판을 시작하고 있는 셈입니다. 공회의 이전 결정에는 아랑곳 하지 않겠다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공회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이 받고 있는 혐의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실망과 함께 다소 불평이 섞인 답변인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빌라도’ 또한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31절)
‘빌라도’의 반응은 해학적이고 공회에 대한 모독에 가깝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유대’의 법을 어겼다면, ‘유대’의 법에 따라 처리하면 될 일을 가지고 왜 ‘로마’법에 따라 처리하려는지, 그리고 반대로 피의자가 정말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면 그를 죽일 권한은 ‘유대’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 당국에 있느니 만치 그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는지 분명하게 밝혀달라는 것이지요.
‘빌라도’의 요구에 대해서 공회는 자신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이는 틀린 것입니다. ‘유대’법에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 있고, 최악의 경우 범죄자를 돌로 쳐 죽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빌라도’ 역시 이 같은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며, 자신의 재량(裁量) 하에 공회가 그 같은 사형집행을 할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유대’인들은 예수가 ‘로마’인의 손에 죽기를 원한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처형 방식도 하나님의 저주를 뜻하는 십자가의 처형입니다. 이는 <신명기>에서도 천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누구든지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신 21:23). 대제사장을 비롯한 공회는 예수님이 어떤 숭고한 대의명분을 지닌 순교자의 죽음을 당하는 자로 사람들 사이에서 인식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는 자로 알려지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요한’ 화자의 입장은 전혀 다릅니다. “나무에 달리는” 처형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32절)
앞에서도 밝힌 바처럼(12:32-33), “나무에 달리는” 처형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거룩한 목적을 성취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무에 달림”은 “나무 위에 들어 올려 짐”으로 보아야 하며,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온 인류의 구원자로서 죽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선언하고 있습니다.
1차 신문. 다시 장면은 바뀌어 ‘빌라도’의 관청 안입니다. 그가 관청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신문을 시작합니다. 첫 번째 신문인 셈입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절)
이 질문은 네 <복음서> 모두에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예수님의 답변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곧바로,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답변하고 있습니다만, ‘요한’ 화자는 예수님의 대답을 37절까지 미뤄둠으로써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두 사람의 대화를 삽입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유대인의 왕”으로서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중요하고도 추가적인 설명을 접하게 됩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에게 그가 과연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인가를 물었을 때(막 14:61), 예수께서는 “내가 그니라”고 답하심으로써(막 14:62)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정작 공회는 예수님을 단순 “행악자”의 혐의를 씌워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참고. 30절). 그런데 ‘빌라도’는 공회의 주장을 무시한 채, 예수님에게 그분이 “‘유대’인의 왕”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빌라도’의 질문은 실은 앞서 공회가 예수님에게 씌운 혐의를 살짝 변형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한’ 화자는 공회의 재판을 거의 언급하지는 않습니다만, ‘빌라도’의 대화를 통해서 볼 때(35절), ‘가야바’의 재판을 모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한 타이틀로서, 로마 총독 ‘빌라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로마식 통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빌라도’는 이 호칭을 순전히 정치적인 용어로 이해했을 것이며, ‘유대’ 당국 또한 그가 그런 식으로 이해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빌라도’가 알고 싶어 했던 바도, 과연 예수님이 그런 자인가 일 것입니다.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4-36절)
하지만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 곧바로 답하는 대신, 그 질문이 누구에게서 나온 것이냐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마 이런 의도겠죠. 즉 “네가 묻는 질문이 네가 정말 나를 그렇다고 인정하고 하는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유대’인들이 나에 대해서 기소한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냐?” ‘빌라도’의 태도는 냉소적이며 모욕적입니다. 그 어떠한 ‘유대’적인 것에도 관심이 없으며, 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다는 태도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이 대면에서 자신의 진정한 의도는 드러내지 않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알고 싶어 했던 바는, ‘빌라도’가 과연 예수님에 관하여 그 자신의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대화를 통해서 더 깊은 지식을 갖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유대’인들의 불만을 단순히 받아들였다면 그는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며, “유대인의 왕”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한편 ‘빌라도’의 편에서 보자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자기에게 넘긴 사실에 대해서 다소 불만이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과연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자기 앞에 서있는지 알고 싶다는 태도입니다. 잘못이 순전히 ‘유대’인들의 관습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로마법에 따라 처단해야 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인지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을 받아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33절). 우선 “그의 왕국”을 두 번에 걸쳐 부정법(不定法)으로 정의(定意)하고 있습니다: “내 나라는... 아니라(36절). 여기서 예수님과 “내 나라”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에 대해서 명시적인 언급은 없습니다만, 이에 대해서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의 선포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현되는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의 활동을 의미하고 있음은 명백합니다. <요한복음>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두어 군데뿐이지만(3:5, 5), 복음서 전체적으로 예수님을 배제한 하나님의 나라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바도 이 같은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일곱 번의 표적 기사에서 드러나고 있는 바처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행사하심으로써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에 걸친 부정적인 선언, 즉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가 의미하는 바는 왕국의 기원(起源)에 관한 강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권이 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이 세상의 왕국과 구별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의 왕국의 방식을 따른다면, 왕국의 유지를 위해서 군대를 가져야 할 것이며, 적대국(敵對國)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전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군대가 없습니다! ‘빌라도’ 역시 이 점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예수님이 말하는 왕국도 로마 제국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예수는 로마의 통치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확인한 ‘빌라도’는 마치 다시 한 번 다짐이라도 받듯,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그분의 왕국이 분명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왕국임에는 분명할 것이므로, 다시 예수님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번에는 긍정문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성격의 왕국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37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37-38절상).
‘빌라도’의 질문이 의미하는 바는, “어쨌든 네가 왕이 아니냐?”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이해하고 있는 왕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예수님이 의미하는 바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보다 확실하게 긍정적인 정의를 내려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즉 그분의 나라는 “진리의 왕국” 즉 진리에 속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것도 바로 이 점을 증거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란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공생애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그분의 “행함”과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역은 필연적으로 심판과 구원을 수반하게 될 것인데, 듣는 이의 태도 여하에 따라 달라질 결과입니다. 다만 이곳에서 예수님은 사역의 긍정적인 측면, 즉 듣고 구원받는 것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와 같은 긍정적인 선언은 단순히 그 나라의 실체에 관한 정의를 내리는 것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초청이기도 합니다. 즉 잘 듣고 그 나라에 참여하라는 암시가 곁들여 있습니다. 이제 ‘빌라도’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셈입니다. 예수께서 재판관 자리에 앉은 ‘빌라도’를 끓어내려 피고석에 앉혀버린 셈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전혀 그 자리에 앉을 의도가 없는 듯합니다. “진리가 무엇인가?”고 되묻고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도 않고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고 있는 그의 모습이 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는 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재판을 통해서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된 사실은 그가 로마에 대해서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진리에 속한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차 선고. 다시 ‘빌라도’는 관청 밖으로 나옵니다.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공식적인 판결 내용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의 판결은 “무죄”입니다.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38절하)
그러나 그가 무리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반응은 오직 한 가지 소리뿐입니다. 그의 기대를 벗어난 것입니다(참고. 40절, 19:6, 12, 14, 15). 예상 밖의 반응에 대해서 ‘빌라도’는 한 가지 묘안을 내놓습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39절)
일종의 타협안입니다. 그가 신문한 피의자가 정말 아무 죄가 없다면, 자신의 권한으로 그를 무죄 방면하고, 사건 종결을 선언하면 그만일 텐데, 이처럼 구차한 타협안을 제시함으로써, 큰 실책을 저지르게 됩니다. ‘로마’ 총독이 ‘로마’ 법정에서 ‘로마’법을 따르지 않고, ‘유대’인들이 원한다면 그들의 관습을 따르겠다고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가리켜 “유대인의 왕”으로 부르고 있는 점이 역설적입니다. 혹자는 이와 같은 ‘빌라도’의 태도를 두고, 그가 ‘유대’ 지도자들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하여 이 같은 타협안을 내놓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유대인의 왕”을 방면해 준다 해도, ‘유대’인들이 그에게 뒤집어씌운 신성 모독의 혐의를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주장도 있습니다. 예컨대, ‘빌라도’는 한 편으로는 비정치적인 차원에서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단의 지지자(支持者)들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을 법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바라바’와 그의 방면을 요구하고 있던 지지자들이 상당수 운집해 있는 상황을 보며, 예수님의 무죄방면을 요구하는 지지자들이 이들을 수적(數的)으로 압도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유대’ 지도자들은 함부로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불평하며, 더 상급 기관에 항소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정정(政情)을 불안하게 하는 혁명 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설들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만일 ‘빌라도’가 내심 그와 같은 계산을 하고 있었다면, ‘유대’ 지도자들은 능력에 있어 그보다 한 수 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재판이 진행될수록 ‘빌라도’는 자신이 피하고 싶어 했던 그 난처한 상황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삭빠른 ‘유대’ 지도자들은 그런 ‘빌라도’가 자신의 계획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내버려둘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바라바’를 놓아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40절)
그들의 요구인 즉은 반국가적인 혁명가이며 살인자인 영웅 ‘바라바’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범법자를 방면하고 의로운 자를 처단하라는 것이지요. 전능하지만 결코 폭력적인 방식이 아닌 자비와 평화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운명을 실현시키려 그들에게 온 사람을 죽이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요구는 참으로 비극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역설은 화자가 ‘바라바’를 “강도”(lh/sth", 레스테스)로 칭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역설적으로 다가옵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강도, 노상강도, 산적, 혁명가 등을 의미하는데, 어떤 경우든 폭력을 도구로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참고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단어를 “열심당”(Zealot)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제거해야 할 반체제(反體制) 게릴라 세력일 것이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영웅적 애국 투사들입니다. <마가복음>은 ‘바라바’를 “민란을 일으키고 민란 중에 살인을 저지른 자”로 그리고 있습니다(막 15:7). 그렇다면 그는 폭력적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려는 자들에게는 영웅적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아닌 게 아니라 일부 번역본에서는 40절에서 그를 자유의 투사로 묘사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바라바’(Barabbas)라는 이름 또한 흥미롭습니다. 이 이름은 그의 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아버지의 아들”(ba abba)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일부 초기 주석가들은 “랍비의 아들”(ba rabbi)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의 일부 사본에서는 그를 가리켜, “바라바라는 예수”(Jesus Barabbas)로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마 27:16-17). 그렇다면 왜 대부분의 <마소라 사본>에서는 이 이름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뺀 것일까? 초기 신학자 ‘오리겐’(Origen)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에 있어서 <성경> 어디에도 죄인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준 곳은 없다.” 이후 성경 학회의 결론인 즉은 <성경>에서 “바라바라는 예수”가 사라지게 된 것은 순전히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일반적으로 “열심당원”에 대해서 거부감을 보이던 ‘유대’인들 조차도 ‘빌라도’의 제안에 ‘나자렛 예수’를 죽이고 대신에 ‘바라바 예수’를 살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 이해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바라바 예수’는 그들에게 유대 민족주의의 대망을 실현시킬 ‘메시아’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메시아’의 도래는 ‘바라바 예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자” 즉 “주의 종”인 ‘나자렛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었던 바,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의 요구는 이 약속을 역설적으로 성취시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비극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빌라도’의 제안, 즉 유월절에 죄인 한 사람을 방면시켜준다는 ‘유대’인의 전례(前例)와 관련해서는 ‘유대’ 문헌 어디에도 그와 같은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그와 같은 관습은 처음부터 아예 있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언제 이와 같은 관습이 실제 정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겠습니다.
채찍과 조롱. ‘빌라도’는 피의자가 아무 죄가 없음을 알았음에도 그를 채찍질하고 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19:1)
왜일까? 우리는 그의 의도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것은 예수를 풀어놓아주려는 ‘빌라도’의 두 번째 묘안입니다. 소위 ‘유대’인들의 사면(赦免) 전통에 따라 죄인 한 사람을 풀어주려는 그의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사코 예수님을 처벌하고 싶어 하는 ‘유대’인들의 요구는 들어주어야 하겠기에 처형보다는 훨씬 가벼운 형벌로 대신하고 싶은 것입니다. 즉 그를 몇 대 때려 훈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눅 23:16). ‘빌라도’는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헤롯’조차도 예수로부터 아무 죄도 발견할 수 없었노라고 선언합니다(눅 23:14-15). 따라서 ‘요한’ 화자에 다르면, ‘빌라도’는 채찍질로 십자가 처형을 대신하려 했던 것이지,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후 그분을 채찍질하여 ‘유대’인들 앞에 내세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따르면, 채찍질은 사형 선고에 앞서 행해진 졌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막 15:15). 즉 채찍질은 처형의 한 과정이었다는 말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채찍질 했을 뿐만 아니라, 더 심한 구타와 조롱(嘲弄)을 더하고 있습니다. 야비하고 잔인한 군중들의 요구가 이들의 행동을 부채질했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2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2-3절)
여기서 가시나무를 엮어 만든 관(冠)은 예수님에게 물리적인 고통을 가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기보다는 그분을 조롱거리로 삼기 위함이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되었을 것만은 분명합니다. 관의 모양은 흔히 고대 동전에 새겨진 황제의 왕관을 본 땄을 것으로 보이며, 당시 흔히 구할 수 있었던 야자수 나무의 가지들로부터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태는 오늘날 흔히 보는 월계수 잎으로 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인디안들이 쓰던 것과 유사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군인들의 의도가 어떠했든 예수님께서 이 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할 수 있는 바,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왕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바는 그분께서 지금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왕의 홍포(紅袍)를 걸치고. 왕좌에 앉아, 열방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는 인사를 받고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사람들이 그의 손에 경의의 입맞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때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화자는 어쩌면 이 장면에서 예수님에 대한 대제사장 ‘가야바’의 예언을 회고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즉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는 예언이 그것입니다(참고. 11:49-52). ‘가야바’의 예언은 그의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막힌 아이러니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점은 ‘빌라도’의 행동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될 것입니다. 즉 그가 십자가에 붙여놓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팻말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고쳐줄 것을 요구했음에도 그는 이를 거절하고 있습니다(19:19-22).
예수님에 관한 이 같은 역설은 비록 그를 향한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와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결국 진실로 드러나게 될 것인데, 이는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일 것입니다. 즉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은 바로 이 같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2차 선고. 하지만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빌라도’의 판단은 확실해 보입니다. 즉 그를 석방시켜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가 사전에 숙지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의 행색(行色)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이번에는 군중들의 동정심을 기대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금 모습은 충분히 그럴 만 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분은 지금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왕의 홍포를 입었어나 군병들에게 조롱당하고 얻어맞아 머리는 풀어지고 얼굴과 온 몸은 찢기고 선혈이 낭자합니다. 적어도 평소 예수님을 익히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지금 그분의 모습은 참으로 충격적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4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4-5절)
동시에 이 장면은 참으로 해학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살려내려는 ‘빌라도’의 필사적인 모습이 우선 그렇습니다. 그는 지금 흥분한 군중을 향해서 절규하듯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이래도 이 사람을 잡아 죽여야겠느냐는 것이지요. 지금의 상황은 두 등장인물의 역할이 완전히 반전된 모습입니다. 즉 군중이 비정하고 무지한 재판관으로, ‘빌라도’가 사려 깊고 합리적인 변호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빌라도’의 입장은 시종일관 이 사람이 아무런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 전혀 해(害)가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마땅히 합당한 판결을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난 군중 앞에 두려워 떨고 있는 모습입니다. 성난 폭도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재판관, 그리고 그 사이에 속수무책 서 있는 하나님의 아들. 그의 운명이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들 두 당사자 간의 타협에 의해서 판결날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 화자는 바로 직전의 장면에서 로마 병정들에 의하여 조롱받고 멸시받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만, 이 장면에서는 그 아들이 법의 보호는커녕 증오와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죽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자의 일관된 의도인 즉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 연약하고 불쌍하고 무기력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빌라도’의 계획은 다시 한 번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동정은커녕 더 큰 저항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무리는 더 큰소리로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6절상)
‘빌라도’는 다시 한 번 좌절을 맛봅니다. 마침내 그도 격노(激怒)하여 무리들을 향해 내뱉듯이 한 마디를 던집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6절하)
이 말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데려가 죽여도 좋다는 최종 선고가 아닙니다. 지금도 밝히고 있는 바이지만, 그는 예수께서 아무 죄도 없다는 점을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고, 그 점을 수차례에 걸쳐 언급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는 집요하고 돌이킬 줄 모르는 이들 ‘유대’들의 태도에 환멸과 짜증이 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는 이 사람을 죽일 생각이 전혀 없으니, 정 원한다면 너희들이 데려다 그렇게 하라는 역겨움의 표시입니다. 이에 ‘유대’ 무리는 오히려 그를 반박하며 이렇게 대꾸합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7절)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혐의(嫌疑)입니다. 만일 이들이 이 혐의를 처음부터 그렇게 강조했더라면 재판의 성격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성모독에 관한 혐의는 로마 법정이 아니라 ‘유대’ 법정에서 다루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빌라도’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혐의는 정치적인 것, 즉 예수께서 스스로 “유대인의 왕”으로 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공회가 이제 종교적인 것, 즉 “신성모독”이라는 새로운 혐의를 들고 나온다 해서 이전의 혐의를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죄목을 추가로 덧붙임으로써, ‘빌라도’로 하여금 이 재판을 결코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무언중에 강요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씌워진 “신성모독”이라는 새로운 혐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무자비한 본심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쉽게 인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아’로 자처한 것도 심각한 일이었거늘,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까지 했으니 이들이 참을 리가 없는 노릇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큰 거침돌로 남아있습니다.
2차 신문. ‘빌라도’는 할 수 없이 그의 관저로 들어가 다시 한 번 신문을 시도합니다. 이번에도 첫 번째(18:33-37)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주제(예: 예수님의 기원과 권위 등)가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들 주제들이 첫 번째에 비해 좀 더 포괄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했다는 ‘유대’인들의 새로운 기소(7절)를 듣고 ‘빌라도’가 더욱 두려워합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8절)
지금까지 ‘빌라도’의 두려움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한 바는 없습니다만, 이곳에서 그가 “더욱” 두려워하고 있다는 언급은 그가 사실상 이 재판을 통해서 상당히 부담감을 느끼고 속으로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그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이 보여주고 있는 일관된 태도나 모습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빌라도’ 자신도 이미 확신하고 있듯이, 예수께서 그에게 쏟아지는 아무런 근거 없는 비난이나 혐의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담대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한 예가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한 번도 다루어본 적이 없었던 이 같은 피의자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했다 하니, 갑자기 더 큰 두려움이 그를 엄습해 온 것입니다. 여기서 더 큰 두려움이란 그가 진정 “신의 화신”(化身)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할 수 있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었던 터라, 만일 그렇다면 그를 잘못 다루었다가 받게 될 신의 보복을 ‘빌라도’는 두려워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도행전>도 이와 관련된 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루스드라’에서 ‘바나바’를 대동한 사도 ‘바울’이 한 앉은뱅이를 치료하여 걷게 하자 그곳 주민들은 ‘바울’ 일행을 가리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온 것이라며 놀라 경배하려 했습니다(행 14:11).
총독은 예수를 다시 그의 관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과연 이 사람이 신의 화신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9절)
“너는 어디로부터냐?”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그의 출신이 어디냐고 묻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순수한 인간인지 또는 정말 하늘로부터 온 자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묵묵부답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이사야>의 노래를 연상시켜주고 있기도 합니다(사 53:7).
왜 예수님은 더 이상 대답해주기를 거부하고 계신 것일까? 첫 번째 대화에서 ‘빌라도’가 보여준 반응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에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빌라도’가 예수님의 기원(起源)에 대하여 들려준들 무슨 새로운 반응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질문의 의도가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일진대, 새로운 계시에 눈을 뜰 일말의 희망조차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만이 예수님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빌라도’의 두려움은 점차 불안으로 바뀝니다. 그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죄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인들조차 자기의 질문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급하여 예수님을 재촉하며, 자기가 어떤 권위를 가진 사람인지 알려주려 시도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0절)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의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황제의 대리인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사람을 살리고 죽일 권력조차 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이 권력에 대해서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알고 있는 최고의 권력은 로마 황제의 그것을 넘어서는 전능자 하나님의 권력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1절)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빌라도’가 자신이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조차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에 따라 ‘빌라도’에게 위임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 ‘빌라도’의 뜻에 따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언급하고 있는 권한은 특별히 현재 진행 중인 재판과 관련된 것으로서(조건절의 시제가 미 완료형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한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의 권위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가장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곳은 <로마서> 13장입니다.
흥미롭게도 ‘불트만’(Bultmann)은 이 재판과 관련해서 ‘빌라도’가 ‘유대’인을 다루는 방식이 국가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전형적인 사례로 간주하고 있습니다만, 한 때 그도 11절을 근거로 국가(또는 정부)는 하나님의 권위를 받은 기관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으며,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판결을 통해서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며, 오히려 ‘빌라도’의 위치와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의 죄가 “더 크다”은 언급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자가 누구인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인물은 ‘가롯 유다’일 것입니다(참고. 13:21). 두 문장에서 공히 동일한 동사 “넘겨주다”(paradivdwmi, 파라디도미)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앞의 문장에서는 미래형으로, 그리고 11절에서는 과거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체포 이야기를 끝으로 무대에서 사라졌으며,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일과는 무관합니다. 다른 가능성으로 ‘유대’ 지도자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인데, 이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온 자들이기 때문입니다(18:28). 하지만 11절에서 비교의 대상은 ‘빌라도’와 다른 한 개인(oJ, 호)이기 때문에, 남은 대안은 대제사장 ‘가야바’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 공회를 대표하는 자로서, 이 모든 일의 주모자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죽이자고 사람들을 부추기는 일에 앞장섰으며(11:49-53), 그분에게 신성모독의 혐의를 씌운 일에 대해서도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입니다(막 14:61-64). 그는 ‘빌라도’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재판하는 권한을 부여받기는 했으나 그 권한을 남용하였으며, 정치적인 사리(私利) 추구를 위하여 예수님에게 백성을 선동(煽動)했다는 날조된 혐의를 뒤집어씌워 ‘빌라도’에게 넘겨 죽음에 이르도록 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죄는 ‘빌라도’의 죄보다 더 크다 할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씀에 깊이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를 방면해주려고 새로운 시도를 한 듯합니다(그냥 사면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2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새로운 카드를 가지고 ‘빌라도’를 압박합니다. 만일 ‘빌라도’가 예수를 방면(放免)하면 “가이사의 친구”가 아니라 ‘가이사’의 적이 될 것이라고 하는 위협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빌라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황제의 신임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를 총독으로 임명한 ‘디베리우스’ 황제는 변덕스럽기로 악명 높은 자였는데, 누구든 그의 지위를 위협하는 자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그 대가를 치르도록 했다 합니다. 황제가 분쟁과 소요로 늘 불안한 ‘유대’ 지역에서 혁명을 꿈꾸는 한 왕을 ‘빌라도’가 도와주었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빌라도’가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함정에 스스로 갇히는 신세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이들 ‘유대’ 지도자들이 성공적으로 로마 총독을 이처럼 난감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곳 ‘유대’ 땅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로마 총독이 황제에 불충(不忠)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 비난이 다른 나라도 아닌 ‘유대’, 즉 로마에 대한 증오와 저항이 제국(帝國) 내 어느 다른 나라보다 더 극열한 나라에서 그 나라의 로마 총독이 로마에 불충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편에서 보자면 참으로 모욕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는 철저하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황제의 친구”라는 호칭 때문입니다. 그가 이 호칭에 그토록 집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아무나 “황제의 친구”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지도급에 속한 인사들만 누릴 수 있었던 특별한 영예였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로마 원로원에 속한 사람들이 “황제의 친구”로 불렸고, 그리고 특별히 선택된 개인들도 이 호칭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의 경우 당시 ‘티베리우스’ 황제의 근위대장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우렐리우스 세자누스’(Aelius Sejanus)와의 친분을 이용해서 그토록 원하던 친구의 호칭을 얻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자누스’와 가까운 자라면 누구나 “황제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후 31년 10월 18일, 무슨 연유인지 ‘세자누스’는 실각되고 마는데 이 때 많은 지지자들도 그와 함께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정치 감각이 아주 뛰어난 대제사장 ‘가야바’가 로마에서의 이와 같은 상황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는 바로 이 같은 상황 변화를 이용해서 ‘빌라도’를 협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풀어주면 그 역시 황제로부터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난 ‘빌라도’는 이제 자기 앞에 서 있는 “유대의 왕”보다 자신의 신변을 더 염려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최종 선고: 십자가형. 재판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적어도 형식적으로 볼 때 선고(宣告)의 내용은 전과 동일합니다(참고. 19:4-7). 그러나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재판관 ‘빌라도’의 입지(立地)마저 위협받게 되는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를 위시한 일단의 ‘유대’ 지도자들에게 철저한 패배의 수모(受侮)를 맛보게 된 것입니다. ‘가야바’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모독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호락호락 넘어갈 수 없습니다. 받은 모독을 되돌려주어야겠습니다. 그가 어떤 복수를 꾸미고 있을까?
13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14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13-14절)
화자는 우선 ‘빌라도’가 모든 사람들(‘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포함한)이 보는 앞에서 위엄과 격식을 갖추어 재판 석에 앉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재판이 법적인 권위를 갖춘 공개적인 재판이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최종 선고가 내려지던 시와 때를 밝히고 있습니다: 유월절 준비일; 정오(제 육시). 마지막으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천명(闡明)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왕.”
‘유대’인들은 이 시각에(정오) 모든 일을 멈추고 집에서 무교병을 꺼내고, 유월절 양(羊)을 도살(屠殺)하여, 사실상의 유월절 행사를 시작합니다. 이곳에서 ‘요한’ 화자가 전하고 있는 재판의 일시(日時)와 관련해서 몇 가지 의문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유월절 준비일”이라 함은 유월절 양(羊)을 잡는 등, 유월절 식사를 위하여 일련의 준비를 갖추는 기간을 말합니다. ‘요한’은 이곳에서 예수님이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는 날 아침에 처형당하신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날은 금요일입니다. 그런데 ‘보이스’ 목사는 이날이 목요일이며, 재판이 시작된 것은 수요일 오후부터였다고 말합니다. 이날이 목요일이든 금요일이든, 즉 유월절이 시작되기 이전이거나 최소한 시작되는 날이든, <공관복음>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컨대,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식사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참고. 막 14:12-26). 이 같은 차이는 문제가 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를 한 그날에 바로 처형되었다는 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모리스’(L. Morris)는 두 기록의 차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합니다. 즉 예수님 당시 두 가지 다른 달력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주류 ‘유대’교에서 사용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사해 사본”(死海 寫本)을 기록했던 일단의 종파(宗派)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신 시기는 “사해 사본”의 달력에 근거해서 기록한 것이고, 그분의 처형에 관한 기록은 ‘유대’교 달력에서 정해놓은 바에 따라 공식적인 유월절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만일 ‘요한’의 기록은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은 유월절 공식 행사가 시작되기 전, 즉 그 준비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도살하는 시점에 맞추어,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공관복음>에서 전하는 최후의 식사 즉 유월절 만찬은 그 전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후의 만찬은 수요일 저녁(주후 30년, 4월 5일)에, 그리고 처형은 다음날 목요일(4월 6일)로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처형 시간입니다. ‘요한’은 “제 육시”(즉 정오)라고 전하고 있고, ‘마가’는 “제 삼시”(즉 오전 9시)(막 15:25)로 못 박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마가’의 경우 하루를 4등분하면(제 1, 3, 6, 9시), “제 삼시”가 대략 오전 9-12시 사이가 될 것이므로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시각은 그들의 조상들이 “출애굽”의 엄청난 은혜를 목도하고 체험했던 때이기도 합니다. 그 때 이들 조상은 무교병을 만들고,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후, ‘야훼’ 하나님 즉 “유대의 왕”이 이집트의 왕 ‘바로’를 이기고 자신들을 구원해주는 체험을 했습니다. 바로 그 시각에 지금 이들 후손들도 하나님의 어린 양을 유월절 제물로 바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얄궂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이 날은 두 번째 “출애굽” 사건이 될 것이었습니다(이번에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두 번째 “출애굽”을 성사시켜줄 “유대의 왕”은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고 죽이기를 원하는 예수입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가하는 회심의 일격(一擊)입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이 선언은 실은 ‘요한’ 화자의 고발이면서, 책 전체를 흐르는 주제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5 절상)
어쩌면 자신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이렇게 날려버립니다. 이전보다 더 격렬하고 단호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묻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15절중)
그가 무슨 다른 반응을 기대하고 물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의 의도인 즉은 책임 소재에 관한 한 대못을 박자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죽게 한 장본인은 바로 너희 ‘유대’인들이라는 점 말입니다. 그들이 예수에게 쏟아 붇는 저주와 수치가 결국 자신들의 머리 위에 쏟아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유대’인들의 대답은 명쾌하기만 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분노한 목소리로 예수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15절하)
화자는 대제사장들이 이렇게 외쳤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이 선언은 직전에 ‘빌라도’가 그들에게, “보라 너희 왕이로다”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 선언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이들 제사장들이 단순히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었던 “메시아 대망” 자체를 부인하는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짐짓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척하면서 이스라엘이 그토록 고대해오던 “하나님의 나라”를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은 나라요 민족으로 자처해 왔습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빌라도’의 최후 선고 외에는 말입니다: “Ibis ad crucem!” 번역하자면, “너를 십자가형에 처하노라”입니다.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16절)
흥미롭게도 ‘빌라도’ 자신의 최후 선고는 네 <복음서>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법적인 최후 선고문 자체는 복음서 화자들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빌라도’의 최정 결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막 15:15). 여기서 “넘겨주다”(paradivdwmi, 파라디도미)는 ‘헬라’ 단어는 분명 십자가 처형을 의미하는 법적 용어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한 가지 애매한 점이 있는 바, ‘빌라도’가 예수님을 누구에게 넘겨주었는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적어도 문맥에 따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도 같은 의미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눅 23:25). 여기서 “그들”이란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후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요한’ 화자는 이처럼 애매모호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화자 자신의 신학적 의도 때문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빌라도’가 예수님을 누구에게 넘겨주었든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의 뜻”을 이룬 셈이며(참고. 눅 23:25), 더 나아가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들을 향해서 그들이 자신을 들어 올릴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요 8:28).
4. 죽음과 장사(19:16b-42)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네 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이고,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만이 갖는 독특한 묘사가 그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있으나 <요한복음>에는 없는 내용들 중 가장 중요한 몇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행인들과 대제사장들 및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장면(막 15:29-32); (2) 온 땅에 임한 어두움에 대한 기록(15:33); (3)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유기의 절규(15:34); (4) 성전 장막이 찢어지는 사건(15:38); (5)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백부장의 고백(15:39). 이들 기록은 <마태복음>에서도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이들 외에도 <누가복음>은 몇 가지 내용들 추가로 더 소개하고 있습니다: (1) ‘골고다’ 노상에서 울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눅 23:27-31); (2)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23:34); (3) 십자가에 함께 매달린 두 강도와 대화를 나누시는 예수님과 한 강도가 회개하는 장면(23:39-43); (4) 사람들이 애곡하는 모습(23:47-49).
그리고 <요한복음>에만 고유한 기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빌라도’가 십자가 위에 붙여놓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과 이로 인한 ‘유대’인들의 저항(19:19-22); (2)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구약>을 인용함으로써 예언의 성취를 강조함(24, 28-29, 36-37절); (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머니를 위탁하는 장면(25-27절); (4) 예수님의 마지막 절규(30절); (5) 예수님께서 로마 병정들에 의해 옆구리를 찔리는 장면(31-36절).
이렇게 볼 때, 적어도 ‘요한’ 화자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상당히 선택적으로 그의 자료들을 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선별한 일곱 개의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 선별적인 자료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네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요소는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서술이 이상할 정도로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요한복음>의 경우 그분의 죽음을 단 세 개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종속절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못 박을 새”(19:18). 이점은 이후 기독교 역사가들이나 현대의 설교자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보여주고 있는 모습과는 지극히 대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에 대하여 이런 저런 설명을 덧붙이면서 될 수 있으면 그 의미를 심화시키려고 애써 왔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대의 독자들 역시 <복음서> 화자들이 그처럼 처참한 죽음을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한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당시 십자가의 처형이 얼마나 잔인하고 참혹한 것인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오는 의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독자들에게는 이 세 단어가 주는 효과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도 끔찍했을 것입니다.
처형(19:16b-18). ‘빌라도’가 예수님을 누구에게 넘겨주었는지에 대해서 화자가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16하그들에게 넘겨주니라. 17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16절하-17절)
하지만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처형을 담당할 네 명의 로마 병사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참고.23절). 이들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할 것입니다. 당시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형장(刑場)까지 걸어가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역사가 ‘플루타크’에 의하면 십자가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만드는데 필요한 나무틀 같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형 집행 과정은 죄수의 양 팔을 벌려 십자가의 수평 부분에 해당하는 나무에 놓고 손바닥에 못을 박아 고정시킨 다음, 죄수로 하여금 그것을 메고 처형장까지 걸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늘 세워져 있는 십자가의 수직 부분에 해당되는 나무 막대 위에 매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골고다’ 언덕에는 항상 그러한 나무 막대가 서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표현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혼자서 그것을 지셨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만, 이는 <공관복음>의 기록과는 상충되기에 주의를 요하는 대목입니다. 예컨대, <마가복음>은 예수님 대신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진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막 15:21 이하). 이 같은 차이를 해소(解消)하기 위한 전통적인 시도(試圖)는 예수님께서 ‘골고다’를 향하여 홀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중간에 쓰러지자 ‘시몬’이 이를 대신 진 것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도 이에 상응하는 유사한 기록을 전하고 있습니다. 즉 ‘시몬’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눅 23:26). 이 같은 설명이 전혀 무리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 화자에게는 다른 의도나 동기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어 보입니다. 그것은 이 복음서 전체를 관통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신학적 의도일 것인데, 예컨대, 앞선 예수님의 체포 장면에서 확인한 바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참고. 18:1-12).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이나 주권(主權)과 관련된 것입니다. 즉 ‘요한’ 화자에게 있어 예수님은 다른 어느 누구의 개입이나 권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는 “운명의 주인”입니다. 초대교회 교부나 일부 ‘유대’ 랍비들은 이 구절 속에 “이삭의 모티브”가 들어있다고도 합니다. ‘이삭’은 자신의 자신을 태울 나무를 지고 ‘모리’ 산으로 올라간 바 있습니다(창 22:6). 만일 우리의 화자가 이 같은 알레고리를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당연히 그럴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만),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똑 같은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요즈음 회교권 국가에서도 그러하듯이 당시 로마에서도 범법자를 처형할 때 많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공공장소(성벽이나 도심지)에서 행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황제 ‘디도’는 공개적인 처형장소로 성벽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요한’ 화자는 ‘골고다’를 공개적인 장소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곳이라면 사람들은 예수께서 들리시는 것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유대의 왕”이라는 팻말조차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에 따르면, 예수님과 함께 처형당하는 두 사람은 도둑입니다(막 15:27). 이들은 아마도 ‘바라바’와 함께 당시 자유와 해방 운동을 벌이던 혁명 투사들이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대목은 예수님께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서술입니다.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18절)
‘랍비’ 전승에 따르면, 가운데 자리는 항상 가장 중요한 자리로서,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고 상세하게 덧붙임으로써, 그분의 죽음은 결국 예언의 성취였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참고. 사 53;12).
십자가의 팻말과 유대인의 거부(19-22절).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죄수는 처형 이유를 적은 팻말을 그의 몸에 두르도록 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이 그 팻말을 들고 죄수보다 앞서 운반하여 나중에 십자가에 붙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그분 옆에 붙인 팻말에 “백성을 선동한 자”로 적혀있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의도적으로 다른 문구(文句)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19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문구입니다. 이 문구는 그동안 대제사장들이 처음 ‘빌라도’에게 제공한 정보였으며, ‘빌라도’ 자신도 그 점을 인정하고 재판 내내 반복해서 사용해왔던 것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빌라도’는 이 문구를 세 가지 다른 언어(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표기했습니다. 이 역시 당시의 관행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팻말 위에 기록한 내용을 다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20절)
그러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이 ‘유대’인들을 자극하고 분노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빌라도’가 노리는 것이었습니다. 재판 내내 ‘유대’인들로부터 당한 치욕을 되갚아줄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한’ 화자에게 있어, ‘빌라도’의 이 마지막 행동은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의 정점(頂點)을 찍는 마지막 에피소드가 될 것입니다. 어째서일까? ‘빌라도’는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통치하던 세계 제국(帝國) 로마의 재판관이자 대리인으로서 온 세계를 향해서,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팻말이 ‘히브리’어로 쓰여 있어 ‘유대’인이라면 이를 모를 리 없고, ‘라틴’어로 쓰여 있어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당시 온 세상 사람들의 사실상의 모국어(母國語) ‘헬라’어로 쓰여 있어 전 세계가 그 팻말에 쓰인 내용을 다 보았다는 온 세상이 이를 다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빌라도’는 ‘요한’ 화자를 대신하여, “예수는 세상의 구주(救主)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치 <시편>의 한 구절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시 96:10).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수난 이야기>의 아이러니가 그 정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두 당사자, ‘빌라도’와 ‘가야바’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그 죽음에 대한 예언자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야바’가 한 일은 그가 일찍이 예언했던 바대로, 예수의 죽음이 그의 백성과 온 민족을 구속(救贖)하게 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며(참고. 11:49-50), ‘빌라도’가 한 일은 그 예수가 이스라엘과 세상의 구주(救主)라고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예측하였듯이, 팻말의 내용을 본 대제사장들은 분기탱천(分岐撐天)하였습니다. ‘빌라도’에게 그 문구를 바꾸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인 반응에 비해 요구하는 내용은 다소 미미한 정도의 문구 수정입니다.
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21절)
즉 그냥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는 요구입니다. 그들의 요구인 즉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거짓말을 했고, 그 때문에 그가 죽는다는 점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이들의 요구를 묵살합니다. 그리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22절)
‘빌라도’가 그의 전 재판 과정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표면적으로 그의 마지막 보복은 성공적으로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이보다 더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한 답변 이상의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진리를 거짓으로 바꿀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리하여 ‘빌라도’는 다시 한 번 부지불식간에 “예수가 세상의 왕”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선포한 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찢어 나눔(23-24절). 죄수들의 옷은 형 집행관들의 소유가 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일종의 노획물로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지니고 있었을 소유는 겉옷과 속옷, 허리띠와 샌들, 그리고 아마도 머리 위에 쓰는 두건이었을 겁니다. 지금 병사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은 겉옷과 속옷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상은 속옷(citwvn, 키톤)입니다. “속옷”(tunic)은 소매가 짧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옷을 말합니다.
23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23-24절)
“속옷”은 매듭이 없이 한 올로만 짠 옷으로서, 찢어 나눌 수가 없습니다. 병사들이 이 옷을 놓고 제비뽑기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 사람만이 이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복음서 모두 이 장면을 보고하고 있습니다만(참고. 막 15:24), 이중 <요한복음>의 묘사가 좀 더 길고 세부적입니다. <공관복음>의 경우 찢어 나눈 옷과 제비뽑기를 하는 옷에 대한 구별이 없으며, 이 장면이 <시편>을 연상하게 합니다만(참고. 22:18), 명시적이지는 않습니다. 이에 비해 ‘요한’ 화자는 보다 구체적입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 22:18).
이 장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해 왔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대제사장이 입는 겉옷이 매듭이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필로’(Philo)는 다소 우화적인 의미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로고스”란 원래 우주 모든 것의 총화(總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만일 ‘요세푸스’의 설명을 취한다면, 예수님의 매듭 없는 겉옷은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분의 역할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필로’(Philo)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의 겉옷은 교회의 연합이나 일치를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의 매듭 없는 옷은 속옷이지 ‘요세푸스’나 ‘필로’가 언급하고 있는 겉옷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의 연합이나,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이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해석에서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대목은 병사들이 예수님의 속옷을 “취했다”는 사실입니다. 혹자는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겉옷을 벗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장면과 병행되는 장면으로서,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내려놓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놓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소유뿐만 아니라, 생명까지고 다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속옷이 결코 짖어질 수 없는 것처럼 그분과 하나님도 결코 분리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를 맡기심(25-27절).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속옷을 나누어 가지기 위하여 제비뽑기를 하는 군인들을 보여준 화자는 이어서 십자가 근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들을 비춥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25절)
이 구절은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앞선 24절과의 대조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조(對照)가 되는 것은 거의 조롱과 멸시에 가까운 병사들의 무관심과 여인들의 헌신입니다.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찢고 제비뽑아 서로 가지려고 법석을 떨고 있을 때, 이 여인들은 그저 안타깝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기막히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요한’ 화자는 바로 이 대목에서 <공관복음>과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그는 <공관복음>의 전언(傳言)과는 달리 여인들을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이전의 시점에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이들 여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그를 멀리서 지켜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참고. 마 27:55-56; 막 15:40; 눅 23:49).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단순히 병사들과 여인들 사이의 대조를 넘어 이어지는 장면까지 연결시키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즉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에 신경을 쓰고 있는 동안, 그분은 사랑하는 여인들에게 자신의 관심을 돌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여인들이 과연 몇 사람이며, 누구인지, 그리고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멀리서 지켜보던 여인들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등에 관해서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선 <공관복음>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목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막 15:40); (2)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마 27:55-56); (3)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눅 23:49).
그리고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여인의 숫자는 해석 여하에 따라 두 명이거나, 세 명, 또는 네 명까지 가능합니다. 만일 25절을 “그 어머니와 그 이모, 즉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한다면, 여인의 수는 두 명이 됩니다. 하지만 이 같은 해석은 아주 부자연스럽습니다. 두 번째 해석은 “그의 어머니와, 그의 이모 즉 글로바의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로 이해하는 것인데, 이 경우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의 이모의 이름이 같아서, 이 또한 부적절한 해석이라 하겠습니다. 나머지 가능성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으로 보이는데, 여인의 수를 네 명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네 명의 여인은 각기 두 쌍의 여인으로 짝을 지을 수 있는데, 한 쌍은 “그 어머니와 그의 이모”이며, 나머지 한 쌍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두 쌍의 차이는 첫 번째 쌍은 무명(無名)으로, 두 번째 쌍은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기록과 <공관복음>의 기록을 일치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를 “작은 야고보와 요세(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만 유일하게 등장하는 ‘살로메’는 예수님의 이모로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예수님의 이모를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해석을 받아들이면, 예수님과 ‘요한’과 ‘야고보’는 서로 사촌 간이라는 오랜 전통과도 일치하는 바가 있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하겠습니다. 특히 이어지는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그분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 즉 ‘요한’에게 의탁하는 것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어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해석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어쩌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전승을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여인들은 <공관복음>에서는 언급하지도 않은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공관복음>에 따르면 이들 여인은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 중의 일부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여인들이 ‘마가’나 ‘마태’가 거명하고 있는 여인들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과연 이들 여인이 <요한복음>이 전하는 바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아니면 <공관복음>에서처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혹자는 십자가 근처까지 다가온 여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만, 보다 합리적인 해석은 멀리서 지켜보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죽음이 가까이 오자 십자가 근처로 다가왔다고 보는 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십자가 처형을 받는 사람 주변에는 그의 가까운 친구나 친척들뿐만 아니라 적들 까지도 지켜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아시고, 십자가에 모여든 여인들 모두를 향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를 향해서 그분의 어머니를 의탁(依託)한다는 유언을 남기십니다.
26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26-27절)
이 짧은 말씀은 단순한 부탁이나 권고가 아니라, 그야말로 유언의 성격이 짙은 말씀입니다. 당시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는 사람은 최후의 유언을 남길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금 그러한 관례에 따른 것인지,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제자의 보호 아래 둔다는 그분의 유언은 마치 법적 효력을 지니는 선언문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여인이여, 여기 당신의 아들을 보소서! 아들이여, 여기 당신의 어머니를 보라!”
그런데 ‘로마 카톨릭’ 학자인 ‘레이몬드 브라운’ 박사는 이 유언을 해석함에 있어, “당신의 어머니를 보라”는 대목에 방점(傍點)을 두고 있습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제자를 어머니의 보호 아래 둔다는 말입니다. 그의 해석이 갖는 신학적 의미는 ‘요한’을 비롯한 사도 전체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보호와 권위 아래 둔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라면 결국 교회가 ‘마리아’의 권위 아래 놓이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로마 카톨릭’의 전통적인 해석이기도 합니다. ‘브라운’ 박사는 이 두 구절을 “가나의 혼인”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첫 사역을 시작하실 때, 그녀가 어떤 역할을 맡는 것을 거절당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지금 이 수난 장면에서 보듯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부여받고 있지 않은가. 사랑하는 제자(즉 모든 기독교인들)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그녀는 산고(産苦) 끝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새롭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시온의 여인’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참고. 요 16:21; 사 49:22; 54:1; 66:7-11). ‘브라운’ 박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세기>의 ‘하와’를 ‘마리아’의 원형(原型)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참고. 창 2-4장). <창세기>에서 말하는 “여인의 후손”은 결국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와 같은 해석은 기독교의 오랜 관행이기도 합니다. ‘하와’가 첫 아들 ‘가인’을 낳고, “내가 야훼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환호하는 모습은 결국 ‘마리아’를 예견(豫見)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 그러하듯, ‘브라운’ 역시 예수께서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의탁하는 이 대목을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절정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구절은 그의 주장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28절상).
물론 모든 ‘카톨릭’ 신학자들이 이 같은 입장에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다우에르’(Dauer)는 이 장면이 사도들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어떤 새로운 권리나 임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리아’에 대한 장성한 아들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듯이, 이 같은 해석이 훨씬 더 타당해 보입니다. 이 장면을 ‘브라운’ 박사가 주장하듯이, 무슨 상징으로 받아들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죽음(28-30절). 돌아가시기 직전의 예수님에게 마실 것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각 <복음서>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두 번에 걸쳐 비슷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이전에 누군가가 그분에게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않았다는 기록은 실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참고. 막 15:23). 아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동안 고통을 완화시켜주기 위해서 여인들이 그렇게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처형 전에 여인들에 의해서 고통을 완화시켜주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은 군인들이 그분을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23:36). 이 경우 신 포도주란 군인들이 가지고 있던 값싼 포도주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 유기(遺棄)의 절규를 외치신 직후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막 15:34-36). 이 장면이 주는 인상은 아마도 구경꾼들이 예수님의 절규를 그분이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가 정말 예수님을 구하러 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예수님에게 마실 것을 주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정확한 배경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어렵습니다만, ‘요한’ 화자의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28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28-30절)
첫째, 이 일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둘째, 로마 병정 중 누군가가 예수님에게 포도주를 주었으며, 포도주의 주인은 근처에 있던 호위병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감히 죄수에게 포도주를 건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자에게 더 중요한 사실은 이야기의 배경이라기보다는 그 목적이나 의도입니다. 즉 그는 이 이야기조차도 <성경>의 성취와 연결 짓고 있습니다. 단지 여기서 말하는 성취란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특정 한 부분에 대한 성취를 말합니다. 즉 “내가 목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그에게 주는” 대목이 <시편>의 한 구절을 연상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시 69:21).
사람들이 막대기 끝에 솜을 달아 포도주를 적셔 주었을 텐데,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병사들이 그들의 잔(盞)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포도주를 마신 후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televw, 텔레오)는 마지막 말을 남기셨습니다. 원래 이 단어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유언을 수행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따라서 어떤 책무나 또는 종교적인 행위를 완수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이 마지막 말씀은 그의 고난과 죽음을 예수님의 사역의 절정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며, 그분의 절대적인 순종의 행위는 모든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합니다.
이 일 후에 예수님은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을 의탁하심”으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요한’의 이와 같은 기록은 <공관복음>의 유사한 기록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막 15:37; 눅 23:46);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마 27:50). 그러나 ‘요한’이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 “(영혼이) 떠나가다”(paradivdwmi, 파라디도미)는 <공관복음>의 표현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 단어는 “전하다”, “전수하다” 등의 의미인데, 이는 이전에 그분께서 자신의 죽음과 관련해서 말씀하신 바를 연상시켜주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10:18). 다시 말하자면 그분의 죽음은 자발적이며 의도적인 것이지 어떤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암시입니다.
옆구리를 찔리심(31-37절). 앞서 소개한 바처럼 십자가형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는 곧바로 끌어내리지 않고 그대로 몇 날이고 십자가 위에 두어 독수리 떼들이 와서 파먹도록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빌라도’에게 와서 시체들의 다리를 꺾어 죽음을 재확인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빨리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요한’ 화자도 밝히고 있듯이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31절)
이들은 아마도 <신명기>의 규례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합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2-23).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요구는 이해할 만하기는 합니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로마’의 관습은 사형수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으며, 독수리 떼가 시체를 완전히 다 먹어치울 때까지 때로 며칠 씩 걸리기도 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결국 죽음을 앞당기기 위하여 쇠뭉치로 다리를 쳐서 분지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화자는 이날이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14절에 따르면 이날은 “유월절 준비일”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일몰(日沒)로 보는 ‘유대’의 관습에 의하면, 이제 막 유월절이 시작되려는 시점입니다. 이같이 중요한 날이라면 율법의 규례를 더더욱 심각하게 지켜야 할 것이었습니다.
병정들이 이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의 좌우에 달려있는 두 사람을 상대로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분이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고서는 다리를 꺾는 대신에 그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릅니다. 이 때 물과 피가 솟구쳐 나왔다고 합니다.
32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32-34절)
그런데 여기서 병정들의 행동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죽은 것을 확인했으면 그냥 두면 될 일이지, 창으로 옆구리는 왜 찔렀는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많은 논의가 있어왔습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차후 다루기로 하겠습니다(참고. 35절에 대한 해석).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35절)
‘요한’ 화자는 자기가 방금 전한 내용, 즉 군인들이 보여주는 이상한 행동(한 일과 하지 않았던 일)이 실로 중요한 것임을 담담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35절에서 이 사건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인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대명사 “그”가 바로 그 증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진실을 강조하였으니, 이제 그 사건의 신학적 암시 내지는 의미를 설명할 차례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36절)
화자가 그동안 일관되게 강조해왔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즉 예언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 질문과 관련해서 <구약>의 세 구절을 인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출 12:46)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민 9:12)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 34:20)
위 세 구절들이 병정들이 왜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았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화자 자신은 물론 초대 교회는 이들 구절을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豫表)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유월절의 의미를 성취시켰을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출애굽의 종말론적 소망을 이루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또한 하나님의 보호 아래 고난 받는 의인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인식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병정들이 예수님의 다를 꺾는 대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것과 관련해서도 예언의 성취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37절)
화자는 이점과 관련해서 <스가랴>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합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스가랴>의 예언은 비단 ‘요한’만 인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중요한 증거로 채택했던 것 같은데, <마태복음>이나 <계시록>에서도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참고. 마 24:30; 계 1:7). 여기서 “찔린 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후회와 애통 가운데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은총과 성령을 부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마태복음>이나 <계시록>에서도 그 “찔린 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애곡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인자가 다시 올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하지만 이들의 애곡이 뉘우침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그 때를 단순히 종말의 때로만 국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인자가 들리는 것을 보리라”는 언급은 그 핵심 강조점이 “구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화자가 <스가랴>를 인용하면서 이를 두 번째 출애굽을 성취시켜 줄 “하나님의 어린 양”(또는 고난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실 의인)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도 그 강조점이 <마태복음>이나 <계시록>에서처럼 종말의 “최후의 심판”에 있다기보다는 “현재의 구원”에 방점이 실려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에 관한 경고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닌 것이, 그를 보고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화자가 이미 선언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무리 속에 ‘유대’인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화자는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세운 음모의 희생양이 될 것이었습니다.
장사(38-42절). 네 <복음서> 모두 ‘아리마대 요셉’에 관한 언급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은 ‘아리마대 요셉’과 관련하여 <요한복음>보다는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가 공회원이며(막 15:43),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고 있었던 자라는 정보입니다(막 15:43; 눅 23:51). 그리고 그는 부유한 자였으며(마 27:57), 공회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공회의 결정에 반대 의사를 표하기도 했습니다(눅 23:50-51). 더 나아가 ‘마태’는 그를 예수님의 제자로 그리고 있습니다(마 27:51). 그런데 유독 <요한복음>만이 그를 ‘유대’인을 두려워하는 자로 그리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38절)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그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12:42-43의 본문에 근거해서 평가하자면, 그는 아주 겁쟁이로서, 사람들의 영광을 더 좋아하는 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정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즉 그가 ‘빌라도’ 앞에 서서 범죄자의 시체를 요구하고 있는 담대한 모습이 그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일견 미미한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은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유대’인들의 난처한 입장을 솔선하여 해결하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즉 시체를 십자가에 그대로 버려둔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되고, 그렇다고 내려달라고 요구한다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사형수를 그들의 가족 묘지에 장사하기 위한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취할 수 있는 차선의 선택은 예수님을 도시 밖의 공동묘지에 묻는 것입니다. 이 같은 난처한 상황에서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고 있으니, 실로 용기 있는 행동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간과(看過)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모친이나 그 가족들조차도 그의 시체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요셉’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할 인물은 ‘니고데모’입니다. 오직 ‘요한’ 화자만이 그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가 ‘유대’의 전통적인 장례 관습에 따라 예수님의 장례를 치러 주는 예의와 정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그보다 장례식을 위하여 그가 준비한 엄청난 양의 몰약과 침향입니다.
39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 쯤 가지고 온지라. 40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39-40절)
우리는 두 사람 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 두 사람이 공개적으로, 그리고 담대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물론 ‘유대’인의 장례법에 따라 장례 의식을 행하고 있는 이들 두 사람의 정성 또한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절차가 끝난 후, 두 사람은 ‘골고다’ 언덕 근처 동산에 예수님을 묻습니다. ‘요한’ 만이 ‘골고다’ 근처에 동산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1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41-42절)
추측컨대, 이 장소는 바로 예수님이 묻히신 곳이며, 또한 부활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그분께서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곳에 묻히셨다는 기록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첫째, ‘유대’인 중 아무도 그가 일반인들의 묘지에 묻히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둘째, 이 경우 역시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이루어진 일로서, 예수님은 결코 보통 사람의 죽음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신학적 의도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체 포
그 운명의 유월절 전날 밤. ‘니산’ 월(오늘날의 3-4월) 14일 자정이 되었을까 말까 한 시점. 갑자기 동산(東山)의 적막(寂寞)이 깨지고, 캄캄하던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소리들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몽둥이와 창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 등등. 그리고 이 사람들이 들고 오는 등(燈)과 횃불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다 배경음악을 삽입한다면 어떤 곡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베토벤’의 제 9번 교향곡, 특히 그 시작 부분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마침내 운명의 시간이 닥쳐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평소에 그렇게 자주 암시하셨던 바로 “그 때”가 지금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란 이제 보니 모든 것이 끝나는 때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무기력하게 사로잡혀 갈 것이고, 제자들은 곧 뿔뿔이 흩어질 것이었습니다. 반면 관저(官邸)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대제사장 ‘가야바’는 조만간 예수님의 체포 소식을 듣게 될 것이고, 그리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됐어!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어.” ‘빌라도’ 역시 차출나간 병사로부터 “상황 종료” 보고를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 체포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성공리에 끝났습니다. 어떠한 인적 물적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끝!”입니다.
세인(世人)들의 훗날 평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던 한 이방인 ‘셀수스’(Celsus)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어느 유대인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주 악의에 찬 사실의 왜곡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를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듣기로 그는 자신이 선언한 그 어떤 것도 이루어놓지도 못했으며, 우리가 그를 기소하여 처형하려 했을 때에는 자신을 숨겨 도망하려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가 자신의 제자로 부르는 사람들의 배신으로 체포됐다는 사실이 정말 창피한 일이 아닌가! 그가 진정 하나님이었다면 도망하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붙잡히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공유했던 제자들, 그를 구세주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요 사자로 떠받들던 그 제자들이 어떻게 그를 곤경에 내버려두고 달아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요한’ 교회의 설교자는 왜 이따위 이야기를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했을까? 자신의 양들에게 무엇을 들려주기를 원했던 것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지금 이 교회는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 것일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다리며 굶주림에 지쳐있던 ‘갈릴리’ 해변 가의 무리들과 같은 처지였을까? 아니면 한 밤중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 만난 배 안에서 살려달라고 고함치던 제자들처럼 시련과 환난을 통과하고 있던 중이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요한’ 화자가 이날 설교 본문으로 이 에피소드를 끄집어 낸 것은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교인들에게 희망보다는 오히려 절망을 선사했을 것이 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교자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가야바’나 ‘빌라도’가 확신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말을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즉 그날 “동산의 작전”은 어둠의 세력들이 주도한 연합작전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기획하고, 감독하고, 주도하고, 통제한 작품이었다는 점을 말입니다. 과연 그는 문학적 거장(巨匠)다운 솜씨로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그날 동산의 사건을 재조명해주고 있습니다.
어둠의 삼위일체. 먼저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체포 조의 모습을 눈 여겨 보기로 하지요. 익살스럽기도 하고 바보스럽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체포하기 위해 등과 횃불과, 창과 칼과 몽둥이를 들고 다가오고 있는 이들 모습이 그렇다는 말입니다(3절). 등과 횃불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어둡다는 말입니다. 어두워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빛”(1:4; 8:12; 9:5)이신 예수님을 찾으러 오면서 또 다른 빛이 왜 필요했던 것일까요? ‘요한’ 화자 자신이 <복음서> 벽두에서 선언했던 바와 같이, “빛이 어둠에 비취고 있음에도 어둠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참고. 1:5). 설교자는 지금 이들 모두가 어둠 가운데서 헤매고 있음을 해학(諧謔)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지(無智)한 자는 이방인들 즉 로마 병사들만이 아닙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도 그 속에 섞여 있습니다. 대 제사장 ‘가야바’나 그가 보낸 성전 치안 요원들이 그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동료 ‘유대’인들을 향해 같은 말로 고발한 적이 있습니다(참고. 롬 2:17-29). 그 ‘유대’인 속에 ‘가롯 유다’도 있습니다. 적어도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유다’는 무리 속에 섞여 단순한 밀고자(密告者)의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자는 그에 관하여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 사람들을 데리고”(3절). 즉 ‘유다’가 이들 체포요원들을 “취하여”(lambavnw), 데리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에 따르면, 이날 ‘유다’는 군대 지휘관 내지는 체포 조의 인솔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로 <마가복음>에 따르면, ‘유다’가 로마 군대와 성전 치안요원들과 함께 그 동산에 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유다’가 체포 조를 따라 온 것이 아니라, 로마 군대와 성전 치안 요원들을 직접 취하여 동산으로 이끌고 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일이 과연 가능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며, 현실적으로도 가능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그리고 ‘요한’ 화자 또한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자의 의도는 오히려 다른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지금 사실(史實)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탈(脫) 역사화 하고 일반화 하는 방식으로 빛과 어둠의 긴장과 대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요한’ 화자가 복음서 벽두에서부터 보여 온 이원론(二元論)적 세계관에 따르면, ‘유다’는 여전히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대적하는 어둠의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배교(背敎)한 제자로서, 로마 군대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어둠의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세상의 빛에 대항하고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들 세력은 상징적으로 “악의 삼위일체” 행세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시편>의 노래가 이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1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시 2:1-3)
그렇습니다. 로마와,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의 제자는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그분은 이들의 연합 전선을 어떻게 대하셨을까? 그 옛날 ‘바벨’탑을 쌓던 무리들을 대했던 방식 그대로입니다. 조롱과 무시입니다. 시인은 이들의 역적모의에 대해서 이렇게 조롱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시 2:4-5).
이들은 등과 횃불만 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붙잡기 위해 창과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습니다. ‘요한’은 이 모습 또한 우스꽝스럽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창과 칼과 몽둥이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이 무기들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마 한 바탕 전쟁을 치를 것으로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왜 전쟁을 할까?” 이 질문에 대해서 ‘도널드 케이건’(D. Kagan)은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케이건’ 교수는 전쟁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동기로 두려움과, 이익 추구, 그리고 명예 추구를 들고 있습니다(참고. 도널드 케이건, <전쟁과 인간>, 세종 연구원: 1997, 서울.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내심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서 두려워 떨고 있다는 말입니다.
죄인이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잡으려 무기를 들고 온 자들이 떨고 있습니다! 혼자서 잡으러 온 것도 아니고 떼를 지어 몰려온 자들이 말입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현상범을 보자 말자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들을 이렇게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6절하). 이들은 지금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단순히 뒤로 물러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땅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예수께서 나아가. 그렇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그다”(ejgw eijmi)라고 선포해 버린 것입니다(5절). 이 선언은 <요한복음>의 주제 선언이자,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드러내셨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나는 야훼 이니라”(출 3:14). ‘유다’나 성전 치안 요원들이 이 선언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로마 병사들조차 벌벌 떨었겠습니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현현(顯現) 앞에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단 10:9)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9:4)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계 1:17)
그러니까 적어도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수난”은 “그리스도에 의한 수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받는 수난은 어둠의 세력이 계획하고 주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자신에게 수난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그분께서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통제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둠의 세력이 오기 전에 이미 “동산으로 나가 계셨고”(1절), 자신을 잡으러 오는 무리를 향해서 먼저 주도적으로 나아가서 “누구를 찾느냐고?”고 묻습니다(4절). 이 장면에서 그 유명한 ‘유다’의 “배반의 입맞춤” 따위는 사족(蛇足)일 뿐입니다. ‘요한’은 그 대목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있습니다. ‘유다’ 따위가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에 무슨 역할을 했겠느냐는 암시이겠지요. 같은 맥락에서 무리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을 찾고 있소”라고 답하지 않고 ‘나사렛 예수’를 찾고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키스를 통해서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했던 것이 아니라는 암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먼저 “내가 그니라”라고 말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분을 알아보았을 뿐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권위와 주도적인 행위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들을 가게 하라. 감히 고개도 못 들고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무리를 향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7절). 제자들은 그냥 가도록 내버려두라는 말씀입니다. 목자(牧者)로서 양들에 대한 관심과 염려를 보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참고. 10:11). 하지만 이 장면 또한 예사롭지 않습니다. 화자는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여전히 상황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주님은 무리들에게 사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화자는 이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한 행동이라는 설명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통제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과 행동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0-11절).
화자는 ‘말고’의 귀를 벤 자가 ‘베드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만, 그에게 이 사실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그의 충성스러운(?) 행동은 가증스러운 “유다의 키스”만큼이나 의미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를 이루는 일에 있어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점잖은 꾸짖음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 하겠느냐”는 말씀에서 다시 한 번 <수난 이야기>의 진정한 저자(著者)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시인은 자신이 겪고 있는 수난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시 27:2);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 34:4);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시 56:9)
이 확신의 노래는 실은 공동체의 확신이기도 합니다. 회중은 예배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를 위한 교훈도 분명해 보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간섭이 아니라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라면, 오늘 나를 지배하고 주도하려하는 어둠의 세력 앞에서 내가 보일 수 있는 모습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지를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2. 법치 국가 유대
<성경>의 네 복음서는 동일한 “복음”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을 전하는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집니다. <공관복음>에 있는 내용이 <요한복음>에는 없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음에도 내용이 서로 다르기도 합니다. 이 같은 이유로 해서 혹자는 <성경>의 오류(誤謬)를 주장하기도 하고, 신뢰하기 어렵다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글쎄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훌륭한 과학자나 수학자일 수는 있겠습니다만, 인문학적 소양은 다소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 복음서의 다양성은 오히려 복음을 네 방면에서 입체적으로 전해주고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그 복음을 더욱 생생하게 맛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발견하는 능력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난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요한’ 화자는 <공관복음>과는 다른 각도에서 그분의 수난(受難)을 바라보고 있으며, 더 나아가 <공관복음>에서 말하지 않는 내용까지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그는 예수님의 “체포”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전하면서, 그 유명한 ‘겟세마네’ 동산을 단순히 “동산”으로만 처리하고 있으며, ‘가롯 유다’의 가증스러운 “배반의 키스”도 아예 생략하고 있는가 하면, 등장인물들의 역할마저 완전히 뒤집어놓고 있습니다. 즉 주도적이고, 위압적인 쪽은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수배자들이 아니라, 피 수배자인 예수님입니다. 수배자들이 오히려 두려워 떨고 있으며, 예수님은 이들에게 기세당당하게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요한’ 화자의 문학적 대가다운 면모를 느끼게 하는 해설입니다. 우리는 ‘요한’ 화자가 이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아무튼 그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이제 장소는 ‘안나스’의 저택입니다. 체포 조들이 예수님을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갔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도 <요한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공관복음>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야바’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6:57-58; 막 14:53-54; 눅 22:54). 그런데 우리의 ‘요한’ 화자는 왜 ‘안나스’를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그 대답을 찾는 일은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수사와 기소. 피의자를 체포했으면 다음은 조사와 심문(審問)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검사(檢事)가 이 일을 담당하는데, 검사는 이를 통해서 죄목과 형량을 정하고, 피의자를 재판에 회부합니다. 이 같은 과정을 일컬어 수사(搜査)와 기소(起訴)라고 하지요. 최근 세월호 법 제정과 관련해서 언론에서 많이 회자(膾炙)되고 있는 용어들입니다.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법으로 수사(搜査)와 기소(起訴)는 검찰 즉 국가가 독점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수사와 기소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고, 예를 들어 피해자가 수사와 기소를 맡게 되면, 감정과 주관에 치우쳐 종국에는 또 다른 피해자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소위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도 필요 이상의 복수를 못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로 볼 수 있습니다. “동태복수법”의 정신은 “피해 받은 만큼만 보상해주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검찰의 역할이나 자세가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체포에서 기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나 절차가 합법적이고 정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의 경우 검찰에 대한 신뢰가 말이 아닙니다. 제주도 지검장 김 수창 씨처럼 인격적 파탄에 이른 검사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편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검사나 판사들, 그리고 절차를 무시하고 강압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수사를 하여 기소 단계에서 법원으로부터 기각(棄却)당하기도 합니다. 실제 우리나라의 경우 이 기각율이 30% 이상에 이른다고 하니 검사의 수사가 얼마나 엉터리로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에도 피의자의 인권을 위해서 네 가지 방어권(防禦權)을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즉 수사기관이 신문(訊問)을 시작하기 전에 피의자에게 진술을 거부할 수 있고, 진술을 거부하더라도 불이익을 받지 않으며, 진술 거부권을 포기하고 한 진술은 법정에서 유죄 증거로 사용될 수 있으며, 신문 과정에서 변호인 조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최근 법원은 북한에서 직파(直派)한 간첩 홍모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는데, 이는 검찰이 홍씨를 수사하면서 이 네 가지 항목 중에서 두 가지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간첩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수사 절차를 무시했기 때문에 그는 무죄 방면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참으로 좋은(?) 나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법제도.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어떠했을까? 제대로 된 사법제도를 지니고 있었을까? 현재까지 상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어 속속들이 알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들은 오늘날 서구의 민주국가들보다 나았으면 낳았지 결코 뒤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인식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유대’ 사회를 지탱해주었을 사법체계는 <모세 오경>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 그들은 “모세의 법” 외에도 <탈무드>를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탈무드>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미쉬나>와 <게마라>입니다. <미쉬나>가 일련의 기본법들을 다루고 있다면 <게마라>는 그에 대한 해설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탈무드>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바벨론 탈무드>와 <예루살렘 탈무드>로서, 이 중 <예루살렘 탈무드>가 더 오래된 것으로 주후 4 세기경에 기록되었으며, 한편 <바벨론 탈무드>는 5 세기경에 기록되었고, 그 분량이 네 배 정도 더 많다고 합니다. <바벨론 탈무드>의 영어 번역본의 경우 400여 권에 이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가 어떤 <탈무드>를 사용하고 있었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이 역시 <오경>과 함께 ‘유대’인들의 법 정신에 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며, 당연히 그들의 사법체계도 아주 정교하고 체계적이었을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예컨대, 사형(死刑)과 관련해서도 아주 복잡하고 세부적인 규정들을 마련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한 정보는 ‘보이스’(J. M. Boice)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참고 도서 8, 1386-1388쪽.
첫째, 재판은 반드시 ‘산헤드린’으로 불리는 ‘유대’ 공회(公會)의 법정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칠십 한 명으로 이루어진 공회는 ‘예루살렘’에서 개최해야 합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공회의 구성원이나 권위에 관해서는 <민수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칠십 인의 장로회를 조직하여 이를 통해서 종교를 비롯한 국가의 제 문제들을 치리하도록 지시하고 있습니다(참고. 민 11:16-17).
공회(公會)는 구성원의 신분에 따라 세 개의 조직(분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사장이 23명, 서기관이 23명, 그리고 장로가 23명으로 도합 69명이며, 여기에 의장 2명을 더하면 전체 71명이 됩니다. 이들 세 개의 분과는 분야별로 다른 일상의 문제들을 다루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회가 이들 세 부류의 신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예수님께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둘째, 이처럼 사형에 대한 판결은 공회원들만의 유일한 권위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 구성원의 자격도 까다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정통 ‘히브리’인으로서 부모 모두 ‘유대’인이라야 합니다. 그들은 법률 지식에 정통해야 하며, 이 분야에 상당한 실무적 경험도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언어에도 능통해야 하는데, 혹시 ‘히브리’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피의자를 다룰 경우를 대비해서입니다. 법정에서 통역관을 두지 않는 것이 공회의 규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하여 공회원은 인격적으로도 결격 사유가 없어야 하며, 피의자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재판에는 반드시 증인이 참석해야 합니다. 증인의 자격이나 역할이야말로 ‘유대’식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로마’식 재판 제도나 오늘날 서구식 제도와 가장 뚜렷하게 구별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재판에서 증인이 하는 일이라고는 그가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만 증언하는 것이 고작이며, 법정은 판결에 도움이 된다면 증인의 수에 제한이 없이 요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재판은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 법에서는 증인의 증언은 피의자가 받고 있는 혐의 사실 전반에 관한 것입니다. 혐의 내용에 대해서 육하원칙에 입각해서 증언을 해야 하며, 그러므로 사형 선고의 경우 증인들의 증언은 모두 일치해야 합니다. 그리고 증언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의 일치된 증언이 필요했습니다(참고. 민 35:30; 신 17:6-7; 19:15).
증인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증인은 단순히 증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고발자의 편에 서서 피의자가 받고 있는 혐의를 고발하고 정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 법정에서는 오늘날처럼 검사나 변호사가 없었기 때문에, 범죄를 처음 목격한 사람이 범인을 고발하여 체포하도록 하고, 법정에서 죄목에 대해서 증언을 해야 했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증인 제도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 한 점은 소위 “사전 경고”에 관한 장치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증인은 누군가 범죄를 저지려 할 때 그 결과에 관하여 사전에 충분히 알려주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세 가지 정도의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선 누군가 성급하게 또는 잘 모르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가능한 한 억제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고, 또 나중에 법정에서 피의자의 범죄 동기를 확정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과, 그리고 재판관으로 하여금 적절한 형량을 지우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입니다. 이 같은 장치는 오늘날 제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사형 선고 방식에 대해서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재판은 반드시 낮 동안에 이루어져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재판관들은 판결을 내릴 때 항상 피의자의 입장에서 될 수 있으면 그를 무죄방면 하려는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또한 판결의 기준은 단순 다수결이 아닌 과반수(즉 37/71)이지만, 만장일치는 무효로 처리됩니다. 그리고 최종 판결은 재판 당일에 내려지는 것이 아니고, 재판이 끝난 후 모든 재판관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 하루 정도 더 생각한 후에 다시 소집하여 공회원들의 재투표를 거쳐 최종 판결이 확정됩니다. 이 두 번째 재판이 진행되는 날에서는 회원들 중 아무도 먹거나 마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가 간략하게나마 예수님 당시 ‘유대’ 재판 제도에 살펴본 바입니다. <탈무드>의 사상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안나스의 법정. 이제 ‘안나스’의 법정으로 우리 눈을 돌려봅시다. 지금 예수님은 공회(公會)가 아니라 ‘안나스’ 앞에 서있습니다. 수사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요한’ 화자는 과연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물어보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안나스’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당대에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을까? 하지만 우리의 화자는 감질나게도 단 한 줄로 그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그가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라”고 말입니다(13절). 하지만 우리는 화자가 무엇을 강조하려는지 알고 있습니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에게 먼저 데려왔을까? 그 악명 높은 ‘안나스’에게! 화자는 우리에게 이 질문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클레이’(W. Barclay)는 ‘안나스’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상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참고도서 5, 225-226.
당시 ‘유대’ 사회에서 그는 가장 성공한 인물이었고, 그만큼 잘 알려진 인물도 없었으며, 그만큼 사람들이 증오했던 인물도 없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실권자였습니다. 주후 6-15년 사이에 대제사장을 지냈으며, 그의 네 아들이 차례로 그의 뒤를 이어 계승하였고,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는 그의 사위였습니다.
‘유대’ 국가가 한 때 독립국 시절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때에는 대제사장 직이 종신(終身)이었습니다만, 로마 속국이 된 이후부터 이 자리는 부패와 비리의 상징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지역 로마 총독에게 가장 충성스럽고, 가장 아첨을 잘하며, 가장 높은 금액을 제시하는 자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임명된 대제사장은 로마의 충성스러운 협력자로서, 로마의 안위와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했습니다. 투자금을 날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도 결국 이 같은 현실주의적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안나스’는 자신이 지닌 막대한 재력(財力)으로 이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그의 네 아들도 모두 그랬습니다. 이 모든 배후에 ‘안나스’가 있었습니다. 그가 돈을 긁어모으는 방법 또한 야비하고 저질스러웠습니다. 성전 내 “이방인의 뜰”에서 환전상 노릇을 하다 예수님에게 쫓겨난 무리들은 실은 단순한 환전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착취자였습니다. 알다시피 희생제물은 흠이 없고 완벽해야 합니다. 이를 검사하는 요원들이 있었는데, 일단 성전 내에 들어온 희생 제물들에 대해서는 이들의 검사를 거친 것들이므로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제사를 드리러 오는 예배자들은 성전 밖에서 검증을 받지 않은 짐승들을 사기보다는 성전 안에서 검사가 끝난 제물들을 사는 것을 더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가격 차이입니다. 예컨대, 비둘기 한 쌍의 경우 성전 안과 밖의 가격 차이가 무려 18배가 됩니다. 성전 안에서 환전상들이 이처럼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거래 뒤에 ‘안나스’가 있습니다. 이런 음성적인 거래를 통해서 그는 부를 축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당시 사람들이 환전이 이루어지던 그 성전을 “안나스의 백화점”이라 불렀겠습니까! 그의 악행은 <탈무드>가 기록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화 있을 진저 ‘안나스’여, 화 있을 진저 그의 독사 같은 입이여!”
‘안나스’의 아들과 사위는 모두 한 통속이 되어 이처럼 비열한 종교 사업을 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 치안요원들은 모두 그의 개인 비서 내지는 하인들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람 앞에 지금 예수님이 끌려와 있는 것입니다! 왜 그가 이런 지시를 내렸을까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2:13-16).
그의 사업이 지금 위험에 빠졌습니다. 그의 이권(利權)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안나스’가 예수님을 데리고 오라고 지시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공정한 재판은 고사하고, 과연 그는 무슨 배짱으로,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을 불러낸 것일까? 안타까울 뿐입니다! ‘안나스’는 자신의 과오를 알고 있을까요? 모르기 때문에 ‘요한’ 화자가 그를 지금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그 앞에 서 계신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신문이 시작될 참입니다. 누가 누구를 신문하고 있는지 두고 볼 일입니다.
3. 신문(1): 여종의 법정(法廷)
‘베드로’는 왜 이 시각에, 이곳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는 것일까?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그분의 제자들이 모두 그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6:56; 막 14:50). 하지만 <요한>은 그들이 도망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제자들은 그냥 가도록 두라고 명령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18:8). 어찌 되었건 ‘베드로’는 공연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화(禍)를 자초(自招)하겠다는 듯이 말입니다. 한 “문지기 여종”으로부터 받지 않아도 될 신문을 받게 될 것이며(18:17), 그리고 더 중요하게도 듣지 않아도 될 변절자의 오명(汚名)을 그날 이후 오늘날까지 듣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그는 잘못된 시각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사람들 틈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점 그의 주님이 지금 처한 상황과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피의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안나스’ 앞에, 그리고 그의 제자는 여종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라는 요구 앞에 서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점이 교회 즉 제자의 숙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어느 신부가 신랑이 받고 있는 혐의에 대하여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어는 제자가 그 선생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과 ‘베드로’의 처지가 일치하는 지점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부터 대조와 차이가 더 뚜렷하게 드러나게 될 참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이 상황을 맞이하고 있지만, ‘베드로’는 혼자가 아닙니다.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곁에 있습니다. 무엇이 그리 추운지 불을 쬐고 있습니다. 행여 두려워 떨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의 선생님은 지금 혼자 당당하게 두려움에 맞서 이 어둠을 꾸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입니다. ‘베드로’는 신문이 시작되자 말자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자신에 대한 혐의(嫌疑)를 완강하게 부인합니다. 신문하던 자가 당대를 호령하던 ‘안나스’가 아니라, 하찮은 여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신문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요한’ 화자의 서술 순서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안나스’의 신문은 뒤이어 등장하고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사실 여기 “‘베드로’ 에피소드”는 정상적인 이야기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 화자는 지금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이 단락을 의도적으로 삽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마치 두 개의 재판을 동시에 번갈아가며 보여주고 싶다는 듯이 말이지요. 지금 ‘안나스’의 집 안과 바깥뜰에서 두 개의 재판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과연 ‘요한’ 화자는 ‘베드로’를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베드로의 실패. 단순히 ‘베드로’의 실패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혹자는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즉 초대 교회 당시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알려져 있던 ‘베드로’의 지위나 위상(位相)을 깎아 내리기 위한 의도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신학자 ‘한센’(Haenchen)은 ‘베드로’의 실패를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된 대표적 사례로 꼽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 13:7).
예수님조차도 ‘스가랴’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베드로’의 실패를 진작부터 예고하지 않았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막 14:27). 따라서 ‘베드로’의 실패는 어쩌면 필연적이었고, 그로서도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지요. ‘가롯 유다’의 실패처럼 말입니다. 누가 주의 뜻을 거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베드로’를 어찌 ‘가롯 유다’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베드로’ 사도는 ‘아리마데 요셉’도 아니고 ‘니고데모’도 아닙니다. 매사에 신중하고 고상해서 사람들의 눈치나 살피면서 얌전하게 신앙생활 하는 교인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초청은 받았으나 그가 가진 돈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근심하며 되돌아간 어느 돈 많은 부자 청년도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가 알기로 그는 사도 중의 사도입니다. 어느 누구보다 용감하고 충성스러웠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주님 앞에서 이렇게 맹세까지 했던 열렬 제자입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이랬던 그가 지금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부정(否定)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아닙니다. 그분이 ‘메시야’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나는 아닙니다!”입니다. 그의 절규(絶叫)를 좀 다르게 표현해 볼까요? “나는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다릅니다. 나는 그런 교회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혹시 내가 만나는 교인들 중에 자기 교회를 험담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습니까? 교회와 교인들의 비리(非理)를 술자리 안주처럼 대화의 주제로 즐겨 사용하는 교인을 본 적은 없습니까? 대개 교회의 지도자급 중에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입니다. 내가 ‘아담’과 아무 상관도 없다고 주장할 수 없듯이, 교회를 향하는 세상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대하여 내가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결속성”(結束性)이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간’이 범죄 했을 때,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수 7:11). 사도 ‘바울’은 한 사람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온 인류가 함께 죄를 지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참고. 롬 5:12-19). 그렇다면 당시 ‘베드로’의 실패는 실은 나의 실패가 되는 것입니다. 즉 그가 “나는 아닙니다”라고 말할 때, 나 역시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나는 그의 제자가 아니에요!”라고 말해버린 것입니다.
베드로를 변호하며. 도대체 어쩌다가 우리의 기둥 ‘베드로’가 이처럼 엄청난 실패를 자초했던 것일까? 그가 이처럼 맥없이 쓰러질 수 있다면 과연 누가 세상 앞에서 담대하고 떳떳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로마 교황청이 수시로 시성(諡聖)을 내려주는 성인(聖人)이나 복자(福者)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신앙인으로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교회 특히 개신교회에 대한 이 시대의 평가가 최악의 수준에 이른 오늘날에, 과연 누가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하며 자랑하고 다닐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나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그가 행동했던 것처럼 하지 않으면 최소한 배신자 내지 실패자의 낙인은 받지 않고도 신앙생활은 그럭저럭 해 갈 수는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실패했던 것일까? ‘바클레이’(W. Barclay)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다른 제자들처럼 제 살길을 찾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뒤따라 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실패한 것은 비겁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용감했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선생님의 뒤를 끝까지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왜 제 갈 길을 가지 않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왔던 것일까? 왜 그토록 큰 위험을 무릅쓰고 ‘안나스’의 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왔던 것일까?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찾은 것과 같은 이유가 아닐까? 이 여인은 왜 예수님이 떠나고 안 계신 그 빈 무덤 주변을 서성거렸던 것일까요? 사랑하는 주님의 시체라도 찾아서 제대로 장사(葬事)를 지내주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렇습니다! 선생님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 여인이 무덤 주위를 서성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도 같은 동기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선생님을 향한 사랑이 그로 하여금 그분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하게 했던 것이겠지요. 이 같은 사랑이 그를 실패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말합니다(요일 4:18). ‘막달라 마리아’도 ‘베드로’도 그들의 선생님을 너무나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패의 두려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배반당할 위험도 없습니다. 실패할 위험도 없습니다. 사랑의 깊이가 깊을수록 배신의 쓰라림은 더욱 클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은 배신자를 희생적으로 사랑하고 끝까지 믿었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만이 배신의 쓰라림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예수님 체포 당시에 칼을 빼들고 선생님을 보호하려 했던 자는 ‘베드로’ 뿐이었습니다.
혹자는 ‘베드로’를 가리켜 인간적인 자신감이 지나쳤다든지(참고. 막 14:31), 영적인 일을 육적으로 해결하려했다든지, 그러므로 칼이 아니라 기도로 위기를 해결했어야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참고로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고 졸다가 주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영역과 육적인 영역이 일도양단(一刀兩斷) 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중 과연 몇이나 그 같은 고도(高度)의 영적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더군다나 당시 체포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사람이라면 과연 누가 ‘베드로’의 용기를 만용(蠻勇)이라 할 수 있겠으며, 그의 사랑을 광적이라거나 편집적인 집착으로 매도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사랑했기 때문에 실패했고, 용맹스러웠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이 같은 실패를 부끄러워해야 할까? 다시는 내가 그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리라고 맹세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지금 모닥불 앞에서 화끈 달아오르고 있는 그의 얼굴은 불의 열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수치심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가지 말아야 할 곳에, 있지 않아야 할 시각에,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 틈에 있었던 관계로, 이처럼 부끄러운 실패를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시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나, 악인은 그렇지 못하고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노래합니다(참고. 시 1:1, 4).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마치 겨와 같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눅 22:31). 그는 지금 불의(不義)한 무리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는 중입니다.
자랑스러운 실패. 하지만 조금 후 우리는 또 다른 ‘베드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참고. 21장). 전혀 다른 종류의 모닥불 앞에 앉아있는 그를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안나스’의 하인들이 피운 불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의 선생님께서 직접 피워놓은 불입니다. 그 불로 아침을 준비해놓고 이 선생님께서 지금 그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불과 얼마 전에 ‘베드로’가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한사코 부인했던 그 선생님이 말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욥’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사탄’은 그를 영원한 실패자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실패를 자랑스러운 실패로, 영광스러운 실패로 회복시키실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의 기도를 드릴 때부터, ‘베드로’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우리는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에서 자신의 실패와 회복에 대해서 어떻게 자랑하며 증언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참고. 행 2:14-36). 실패가 없는 곳에 회복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실패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자가 실패하여 넘어져 있는 형제를 일으켜 세울 수는 없는 법입니다.
누가 ‘베드로’의 수치스런 실패를 영광과 자랑의 실패로 만들어놓았습니까? 이것이 ‘요한’ 화자가 그의 교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도전입니다! 나는 과거의 실패로 지금 쓰러져 있지 않습니까? ‘예레미야’처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 하리라” 다짐하며, 분노와 후회의 눈물을 쏟아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수치와 눈물을 누구에게 가져가야 할까요?
4. 신문(2): 제사장의 법정
이제 무대는 다시 한 바퀴 돌아 ‘안나스’의 집무실입니다. 곧 새로운 신문(訊問)이 시작될 참입니다. 직전의 무대에서 문지기 여종이 신문자(訊問者)의 역할을 맡았고 ‘베드로’가 피의자(被疑者)였다면, 이번 무대에서는 ‘안나스’와 예수님이 각각 그 역할을 맡게 될 것입니다. 무릇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범죄자나 피의자가 자발적으로 법정(法廷)에 서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만, 이 두 신문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베드로’ 또한 스스로 자청(自請)하여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오직 한 가지 위대한 동기(動機)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지금 당장 본인이 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바로 그 동기 때문에 두 사람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점만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같은 동기로 출발했으니, 선택의 결과에 대해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닐 듯합니다. 예컨대, ‘베드로’는 선택의 결과로 쓰라린 실패를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의 실패를 놓고 왈가왈부(曰可曰否)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럴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위대한 동기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이거나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을(乙)의 위치에 있다고 판단되면 억울하다며 법과 정의(正義)를 요구합니다. 세상이 공정하지 못하니 이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불평하고 항의합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자신에 대한 재판을 ‘유대’ 법정이 아닌 로마 법정에서 받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까. 그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도 세상을 향하여 정의를 요구했던 것일까요?
아무튼 이와 같은 태도에 대해서 영국의 저명한 신학자 ‘멜컴 무거릿지’(Malcolm Muggeridge)는 아주 냉소적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정의롭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사하라 사막에서 냉수 한 그릇을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동료 인간으로부터 정의를 기대하다니! 우리가 인간으로부터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비와 긍휼일 것이다. 그나마도 하나님 덕분인 것을.”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정의를 행할 능력이나 의지가 있다면 법은 과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왜 국회가 필요하며, 검찰이나 경찰은 무슨 소용일 것이며, 법정이나 감옥은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결국 정의를 외치는 사람일수록 스스로의 위선(僞善)을 드러낼 뿐이다.”
이것이 왜 위선일까? 을의 위치에서 갑(甲)의 위치로 신분이 바뀌게 되면 태도가 완전히 돌변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제까지 그토록 정의를 부르짖던 자가 타인에 대해서 예사롭게 불의를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세월 호 유가족 대책 위원회 임원들이 모 대리운전 기사를 폭행하며 보여준 태도가 가장 최근의 극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 일이 있기 직전까지만 해도 세월 호 참사에 대한 성역 없는 철저한 조사와 정의 구현을 요구하며 단식농성까지 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서는 경찰에 나가 조사받는 것조차 회피했습니다.
적어도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무거릿지’의 주장은 하등 새로울 것이 없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즉 법이 많다는 것은 세상이 그만큼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고, 법이 많은 곳에 정의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처벌과 죽음이 늘어간다는 역설 말입니다. 왜 그럴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그분만큼은 정의를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모든 엉터리 재판 따위는 집어치우란 말이야. 온통 하자(瑕疵)와 불법 투성이 뿐인 이 재판을 말이야!”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불편부당(不偏不黨)하신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신가!
안나스의 법정. 그렇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을 체포하는 과정에부터 재판과 선고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습니다. 과정과 절차와 내용 그 모두가 불법이고 위법이었습니다. 우선 체포 장면부터 다시 돌아보기로 하지요. 당시 공회(公會) 법에 따르면, 범법자는 반드시 밤이 아닌 낮에만 체포해야 합니다. 체포도 정당한 법적 절차에 따른 것이 아니라, 밀고자(密告者) 내지는 배신자의 도움을 받아 은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체포 당시 체포의 이유, 즉 혐의(嫌疑)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명백한 불법 체포입니다!
체포는 그렇다 치고 ‘안나스’의 행위는 어떠합니까? 그가 과연 신문자로서 자격을 가지고 있었느냐는 논외(論外)로 치더라도, 그가 법을 아는 자라면 그 앞에 서 있는 피의자를 무죄방면(無罪放免) 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불법을 가중(加重)시키고 있습니다. 하기야 ‘안나스’가 주님을 자신의 법정(法廷)에 불러 세운 것은 무슨 거창한 종교적이거나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누려왔던 자신의 기득권(旣得權)을 계속 지키고 싶다는 일념뿐이었기에 그가 무슨 짓을 한들 하등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그가 저지르는 불법은 무엇입니까? 그가 현직 공회(公會) 의장이 아니므로 전혀 재판관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사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합시다. 그렇다면 최소한 재판 절차 정도는 제대로 지켰어야 했습니다. 즉 이 무자격자가 지금 낮이 아닌 한 밤중에 재판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자격이 없으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재판 장소는 어떻습니까? 공회, 즉 공공 장소가 아닌 개인 법정입니다. 자신의 집에서 혼자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이겁니다(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불법은 또 있습니다. 피의자로 하여금 그가 받고 있는 혐의(嫌疑)가 무엇인지 스스로 밝히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19절). 재판관은 피의자가 아니라 증인들에게 혐의 사실을 묻고, 들어야 합니다. 당연히 피의자는 묵비권(黙秘權)을 행사할 권리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그 어떤 답변도 할 필요도 없고, 또 해서도 안 됩니다.
‘안나스’가 이 법을 몰랐을까요? 예수님이 마치 재판관을 놀리듯 오히려 되묻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21절). 피의자인 나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증인들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누가 불법을 저지르고 있으며, 누가 정의를 행하고 있습니까? 누가 누구를 신문하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장면은 실로 해학(諧謔)이자 풍자(諷刺)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제사장 ‘안나스’는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몰아가려 했던 것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은밀하게 백성들을 호도하여 배교에 빠뜨리는 것으로서, <신명기>에 따르면 이런 자는 돌로 쳐 죽입니다(신 13:1-10). ‘안나스’의 의도를 알았음인지, 예수님은 자신은 한 번도 은밀하게 가르친 적이 없고, 성전과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20절). 결국 ‘안나스’의 계획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즉 은밀하게 가르치는 자가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라면, 거짓 제사장의 특징은 은밀하게 재판하는 자라는 등식이 성립할 것인데, ‘안나스’가 이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화자의 해학과 풍자가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안나스’의 호위 무사 하나가 화가 발끈 났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을 대하는 태도가 건방지다는 것이지요: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22절).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대개 논리에 밀리거나 궁색한 자가 먼저 폭력에 의존합니다. 이 호위 무사는 증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선지자 ‘예레미야’를 매질하고 투옥시켰던 대제사장 ‘바스훌’을 연상시켜줍니다.
그를 향해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이 재판이 불의하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즉 정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 말한 것이 있으면 그 증거를 대라”는 것입니다(23절). 그 어떠한 은밀하고도 체제 전복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으니, 공개적인 법정에서 증인들의 참석 하에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보자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예수님은 지금 적법한 절차에 따른 공개 재판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회를 열어라”는 요구이자 명령입니다. 결국 ‘안나스’는 굴복하고 맙니다. 비밀 재판은 중단되었고, ‘안나스’의 법정은 결국 불법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가야바의 법정.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요구하셨던 공개 재판, 즉 공회는 과연 적법하게 진행되었을까? ‘가야바’는 과연 정의를 행했을까? 웬 일인지 ‘요한’ 화자는 이 장면을 생략하고 있습니다만(참고. 28절), <공관복음>은 이 재판역시 불법이며, 따라서 판결은 아무런 법적 효력을 지닐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참고. 마 26:59-66; 막 14:55-64; 눅 22:66-71).
아무런 물증(物證)도 없이 심증(心證) 만으로 피의자를 기소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공회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떤 죄목으로든 혐의를 덮어씌워야 할 텐데, 증인들의 증언이 제 각기라 예수님을 기소할 공적인 혐의 내용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공회의 재판 자체가 아예 성립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이것이 불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재판 절차라도 정당했어야 할 텐데, 그것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공회도 역시 ‘안나스’의 재판처럼 대낮이 아닌 한 밤중에 열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공회가 열린 시기도 문제였습니다. 사형(死刑)과 같은 중대한 재판의 경우, 안식일 전 날이나 다른 중요한 축제일에는 열어서는 안 됩니다. 재판도 일종의 일로 볼 수 있을 것인 즉, 안식일에 일을 할 수 없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회는 스스로 안식의 법을 어긴 셈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중요한 재판은 절대로 단 한 번의 재판으로 하루 만에 끝내서는 안 됩니다. 첫 번째 투표에서 무죄로 혐의가 벗겨지면 재판은 그것으로 끝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유죄로 인정되면 재판은 다음 날까지 연기하였다가 두 번째 투표를 실시하게 됩니다. 이 두 번째 투표에서도 유죄로 인정되면 사형집행이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재판이 두 번에 걸쳐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견 법적으로 아무 하자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 두 번이란 한 번은 저녁에, 다른 한 번은 다음 날 이른 새벽으로서, 시간 간격이 불과 몇 시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공회의 재판이 무효가 되는 근거는 또 있습니다. 사형 판결이 증인의 증언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피의자의 고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 14:61-62). 무효의 근거는 또 있습니다. 공회의 결정이 만장일치(滿場一致)였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막 14:64후).
변론자. 여기까지가 절차상의 문제들이었다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 하나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어쩌면 이 문제야말로 재판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재판에서 피의자를 위한 변론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부활절 전야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온 나라에서 단 한 사람, 그분을 위하여 변론을 해 줄 사람이 없었을까? 이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증언하고 변론해 줄 사람이 진정 하나도 없었을까?
물론 있었다고 해도 공회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변론을 온전히 들어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에 상관없이 공회는 변론의 기회 자체를 아예 없애버렸으니 사실상 직무유기를 저지른 셈이고, 불법을 행한 것입니다. 공회는 다수의 횡포를 자행(恣行)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체포에서 재판과 판결에 이르는 그 모든 과정과 절차 하나하나 마다 제대로 된 것이 없었고,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원천무효입니다. 재판이 원천무효라면 피해보상이 따라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피의자가 죽어버렸으니 보상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억울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정의와는 거리가 먼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불의(不義)를 허용하신 것일까? 여기서 허용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다른 표현을 쓰 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불의(不義)를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하기만 하신 것일까? 왜 정의와 공법을 바로 세우지 않으셨을까?
정의가 있는 곳에 처벌이 있기 때문입니다. 법은 죽이지만, 살리지는 못합니다. 살리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분의 ‘헤세드’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바로 이 동기 때문에 그는 불의를 참고 견디어낸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정의를 말할 때, 하나님은 자비와 용서를 보이셨습니다. 그것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5. 신문(3): 곧 닭이 울더라
곽 경태 감독이 연출을 맡았던 영화 <친구>에서 동수(장 동건 扮)가 그의 친구 준석(유 오성 扮)이가 보낸 하수인의 칼에 난자(亂刺)를 당하고 죽어가면서 부산 사투리로 내뱉은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인자 고만해라. 만이 묵었다 아이가.” ‘베드로’ 역시 똑 같은 심정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한두 번도 모자라 세 번씩이나 나를 죽이고 있는 이 친구를 향해서 같은 절규를 내뱉을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요한’ 화자는 이 친구를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라고만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든 사람들이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베드로’는 자신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닐까?
‘요한’ 화자가 ‘베드로’의 행동을 다루는 방식은 공평하지 못하며, 따라서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주 억울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 화자는 이 “베드로 재판”을 “예수님 재판”과 거의 동등한 수준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두 재판 모두 ‘안나스’ 집에서, 같은 시각에 진행되고 있는 것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고 있어, 두 피의자의 행동이나 태도를 아주 뚜렷하게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참고로 <공관복음>은 소위 “베드로 재판”을 “예수님 재판”과는 별도의 이야기로 따로 구분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세 번씩이나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은 담대하고 당당한 주님의 모습 때문에 더욱 안타깝고 초라해 보이기만 합니다. 이점이 공평하지 못하며, 억울하다는 것이지요. 어디 비교할 대상이 없어 예수님과 비교를 하다니요! 나를 ‘우사인 볼트’와 백 미터 달리기 경주에 나란히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 화자는 과연 우리의 영웅 ‘베드로’를 부관참시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 정도는 잡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그리하여 ‘베드로’의 참 모습 정도는 밝히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이었으며, 참 모습이 아닌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두려워 떨며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던 그 모습이 ‘베드로’의 참 모습이었을까? 그렇다면 결단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분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고 설쳐대던 그 모습은 헛되고 과장된 모습이었을까?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일 수 있지 않을까?
만일 우리가 “베드로 에피소드”의 주인공을 ‘베드로’로 삼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질문들은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그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유사한 상황에서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를 교훈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접근 방식은 과연 적절할까? 잠시 <아브라함 이야기>를 회상해 보기로 하지요.
영웅으로서 ‘아브라함’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영역이 있습니다. <창세기> 화자의 끊임없는 관심은 ‘아브라함’의 영웅적 자질이 본질적으로 영적(靈的)인 것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적 영웅으로서 ‘아브라함’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나이 75세에 그동안 누려왔던 그 모든 관계와 기득권을 끊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또한 가정적 영웅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래’의 남편이며, ‘롯’의 삼촌이며, ‘이삭’의 아버지이며, 한 민족의 아버지이며, 궁극적으로는 전 인류를 위한 ‘메시아’의 아버지입니다.
이랬던 그가 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는 놀랍게도 영웅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입니다. 그는 야비하고, 이기적이며, 교활하기까지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내를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고, 이방인에게 거짓말을 하여 부(富)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이방인에게 재산상의 손실은 물론 큰 고통까지 안겨줍니다.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한다하더라도 그가 영웅이 될 자질은 없습니다. 만일 교회가 이런 사람을 믿음의 영웅으로 치켜세운다면, 세상은 교회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냉소와 야유를 보낼 것이 뻔합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모습일까?
사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된 데에는 그럴 만 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살던 땅에 기근(饑饉)이 몰아닥쳤기 때문입니다. 그 땅에 가뭄이라니! 있어서는 안 되지요. 그 땅은 그냥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서 살라고 하신 약속의 땅입니다. 사시사철 젖과 꿀이 흘러야 할 땅입니다. 가뭄도 그냥 잠시 스쳐 지나갈 정도의 가벼운 가뭄이 아닙니다. 생존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재난 대비 매뉴얼도 없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겁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입니다. 과연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가뭄으로 찌든 “약속의 땅”에 남아 온 가족과 가축을 굶겨 죽이느니, 젖과 꿀이 흐르는 ‘이집트’의 ‘나일’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번성하고 번창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나안’에서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곳에서 해왔던 것보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 했음직도 합니다. <시편>에서도 고백하고 있듯이, 음부(陰部)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자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이 내린 선택의 결과로 혹독한 대가를 치루지 않았던가!”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재반박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닥칠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설령 안다고 해도, 그 미래를 바꿀 능력을 가진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아브라함’이 무슨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가나안’이 아닌 ‘이집트’를 약속의 땅으로 지정해주었더라면, ‘아브라함’이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렇습니다. 결국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아브라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독서의 관점도 위기의 순간에 ‘아브라함’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에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실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그분이 기근을 적극적으로 의도했든 또는 소극적으로 그것을 허용했든,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자신의 약속을 지킬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표면 상 <아브라함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임에 틀림없습니다만, 무대 뒤의 진정한 주인공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모든 이야기의 저자이자 동시에 등장인물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관점이야말로 비단 <아브라함 이야기>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주제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가련한 ‘베드로’도 같은 심정으로 우리를 향해 읍소(泣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날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신다고 했을 때,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주님을 따를 수 없나이까? 주님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진심으로 말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체포당하시던 그 순간에 내가 칼을 빼들고 ‘말고’의 귀를 잘랐던 것도 진심으로 주님을 보호하기 위한 충정(忠情)이었음을 알아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가지 않아도 될 ‘안나스’의 집까지 따라 들어갔던 것도, 진심으로 주님이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읍소는 이렇게 계속되는 듯합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요? 왜 평소 나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움츠려 들어 나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정해 버리다니. 평소 나 답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이점 주님도 잘 알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돌변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내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베드로’의 고백은 순전히 본인의 상상(想像)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공동체의 유익을 떠올리며 창작해 본 것입니다. 공동체의 유익에 관하여 <시편>은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베드로’는 그날 밤, 잘못된 무리 속에서 불을 쬐다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만일 그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만일 ‘롯’이 ‘아브라함’ 교회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과 맥을 같이 하는 대목입니다.
나는 외로운 늑대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혼자가 아닙니다. 늘 삼위(三位)의 교제 가운데서 살아가십니다. “누구나 죽을 때는 혼자”라고 합니다만, 이는 틀린 말입니다. 그날 ‘베드로’가 악인의 무리 속에서 외로운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을 때, 주님은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바로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그를 위하여 사투를 벌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당당하게 재판관을 꾸짖고 있었습니다. 재판관의 불의(不義)를 고발하고, 정죄(定罪)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물으셨을 때, 그가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언약을 인정하고 또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석별의 정”이라는 노래의 제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일 년 사시가 변하여도, 동서남북이 바뀌어도, 우리 굳게 맺은 언약은 영원토록 변함없으리.” 하지만 이 노래는 ‘베드로’의 노래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 그분의 노래라야 할 것입니다. 그분만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6. 빌라도의 법정(1): 공회를 고발함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원칙이란, 어떤 사건에 대해 일단 판결이 확정되면 다시 재판을 청구할 수 없다는 형사상 원칙을 말합니다. ‘유대’ 공회가 이를 몰랐을까요? 예수님에게 대해서 이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던 것이에요. ‘유대’의 법정신은 역사상 다른 어떤 법보다 더 인권적 원칙에 충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름 아닌 ‘모세’의 율법에 기초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점에 대해서 본인은 수 주 전 설교를 통해서 ‘유대’의 법정신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소개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죄목으로 두 번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한 번은 공회 즉 유대 법정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빌라도’ 법정 즉 로마 법정입니다. 하지만 ‘요한’ 화자는 어쩐 일인지 ‘가야바’가 주재하는 ‘유대’ 공회의 재판 과정은 일절 생략한 채(참고. 18:28상), ‘빌라도’의 재판만을 길고 상세하고 다루고 있습니다(참고. 18:28하-19:16). 예수님에 대한 신문으로 말하자면 화자의 네 번째 서술인 셈입니다. 아마 그는 바로 이 부분을 통해서 예수님의 재판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려는 듯이 보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화자 자신의 서술이나 주요 등장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범상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유대’ 공회는 왜 예수님을 로마 법정에 다시 세우려 했던 것일까? 공회는 예수님에 대해서 신성모독(神聖冒瀆)의 선고를 이미 내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다시 그분을 ‘빌라도’에게로 데리고 온 것일까? ‘빌라도’ 자신도 그 이유가 궁금하다는 듯이 그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29절).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예수님의 무죄(無罪)가 강력하게 암시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재판은 재판관이 피의자에게 기소(起訴) 내용을 재확인함으로써 시작됩니다만, 지금 ‘빌라도’는 피의자가 아니라 고발자들을 향해서 기소 내용을 확인하겠다고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당황스러운 질문입니다. 그냥 통과 의례를 거치기 위해서 피의자를 데리고 온 것뿐인데, 눈치를 보아 하니 ‘빌라도’가 재판을 처음부터 정식으로 시작하려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공회는 궁색한 변명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렴 아무 죄도 없는 자를 데리고 왔겠습니까? 그는 흉악한 범죄자입니다”(30절). 이에 ‘빌라도’는 더욱 시큰둥해지며, 다소 짜증스럽다는 듯이 내뱉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 법대로 하면 될 거 아닌가”(31절). ‘유대’ 법정에서 선고한 결론에 따라 처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들의 양심이 찔리는 순간입니다.
‘빌라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시 로마의 식민 통치 정책을 반영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즉 로마는 피 점령국가에 대하여 상당한 정도의 자율권과 자치권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사형(死刑) 집행에 대해서만큼은 예외 규정을 두었다고 합니다. 즉 사형 집행 권한은 로마에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사십 년 전부터 이스라엘의 사형집행 권한은 로마에 귀속되어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유대’ 법에 따라 처리하라는 ‘빌라도’의 말에 자신들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없다고 항의하는 이 사람들의 말은 일면 맞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의 항의는 정당하기도 하고, 또 틀리기도 합니다. ‘스데반’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들에게 사람 죽일 권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즉 누군가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를 지었을 경우 돌로 쳐 죽일 수는 있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율법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레 24:16).
그러니까 신성모독을 범하는 자는 죽일 수 있으며, 그 경우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 첫 번째 목격자가 가장 먼저 돌을 던지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신 17:7).
공회가 ‘빌라도’ 앞에서는 예수님을 단순한 행악자로 기소하고 있습니다만(30절), 그들의 공식 판단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참고. 마 26:63-65; 막 14:62-64; 눅 23:66-71). 따라서 공회 법정은 그를 죽일 권한이 있었고, 마땅히 그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비록 증인들마다 증거가 달라 공회의 결정 자체가 아예 인정받기도 어렵겠습니다만. 그런데 공회는 왜 스스로의 결정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표면적인 이유인 즉은 순전히 종교적인 것입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손에 피를 묻혀 스스로를 불결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28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증오심이 종교로 포장된 것에 불과합니다. 본인도 개인적인 원한이나 적개심을 종교의 이름을 빌어 거룩한 분노로 포장하는데 일가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고해 보면 본인의 바로 이와 같은 위장과 위선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공회가 보이고 있는 행태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정말 싫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그를 정말 죽이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어느 목사나 신부가 교인들의 입바른 소리를 즐겨 들으려 하겠습니까? 내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차라리 그런 성도는 다른 교회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무슨 특별한 적개심이나 증오심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공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자신들의 목적에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빌라도’의 법정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의 처소이기 때문에 불결하여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참고. 민 9:6-12).
사람을 죽이는 일에 그토록 헌신해있으면서, 자신의 불결함이나 사악함에 대하여는 아무런 가책이나 거리낌도 없으면서, 이방인의 처소에 들어가 자신을 불결하게 함으로써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실로 해악과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행하는 데에는 더 심오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한’ 화자의 신학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32절). 즉 예수께서 ‘유대’법에 따라 신성모독 죄로 돌에 맞아 죽을 것이 아니라, ‘로마’ 법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인데,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에 의한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이미 예수님 스스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이 어떠한 죽음을 죽을 것인지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12:32). 적어도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로마’ 법에 따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할 것이었습니다. ‘가롯 유다’의 배신이 예수님의 체포에 아무런 역할을 한 것이 없고, ‘베드로’의 결심이나, 헌신도 그분이 체포당하지 않게 하는데 아무런 기여를 한 것이 없듯이, 공회 역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스스로 그 머리 위에 하나님의 진노를 더 쌓은 것밖에는 말입니다. 즉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쓸데없이 한 것이었습니다.
7. 빌라도의 법정(2): 빌라도를 신문함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마치 예수님의 죽음이 전적으로 ‘본디오 빌라도’의 책임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듯합니다. ‘가롯 유다’도, ‘유대’ 공회도, 로마 병정도 아닙니다. 오직 ‘본디오 빌라도’가 그 모든 책임을 다 뒤집어써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그가 무슨 악독한 짓을 했기에 그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까?
총독 빌라도. 사실 일반 역사가들이 ‘빌라도’에 대해서 평가한 기록을 보면 과연 그는 잔혹한 냉혈한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약학자 ‘바클레이’(W. Barclay)는 ‘빌라도’를 악명 높게 만든 세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그가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유대’ 지방의 행정 수도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이사르’였습니다만, 그 지방 총독은 ‘예루살렘’을 수시로 방문했습니다. 그 때마다 일단의 군대가 그를 따랐는데, 모든 전임 총독들은 ‘유대’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군기(軍旗) 끝 부분에 달린 황제의 흉상을 사전에 제거하고 입성했다고 합니다. 신(神)으로 자처하는 황제의 흉상을 ‘유대’인들이 용납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 흉상을 제거해 달라는 ‘유대’인들의 요청도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이를 요구하자 그는 이들을 원형 경기장에 몰아넣고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만, ‘유대’인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일화는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은 늘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새 수로(水路)를 건설하고 싶어 했는데, 문제는 자금이었습니다. 그는 이 자금을 성전에 있는 소위 ‘코르반’이라 부르는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헌금으로 충당했습니다. 모두들 수로를 간절히 원하기는 했습니다만, 하나님에게 드려진 것을 결코 다른 용도로 쓸 수 없다는 것이 ‘유대’의 법, 이에 그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총독은 이를 제압하기 위하여 평복으로 위장한 사병들을 폭도들 사이로 잠입시켜 학살을 감행했습니다. 이 소문은 황제에게까지 알려져 총독 자신의 지위까지 위태로울 지경 이었다 합니다.
세 번째 일화는 더욱 고약합니다. 총독은 ‘예루살렘’에 머물 때에는 ‘헤롯’의 옛 궁전에서 지냈다고 하는데, 이곳에 당시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이 새겨진 일련의 보호벽들을 설치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을 자극했고 분노하게 했습니다. 거룩한 도시에 신으로 자처하는 자의 이름을 새겨놓다니요! 이번에는 그와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 설치물을 제거하도록 충고했으나 그는 거절했고, 결국 황제가 직접 그것들을 제거하라고 지시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빌라도’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이 세 번째 일화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주후 35년의 일로, 그 해에 ‘사마리아’에 작은 규모의 소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이들을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그동안 ‘로마’의 충성스러운 시민으로 인정받아왔던 터, 인근 ‘시리아’로부터 황제의 사절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개입할 정도였습니다. 그에 관한 평판이 좋지 않자 결국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를 ‘로마’로 소환했습니다만, 소환 도중 황제가 사망하는 바람에 그는 처벌은 면하게 됩니다. 그 이후 그의 행방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이것이 세속 역사가들이 전해주는 ‘빌라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요한’ 화자의 기록에 따르면, 그를 향한 평가는 일견 과장되었거나 왜곡되어있다는 생각입니다. 재판관으로서 그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공정하며, 관대하기 까지 한 모습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그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어떤 정보를 사전에 제공해 주었든 개의치 않고 재판을 새롭게 진행하겠다는 듯한 태도입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29절). 마치 예수님에 관하여 사전에 들은 바가 전혀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예수님을 그에게 넘긴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상당히 당혹스러웠을 질문임에 틀림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예수님을 처벌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그분을 무죄 방면해 주기 위하여 안간 힘을 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재판을 진행할수록 그분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말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38절);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19:4);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19:6).
그러나 ‘유대’인들의 태도는 완강하기만 합니다. ‘빌라도’의 판결에 동의할 수가 없다고 우깁니다. 그를 풀어주면 황제에게 반역을 도모하는 일이 될 것이라며 그를 협박까지 합니다(19:12). 할 수 없이 ‘빌라도’는 일련의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그가 먼저 시도한 것은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니 ‘헤롯’의 관할에 속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눅 23:6-12). 하지만 웬 일인지 ‘헤롯’은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되돌려 보냅니다.
‘빌라도’의 두 번째 시도는 ‘바라바’와 예수님을 맞교환 하는 것이었습니다(마 27:15-26; 막 15:6-15; 요 18:39-40). ‘유대’인들이 설마 예수님 대신에 악명 높은 ‘바라바’를 선택하겠느냐는 희망이 깔려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무리의 선택은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요구했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 하여 그들에게 보여줍니다(19:1-5). 혹시나 피 흘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측은한 생각으로 그를 풀어주라고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빗나갔습니다.
예수님과 빌라도. ‘빌라도’는 왜 이처럼 한사코 예수님을 놓아주기를 원했던 것일까? 그는 정말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었을까? 역사가들이 그를 지나치게 악의적으로 평가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체적으로 정학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의 진정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아내가 전날 밤에 꾼 꿈 때문이 아니었을까? 재판 당일 아침 그의 아내는 그에게 사람을 통해서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는 기별을 보냅니다(마 27:19). 무슨 꿈이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악몽 비슷한 것이었나 봅니다. 아무리 황당무계한 꿈이라도 듣지 않았다면 몰라도 듣고서야 모른 채 할 수 없었을 터, ‘빌라도’는 처음부터 이 재판을 맡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을 데려다 ‘유대’법에 따라 재판하라고 했습니다(요 18:31).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국에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예수께서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그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바로 여기에 예수님과 관련한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누구든 예수님에 관한 한, 중립지대가 있을 수 없다는 교훈이 그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는 그와는 상관없노라”라고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국 그의 편에 서게 되든지, 아니면 그의 반대편에 서게 되든 지 중의 하나입니다.
‘빌라도’의 선택과 관련해서 또 하나 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빌라도’는 왜 그리스도의 편에 설 수 없었을까? 한 마디로 답하자면, 그것은 그의 능력 밖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빌라도’는 자신의 능력이나 권한에 대해서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참고. 19:10). 예수님의 제자 ‘도마’도 같은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 하겠노라”(20:25). “믿음”이 나로부터 나오는 그 무엇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성”(理性; reason)적 탐구나 노력만으로 결코 이를 수 없는 지식이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지식은 오직 그분의 “계시”(啓示; revelation)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첫 대면을 통해서도 이 점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견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신문을 받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정 반대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중입니다. 즉 ‘빌라도’가 예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에 치명적으로 중요한 계시를 듣고 있는 중입니다.
계시와 초청. 그 계시란 다름 아닌 “내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라에 대해서 두 번에 걸쳐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 번은 부정적인 진술을 통해서, 그리고 또 한 번은 긍정적인 진술을 통해서입니다. 부정적인 진술이라 함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로마’ 제국과 같은 세상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창과 칼이 지배하는 속성 말입니다. 긍정적인 진술이라 함은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진리가 통치한다는 말이겠지요.
진리란 무엇입니까? 지금 ‘빌라도’도 같은 질문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38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리를 가장 포괄적으로 정의(定義)한 바 있습니다: “내가 곧 진리라”(참고. 14:6). 이 정의에 따르면 진리란 무슨 사상이나 이념이나 교훈이 아니라, 인격 그 자체를 말합니다. 조금 더 풀어 정의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함으로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라도’가 이 계시를 제대로 체득(體得)했을까요? 그가 기껏 알게 된 지식은 “하나님의 나라”가 ‘로마’ 제국에 별 위해(危害)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무죄하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계시의 목적이었을까? 계시는 단순히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초청(招請)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단순히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얻는 것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는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초청에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7절하).
진리에 속한 자가 보이는 반응은 과연 어떤 것일까? ‘도마’가 보이고 있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가 그렇게도 확인하고 싶어 했던 상처 난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도마’가 보였던 반응은 “아, 과연 주님께서 부활하셨구나. 그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구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 ‘도마’의 이 고백은 연구나 탐색을 통해서 내린 결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계시 덕분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빌라도’와 ‘도마’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는 믿음의 선물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그의 비극이 있다 하겠습니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이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굳이 그의 편에서 그 이유를 찾자면, 그가 진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빌라도’의 재판 전 과정을 대하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계시가 철저하게 ‘빌라도’ 한 개인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사람 간의 대화가 항상 ‘빌라도’의 관청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유대’인들은 이 자리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공관복음>의 기록과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요한’ 화자는 그동안 일관되게 강조해왔던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계시와 초청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빌라도’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재판은 단순히 재판이 아니라, 복음의 계시이자 선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모두를 위한 복음 말입니다.
8. 빌라도의 법정(3): 예수와 바라바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는 ‘마리아’만큼이나 흔한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일부 오래된 <성경 사본>들에서 ‘바라바’를 ‘바라바 예수’(Jesus Barrabba)로 부르고 있다 해서 특별히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번역본이나 사본에서 그를 ‘바라바 예수’가 아닌 ‘바라바’로 고쳐 부르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초대 교회 신학자 ‘오리겐’의 설명이 그럴 듯해 보입니다. 즉 ‘바라바’와 같은 악명 높은 강도에게 ‘구원자’를 뜻하는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가당치도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바라바 예수’가 ‘바라바’로 바뀐 것은 순전히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정말 ‘바라바’의 원래 이름이 ‘바라바 예수’였다면, 그는 ‘나자렛 예수’(Jesus of Nazareth)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인 셈입니다. 결국 ‘빌라도’와 ‘유대’인 무리는 두 예수를 놓고 흥정을 벌이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나자렛 예수’를 살려주고 대신에 ‘바라바 예수’를 희생양으로 삼고 싶습니다. 그 동기가 자신의 양심의 요구에 따라 나온 것인지, 아니면 아내의 충고 때문이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군중 즉 세상은 ‘나자렛 예수’를 희생양으로 삼아 ‘바라바 예수’를 살리기를 원합니다. ‘빌라도’가 어떤 선택을 하든,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대속적(代贖的) 죽음을 맞이해야 할 운명입니다. 그러니까 두 ‘예수’는 참으로 기막히게도 같은 소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두 예수. 네 <복음서>가 한 결 같이 강도 또는 살인자로 낙인찍고 있는 ‘바라바’(요 18:40; 막 15:7; 눅 23:19; 마 27:16). 그가 어떻게 ‘바라바 예수’ 즉 구원자의 타이틀을 얻게 된 것일까? 만일 그가 백성들 사이에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혁명 전사(戰士)로 인식되고 있었다면, 그는 단순한 강도나 살인자가 아니라 ‘유대’ 민족의 영웅 내지는 ‘메시아’로 열렬히 환영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 왕국의 대의(大義)을 실현함에 있어 폭력이나 살인 정도는 피할 수 없는 수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무리가 그토록 큰 소리로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요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빌라도’가 이 백성의 요구대로 ‘바라바 예수’를 살려주면 어떻게 될까? 그가 진정 자신의 이념과 소명에 충실하다면, 그가 진정한 혁명가라면, 그는 풀려나자말자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즉 다시 칼을 들고 살인과 폭력을 일삼으며 로마 제국을 골치 아프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국은 그를 잡으려 나설 것이며, 결국 그는 체포될 것이고, 다시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혁명을 위한 그의 무력은 로마라고 하는 더 큰 무력에 의해서 제압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를 대신해 희생양이 되었던 ‘나자렛 예수’의 죽음은 적어도 그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즉 ‘나자렛 예수’의 대속적 죽음이 그를 살리지는 못했다는 뜻입니다. ‘바라바 예수’가 자신의 방식을 고수(固守)하는 한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그가 선택한 방식이란 물리적 힘을 사용하는 것이고, 그 대상은 자신이 아닌 타인과 세상을 향한 것입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세상과 타인은 거듭나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이들을 지배하는 제도나 관습이나 이념이나 사상을 모두 갈아엎어야 합니다. 이점 ‘바라바 예수’를 선택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혁명만이 변화인가. 이와 같은 혁명은 과연 모든 것을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예컨대, ‘바라바 예수’가 사로잡히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과업을 수행했더라면 그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을까?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시도하는 혁명이 지나치게 혁명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가 바꾸려는 그 모든 것에서 자신만은 제외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가 천하를 바꾼다 해도 스스로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면 혁명은 여전히 미완(未完)으로 남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이사야>의 노래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노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과연 이와 같은 평화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어린 양과 어린 염소와 송아지와 어린 아이와 암소와 수소가 힘써 노력한 결과일까? 아니면 이리와 표범과 곰과 사자와 독사가 먹지 않아도 늘 배부르게 되었기 때문일까? 이도 저도 아닙니다. 이들 맹수들의 본성, 즉 식성(食性)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육식(肉食)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무슨 연고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들 맹수들은 자신들이 가진 파괴적인 힘을 더 이상 가련한 초식동물들에게 사용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었습니다. 평화는 그렇게 온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전지전능(全知全能) 하신 하나님께서 강보(襁褓)에 싸여 스스로를 방어할 아무런 무기(武器)도 힘도 없는 어린 아이로 태어난 것에 견줄 만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자렛 예수’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시는 혁명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분의 방식은 우리와 화평을 이루기 위하여 먼저 칼과 창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결과가 자신의 죽음까지 초래한다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평화가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자와 토끼가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만일 ‘나자렛 예수’께서 ‘가야바 예수’와 같은 감옥에 수감되어있었다면, 혁명의 방식을 놓고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갔을까? ‘가야바 예수’가 세상을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나자렛 예수’께서는 그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을까? 뭐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시려는 방식대로 해보게. 먼저 뒤집어엎어야 할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자네라네.” 이는 그분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거듭나야 해”(3:3).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는 방식은 참으로 신비하기 짝이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적극적인 참여를 필요로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의사(意思)와는 전혀 상반된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이 홀로 일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이 재판에서 ‘유대’인이 보여주고 있는 비극적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들을 살리러 온 생명의 주(主)를 죽이고, 살인자를 살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는 이 모습 말입니다. 이들의 동기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지금 이들 무리와 함께 일하고 계신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궤변(詭辯)일 것입니다.
왜 이 백성은 ‘나자렛 예수’가 아닌 ‘바라바 예수’를 원했던 것일까? 이 또한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 이들은 ‘나자렛 예수’를 훨씬 더 위험한 인물로 보았던 것은 아닐까? 할 수만 있다면 항상 덜 위험한 쪽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일터, 그들의 선택을 나무랄 수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살인자이자 강도인 ‘바라바 예수’가 아무 죄도 없다고 ‘빌라도’가 판결한 ‘나자렛 예수’보다 덜 위험하다니!
그러나 사실이 그러합니다. 두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나 요구 사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먼저 ‘바라바 예수’는 나의 인생을 그에게 바칠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다만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즉 자신의 혁명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내 인생을 이용하겠다고만 말합니다. 그러나 ‘나자렛 예수’께서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겠다고 요구하십니다. 내 인생을 통제하고 움직여야겠다고 말합니다. 누가 더 위험한 인물입니까?
그래서 ‘나자렛 예수’만 아니라면 누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금도 외칩니다: “‘나자렛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 예수’를 우리에게 주소서.” 이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누구를 달라고 외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바라바’가 풀려나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는 역사적으로 ‘나자렛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직접 몸으로 체험한 첫 번째 수혜자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가 받은 수혜가 육체적인 것이었다면, 내가 받은 수혜는 전인적(全人的)인 것입니다. 그가 받은 수혜가 한시적인 것이었다면, 내가 받은 것은 영속적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그분이 온전히 내 인생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내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빌라도’처럼 어정쩡하게 ‘나자렛 예수’와 세상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원하고 있습니까?
9. 빌라도의 법정(4): 보라 이 사람을!
예수님께서 오직 말씀으로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잠잠하게 하셨을 때, 사람들은 놀라 서로를 향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는가?” 과연 이 사람은 누구이며,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비단 당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세대를 향해서 던지는 치명적으로 중요한 질문일 것입니다.
바로 이 동일한 사람이 지금 ‘빌라도’ 앞에 서 있습니다.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홍포를 걸치고, 온 몸은 채찍 자국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로 말입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그를 이런 모습으로 ‘유대’ 군중들 앞에 내세워 같은 질문을 하려 합니다: “보라, 이 사람을!”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해 보라는 도전과 호소를 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이 사람을 먼저 만나보았을 때 어떤 사람이라는 판단이 섰기에 군중들로 하여금 이 사람을 보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일까?
가시관과 홍포.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이 사람은 지금 “유대의 왕”으로 ‘빌라도’ 앞에 서있습니다. ‘유대’ 공회도 그에게 “유대의 왕”이라는 혐의를 씌워 ‘빌라도’에게 데리고 온 바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사람은 왕으로 부르기에는 너무나 희극적인 형색을 하고 있습니다. 가시나무 관을 쓰고 있고, 홍포를 걸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마치 전쟁에 져서 적국의 포로로 끌려와 있는 모양새입니다. 로마 군병들이 그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물론 ‘빌라도’의 묵인 내지는 승인 하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을 이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 군인은 군인을 알아보는 법이거늘 ‘빌라도’나 이들 병정들에게는 그만한 안목은 없었나 봅니다. 현대전에서도 전쟁에서 패한 지휘관에게는 그 계급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줍니다. 포로라고 해서 데려다 조롱하고 멸시하며 고문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국가 간에 정해놓은 규약입니다. 그러나 이들 군인들은 “유대의 왕”에게 함부로 대했습니다. 조롱하고, 멸시했으며, 채찍으로 때리고 고문했습니다. ‘빌라도’는 왜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다루었던 것일까?
그로부터 무슨 귀중한 정보를 얻어내려 했던 것도 아니고, 그가 특별히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그 스스로도 몇 번이나 실토하였듯이 그로부터 아무런 잘못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만 그 사실을 알아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을 알게 사람들이 한 결 같이 고백하는 바는 그분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을 배반했던 제자 ‘가롯 유다’조차도 나중에 이렇게 실토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상).
‘빌라도’의 아내는 어떻습니까? 남편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마 27:19). ‘헤롯’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고 ‘빌라도’가 전해주고 있습니다: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눅 23:15).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과 함께 처형당했던 도둑조차도 죽어가면서 이분의 무죄라는 증거를 후세에 남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1).
증인은 또 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그 사람입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눅 23:47). 마지막으로 그토록 예수를 처형하라고 외쳐대던 군중들조차도 그날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벌어진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고 두려움에 떨며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 27:54).
바로 이것이야말로 “나사렛 예수”를 가까이서 만나본 사람이라면, 내리게 되는 한 결 같은 증언이고 고백일 것입니다. ‘빌라도’의 고백도 그것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18:38). 그가 비록 진리에 관심이 없었던 하더라도, 최소한 이 초라한 “유대의 왕”이 로마에 결코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이 왕은 혁명가도 정복자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라바’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혁명분자였습니다. 당연히 그를 처형했어야 마땅합니다.
채찍 대 십자가. 사실이 그러함에도 ‘바라바’를 처형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를 데려다 채찍질을 하고서는 그를 군중들 앞에 내세웁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우리는 그의 의도를 모르지 않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예수를 풀어놓아주려는 ‘빌라도’의 두 번째 묘안입니다.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사코 예수님을 처벌하고 싶어 하는 ‘유대’인들의 요구도 들어주어야겠기에 새로운 묘수를 짜낸 것입니다. 그가 택한 방식은 처형보다는 훨씬 가벼운 형벌, 즉 <누가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바대로 예수님을 몇 대 때려 훈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눅 23:16). 다시 말하자면 ‘빌라도’는 채찍질로 십자가 처형을 대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의 행색(行色)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이번에는 군중들의 동정심을 기대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금 모습은 충분히 그럴 만 하다는 생각입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왕의 홍포를 입었어나 군병들에게 조롱당하고 얻어맞아 머리는 풀어지고 얼굴과 온 몸은 찢기고 선혈이 낭자한 모습은 사람들의 동정을 사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평소 예수님을 익히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지금 그분의 모습은 참으로 충격적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아주 필사적입니다. 그는 지금 흥분한 군중을 향해서 절규하듯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이래도 이 사람을 잡아 죽여야겠느냐는 것이지요. 지금의 상황은 두 등장인물의 역할이 완전히 반전된 모습입니다. 즉 군중이 비정하고 무지한 재판관으로, ‘빌라도’가 사려 깊고 합리적인 변호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은 성난 군중 앞에 두려워 떨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만. 성난 폭도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재판관, 그리고 그 사이에 속수무책 서 있는 하나님의 아들. 그의 운명이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들 두 당사자 간의 타협에 의해서 판결날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 화자는 바로 직전의 장면에서 로마 병정들에 의하여 조롱받고 멸시받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만, 이 장면에서는 그 아들이 법의 보호는커녕 증오와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죽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자의 일관된 의도인 즉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 연약하고 불쌍하고 무기력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빌라도’의 계획은 성공했을까요? 그는 다시 한 번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동정은커녕 더 큰 저항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무리는 더 큰소리로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입니다(6절상). 마침내 그도 자포자기(自暴自棄) 하는 심정으로 무리들을 향해 분노를 드러내고 맙니다. 하고 싶은 하라고 말해버린 것입니다(6절하).
이 말은 물론 예수를 죽여도 좋다는 최종 선고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요구가 하도 집요하고 끈질겨서 환멸과 짜증이 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는 이 사람을 죽일 생각이 전혀 없으니, 정 원한다면 너희들이 데려다 그렇게 하라는 역겨움의 표시입니다.
그의 태도에 무리가 다소 누그러졌을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세등등하여 새로운 혐의를 하나 더 추가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왕”이라는 정치적인 혐의 외에 이번에는 “하나님의 아들”, 즉 신성모독이라는 종교적인 혐의가 그것입니다(7절).
그런데 왜 이 혐의를 이제야 밝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혐의(嫌疑)입니다. 만일 이들이 처음부터 이 대목을 강조했더라면 재판의 성격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성모독에 관한 혐의는 로마 법정이 아니라 ‘유대’ 법정에서 다루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벌의 내용도 십자가의 형벌이 아니라, 돌에 맞아죽은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사실 공회가 예수를 죽이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성모독 때문이 아니었던가요? 하지만 그동안 ‘빌라도’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혐의는 정치적인 것, 즉 예수께서 스스로 “유대인의 왕”으로 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유대’ 공회가 이제 종교적인 것, 즉 “신성모독”이라는 새로운 혐의를 들고 나온다 해서 이전의 혐의를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죄목을 추가로 덧붙임으로써, ‘빌라도’로 하여금 이 재판을 결코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무언중에 강요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인물은 그냥다루어도 되는 경범죄 수준의 죄인이 아니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다시 한 번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무자비한 본심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본심 말입니다. 예수께서 ‘메시아’로 자처하는 것도 심각한 일이거늘,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까지 했으니 이들이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래저래 “나사렛 예수”는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에게 큰 거침돌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화평의 역설. 이스라엘이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일이 왜 그토록 어려울까? 하나님께서 그들과 화평을 이루는 방식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적대적인 두 세력 간에 화평을 이루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강자가 스스로 무장해제하여 약자와 같이 되거나 입니다. 이스라엘이 기대했고 지금도 기대하고 있는 방식은 앞의 것입니다.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참고. 고전 1:23). 이 사람들은 <이사야>의 노래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왜 전능자 하나님께서 굳이 이런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 하시는 것일까? 왜 스스로 약해져서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방식을 택했을까?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3-35).
그의 노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깊은 신뢰와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를 이루어 가심에 있어, 때로는 우리를 참여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배제시키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어느 경우든 우리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건을 성취하심에 있어 ‘가롯 유다’나, ‘빌라도’나, 로마 병정이나,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개개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었으니 나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어”라고 항변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소명(召命)과 운명(運命)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소명을 받은 자이지 정해진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소명은 열려있지만 운명은 닫혀있습니다. 소명은 가능성을 말하지만, 운명은 결과를 말합니다. 소명은 역동적이지만 운명은 정체되어있습니다. 소명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에 집중하지만, 운명은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까?”에 집중합니다. 다섯 달란트나 세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소명을 믿었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운명을 믿었습니다. 소명을 믿었던 사람은 이윤을 남기려 했습니다만, 운명을 믿었던 자는 그것을 땅속에 묻어버렸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사람입니다. 즉 나는 그리스도의 소명을 나의 소명임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군중 속의 개인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군중 속에 있지만 고립된 개인으로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자입니다.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을 걷도록 부름 받은 자입니다. 그날 그 무리 속에 고독한 개인은 아무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도 그분을 위해서 변론하러 나선 자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요한’ 화자는 이점을 서막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11).
그런데 나는 어이하여 그 빛 속에 거할 수 있게 된 것일까요? 어찌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된 것일까요? 그래서 나는 정말 행복합니까?
10. 빌라도의 법정(5): 대제사장 가야바
‘하갈’이 그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사라’의 학대를 피해 도망 나와 광야를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 앞에 나타나 ‘이스마엘’과 그의 후손들에 대하여 예언을 한 것이 있습니다. 그 예언은 이렇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하여 살리라”(창 16:12).
과연 이 예언이 정확하게 어떤 방식으로 성취가 되었는지, 아니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중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최근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테러전쟁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창세기>의 이 예언을 상기하게 됩니다. 하버드대학교 교수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도 혹시 이 예언의 말씀을 그의 유명한 저서 <문명의 충돌>에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는 이 책에서 국제정치에서 가장 심각한 분쟁이 문명 간의 충돌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구분법에 따르면 세계는 여러 문명권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중 가장 큰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는 것이 서구(기독교권)와 이슬람권입니다. 서구는 국제관계에서 그동안 유지해 왔던 강대국으로서의 패권(覇權)을 지키기 위해 정치·경제적 압박을 지속할 것이며, ‘이슬람’권은 이에 대한 반발로 서구와 적대적 위치에 놓일 것이라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문명 충돌의 핵심입니다. 그의 이론에 여러 가지 논쟁의 여지가 많습니다만, 작금(昨今)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전쟁을 보면서 그의 주장이 허무맹랑하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자유-신성 불가침? 특히 최근 프랑스 잡지사 <샤를리 에브도>의 편집진이 일단의 ‘무슬림’ 테러분자들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는 것에 전 세계가 격분하고 있습니다. 온 유럽이 테러에 항의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고, 온건 ‘이슬람’ 국가들도 이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일부 언론은 이 사태를 보도하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전쟁이라고 논평하기도 합니다.
테러의 직접적인 원인은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만평을 실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잡지사가 이런 만평을 실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동안 수시로 ‘이슬람’ 종교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만평과 글을 싣기도 했습니다. 존경하는 선지자를 그리는 것조차 금기 시 하고 있는 판에 이번에는 그의 나체를 그려 조롱까지 해댔으니, 이 사람들의 분노가 어떠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거의 대부분의 세계인들은 이들 테러분자들의 만행(蠻行)을 규탄하면서, 동시에 언론의 자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합니다. 언론에서 다루지 못할 주제는 없으며, 그 어떠한 견해도 억압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금기(禁忌)도 금기 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같은 주장은 1968년 프랑스 시민혁명에서 이미 천명된 바 있는 정신이기도 합니다(참고로 소위 68 프랑스 혁명의 시초는 한 대학에서 남학생도 여학생 기숙사를 함께 쓰도록 해달라는 학생들의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인간의 자유에 어떠한 금기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프란체스코’ 교황의 입장은 다소 다른 것 같습니다. 그분은 이번 “샤를리 에브도” 사태에 대하여 논평하면서, 누구든 다른 사람이 가진 종교적 신념을 존중해야 하며, 조롱이나 경멸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내 어머니를 모독한다면 나한테 얻어맞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로마카톨릭’이 주류 종교를 이루고 있는 프랑스 인들이 듣기에는 상당히 거북한 말씀입니다.
본인도 이분의 생각에 대체적으로 동조하면서,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양비론(兩非論)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습니다. 우선 “어떠한 금기(禁忌)도 금기시 되어야한다”는 주장은 무엇보다 성경적이라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모순적인 주장입니다. 자기 모순적이라 함은 이 주장에 반대되는 주장은 금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적이 않다 함은 하나님조차도 자신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언론의 자유라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슬람 종교에서 제한하고 있는 금기 사항들은 어떻습니까? 예컨대, 그 종교의 창시자를 모독해서는 안 됨은 물론 그의 초상까지 그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 말입니다. 적어도 본인이 느끼기에는 이 종교는 그들의 하나님, ‘알라’보다 ‘무함마드’ 선지자를 오히려 더 경외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무슬림’들은 이 금기를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살인을 행하면서도, “알라는 위대하다”를 마치 주문(呪文)처럼 외쳐댑니다.
이들이 말하는 ‘알라’란 결국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그렇다면 이분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닙니까! 그래서 논리적으로 본다면, 이들은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로 내 종교에서 금기하고 있는 규례를 누군가 어겼으므로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처단(處斷)한 것이 됩니다. 과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분을 반대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를 처단해도 되는 것일까? 과연 이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믿고 있듯이 이방인들과 치르는 모든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불러도 좋은 것일까?
종교와 이념. 이쯤 되면 종교는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립니다. 이념이나 사상 말입니다. ‘이슬람’이 아니라 ‘이슬람’ 주의(主義)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도 아주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며, 비열하고, 교활한 모습까지 띄게 됩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로 대표되는 예수님 당시 ‘유대’ 주의(Judaism)의 모습도 그러했습니다.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는 수없이 많은 금기 조항들을 만들어놓고, 이를 어기는 자들에 대하여 항상 처단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사도행전>은 이 같은 “유대주의”의 편협함이나 사악함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흥미로운 독서 관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사도들의 선교 여행에서 가장 큰 장애가 “유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훼방은 폭력적이며, 은밀하고, 음흉하며, 늘 공범자를 참여시킵니다. 그리고 이들을 매수하거나 없는 사실을 말하게 합니다(참고. 행 4:17; 5:33; 6:11; 9:23; 12:2-3; 13:28, 45, 50; 14:2, 19; 17:5; 18:6, 12; 20:3, 19, 29; 21:27, 31, 35; 22:22; 23:2, 12, 30; 25:2, 7등).
이들 중 최악의 사례는 지금 ‘빌라도’의 관청 앞에서 벌이고 있는 소동일 것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들의 법정에서 신성모독의 판결을 받았으면 자신들의 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이면 될 일을, 굳이 ‘빌라도’의 손을 빌어 처단하고 싶다고 합니다. 여기에 ‘가야바’의 교활함과 비열함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손에는 직접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빌라도’를 공범으로 참여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도 ‘가야바’의 계책을 다음과 같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달라 하였으니”(행 13:28). 이 같은 술책은 ‘사탄’적입니다. 늘 남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공범자(共犯者)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재판에서 주모자와 공모자의 형량(刑量)이 다릅니다. 당연히 주모자가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빌라도’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1절하). 이 문장에서 “(넘겨준) 자(oJ, 호)”가 단수형으로 되어있어,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인물은 ‘가롯 유다’일 것인데, 그는 예수님의 체포 이야기를 끝으로 무대에서 사라졌으며,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일과는 무관합니다. 다른 가능성으로 ‘유대’ 지도자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인데, 이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온 자들입니다(18:28). 이 문장에서 비교의 대상은 ‘빌라도’와 다른 한 개인이라 했으니, 남은 대안으로 대제사장 ‘가야바’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 공회를 대표하는 자로서, 이 모든 일의 주모자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죽이자고 사람들을 부추기는 일에 앞장섰으며(11:49-53), 그분에게 신성모독의 혐의를 씌운 일에 대해서도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입니다(막 14:61-64). 그는 ‘빌라도’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재판하는 권한을 부여받기는 했으나 그 권한을 남용하였으며, 정치적인 사리사욕(私利私慾) 추구를 위하여 예수님에게 백성을 선동(煽動)했다는 날조된 혐의를 뒤집어씌워 ‘빌라도’에게 넘겨 죽음에 이르도록 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죄는 ‘빌라도’의 죄보다 더 크다 할 것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 사람들은 기독교에도 무수히도 많은 금기 조항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해서는 안 되는 규례들이 많고, 이를 어길 경우 하나님의 처벌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신약>만 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규례나 권고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선행(善行)에 대한 보상과 악행(惡行)에 따른 책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들 내용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이나 교회를 회피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할 것입니다. 진리란 사람들을 마음 편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이 다를까? 도피성(逃避城)을 말하고 있습니다. 피할 곳, 즉 용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도피처가 아니라, 영원한 도피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religion)란 영어 단어는 “다시”(re-) “잇다”(regare), 즉 “끊긴 것을 다시 이어준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다리를 놓는 자”라고 합니다. 누가 무엇을 이어준다는 말일까? 이 질문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힌트는 이렇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영원한 도피성이자 영원한 대제사장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교회 역시 세상을 향한 제사장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참고. 롬 15:16). 제사장의 임무는 관계를 맺는 일이지 끊는 것이 아닙니다. ‘가야바’처럼 선동하고, 음해하고, 뇌물로 매수하고, 공모하고, 고발하고, 위증(僞證)하고, 강요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제사장은 결코 관계 맺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성령 모독죄. 하지만 <성경>에서도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 12:31);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막 3:29);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 12:10)
어떻습니까?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죄만큼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을 모독하는 죄” 말입니다. 나는 대뜸 이렇게 반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의 용서가 무제한적일 리가 없지. 이거 조심해야겠는걸.”
그런데 다시 한 번 이 구절로 되돌아가봅시다. 과연 내가 이들 구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그런데 왜 하필 성령이란 말인가?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도대체 그 죄가 얼마나 심각하기에 결코 용서받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들 질문에 일말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의 <다락방 강론>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비록 단편적이긴 하지만, 주님께서는 성령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강의하신 바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그 강의가 기억나지 않는다면, ‘바울’ 사도의 다음과 같은 답변이 더 이해가 빠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9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9-11)
우리가 성령님을 “돕는 자” 즉 “보혜사”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즉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의 인격과 활동을 알 수도 없고, 또 믿을 수도 없으므로 용서가 불가능하며 그것을 체험할 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의 이와 같은 도움을 거부하고 거절하는 것이 “성령님을 모독”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모독”과 관련한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성령을 모독하지 말라”는 금기 사항이 아니라, 적극적인 초청의 말씀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는 무제한적이며,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신성모독의 죄도 포함됩니다. 누구든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락방 강론>에서 오직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으로, 오직 그분의 도움에 의해서만, 이 사실을 믿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참고. 요 16).
하지만 만일 누군가 성령마저 모독한다면 오늘날 교회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말도 안 되는 해결책 같습니다만, 그를 저주하며 참형에 처해야 할까? 그를 상대로 집단 테러라도 가해야 할까? <로마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은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 12:18-19)
‘가야바’는 <신명기>(32:25)의 이 구절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알면서도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취사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11. 빌라도의 법정(6): 본디오 빌라도
‘위키’ 백과사전에서 “정치”(政治)를 다음과 같이 정의(定義)하고 있습니다:
정치(政治)에서 “정”(政)은 바르다의 “正”(정)과 “일을 하다” 또는 “회초리로 치다”는 뜻의 “攵”(등글월문 = 攴)이 합쳐서 이루어진 말이다. 즉, 바르게 하기 위해 일을 하거나 회초리로 치는 것을 뜻한다. “정”(政)은 특히 자신의 부조화(不調和)로운 면을 다스려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는 물(氵= 水)과 건축물(台 태)이 합하여 이루어진 말이다. 이것은 물(水)의 넘침에 의한 피해를 잘 수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는 특히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부 조화로운 면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치”(政治)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로운 것,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아 극복하는 일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정치”란 상당히 고상하고, 아름답고, 훌륭한 일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이 단어를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를 그리는데 사용해 왔습니다. 예컨대, “정치적인 사람”하면 아주 술수나 음모에 능하고, 속이기를 잘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남을 예사롭게 이용하는 사람 정도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게 봐준다 해도, 정치인이란 기껏해야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정도가 고작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경우 신뢰도 평가에서 항상 가장 꼴찌를 차지하는 기관과 집단이 국회와 정치인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이처럼 정치에 대해서 낮은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영어권에서도 “정치인”(politician)과 “정치가”(statesman)를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정치인”이란 앞에서 말한 그대로 오직 자신과 그가 속한 당(黨)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으로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작은 정치를 하는 소인배(小人輩)라고 해야겠지요.
반면 “정치가”는 정치에 관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으로서, 나라의 중요하면서도 큰일들을 탁월한 능력과, 통찰력과 선견지명을 가지고 수행해 갑니다. 그리고 그 내면의 동기도 이타적이고, 애국심에 불타며, 헌신과 희생정신이 투철합니다. 아주 큰 정치를 하는 대인배(大人輩)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와 같은 정치가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었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만.
가이사의 친구. 제 5대 유대총독(재직 26-36년)으로 지낸 ‘빌라도’(Pontius Pilatus)는 과연 어떤 부류에 속할까? <사도신경>에 자신의 이름이 등장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사람들 입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린 로마인이 되어버린 ‘빌라도’.그를 정치인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정치가라 해야 할까?
그의 인격적 단면에 대해서는 앞선 설교에서 한 차례 소개한 바 있습니다. 총독 취임 시 로마 황제를 그린 군기(軍旗)를 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거나, ‘예루살렘’ 시의 수로(水路)를 건설하기 위하여 성전(聖殿) 금고에서 자금을 유용하고, 이에 항의하는 민중을 학살하는 등, ‘유대’인들을 경멸하고 무시했다는 정도입니다.
이런 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은 있었습니다. 그의 최대 관심사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겠습니다만, 그의 최대 관심사는 “황제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황제가 그를 이 자리에 앉혀준 임명권자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그 황제의 이름은 ‘티베리우스’(본명: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Tiberius Claudius Nero)입니다. 그는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Octavian, 재위BC 27-AD 14)의 뒤를 이어 로마제국의 두 번째 황제가 된 인물입니다(재위 AD 14∼37). 그는 본래 야망이 넘치는 여인 ‘리비아 드루실라’(Livia Drusilla, BC 58~AD 29)와 ‘카이사르’의 함대사령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Tiberius Claudis Nero)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리비아’가 그를 임신했을 당시 달걀을 품에 안고 다녔는데 며칠 후 멋진 숫병아리가 나왔고, 그로 인해 뱃속에 있는 아이는 로마의 왕이 되리라는 점괘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카이사르(Caesar, Gaius Julius BC 100-BC 44)의 암살 사건에 연루된 가족들과 함께 도피생활을 해야 했으나, 훗날 그의 어머니가 친아버지와 이혼하고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함에 따라 그는 황제의 양아들이 되었으며, 그가 죽자 원로원에 의해 제 2대 황제로 등극합니다. 서기 26년에는 근위병 ‘세야누스’(Sejanus)에게 권력의 많은 부분을 위임하고 로마를 떠나 ‘카프리’(Capri) 섬에서 은둔 생활을 즐깁니다. 하지만 ‘세야누스’의 역모가 밝혀지자 그를 교수형에 처한다. 그리고 서기 37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입니다. 그는 제 1대 황제의 정책을 대체적으로 답습하면서, 사치와 향락을 억제하여 빈민들을 위한 구제에도 힘썼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려했던 수많은 칭호와 명예를 사양하고 자신에 대한 비난연설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등 공화정과 민주원리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정책들로 국가 재정을 풍요롭게 했다. 하지만 반대자에 대한 잔인한 처벌과 제거, 궁정음모, 측근 ‘세야누스’의 권력남용, ‘카프리’섬 은둔 기간에 나돌던 좋지 않은 소문 등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가 이 호칭에 그토록 집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아무나 “황제의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상류층 지도급 인사들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영예(榮譽)였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원로원 의원들이나 특별히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 이 호칭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어떻게 이 호칭을 얻을 수 있었을까? 당시 ‘티베리우스’ 황제의 근위대장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야누스’(Aelius Sejanus)와의 친분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당시 ‘세야누스’와 가까운 자라면 누구나 “황제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누리던 영예는 얻었다기보다는 돈으로 샀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돈이나 연줄을 이용해서 그토록 원하던 영예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계속 지키고 싶겠지요. 특히나 임명권자가 ‘티베리우스’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이 황제는 변덕스럽기로 악명 높은 자, 누구든 자기의 지위를 위협하는 자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그 대가를 치르도록 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 하는 아닌 게 아니라,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근위대장 ‘세야누스’는 역모(逆謀)에 연루되어 교수형에 처해졌고, 이 때 그를 따르던 많은 지지자들도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당연히 ‘빌라도’에게 황제의 신임을 잃는 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참칭(僭稱)하는 한 ‘유대’인 피의자가 나타나 새로운 두려움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그를 1차 신문해 본 결과 정치적으로 로마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은 섰습니다(참고. 18:38; 19:4; 6). 그런데 그의 태도가 영 부담스러웠습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근거 없는 비난이나 혐의에 대해서 아주 당당하고, 그러면서도 고요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 때문입니다. 적어도 ‘유대’ 땅에서 최고의 권력자인 자기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섰던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다루어본 적이 없었던 이 같은 피의자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했다 하니, 갑자기 “더 큰” 두려움이 엄습해 온 것입니다(8절). “더 큰” 두려움이라 함은 그가 정말 “신의 화신”(化身)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할 수 있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었던 터라, 만일 그렇다면 그를 잘못 다루었다가 신의 보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예컨대, ‘바나바’를 대동한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한 앉은뱅이를 치료하여 걷게 하자, 그곳 주민들은 ‘바울’ 일행을 가리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온 것이라며 놀라 경배하려 했던 에피소드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행 14:11).
‘빌라도’ 역시 이 사람이 신의 화신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두려움을 해소(解消)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예수님의 출신지역이 어디냐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인간인지 또는 정말 하늘로부터 온 자인지 묻고 있습니다(참고. 9절상).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부답입니다. 부질없다고 생각하셨겠지요. 그 이유는 첫 대면에서 ‘빌라도’가 보여준 반응 때문일 것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빌라도’가 예수님의 기원(起源)에 대하여 들려준들 무슨 새로운 반응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진리에 대하여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던 자가 아닙니까(18:38)? ‘빌라도’의 이와 같은 태도 때문에 “희롱하는 빌라도”라는 어구(語句)가 탄생되기도 했습니다. 즉 확고한 신념이나 도덕적 중심이 없는 정치인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물며 지금 ‘빌라도’의 의도가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일진대, 새로운 계시에 눈을 뜰 일말의 희망조차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만이 예수님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그가 알 리가 없습니다.
이제 다급해진 쪽은 피의자가 아니라 재판관입니다. 내심 두렵고 불안해지는 자신을 숨기려 허세를 부려봅니다: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0절). 요즈음 식으로 표현하자면,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황제의 친구야”입니다. 피의자에 대한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빌라도’는 몰랐습니다. 자신의 이 발언이 자기를 올무에 빠지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가 그토록 뽐내고, 자랑하며, 지키고 싶어 했던 그 지위와 영예가 결국 자신의 최대 약점이 될 것이라는 점을 몰랐던 것이지요. 정치인의 최대 약점은 무엇일까?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특권입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정치 평론가가 김정은이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 이유인 즉은 그가 가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독재자의 최대 약점은 그가 누리는 절대권력 그 자체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하겠습니다.
정치인 가야바. 노회(老獪)한 ‘가야바’가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현재 누리고 있는 영예로운 대제사장 직을 어떻게 거머쥐게 되었는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장인 ‘안나스’의 자금력과 정치력 덕분입니다. ‘유대’ 국가가 로마 속국이 된 이후부터 대제사장 자리는 부패와 비리의 상징이 되어버렸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 지역 로마 총독에게 가장 충성스럽고, 가장 아첨을 잘하며, 가장 높은 금액을 제시하는 자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임명된 대제사장은 로마의 충성스러운 협력자로서, 로마의 안위와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야바’는 ‘유대’에서 ‘빌라도’ 버금가는 정치인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자기 뜻을 어기고 예수를 풀어주겠다니!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무리들을 선동하여 ‘빌라도’의 약점을 파고듭니다. 즉 예수를 방면(放免)하면 “가이사의 친구”가 아니라 ‘가이사’의 적이 될 것이라고 위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특기를 최대한으로 살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빌라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황제의 신임을 잃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반역의 땅 ‘유대’에서 혁명을 꿈꾸는 한 왕을 ‘빌라도’가 도와주었다는 소문을 황제가 알게라도 된다면 ‘빌라도’가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친구 근위대장 ‘세야누스’가 역모(逆謀)로 중앙 권력 무대에서 사라진 지금, ‘빌라도’는 자신의 안위(安危)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있으며, 정치 십 단(段)인 ‘가야바’가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함정에 스스로 갇히는 신세가 될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가야바’가 로마 총독을 이처럼 난감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역의 땅 ‘유대’에서 치안의 책임을 맡은 최고 책임자가 그의 임명권자인 황제에 불충(不忠)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니 말입니다. 그것도 ‘유대’ 땅에서 말입니다. ‘유대’가 어떤 곳입니까? 로마에 대한 증오와 저항이 제국(帝國) 내 어느 지역보다 더 극열한 곳에서, 로마의 총독이 로마에 불충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니 말입니다! ‘빌라도’는 치욕으로 온 몸을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유대의 왕”보다 자신의 신변을 더 염려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황제의 친구”에 그토록 집착했건만, 이제 보니 한 번도 황제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가 진정 “황제의 친구”였다면, 그것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었을 터이니 말입니다.
이점 ‘가야바’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요? 그는 왜 그토록 예수님을 제거하기를 원했을까? 하나님의 아들로 자칭하는 이 자가 그의 지위를 위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가 누리고 있던 종교적 특권과 지위를 잃어버릴까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결국 ‘가야바’ 역시 진정으로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에 비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들은 나의 친구라”고 먼저 말씀하신 것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지 모르겠습니다(참고. 요 15:14-15). 내가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려고 안달할 필요조차 없다는 의미일 테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빌라도’와 ‘가야바’는 진정 예수님의 친구가 될 기회가 없었을까? ‘빌라도’만 하더라도 예수님이 로마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전혀 죄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하게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살리고 싶은 의지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래서 그를 살리기 위해서 이런저런 행동도 취해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가 그토록 예수님을 살리려 했으면서도,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몬 그의 행위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의 편에서 설명하자면,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작 큰 두려움은 우습게 여기고 작은 두려움에 자신을 내주었습니다. 작은 두려움이란 “황제의 친구” 자리를 놓치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 ‘가야바’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예수님을 살려주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큰 두려움이란 “그리스도의 친구” 자리를 놓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그러나 현실에서 누가 ‘빌라도’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도 ‘가야바’의 편에 섰거나, 또는 ‘빌라도’의 처신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갑”(甲)의 위치에 있다 싶으면 소위 “갑질”을 했을 것이고, “을”(乙)의 위치에 있다 싶으면 ‘가야바’처럼 사람들을 선동해서 “갑”을 마녀사냥 하듯 했을 것입니다. 결국 나는 ‘빌라도’이기도 하고 동시에 ‘가야바’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요한’ 화자 자신도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있는 다성성(다聲性)을 이 두 등장인물에 투영시켰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바라바’든, ‘빌라도’든, ‘가야바’든, 무리든,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을 친구로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유는 이들이 그분의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무슨 악한 생각과 계획을 세우든, 그 악한 계획조차도 그분의 섭리를 위한 재료로 활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빌라도’와 ‘가야바’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없다는 점만큼은 알아두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그 사실을 ‘빌라도’에게 확인시켜주고 계십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참고. 11절상). 하나님의 신비가 정말 크고 놀라울 뿐입니다!
12. 빌라도의 법정(7): “Ibis ad crucem!”
오늘날 세계적으로 사형(死刑)이 반인륜적이라 하여 많은 국가에서 중단하였거나, 시행을 장기간 유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만, 소위 문명국가로 불리는 미국에서조차 여전히 사형이 집행되고 있습니다. 사형 방법으로는 총살형(銃殺刑), 교수형(絞首刑), 독가스 형 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로 거슬러 올라 갈수록 형의 방법이 보다 잔혹하고 끔찍합니다. 아주 야만적이었던 거죠. 참수형(斬首刑)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는 죄수의 목을 잘라 죽이는 것을 말하는데,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단두대(斷頭臺)를 사용했고, 조선시대에는 망나니가 그 일을 맡아했습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로마시대에는 십자가형을 들 수 있습니다. 십자가형의 잔혹성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만, 당시 로마인들이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ay)의 설명을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십자가형에 대해서는 로마인들조차 공포로 몸을 떨 정도였다. ‘키케로’는 십자가형을 가장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죽음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타키투스’는 그 같은 형벌을 비열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형벌은 원래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사람들은 땅을 신성한 것으로 여겨 악인이 죽어 땅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으며, 대신 십자가에 매달려 죽도록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체는 독수리나 까마귀 떼들이 와서 파먹도록 했다. ‘카르타고’고 이 제도를 도입했고, 로마는 이들로부터 이 처형 방법을 배웠다.
그러나 십자가 처형은 로마 본토에서는 결코 시행되지도 않았고, 지방 속지(屬地)에서 그것도 노예에 한해서 시행되었다. 로마인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키케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로마 시민을 구속하는 것은 범죄 행위이며, 그를 때리는 행위는 더욱 심각한 범죄이다. 더 나아가 그를 죽이는 행위는 거의 존속 살인에 가까운 짓이거늘, 그를 십자가에 매단다고 한다면 내가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처럼 잔혹한 행위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범죄 행위이다.” 이처럼 십자가 형벌은 고대 사회에서 가장 두렵고 끔찍한 것으로서, 노예나 범죄자에게나 해당되는 형벌을 예수께서 받으시고 돌아가신 것이다.
역사적 순간. 예수님은 노예도 아니었고, 범죄자도 아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고(18:38; 19:4, 6), 그를 풀어주고 싶어 했으며, 실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재판을 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立地)마저 위협받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최후 선고만 남은 셈입니다. 마침내 그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의 결정을 선포합니다: “Ibis ad crucem!”(“너를 십자가형에 처하노라”).
그런데 <성경>은 왜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장면을 생략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분명 자신의 최종 판결을 군중들 앞에서 선포했을 텐데 말입니다. 영화에서 때로 일부 장면들을 무성(無聲)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 장면의 극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요한’ 화자도 같은 효과를 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무리의 함성에 파묻혀 ‘빌라도’의 선고가 아예 들리지도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지못해 쫓기다시피 판결을 내리고 있는 재판관과 그를 둘러싼 ‘유대’ 무리들이 주먹을 내지르며 즐거워 환호(歡呼)하는 모습을 무성으로 처리함으로써, 관객들의 분노를 이끌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아닌 게 아니라, 이어지는 화자의 해설을 보면 그 역시 자칭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조롱과 분노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요한’ 화자는 자신의 분노를 ‘빌라도’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빌라도’의 심정은 지금 어떤 것일까? ‘가야바’를 위시한 일단의 ‘유대’ 지도자들에게 철저한 패배의 수모(受侮)를 맛보았으니 말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모독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 수만은 없습니다. 받은 모독을 되돌려주어야겠지요. 그가 어떤 복수를 꾸미고 있을까?
그는 이 역사적 장면을 먼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돌을 깐 뜰(gabbaqa,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있더라”(13절). ‘빌라도’가 모든 사람들(‘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포함한)이 보는 앞에서 위엄과 격식을 갖추어 재판 석에 앉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재판이 법적인 권위를 갖춘 공개적인 재판이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겠지요. 뭐 이런 의도일까요? 즉 하나님의 백성이 만인들이 보는 앞에서 이방인 재판관을 억지로 떠밀어, 그들의 왕을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최종 선고가 내려지던 시와 때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14절상). ‘유대’인들은 이 시각에(정오) 모든 일을 멈추고 집에서 무교병을 꺼내고, 양(羊)을 도살(屠殺)하여, 사실상의 유월절 행사를 시작합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이 날은 목요일 오전입니다. 알다시피 이날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출애굽”의 엄청난 은혜를 목도하고 체험했던 날이기도 합니다.
그 때 이들 조상은 무교병을 만들고,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후, ‘야훼’ 하나님 즉 “유대의 왕”이 이집트의 왕 ‘바로’를 이기고 자신들을 구원해주는 체험을 했습니다. 바로 그 시각에 지금 이들 후손들도 하나님의 어린 양을 유월절 제물로 바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얄궂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이 날은 두 번째 “출애굽” 사건이 될 것이었습니다(이번에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빌라도’의 마지막 반격이 압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회심의 일격(一擊)을 가하고 있는 것이지요: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14절하). 그의 선언은 조롱과 멸시로 가득 차 있습니다. 뭐 이런 심사겠지요: “보라, 너의 왕이라고 하는 자를. 이 자가 너희 왕이라고? 이 별 볼일 없이 생긴 이 자가?”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기막힌 복음의 아이러니를 보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출애굽”을 성사시켜줄 “유대의 왕”은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고 죽이기를 원하는 예수입니다. 그는 지금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수가 “유대의 왕”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재판관이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 선언은 실은 ‘요한’ 화자의 고발이면서, 책 전체를 흐르는 주제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아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15 절상).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이렇게 날려버립니다. 이전보다 더 격렬하고 단호한 태도로 말입니다. ‘빌라도’는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15절중).
무슨 다른 반응을 기대하고 물었을까요? 행여나 그들의 마음이 돌아설까 하고 말이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책임 소재에 관한 한 대못을 박자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를 죽게 한 장본인은 바로 너희 ‘유대’인들이야!” 하지만 ‘유대’인들의 태도는 요지부동(搖之不動)입니다. 이전보다 더욱 큰 소리로 외쳐댑니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5절하). 화자는 대제사장들이 그렇게 외쳤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대답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이 선언은 직전에 ‘빌라도’가 그들에게, “보라 너희 왕이로다”고 선언한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들의 반응이 왜 의미심장한 것일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대제사장 이스라엘은 지금 단순히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었던 “메시아 대망” 자체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짐짓 ‘가이사’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척하면서, 자신들이 수 천 년 동안을 그토록 고대해오던 “하나님의 왕국”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은 나라요 민족으로 자처해 왔습니다.
도대체 예수가 얼마나 미웠으면 그들이 그토록 미워하던 로마의 ‘가이사’가 그들의 왕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예수를 얼마나 혐오했으면 자신의 정체성마저 부인하고 싶은 것일까? 우리는 지금 종교인, 특히 소위 하나님의 종(從)으로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사악한 짓을 할 수 있는지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역사.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철학자 ‘헤겔’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점은 우리가 도무지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도서>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전 1:9).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원래 신정국가(神政國家)로 출발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왕으로 직접 통치하는 나라였습니다. ‘모세’나, 사사(師事)나, 선지자들은 왕의 대변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유익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지자 ‘사무엘’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주변 국가들을 돌아보니 모두 왕들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국가들이 더 강력해 보였고, 더 효율적으로 보였으며, 더 멋있게 보였을까요? ‘사무엘’에게 마침내 자신들도 왕을 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삼상 8:6). ‘사무엘’은 백성이 자기를 싫어하는 줄 알고 이를 불쾌하게 여겨 하나님에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이미 오래 전에도 “우리에게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라고 외쳐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디 이스라엘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시편>은 이것이 인류 공통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고 가릴 것 없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시 2:1-3).
‘시날’ 평지에서 있었던 ‘바벨’탑의 반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흩어지는 대신에 한데 모여 이렇게 외쳐댑니다: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이 사람들 왜 이러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과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겠다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만큼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왜 ‘가야바’는 ‘가이사’를 섬겼으면 섬겼지, ‘야훼’ 하나님은 섬길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이들 모두가 한 가지 동기(動機)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가졌던 그 동기입니다. 뱀이 그에게 심어주었던 그 동기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그 동기란 하나님의 통제와 지배를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입니다. 하나님만이 누리고 있는 그 자유를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자율(自律)과 독립을 원하는 것입니다. 과연 ‘아담’은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선과 악이 무엇인지는 알게 되었으나, 그것을 통제할 능력은 갖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자유와 자율을 얻었으나 그 대가는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 구호는 미국독립전쟁 당시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 의원이었던 ‘패트릭 헨리’(P. Henry; 1736-1799)가 총회에서의 연설의 마지막 대목에 있는 것이라 합니다.
죽음마저 지배할 그 자유는 갖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자신들의 왕을 갖게 된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가야바’가 하나님 아들 대신에 ‘가이사’를 선택한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호세아>가 일찍이 예언했던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호 3:4). 그 결과란 이스라엘이 태초의 그 어둠과 혼돈과 공허 속에 지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모두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스스로의 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교회든, 외부로부터 통제가 필요합니다. 대개의 민주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삼권분립의 원칙이 그 예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힘을 가진 자가 멋대로 날뜁니다. 독재자가 나타납니다. ‘가이사’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가이사’는 자신이 하나님 행세를 합니다. 김정은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지배를 벗어나려 하다가 역설적으로 ‘가이사’의 지배를 받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요한’ 화자는 이곳에서 일부러 애매모호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즉 사실이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준 것처럼 서술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의 해학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빌라도’와 ‘가야바’는 ‘가이사’의 친구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그러한 ‘가아뱌’에게 “유대의 왕”을 내주었습니다. 마치 “이 사람이야말로 네가 진정으로 섬겨야 할 왕이야”라고 훈계라도 하듯 말입니다. 이 같은 일은 오늘에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세상은 제발 교인답게 살라고 오히려 걱정해줍니다.
나의 왕은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의 지배와 통제를 받고 있습니까? 왕의 지배를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는지, 아니면 자율을 찾아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는지 자문(自問)해 볼 일입니다.
13. 십자가(1): 골고다로 가는 길
채무 보증을 섰다가 그 빚을 떠안아 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 것입니다. 나도 한 친척의 은행 빚 보증을 섰다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월급이 차압당하고, 재산 차압을 하겠다는 내용의 법무부 장관 소인이 찍힌 두툼한 편지가 우리 집으로 날아들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남 보기에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정년퇴직이 되어서야 겨우 청산을 다 했습니다만, 지나놓고 보면 정말 억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는 것이지요.
연대 빚보증은 우리의 오랜 문화와 관습이 낳은 정말 말도 안 되는 후진적인 제도였습니다. 지금은 법으로 천만 원인가 하는 액수 이상은 보증을 못하도록 정해놓았다고 합디다만, 그동안 이 제도로 가정 파탄이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은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얼마나 많았습니까! 정말 억울한 노릇이 아닙니까? 남이 진 빚을 내가 값아 주어야 하다니 말입니다. 그런대도 은행이나 사채업을 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작 빚보증을 서주는 본인조차도 이 말도 안 되는 제도를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아무도 이래서는 안 된다 하며 전 사회가 반대하고 나서지 않았는지 참 궁금합니다. 정작 빚을 진 당사자야 보증인 덕분에 책임을 면할 수 있게 되어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책임을 아는 자라면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이 아닙니까? 자존심을 상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특히 自意識이 강한 사람이라면 누군가 내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고 하면 참 견디기 어려운 노릇일 것입니다. 철없는 어린 아이나, 무슨 거지 건성이 몸에 밴 자가 아니라면,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에 대해서 창피하게 여길 줄을 압니다. 그것도 큰 재산상의 피해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채무가 돈이 아니라, 예컨대, 군대 생활을 대신 해주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그게 아니라면 내가 군대 가 있는 동안 내 처자식 책임을 져 주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아니면 내 부모님의 아들 노릇 좀 해달라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이 모두 말도 안 되는 요구라고 코웃음 칠 게 뻔합니다.
그게 우리의 상식이자 자존심입니다. 부탁하는 쪽이나 부탁을 받는 쪽이나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이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죄(罪)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즉 감옥 형(刑)을 선고받은 사람이 자기 대신 가서 옥살이를 해달라고 요청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게 가능하기라도 하겠습니까? 만에 하나 누군가 바보 천치 같은 자가 그렇게 해주겠다고 나선다 해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건 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소위 대속(代贖), 즉 다른 사람의 죄를 자기 것으로 삼아, 대신 옥살이를 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시몬의 십자가. 그런데 여기 빚보증을 섰다 대신 갚아준 사람만큼이나 억울해 할 사람이 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바로 그입니다. <공관복음>은 그가 시골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마, 27:32; 막 15:21; 눅 23:26). 지방에 있다 유월절을 지내려고 온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들 세 <복음서> 모두, 이 사람이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너무 힘들고 지쳐 있으니, 로마 병정들이 대신 근처에 있는 그를 불러다 지고 가게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죄인도 아닌 사람이 죄인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으니 정말 황당하고 기가 찰 노릇이 아닙니까? 그냥 구경 차,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곤욕을 치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는 비유하자면 마치 고속도로를 주행하다 마주 오는 차선에서 난 교통사고를 구경하다 내가 사고를 당한 것보다 더 재수 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대신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지 이 같은 치욕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늘날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예수님 십자가를 지고 가는 퍼포먼스(performance)를 하기도 합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연기일 뿐입니다. 하등 부끄러워하거나 억울해 할 일이 아닌 것이지요.
하지만 ‘시몬’은 연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 그 일을 행해야 했습니다. 내가 만일 ‘시몬’이었다면 ‘골고다’로 가는 내내 불평과 원성을 쏟아냈을 것입니다. 정말 재수 없는 날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예수가 아니라, 이 사람 ‘시몬’이 대역(大逆) 죄인인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관광객 중 아무도 ‘시몬’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져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골고다’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날 ‘시몬’에게 그 길은 정말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런데 말입니다. 누군가 실제 그 짓을 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도 안 되는 짓을 말입니다! 당연히 믿을 수 없습니다. 당장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자체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누군가 내 죄를 대속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기 어렵습니다. 너무 좋아서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좋은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죄를 대속했다”는 그 좋은 소식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니까 말이지요. 이건 논리적으로도 말도 안 되지만, 인간에게 아주 수치스러운 소식인 것이에요. 도대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만물의 영장(靈長)인 인간을 어떻게 알았으면 감히 그 따위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이치가 사필귀정(事必歸正)이요, 인과응보(因果應報) 아닙니까? 즉 자신이 행한 일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복음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성경>만 우리의 죄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유난을 떨지, 웬만한 종교에서는 인간을 죄인 취급하는 자체를 죄악시하기까지 합니다. 예컨대, 힌두교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한 힌두교 스승이 행한 연설을 소개하면서 이점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힌두는 여러분을 죄인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고, 불멸의 행복에 참여한 사람들이며, 거룩하고 완전한 존재들입니다. 땅 위의 여러분, 신들이 죄인이라고요?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주장합니다. 즉 만일 인간이 범죄한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주장입니까! 인간의 존엄에 대한 대 헌장(憲章)으로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이 주장은 우리의 자존감을 한껏 높여주는 권리장전과도 같은 것입니다. 빚을 졌으면 본인이 갚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 이것은 인간 본연의 권리이자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일이 아닙니까! 중보자가 내 대신 책임을 질 이유도 필요도 없으며,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신세를 입은 것이 없으니, 내가 굽실거릴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정말 대속을 치욕스럽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정말 현실에서 “대속의 유혹”을 전혀 느끼지 않고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정말 나의 잘못이나, 불행이나, 또는 고통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전가시키거나 환경의 탓으로 돌리려 한 적이 없었다는 말인가? ‘아담’이나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그리고 ‘하와’는 뱀이 자신을 대속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나 역시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면, 최소한 환경만이라도 나를 대속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습니까? 사실 나는 끊임없이 대속의 제물(祭物)을 찾기에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최근의 사례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얼마 전 문창극 장로라는 분이 한 교회에서 행한 강연을 두고 홍역을 치른 적이 있었습니다. 일제(日帝) 강점 36년의 원인이 조선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인데, 언론은 그의 강연의 일부만을 발췌하여 그를 친일(親日) 식민사관(植民史觀)을 가진 자로 매도해 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총리 후보에서 낙마(落馬)했습니다. 어찌 되었건 대한민국 사람의 절대 다수는 조선의 멸망의 원인을 조선의 책임이 아닌, 일제의 책임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일제를 대속 제물로 삼고 싶어 하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오늘날에도 나라에 무슨 일이 터지면, 크든 작든 국민들은 대통령부터 먼저 찾습니다. 그가 그 시각에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보입니다. 만일 그 시각에 그가 다른 장소에서 무슨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면, 금방 비난과 원망이 쏟아집니다. 이 국민이 대통령을 무슨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 알아서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희생양이 필요할 뿐입니다. 자신의 불만을 잠재워 줄 대속의 희생양 말입니다. 대통령을 희생양으로 삼는 다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가 갑니다만, 진짜 양을 대속 제물로 삼는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일 것입니다. 짐승이 사람의 죄를 대신하는 것도 그렇고, 또 양이 무슨 죄입니까? 그런데 알다시피 이 말도 안 되는 희생 양 제도의 원조(元祖)는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왜 하나님이? 물론 대속은 “구원”(救援)이라는 전체 그림의 한 부분에 불과하지만, 대속 하나만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의 대속의 행위는 그분 스스로 그 모든 잘못된 것에 대하여 궁극적인 책임을 지시겠다는 결단의 표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영원한 대속 제물로 내놓으신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고 더 이상의 대속 제물이, 더 이상의 희생 제사가 필요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끊임없이 핑계 거리를 만드는 그 수고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건 말도 안 돼!” 하며 여전히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안식을 누릴 것인가?
어느 쪽을 택하든 나의 자유에 속하겠습니다만, 그전에 반드시 물어보아야 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처럼 어리석고, 비이성적이며, 무모한 일을 한 것일까? 심술궂게도 나를 그분 앞에 발가벗겨 수치스럽게 만들고자 함이었을까?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알다시피 ‘아담’은 그가 한 일을 깨닫고서는 부끄럽게 여겨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나무 뒤에 숨지 않았습니까(참고. 창 3:7-8).
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왜 그랬는가?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의 유명한 책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참으로 통찰력 넘치는 답변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궁극적인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십자가 에피소드의 그 모든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기획에서부터 제작과 연출 및 출연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하지만 기획이나 제작 그리고 연출까지는 좋은데, 출연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것도 주연으로 말입니다.
옛날 이 땅의 임금님들은 나라에 가뭄이 들면 자신이 부덕(不德)해서 그렇다며, 죄수의 복장을 하고 기우제(祈雨祭)를 드렸다고 합니다. 가뭄이 왜 자기 탓이겠습니까?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백성과 하나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만하면 그는 악한 왕이 아니라 선한 왕임은 분명합니다. 왕이 기우제를 드린다고 해서 하늘이 무슨 감동을 받겠습니까만, 백성의 마음은 그게 아닙니다. 크게 감동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 나라님이 우리를 이처럼 극진히 생각하고 계시는구나. 우리의 근심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시는구나.”
가장(家長)은 자신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가족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나의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통감하고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면, ‘베드로’처럼 당황하여 “어찌 주님께서 나의 발을 씻기려 하십니까?” 하며 거부하는 것이 그나마 체면을 지키는 일일까? 아니면 염치 불구하고 때 묻은 발을 내놓아야 할까? 어느 쪽이 그분의 위험한 도박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일까?
14. 십자가(2): 다른 두 사람
‘골고다’를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은 예수님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그날 처형을 당하는 다른 두 사람도 있었다고 네 <복음서>가 공(共)히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이들 역시 그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이들 또한 그랬습니다. 비록 ‘요한 ’은 이들의 신분에 대해서 언급을 자제하고 있습니다만, ‘마가’는 이들이 도둑이라고 밝히고 있고(참고. 막 15:27), ‘누가’는 이들을 행악자로 부르고 있습니다(눅 23:32). 아마도 이들은 ‘바라바’와 함께 당시 자유와 해방 운동을 벌이던 혁명 전사(戰士)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십자가에 달린 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어떤 심정으로 매달려 있을까? 혁명 투사답게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 만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고통으로 얼굴은 일그러진 채, 로마 당국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자신의 조국 ‘유대’와 하나님에 대해서까지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고 있지나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조국 해방을 위한 우리의 의로운 투쟁에 조국과 하나님이 왜 함께 하지 않느냐면서 말입니다. 대개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태도가 이렇습니다. 이럴 때 누군가 좀 알아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런데 사람들은 이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모두의 관심은 온통 예수님에게로만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향하여 온갖 조롱과 저주를 쏟아내기에 바쁩니다: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 지어다”(눅 23:35);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 지어다”(막 23:35).
이러자 이들 도둑들도 자신들의 처지를 잠시 잊은 것 같습니다. 군중과 합세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욕설을 해대기 시작합니다(마 27:44). 자신들의 분노를 이분에게 쏟아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는 이중 한 사람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눅 23:39). 지금 이 사람, 갑과 을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습니다. 사정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명령을 하다니요! 뭐 이런 식입니다: “나를 구원할 수 있으면 한 번 해 보든지.”
사실 우리는 갑과 을의 관계가 뒤바뀐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대도 많은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도움을 주려는 자가 안타까워하고 있고, 도움을 받아야 할 자가 이 도둑처럼 도움을 우습게 여기는 세상 말입니다. 좋은 소식을 듣는 자의 반응이 대부분 이렇습니다. “나를 한 번 설득해 보라”든지, “나는 스스로 잘 알아서 하고 있으니 그런 거 필요 없다”든지, “지금은 그러니 나중에 한 번 생각해 보자”는 등의 반응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반응이야 말로 전형적으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될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도둑은 필경 구원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원망과 분노로 인생을 마감했을 것으로 믿습니다. 바로 그 시각, 바로 자기 곁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함께 달려있는 혁명의 동지에게 말이지요. 이 사람의 반응을 한 번 봅시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눅 23:40-42).
도대체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이처럼 완벽하게 가질 수 있었을까요? 마치 “구원문답” 책을 암송(暗誦)이라도 하듯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료 친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입은 자가 이처럼 신속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과연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인식하게 된 것일까요?
평소 <성경> 공부라도 열심히 해두었던 것일까? 평소에 경건 훈련을 열심히 했던 것일까? 예수님의 이름을 이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일까? <고린도전서>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그렇습니다. 그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홀연히 성령님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왜 그날 그에게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왜 두 사람 모두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일어난 결과와 현상만 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바람의 소리는 들을 수 있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참고. 요 3:8).
이 같은 기적은 나중에 로마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에게도 일어났습니다. 대 사도 ‘베드로’가 그의 집에 들어와 설교를 하고 있는 중에, 성령께서 ‘고넬료’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사람에게 홀연히 내려오셨습니다(행 10:44). 그들이 설교에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헌신하며 침례를 받은 후가 아니었습니다. 설교 도중에 그냥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하던 ‘베드로’가 오히려 깜짝 놀라, 그들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은 줄로 알고 어찌 이들에게 침례를 금할 수 있겠느냐며 침례를 베풉니다(행 10: 47).
‘고넬료’의 경우보다 더 극적인 일이 지금 십자가에서 이 무명(無名)의 악한(惡漢)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예수님이나 침례 ‘요한’을 제외하고는 <신약>에서 성령 세례를 받은 첫 번째 ‘유대’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행악자의 신분으로서 말입니다. 평생을 악한으로 살아왔지만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예수님에게 구원을 간청했을 뿐인데,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바로 이 순간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처럼 황홀한 기분, 이처럼 말할 수 없는 평안과 해방감을 일찍이 느껴본 적이 있었을까? 이제 그는 잔뜩 기대에 부푼 채로, 그 낙원을 상상하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을 것 같습니다: “사망아, 너희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지만 이건 너무 공평하지 못한 처사가 아닙니까? 평생 제 마음대로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어찌 재수가 좋아 엄청난 횡재를 누리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정말 행운아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횡재를 얻자 말자 바로 죽어, 구원 이후의 힘든 삶을 거칠 필요도 없었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었으면서도, 하루하루를 고통 가운데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 땅의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뭐라 말입니까? 아버지 곁에서 묵묵하게 살아온 큰 아들이 받을 수 있는 보상이나 선물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허랑방탕 제멋대로 살다가 돌아온 작은아들만 반갑게 맞아주는 아버지를 과연 공평하다 할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억세게 재수 좋은 행운아라 하는 그가 구원을 받자말자 곧바로 죽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그동안 너무 작은 하나님을 내 속에 가두어 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이 나에게 오신 것은 나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참고. 요 10:10). 그 풍성한 삶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인생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길이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자 말자 죽은 아이를 행운아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죽은 사람을 행운아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한 죽음을 놓고 안타깝다거나, 아깝다고 말할지언정 정말 잘 된 일이라고 축하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 고해(苦海)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인식은 그것이 어떻게 전개될지라도, 살아볼 가치가 있는 참으로 신비한 그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삶이 너무 힘들어 가끔 자살로 일찍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많지만, 우리 대부분은 아무리 힘들어도 살고 싶어 하지 죽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태어나자 말자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 사람을 행운아라 부러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를 행운아라 하는 것은 그가 그나마 마지막 행운의 열차에 기적적으로 올라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는 곁에 함께 매달린 친구처럼 그냥 그렇게 살다가 허무하게 죽을 뻔했습니다. 단순히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는 이전보다 더욱 괴롭고 힘든 삶을 살아가야 했을 운명이었습니다. 그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누가’는 어느 한 부자와 거지 ‘나자로’ 이야기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참고. 눅 16:19-31). 이런 점에서 그는 정말 행운아였습니다.
이날 이 사람은 두 번의 기적을 체험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한 번은 그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 그에게 찾아온 첫 번째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성령께서 그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 보혜사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구원을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았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렀습니다”(참고. 사 55:6). 그리고 주께서는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사 49:8)고 응답하셨습니다.
그 때가 진정 구원의 때였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 은혜 되기 위해서는 함께 있던 나머지 한 도적도 구해주셨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왜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그냥 버려두셨을까? 누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가 있을까요?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15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5-16, 18)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그분의 절대 주권을 그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리요”(롬 9:19). 이 항변에 대해서 사도는 논리적인 답변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도 역시 비논리적으로 오히려 꾸짖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0-21).
참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답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논리의 한계로 이 꾸짖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모든 논리나 설교나 설득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음일까? ‘요한’ 화자는 이 두 도적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예 소개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예수님께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서술입니다(18절). 사실 이 주제는 복음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이는 그분의 임재(臨齋) 내지는 현존(現存)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분께서 대답하셨던 그 주제인 것이지요: “나는 야훼니라.”고통받는 이집트에 나타나셔야 할 하나님께서 도무지 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은 이 시점에, 이곳 ‘시내’ 산에도 계신다는 말은 그분의 소위 무소부재(無所不在)를 강조하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선언도 시공을 뛰어넘는 그분의 현존을 의미하는 선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는 <출애굽> 전체의 주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랍비’ 전승에 따르면, 가운데 자리는 항상 가장 중요한 자리로서,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고 상세하게 덧붙임으로써, 그분의 죽음은 결국 예언의 성취였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하).
그러므로 나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며,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는” 길만이 내가 살 길임을 알아야겠습니다.
15. 십자가(3): 팻말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攝理)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분의 신비한 섭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가장 압축적으로 잘 요약해 놓은 한 문장을 <로마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구절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살았던 자신의 지난 시절을 회고하며,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이와 같은 고백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이 같은 고백을 한두 번쯤은 해 보았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바로 이점이 성도(聖徒)로 살아가는 축복이자 특권일 것입니다. 고해(苦海)와도 같은 인생 항로에서 자유와 안식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빌라도’나 ‘가야바’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도 나름대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성취시키는 일에 일조(一助)를 하였으니 분명 할 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칭찬은 몰라도 비난받을 일은 하지 않았다고 우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난할 수 있으리요!” ‘가롯 유다’도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답하고 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참고. 롬 9).
섭리와 운명. 하지만 사도의 이 고백은 성도의 자유방임(自由放任)을 용인하는 면허증은 아닐 것입니다. 자유방임적인 태도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테니 될 일은 결국은 될 것이고, 따라서 어떻게 살든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다”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운명론(運命論)과 혼돈하면 이런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오히려 매 순간 내가 나의 자유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충고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컨대, 그 충고는 다음과 같은 고민을 반영하는 것이라야 하겠습니다: “내 앞에 놓인 여러 가능한 선택들 가운데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것이 될까? 한 치 앞의 일도 알 수 없는 내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여러 가능한 선택”이라 했습니다. 즉 이들 중 어느 것을 택하든 윤리․도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선택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금지하고 있는 선택들에 대해서야 크게 어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는 것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이 같은 어려움은 성도에게 뿐만 아니라, 국가나 기업의 최고 지도자라면 매일처럼 당면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나마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은 소위 “빅 데이터”(big data)에 의존하는 길일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통계에 의존한다는 말인데, 그동안 축적한 통계의 분량이 많고 체계적일수록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예로, 최근 미국에서 IS(이슬람 국가)에 참여하려는 몇몇 청소년을 사전에 체포한 적이 있는데, 이 역시 정부가 “빅 데이터”에 의존한 결과였습니다. 물론 정부가 국민 개개인의 일상사(日常事)를 손바닥 보듯 일일이 파악하고 있는 것이 옳으냐는 별개의 문제이겠습니다만.
“빅 데이터”란 결국 그동안 쌓아놓은 지식과 정보입니다. 탁월한 지도자라면 이 “빅 데이터”를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그의 동물적인 감각(感覺)과 결단력이 더해진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상상(想像)과 열정(熱情)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바리새’인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울’에게는 열정은 있었으나 지식이 없었습니다. 아니, 그에게는 엄청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은 모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지식은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는 그토록 많은 잘못된 지식을 안고 살아왔을까? 상상력이 결여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상상력이 결여되면 유연성(柔軟性)이 떨어집니다. 이럴 경우 지식은 교리(敎理)나 이념(理念)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교리나 이념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경직(硬直)되면 해악을 끼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갖고 있는 보편적 오해 중의 하나는 이 책을 교훈이나 교리문답 모음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로마 카톨릭’ 교회당 앞에 늘 걸려 있는 현수막도 “새 신자 교리 과정”을 소개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성경> 특히 <구약>의 대부분은 교리가 아니라, 이야기와 노래와 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그분의 말씀을 딱딱하게 머리로써만 이해하지 말고, 가슴으로 느끼고 맛보라는 의도일 것입니다. 즉 <성경>을 신학 책이 아니라, 국어책 대하듯 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이야기했더니, 천주교에 오래 몸담아 왔던 노부부께서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주교에서 그렇게 배운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바리새’인 ‘사울’이 <구약>의 지식에 거룩한 상상의 날개를 달았다면,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바울’이 되는 순간, 지식과 열정을 동시에 갖추게 됩니다. <구약>의 “빅 데이터”를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재해석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기적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령님께서는 ‘사울’이 가진 지식에 새로운 빛을 비추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이와 같은 사역을 “조명”(照明; enlightenment)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만일 그에게 <성경>과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면, 이 같은 변화가 가능했을까? <로마서> 8:28의 그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새로운 계시가 마른하늘에서 벼락 치듯 그에게 내려 왔을까? 그에게 계시는 점진적이었습니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은 이럴 때 딱 적합한 말씀 같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즉 “옛날에 배운 것을 복습하고 거기다 새로운 것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공자(孔子)의 이 말씀을 역으로 이해하자면, “옛날에 배운 것이 없으면, 새로운 것을 알 수가 없다”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게 옛것은 <구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는 <성경>입니다. 이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계시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 주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리고 지금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 <성경>을 통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천국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알되 제대로 알아야 하며, 배우되 열정적으로 배워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잊을 만하면 천국 체험 수기나 책들이 나와 많은 신자(信者)들을 열광시킵니다. 자기 혼자만 그렇게 열광하면 될 텐데, 이 같은 책을 전도용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책을 소개하면서 꼭 한 마디 빠뜨리지도 않습니다: “거 봐, 정말 천국은 있는 것이라고”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판 된 적이 있는 유명한 책, <천국에서 돌아온 소년>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 책은 6세 때에 교통사고로 2개월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깨어난 ‘알렉스’라는 소년의 아버지가 쓴 것으로, 그는 이 책으로 상당한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의 아들 ‘알렉스’가 그 책 내용이 거짓이라고 고백하는 바람에 교회와 기독교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책을 베스트셀러에 올린 ‘아마존’이나 ‘뉴욕타임즈’ 등 유력 일간지들 대부분이 참으로 황당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의 존재 자체가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무식하거나, 유식하더라도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탓이 아닐까요?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해서도 선(善)을 이루시는 것일까? 그것이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고백하는 바일까? 싫지만 그렇다고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우들을 활용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경우에도 불구하고 선을 이르실 수 있다.”
세 가지 언어. ‘빌라도’가 한 일도 그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붙여놓은 “나사렛 예수, 유대의 왕”이라는 팻말이 그것입니다. 당시 죄수를 처형할 때 처형 이유를 적은 팻말을 그의 몸에 두르게 하거나, 또는 죄목(罪目)을 적은 팻말을 십자가에 붙이도록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죄목은 “백성을 선동한 자”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죄목이 아니라, 죄수의 이름과 호칭을 붙여놓은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다른 문구(文句)를 선택한 것이지요.
그것도 한 가지 언어가 아닌 세 가지 언어로 말입니다: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결과적으로 온 세상이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 임을 알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누가 그에게 예수님이 “‘유대’의 왕”이라고 알려주었을까? 다름 아닌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는 진정 온 세상을 향해서 이 메시지, 즉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의 왕”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복수를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는 이 팻말이 ‘유대’인들을 자극하고 분노하게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빌라도’가 노리는 것이었습니다. 재판 내내 ‘유대’인들로부터 당한 치욕을 한꺼번에 되갚아줄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장 거센 항의가 들어옵니다. 그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칭했으니 “나는 유대인의 왕”으로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노라”고 하면서, 단호하게 이들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빌라도’가 그의 전 재판 과정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구세주, 예수. 표면적으로 그의 보복은 성공적으로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훨씬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이 마지막 행동은 <수난 이야기>의 정점(頂點)을 찍는 마지막 에피소드가 될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역설적인 방식으로 말입니다. 세계의 지배자 로마 제국(帝國), 그 제국의 한 재판관이 온 세계를 향해서,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팻말이 ‘히브리’어로 쓰여 있어 ‘유대’인이라면 이를 모를 리 없고, ‘라틴’어로 쓰여 있어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당시 온 세상 사람들의 사실상의 모국어(母國語) ‘헬라’어로 쓰여 있어 전 세계가 그 팻말에 쓰인 내용을 다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빌라도’는 ‘요한’ 화자를 대신하여, “예수는 세상의 구주(救主)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가 마치 <시편>의 한 구절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시 96:10).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두 당사자, ‘빌라도’와 ‘가야바’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그 죽음에 대한 예언자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가야바’가 한 일은 그가 일찍이 예언했던 바대로, 예수의 죽음이 그의 백성과 온 민족을 구속(救贖)하게 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며(참고. 11:49-50), ‘빌라도’가 한 일은 그 예수가 이스라엘과 세상의 구주(救主)라고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즉 두 사람은 합작하여, 예수님이 구세주(救世主) 즉 세상의 구원자이면서 동시에 만유(萬有)의 주(主)임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그것이 알고 싶을 뿐입니다.
16. 십자가(4): 제비 뽑기
“정직이 최 상책”이라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이는 “진심(眞心)은 결국 통한다”는 말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정직이 항상 최선인 것은 아니며”, “진심은 늘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게 합니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직함이나 진심을 내보이려는 사람은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저자 ‘스콧 펙’(Scott M. Peck) 박사는 사랑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진실한 사랑에는 항상 배신의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심한 도박꾼들. 진실한 사랑에 대한 가장 큰 배신은 무관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랑에 대한 무관심은 실은 그 사랑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시체를 옆에 두고 제비뽑기라니요!
요즈음 들어 이런 풍경은 많이 사라졌습니다만, 장례식장에는 의례히 밤을 새워 화투치기를 하는 조문객들이 있었습니다. 상주(喪主)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자 함께 밤을 새우다보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간혹 이게 도(度)를 넘어 도박(賭博)으로 번져 조문객들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 여기에 왜 왔는지 잠깐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주나 망자(亡者)의 편에서 보자면 참 기가 찰 노릇이지요. 슬퍼해야 할 시간에 돈 때문에 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 십자가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솔직히 이 장면은 <수난 이야기>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대목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죽은 죄수의 유품(遺品)이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병사들이 나누어가지려고 제비뽑기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무리 죄수의 옷을 가져가는 것이 호송 병사의 특권이라 해도, 그것을 가져다가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무슨 값비싼 귀중품도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戰利品)도 아니라 집에 가져가 대대(代代)로 기념할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도대체 우리의 화자는 이 장면을 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 Barclay)는 이 장면을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네 명의 병사가 한 조를 이루어 죄수 한 사람을 호송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복장(服裝)에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신발과 ‘터번’이라 불리는 일종의 모자와, 허리띠, 속옷, 그리고 겉옷과 속옷입니다. 병사 네 사람이 각기 원하는 유품을 하나씩 취하고 나면 하나가 남습니다. 아마도 마지막 남은 한 가지가 속옷이었던 같습니다.
지금 병사들은 그 속옷을 누가 가져 갈 것인가를 놓고 제비뽑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노름판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것을 그냥 네 부분으로 찢어 나누어가질 수는 없었을까요? 그게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속옷은 마디가 없이 그냥 한 올로만 짜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네 등분으로 나누게 되면 모두 풀어져서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통째로 가져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서로 가져가겠다고 주사위를 제비뽑기를 하며 희희낙락(喜喜樂樂)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까?
참 무심(無心)하고 무신경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시체를 곁에다 두고 어떻게 도박판을 벌일 수 있는 것인지. 하기야 늘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들에게 죄수 한 사람의 죽음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일일이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갖는 자체가 오히려 전문 직업인으로서 구차스러울 뿐인 것이지요. 우리는 화장터에서 눈물 흘리며 작업 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수의(囚衣)를 입히는 직업 장례사가 슬픈 표정을 짓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겠지요. 어떤 일에 전문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처럼 모든 거추장스러운 감정 따위는 배제하고, 오직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는 훈련을 쌓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경우를 보면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의 도박. 그런데 그날 그 자리에서 도박을 벌였던 사람은 병사들만은 아니었습니다. 또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충성심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내 모든 것, 내 생명까지도 단 한 번의 ‘배팅’에 다 걸었습니다. 그 십자가에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으로 그렇게 순종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랬을까? 내 시체를 곁에다 두고 도박을 벌이고 있는 저 무심하고 무관심한 병사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스튜더트 케네디’(Studdert Kennedy)라는 사람은 이 장면을 떠올리며 지은 시(詩)가 하나 있습니다:
저들, 저 병사들이
거기 앉아 그를 지켜보고 있구나.
그들이 거기서 주사위를 던지는 동안,
그는 자신을 희생하였구나.
그 십자기 위에서 그렇게 돌아가신 것이지.
하나님의 세상에서 죄를 없애버리려고
나의 그리스도, 그분도 결국은 도박사였던 게지.
스스로 목숨을 던져
이 세상을 구속하시려고 말이지.
이윽고 고통은 끝이 나고,
서쪽으로 해가 기울기 전에,
그날 피로 물든 면류관을 머리에 쓴 채,
그는 자신이 이미 승리하였음을 알았음이라.
시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의 비극은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죽음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세상을 구하려고 그리스도는 엄청난 모험과 도박을 감행했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위하여 죽는 사람은 간혹 있으나, 죄인을 위하여 죽는 경우는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 헛된 죽음일 뿐입니다(참고. 롬 5:7).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처음부터 배신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도박.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도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큰 도박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담’을 창조 속에 포함시킨 일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언약을 맺었습니다. 언약의 내용인 즉은 하나님의 권위에 버금가는 지위와 지식과 권한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흙에 불과했던 그를 초자연적인 존재,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의 신분이 초고속으로 수직 상승을 한 것이었습니다. 한 줌의 흙이 신적인 존재가 되다니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업은 창업(創業)하자말자 어긋나버렸습니다. ‘아담’의 배신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배신을 하기로 작정을 했는지는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는 그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동기가 아닌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해 보자면, 그의 무관심과 무신경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 그 각별한 나무가 항상 각별하게 보이고 또 그렇게 인식하며 살았어야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 나무의 열매가 동산의 다른 나무들의 열매처럼 그냥 따먹어도 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내 부모가 다른 부모에 비해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내 남편이 다른 여자들의 남편과 구분이 안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 아내와 남의 아내와 구별이 안 되면 어떻게 될까? 주일이 다른 요일들과 구분이 안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 존재의 의미가 각별하게 여겨지지 않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게 모두 무관심의 결과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그 특별한 언약의 말씀이 특별하게 들리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얼마나 엄청난 지위와 권한을 부여했는지 별 관심이 없어지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요? 뱀이 바로 그 틈을 타고 들어왔을까요?
아무튼 하나님의 원(原) 창조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를 바로잡으려고 두 번째 창업, 즉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통한 재창조(再創造)의 모험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번에는 그분의 진심이 통했을까? ‘요한’ 화자는 세상의 반응을 서막에서 이렇게 묘사한 바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세상은 무지했고, 무관심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의 진심을 외면했거나, 무관심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조차 그랬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 하였으나”(1:11).
따라서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受難)과 죽음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게 보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날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의 것으로 여겼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먼 산 불구경 하듯 그 광경을 지켜보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냥 지나쳐버렸든지. 이보다 훨씬 이전, ‘예루살렘’이 멸망할 당시에도 이 백성이 그랬습니다. 내 나라, 내 민족이 파괴되고 흩어지고 있었는데도, 그 비극을 나의 것으로 여기지 못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들을 향해 이렇게 절규했겠습니까: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애 1:12).
우리 모두도 하나님을 알고 안 뒤, ‘예레미야’과 같은 고통을 한두 번쯤은 겪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성령 충만하여 가족이나 이웃에게 가슴 벅찬 기쁨을 소개하고 전해 본 경험 말입니다. 그 때 내게 돌아온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나화 함께 환호하며 기뻐했습니까? 내게 감사의 표시라도 해주었습니까? 죽게 된 사람 살려주었다고 손을 붙잡고 돈 봉투라도 들고 왔습니까? 십중팔구 그들은 내게 안타까움만 더해줄 뿐이었습니다. 때로는 무관심으로, 때로는 조롱과 무시로, 때로는 적개심으로 말입니다.
나의 가족이나 이웃도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다는 사실에 나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불렀던 그 애가(哀歌)를 재창(再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주의 말씀을 증거하지 않겠나이다”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또한 주님이나 하나님 아버지처럼 늘 배척과 배신과 무관심을 복음 증거의 대가로 받을 수밖에 없다는 도박사의 심정으로 살아야 할 운명인가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맙시다.
예언의 성취.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관심의 절정, 즉 그 하찮은 “제비뽑기”마저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려 하시는 원대하고도 신비한 계획 속에 미리 포함시켜 놓으셨다면, 내 일생에서 내가 복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수모나 모욕이나 적대감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요한’ 화자가 이 장면에서 보여주고 싶어 했던 궁극적인 의도였을 것입니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24절).
우리는 화자가 인용하고 있는 이 <시편:22>이 그 배경이나 역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즉 이 시를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해석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신약>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 27:39; 막 15:29; 눅 23:35. 참고. 시 22:8). 그런 점에서 이 시가 예언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이 시인이 그리고 있는 대적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대한 바 있습니다(시 22:19; 요 19:24; 마 27:35; 막 15:24; 눅 23:34). 혹자는 그래서 이 시를 “제 5 복음서”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신약>의 시각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 시의 시인과 동일시했다는 것입니다(마 27:46; 막 15:34). 왜냐하면 이러한 동일시를 통해서 십자가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재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서 대적들에게 둘러싸인 채,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그분 역시 예수님의 고난 가운데서, 예수님의 공포를 함께 경험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고난을 그냥 바라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아들과 함께 죽음의 공포를 맛보고 계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고난 받는 자와 죽어가는 자와 동일 시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그러한 외로움과 공포를 경험하셨기 때문에, 이 시인과 동일한 처지에서 힘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위로와 안식과 구원을 베푸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러나 이 시인의 경험과 예수님의 경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이 시인은 지금 죽음을 모면했으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일부(21-31절)는 ‘메시야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시인의 확신에 찬 선언, 즉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21절)는 시인의 경우처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의 영원한 승리 즉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성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이 시인처럼 오늘날에도 고난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과(22-26절) “회중”(27-31절), 즉 교회 모두에게 찬양의 동기가 되는 구원인 것입니다.
17. 십자가(5): 어머니를 부탁해
종교인들은 어버이날을 어떻게 지낼까? 모 일간지 신문 기자는 이것이 궁금했던지 성철 스님과 관련된 한 일화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연인 즉은 이러합니다. 성철 스님이 출가하고 4년쯤 지났을 무렵인 1940년대 초반 무렵, 금강산 마하연에서 하안거(夏安居) “하안거”란 불교에서 승려들이 음력 4월 보름 다음날부터 7월 보름까지 3개월 동안 한곳에 머물면서 좌선과 수행에 전념하는 일을 말합니다. 안거(安居)는 ‘싼스끄리뜨 바르샤’(varșa)를 번역한 말로 우기(雨期)를 뜻하며, 하행(夏行)ㆍ하경(夏經)ㆍ하단(夏斷)ㆍ하좌(夏坐)ㆍ좌하(座夏)ㆍ백하(白夏)라고도 합니다. 원래 인도에서는 우계인 ‘몬순’기에 3개월 동안 비가 오는데, 이 때 치러지는 불교 교단의 특수한 연중행사를 안거라 합니다. 곧 이 시기에는 바깥에서 수행하기에 어려움이 따르고, 나아가 비를 피하기 위해 초목과 벌레들을 다치게 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에 아예 외출을 삼가고 일정한 곳에 머물면서 수행과 참선에 힘쓴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하안거 [夏安居] (원불교대사전, 원불교 100년 기념 성업회).
중일 때였습니다. 이곳에서 전체회의(대중공사라 부름)가 열렸습니다. 회의 안건은 “성철 스님 어머니 면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성철 스님의 어머니가 아들 면회를 왔기 때문입니다. 장남이 말없이 출가(出家)한 후, 속을 태우던 어머니가 수소문 끝에 이곳에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不遠千里) 진주에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이를 알고도 내다보지도 않고 참선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동료 스님들이 보다 못해 들고 일어난 것이지요. 회의의 결론은 이랬습니다: “아무리 생사를 걸고 정진하는 수도승이기로서니, 어머니가 저 멀리 남쪽 끝 진주에서 이곳까지 찾아오셨으니 마냥 외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어머니를 맞이하든지 아니면 선방을 떠나야 한다.” 결국 성철 스님은 대중의 의견을 따라 어머니를 만났는데, 대뜸 “뭣 하러 여기까지 찾아오셨느냐?”며 쏘아 붙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도 보통 단수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니 보러 온 거 아이다. 금강산 구경 왔지.” 덕택에 아들 손잡고 금강산 유람을 마친 성철 스님 어머니 왈, “보고 싶던 아들 손잡고 금강산 구경 잘 했제. 아들한테 업히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고, 그래그래 금강산을 돌아다니는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 마음에 분간이 안 되는 기라. 금강산 구경 잘 하고 헤어 졌제.” 성철 스님은 이렇게 동료 스님들 덕분에 효도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김 한수 기자가 조선일보(2015.05.08. A25면)에 게재한 글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에 관한 상식입니다. 즉 불교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부모와 맺은 인연도 끊고 출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보자면, 기존의 가족을 버리고 새 가족(종교 공동체)의 인연을 맺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수녀님이나 신부님들도 이점에서 있어서는 스님들과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갑니다. 한 수녀님은 SNS에 딸을 수녀로 보낸 한 어머니의 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글의 제목은 “묵주기도를 잊어버렸다. 가르쳐주고 가거라”입니다. 그 어머니가 얼마나 딸이 보고 싶었으면, 묵주기도를 핑계로 이런 편지를 보냈겠습니까! 딸이 종교에 귀의(歸依)하여 어머니를 거의 만나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역시 새 가족을 위하여 이전의 가족 관계를 가볍게 여긴 결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땠습니까? 그분은 자신의 어머니를 어떻게 대하셨을까?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는 두 사람을 주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그리고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에, 어린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부자 청년에서 거지 ‘나자로’에 이르기까지, 로마 백부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 이르기까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서 문둥병 환자에 이르기까지, 세리(稅吏)에서 ‘나인’ 성 과부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사랑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만, 이들 두 사람과 예수님의 관계는 각별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19:26), 즉 이 복음서의 실제 저자로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참고. 21:20, 24).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이 실제 저자일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대개 한 사람의 임종(臨終) 시에는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즉 직계 가족들이 임종을 지켜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화자는 이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나머지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분의 아버지 ‘요셉’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장면에서 그들의 부재(不在)가 오히려 우리의 주목을 끌 정도입니다. 도대체 나머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네 여인. 화자는 이 질문에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대신에 그는 다른 여인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십자가 곁에 함께 있었던 여인들은 예수님의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입니다(25절). 의심의 여지없이, 도합 네 명의 여인과 한 사람의 제자가 그분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장면에 대한 ‘요한’ 화자의 증언과 <공관복음>의 증언이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공관복음> 사이에서도 사뭇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누가복음>은 이들 여인의 이름을 밝히는 대신 단순히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라고만 전하고 있습니다(눅 23:49상). 그것도 이들이 십자가 바로 곁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참. 눅 23:49하). 이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몇 명이나 있었는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마가복음>은 멀리서 바라보던 여인들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고 합니다(막 15:40). 그러나 <마태복음>은 ‘살로메’에 대한 언급은 없고,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다고 전합니다(마 27:56).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추측할 수 있는 바는, 당시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동행했던 여인들이 꽤나 많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참고. 마 27:55). 이들 중 일부는 ‘요한’ 화자의 전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곁에서, 그리고 나머지 여인들은 멀리서, 예수님의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듯싶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십자가 곁에 과연 몇 사람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크게 상관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훗날 이들 여인들이 누가 십자가에 더 가까이 있었는가를 놓고 경쟁하듯 서로 다투지는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신앙과 사랑은 자랑하는 것이 아닐 것이니 말입니다.
다만 ‘요한’ 화자가 특별히 네 명의 여인들 이름을 거명하며 소개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과 이들 간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던지 대표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본인의 추측입니다. ‘마태’는 이들이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섬겼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마 27:55). 사랑하지 않고서는 섬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두려움을 멀리 쫓아버린다고 합니다(참고. 요일 4:18). 이들 네 여인은 예수님을 진정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사회가 범죄자로 낙인찍은 사람을 사랑하고 따르는 일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로마’ 당국 즉 세상으로부터 단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 즉 교회로부터도 신성모독(神聖冒瀆)의 이단으로 사회적 죽음을 당한 자입니다. 이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아도 개의치 않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그와 한 무리 행세를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베드로’가 이점을 단적으로 보여준 바 있습니다. 자신은 결코 예수와 한 무리가 아니라고 세상을 향해 하소연하지 않았습니까! 흔히 사도 ‘베드로’를 가리켜 무모하고 단순하다고 합니다만, ‘갈릴리’ 촌뜨기 여인들에 비하면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이 여인들은 무모했고, 단순했으며,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갔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십자가를 지켰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새삼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단어, 누구나 듣기만 하여도 눈가에 눈물을 촉촉하게 적시게 만드는 단어, 우리의 가슴을 늘 죄책감으로 사로잡히게 하는 단어, 그 단어가 바로 어머니 아니겠습니까! 그 어머니가 어찌 아들의 죽음을 그냥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내가 대신 달려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들 곁에서 애통해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세 여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화자는 오히려 침묵으로 이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우리의 화자는 분명 목격자로서 최후의 장면을 지켜보았을 텐데, 자신이 듣고 보고 또 느낀 바를 극도로 자제하고 절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직 한 가지, 즉 자신을 제외한 목격자가 네 사람의 여인이었다는 사실만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왜 하필 네 여인인가? 또 다른 네 명의 남자 목격자와의 극적인 대조를 위함은 아니었을까? 다름 아닌 네 명의 로마 병사들 말입니다!
사실 화자는 직전에 이들 네 명의 로마 병사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또 다른 네 명의 여인들의 심정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들 네 명의 병사들이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세상의 반응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죽어가는 한 죄인의 속옷을 나누어 가지기 위하여, 제비뽑기를 하고 있는 이 무관심과 무신경의 극치를 말입니다! 누가 죽었으며, 그리고 왜 죽었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분이 남긴 속옷이 관심사일 뿐입니다.
네 여인의 관심사도 그것이었을까? 그 옷의 주인이 아니라 그 속옷이었을까? 이 분의 유품을 가져가기 위해서 지금 이들 네 병사 곁에 모여 있는 것일까? 목격자이자 증인인 이 제자는 네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참고. 25절).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는 기막힌 대조입니다. 즉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찢고 제비뽑아 서로 가지려고 법석을 떨고 있을 때, 이 여인들은 그저 안타깝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기막힌 대조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들의 관심사는 그 속옷이 아니라 그 옷 주인, 즉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무관심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이들과 함께 아파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새 가족. 로마 병사들의 행동이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면(참고. 24절), 이들 다섯 사람 즉 예수님을 사랑했던 네 여인과,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한 제자의 행동 역시 <성경>을 응하게 하는 행동으로 규정함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예. 요일 4:18). 허나 우리는 이 장면에서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는 절정의 장면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른 바 예수님의 가상칠언(架上七言) 중의 하나로 꼽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참고. 26-27절).
예수님께서는 성철 스님의 “하안거”와는 비교도 안 될 고통과 시련을 겪는 와중에서도 죽기 전에 꼭 확인해 두고 싶었던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를 내가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성경>의 말씀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 그분은 종교적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어머니를 멀리하고 배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기존의 가족을 버리고 새 가족을 취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새 가족 안에 이전의 가족을 포함시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지금 그것을 주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새로운 가족 즉 교회는 태초의 소명, 즉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소명을 이루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창 1:28).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세상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해줄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18. 십자가(6): 다 이루었다!
죽으면서 “나는 정말 원(怨)도 한(恨)도 없이 살다 가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전도서>의 ‘솔로몬’이 아마 그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오히려 그는 부질없고 허무한 인생을 살다가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원(怨)은 무엇이며, 또 한(恨)은 무엇입니까? 이 둘은 서로 어떻게 다릅니까? 일견 같은 것 같은데, 이어령 선생은 이 둘은 전혀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후 이어지는 심훈의 시에 대한 해석은 이어령의 <언어로 지은 집>에서 인용, 발췌한 것입니다.
그분에 따르면, 한이란 어떤 외부의 힘이나 방해로 이루지 못한 욕망입니다. 원도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것 같기는 합니다만, 한풀이와 원풀이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춘향이에게 있어 변학도에 대한 감정은 원이지만, 이몽룡에게는 한이 됩니다. 춘향이의 시(詩)가 변학도에게 향하면 원풀이의 언어가 되며, 이 도령에게 향하면 한풀이의 시가 됩니다. 춘향이의 원이 행동으로 나타나면 원수(怨讐)를 갚는 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변 사또에게 복수를 한다 해도, 이 도령을 만나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한은 풀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모든 것을 멸할 수 있어도 평생 동안 마음속에 담아둔 그 한은 없앨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은 숭고하고 참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생각입니다. 흔히 우리 한국인을 한의 민족이라 하는데, 한국인이 종교로부터 구하려고 한 것도 영생이 아니라 어쩌면 그 한을 풀고자 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어령 선생은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을 참으로 숭고한 “한의 시”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심훈이 이 한편의 시로 불멸의 시인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재미 삼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한다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여기서 “그날”은 조국의 광복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춘향이를 심훈으로 바꾸고, 변학도를 일제(日帝)로, 그리고 이 도령을 광복으로 바꾸면, 왜 이 시가 한의 시가 되는지 이해가 됩니다. 이어령 선생이 이 시를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 잠깐 들어보기로 합시다.
시의 첫 번째 연이 죽음보다도 강한 “한풀이”를 노래하고 있다면, 두 번째 연에서는 죽음보다 강한 “신바람”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제 1연에서는 제 머리로 인경을 받아 종을 울리지만, 제 2연에서는 칼로 제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 친다. 종소리가 민족의 한을 푸는 소리라면, 북소리는 민족의 행진을 이끄는 신바람의 소리다. (중략) 그러므로 그 속에는 북과 북을 치는 사람이 구별되지 않는다. 자기 가죽으로 만든 북을 자기가 친다고 했다. 치는 것도 자기요, 울리는 것도 자기다. 사람이 북이 되고, 북이 사람이 된다. 그러한 신명의 북소리는 삼각산 한강수와 교감은 물론 생과 죽음의 문지방마저도 횡단한다. (중략)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한의 종소리와 신바람의 북소리는 다 같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점이다. 한의 종소리는 자신의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소리이고, 신명의 북소리는 자신의 살가죽을 칼로 벗겨내는 소리이다. (중략) 그러므로 그날의 기쁨을 뒤집기만 하면 가혹한 일제의 압제 상황인 오늘에 대한 고발과 분노의 심판이 되는 것이다.
테텔레스타이. 어떻습니까? 지금 십자가의 상황을 이 시에 그대로 대입한다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심훈에게 “그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막연한 미래로 남아있다면, 예수님에게 “그날”은 지금 당장 이루어진 현실입니다. “다 이루었다(tetevlestai, 테텔레스타이)!(30절)”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이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아무런 여한(餘恨)도 없다”는 말씀으로 들어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해 볼 때, 예수님께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이 삼십대에, 동족으로부터는 종교적 이단자로, 로마 당국으로부터는 사회를 어지럽히는 혁명 분자로 낙인 찍혀, 당시 가장 참혹하다는 십자가의 처벌을 받고 죽은 죄수를 누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이 문장은 수동태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그 일은 끝났다”, 내지는 “그 일이 다 이루어졌다”입니다. 그러나 듣기에 따라서는 이 말은 자포자기(自暴自棄)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가 무슨 큰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위하여 당당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대역무도(大逆無道)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말한다면, 누가 들어도 한 맺힌 최후의 절규로 듣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불과 얼마 전까지 극도의 고통으로, “내가 목마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르긴 해도 곁에서도 겨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요한’ 화자는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어가는 자가 무슨 힘이 남아돌아 큰 소리로, “테텔레스타이”라고 고함쳤겠습니까! ‘요한’ 화자는 여기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두 복음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마 27:50);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막 15:37). 도대체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요? 결국 두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큰 고함 소리는 ‘요한’이 전하는 “다 이루었다”가 아닐까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극도의 피곤과 고통 가운데서, 패배나 실패를 자인(自認)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분은 지금 확신과 안도감(安堵感) 가운데서 승리의 환호(歡呼)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안도감이라고 말했습니다. 안도감이란 아무 여한이 없을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분이 느끼는 안도감이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내가 살아가면서 안도의 긴 숨을 내쉴 때는 언제입니까? 내가 우주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면 안도의 긴 숨을 내쉴 때는 언제일까요? 내가 만일 잠수함 속에서 몇 년을 근무한 해군 장병이라면 어떻습니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터에서 마침내 종전(終戰)의 메시지를 듣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요? ‘필립 얀시’는 <내가 몰랐던 예수>에서,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기분을 지구 귀환을 앞둔 우주인의 심정, 내지는 수년간의 잠수함 근무를 끝내고 육지로 올라오는 수병(水兵)의 기분으로 상상하고 있습니다. 결국 안도감이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무사히 다 마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보상이 아닐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안도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그리고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았다”고 쓰고 있습니다(히 12:2). 그 즐거움이란, “귀환”(歸還)의 즐거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힘들고 지친 전투, 그러나 마침내 승리로 마무리한 기나긴 그 전투를 끝내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그 즐거움 말입니다.
혹시 지금 예수님께서 믿음의 눈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침내 내가 가야 할 그 곳, 내가 속한 그 위치와 지위로 돌아가 있는 내 모습을 본 것은 아닐까요? 인간의 모습을 입고 천사보다 잠시 못하게 되었으나, 이제는 그 남루한 옷을 벗어버리고, 영광과 존귀의 옷으로 갈아입고 만유(萬有)의 주(主)로 앉아있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참고. 빌 2:8-10)? <계시록>은 여러 곳에서 영광의 자리에 앉아, 모든 피조물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고 있는 “어린 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이 광경! 이 즐거움 때문에, 두개골이 파열되고 가죽이 벗겨지는 아픔도 참겠다던 심훈처럼, 예수님 역시 같은 고통을 감내하신 것입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요한’이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 “(영혼이) 떠나가다”(paradivdwmi, 파라디도미)는 <공관복음>의 표현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 단어는 “전하다”, “전수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이전에 그분께서 자신의 죽음과 관련해서 말씀하신 바를 연상시켜주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10:18). 다시 말하자면 그분의 죽음은 자발적이며 의도적인 것이지 어떤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암시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심훈에게 즐거움의 원천은 조국 광복(光復)이었습니다. 광복이 곧 회복(回復)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즐거움의 원천도 역시 광복에 있다 하겠습니다. 어떤 광복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분이 학수고대하던 영광스러운 “왕의 귀환”을 포함해서 “인류의 광복”을 말합니다. “인류의 광복”이란 인간을 본래의 인간으로 재창조(recreation)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하지만 재창조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救贖)이 필요합니다.
재창조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그려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 중의 하나가 구속이라는 그림입니다. ‘존 스토트’는 그의 대표작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네 가지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구속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구속은 경제 용어로서, 고대 로마 시대에 노예를 일정 값을 주고 사오는 행위를 말합니다. 오늘날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는 행위도 영어로 redeem, 즉 “구속”(救贖)이라 부릅니다. 현금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현금 외는 없을 터인데, 은행에서 그 가치를 현금과 동일하게 인정해 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속의 대가는 반드시 등가(等價)의 가치를 지닌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는 곧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를 무시하고 사람 대신에 짐승(때로는 곡식)으로 값을 치를 수 있다는 법을 만드신 것입니다. <레위기>의 희생제사가 그것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처사입니다. 짐승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말 불공정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편에서도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잘못했는데, 짐승더러 그 대가를 치르도록 했으니 말입니다. 사형수를 대신해서 그의 애완견이나 가축을 죽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사형수를 대신해서 그 가족이나 이웃 중 누군가 대신 죽어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어느 정신 나간 자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짐승을 대속의 제물(祭物)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일시적이며, 상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스라엘만 이 사실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했을 때, 어찌 그를 거부하고 배척할 수 있었겠습니까? 적어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는 ‘유대’인이라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과 함께 처음으로 지켰던 그 “유월절”을 회상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어야 했습니까? 죽음의 천사가 이집트 온 땅을 덮쳐 모든 이집트인의 첫 아들을 다 죽였을 때, 실은 이스라엘의 장자들도 모두 함께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출애굽기>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출 12:21하-22상). 즉 “어린 양”이 대속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정말 치사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닙니까! 그들은 이집트를 빠져 나오면서 하나님의 진노에 부들부들 떨었어야 했고, 동시에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지 못했어야 했습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그런대 지금 그들 눈앞에서 그 때와 똑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28하-29절). 하나님의 아들이 목이 왜 마릅니까? 스스로 생수(生水)로 자처하시던 분이 목이 마르다니요!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 ‘요한’ 화자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한 인간의 죽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고한 인간 말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는 자라면, 이 장면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알아챘어야 합니다. ‘요한’ 화자가 이 장면을 두고, 다시 한 번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28절).
따라서 이 장면을 목도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에 두려움으로 전율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감격으로 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어야 할 것입니다:
아, 이것이었구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출애굽이구나! 짐승이 아닌, 사람이 대속의 제물로 죽어가고 있구나. 무고한 어린 양이 아닌, 무고한 한 인간이 나를 위해서 죽어가는구나. 이제 내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인간 대접을 받는구나.
그렇습니다. 내가 그토록 고상하고, 아름답고, 귀중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남하 목사가 쓴 <예수님짜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요지인 즉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가치가 한낱 어린 양 한 마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면, 나를 흑암의 권세로부터 출애굽 즉 구속해 내기 위하여 하나님이 치른 가격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존재입니다! 세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존재 말입니다.
19. 십자가(7): 옆구리를 찔리심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꾼으로 불리는 조희팔이 최근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무려 수 조원의 사기를 치고 중국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에 그의 최측근이 중국 공안 당국에 검거되어 한국으로 압송되면서 그의 죽음을 놓고 다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에게 사기를 당한 수백 명의 피해자들은 그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어 관 속에 누워있는 모습까지 수년 전에 공개되었음에도 이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워낙 희대(稀代)의 사기꾼이라, 장례식 장면도 다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해대책위원회는 조희팔이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믿으며, 그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 여부를 놓고 사회적 문제가 된 사례는 또 있습니다. 천 경자 화백의 경우입니다. 얼마 전 그분의 추도식이 열렸습니다. 그분의 명성으로 본다면 추도식의 규모가 사회장(社會葬) 정도는 되었어야 한다는 생각인데, 아주 조촐했습니다. 그런데 이 추도식이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천 화백이 과연 죽었는지, 죽었으면 언제 죽었는지, 그리고 그 묘지는 어디 있는지, 일반에게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천경자 화백이 누구입니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삼대 미술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입니다. 그런대도 그녀의 죽음은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천 화백을 마지막까지 모시고 있었던 그녀의 장녀입니다. 그런데 이 딸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도무지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도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도 그의 죽음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참고. 고전 1:23). ‘유대’인의 분노는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다른 이도 아닌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요설(饒舌)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성경>에서도 “십자가에서 죽는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단언하고 있지 않습니까(신 21:22-23)! 그러니 이단(異端)도 이런 이단이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시 ‘헬라’인, 즉 이방인들은 그분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다고 합니까? 역시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의 신화(神話)에는 신의 아들이 죽는 일 따위는 결코 없습니다. 신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존재 아닙니까? 그러니 만일 예수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죽지 않았어야 하며, 정말 죽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성경>에서도, ‘헬라’인의 <신화>에서도, 이방인의 이성(理性)의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주장이 설 자리는 없어 보입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당시 교회 안에는 영지주의(靈知主義)라 부르는 이단 사상이 침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이원론(二元論)의 한 아류로서, 예수님께서 인성(人性)과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속된 육체를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육체가 없으니 죽음도 당연히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당시 ‘요한’ 공동체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로 구성된 공동체였다고 가정해 볼 때, 교인들의 믿음은 이래저래 위기적 상황에 처해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두텁다 해도, 그리고 아무리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설교자가 훌륭한 설교를 전한다 해도, 그 때나 지금이나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는 일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쉬운 법입니다. 선동가(煽動家)의 잠언에 이런 말이 있다 합니다: “거짓말도 계속 들으면 진리로 들리는 법이다.” 악마의 유혹도 그렇겠지요? ‘아담’이 단 한 번의 유혹으로 ‘사탄’에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은 그럴듯하면서도, 집요했을 것이라는 것이 본인의 추측입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점점 존재감을 상실해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요한’ 화자는 이미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기록한 바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19:30). 그것도 다른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목격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참고.19:26).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직접 보았다는데. 그러나 그는 같은 이야기를 또 하고 있습니다. 마치 책의 부록을 쓰듯, 또 다른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피와 물. 군인들의 기이한 행동과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터져 나온 “피와 물”에 관한 기록이 그것입니다. 이 내용은 일견 불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 <공관복음>에는 없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과연 그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의 의도와 관련해서 추측해 본다면, 사실 이 장면은 앞 장면과 시적(詩的) 반복 내지는 유사병행(類似竝行)을 이루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앞 장면의 요점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봅시다. 두 곳입니다: (1)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내가 목마르다 하시고”(28절); (2) “그의 영혼이 떠나가시니라”(30절).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장면에서도 화자의 의도는 동일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분은 정말 죽었다; 둘째, 그분이 죽은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뜻이었다.
다시 한 번 “피와 물”에 관한 화자의 증언으로 되돌아가보기로 하지요. 예수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터져 나왔다는 말은 실은 불필요한 증언입니다. 이미 숨을 거두었다고 했는데, 무슨 새로운 증언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볼 때,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새로운 증거를 내놓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그 피와 물이 그냥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이들 무지한 군인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서 터져 나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미 확실하게 죽어있었음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만일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기색이 있었더라면, 군인들은 예수님의 다리를 꺾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그들을 보낸 것은 예수님의 다리를 꺾으라는 것이었지,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옆구리를 찌른 것은 나름대로 확인 사살을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창으로 찔러 확인사살까지 했으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즉 예수께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죽었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군인들도 확인했고, 화자 자신도 이 사실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는 이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만일 그분이 진정으로 죽지 않았다면, 부활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지도 않았는데 무슨 부활이 있겠습니까!
사실 그분의 부활을 놓고 역사적으로 온갖 억측과 이론들이 난무해 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컨대, 그분은 잠시 졸도했을 뿐이며, 동굴 무덤 속의 냉기(冷氣)에 다시 깨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한 것처럼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즉 그분은 소생(蘇生)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화자는 힘주어 말합니다: “그분은 정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정말 부활하신 것이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돌아가신 예수님 옆구리에서 터져 나온 “피와 물”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매혹적인 해석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혹자는 물과 피가 교회에서 중요한 두 가지 의식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물은 침례(浸禮)를, 그리고 피는 성찬(聖餐)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으니, 이와 같은 해석은 나름대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에서 “피와 물”을 교회를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했다는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럴 듯하지만 잘못된 해석입니다.
더 기막힌 해석도 있습니다. 즉 ‘하와’가 ‘아담’의 허리 즉 갈비뼈에서 나온 것처럼, 교회도 두 번째 ‘아담’ 그리스도의 허리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해석은 ‘알레고리’, 즉 풍유적(諷諭的) 해석의 한 전형(典型)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런 식의 해석에 환호합니다. 경건하게 들릴 뿐만 아니라, 신비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물론 ‘요한’ 화자를 포함해서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을 이처럼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 대가(大家)들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후대의 독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약>저자들이 <구약>을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것이 해석학적으로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 해석이 <신약>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을 해석함에 있어, <신약>이 해석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만 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요한’ 화자는 로마 병정들이 보여주는 이상한 행동(한 일과 하지 않았던 일)은 <구약>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로 그는 <구약>의 두 본문을 인용하면서, 이들을 순전히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화자가 인용하고 있는 <성경>의 두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 하도다”(시 34:20);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슥 12:10상). 이 두 본문이 정확하게 어떤 역사적 배경 하에서 기록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화자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豫表)하고 있다고 단언합니다. 자의적(恣意的)이고 독단적인 해석임에 분명하지만, <신약>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 본문은 각각 부정적이며, 긍정적인 측면에서 군인들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군인들이 하지 않았던 행동에 대해서, 그리고 <스가랴>는 그들이 실제 취했던 행동에 대해서입니다. ‘빌라도’의 명을 받은 군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적의 다리와 함께 예수님의 다리도 꺾으려고 왔던 것이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처음의 의도와는 정 반대로 행동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이 성취되는 방식이 참으로 아이러니 그 자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들 군인더러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라고 했던가요? 따지고 보면 원인 제공자는 결국 ‘유대’인들이 아닙니까? 그것도 율법을 지키고자 했던 열렬 ‘유대’인들 말입니다. 그들이 먼저 나서 십자가에 있는 시체들의 다리를 꺾어 치워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참고. 31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율법은 다름 아닌 유월절에 관한 규례입니다. <신명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2-23).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의 요청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로마의 관례에 따르면, 십자가형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는 곧바로 끌어내리지 않고 그대로 몇 날이고 십자가 위에 두어, 독수리 떼들이 와서 파먹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랬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빌라도’에게 와서 시체들의 다리를 꺾어 죽음을 재확인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빨리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리가 부러지면 온 몸을 지탱시켜주는 횡격막이 아래로 늘어져 힘을 쓸 수가 없어 더 일찍 사망에 이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이며 신앙적인 것입니다. 이제 막 유월절이 시작되려는 시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로마인들보다 더 고상하고 진보된 민족이라 해야 합니까? ‘스펄전’ 목사님도 “인간의 양심이 죽은 곳에서 종교적 양심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유대’인들의 이러한 모습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자비가 아니라, 위선이고, 자가당착(自家撞着)입니다. 이율배반(二律背反)도 이런 이율배반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그 율법을 주신 자를 죽인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음모의 희생양. <스가랴>의 예언은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중요한 증거로 채택했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이나 <계시록>에서도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스가랴>는 “찔린 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후회와 애통 가운데서 그렇게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회나 애통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은총과 성령을 부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참고. 슥 12:10). <마태복음>이나 <계시록>에서도 그 “찔린 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애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인자(人子)가 다시 올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애곡이 뉘우침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추측건대, <마태복음>이나 <계시록>에서 강조점이 종말에 있을 “최후의 심판”에 있다면, <요한복음>에서는 “현재의 구원”에 방점(傍點)을 두고 있는 듯합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유월절을 완벽하게, 그리고 영원히 성취시켰을 뿐만 아니라(참고. 히 9:25-26), 두 번째 출애굽을 통해서 “종말의 소망”을 완성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들리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요 3:14). 두 번째 출애굽이 첫 번째와 다른 점은 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유월절의 양”으로 짐승이 아닌 자신을 바쳤다는 사실입니다(참고. 히 9:12).
이 마지막 유월절의 가장 큰 비극이자 아이러니는 정작 하나님의 어린 양을 드린 자들은 그 피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세운 음모의 희생양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를 보고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화자가 이미 선언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20. 십자가(8): 장사(38-42)
본인이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주말이면 본인 집으로 찾아와 전도하던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자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금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먹을 것을 들고 찾아오곤 했습니다. 처음 한 두 번은 예의 상 반갑게 맞아주긴 했으나, 계속 오는 것이 싫었습니다. 하지만 내색은 할 수 없어, 더 이상 오지 못하게 하려고 이런저런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며 그들을 귀찮게 했습니다. 때로는 얼굴을 붉히며 논쟁도 하고, 또 때로는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러기를 수개월, 그 부부의 열심 때문이었던지 결국에는 우리 부부는 침례를 받고, 등록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 공개적으로 간증도 했습니다. 물론 그 부부에게 감사한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지요.
침례를 받던 그날 주일 아침 교회에 나오기 전, 집에서 잠간 꿇어 앉아 기도를 했습니다. 오래 동안 원(願)은 있었으나 결코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흡연 습관을 끊고 싶다는 기도였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는 아직도 담배가 반쯤 남아있는 담배 갑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집을 나섰는데,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지금까지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사실 이것은 지극히 미미한 외적 변화에 불과한 것이고, 내 안으로 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안개처럼 뿌옇게 내 앞을 가리던 그 무엇이 깨끗하게 사라진 느낌이었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내 속에 한 가지 불만 같은 것이 생겨났습니다. 뭐 이런 것이지요: “도대체 그동안 한국에서 수십 년을 살았는데, 나에게 이들 부부처럼 예수 믿으라고 말한 사람이 왜 한 사람도 없었더란 말인가. 대한민국의 그 많은 예수쟁이들은 다 어디로 갔더란 말인가? 도대체 이 사람들 교회에서 무엇을 배운다는 말인가?” 그래서 나는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결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내가 아는 것을 절대로 혼자 간직하고 살지는 말아야지. 증거하고 알려주어야지.
당시 교회의 분위기도 그랬습니다. 주일 예배는 흥분과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예배는 늘 일종의 축제였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초청의 시간이 되면, 서로들 달려 나와 결신(決信)이나 재 헌신의 간증을 하려했고, 나머지 교인들은 박수로 그런 사람들을 환영하고 격려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다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수요 기도회나 기타 구역 모임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모였다 하면 서로들 자기 간증 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이 모임이 그냥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고, 밥 먹고 즐기는 모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따분하게 성경공부만 하는 모임도 아닙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모임입니다. 어떤 이는 자기 인도자의 권유와 도전으로, 잘 운영해오던 비디오 가게를 처분해버렸습니다. 팔리는 비디오 중에 음란 비디오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팔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교인은 담배와 도색 잡지를 가게 진열대에서 치워버렸습니다. 잡화 가게에서 이들이 가게의 주 수입원인데도 말입니다. 또 있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어떤 부부는 그동안 일주일에 6일을 일했는데, 그 교회에 온 이후로 5일만 일하고 금요일은 전도의 날로 정해, 전도 대상자를 찾아다니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것이 교회이고, 교회의 힘입니다. 교회는 죽은 사람들의 무덤이 아닙니다.
이 교회에서 교인들의 이런 모습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거나, 예배나 구역 모임에서 점잖 빼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배겨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그냥 두지를 않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그 사람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고 진단하려고 합니다. 마치 의사 앞에 앉은 환자처럼,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내면세계나 신앙 상태에 대해서 수시로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까지 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숨기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과연 이런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나 ‘니고데모’라면 어땠을까요?
나는 기질 상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나 ‘니고데모’입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나는 마치 무슨 열병이나 집단 체면에 걸린 듯한 교회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거나 싫어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앙(신학이 아니라)의 기초를 그 교회에서 닦은 것을 참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 교회 덕분에 거듭난 교인이라면 당연히 열정과 꿈을 가지고 다소 요란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입니다만. 처음의 결심과 열정이 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그저 조용하고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목사라고 하는 신분이 참 좋다는 생각도 듭니다. 젊은 시절의 객기로 목사가 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이제는 나를 아는 사람치고 내가 목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굳이 복음을 전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나의 존재 자체가 증거고 증언이 되는 셈입니다. 때로는 그저 침묵하는 것조차도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아, 저 사람은 아주 점잖은 목사로구나”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받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유익이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전해야 하는 일이 직업이 되다 보니, 늘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그동안 나는 성경을 떠나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가르치고 설교해야 하니 남들보다 독서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독서는 새로운 지식을 얻는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독서를 더할수록 지식도 따라 늘어갔습니다. 물론 지식과 신앙의 깊이가 반드시 비례해 왔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숨어서 예수 믿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대한민국이라는 자유세계에 살게 된 것도 큰 축복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만일 북한이나 미얀마, 또는 이슬람 국가에 살았더라도 이렇게 드러내놓고 예수 믿는다고 자랑할 수 있었을까? 내 기질로 볼 때, 아마 결코 그렇게 살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환경 탓이나 하며 체념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가끔 생각나면 혼자서 조용히 기도나 독서하는 것으로 자위(自慰)하며 살았겠지요. ‘요셉’이나 ‘니고데모’도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기질적으로 좀 더 적극적인 사람이라면, 다른 형태로 신앙을 드러내려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예컨대, 정의사회 구현 운동이라든지, 불우이웃 돕기 등과 같은 성경적 교훈과 맥을 같이 하는 윤리ㆍ도덕 활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영역에서는 내가 굳이 예수님의 “숨은 제자”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숨어 사는 제자. ‘요한’ 화자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를 “숨은 제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숨어서 예수님을 믿는 자라는 뜻이겠지요. 가능한 일일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기도도 혼자서, 예배도 혼자서, 성경공부도 혼자서 하는 교인이라는 뜻이겠지요. ‘니고데모’에 대해서 찾아보았더니, <요한복음>에서 세 번 등장하는 것이 전부입니다(3:1; 7:50; 19:39).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네 복음서 모두에 등장하고 있습니다(마 27:57; 막 15:43, 45; 눅 23:50-51; 요 19:38). ‘요한’ 화자가 이들 두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한 번 볼까요?
우선 ‘요셉’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19:38상). 썩 좋은 평가는 아닌 것처럼 들립니다. 오히려 그에 대하여 상당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 왜 그렇게 살지?”하는 책망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니고데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를 소개하면서,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38절). 꼭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소개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까? 사람의 약점이나, 과거 한 때 잘못한 행위를 들추어내면서 사람들 앞에 소개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화자의 심보가 정말 고약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소개 바람에 두 사람은 교회에서 두고두고 “숨어서 예수 믿는 자”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달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 생전에 유대 공회원들 가운데서 숨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12:42). 이런 사람들을 향한 ‘요한’ 화자의 평가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숨기고 사느냐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기 본문에도 기록하고 있는 바처럼, 두려움 때문입니다. 동료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38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적 소수(小數)의 편에 선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가 있지 않고서는 참 힘든 일인가 봅니다. 특히 그 사회가 사상적으로나 이념적으로 획일화 되어있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다른 생각, 다른 종교, 다른 세계관은 지탄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요한’ 화자는 또 다른 이유 때문에 “두더지 교인”이 된 사람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12:43). 칭찬이 듣고 싶다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에게나 있겠습니다만, 이런 마음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거나 부유한 사람일수록 더 심한 모양입니다. 예컨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는 그 사회에서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공회원이었고, 돈도 많았습니다.
‘마태’는 ‘요셉’을 ‘아리마대’의 부자로 칭하고 있습니다(마 27:57). 그는 예수님 시체를 감쌀 깨끗한 세마포를 가져왔고, 시체를 넣어둘 새 동굴 무덤도 자기 소유였습니다(마 27:60). ‘니고데모’는 시체에 뿌릴 몰약과 침향을 무려 일백 파운드나 가지고 왔습니다(39절). 이게 얼마나 많은 분량인지 비교를 위해서, 이전에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뿌린 향료의 양이 얼마였던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지 한 파운드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예수님 때문에 사회적 죽음을 자초하려 했을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니 지금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 두 사람, 숨어 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죽어서 지낸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간혹 살아있다는 표시를 보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공관복음>은 ‘요셉’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자”로 그리고 있고(막 15:43; 눅 23:51), “선하고 의로운” 자로 치켜세우기도 합니다(눅 23:50). 그리고 예수님을 저주하는 공회의 결정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눅 23:51). 물론 그가 회의장에서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숨은 제자라 해도 제자는 제자입니다. 어찌 선생님을 죽이자는 결의에 동의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설령 그가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은 숨겼겠지요.
과연 이들을 “거듭난 자”로 볼 수 있을까?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에 있었던 그 유명한 한 밤중의 대화에서 ‘니고데모’는 과연 거듭남의 체험을 했을까? 사실 그날 대화의 주제는 “거듭남”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것이 알고 싶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고, 예수님도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는지를 알려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지 “거듭남”의 신비로움에 대해서 말해주었을 뿐입니다. 사실 그날 밤중의 대화는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돌아갔습니다. 초저녁에 와서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거듭남의 신비는 ‘안드레’와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안드레’ 역시 예수님과 한 밤중의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돌아옵니다. 다음날 아침, 형을 찾아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자랑하며 형을 그분에게로 데리고 갑니다(참고. 1:37-42). ‘사마리아’의 여인도 한낮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리고 마을로 되돌아옵니다. 이번에는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니며 외쳐댑니다: “동네 사람들아,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나와 함께 그분을 만나러 가보자.” 탕녀(蕩女)에서 성녀(聖女)가 되는 아주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제자입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숨어사는 두 제자”에게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경천동지(驚天動地)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이 어둠 속에서 마침내 빛 가운데로 당당히 걸어 나온 것입니다. 누가 이들을 소심하고 겁 많은 제자라 하겠습니까?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는 그 일을 자청하고 나섭니다. 예수님께서 죽었으니 이제 남은 절차는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지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빌라도’에게 가서 죄인의 장례식을 치러야 하겠으니 시체를 내려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습니까?
‘유대’인들이 했어야 합니다. 예수의 다리를 꺾어 빨리 죽게 해 달라고 했으니, 이제 그를 끌어내려 장사지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유월절을 앞두고 시체를 만지는 그 부정(不淨)한 일을 누가 하려하겠습니까? 나도 부정해지는 판에... 예수님의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면 열두 사도들? 이 사람들 모두 지금 어디서 무엇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사랑하던 그 제자”는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십자가 아래에서 그분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숨어사는 두 제자”를 도와 함께 장례식을 치렀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런데 마치 유체 이탈 화법을 쓰듯, 자신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화자는 예수님의 장례를 언급하면서 왜 하필 이 두 사람을 내세우고 있는 것일까요? 이 모든 일을 목격하고 기록한다는 본인조차 빼버린 채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일까요? 교회 회중 앞에서 이들을 공개재판이라도 하자는 것이었을까요? 그래서 교회가 안아야 할 “주홍 글씨”를 대신 이들에게 뒤집어씌우자는 것이었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화자 ‘요한’이 작성한 예수님의 장례 설교문은 어떠해야 할까요? 제가 여기 본문의 기록에 ‘카텐자’를 붙여보았습니다. 그 내용이 설교라기보다는 차라리 간증이나 고백에 가깝습니다. 그의 설교는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회중 여러분, 이 사람들 한 번 보세요. 예수님 살아계실 때는 내내 숨어 지내다가, 돌아가시고 나니 어슬렁어슬렁 나타나 장례식 한 번으로 생색을 내려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양심의 가책이라도 좀 덜어보자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여러분,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평소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물론 이 사람들, 평소 예수님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했을 것입니다. 이 점 나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빌라도’ 역시 그를 존경했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들 예수님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좋은 일 한 번 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동안 진 빚의 일부라도 갚을 수 있겠거니 생각했을 수도 있지요. 생색을 내고 있다고 생각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빌라도’ 역시 좋은 일 한 번 크게 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어!” 그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한 것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 이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거듭난 자만이 그분의 제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과연 그 두 사람은 거듭났을까요? 난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지금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지금 나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이것은 나의 간증이요 고백입니다. 내 가슴을 비수처럼 찔러오는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내가 평소 그렇게 경멸하던 “숨어 사는 제자”가 보여준 담대함과, 헌신과, 그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자칭 사도라고 하는 나도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이 사람들이 보여주었다는 사실이 나를 한 없이 부끄럽게 합니다. 이들이 자신의 사재(私財)를 털어 예수님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 그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이 사람들이 <성경>의 예언을 응하게 하는 동안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나는 정말 제자일까요?
제 3부
부활 설화
(20:1-31)
제 22과: 부활설화
22
부활 이야기
(20:1-31)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 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20:27-29).
<성경>과 관련하여 자주 듣는 질문들의 한 형태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인가?”입니다. 예컨대, “창조는 역사적 사실인가?”, “노아의 홍수는 역사적 사실인가?” “출애굽은 역사적 사실인가?” 등입니다.
이런 질문은 ‘도마’의 질문과 근본적으로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부활은 과연 역사적 사실인가?” 이들 질문의 배후에는 <성경>이 기록들이 과연 합리적이고도, 객관적이며, 과학적인가?”라는 의심이 깔려있습니다. 이는 당연하고 또한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다만, 질문의 동기나 목적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사 표현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은 이와 같은 합리적인 질문이나 관심사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오히려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 어떠한 증명을 시도하기는커녕, 아예 관심을 보이고 있지도 않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식은 곧 체험이라는 ‘유대’인들의 인식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즉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인식입니다. 이것은 보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는 도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가 가진 바 소망이나 믿음에 대해서 항상 변증하고 간증할 준비를 갖추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내세울 가장 강력한 기독교 변증(apologetics)은 무엇일까? 부활입니다! 부활은 물론 단순한 소생(蘇生)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 또는 두 번째 창조를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부활을 신학적으로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부활에 관한 우리의 증거도 이를 바탕으로 일련의 가상적인 질문들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1) 부활은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2) 그리고 이 질문은 진정 중요한 것일까?
(3) 부활은 왜 필요했던 것일까?
(4) 오늘 나에게 부활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요한’ 화자는 그가 선별한 네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이들 질문에 대하여 나름의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들려주는 “부활 이야기”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전하고 있는 부활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이 부활에 관하여 격정적으로 논증하고 웅변하고 있다면, ‘요한’ 화자는 그저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물론 목적은 같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양식. 본문의 문학 양식은 설화(즉 이야기)이며, 구체적으로는 <부활 이야기>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전체 5막으로 구성된, 아주 정교하면서도, 예술적으로 잘 짜인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이 복음서를 관통하는 신학적 주제를 아주 극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전하는 <부활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예수 이야기의 절정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그가 이곳에서 드러내려고 하는 핵심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고, 분명 장사되었다가, 그리고 부활한 그 예수가 곧 ‘메시아’(즉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야기는 U字형의 구성을 이루는 전형적인 희곡(戱曲)에 속합니다. 즉 주인공의 궁극적 승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그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함과 신성(神性),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새 생명으로 가는 문학적 원형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복음(福音)이라는 단어는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구조. 앞에서도 말한 바처럼 이야기는 전체 5막으로 구성되어있으면서, 시간대 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각 에피소드는 독립적으로 취급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배경. 설화의 배경은 ‘예루살렘’입니다. 빈 무덤에 관한 언급은 <요한복음>외 다른 곳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했다는 이야기 등을 통해서 부활사건의 지리적 위치가 밝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서막(1-10절)
‘요한’ 화자의 <부활 이야기>는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발견한 시점(時點)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1절)
여기서 화자가 밝히고 있는 시점, 즉 “안식일 첫날”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표현은 부활과 관련한 교회의 신앙고백(케리그마, kerygma), “장사한 지 삼일”과는 다른 것입니다(참고. 고전 15:3-4). 이 표현은 <사도신경>에도 나타나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브라운’(Brown)의 설명에 따르면, “안식일 첫날”은 빈 무덤을 발견한 시점에서 유래한 것으로, 교회는 처음 한 동안 이 표현을 “장사한 지 삼일”이라는 표현보다 더 널리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장사한 지 삼일”의 표현이 “안식일 첫날”을 급속도로 대체해 갈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면서 이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었고, ‘유대’인들이 이를 익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더 나아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삼일”이 갖는 의미는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 6:2). 물론 “삼일”이든 “삼일 후”든 반드시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당시 ‘랍비’ 사회에서 이 표현은 곧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요한’ 화자는 왜 예수님의 경고성 예언 속에 담긴 “삼일 후의 부활”(막 8:31)을 기억해내지 못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하여 곧바로 떠오르는 가능한 대답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자신의 임박한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했지만,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던 제자들은 이제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기대와 믿음은 무시무시한 십자가의 사건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참고. 눅 24:21). 더 나아가 제자들은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을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 가운데 곧 임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을 개연성(蓋然性)이 높다(예컨대,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향해서, “너희 오빠가 살리라”고 하셨을 때(11:24), 그녀가 어떻게 반응했던가!). 그것 말고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어찌 꿈이나 꿀 수 있었겠는가!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혼자 갔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참고. 1절).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2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이다. 즉 문장의 주어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점으로 미루어, ‘막달라 마리아’ 외에 다른 누군가 함께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양적 관습에 따르면, “우리”가 반드시 복수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컨대, 우리도 “나의 아내”를 “우리 아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불트만’(Bultmann)도 이 같은 견해를 피력한 바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마가복음>은 ‘막달라 마리아’ 외에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도 함께 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막 16:1-3). 만일 <마가복음>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안을 한 번 들여다보고는 다른 여인들보다 먼저 그 자리를 떠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사도들에게 전한 메시지도 다른 여인들의 그것과 다른 이유도 설명될 수 있을 듯합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 16:7).
그러나 화자의 관심사는 누가 무덤 동굴에 갔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두려움에 떨며 사도들에게 전하는 동굴의 상황에 대한 묘사에 있습니다: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마리아’의 보고는 도둑이나 또는 대적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굴해갔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화자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 보고를 <부활 이야기>의 첫 번째 증거 내지는 변증으로 활용하려 하는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 즉 “빈 무덤”에 관한 증언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소극적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빈 무덤”의 증언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나돌던 이른 바 “도난 설”(참고. 마 28:13-15)에 대한 강력한 반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체 도굴은 로마 시대 당시 사형에 준하는 범죄행위였다고 합니다. 이를 금하는 로마 황제의 칙령의 복사본이 ‘나사렛’에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과연 누가 사형을 무릅쓰고 시체도굴을 감행했겠는가?” 이것이 화자가 던지는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를 듣고 두 제자가 있는 힘을 다해 동굴로 달려갑니다.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던 제자”입니다.
3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3-5절)
그런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동굴에 먼저 도착합니다. 화자가 굳이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밝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만큼, 그 사랑의 힘이 그로 하여금 더 빨리 걸음을 재촉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먼저 도착한 그는 동굴 안을 들여다보기는 했으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머뭇거렸는지, 그리고 그가 본 세마포 수의(壽衣)에 대해서 베드로에게 왜 말해주지 않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한편 ‘베드로’는 그의 기질답게 동굴에 도착하자말자 그대로 안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그는 동굴 안을 살폈고,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6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6-7절)
이 두 구절은 ‘베드로’가 발견한 것이 단순히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두건(頭巾) 그 이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이라 함은 세마포와 두건이 놓여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이들이 원래 시체를 싸고 있었던 그대로 흐트러짐 없이 놓여있다는 뜻입니다.
학자들은 일찍부터 이 구절이 갖는 변론적(辯論的)인 기능에 주목을 기울여왔습니다. 그것은 “도난 설”에 대한 또 다른 반증으로서의 기능을 말합니다. 예컨대, 중세 신학자 ‘크리소스톰’(Chrysotom)은 반듯하게 놓여있는 예수님의 수의와 머리 두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면, 힘들여 수의와 머리 두건을 벗겨, 그것들을 원래의 모습대로 가지런히 놓아두고 떠나는 수고는 왜 했겠는가?” 혹자는 이 주장에 동의하면서,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합니다: “시체는 가져가면서 값비싼 몰약과 향료는 왜 두고 갔을까?”
그러나 이 본문과 관련해서 또 다른 일단의 학자들이 제기하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수의와 머리 두건의 상태가 부활의 증거로서 그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면, 왜 ‘베드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요한’ 화자가 진정 “빈 무덤”을 부활의 증거로 내세우길 원했다면,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시도는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관습에 따르면, “빈 무덤”에 관한 여인들의 증언은 증언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두 남자 즉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빈 무덤을 확인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두 남자의 증언은 <구약>에서 요구하는 증언에 관한 법적 효력을 만족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신 19:15).
그러나 여전히 질문은 남습니다: “‘베드로’가 놓친 의미를 “그 다른 제자”가 발견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시사(示唆)하는가? “그 다른 제자”는 진정 남겨진 수의와 머리 두건을 부활의 증거로 활용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추측건대, 그의 관심사는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단순한 데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정하게 정리되어있는 수의와 머리 두건의 상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 그 자체 말입니다: “아, 주님께서 그 수의를 영원히 벗어버리고 다시 사셨네!”
그렇다면 “그 다른 제자”가 뒤에 남겨진 수의와 머리 두건만 보고서 주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그는 아마도 자신이 직접 기록한 ‘나사로’의 소생(蘇生)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을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이야기를 부활을 예고하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했습니다. 죽어 썩어가던 ‘나사로’가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에 되살아나서 동굴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세마포와 머리 두건을 그대로 두른 채였으며, 그가 세상에서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것들을 풀어주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그것들로부터 빠져나왔으니, 부활의 표적으로 받아들이기에 결코 주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너무나 간단명료한 이 사실이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실제 단정하게 정리된 수의와 머리 두건을 먼저 발견한 이는 자신이었건만 그 앞에 벌어진 장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 표적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종의 불가사의(不可思議)였습니다. 같은 불가사의라도 “그 다른 제자”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불가사의입니다. 즉 그는 세마포와 머리 두건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는 믿었습니다!
8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8-9절)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이 문제입니다. 즉 이 두 구절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성경>을 제대로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는 언급이 8절 이후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믿음이 아직은 미숙하고 불완전한 수준에 머문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8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믿음”은 이곳에서처럼 아무런 수식어 없이 절대적인 의미로 사용될 경우 “참된 믿음”을 의미합니다(참고. 5:44; 6:47; 19:35; 20:29). “빈 무덤을 보고 믿는 것”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믿는 것”과 동일하다는 말입니다(참고. 4:48).
그렇다면 두 구절 사이의 모순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혹자는 9절이 괄호로 묶여있다는 사실을 들어, 후대의 편집적 삽입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는 불필요한 주장일 뿐입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제자들의 “믿음의 결여”가 아니라, “<성경>에 대한 “몰이해”(沒理解)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제자들이 ‘메시아’의 사역과 관련한 <성경>의 예언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은 ‘엠마오’의 두 제자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눅 24:25-27, 32),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참고. 눅 24:44-47). 당연히 “그 다른 제자”와 ‘베드로’도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9절에서 복수형 “그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그 다른 제자”가 이해하고 있는 것을 ‘베드로’를 포함한 나머지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서막의 마지막 표현 역시 흥미롭습니다. 즉 두 제자가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입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10절)
“그 다른 제자”는 집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빈 무덤”에 관하여 보고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제자들에게도 이야기했을까요? 전혀 알 길이 없으며, 행여나 그랬다 하더라도 이 짧은 부활 이야기 속에 그 모든 이야기들을 다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일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면, 과연 다른 제자들이 이 제자의 증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을까 입니다. 이들은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고서도 믿지를 못했습니다(눅 24:36)! 이런 제자들에게 그가 굳이 말도 안 되는(?) 주님의 부활을 믿도록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믿음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제 1막(11-18절)
두 번째 장면에서도 화자는 여전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으나, 이 여인은 다시 무덤 앞에 와서 울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11절)
그녀가 울고 있는 이유는 예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분의 유해(遺骸)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당황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만, 특히 당시 근동의 ‘유대’인들은 시체 유기(遺棄)나 훼손(毁損)을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사울’과 그의 자식들의 시체를 함부로 내버렸을 때, ‘야벳-길르앗’의 용맹한 사람들이 시체들을 거두어 장례의 예를 다하여 장사지내주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참고. 삼상 31:9-13).
지금 ‘마리아’는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염려하며 울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울면서 무덤 안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나 무덤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베드로’나 “그 다른 제자”의 경우와는 달리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예수님의 수의가 아니라, 두 천사였습니다.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12절)
천사의 출현을 언급하고 있는 이 장면은 <공관복음>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두 천사 대신에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여인들 앞에 나타났다고 전하고 있고(막 16:5), <누가복음>은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눅 24:4), <마태복음>은 “눈 같이 흰 옷을 입은 주의 천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찬란한 옷”이라든지 “눈 같이 흰 옷”은 모두 천상(天上)의 존재를 상징하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네 <복음서> 모두 천사가(그 숫자에 관계없이) 나타났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두 천사가 자리하고 있는 위치가 하나는 예수님의 머리 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발쪽이었다는 기록은 수의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암묵적인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시체를 가져간 주인공이 도적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는지에 대해서는 차차 밝혀질 것입니다.
천사는 좋은 소식, 즉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즉각적으로 밝히지 않고, 왜 우느냐는 질문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13절상)
<공관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여인들에게 대해서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언급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 16:6);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마 28: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 24:5). 이 경우에서 보듯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여인들의 행동을 그냥 제 삼자의 입장에서 서술해주고 있고, <누가복음>은 천사의 수사적 질문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천사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는 이내 몸을 돌이킵니다: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13절하)
그런데 이 장면은 다소 이상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천사들로부터 몸을 돌렸다는 언급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왜 그랬을까요? 혹자는 이곳에서 두 에피소드가 아주 부자연스럽게 연결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만,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동굴 입구 근처에서 무엇인가 인기척을 느껴 그쪽으로 몸을 돌렸을 수도 있습니다. 과연 그녀는 그곳에 한 사람이 서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14절)
이 대목은 다른 <복음서>들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 역시 ‘예루살렘’으로부터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예수님을 만났으나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갈릴리’ 호수로 물고기를 잡으러갔던 다른 제자들 역시 해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서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입니다: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막 16:12). 또 다른 가능성은 그들의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 24:16).
첫 번째 가능성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다른 모습은 그분이 입었던 옷 때문이 아니라 부활로 영화롭게 변한 그분의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가능성은 성령의 계시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심령이 아직 준비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보다 성령님의 사역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점과 관련해서 ‘불트만’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는 그를 알아볼 수 없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의도인 즉은 분명 ‘마리아’의 주목을 끌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만, 그녀는 자신에게 말하는 분이 예수님인 줄을 깨닫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부활절 기간 동안 그렇게 이른 새벽에 동산 지기가 아니라면 누가 그곳에 있겠는가?” 이것이 ‘마리아’의 생각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마리아’는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덤이 이처럼 깨끗하게 치워져 있으니 이 동산지기가 반드시 나쁜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예수님의 유해를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겼겠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그녀는 그 동산지기에게 말을 건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5절)
바로 이 순간 예수님께서 마침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계시(啓示)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계시는 단순히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족했습니다. 평소에 그녀를 부르던 것처럼 말입니다. ‘마리아’ 역시 평소 하던 대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답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을 반영하듯 그녀의 대답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선생님!”하고 부르는 그녀의 대답 속에는 자신의 마음과 가슴으로 드러낼 수 있는 그 모든 사랑과 믿음과 기쁨이 녹아 있었을 것입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를 때, 양이 그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참고. 10:3). 예수님은 이렇게 하여 ‘마리아’와 인격적인 관계를 새롭게 맺으신 것입니다. ‘마리아’ 스스로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관계를 말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선생님”라고 부르던 그 순간부터 이전과는 다른 더 깊은 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a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b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17절)
“붙들지 말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마리아’가 취한 행동은 <마태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는 여인들의 행동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마 28:9). 즉 ‘마리아’는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발을 붙잡으려 했을 것입니다. 물론 두 <복음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 동사가 다르기는 합니다만, 의미로 볼 때 사실상 무방하다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붙들다”는 동사로 ‘하프토마이’(a{ptomai)를 사용하고있고, <마태복음>에서는 같은 의미로 ‘크라테오’(kratevw)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인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당시 근동 지방의 풍습으로 볼 때 지극히 친숙한 모습으로, 상대에 대하여 예(禮)를 갖추어 존경과 사랑을 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 이 말씀은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가장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특히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 하였노라”는 말씀과 연관 지어 생각할 때 더욱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마리아’로 하여금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메시지, 즉 그분께서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차라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메시지가 지금 상황에서는 더 타당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이 두 메시지는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 두 메시지 사이의 차이를 구별해 내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분께서 아직 하나님께로 올라가지 않았으므로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 수 없다면, 왜 ‘도마’는 예수님의 상처를 손으로 만져볼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인가? 이 두 에피소드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승천(昇天)을 하셨다는 말인가?
이들 질문과 관련해서 <마태복음>에서 그리고 있는 유사한 장면을 떠올려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 28:10). 이 장면에서는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메시지의 내용이 다릅니다. 즉 제자들로 하여금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참고로, <마태복음> 28:7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한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천사입니다). 이 명령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이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새롭게 그분의 부활과 승천에 관해서 듣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 <복음서>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전할 소식은 그 강조점이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점과 관련해서 혹자는 17절을 두 부분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한 절로 보아야 하며, 전체적인 의미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 ‘막달라 마리아’로 하여금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소식은 괄호 속으로 처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주장에 따라 17절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으므로, 나를 붙들지 말라. 그러나 이제 오래지 않아 올라갈 터인즉,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 그리하여 그들이 내가 어떻게 이렇게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너보다는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사전에 준비할 수 있도록 하라.” 여기서 “이제 오래지 않아 올라갈 것”이라고 새롭게 추가한 미래형 문장은 “이제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는 중이니”의 현재형 문장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 17절에서 “올라간다”는 현재 진행형의 의미가 강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올라간다”가 의미하는 바는 특별히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구속 사역의 전체적인 시각, 즉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전 과정에서 바라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분의 사역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락방 강론을 통해서 이미 그 일에 대해서 들어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주님께서는 아버지 집에 제자들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려 간다고 말씀하신 바 있고(14:2), 그들과 재회함으로써 그들의 근심을 몰아내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해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며(14:18-19; 16:16-22),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동거하게 되는 새로운 관계에 대해서도 말씀하셨고(14:21-23), 능력의 기도와 사역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새로운 시대도 약속해 주셨으며(14:12-14; 16:23-24),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이어 성령님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깨닫고 그들의 사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부활”이라는 용어 대신에 사실 상 “승천”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결국 두 단어는 같은 것이며, 둘 다 예수님의 죽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전하는 것이나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고 전하는 것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후자의 경우는 예수님의 부활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전자(前者)의 표현은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포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17절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전할 소식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로 올라간다” 그 이상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여기서 형제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혈연의 형제들이 아니라,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범위는 더 확대되어 모든 신자들을 일컫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고, 성령님을 이들에게 보내심으로써,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룻’의 결단을 상기시켜줍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그러나 ‘룻’과 신자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선택한 자는 ‘룻’ 자신이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구세주 예수님의 선택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의 구속의 사역, 즉 죽음과 부활과 그리고 승천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18절)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을까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심지어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해버립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 하니라”(막 16: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눅 24:11). 이제 예수님께서 이들 앞에 직접 나타나셔서 보여주는 수밖에는 없게 되었습니다.
3. 제 2막(19-23절)
때는 부활절 저녁, 제자들이 모처에 모여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와 병행되는 장면이 <누가복음>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눅 24:36-42).
아마 이때쯤이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돌아와서 그들이 만난 예수님에 대하여 보고도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문도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절)
문이 닫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 방에 나타나나셨다는 사실은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더 이상 시공(時空)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그분께서 원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닫힌 문을 그대로 통과했다는 사실을 시공을 초월하는 그분의 능력을 보여주는 한 증거로 삼기에는 부적절하다 하겠습니다. 오히려 그분께서 어떻게 이곳에 나타나셨는지는 우리의 이해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닫힌 문”의 기능은 다른 데 있습니다. 여기서 화자가 전하는 “닫힌 문”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제자들의 두려움을 반영하는 모티브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두려움에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떨고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평강”(즉 ‘샬롬’)의 인사말은 아주 각별하다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이 인사말은 문학적으로 “닫힌 문” 즉 두려움과 대척점에 서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샬롬’은 당시나 지금이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사말, “안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날은 여느 날이 아니기 때문에 각별합니다. 이날은 부활절 저녁이며,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인사말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성취로 기대하던 바가 바로 ‘샬롬’이었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으로 이루어졌다는 선언이 예수님의 인사말 속에 내포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즉 부활절 저녁에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샬롬’은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외치신, “다 이루었다”는 선언에 대한 보충 설명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과 화평(和平)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즉 ‘샬롬’)를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전하시는 ‘샬롬’은 부활절의 인사로 더 이상 적절할 수가 없는 인사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바울’ <서신서>에서 인사말로, “은혜”와 함께 “평강”(‘샬롬’)이 등장하고 있는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상처 난 자신의 손(그리고 발도)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참고. 눅 24:39). 이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완화시켜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금 그들 앞에 서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들의 주님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확인 작업은 향후 교회의 신앙 고백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즉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시며, 부활하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쏟으시고 죽으신 세상의 구세주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절)
사실을 확인한 제자들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이 또한 예수님께서 다락방 강론에서 이미 약속하신 바이기도 합니다. 즉 그분께서 다시 그들에게 와서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놓겠다는 약속입니다(참고. 14:18; 16:20-22). “기쁨”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의 원천입니다(예. 사 25:6-9; 54:1-5; 61:1-3). “기쁨”은 또한 부활절의 분위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평강”을 전하면서, 동시에 이른 바 “선교적 위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를 “대위임령”(the Greatest Commission)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공관복음>에서도 마지막은 항상 동일한 선교에 대한 위임(委任)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만, 그 형태는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각 복음서의 공동체가 처해있는 상황과 형편이 다르거나, 또는 각 <복음서>의 화자가 지니고 있는 복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인식이나 통찰력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경우는 이 위임의 당부 말씀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 비교적 짧고 간략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교에 대한 강조점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거나 약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나도...한다”는 표현 때문입니다. 사실 <요한복음>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 중의 하나도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에 보낸다”입니다(참고. 17:18). 이 주제는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와 사실 상 같은 권위를 같는다”라는 ‘유대’의 일반적인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골로새서>는 이를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골 1:19). 즉 아버지는 아들의 말과 행동과 인격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이제부터는 주님의 대리자로 세상을 향해 주님을 드러낼 때가 온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영접하는 자들은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이는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하신 말씀이 실제로 작동할 때가 온 것입니다(참고. 13:20).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님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주시는 목적은 선교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2절)
여기서 “숨을 내쉬다”는 표현은 당연히 문자적으로 이해해야겠지만, <구약>에서 “하나님의 호흡”(즉 생기)은 생명의 창조나 소생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살아있는 생명으로 만들었습니다(참고. 창 2:7). 그리고 선지자 ‘에스겔’은 바람으로 하여금 죽은 자들에게 들어가 다시 살아나게 한 바 있습니다(참고. 겔 37:9-10). 특히 <에스겔>의 이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서부터 이스라엘의 고토(故土) 회복을 예고하는 환상으로서, 여기서 생기(즉 성령)의 역할은 예루살렘 귀환(歸還)을 자극하고 재촉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생기를 부활과 관련해서 사용한다 해서 전혀 놀랄 일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행동 역시 하나의 상징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맞아 성령님을 통해 생명을 전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창조는 상호 보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구절을 새로운 창조의 시작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새로운 창조 안에 인간을 포함시키는 행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새로운 창조는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드러나고, 또 성령님에 의하여 구체화된 사건입니다(참고. 고후 5:17).
그런데 “성령을 받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 질문을 낳게 합니다. 하나는 그 대상에 관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시기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선 첫 번째 질문에 관해서는 큰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성령님의 사역은 당시 이 자리에 모인 제자들에게만 국한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앞선 다락방 강론에서 약속하셨던 보혜사 성령님이 열두 사도들에게만 국한될 수 없듯이, 성령님을 통한 제자들의 사역(21-23절) 또한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교회의 사역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두 번째 질문입니다. 즉 당시 제자들이 언제 성령을 받았을까요?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성령 강림은 오순절에 이루어진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참고. 행 2장). 그렇다면 “성령을 받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실제 많은 학자들도 22절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칼빈’(Calvin)도 제자들은 이날 마치 세례식에서 머리 위에 물을 뿌리듯 성령을 부분적으로 받았을 뿐이며, 완전하고도 충분한 형태의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 즉 성령의 점진적인 강림에 대한 인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부활절과 오순절을 기계적으로 구분하여,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 사이에 쐐기를 박아 차별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성령 강림과 관련된 두 기록은 전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일까? 즉 과연 <요한복음>은 부활절에, 그리고 <사도행전>은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렇게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 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성령강림을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일 뿐입니다. 즉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의 사건으로서, 성령 강림은 이들 세 사건이 부활절이라는 상황 안에서 한데 어우러져 일어난 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따로 떼어 부활절 40일 후에 일어난 별개의 사건으로 보고, 이날(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한 것으로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두 기록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성령이 두 번에 걸쳐 강림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두 기록 중 한쪽이 다른 한 쪽의 기록을 수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거니와, ‘요한’ 화자는 <부활 이야기>를 들려줌에 있어, 부활에서 오순절까지의 전체 사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시간대 별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다만 네 개의 에피소드를 선별하여 부활 후 일주일을 추적하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도 정확한 시간 순서를 따르고 있지도 않습니다. 추측건대, ‘요한’ 화자도 <사도행전>에서 기록하고 있는 오순절 사건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부활 이야기> 속에는 정확하게 언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서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는 어차피 필수적인 일일 것이므로, 굳이 다시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구절은 부활 이후 대위임령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23절)
<마태복음>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두 구절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내용 상 이들 구절은 위 23절과 사실상 대동소이하여, 원래 같은 전승에서 유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 <복음서>에서 이들이 등장하고 있는 시점이나 상황은 분명 다릅니다. 두 경우 모두 제자나 사도들이 수행해야 할 사역의 성격이나 내용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를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상황에 적용하고 있으며, <마태복음>에서는 그 이전의 상황, 즉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제자들에게 위임된 사역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매다”와 “풀다”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 두 행위는 재판관의 판결 행위를 연상시켜주는데, 범죄 혐의(嫌疑)를 받은 피의자(被疑者)를 “구속”(拘束)하거나 또는 “방면”(放免)하는 행위가 그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상황에서 보면, 재판관은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제자)로 이해할 수 있으며, “매고 푸는” 행위는 “죄 사함”이나 또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 둘은 복음의 메시지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서, 사도들의 권위와 직결되어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권위는 예수님 공생애 당시나 부활 이후가 다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마태복음>에서는 위임의 말씀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 중에 있었던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 이후에 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수난 기간 중에 보여준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그 “반석”이 ‘베드로’가 될 수가 없음은 자명해 보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주목할 대목은 성령님에 대한 언급입니다(참고. 22절). 따라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위임(大委任)은 별개의 것이라기보다는, 동일한 사역의 연장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에게 방점을 두고 있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성령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특히 성령님을 통한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께서 다락방 강론에서 이미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15:25-26; 16:8-11).
이처럼 “매고 푸는” 사역은 이중적인 상황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중적인 결과도 수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일견 모순되는 복음의 양면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9:39).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끝나고 있는데, 그분의 죽음은 곧 “이 세상과 세상의 임금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참고. 12:31). 심판이 그리스도를 죽인자의 편에 서있는 모든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라면, 용서와 구원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는 모든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음의 이중성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고 그들 안에서 그들과 함께 사역하는 성령님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매고 푸는” 제자들의 권세와 관련해서 남은 질문은 그 적용 대상과 범위에 관한 것입니다. 예컨대, 교회가 예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이 권한을 세상에 대해서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만, 과연 교회 안의 다른 지체들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신자들이라 해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테니, 죄를 범한 신자들에 대해서 교회가 이 권세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할 것처럼 여겨집니다(현대적 용어로 이와 같은 권세를 治理權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누가 이 권세를 행사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가 이 권리를 행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참고. 행 5:1-11). 그리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범죄 한 영혼에 대해서는 교회가 그를 치리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참고. 고전 5:1-5). 이후 교회가 점차 조직화 되면서, 이른바 임명받은 성직자들이 점차 사도들의 직분을 대신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로마 카톨릭’ 교회는 위 <성경>의 사례들을 근거로, 사제들에 의한 고해성사(告解聖事) 제도로까지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이 제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 내에서조차 목회적 차원에서 죄의 용서나 심판에 관한 목회자의 권위 있는 훈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교회는 지체 상호 간에 피차 배우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4. 제 3막(24-29절)
<부활 이야기>의 세 번째 에피소드는 제자 ‘도마’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무대는 부활절 다음 주일 저녁입니다. ‘요한’ 화자는 ‘도마’가 부활절 저녁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성격의 일단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24절)
지금까지 <요한복음> 내에서 ‘도마’가 등장한 횟수는 두어 번 정도입니다(11:16; 14:5). 이 두 번의 등장을 통해서 드러나는 그의 성격은 다소 부정적입니다. 조급하고, 쉽게 자포자기하고, 비관적이며, 자주 자기 연민에 빠지는 사람으로 비칩니다. 이해하는 속도가 느리며, 그래서인지 질문에 아무런 거침이 없어 보입니다. 이와 같은 그의 성격의 일단이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질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5절)
수님의 가르침에 이해는
(1) Jn 11:46 - “우리도 죽으러 가자.” 이러한 태도는 일견 아주 용기 있는 것 같으나 실은 그의 조급하고도 비관적인 성격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우리도 얼마나 그와 같습니까! 쉽게 자포자기하고 자기 연민에 자주 빠지는 것이 말입니다. 진리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성경공부 하다 모르는 것 만나면 여기저기 책을 찾아봅니까? 당신은 당신이 갖기를 원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인내하며 끈질기게 투자합니까? 당신이 선택하고 있는 학과목의 리포트 제출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혹시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부산의 버스 종점 근처에 사는 어느 여인 이야기를 아십니까? 동네 버스정류장의 소음 문제로 그 회사를 상대로 끈질긴 3년 동안의 법정 투쟁 끝에 승소를 받아낸 여인 말입니다.
(2) Jn 14:5 -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나이까?” 또한 다소 비관적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상당히 합리적인 질문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이곳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태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주 합리적이고도 과학적인 태도가 그것입니다. 요한기자는 세 번에 걸쳐 도마의 질문을 반복함으로써, 다시 한 번 3이라는 숫자의 수사적 패턴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1)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2)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3)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 드러나는 모티브는 무엇입니까?
다소 과장된 것처럼 보이나, 실은 요한복음서 전체에서 마치 배경음악처럼 내내 깔려 오던 “의심과 회의”라는 모티브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제자들의 의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니라(요 4:48).”
따라서 도마의 의심도 이러한 선언의 한 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앞선 제 4막에서도 드러난 제자들의 의심을 다시 한 번 과장되게 표현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마리아의 증언이었습니다. 그 효과는 무엇입니까? “아니, 제자들마저도 그랬단 말인가?”
그의 이러한 질문은 실은 도마 혼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계몽시대 이후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소위 “과학적 합리주의”라는 인류의 최대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지극히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이 바로 “이성과 합리” 아닙니까! 특히 학문의 영역에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태도를 갖도록 교육받아 오지 않았던가! 객관적이고도 가치중립적인 자세는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추구하고 지녀야 할 덕목입니다. 그런데 이 이성과 합리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도마의 질문의 성격부터 분석해 봅시다.
먼저 그의 질문이 그렇다면 과연 합리적인가부터 따져 보죠. 과연 그러한가?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첫째, 그는 이미 많은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서입니까? 마리아로부터, 그리고 그의 동료 사도들로부터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지난 3년 동안의 체험을 토대로 충분히 논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말입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는 수없이 많은 기적들이 예수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는 것을 목격도 했고, 그리고 그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이죠. 그가 성실한 학생이기만 했더라도 충분히 그의 체험을 통해서 예수의 부활의 당위성을 논리적으로 끄집어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동료들을 믿지도 않았고, 그 자신의 체험으로부터도 아무 것도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앞뒤가 꽉 막힌 돌대가리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소위 과학지상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과학의 영역을 혼돈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과학에는 두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재현 불가능한 사건을 다루는 소위 기원과학의 영역이고, 또 하나는 실험과 반복이 가능한 그래서 귀납적인 추론이 가능한 소위 실험과학의 영역이 그것입니다. 그는 지금 재현 불가능한 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결코 믿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겠죠. 당신은 6.25사변을 역사적 사실로 믿습니까? 어떻게 보지도 않았는데 믿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다시 재현해 낼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것을 사실로 맏아들이고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세 번째 그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성의 능력을 과신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수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헤밍웨이 역시 이 점에 있어서 일찍이 동의한 바 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한 가지 질문을 해 봅시다. 만일 그에게 그가 원하는 증거들이 제시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가 믿을 수 있을까요? 그는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즉 그는 그가 만일 부활한 그 예수를 확인하기만 한다면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그의 착각입니다. 안다는 것하고 믿는다는 것하고는 전혀 별개의 것임을 그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는 지난 3년을 예수의 제자로 12명 속에서 살아 왔으면서도 한 번도 그 풍성한 의미를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자였습니다. 그래서 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두려움과 불안과 초조 등에 둘러싸여 고민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도대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전해 줄 수 없는 운명 가운데 살아 갈 수밖에 없었을 거란 말입니다: (예) 내 제자 천은우 등 (소위 모태 신앙). 이처럼 우리가 예수에 관한 모든 역사적이고도 과학적인 지식과 자료들을 다 소유한다 할지라도, 이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그 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2) 은혜와 계시(26후-27)
그러면 무엇이 해결책입니까? 인격체간의 만남은 단순히 그 상대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부릅니다. 그 자신의 이성적 탐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먼저 와서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왜 은혜입니까?
첫째,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평(peace with God)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히브리어로 우리가 잘 아는 샬롬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이 말은 그냥 “안녕”하는 정도의 인사말에 지나지 않지만, 그 날만은 예외였습니다. 부활절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봅시다, 다시 세번의 반복적인 인사가 주어지고 있는 것을!(19, 21, 26절) - 반복해서 읽어봅시다.
도대체 무슨 평강입니까? 그것은 화평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외치신 “다 이루었다” 라는 선언의 보충적 설명입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그 자신의 진노와 노여움을 스스로 먼저 다 풀었다는 의미입니다. 노여움을 풀다니요? 우리가 언제 그와 원수가 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두 말하면 잔소리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진노를 그냥 혼자서 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대신 피를 보게 함으로써 진노를 푸셨다는 말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즉 그 자신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강은 세상이 주는 그러한 종류의 정전 협정이나 로마가 이룩한 평화, 즉 Pax Romana 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 모든 곳에서 항상 이 단어를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세세토록 영원무궁할 지어다.”
두 번째, 이 평강은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오는 마음의 평화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평강(peace of God)인 것입니다. 이것이 왜 은혜입니까? 이것은 그 모든 두려움을 우리로부터 쫓아내기 때문입니다. 26절의 무대 장치와 분위기를 다시 봅시다: “문들이 닫혔는데...” 무슨 색깔인가요?
이 문은 무슨 문입니까? 그것은 문자적으로는 고독과 두려움의 문입니다. 19절을 봅시다. 그리고 보다 영적으로는 나는 이 문을 자기 자신의 이성과 합리의 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지금 이 우물에 갇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이 어두움을 몰아내는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말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증거들이 있다 해도,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지식들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를 결코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가지고 예수에 대해서 연구는 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또 그에 대해서 밤새 논쟁을 벌일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그를 만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가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으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요청합시다! 겸손히 요청합시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러나 주님은 도마가 개인적으로 이러한 요청을 하기 전에 이미 와 계셔서 그의 손을 뻗어 그를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의심하는 도마야, 네 손을 뻗어 나를 만져 보라(27절).”
도마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문제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증거 부족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바로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문제를 누가 해결해 주었습니까? 그가 증거를 제시받음으로서 입니까? 일견 그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가 예수를 만나서 만져 보고 확인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부활한 예수의 현존과 그의 말씀에 이미 압도되어 버린 것입니다. Let me repeat: 그의 말씀에 압도된 것입니다!
3) 의심에서 찬양으로(28절)
(1) 28절. 28절의 선언은 무엇입니까? 아, 역시 예수는 부활했구나! 사실 확인입니까? No, No, No, No,... 이것이 바로 요한 기자가 처음부터 일관되게 드러내려고 했던, 그러나 그 동안 계속해서 우회적으로 암시적으로만 드러내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오히려 감질나게 해왔던, 그 한 가지 주제가 지금 거대한 화산처럼 폭발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가장 의심 많던 제자의 가장 위대한 고백이 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찬양과 경배입니다!!! 그는 지금 예수는 주이고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이 찬양은 세상을 향해서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아니고,
오직 그가 발견하고 발견되어진
그의 주, 그의 하나님을 향한 외침이요 찬양인 것입니다!
그는 지금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로서의 부활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에게 체험되어 지고 있는 그 부활의 능력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마의 이러한 체험은 그 만을 위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도마 이야기를 듣고 있을 요한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추정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이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까요? 혹 지체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적으로 목격하지도 못하고, 의심하고, 반신반의하며 회의와 의심 가운데서 다시 한 번 그 자신 그러한 체험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며 신앙생활을 하기도 했을 것이며, 또 혹자는 믿지 않는 다른 이웃들로부터 예수의 부활을 증거토록 요구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즉 공동체의 목회자가 목회적 목적을 위해서 쓴 글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19절);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절)".
4) 결론 -믿음의 본질(30-31)
그 외의 목적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글이 지니는 선교적 차원의 목적입니다. 설령 처음부터 그러한 목적이 없었다고 하드라도, 우리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 결론에서 충분히 그러한 목적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읽는 모든 자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이를 믿고 생명을 얻어라.”
우리가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를 맛본다는 것이다. 그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를 순종하고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르쳐 지켜 행하게 하라.”
교훈과 적용
1. 아직 어두울 때에
역사(歷史)와 사기(史記) 즉, 역사 기록은 분명 다릅니다. 역사를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본다면, 역사 기록은 주관적이며, 선별적이고, 또한 의도적입니다. 역사가는 모든 역사적 사실을 낱낱이 다 기록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여러 사실들 중의 일부를 선별해서, 자신의 목적에 맞도록 배합하고 배열해서, 그의 청중이나 독자들에게 들려줍니다. 따라서 <성경> 이야기 속에 내가 궁금해 하는 내용들이 빠져 있다고 해서, 그 이야기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고 한다거나, 또는 <성경>의 역사 기록을 기초로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역사 기록에 관한 무지(無知)를 드러내는 짓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야기>는 차원이 다릅니다. ‘요한’ 화자(본문에서 “그 다른 제자”로 등장하는 인물)는 이곳에서 자신의 <부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면서 이례적(異例的)으로 그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이야기의 끝 부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물론 이 진술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록 목적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부활 이야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부활을 믿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의 이야기는 재판정에서의 진술처럼 누구에게나 분명하고 명쾌하여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부활 보고서”를 작성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보고서가 아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도 기존의 그것과는 정 반대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가 보아도 단순하고 명쾌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만들어야 할 텐데, 평범한 독자라면 그의 <부활 이야기>를 읽고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 할 수도 있겠습니다. 도무지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변증하고 변론하려고 이 글을 쓴 것 같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나마 주의 깊은 독자라면 행여 복선(伏線)이나 암시(暗示) 같은 것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그의 <부활 이야기>는 운전에 비유하자면, 오히려 역주행(逆走行)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는 마치 태초의 <창조 이야기>를 닮은 모습입니다(우리는 본 복음서의 서막도 태초의 창조 이야기의 서술 패턴을 따르고 있음을 관찰한 바 있습니다). 창조는 어둠과 혼돈과 공허 가운데서 시작한 바 있습니다(창 1:2). 이것은 창조 직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마다, 육일 간에 걸쳐 빛과 질서와 그리고 충만함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재창조 이야기” 즉 <부활 이야기>도 이러한 패턴과 유사합니다. 그는 네 개의 에피소드를 선별하여 시간대 별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즉 새벽 어두움 가운데서 시작하여, 아침에 이어 저녁, 그리고 일주일 후의 이야기로 나아갑니다. 그 절정은 물론 일주일 후의 에피소드에서 나타납니다.
<부활 이야기>의 서막(序幕)은 “안식일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열리고 있습니다(1절). 그렇습니다. 아직 어두울 때라고 말했습니다. 달리 표현해 보자면, “어둠침침하여 사물에 대한 식별(識別)이 어려울 때”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살인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 증언을 한답시고, “그 사건이 있던 시각은 어둠침침하여 누가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을 때였는데”라고 말하는 식입니다. 잘 보이지도 않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증언을 할 수 있다는 말일까요? 그러니까 이 사람의 증언은 처음부터 신뢰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증인은 자신의 증언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모습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여인이 어두움 가운데서 본 것이라고는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뿐이었음에도,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다”고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이 결론은 지나치게 비약적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당황한 ‘막달라 마리아’는 과연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기나 했을까요? 그리고 “빈 무덤”이 과연 그의 결론을 지지해줄 수 있을까요? 어떻게 “빈 무덤”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디론가 옮겨갔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증언 자체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증인 자신이 더 문제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여인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인의 증거는 증거로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기에 더하여 이 여인은 지금 홀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증언으로서의 효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적어도 두세 사람의 일치된 증언이 있어야 합니다(참고. 신 19:15).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이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그날 어둔 새벽에 동굴을 찾아갔던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니었다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마가복음>은 ‘막달라 마리아’ 외에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도 함께 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막 16:1-3). 만일 <마가복음>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안을 한 번 들여다보고는 다른 여인들보다 먼저 그 자리를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 여인이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보고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 16:7).
그러나 화자의 관심사는 누가 무덤 동굴에 갔느냐에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 문제라면 공동체 안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두들 아는 정보를 굳이 상기시킬 필요성은 없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공동체의 설교자는 회중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들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화자의 관심사는 ‘막달라 마리아’가 두려움에 떨며 전하는 빈 무덤에 대한 묘사에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전했습니다: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당시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강력한 암시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는 도둑이나 또는 대적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굴해갔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견 ‘요한’ 화자가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를 <부활 이야기>의 증거로 채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많은 학자들이 이 견해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논증에 관해서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 ‘프랭크 모리슨’의 <누가 돌을 옮겼는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 즉 “빈 무덤”에 관한 증언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소극적 증거가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즉 “빈 무덤”의 증언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나돌던 이른 바 “도난 설”(참고. 마 28:13-15)에 대한 강력한 반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체 도굴은 로마 시대 당시 사형에 준하는 범죄행위였다고 합니다. 이를 금하는 로마 황제의 칙령의 복사본이 ‘나사렛’에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현실이 이러한대 과연 누가 사형을 무릅쓰고 시체도굴을 감행했겠는가?” 이것이 화자가 던지는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겠지요.
하지만 역사적으로 회의론자들은 부활을 쉽게 믿는 자들을 매도할 때, 무엇이든지 쉽게 믿는 순진무구한 종교적 촌뜨기라거나, 또는 자기네 종교를 퍼뜨리기 위하여 당치도 않는 부활 이야기를 꾸민 아주 교활한 음모자라고 규정해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듯이, 정작 부활을 가장 먼저 부인하고 믿지 못하겠다고 했던 자들이 ‘막달라 마리아’나 사도들과 같은 단순하고 무지한 ‘갈릴리’ 촌뜨기들입니다. 그러니 부활은 이들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이른 바, “음모 설” 또한 설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화자는 그의 변론에 힘을 더하기 위한 목적인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빈 무덤의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를 듣고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동굴로 달려가서 본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두 사람이 달려가는 과정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예컨대, “그 다른 제자”는 왜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동굴에 먼저 도착했는지, 왜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가 오기를 기다렸는지, 동굴 안에 세마포가 놓였다는 사실을 왜 ‘베드로’에게 알려주지 않았는지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3-5절).
중요한 사실은 두 사람이 발견한 것이 단순히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수의(壽衣)와 머리를 쌌던 두건(頭巾) 그 이상이라는 점입니다. 즉 이것들이 그냥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시체를 싸고 있던 형태 그대로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6-7절). 이 장면은 소위 “도난 설”에 대한 또 다른 반증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중세 신학자 ‘크리소스톰’(Chrysotom)은 반듯하게 놓여있는 예수님의 수의와 머리 두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면, 힘들여 수의와 머리 두건을 벗겨, 그것들을 원래의 모습대로 가지런히 놓아두고 떠나는 수고는 왜 했겠는가?” 지당한 말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시체는 가져가면서 값비싼 몰약과 침향은 왜 두고 갔을까?”
맞습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의 화자는 가지런히 놓인 수의와 두건을 부활의 증거로 사용하고 싶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점을 백퍼센트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즉 빈 무덤 안에 남겨진 수의와 두건의 상태가 부활의 증거로서 그렇게 중요했다면, ‘베드로’는 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그 다른 제자”가 보고 깨달았던 의미를 ‘베드로’는 왜 놓쳤던 것일까? 누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 질문과 관련해서, 화자의 의도가 더 단순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즉 적어도 수의와 두건에 관한 한, 그가 방점(傍點)을 둔 것은 그것들의 상태가 아니라, 예수님이 더 이상 그 안에 둘려 싸여 있지 않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은 주님께서 죽음의 수의를 영원히 벗어던지고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른 제자”가 뒤에 남겨진 수의와 머리 두건만 보고서 주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그는 아마도 자신이 직접 기록한 ‘나사로’의 소생(蘇生)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을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이야기를 부활을 예고하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한 바 있습니다. 죽어 썩어가던 ‘나사로’가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에 되살아나서 동굴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상태는 수의와 두건을 그대로 두른 채였으며, 따라서 이 세상에서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것들을 풀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그것들로부터 빠져나왔으니, 부활의 표적으로 받아들이기에 결코 주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너무나 간단명료한 이 사실이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실제 단정하게 정리된 수의와 머리 두건을 먼저 발견한 이는 자신이었건만 그 앞에 벌어진 장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 표적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종의 불가사의(不可思議)였습니다. 같은 불가사의라도 “그 다른 제자”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불가사의입니다. 즉 그는 세마포와 머리 두건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는 믿었습니다(8-9절)!
그런데 여기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두 구절이 있습니다(8-9절). “그 다른 제자”가 보고 믿었다고 해 놓고서는 곧바로 그들(즉 제자들)이 <성경>을 제대로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토를 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믿음이 아직은 미숙하고 불완전한 수준에 머문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불필요한 주장일 뿐입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제자들의 “믿음의 결여”가 아니라, “<성경>에 대한 “몰이해”(沒理解)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제자들이 ‘메시아’의 사역과 관련하여 <성경>의 예언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은 ‘엠마오’의 두 제자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눅 24:25-27, 32),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참고. 눅 24:44-47). 당연히 “그 다른 제자”와 ‘베드로’도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9절에서 복수형 “그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그 다른 제자”가 이해하고 있는 것을 ‘베드로’를 포함한 나머지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서막의 마지막 표현 역시 흥미롭습니다. 즉 두 제자가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입니다(10절). 엄청난 사실을 목도했음에도 그냥 집으로 돌아가다니요! ‘베드로’야 그 의미를 몰랐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다른 제자”는 이럴 수는 없습니다. 물론 집으로 돌아가 그가 모시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빈 무덤”에 관하여 보고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제자들에게도 체험담을 나누었을까요? 행여나 그랬다 하더라도, 과연 다른 제자들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을까요? 이들이 누굽니까?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고서도 믿지를 못했던 자들이 아닙니까(눅 24:36)!
이런 제자들에게 굳이 말도 안 되는(?) 주님의 부활을 믿도록 강요하기보다는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란 자신의 믿음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가 과연 언제 올까요? 언제 쯤 그 일이 가능하게 될까요? 남은 부활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만, 그 가능성을 점쳐 보자면 처음 서막의 분위기만큼이나 희미하고 어두울 것이라는 전망이 듭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곧 불가능을 믿는 것이기에, 적어도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부활의 역설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가능한 일은 꿈꾸지 않습니다. 아니 꿈 꿀 필요가 없습니다. 가능하니 그냥 실천에 옮기면 실현될 것입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만, 이 말은 조건적입니다. 즉 “실현 가능한 꿈은 이루어진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부활은 그것을 믿는 안 믿든 얼마나 멋지고 황홀한 일인가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하니 말입니다. 혹시 우리의 화자가 이점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즉 “당신은 부활을 원합니까? 당신은 진정 부활을 필요로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습니까?
2. 마리아야! 랍오니!
KBS TV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 하나를 꼽으라면, 매주 월요일 저녁 10시에 시작하는 “가요무대”입니다. 이 프로가 2015년 가을, 방영 30주년을 기념하는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이는 세계 TV 방송 사상 초유의 일로, 단일 프로그램이 그토록 오랜 방송 기록을 세운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이 프로를 애청하는 한국인들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이 프로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방송될 수 있었던 비결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이 그 프로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 프로를 그렇게 좋아할까?
이 프로가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품어왔던 그 숱한 그리움을 내대신 노래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움을 노래하는 그 많은 노래들 중에서 저 유명한 노래 <동백 아가씨>의 노랫말을 한 번 기억해 보기로 하지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1절)
이 아가씨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되, 새로운 이름이 동백 아가씨가 된 것이 글쎄 그리움 때문이랍니다. 돌아오지 않는 임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곁에서 지켜보던 동백나무의 꽃잎마저 빨갛게 멍이 들었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잘 아는 <목포의 눈물>에는 이런 노랫말도 있습니다: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이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네,
못 오실 님이라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눈물
여기 목포의 아가씨는 임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그 때 자기 가슴을 도려내어 함께 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리움이 사무쳐 한(恨)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사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요무대>는 사랑하는 임에 대한 그리움만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 6ㆍ25 사변 당시 이북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 군대 침상에 누워 잠 못 이루는 한 병사가 노래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어릴 적 함께 고향에서 놀던 친구들, 심지어는 가난했던 시절 나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던 하숙집 주인에 대한 그리움마저 노래가 되어 흘러나옵니다. 한국의 가요, 특히 트롯토를 우습게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그것은 한국 사람의 정서요, DNA입니다. 아쉽게도 요즘 노래에는 이런 시(詩)가 없습니다.
도대체 그리움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쉬움입니다. 미련이며, 후회이며, 안타까움입니다. 이것이 쌓이면 한(恨)이 됩니다. 우리는 왜 그리워하며 아쉬워합니까? 왜 후회하며, 한탄합니까? 젊었던 시절에는 그리움이 쌓일 겨를이 없습니다. 오히려 희망과 포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 들수록 그리움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갑니다.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면 할수록, 아쉬움과 그리움만 남을 뿐입니다. 그 때 같이 놀던 그 친구들, 함께 다니던 그 장소들이 다시 보고 싶어집니다.
왜입니까? 바둑처럼 지난 것을 복기(復棋)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한 번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인생이 바둑 같다고 합디다만, 복기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생은 바둑과는 전혀 다르다 하겠습니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총구를 떠난 총탄을 다시 총구 속으로 되돌아오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한 번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세월을 되돌려 내가 저질렀던 수많은 잘못들을 복구할 수가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말했듯이, 한 번 태어난 사람은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이 여인은 지금 왜 여기서 이렇게 하염없이 울고 있는 것입니까? 다른 날도 아닌 부활절 아침에 말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환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시점에, “동백 아가씨”를 부르고 있으며,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의 가슴은 빨갛게 물들었고, 예수님 돌아가실 때 함께 보내지 못한 내 마음을 부여잡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그리움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던 선생님이 영영 오지 못할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억누르고 마지막 예(禮)를 갖추려고 무덤에 와보니, 그분의 시체마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이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는 희망과 환희의 부활절 아침을 그날 ‘막달라 마리아’는 절망과 슬픔으로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이 여인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 즉 지난 삼년동안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과, 사도들과, ‘갈릴리’의 여인들 역시 불신과 절망으로 이날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사전에 듣지 않았던 것도 아니나, 제대로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사실 부활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정작 돌아가셨을 때, 그들 역시 함께 죽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이 죽어버렸으니, 사실 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이들도 한 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9). 이 믿음이 이제는 흘러간 과거지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각자는 생업(生業)을 위해 원래 있던 그 곳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집으로, 마을로, 그리고 바닷가로. 그러니까 역사상 첫 부활은 믿음이 불신으로, 소망이 절망으로 바뀌던 날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여인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불신의 대표적인 사도(師徒)를 꼽으라면 ‘도마’일 것입니다. 교회는 그를 “의심 많은 도마”로 부르고 있습니다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의심 많은 자가 아니라 아예 불신자(不信者)였습니다. 그는 단호하고, 솔직하며, 고집스럽고,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성격의 일단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 20:25). 이것은 의심이 아니라, 아예 대놓고 거부하고 불신하는 태도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 소망(所望)이 있을 리 없습니다. 소망도 믿음과 함께 죽어버렸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절망이 깊었으면, 함께 걸어가며 자신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인줄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한 때 가졌던 소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눅 24:21). 그가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나버렸으니 이제 ‘메시아’에 대한 그 소망도 사라져 버렸다고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도 죽고, 소망도 죽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왜 여기서 이렇게 하염없이 울고 있는 것입니까? 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울고 있을까요?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남은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리움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이제 이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사랑을 제일이라 하는지 말이지요. 믿음과 소망은 비록 사라졌을지라도, 사랑은 여전히 그리움이 되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 우리의 순애보 ‘막달라 마리아’!
지난 삼일 내내 울고 또 울었건만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있는 듯합니다. 두 천사가 그녀에게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도, 전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사람들이 주님을 어디다 두었는지 몰라서 운다고 대답합니다(14절). 이들이 천사인줄도 몰랐던 것이겠지요. 오직 사라진 주님의 시체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에 이들이 누군지 알 겨를도 없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일까요? 그래서 이 말을 하고 그녀는 몸을 돌이켰는데, 바로 그 순간 동굴 입구 쪽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봅니다.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리운 그 사람, 애타게 찾던 주님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누구인지 이번에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냥 동산지기 인줄로만 알았다고 화자는 전합니다(14절). “왜 ‘마리아’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어쩌면 이렇게 묻는 자체가 어리석은 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기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삼일 전에 돌아가신 내 어머님이 지금 내 앞에서 서있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다 분명 주님의 모습 또한 변해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주님이 다시 묻습니다. 왜 울고 있으며, 누구를 찾는지. 그런데 ‘마리아’의 대답이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5절). ‘몽고메리’(J. B. Montgomery) 목사님은 이보다 더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이 왜 그토록 감동적입니까? ‘반하우스’(Barnhouse) 목사님이 이 여인에 대하여 느낀 그의 감동을 본인의 감정을 섞어 다시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이 여인은 지금 한 남자의 시체를 요구하고 있다. 삼일 밤낮을 거의 뜬 눈으로 보내면서 울고 또 울어 가슴은 텅 비었을 터인데, 여전히 흘릴 눈물이 남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 동굴을 몇 번이나 왕래했을까! 그리고 무려 백 파운드의 침향과 몰약과 함께 세마포에 싸인 그 시체를 마치 깃털 취급하듯 옮기겠다고 요구하고 있다니! 힘센 장정도 혼자서는 옮기기가 어려운 그 무게를 전혀 고려함도 없이 말이다. 이처럼 그녀는 선생님을 사랑했던 것이다. 비록 믿음과 소망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분에 대한 사랑은 아직도 남아있기에 여인이 감당하기에는 불가능한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 땅과 하늘을 통 털어 이처럼 위대한 사랑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동산지기에게 이 말을 하고서 ‘마리아’는 다시 등을 돌려 동굴 안을 들여다봅니다. 지금 동산지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심정이 아닌 것이지요. 그에게는 관심도 없습니다. 행여나 하는 심정으로 동굴 안을 다시 수색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등 뒤에서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음성을 듣습니다: “마리아야!”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부른 것입니다. 이 순간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태초의 공허와 흑암과 혼돈은 마치 들을 귀라도 가진 인격체인 것처럼,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반응하여 나아옵니다(창 1:2-3). <시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나사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어서 이미 단순한 유기물질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아닌 그 물질들을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사로’를 구성했던 그 원자와 분자들이 마치 먼 시간 여행을 역주행 하듯 공허와 흑암과 혼돈을 헤치고 거슬러서 다시 현실로 살아나옵니다(11:43-44).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야말로 찰나의 지체함도 없이, 그녀는 응답해 옵니다: “랍오니”하고 말입니다. 이 짧은 순간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마리아’ 안에서 태초의 천지창조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믿음과 소망이 다 사라지고, 공허와 흑암과 혼돈으로 가득 찬 ‘마리아’의 영혼이, 창조의 명령을 들은 것입니다: “‘마리아’야 너에게 빛이 있으라.” 그 순간 ‘마리아’는 ‘나사로’가 겪었던 그 일을 겪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동굴을 빠져나오신 것처럼, 그녀 역시 죽음의 동굴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즉 ‘마리아’는 바로 이 순간 자신의 부활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마리아’의 응답, “랍오니” 속에 이 모든 일이 다 녹아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부활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 지부터 먼저 묻는 것입니까? 왜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까요?: “아, 나는 정말 부활하고 싶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단 말이야.” 적어도 후회와 미련으로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자라면, 더욱 처절하게 부활을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부활이 모두에게 쉽게 믿기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입니다.
‘필립 얀시’의 말대로, 부활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되돌려놓았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난 세월을 되돌릴 수 없어, 후회와 미련과 그리움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부활은 내가 지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이자 약속입니다. 부활은 내가 그토록 간구하던 그것을 이루어놓았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살고 싶다는 그 소망 말입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는 그 소망 말입니다. 이것들은 다 헛된 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이 헛된 꿈을 가능한 현실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 다시 사셨습니다!
3. 내가 주를 보았다!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는 결국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임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게 됩니다. 아이가 철이 들어 사려분별을 할 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아이가 ‘산타크로스’가 더 이상 실존의 인물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갖게 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이제 더 이상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자부심일까? 꿈이나 ‘판타지’를 먹고 사는 철부지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지식인이 되었다는 자존감일까? 그래서 이제부터는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살아야겠다는 각오라도 가지게 되었을까?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의 지식이 늘어도, 꿈을 간직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바램 인가 봅니다.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영화들을 보면 이른 바 ‘판타지’ 계열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별들의 전쟁; Star Wars>을 위시해서, <스타 트렉>, <쥬라기 공원>,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인디아나 존스>, <아바타> 등은 비단 어린 아이들 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열광시켰던 영화들입니다. 특히 <별들의 전쟁>은 여섯 편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시리즈가 끝난 지 이십년이 지나, 다시 새로운 시리즈 제 1편 <별들의 전쟁: 깨어난 포스>가 최근 상영된 바 있는데, 상영 3주 만에 역대 최고의 흥행수입기록을 다시 갈아치웠다고 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 같은 영화들에 대해서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이들 영화들이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겠습니다. 즉 말도 안 되는 공상과 허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믿기 위해서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보는 것입니다.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어, 어린 시절에 지녔던 꿈과 낭만을 자극하고, 추억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산타크로스’처럼 말입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굳이 이들 영화가 비과학적이라 하여 몰아내고 배척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얻게 되는 유익이 과연 무엇일까요? 공상과 상상을 내 마음으로부터 몰아내고 나면 과연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공허와 어둠과 혼돈(混沌) 외에 딱히 남는 것이 있을까? 이 모습이 아이가 철이 든 이후의 모습은 아닐까요? 도대체 철이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나의 경우를 돌이켜보면, 그 해맑고 순진무구한 웃음, 그 많은 꿈과 희망, 그 많은 공상과 상상을 상실하면서 어른이 되어왔다는 생각입니다. 예컨대, 최근 들어 내가 크게 한 번 마음 놓고 웃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하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로 가슴 벅차 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막막함이나 무기력뿐입니다. 매일 아침기도 시간마다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결심해보지만 작심삼일은커녕 저녁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모두 안개처럼 사라져버리고 없습니다. 얼마 전 김종필 씨가 구순(九旬) 잔치에서, 지난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자 풍운아로서 참으로 역동적인 삶을 살아온 그분도 이런 생각일진대, 하물며 나 같은 범인(凡人)이야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 인생이 정말 살 것 없다고 생각하는 이는 이분 뿐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꿈과 비전을 실천하며 살았던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성인(成人)이 된다는 것, 노인이 된다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웃음과, 꿈과, 열정과, 공상과, 상상력이 모두 소진되고, 그 자리를 외로움이나 고독, 그리고 적막과 허무와 쓸쓸함 등이 대신 차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 시절 생육하고 번성하던 활기 찬 창조의 날개 짓이 서서히 동력을 잃어가는 시기가 이때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날개 짓이 완전히 멈추면 영원한 수면, 즉 반창조의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일만 남은 시기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태야말로 창조의 요람이 되고, 모티브가 될 수 있다고 시인 장석남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촌들인 외로움, 고독, 적막, 허무, 쓸쓸함 등등의 안개와도 같은 이 말들이 어쩌면 우리들에게 창조적인 삶의 에너지를 넣어주는 정신의 대지일지도 모른다. 고독과 적막이 중매(仲媒)한 그 많은 문학이 그렇고, 허무와 쓸쓸함이 중매한 그 많은 음악이 그렇듯이 말이다.” 이 얼마나 성경적인 상상입니까! 이 사람은 지금 태초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듯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뒤덮여 있으면서 하나님의 창조적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 말입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 전까지,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이 이랬을까요? 몇 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아리마대 요셉’의 동굴을 찾아갔던 것은 선생님이 평소에 말씀하시던 무슨 부활을 기대하고 갔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평소 예수님께서,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셨을 때, 제자들이 보였던 반응은 꿈과 희망이 아니라 근심이었습니다(참고. 마 17:22-23; 막 9:30-32; 눅 9:43-45). 예수님은 이들에게 다시 돌아올 테니 근심하지 말라고 타이르기도 했습니다(참고. 요 14:1-3).
아니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서, 다시 돌아온다고 했는데 왜 근심합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는 일은 늘 일상의 경험이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일은 공상이고 망상입니다. 당연히 제자들의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죽음에 관한 것이지, 부활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막달라 마리아’가 무슨 신통한 믿음이 있어, 부활을 기대하고 그 동굴을 찾았겠습니까! 그 반대일 가능성이 큽니다. 외로움과, 고독과, 적막함과, 허무함과, 쓸쓸함을 안고 그 동굴을 찾아간 것 아닐까요?
새로운 창조, 즉 부활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선생님!”하고 부르는 ‘마리아’의 대답 속에는 자신의 마음과 가슴으로 드러낼 수 있는 그 모든 사랑과, 믿음과, 기쁨이 녹아 있었겠습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를 때, 양이 그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참고. 10:3). 예수님은 이렇게 하여 ‘마리아’와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신 것입니다. ‘마리아’ 스스로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관계를 말입니다. “아, 이제 내가 선생님에게 달려가서, 무릎 꿇고, 그분의 발에 폭풍같이 키스하며, 경배하리라”하며 달려가려는데, 아니 이 무슨 실망스러운 말씀입니까!
“나를 붙들지 말라”는 것이에요. 이 말씀은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가장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특히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 하였노라”는 말씀과 연관 지어 생각할 때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참고. 17절상). 그런데 어찌하여 <마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가(다른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참고. 마 28:9).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 수 없다면, 왜 ‘도마’에게는 예수님의 상처를 손으로 만져볼 수 있도록 허용하셨을까(참고. 20:27)? 이 두 에피소드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승천(昇天)을 하셨다는 말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런저런 질문들에 대해서 아무도 일치되고, 만족할 만 한 대답을 주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가지 설명을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 맺어진 새로운 관계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나를 붙들지 말라”를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육체적 접촉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여기서 사도가 의도하는 바는, 예수님을 이제부터는 혈과 육을 지닌 인간 예수가 아닌, 부활하신 “주님” 내지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하자는 것일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과 맺은 새로운 관계란 영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육신(肉身)의 선생님으로 제한하거나 국한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붙들지 말라”는 충고도 그와 같은 “(육신적 사고에) 머물거나”, 또는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어떨까요? 육신의 대가(大家)를 들자면 단연 ‘베드로’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하셨을 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항변했습니다(참고. 마 16:21-22). 그리고 “변화 산”에서 초막을 짓고 영체(靈體)로 변화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그곳에서 계속살기를 원했습니다(참고. 마 17:4).
가서 이르라. 이 같은 요구는 당연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변화하신 예수님을 그렇게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육신과 영체가 함께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육신적 사고를 교정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참고. 마 17:5). 그와 비슷한 상황이 지금 ‘막달라 마리아’에게 일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라”(17절하).
무엇을 전하라는 것입니까? 무슨 소식입니까?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소식입니다. 불가능한 소식입니다. 도저히 현실이 될 수 없는 소식입니다. 그저 희망 사항에 불과했던 소식입니다. 판타지가 현실이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공상이 현실이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당연히 ‘마리아’가 전할 소식은 그 강조점이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이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새롭게 듣게 될 소식은 “그분이 살아나셔서, 이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고 있다”입니다.
‘마리아’가 전할 소식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로 올라간다”는 그 이상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17절하). 여기서 형제들은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신자들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고, 성령님을 이들에게 보내심으로써,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현실입니다. 화자는 이 대목에서 <요한복음>의 서막의 선언을 다시 한 번 기억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듯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예수님의 말씀은 ‘룻’의 결단을 상기시켜줍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며느리가 그 시어미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시어미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겠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룻’과 신자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선택한 자는 ‘룻’ 자신이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구세주 예수님의 선택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으면, 그분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삼아주셨겠습니까! 그분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이 이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단순히 좋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슴 벅찬 이 소식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혼자만 아는 비밀로 가슴 속에 묻어두거나, 아니면 떠들고 다니거나 입니다. 우리의 ‘마리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대답이 필요 없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시기도 했지만,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맹인들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눈이 밝아진 것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음에도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고 다녔습니다(마 9:30-31). 바로 여기에 창조의 위력이 있습니다.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드는 힘 말입니다.
‘마리아’ 역시 너무 좋아서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이 소식을 안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내가 주님을 보았다!” ‘베드로’가 “변화 산”에서 이와 유사한 일을 겪었을 때 보였던 반응과는 백팔십도 다르지 않습니까! 지금 이 장면은 내가 익히 아는 한 장면과 겹쳐지고 있어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수가’ 성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쳐대던 그 장면입니다. 그 장면은 <요한복음>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오페라 “사마리아 여인”은 세 번의 절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 번의 절정 모두에서 핵심은 예수님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즉 첫 번째 절정은 예수님의 극적인 자기 계시, 즉 “내가 그라”고 밝히시는 장면에서 볼 수 있으며(4:26), 두 번째 절정은 환희(歡喜)에 찬 여인의 ‘아리아’ 즉 대중 고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보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냐”(4: 29절하). 그리고 또 한 번의 절정은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수가’ 성 주민들이 관객 즉 온 세상을 향해서 외치는 대 합창입니다: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시라”(4: 42). 이 장면은 오페라의 ‘휘날레’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여인의 사랑의 고백에 이어, 극중 등장인물들 모두가 무대에 올라 거대한 환희의 합창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베토벤’의 “song of joy”를 부르는 듯한 장면입니다. 어떻게 이 모든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한 ‘사마리아’ 여인 때문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세월 호 선장 이 준석 씨를 언급하고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얼마 전 법원은 그에게 무기징역의 중형을 내렸습니다. 판결의 요지인 즉은 배의 상태나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 잘 아는 선장이 이를 승객들에게 사전에 알려 대피하도록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이건 직무유기를 넘어, 미필적 고의(未必的 故意)에 의한 살인 행위입니다. 희생자 가족은 물론 우리 모두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판결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 역시 이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구원의 복된 소식이나, 임박한 종말과 심판에 관한 한, 나는 ‘마리아’이기보다는 이준석 씨에 더 가깝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내 삶을 역동적이며, 활기차게, 그리고 풍성하게 해줄 그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 그 출발점은 이것일 것입니다: “나는 과연 주님을 보았는가?”
4. 너희에게 평강을
우리는 이제 <부활이야기>의 세 번째 에피소드를 보고 있습니다(연극 무대로 치자면 서막과 제 1막에 이은 제 2幕에 해당됩니다). 무대의 배경은 여전히 ‘예루살렘’입니다만, 시간은 안식 후 첫날 저녁, 즉 부활절 저녁입니다. 이야기의 서막(序幕)이 부활절 새벽의 어두운 동굴 무덤 안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었다면, 제 1막은 부활절 아침 동굴 입구에서 있었던 일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에피소드는 같은 날 저녁, ‘예루살렘’의 모처(某處)(아마도 어느 제자의 집이었을 것입니다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참고. 눅 24:33).
각 장면마다 시간과 장소가 다를 뿐만 아니라, 주요 등장인물도 다릅니다. 서막의 주인공은 사도 ‘요한’과 ‘베드로’였으며, 제 1 막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그 주인공이었고, 이제 여기에서는 아마도 모든 사도들을 포함한 일단의 제자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눅 24:33). 각 무대의 시간이 다르고, 장소도 다르며, 등장인물들도 다릅니다만, 세 개의 무대를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되는 핵심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등장인물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사건과 관련된 단어이기도 합니다. 무엇일까요?
닫힌 문들. 사실 이 질문은 ‘요한’ 화자가 전하려고 하는 <부활 이야기>의 궁극적인 목적과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목적을 하나의 ‘모티브’를 통하여 그려내고 있습니다. 과연 이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참고로 이 경험은 이들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험이었습니다. ‘수가’ 성 여인에게도 필요했던 그 경험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마디로 “조우”(遭遇), 즉 “만남”(encounter)입니다. 사실 만남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만남 가운데 최고의 만남이 무엇인지는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수가’ 성 여인은 이 한 번의 만남으로 소위 대박, 즉 인생 역전을 이루어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이 극적인 만남을 대박의 기회로 활용했다고 해야겠습니다. 이 여인이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지 짐작해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는 이 엄청난 만남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요한’ 화자는 그저 이렇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20:10). 아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다니요! 이 두 제자의 만남은 ‘수가’ 성 여인이 경험했던 그 만남과는 격이 다릅니다. 이 두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대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다니요! 정말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이 여인은 제자들에게 돌아와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부하신 말씀과 함께, 그날 아침의 감동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20:18). 사실 그날 아침 제자들에게 달려가 이 엄청난 소식을 전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여러 여인들이 더 있었습니다(참고. 마 28:8). 그런데 제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참고. 막 16:11). 그날 아침 이 소식을 들었던 제자들은 누구였을까?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도 함께 있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 또한 이해하기 힘든 대목으로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동일한 체험, 동일한 만남이 어쩌면 이처럼 대조적일 수가 있을까요? 한 편에는 여인들의 흥분과 감동과 환희가 있다면, 다른 한 편으로는 사도들의 덤덤함과 무신경과 불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말합니다. 네 <복음서>가 전하는 사뭇 다른 <부활 이야기>들이 진정 참된 증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누군가 없는 사실을 꾸며내려 했다면, 각 이야기들은 마치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일치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며, 제자들의 반응 또한 이처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제자들의 모습을 주목해 봅시다. 그들은 지금 두려움으로 문도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는 사도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이때쯤이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돌아와서 그들이 만난 예수님에 대하여 보고도 했을 것입니다(참고. 눅 24:35). 그리고 당연히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했던 여인들도 함께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배적인 분위기는(‘모티브’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역시 어둠과, 두려움과, 회의와, 불신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합니다만(참. 롬 10:17),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지금 들에게는 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도 있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그분의 죽음에 대한 기억만이 지금 이 자리를 지배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들 모두는 여전히 어둠과 혼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이 닫힌 문들을 박차고 세상으로 나가서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설득하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옛날 ‘가데스바네아’에서 ‘여호수아’나 ‘갈렙’같은 용사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모두들 자폐증의 문에 갇혀, 그들끼리 이대로 영원히 살아갈 것 같은 모습입니다.
샬롬! 그런데 이 어둠을 뚫고, 이 불신과 자폐(自閉)의 문들을 뚫고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나타나십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입니다! 도대체 그분께서 꼭꼭 걸어 잠근 문들을 뚫고 어떻게 들어오신 것일까요? 우리의 이해와 상상을 초월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화자는 이 질문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닫힌 문들을 뚫고 왜 다시 나타나신 것일까?”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평강”(eijrhvnh, 에이레네)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250회 이상 등장하는 ‘히브리’ 단어 ‘샬롬’(!l,v,)을 번역한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사실 ‘샬롬’은 당시나 지금이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사말, 즉 “안녕!”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날은 여느 날이 아니기 때문에 각별합니다. 이날은 부활절이며,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샬롬’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성취로 기대하던 바가 바로 ‘샬롬’이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절 저녁에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샬롬’은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외치신, “내가 다 이루었다”는 선언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닫힌 문입니까? “닫힌 문” 사이로 들어오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들에게 또 한 번의 기적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닫힌 문이 기능하는 바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반영하는 장치입니다. 그들 모두는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전하시는 ‘샬롬’은 부활절의 인사로 더 이상 적절할 수가 없다 하겠습니다. 그분이 전하는 인사말은 문학적으로 “닫힌 문” 즉 두려움과 대척점에 서서, 그 문을 열고, 두려움을 날려버리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겠지요.
왜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까? 그들을 잡아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한 때 제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이 말씀에 따르면, 지금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 ‘유대’인들은 전자(前者)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 큰 두려움의 대상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두려움마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전하는 ‘샬롬’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왜입니까? <구약>에서 ‘샬렘’은 “화목제물”(和睦祭物)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구원을 설명하는 여러 그림 가운데, “화목”(和睦, propitiation)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화목은 성전(聖殿)에서 제사 드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 화목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진노 때문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하나님과 우리, 즉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원수로 살아왔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가 그 화목을 이룹니까? 아들입니까 아니면 아버지입니까? <이사야>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理想), 즉 ‘샬롬’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상태가 가능하게 되었을까? 어린 양과 염소와 어린 아이와 암소가, “우리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원한다. 우리 서로 대화하자”라고 선언했기 때문입니까? 그래서 이들의 선의(善意)에 이리와 표범과 사자와 곰과 독사가 크게 감동을 받아 평화조약이라도 맺은 것입니까? 아! 대한민국이 그 모든 선의를 가지고 인내하며, 대화하고, 경제지원을 해주고, 평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면 김정은이 감동을 받아 핵무기를 포기하고 대한민국과 평화조약을 맺을까요?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샬롬’은 약자(弱者)의 선의(善意)나, 희망이나, 또는 애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 반대입니다. 즉 강자(强者)의 힘과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도 그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로마의 힘과 의지였습니다. 이는 동물 왕국(animal kingdom)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가 노래하고 있는 이 평화도 염소나, 송아지나, 어린 아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사자가 그 식성(食性)을 바꾸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즉 육식(肉食)이 아니라 초식(草食)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독사의 독이 더 이상 독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로마 제국에서도, 동물 왕국에서도, 화목 즉 ‘샬롬’은 힘없는 자가 아니라 힘센 자가 이루어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중에서 누가 화목을 이루었습니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에게 평강을” 하실 때, 이는 곧 “내가 그것을 다 이루었노라”는 말씀입니다(19:30). 즉 “내가 세상과 싸워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16:33). “내가 세상과 마귀를 굴복시켰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화목제물은 왜 필요했던 것일까요? 도대체 하나님은 누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바친 것입니까? 그분이 굴복시킨 세상입니까, 아니면 마귀입니까?
힘 센 자가 약한 자에게 조공이나 제물을 바치는 법은 없습니다. 갑이 을에게 머리를 숙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인간도, 짐승도 다른 그 무엇도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그분 자신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희생(self-sacrifice)을 통하여 자기만족(self-satisfaction)을 이루신 것입니다(J. Stott).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b). 비로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 즉 ‘샬롬’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화목에는 전제가 붙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쟁의 두 당사자가 전쟁이 끝나고 강화조약을 맺을 때, 전쟁의 책임이나 보상 등과 관련한 내용들을 그 규약 안에 담습니다. 이때 그 내용은 패전국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승전국이 일방적으로 만듭니다. 패전국이 이러쿵저러쿵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승전국의 재량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강화조약을 맺으실 때에, 요구하신 화평의 조건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로마서>로 되돌아가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렇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평강. 여기서 “누리자”라고 번역한 이 대목은 정말 탁월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느냐 마느냐의 선택이 오로지 나에게 달려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선물을 누리는 것은 이제 오직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면, 이제 더 이상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샬롬”을 전하시면서 상처 난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신 것도 이전에 다락방 강론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이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사도 ‘바울’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제자들은 비로소 확신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시며, 부활하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쏟으시고 죽으신 세상의 구세주시다.” 그리고 그들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20절). 이 또한 예수님께서 다락방 강론에서 이미 약속하신 바이기도 합니다. 즉 그분은 다시 그들에게 와서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놓겠다고 하셨습니다(14:18; 16:20-22). “기쁨”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의 원천입니다(예. 사 25:6-9; 54:1-5; 61:1-3). “기쁨”은 또한 부활절의 분위기이기도 합니다. 이 기쁨으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4.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서>는 이것을 조금 다른 말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그러나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오히려 정 반대로 행동한 전형에 속한다 하겠습니다. 그들이 ‘욥’의 즐거움에 얼마나 참여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그의 슬픔에는 득달같이 달려와 함께 아파하기는커녕 그의 상처를 더욱 아프게 후벼 파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추측해 보건대, 이들 친구는 ‘욥’이 잘나가던 시절에는 그와 함께 즐거워했던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질시하고 투기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원인도 알지 못하는 병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고생하던 한 환자가 우연히 한 병원에서 완치를 경험했다면, 다른 환자들에게 그 병원을 소개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인심 좋은 “맛 집”을 알게 되었다면, 내가 아는 친구들에게 널리 소개해 주고 싶은 것이 정상이겠지요. 물론 사람들이 알고 몰려오면 나에 대한 대접이 소홀할 터이니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만. 나 혼자만 그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비유에도 이런 사람이 등장하기는 합니다. 그는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고는 이를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버립니다(마 13:44).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비유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 친구는 자신의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지 않아 합니다.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적인 체험을 한 제자들, 그야말로 기뻐 어찌 할 줄 몰라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샬롬’을 전하면서, 그 기쁨을 세상과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른 바 “대위임령”(the Greatest Commission), 또는 “지상 선교명령”이라 부릅니다. 명령이라고 하니 솔직히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기쁨을 세상과 나누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도 마지막은 항상 대위임(委任)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만, 그 형태는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각 복음서의 공동체가 처해있는 상황과 형편이 다르거나, 또는 각 <복음서>의 화자가 지니고 있는 복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인식이나 통찰력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경우는 이 위임의 말씀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 비교적 짧고 간략하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선교에 대한 강조점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거나 약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나도...한다”는 표현 때문입니다(참고. 21절).
사실 <요한복음>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 중의 하나도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에 보낸다”입니다(참고. 17:18). 이 주제는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와 사실 상 같은 권위를 같는다”라는 ‘유대’의 일반적인 사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는 이를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골 1:19). 즉 아버지이 속성이 아들의 말과 행동과 인격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히 3:1).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실 때, “너희는 세상을 향한 사도이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는 세상을 향한 화목 제물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낸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동일한 화목제물로 보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드러내신 것처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곧 예수님의 현현(顯現)이 될 것이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시적인 모습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분처럼 생각하고, 그분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능력을 드러낼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영접하는 자는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이는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이 되는 때가 온 것입니다(참고. 13:20).
성령을 받으라. 하지만 기쁨이나 슬픔은 누가 나누라고 강요하거나 명령한다고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자발적이며 충동적인 것입니다. 순전히 내적 동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내적 동기입니다. 사실 우리가 겪어 보아서 알지만 기쁨이니, 감격이니, 슬픔이니 하는 그 모든 감정들이 한낱 아침 이슬 같지 않습니까! 지금 제자들에게 찾아온 부활의 감격도 신혼의 감격처럼 조만간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겠지요.
어떻게 하면 그 감격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22절).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그 대답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성령께서 내적 동기가 되어 자신의 일을 수행해 갈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를 예수님에게 방점을 두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겠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참고. 마 28:20).
하지만 이 두 표현은 결코 다를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일생 역시 “성령 충만”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고(마 1:18), 침례를 받으실 때도 성령께서 그분 위에 내리셨으며(마 2:16), 광야로 나가 마귀와 대적을 하실 때에도 성령께서 함께 하셨으며(마 4:1), 이후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그 모든 순간에 성령께서 늘 함께 하셨습니다. <신약>은 우리 또한 “성령의 전”이라고 말합니다(고전 6:19).
적어도 지금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주시는 목적은 선교를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참고. 22절). 아닌 게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승천을 앞둔 시점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여기서 “숨을 내쉬다”는 표현은 당연히 문자적으로 이해해야겠지만, 하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도 하등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입니다. 무슨 상징일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호흡”(즉 생기)은 생명의 창조나 소생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살아있는 생명으로 만들었습니다(참고. 창 2:7). 그리고 선지자 ‘에스겔’은 바람으로 하여금 죽은 자들에게 들어가 다시 살아나게 한 바 있습니다(참고. 겔 37:9-10). 특히 <에스겔>의 이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서부터 이스라엘의 고토(故土) 회복을 예고하는 환상입니다. 여기서 생기(즉 성령)는 예루살렘 귀환(歸還)을 자극하고 재촉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볼 때, 예루살렘 귀환은 이스라엘, 즉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을 상징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생기를 부활과 관련해서 사용한다 해서 전혀 놀랄 일은 아닐 것입니다. 즉 새로운 시대를 맞아 성령님을 통해 생명을 전가하는 행위에 대한 상징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종말의 시대에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새로운 창조는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드러나고, 또 성령님에 의하여 구체화되는 사건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참고. 고후 5:17).
그런데 “성령을 받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 질문을 낳게 합니다. 하나는 “누가 받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언제 받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선 첫 번째 질문에 관해서는 큰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이 그날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더 넓게는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 즉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다락방 강론에서 약속하셨던 보혜사 성령님이 열두 사도들에게만 국한될 수 없듯이, 성령님을 통한 제자들의 사역 또한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교회의 사역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21-23절).
문제는 두 번째 질문입니다. 즉 당시 제자들은 과연 언제 성령을 받았을까요?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성령 강림은 오순절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참고. 행 2장). 그렇다면 “성령을 받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실제 많은 학자들도 22절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칼빈’(Calvin)도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날 마치 세례식에서 머리 위에 물을 뿌리듯 성령을 부분적으로 받았을 뿐이며, 완전하고도 충분한 형태의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칼빈’이라도 우리는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아니 한 분 인격체이신 성령님을 부분적이고도 점진적으로 받다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할부 대금 납부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칼빈’은 이 구절을 왜 이런 식으로 해석했을까? 추측건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의 두 기록 사이에 쐐기를 박아 차별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즉 부활절과 오순절을 두 개의 별개의 사건으로 기계적으로 구분하면 이와 같은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요한복음>은 부활절에, 그리고 <사도행전>은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과연 성령 강림과 관련된 이들 두 기록은 전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일까?
두 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성령강림을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즉 ‘요한’ 화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각기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의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성령 강림도 이들 세 사건이 부활절이라는 상황 안에서 한데 어우러져 일어난 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승천만을 따로 떼어내어, 부활절 40일 후에 일어난 별개의 사건으로 보면서, 이날(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한 것으로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두 기록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성령이 두 번에 걸쳐 강림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두 기록 중 한쪽이 다른 한 쪽의 기록을 수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거니와, ‘요한’ 화자는 <부활 이야기>를 들려줌에 있어, 부활에서 오순절까지의 전체 사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시간대 별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다만 네 개의 에피소드를 선별하여 부활 후 일주일을 추적하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도 정확한 시간 순서를 따르고 있지도 않습니다. 추측건대, ‘요한’ 화자도 <사도행전>에서 기록하고 있는 오순절 사건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부활 이야기> 속에는 정확하게 언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서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는 어차피 필수적인 일일 것이므로, 굳이 다시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사하면. 이제 마지막으로, 대위임과 관련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23절). 사실 이 구절은 대위임의 내용에 관한 것으로서,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천명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두 구절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내용 상 이들 구절은 모두 대동소이하여, 원래 같은 전승에서 유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 <복음서>에서 이들이 등장하고 있는 시점이나 상황은 분명 다릅니다. 두 경우 모두 제자나 사도들이 수행해야 할 사역의 성격이나 내용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를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상황에 적용하고 있으며, <마태복음>에서는 그 이전의 상황, 즉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제자들에게 위임된 사역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매다”와 “풀다”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 두 행위는 재판관의 판결 행위를 연상시켜주는데, 범죄 혐의(嫌疑)를 받은 피의자(被疑者)를 “구속”(拘束)하거나 또는 “방면”(放免)하는 행위입니다. <마태복음>의 상황에서 보면, 재판관은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제자)로 이해할 수 있으며, “매고 푸는” 행위는 “죄 사함”이나 또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 둘은 복음의 메시지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서, 사도들의 권위와 직결되어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권위는 예수님 공생애 당시나 부활 이후가 다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마태복음>에서는 위임의 말씀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 중에 있었던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 이후에 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주목할 대목은 성령님에 대한 언급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대위임(大委任)은 별개의 것이라기보다는, 동일한 사역의 연장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에게 방점을 두고 있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성령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특히 성령님을 통한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께서 다락방 강론에서 이미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15:25-26; 16:8-11). 물론 <공관복음>도 성령님을 모독하는 행위와 관련하여 치명적인 경고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마 12;31; 막 3:29; 눅 12:10).
이처럼 성령님의 “매고 푸는” 사역은 이중적인 상황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중적인 결과도 수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일견 모순되는 복음의 양면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9:39).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끝나고 있는데, 그분의 죽음은 곧 “이 세상과 세상의 임금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참고. 12:31). 심판이 그리스도를 죽인자의 편에 서있는 모든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라면, 용서와 구원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는 모든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음의 이중성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고 그들 안에서 그들과 함께 사역하는 성령님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매고 푸는” 제자들의 권세와 관련해서 남은 질문은 그 적용 대상과 범위에 관한 것입니다. 예컨대, 교회가 예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이 권한을 세상에 대해서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만, 과연 교회 안의 다른 지체들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신자들이라 해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테니, 죄를 범한 신자들에 대해서 교회가 이 권세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할 것처럼 여겨집니다(현대적 용어로 이와 같은 권세를 治理權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누가 이 권세를 행사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가 이 권리를 행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참고. 행 5:1-11). 그리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범죄 한 영혼에 대해서는 교회가 그를 치리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참고. 고전 5:1-5). 이후 교회가 점차 조직화 되면서, 이른바 임명받은 성직자들이 점차 사도들의 직분을 대신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로마 카톨릭’ 교회는 위 <성경>의 사례들을 근거로, 사제들에 의한 고해성사(告解聖事) 제도로까지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이 제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 내에서조차 목회적 차원에서 죄의 용서나 심판에 관한 목회자의 권위 있는 훈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교회는 지체 상호 간에 피차 배우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부활 이야기>의 세 번째 에피소드는 제자 ‘도마’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무대는 부활절 다음 주일 저녁입니다. ‘요한’ 화자는 ‘도마’가 부활절 저녁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성격의 일단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24절)
지금까지 <요한복음> 내에서 ‘도마’가 등장한 횟수는 두어 번 정도입니다(11:16; 14:5). 이 두 번의 등장을 통해서 드러나는 그의 성격은 다소 부정적입니다. 조급하고, 쉽게 자포자기하고, 비관적이며, 자주 자기 연민에 빠지는 사람으로 비칩니다. 이해하는 속도가 느리며, 그래서인지 질문에 아무런 거침이 없어 보입니다. 이와 같은 그의 성격의 일단이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질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5절)
수님의 가르침에 이해는
(1) Jn 11:46 - “우리도 죽으러 가자.” 이러한 태도는 일견 아주 용기 있는 것 같으나 실은 그의 조급하고도 비관적인 성격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우리도 얼마나 그와 같습니까! 쉽게 자포자기하고 자기 연민에 자주 빠지는 것이 말입니다. 진리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성경공부 하다 모르는 것 만나면 여기저기 책을 찾아봅니까? 당신은 당신이 갖기를 원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인내하며 끈질기게 투자합니까? 당신이 선택하고 있는 학과목의 리포트 제출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혹시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부산의 버스 종점 근처에 사는 어느 여인 이야기를 아십니까? 동네 버스정류장의 소음 문제로 그 회사를 상대로 끈질긴 3년 동안의 법정 투쟁 끝에 승소를 받아낸 여인 말입니다.
(2) Jn 14:5 -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나이까?” 또한 다소 비관적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상당히 합리적인 질문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이곳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태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주 합리적이고도 과학적인 태도가 그것입니다. 요한기자는 세 번에 걸쳐 도마의 질문을 반복함으로써, 다시 한 번 3이라는 숫자의 수사적 패턴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1)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2)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3)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 드러나는 모티브는 무엇입니까?
다소 과장된 것처럼 보이나, 실은 요한복음서 전체에서 마치 배경음악처럼 내내 깔려 오던 “의심과 회의”라는 모티브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제자들의 의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니라(요 4:48).”
따라서 도마의 의심도 이러한 선언의 한 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앞선 제 4막에서도 드러난 제자들의 의심을 다시 한 번 과장되게 표현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마리아의 증언이었습니다. 그 효과는 무엇입니까? “아니, 제자들마저도 그랬단 말인가?”
그의 이러한 질문은 실은 도마 혼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계몽시대 이후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소위 “과학적 합리주의”라는 인류의 최대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지극히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이 바로 “이성과 합리” 아닙니까! 특히 학문의 영역에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태도를 갖도록 교육받아 오지 않았던가! 객관적이고도 가치중립적인 자세는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추구하고 지녀야 할 덕목입니다. 그런데 이 이성과 합리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도마의 질문의 성격부터 분석해 봅시다.
먼저 그의 질문이 그렇다면 과연 합리적인가부터 따져 보죠. 과연 그러한가?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첫째, 그는 이미 많은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서입니까? 마리아로부터, 그리고 그의 동료 사도들로부터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지난 3년 동안의 체험을 토대로 충분히 논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말입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는 수없이 많은 기적들이 예수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는 것을 목격도 했고, 그리고 그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이죠. 그가 성실한 학생이기만 했더라도 충분히 그의 체험을 통해서 예수의 부활의 당위성을 논리적으로 끄집어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동료들을 믿지도 않았고, 그 자신의 체험으로부터도 아무 것도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앞뒤가 꽉 막힌 돌대가리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소위 과학지상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과학의 영역을 혼돈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과학에는 두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재현 불가능한 사건을 다루는 소위 기원과학의 영역이고, 또 하나는 실험과 반복이 가능한 그래서 귀납적인 추론이 가능한 소위 실험과학의 영역이 그것입니다. 그는 지금 재현 불가능한 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결코 믿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겠죠. 당신은 6.25사변을 역사적 사실로 믿습니까? 어떻게 보지도 않았는데 믿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다시 재현해 낼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것을 사실로 맏아들이고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세 번째 그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성의 능력을 과신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수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헤밍웨이 역시 이 점에 있어서 일찍이 동의한 바 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한 가지 질문을 해 봅시다. 만일 그에게 그가 원하는 증거들이 제시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가 믿을 수 있을까요? 그는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즉 그는 그가 만일 부활한 그 예수를 확인하기만 한다면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그의 착각입니다. 안다는 것하고 믿는다는 것하고는 전혀 별개의 것임을 그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는 지난 3년을 예수의 제자로 12명 속에서 살아 왔으면서도 한 번도 그 풍성한 의미를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자였습니다. 그래서 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두려움과 불안과 초조 등에 둘러싸여 고민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도대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전해 줄 수 없는 운명 가운데 살아 갈 수밖에 없었을 거란 말입니다: (예) 내 제자 천은우 등 (소위 모태 신앙). 이처럼 우리가 예수에 관한 모든 역사적이고도 과학적인 지식과 자료들을 다 소유한다 할지라도, 이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그 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2) 은혜와 계시(26후-27)
그러면 무엇이 해결책입니까? 인격체간의 만남은 단순히 그 상대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부릅니다. 그 자신의 이성적 탐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먼저 와서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왜 은혜입니까?
첫째,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평(peace with God)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히브리어로 우리가 잘 아는 샬롬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이 말은 그냥 “안녕”하는 정도의 인사말에 지나지 않지만, 그 날만은 예외였습니다. 부활절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봅시다, 다시 세번의 반복적인 인사가 주어지고 있는 것을!(19, 21, 26절) - 반복해서 읽어봅시다.
도대체 무슨 평강입니까? 그것은 화평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외치신 “다 이루었다” 라는 선언의 보충적 설명입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그 자신의 진노와 노여움을 스스로 먼저 다 풀었다는 의미입니다. 노여움을 풀다니요? 우리가 언제 그와 원수가 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두 말하면 잔소리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진노를 그냥 혼자서 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대신 피를 보게 함으로써 진노를 푸셨다는 말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즉 그 자신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강은 세상이 주는 그러한 종류의 정전 협정이나 로마가 이룩한 평화, 즉 Pax Romana 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 모든 곳에서 항상 이 단어를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세세토록 영원무궁할 지어다.”
두 번째, 이 평강은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오는 마음의 평화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평강(peace of God)인 것입니다. 이것이 왜 은혜입니까? 이것은 그 모든 두려움을 우리로부터 쫓아내기 때문입니다. 26절의 무대 장치와 분위기를 다시 봅시다: “문들이 닫혔는데...” 무슨 색깔인가요?
이 문은 무슨 문입니까? 그것은 문자적으로는 고독과 두려움의 문입니다. 19절을 봅시다. 그리고 보다 영적으로는 나는 이 문을 자기 자신의 이성과 합리의 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지금 이 우물에 갇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이 어두움을 몰아내는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말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증거들이 있다 해도,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지식들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를 결코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가지고 예수에 대해서 연구는 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또 그에 대해서 밤새 논쟁을 벌일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그를 만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가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으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요청합시다! 겸손히 요청합시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러나 주님은 도마가 개인적으로 이러한 요청을 하기 전에 이미 와 계셔서 그의 손을 뻗어 그를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의심하는 도마야, 네 손을 뻗어 나를 만져 보라(27절).”
도마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문제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증거 부족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바로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문제를 누가 해결해 주었습니까? 그가 증거를 제시받음으로서 입니까? 일견 그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가 예수를 만나서 만져 보고 확인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부활한 예수의 현존과 그의 말씀에 이미 압도되어 버린 것입니다. Let me repeat: 그의 말씀에 압도된 것입니다!
3) 의심에서 찬양으로(28절)
(1) 28절. 28절의 선언은 무엇입니까? 아, 역시 예수는 부활했구나! 사실 확인입니까? No, No, No, No,... 이것이 바로 요한 기자가 처음부터 일관되게 드러내려고 했던, 그러나 그 동안 계속해서 우회적으로 암시적으로만 드러내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오히려 감질나게 해왔던, 그 한 가지 주제가 지금 거대한 화산처럼 폭발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가장 의심 많던 제자의 가장 위대한 고백이 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찬양과 경배입니다!!! 그는 지금 예수는 주이고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이 찬양은 세상을 향해서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아니고,
오직 그가 발견하고 발견되어진
그의 주, 그의 하나님을 향한 외침이요 찬양인 것입니다!
그는 지금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로서의 부활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에게 체험되어 지고 있는 그 부활의 능력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마의 이러한 체험은 그 만을 위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도마 이야기를 듣고 있을 요한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추정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이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까요? 혹 지체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적으로 목격하지도 못하고, 의심하고, 반신반의하며 회의와 의심 가운데서 다시 한 번 그 자신 그러한 체험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며 신앙생활을 하기도 했을 것이며, 또 혹자는 믿지 않는 다른 이웃들로부터 예수의 부활을 증거토록 요구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즉 공동체의 목회자가 목회적 목적을 위해서 쓴 글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19절);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절)".
4) 결론 -믿음의 본질(30-31)
그 외의 목적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글이 지니는 선교적 차원의 목적입니다. 설령 처음부터 그러한 목적이 없었다고 하드라도, 우리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 결론에서 충분히 그러한 목적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읽는 모든 자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이를 믿고 생명을 얻어라.”
우리가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를 맛본다는 것이다. 그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를 순종하고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르쳐 지켜 행하게 하라.”
토의와 연습
1. ‘도마’의 체험을 중심으로 ㄴ의ㅏ 소감을 나누어 봅시다. 드리고 싶은 기도가 있습니까?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까? 당신에게 부활의 체험과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겠습니까? 특히 이번 한 주 생활가운데서 말입니다.
1) 본문의 핵심적 주제는 무엇입니까?
2) 본문의 단락 구분을 통해서 이 주제가 어떻게 발전되며 보강되고 있습니까?
3) 이러한 주제를 위하여 본문에서 도입되는 문학적 기법(수사, 모티브, 상징, 등등)들이 있습니까?
제 5부: 에필로그
제 5 部
에필로그
제 23과: 교회와 사도와 선교
23
교회와 사도와 선교
(21:1-2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21:15-17).”
호진이나 상길이처럼 성경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독자들은 요한복음 20장을 마치면서 “휴, 그 지긋지긋하던 요한복음 공부가 다 끝났구나!”하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것입니다. 특히 상길형제는 공부시간 중에 자주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는 훌륭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합니다. 내가 너무 심했나? 이제는 홀몸도 아닌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공부시간 내내 지겨워했던 것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의 마지막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제 20장의 [도마의 발견], 즉 늘 회의와 자기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그가, 마치 알렉스 헤일리의 힛트작「뿌리」의 주인공이 오랜 노력 끝에 드디어 자신의 혈통의 뿌리를 발견하고, “내가 드디어 찾았구나!”(원 대본에는 영어로, “I found it!"으로 표현되어있음)하며 내뱉던 것과 같은 환희의 절규를 뿜어내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그들도 내심 가슴이 찡하는 감동도 받고, 나름 데로 헌신의 결심도 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기쁨은 드디어 공부가 끝났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라, 그런데 아직 한 장이 더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실망하는 모습이란.
그런데 이들이 이처럼 착각을 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 말씀입니다. 사실 20장은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요한복음 전체의 클라이맥스가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그 동안 복음서 전체에 걸쳐 계속 등장하던 모티브나 주제들이 다시 한 번 요약적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복습하는 셈치고 그곳으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부활절 첫 날의 이야기라든지, 도마의 고백 등을 면밀히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도마 이야기의 교훈은 이 이야기를 읽는 당대나 후대의 독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누구나 도마처럼 영생을 누릴 수 있다.”
따라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20장에 더할 이유나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20:30-31을 읽은 다음 21장을 읽어보면 어딘지 어색하고 연결이 잘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장이 왜 더하여 졌을까요? 해설자가 더 할 말이 있었을까요? 도대체 21장의 목적이나 기능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곳에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공부할 것이지만,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브루스 밀론이 말한 바처럼, 21장의 내용은 앞에 나온 장들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전체의 적절한 마무리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장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전개된 제자(즉 교회)들의 선교적 사명이라는 주제와는 너무나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호스킨스는 이 점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통찰력있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명령에 의해, 그리고 그 분의 권위아래 수행되는 선교에 관한 진술로 끝나야 적절하게 끝나는 것이다.” 자, 이제 이 장을 보다 상세하게 다루어 봅시다.
2. 양식/구조/배경
1) 양식: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21장은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기를 일종의 부록 내지는 後記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어떠한 의도로 이러한 부록을 더하였을까 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는데, 아직 정확하게 일치된 견해는 없는 실정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21장의 해설자(그가 누구든)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무언가 감지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강조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과 사도들의 역할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교회가 드러내야 할 “표적”(sign)(그리스도의 표적이 아니라)의 의미가 포함되고 있습니다. 다소 어렵습니까? 참고 기다립시다.
2) 구조: 본문의 구조는 비교적 명확합니다.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구분됩니다. 각 단락마다 적절한 제목을 정해 봅시다.
(1) 제 1단락(21:1-14):
(2) 제 2단락(21:15-23):
① 15-17절:
② 18-19절:
③ 20-23절:
(3) 21:24-25:
그런데 우리가 21장을 읽다보면, 이야기가 마치 연속해서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는데,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20장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주제의 전개를 위해서 연결해서 편집해놓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1-14절의 이야기조차도 한 단위로 볼 것인가 또는 두 개의 단위로 볼 것인가에 대한 견해가 분분한 실정입니다. 이러한 자료비평적(무슨 말이고?)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나마 마음잡고 끝까지 견디기로 작정한 호진이와 상길이가 도망가면 안되니까.
3) 배경: 이왕 자료비평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만 심심풀이로 공부 좀 해봅시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단락의 배경과 관련한 것입니다. 첫 번째 단락의 상황은 분명 갈릴리 바닷가입니다. 위의 풍경 사진에서 보듯이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곳에서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를 못합니다(4, 7절). 그런데도 14절은 이 만남이 부활 후 세 번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렇지, 어찌 세 번씩이나 만나고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이거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만남이 세 번째가 아니고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이에 대한 문제는 잠시 후 논의하기로 하겠습니다. 사실 누가나(눅 24:34) 사도 바울의 증언(고전 15:5) 등에 의하면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그리고 여인들과 함께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두 차례나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시기는 부활 후 첫 날 빈 무덤가나, 엠마오로 가는 도중이었거나, 또는 예루살렘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언급(21:14)은 정확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15-17절의 상황은 이 세 번째 만남보다 시기적으로 먼저 일어난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즉 이 두 번의 만남 중의 한 상황에서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18-19절의 상황도 그 부활절 기간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의 순교에 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사건은 한참 후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는 합니다만. 20-23절의 핵심은 역시 22절로서, 이는 요한공동체내에서 별도로 회자되고있던 자료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4-25절은 복음서 전체의 대미를 장식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서 전체에 대한 신빙성 내지는 권위를 드러내려는 목적이 엿보입니다.
3. 주석
3-1. 제 1단락(1-14절): 교제와 회복
1) 1-3절. 배경은 갈릴리 호수로 알려진 디베랴 바닷가입니다. 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니고 이곳이라 제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으면,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지, 왜 본업으로 돌아가 있느냐는 이유 때문입니다. 특히 3절의 베드로가 한 말,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를 놓고 아마도 고기잡이가 이 때만큼 혹독하게 비난받은 적도 없었을 겁니다. 도대체 이럴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가면 자기 혼자 갈 것이지, 왜 다른 사도들마저 꼬셔서 함께 헷갈리게 하느냐 이거죠. 불순종과 배교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실 그 동안 이 구절에 대한 설교의 대부분이 이런 식이었습니다. 당신도 동의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 비슬리 머레이가 이들 제자들을 두둔하여 쓴 글을 읽어봅시다:
그들의 심리적, 정서적 안정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오랫동안 익숙한 갈릴리 바다에서 낚시 여행을 하는 것도 이상적인 치료요법이었을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은 정서적으로 동요하는 기간이었다. 단 한 주일 동안에, 그들은 종려주일이라는 아찔하게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가 성금요일의 완전한 절망의 수렁으로 급강하했으며, 다시 부활의 영광에 의해 하늘 끝까지 휘몰아쳐 올라가는 것을 모두 경험했다. 심야의 낚시질은 아마도 의사가 지시했을 만한 안정책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비록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물고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밤을 그들이 택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않는가!”
정말 그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3절을 베드로가 실의와 절망 가운데 본업으로 되돌아가면서 무심코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이들이 지금 왜 이곳에 왔으며, 그리고 여기서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가능한 한 가지 대답은 막 14:28 이나 16:7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서 그들을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셨고, 따라서 이들은 지금 주님의 그 말씀을 상기하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왜 그를 이곳에서 기다려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글쎄요, 이제 바야흐로 주님께서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이곳에서 펼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도 했을 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3절에서 나타난 사도들의 이러한 지극히 평범한 행동(즉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행동)을 어떻게 이해함이 바람직할까요? 역시 비슬리 머레이가 제의한데로, 우리는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이들 사도들의 행동을 이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에 관해서 많이 듣고 배워서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당시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했던 사도들보다 오히려 더 큰 믿음을 소유한 듯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솔직히 부활은 예수님을 제외하고 나면 온 인류가 역사상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유일무이한 사건 아닙니까? 항차 당시 지극히 제한된 지식과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을 사도들에게 있어서야 두말할 나위도 없었을 겁니다. 그들이 믿는 부활에 관한 지식이래야 겨우 죽음 이후의 부활 정도였을 겁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고백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더더구나 이들이 부활의 의미, 특히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에 대해서 체계적인 신학적 지식을 소유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갈릴리는 또한 어떤 곳입니까? 이 모든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기에는 가장 부적합한 시골 아닙니까? 예루살렘이라면 또 몰라도... 이런 곳에서 다시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그 의미에 대해서 강의를 듣게 될 줄이야 어찌 꿈엔들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이들이 비록 부활하신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목격하고서도, 실의와 좌절은 아니더라도 무언가 혼란스럽고, 그래서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이곳에서 바야흐로 주님으로부터 보다 체계적으로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에 대해서 강의를 듣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들을 나무라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이들을 나무랄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이 만일 부활하신 주님이라면 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겠습니까? 사실 이 주제야말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핵심이 됩니다. 나중에 다시 논의할 것입니다만.
2) 4절. 날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번의 만남이 처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부활하신 주님의 변화된 모습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겠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당신은 지금 주님께서 오신다면 금방 알아볼 수 있을까요?
3) 5-6절.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호숫가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질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얘들아, 뭐 좀 잡았느냐?” 이거 아니겠습니까? 드디어 주님께서 제자들의 고기잡이로부터 무언가 영적인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준비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이 질문은 이 단락의 기능을 결정해 주는 효과를 지닙니다. 무슨 기능일까요?
따라서 이 질문은 그 질문을 듣고 있을 (내포)독자들 역시 바짝 긴장하게 하는 효과를 지닙니다. 당신도 긴장이 됩니까? 아니면 아무 생각도 없습니까?
호진이의 독백: “긴장은 무슨 얼어죽을...” 이러면 안됩니다. 왜냐? 제자들도 그렇고, 독자들 역시 이 밤은 이상하게 일이 잘 안 풀리는 날이었습니다. 이들 노련한 어부들이 밤새 고기 한 마리 못 잡다니 영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브루스 밀론은 이 질문을 나름 데로 다음과 같이 효과를 넣어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어이, 친구들, 자네들 고기라곤 한 마리도 못 잡았지?...오른쪽으로 한 번 그물을 내려보게나, 그러면 조금 잡을 수 있을 걸세!”(5-6절)
밀론의 말대로 확실히 주님의 말에는 무언가 거절할 수 없는 힘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누군가 땅에서 그들을 향해 이런 충고를 했다면 “웬 미친 녀석 이람”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킨 대로 그물을 오른쪽으로 담갔더니, 아니, 이게 웬 일입니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단지 왼쪽과 오른쪽의 차이에 불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동안 복음서 자체도 그랬지만 독자들 역시 온통 그리스도의 표적에만 몰두해 온 나머지, 이 기적은 사람들의 주목을 별로 끌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복음서 내의 일곱 가지의 기적을 말할 때, 이 기적은 포함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은 사도들의 표적, 다시 말하면 교회의 표적이 됩니다. 보다 영적인 의미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이처럼 놀라운 표적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4) 7절. 제자들의 반응은 거의 본능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충고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부활하신 주님일 줄이야! 예수께서 사랑하던 그 제자가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일러주자 베드로도 금새 알아버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주님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기적을 감히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이 누구입니까? 서당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이들도 이젠 이런 류의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주님의 손길과 향기를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게 제자훈련의 성공사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척하면 삼척이라, 스승의 눈길만 보아도 그 속마음을 알아보는 제자 말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사람 많습니다. 김태정 전도사의 마음을 한 길 물속처럼 훤하게 꿰뚫어 보는 제자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다름 아닌 최 아무개, 서 아무개, 그리고 이 아무개 등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이야기가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베드로의 이어지는 행동을 관찰해 봅시다. 과연 베드로는 베드로입니다. 그가 지금 보이고 있는 반응은, 이보다 며칠 전 부활의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그에게 달려와 “주님을 보았다”고 전했을 때 그가 보인 반응, 즉 무덤을 향해서 미친 듯이 달려갔던 그 반응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습니까(참고: 요 20:4-8)? 이 두 이야기의 해설자가 동일인인 듯 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반응을 보는 당신의 소감은 어떻습니까?
“야, 저기 우리 전도사님이 오시는구나” 하면서 막 달려오는 최 아무개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5) 8-11절. 뒤이어 다른 제자들이 작은 배를 타고 생선이 든 그물을 들고 왔습니다(8절). 와보니 주님께서 이미 불을 지펴놓고 생선구이와 떡을 준비해놓으신 겁니다(9절). 물론 소주도 있었겠죠? 참 기똥찹니다! 이 얼마나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장면입니까? 그런데 분위기에 취해서 “玉의 티”를 어찌 놓칠 수 있을까 보냐. 따질 것은 따져야죠.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는 여기서 소위 [자료비평]이라는 작업을 한 번 해봐야 되겠다 이 말씀입니다. 여러분 9절과 10절을 함께 읽어보시면, 어딘지 석연찮은 곳이 있습니다. 9절에서는 이미 생선이 구워져 있는데, 10절에서는 다시 주님께서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연결이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이겁니다. 그래서 비슬리 머레이는 8절을 10-11절로 바로 연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9절을 빼고 8-11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6) 9, 12-13절. 자,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을 식사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어라.”(12절) 고기와 빵과 식사라! (그리고 쏘주라) 그래서 알랜 쇼는 이 장면이 [교회의 성만찬]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이 6:11과 너무나 흡사한 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발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주님께 “당신은 누굽니까?”하고 질문하는 제자들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12절). 물론 이들은 이 사람이 누군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묻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감히 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죠. 이 점은 엠마오의 두 제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부활하신 주님과 이들 사이에는 이제 도무지 건널 수 없는 일종의 벽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벽은 이내 주님 자신에 의해서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봅니다. 식사에의 초대죠.: “와서 조반을 먹어라.” 물론 주님 자신은 식사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들을 식사로 초대하면서 부활하신 주님과 이 땅에 육체로 속한 채로 살아가는 제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 엄청난 분리가 메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장면이 그려주는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왜 주님께서 이들을 만나고 계신지 알 듯 합니다. 아름답고도 한적한 새벽의 갈릴리 호숫가에서 서로 마주 앉아 식사를 나누며, 친밀하면서도, 진지한 대화를 통해서 이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새롭고도 더욱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확립코자 하는 것이 우리 주님의 계획이자 의도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이제 우리의 해설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도전과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고기가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오늘 주님과 함께 조반을 나누셨습니까? 당신의 어제의 하루는 어떠했습니까? 지난 한 주간은 또 어떠했습니까? 진정 매 순간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대화하며 식사를 함께 나누셨나요? 혹시 지금도 이들 사도들처럼 엉뚱한 곳에서 자아의 그물을 늘어뜨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하루하루를 감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그물을 던져두고 부활하신 주님에게로 달려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기 바랍니다. 이제 그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한 번 들어보고 싶지 않습니까?
[복음산책]: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좀 합시다. 그러나 대개 공부 잘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더 흥미진진해 합니다(예: 김호진). 무엇인고 하면 잡은 물고기의 숫자(153마리)에 관한 것입니다. 왜 하필 153마리냐 이거죠. 이 점에 대해서 교부시대 이후 여러 사람들이 아주 요상한 해석들을 많이 내놓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만 소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① 제롬(4세기 교부): 153 종류의 물고기로서, 사도와 교회의 열방을 향한 선교적 사명에 대한 비유 내지는 상징이다.
② 어거스틴(제롬의 친구): 153은 1부터 17까지의 숫자의 총합으로서, 점으로 표시하면 삼각형을 이룬다. 그리고 17 = 10 + 7이며, 이중 10은 십계명을, 7은 성령의 일곱 위를 나타낸다. 어쨌든 10과 7은 유대교의 중요한 완전수들이다. 예: 창조의 열 말씀;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10대 계보;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의 10대; 아브라함이 거친 열 가지 시험; 애굽에서의 10 가지 기적; 등등.
③ 시릴(Cyril): 153 = 3 x 50 + 3; 삼위의 하나님의 숫자.
④ 현대의 발견(gematria): 구원; 또는 예수 그리스도(a=1, b=2, c=3, 등등).
이 모든 발견들... 한 마디로 말짱 황입니다. 왜요?
3-2. 제 2단락(15-23절): 교회의 표적
바로 그 계획이 이곳에서 놀랍게 펼쳐질 참입니다. 그래서 21장의 핵심은 이 두 번째 단락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 1단락은 일종의 도입부였습니다. 제자들은 이곳에서의 경험-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보다 깊은 영적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셈입니다.
독자들 역시 그렇죠. 그 동안 우리들은 “왜 자꾸 이야기가 겉돌고 있을까?” 하고 궁금해했습니다. 그 궁금해하던 것을 이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할 참입니다. 조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입니다. 듣는 이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그러한 힘과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새로운 소명이 그것입니다. 한 마디로,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 즉 교회의 표적에 관한 것입니다.
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17절)
(1) 15절. 그래서 그 전에 먼저 확실히 해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의 세 번에 걸친 확인 질문이 그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일 수도 있고, 또는 “네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질문은 베드로 자신의 앞선 세 번의 否認과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Gaechter같은 학자는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세 번의 질문은 근동을 비롯한 동양적인 관습에서 나온 것으로서, 중요한 서약을 할 때나 법을 제정하고 선포할 때, 세 번에 걸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관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개회나 폐회를 공식적으로 알릴 때, 의사봉을 세 번 두드리는 행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러한 세 번에 걸친 질문은 베드로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동시에 그의 사도적 권위를 확립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습니다. 즉 실패를 용서해 주는 문제와, 그러한 실패자를 다시 지도자로 세우는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진정으로 베드로에게 확인시키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참고로 고전 13:1-3도 함께 읽어봅시다.
그런 연후에 주시는 소명은 무엇입니까? 순서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 질문과 소명의 관계, 즉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양을 먹이는 사역과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한 교훈은 없습니까?
(2) 16-17절.
이 세 번의 질문은 분명 베드로를 아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베드로는 지금 주님께서 자기의 존재의 깊은 곳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와 유사한 체험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세 번의 질문의 각각의 의미가 무엇인지 따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각기 다른 단어를 주님께서 쓰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양을 치는 것과 먹이는 행위도 다르게 볼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구별은 정말 할 일없는 자들의 질문입니다. 오히려 베드로와 주님과의 관계와 베드로의 소명을 강조하기 위한 해설자의 수사적 의도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합니다. 이 세 번의 질문을 통해서 베드로의 고통은 무엇이었으며, 그리고 그의 고백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러한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예수님과 베드로의 내면 세계를 잠시 훔쳐봅시다. 도대체 무슨 생각들이 오가고 있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이니 베드로의 속마음을 아마도 훤하게 들여다보고 계셨을 것이고, 베드로 역시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기에 어디로 그의 감정을 숨기거나 모면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복음산책]: 이 단락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 있습니다: “왜 하필 베드로에게 이 모든 사역을 맡기실까?” 이 역시 공부 잘 못하는 사람들이 묻는 질문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이 장면을 통해서 베드로의 특별한 역할을 강조하려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단락에 와서 갑자기 달라진 배경의 변화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이곳에서는 앞에서 등장했던 다른 사도들은 사라지고, 베드로만이 주님과 홀로 대화하고 있습니다. 단지 “주님의 사랑하던 제자”가 나중에 잠시 등장할 뿐입니다. 아마 이 이야기는 앞선 그것과는 출처가 다른 자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크게 두 종류의 답변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적 답변과 개신교적 답변이 그것입니다. 우선 로마 카톨릭적 답변은, 이 소명이 베드로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간주하고, 주님께서 그에게 교회의 首長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이 단락은 마 16:18-19와 함께 金科玉條같은 곳입니다. 기억해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도 하나요, 감독도 하나”임을 주장하는 입장이라 이러한 해석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사실 구약에서 목자(shepherd)는 왕 내지는 통치자의 의미가 있기는 합니다(예: 삼하 5:2).
개신교적 해석은 이와 전혀 다릅니다. 보다 포괄적이라고나 할까요. 우선 목자의 의미와 범위부터 다릅니다. 신약에서 목자는 장로(elder)나 감독(bishop)의 의미도 아울러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자신은 주님을 “우리 영혼의 목자이자 감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벧전 2:25). 또 한 교회 내의 장로들을 가리켜 “함께 장로 된 자”라고 합니다(예로써, 벧전 5:1). 그리고 그 장로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합니다(벧전 5:3). 이 점은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성령께서 감독자가 되도록 맡기신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권합니다(행 20:28).
이렇게 볼 때, 이 대화는 베드로 개인의 목자직분에 대한 소명이라기보다는 목자 직분이 갖는 권위와 대표성에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 말이 났으니 말인데, 양 무리가 주님의 양 무리이지 어디 베드로의 소유입니까? 주님께서는 스스로를 선한 목자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고(요 10:11), 또한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림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도 했습니다(요 15:13). 그런데 어떻게 베드로가 통치하고 지배하는 목자(또는 감독)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우리의 해설자는 그의 사랑하는 공동체의 목자나 회원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사실 이곳에서 주님은 내포저자요, 베드로는 내포독자의 역할을 맡고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양 무리를 먹이고, 치려는 회원 여러분, 또한 새로운 양들을 전도하여 가르치려고 하는 회원 여러분, 당신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찬송가 102장을 불러봅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끊임없는 영적인 공급과 회복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여러분들을 목장모임에 불러 먹고 마시라고 권합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이 이 단락의 주제이자 오늘을 위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너는 돌이킨 후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후).
2) 나를 따르라(18-19절)
이제 주님은 비로소 베드로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무엇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18절의 예언은 15-17의 내용과는 별도의 전승으로 초대교회 안에서 여러 사람들 사이서 膾炙되고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베드로의 순교에 관한 이러한 예언은 앞의 단락과 적절히 연결되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바로 이게 목자의 운명 아닙니까? 목자의 운명과 관련해서 주님께서 일찍이 유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0:11과 15:13을 찾아 적어봅시다. 18절과 연결이 잘 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죽음의 방식과 관련해서도 18절은 많은 추측을 낳게 했습니다. 특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의 표현이 그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베드로가 십자가상에서 거꾸로 달려 순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트만은 한 잠언 경구를 이용해서 이 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릴 때는 자기 마음대로 다닐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그가 원하지 않는 곳에도 끌려 다녀야 하는 법이야.” 버나드도 이와 유사한 설명을 덧부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활기에 넘쳐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젊음과 연약하고 무기력한 늙음을 대조시킨 것이다... ”네 팔을 벌린다“는 표현도 늙어 타인의 부축을 받아 이끌려 가고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해석들을 토대로 이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해 보면, 베드로의 (영적) 젊은 시절의 자유분방함은 (영적)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순종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명령의 끝은 어디입니까?
이제 요한 공동체의 목자는 다시 그 회원들에게 마지막으로 권합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목자의 사명이자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어디까지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까? 그가 “너는 나를 따르라” 할 때 당신은 어디까지 따를 생각을 합니까? 우리의 사도 베드로는 어디까지 갔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의 순종의 끝은 죽음이었습니다. 나도 그럴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이 좁은 길을 걸어갑시다.”
참고로, 이 구절이 기록될 즈음에는 베드로는 이미 순교의 인생을 마감한 뒤였을 확률이 큽니다.
3) 네게 무슨 상관이야?(20-23절)
(1) 20절. 그러나 혹시 마음이 썩 내기키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왜 하필 나만?” 하고 회의가 듭니까? 이어지는 단락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곳입니다. 이제 해설자는, 베드로가 그토록 궁금해했던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본문은 아무런 언급은 없지만, 앞에서 베드로의 운명에 대해서 언급한 후에 곧바로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분명 두 사람의 운명은 상당히 대조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요한 공동체는 익히 알고있는 듯 합니다.
대개 우리는 열심히 교회에서 사역할 때, 은근히 화가 치밀 때가 있습니다: “다른 놈들 다 오데 갔노?” 평소에 열심히 사역하던 사람들은 이런 질문 잘 하지 않는데, 어쩌다가 개떡같은 마음이 생겨 한 번 큰 마음먹고 소매 걷어 부치고 뭐 좀 하려는 사람은 꼭 이런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언제 이런 질문 합니까?
(2) 21-22절. 베드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글쎄요, 그가 화가 났다는 암시는 없지만, 어쨌든 이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궁금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질문을 감정을 넣어서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21절). 이러한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22절)? 그 의미를 간단히 요약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이 사람이 베드로보다 더 편한 길을 걷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베드로가 간여하고 관심 가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만일 이 제자가 혹시 요한복음의 내포저자이기라도 하다면, 그는 분명 상당한 고심 끝에 이 구절을 추가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도 베드로는 순교하고 없는 지금, 자기는 여전히 살아있으니 혹시 그의 독자들이 자신의 목자로서의 자격이나 헌신에 회의를 품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더나아가 베드로의 이러한 질문을 삽입함으로써 행여나 대 사도 베드로를 비난하고, 흠집 내려는 의도로 비췰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22절은 주님의 입을 빌어서 해설자 자신이 그의 사역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라면 22절에 덧부쳐 당신의 입장을 설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기독교 사역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서 당신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게 하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도대체 기독교 사역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3) 22-23절. 그러나 22절의 설명은 공동체 안에서 엉뚱한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오해도 그렇고, 또 이제자의 운명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억척이나 추측들이 가능할까요? 한 예로서, 만일 이들이 이 제자가 주님 오실 때까지 살 것이라고 믿고있었는데, 주님은 오시지 않고 그 제자는 죽어버렸다면 종말에 대해서 이들이 상당히 실망했을 것입니다. 요즈음에도 이런 무리들 많이 있습니다.
수년 전 나와 성경 공부하던 한 학생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수 개월 동안 자취를 감춰버린 것입니다. 그러다 약 일 년 후 그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내용인 즉은 그 동안 그는 주님이 그 해 10월 24일에 오시는 줄로 믿고 열심히 기다렸는데, 그 날이 지나도 오지 않아서 실망하여 성경 공부를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한심한 친구였습니다. 나는 절대로 “다미선교”를 가르친 적이 없는데, 이 친구는 그 동안 나랑 공부하면서도 또 다른 선생으로부터 그 고약한 가르침을 계속 배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이 친구를 우연히 학교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뭐 하는지...
그래서 23절의 정정은 이런 점에서 상당히 적절한 것이라고 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3. 제 3단락(24-25절): 大尾
이 마지막 두 문장은 두 가지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21:1-23의 이야기를 분명히 “사랑하는 제자”가 썼음을 증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복음서 전체의 마지막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24절과 25절이 각기 다른 출처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24절 후반의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의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1) 24절. 비슬리 머레이는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능한 답변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에베소 장로들: 24절을 19:35와 비교해 볼 때, 분명 복음서의 내포저자 자신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일인칭 단수형”의 문장으로 표현되어있는 25절은 사도가 이처럼 말하는 것을 들은 자들입니다.
(2) 내포저자 자신: 복음서 자체의 공적인 신임도나 권위를 더하기 위해서 “우리”라는 복수형을 썼습니다. 특히 “증거”나 “증인”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는 항상 그러했습니다.
(3) 제 3의 인물: 복음서를 읽고 이해하고 있는 자들 중의 한 사람.
(4) 내포저자와 교회
(5) 단순한 표현 상의 문제: (예) 잘 알려져 있듯이
2) 25절. 이 마지막 문장은 내포저자의 결론인 20:30-31과는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섯 가지 정도 될겁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이 마지막 문장의 수사적 기법(과장법)은 당시 헬라 작가들에게는 익숙한 것입니다. 하기야 이러한 과장이 아니더라도 창조와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신실하신 헤세드에 대해서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다같이 불러봅시다.
연습 및 토의
1. 창조교회 각 회원의 궁극적인 비전은 우리 주보나 또는 교재(# 100)에서 밝혔듯이 자신의 목장을 갖는 것입니다. 즉 목자가 되는 일입니다. 오늘 베드로에게 주어진 소명과 비교해 볼 때, 과연 이러한 비전은 성경적입니까? 그리고 실현 가능한 비전입니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2. 당신은 이러한 비전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신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계획을 지금 어떻게 이루어가고 있습니까?
1) 본문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이 주제에 맞는 핵심성구를 암송해 봅시다.
2) 그 주제가 어떠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본문의 단락을 따라 순서대로 설명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