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4과
새 질서(1): 새로운 창조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2:1-12약 28분 분량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하니라(2:5);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

어느 국가든지 새로운 공화국이 들어서면, 국가의 모든 영역에서 일대 개혁이 시작됩니다. 우리나라도 해방 이후 여러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많은 정치, 사회, 경제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 개혁 조치들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이라, 개혁은 항상 충분하지 못했으며, 그로 인한 새로운 부작용만 남긴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컨대, 개혁의 주체 세력이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린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혁명의 문제점은 그것이 지나치게 혁명적이지 못하다”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혁명으로 들어선 정권이 대개 실패로 끝나는 것만 보아도 이와 같은 지적은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출발한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근대사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습니까? 이 역시 혁명입니다. <요한복음>의 서막(序幕)을 통해서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만, 이 나라는 예수님의 “성육신”(the Incarnation)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화자는 성육신 사건을 생명과 질서에 대한 “새로운 창조” 또는 “두 번째 창조”(second creation)라는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등장하고 있는 또 다른 일련의 신학적 주제들에 대해서는 “서론”에서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추후 이들에 대해서 해당 본문에서 개별적으로 다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1-5절 및 12-13절 등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서막에서 “새로운 창조”에 대한 장엄한 선언에 이어, 이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예들이 이어지는 일련의 에피소드들과 함께 2:1-4:42의 본문 사이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두 번의 기적 사건과 두 번의 담론을 담고 있습니다만, 이들 각각은 상호 무관한 것이 아니라, “새 창조”라는 동일한 주제 하에 구슬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학적 대가로서의 화자의 솜씨를 엿볼 수 있습니다:
(1) 새로운 창조(2:1-12)
(2) 새로운 성전(2:13-22)
(3) 새로운 탄생(2:23-3:36)
(4) 새로운 예배(4:1-42)
이 모든 새로운 변화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며, 그는 이들 사건과 담론의 주인공입니다. 화자는 이러한 구성을 통해서 그의 독자들이 ‘예수’가 과연 누구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예수’를 새로운 창조와 관련하여 선언한 바 있습니다(고후 5:17).
이러한 구성과 관련해서 볼 때, 제 2장은 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1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두 예들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문학적 연결: “사흘 되던 날에”(2:1)의 표현
(2) 신학적 연결: 1:51의 선언과 2:1-12의 내용
또한 화자가 “가나의 잔치”에서 일어난 기적을 “첫 표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인가에 상관없이, 적어도 신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는 첫 번째 기적이 되어야 할 당위성을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문학과 역사
기적설화. <요한복음>에서 <기적 이야기>는 <공관복음>에서 다루고 있는 <기적 이야기>들과 상호 연관을 지니고 있으며, 때로 비교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우선 기적에 대한 용어의 선택이 주목을 끄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기적을 “표적”(shmei'on; sign)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흔히 “권능”을 뜻하는 단어 ‘두나미스’(duvnami")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도 기적을 “표적”(t/a, 오트)으로 칭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 외에도 두 가지 다른 단어를 함께 사용함으로써, 기적의 다양한 측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기적과 관련해서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세 가지 단어를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표적/징조(sign): 출 3:12; 4:3-8; 삿 6:17; 사 38:7; 렘 44:29; 행 2:43; 4:16, 30; 8:13; 14:3; 마 12:39-40
(2) 이적/기사(wonder): 출 7:3; 신 26:8; 마 24:24; 요 4:48; 행 6:8; 14:3
(3) 권능(power): 렘 10:12; 출 15:6-7; 민 14:17; 대상 29:12; 출 9:16; 마 11:20; 13:58; 눅 1:35; 눅 10:19; 롬 8:39; 롬 1:16
기적에 대한 이들 세 용어가 각기 기적에 대해서 어떤 측면을 강조하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참고. 토의와 연습). 언급하였듯이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바는 “표적”으로서의 기적입니다. 기적에 대한 이와 같은 지식을 바탕으로 기적에 대하여 보다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을 것인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할 준비를 늘 갖추고 있는 것이 복음의 설득과 전파에 유익할 것입니다(참고. 벧후 3:5). 아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별도 “연습과 토의” 시간에 심도 있게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1) 기적의 정의-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의 차이
(2) 기적과 자연법칙-기적은 과연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인가?
(3) 기적의 확인-기적을 어떻게 기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까?
(4) 기적의 역사성-기적은 역사인가 신화인가?
(5) 기적의 필요성-기적은 과연 유익한가?
단락과 구조. 본문의 구조는 아주 단순합니다. 기적 사건을 중심으로 일종의 기승전결(起承轉結) 식의 직선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다섯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기적의 배경 및 필요성(1-3절상)
(2) 기적의 시기(3하-5절)
(3) 기적의 발생(6-8절)
(4) 기적의 확인(9-10절)
(5) 기적의 목적(11절)
자료와 편집. 마지막 11절은 화자 자신의 “해설”(exposition) 내지는 “주해”(comment)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화자는 11절에서 이 기적을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 진술은 예수님께서 같은 지역 ‘갈릴리’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4:54). 이처럼 화자는 같은 기적이라도 ‘갈릴리’ 외의 지역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2:23). 추측컨대, 화자는 <요한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곱 가지의 기적을 포함한 일련의 기적 사례들을 담고 있는 소위 <표적 전승>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승의 말미에는 <요한복음>의 결론으로 알려져 있는 다음과 같은 진술이 담겨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0-31)
소위 <표적 전승>이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기적들 모두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가나’의 두 기적만큼은 담고 있었을 것이며, 화자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 계시의 시작으로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기적의 필요성(1-3절)
이야기는 “사흘째 되던 날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시간에 관한 이와 같은 언급은, 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어떠한 기능과 의미를 지닐까요? 너무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만,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해 볼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1:51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약속과 연관시켜 볼 수도 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며,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마지막 날의 안식이 떠오르기도 할 것입니다.
혹자는 이날을 부활 주일과 연관해서 생각하려 하는데, 이는 이날의 기적이 예수님의 영광의 부활을 예고해 주고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창세기> 1장의 한 주간과 1:19-2:1의 본문 전체가 다루고 있는 한 주간은 각기 첫 창조와 두 번째 창조를 나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다 단순한 해석을 선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사흘 후”는 아주 짧은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나다니엘’에게 약속하셨던 “더 큰 일”(1:50-51)이 지체 없이 성취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잔치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은 이들도 예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될 것임을 시사해주고 있는데, 이는 제자들이 잔치에서 맡게 될 역할이 무엇이든 예수님께서 그 책임을 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3포도주가 떨어진지라(2-3절상)
그런데 이 신나는 축제 한 마당에서 아주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술이 떨어진 것입니다. 요즈음처럼 술 가게가 따로 있지도 않았을 터이니 당황스러운 상황이 벌어진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개 일 주일씩이나 걸리는 ‘유대’ 식 결혼 풍습을 생각한다면 술이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접대 상 심각한 결례로서, 신랑 측에 나쁜 영향을 주었으며 때로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W. Barclay).
예수님의 어머니도 잔치에서 손님 접대하는 일을 맡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아들에게 와서 이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아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 합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3절하)
왜 그녀는 이 문제를 예수님에게 알리고 있는 것일까? 아들이 무슨 기적을 일으켜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을까?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브루스 밀런’의 설명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녀의 요청은 본질적으로 그 분에게 자신의 필요를 알리는 것으로, 중보기도에 대한 아주 좋은 모범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뭔가를 지시하기 위해 기도를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분 앞에 우리의 필요를 내려놓고, 그 분이 원하시는 대로 응답하시도록 그 분을 의뢰하는 것이다”(참고 도서 15, 79쪽). 이러한 설명은 그 자체로서는 하등의 하자가 있을 수 없으나, 이 장면에 대한 해석으로는 지나치게 경건주의적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지극히 순진하며, 이야기의 극적 효과를 반감시키는 것입니다. 극적 효과라 함은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를 “창조의 기적”으로 시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그분의 어머니가 이미 알고 있었다고 전제한다면 이야기의 흐름은 논리적 일관성을 잃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기적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일어나기 위한 당위성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어머니는 지금 기적을 기대하고 있기보다는 술이 없기 때문에 그녀 역시 매우 당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녀의 당혹스러움을 가중시켜주는 요소는 하나 더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의 존재입니다. 이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무슨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주인에게 부담만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제자들 역시 앞에서 전제한 바대로 잔치집 주인과 친척관계에 있었다면, 당시 유대관습에 의하면 이들 역시 어떠한 형태로든 도움을 주어야만 했기 때문에, 아들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는 어머니로서는 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화자가 의도하고 있는 바는 예수님의 어머니의 당황스러운 모습을 통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은근히 예수님의 기적을 기대하게 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수사적 기법은 <요한복음>의 화자가 다른 곳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서, 한 예로, ‘베데스다’ 연못가의 기적을 소개함에 있어서도 사전에 길고 상세한 정황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참고. 5:1-7).
2. 기적의 때(4-5절)
그러나 이어지는 단락은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답변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절)
이 구절을 삭제하는 것이 오히려 더 부드럽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자연스러움 때문에 혹자는 이 구절을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보기도 합니다. 즉 화자가 <기적 전승>의 자료에 이 구절을 추가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정 반대의 주장을 펼치는 학자도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은 원래부터 <기적 전승> 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야기를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역사적으로도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진영은 예수님의 답변 태도를 놓고 서로 상반된 극단적인 입장을 유지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즉 前者가 예수님의 답변을 부드럽고 평온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반해, 後者는 다소 공격적이며 적대적인 답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는 <구약>에서도 서로 상반되는 두 경우 모두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삿 11:12; 대하 35:21; 왕하 3:13), 이 한 문장만으로 화자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가려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열왕기>는 흥미로운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하니라(왕하 3:13)
이곳에서 선지자 ‘엘리사’는 왕의 요청에 거부 의사를 드러내고 있지만, 결국에는 그 요청을 수용하기에 이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그분의 어머니의 요청을 거부하는 듯하지만, 결국 어머니의 요청에 부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답변 속에는 또 다른 애매모호함이 있습니다. 그분의 “때”(w{ra, 호라)와 관련된 언급 때문입니다. 과연 그 때가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 분명치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그 때를 그분의 죽음과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물론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연관 지어 말씀하시긴 하지만(7:30; 8:20; 13:1; 17:1), 이 장면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곳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에 따라 화자의 의도를 추측해 보건대, “하나님 나라”나 공생애의 시작은 그 시기를 하나님만이 결정하실 문제이지 어느 누구도(예수님의 어머니를 포함해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을 것입니다. 혹시 이러한 강조가 지나쳐 이처럼 불필요한 곳에서 무리한 표현이 삽입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3. 기적의 발생(6-8절)

마침내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기적은 그야말로 “창조의 기적”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모리스’(H. Morris) 박사는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모든 기적을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Morris, H. M., The Biblical Basis for Modern Science.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4.
소위 “창조의 기적”(흔히 등급 A 기적으로 불림)과 “섭리의 기적”(등급 B 기적)이 그것입니다. “창조의 기적”이라 함은, 전문적인 용어를 빌자면, 현재 가장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알려져 있는 “열역학의 두 법칙”에 반하는 기적들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열역학의 두 법칙”에 관한 상세한 설명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상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그리고 “섭리의 기적”은 딱히 “열역학의 두 법칙”에 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적의 발생 시기나 장소 등과 관련해서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할 때 부르는 이름입니다.
이 분류에 따르면, 본문의 기적은 “창조의 기적”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기적이 갖는 상징성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새로운 창조”와 함께 시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창세기>가 하나님의 천지창조 즉 “첫 창조”로 시작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창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기적의 발생과 관련해서 다시 한 번 특유의 대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과 포도주의 대조가 그것입니다. 물과 포도주는 각기 ‘유대’교와 복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는 종교와 하나님의 나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물이 종교적 정결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포도주는 기쁨과 환희를 상징합니다. 물이 잔치에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없듯이 종교 또한 삶에 아무런 기쁨도 줄 수 없습니다. “여섯 개의 물 항아리”가 전달해 주고 있는 이미지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6절)
숫자 “여섯”은 화자가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즐겨 사용하는 완전수 “일곱”에서 하나가 빠진 숫자입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며, 무미건조한 종교에 대한 이미지라 할 것입니다.
기적의 발생과 관련해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무명의 하인들의 역할이 그것입니다. 이들의 역할은 무엇이었습니까?
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7-8절)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사람들의 “순종”이 기적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순종을 통해서 직접 기적을 체험하는 특권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잔치에 기쁨을 더해주는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4. 기적의 확인(9-10절)
연회장(그가 누구든)의 탄성을 들어봅시다:
9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9-10절)
혼주의 칭찬은 당시에 회자하던 일종의 경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완벽한 기적에 대한 비유적 선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행태는 변한 것이 별로 없는 듯합니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술집 주인들은 손님들이 거나하게 취하기 시작하면 물 타는 짓을 많이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의 초점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기적, 그것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자연적인 기쁨은 “포도주가 떨어지듯” 한계가 있고 그 끝이 있습니다. 기쁨이 더 충만한 기쁨으로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그것들은 언젠가는 소진되고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공허와, 상실과, 허무가 따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의 기쁨이 날로 풍성하고 충만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10:10하).
5. 기적의 목적(11절)
마지막 구절은 기적의 목적과 관련한 화자 자신의 해설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절)
강조를 위해서 밑줄 친 부분은 단어 하나하나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들로부터 일련의 교훈과 적용 점들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화자는 ‘가나’의 기적을 “처음 표적”으로 칭하면서, 이를 주님의 “영광”과 “계시”와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이들 모두는 기적의 궁극적인 목적과 결부된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은 그 성격상 “창조의 기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 했습니다. 그리고 혼인 잔치는 ‘유대’교에서나 <공과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아주 친숙한 이미지입니다(예. 마 5:6; 8:11-12; 22; 막 2:19; 눅 22:15-18, 29-30상). 그리고 풍성한 포도주는 잔치의 한 모습이기도 합니다(사 25:6).
교훈과 적용
1. 하나님 나라
희락.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 나라의 특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하지만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필자의 경우만 해도 이 구절을 교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이해는 하고 있으나, 실제 삶에서 제대로 체험하거나 구현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못합니다. 특히 “희락”과 관련해서 돌아볼 때, 거의 영점 수준입니다. 환희보다는 걱정, 즐거움보다는 분노, 밝은 모습보다는 찡그리고 어두운 모습을 짓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이런 모습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부인하고 싶은 것이지만 마음대로 잘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즐거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 32: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또한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가 “희락”입니다(갈 5:22). 이 모든 구절들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 나라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로 “희락”을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혼인 잔치.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공생애(共生涯)를 결혼 잔치에 참석하는 것으로 시작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혼인 잔치는 ‘유대’교에서나 <공과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아주 친숙한 이미지라고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결혼 없는 삶, 즐거움 없는 결혼, 술 없는 즐거움, 이 모두 상상하기 어려운 이미지들입니다. ‘가나’의 결혼은 이 모두를 다 포함하고 있기에 하나님 나라의 시작에 대한 이미지로 더없이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결혼식의 혼주(婚主)는 이 모든 즐거움에 한 가지를 더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초청한 것이지요. “그가 왜 예수님을 초청했을까?” 우리는 이런저런 추측을 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즐거움의 자리에 함께 하시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이는 정말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지적 호기심에 정서적 즐거움을 더하기 위하여, 그날의 잔치 장면을 좀 더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잔치가 무르익어 가고, 음식과 술은 더 빨리 오가며, 사람들의 얼굴에는 취기가 역력해지면서, 누군가가 흥을 이기지 못하여 일어서 노래하며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이에 질 새라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더 큰 소리로 노래하고 떠들면서 ‘가나’의 밤은 여흥으로 깊어만 갑니다.
이 와중에 예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구석에 혼자 앉아 안개를 피우며 사람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혹은 술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때는 이때다”하고 기적을 베풀어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리면서. 또는 광란의 파티가 싫어 일찌감치 그 자리를 떴을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자기 노래 순서가 되었을 때, 취객들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거룩한 찬송가를 불러 잔치판에 찬물을 끼얹었을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롬 12:15). 예수님께서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지금 파티에 참석하여 웃고, 즐거워하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그 자리를 빛내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장면은 예수님에 관한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예수께서 사람들과 함께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첫 번째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어쩌면 유일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자리에서 불편함이나 어색함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또는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는 것에 대해서 부담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수이기도 한 필자는 세미나다, 학회다 하여 수시로 회식 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회식 후에는 대개 노래방 등에서 여흥을 가집니다. 술이 한두 순배 돌고나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노래와 춤을 시작합니다. 이 정도면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참고 앉아 있을 만한데, 도우미들까지 등장하게 되면 정말 난감해 집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란 게 뻔합니다. 처음 보는 손님들 붙잡고 어울려 춤추고 노래한 대가로 수고비를 받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그 자리에 있어야 할지, 아니면 일찌감치 자리를 떠나야 할지를 놓고 어색해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함께 하자니 어딘가 꺼림칙하고, 그렇다고 혼자 빠져나오자니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습니다. 결국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때로는 참석하는 쪽으로, 어떤 때는 불참하는 쪽으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순전히 그날의 기분에 달린 선택입니다. 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내 기분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함께 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공유하거나 만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저래 내 행동은 믿음에 근거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일관성 있는 행동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분은 잔치에 참석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즐거움을 계속 이어가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가나’의 여흥이 계속되면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신나게 먹고 마셨으면 포도주가 다 떨어졌겠습니까? 보통 결혼 한 번 하는데 일주일씩이나 걸렸다고 하니 술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것은 접대 상 심각한 결례로서, 신랑 측에 나쁜 영향을 주었으며 때로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포도주가 없으니 더 이상의 즐거움은 없습니다. 잔치는 이제 파장입니다. 술은 즐거움의 상징입니다. ‘랍비’의 경구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술이 없으면 즐거움도 없다.” <시편>의 시인도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주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시 104:15). <사사기>는 포도주가 “신들과 사람들을 모두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삿 9:13). <이사야>는 우리로 하여금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예수님은 술이 떨어져 잔치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혼주가 당황스러워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요즈음처럼 술을 사러 근처 가게로 갈 형편도 아닙니다. 술이 떨어졌다며 염려하는 어머니에게, “지금은 내 때가 아닙니다”라고 했으면서도, 잔치의 즐거움이 계속 이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가나의 기적”이 탄생하는 극적 순간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 부분이 본문 이야기에서 또 한 번의 경이로운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이로움은 또 있습니다. 혼주의 탄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10절). 예수님께서 만드신 새로운 포도주는 단순히 좋은 포도주가 아니라, 최상의 포도주였습니다!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은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예수님께서 이날 최고급 포도주를 얼마나 제공하셨을까? 각 항아리의 부피가 물 두세 “통”(metrhthv") 대략 9갤런에 해당하는 부피.
이었으니, 여섯 항아리 모두에 채우면 대략 백 내지 백팔십 갤런의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ay)는 포도주의 양이 이처럼 많은 데에 놀라며, 지구상 어느 혼인 잔치에서도 그토록 많은 포도주를 마실 수는 없다면서, 이 숫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실토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할 근거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날 아예 작정하고 포도주가 차고 넘치도록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먹고 남을 정도로 말입니다. 하객들은 그야말로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시며 신나게 놀았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께 나아올 때, 그분을 구세주로 영접할 때, “가나의 잔치”가 내 속에서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허와 무기력과 어두움과 분노의 자리에 새 질서의 포도주가 명랑하고, 유쾌하며, 즐거움과 활기로 대신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즐거움의 포도주를 넘치도록 만드신 주님께서 먹을 양식 또한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분이 채워주실 것이 어찌 먹고 마시는 것에 국한될 수 있겠습니까!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2. 물과 포도주
해외 선교 특히 회교권 국가에 대한 선교를 놓고 교회 내에서조차 찬반양론이 뜨겁습니다. 물론 반대 진영도 기독교 선교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단지 그 방법론에 대한 문제 제기일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이들 국가에서 선교 활동을 벌이다 테러 집단에 납치되어 살해되거나, 또는 당국에 의해 적발되어 추방되는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점들이 노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부도 이들 선교사들 때문에 해당 국가로부터 여러 차례 항의를 받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가 최근 입법 예고를 한 것이 있는데, 향후 외국에서 말썽을 일으켜 국외 추방령을 받은 여행객들에 대해서는 이들의 여권을 압수함은 물론 일정 기간 해외여행을 제한시키겠다는 것입니다. 향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기독교회로부터 반발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이유인 즉은 현재 대한민국에 파송되어 있는 이슬람 선교사가 3만여 명에 이르며, 이들의 선교 활동은 종교의 자유라는 명목 하에 전혀 제한을 받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법의 보호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입법은 형평성을 잃은 조치이며, 향후 기독교 선교를 심각하게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복음은 늘 경계와 배척과 질시의 대상이었지 마치 개선장군처럼 열렬히 환영받으면서 전해진 적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복음 전도자가 유념해야 할 대 원칙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뱀처럼 지혜롭게, 비둘기처럼 순결하게”일 것입니다.
필자의 연구실에도 회교권 국가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다수 있습니다. 이들이 선교의 목적으로 왔는지 아니면 순수하게 학위 취득을 위해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필자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왔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려줄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복음을 들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굴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필자의 연구실에는 매일 치열하게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복음을 강요할 수 없고, 그렇다고 수수방관 내버려 둘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요? ‘존 스토트’ 목사님이 제안하신 “설득”만이 유일한 대안이 될 뿐입니다. 그것도 치열하고도 끈기 있는 설득이라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역시 치열하고 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종교적 열심은 정말 대단합니다. 정해진 음식 외는 입에 대는 법이 없습니다. 연구실에서 회식을 할 때마다 우리 학생들이 이들에게 맞는 식사를 주문해 주느라 바쁩니다. 사실 매번 이런 일이 반복되어 짜증도 나고, 아예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이 달아납니다. 이처럼 선별적으로 먹는 음식마저도 일 년에 한 달씩은 아예 안 먹고 지냅니다. 그 유명한 ‘라마단’ 기간입니다. ‘라마단’ 기간은 음력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매년 그 시기도 달라질 뿐만 아니라, 나라마다 지역에 따라서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같은 지역마다 일몰(日沒) 시간이 다르므로 금식 시간도 다르며, 같은 지역 내에서도 매일 일몰시간이 달라지므로 매일 저녁 식사 시간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 각 사람은 매일 일몰 시간표를 지니고 다니면서 언제 저녁을 먹을지를 살펴야 합니다. 한 번은 학생 중의 하나가 하루 종일 금식으로 너무 배가 고팠던지 일몰 후 저녁시간에 과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로 인해 급성 복통으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는 등 한바탕 소동을 치룬 적도 있습니다. 하도 어이도 없고 딱해서 병상에 누운 그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병원을 나오면서 나는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이 친구가 이처럼 힘들여 얻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기도와 금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는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체득한 답은 이런 것입니다. “아, 모든 종교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종교로구나.” 종교는 수없이 많은 규율과 규정을 가지고 우리를 구속하고 속박합니다. 규율이 많은 곳에 위법과 처벌이 난무합니다. 처벌이 많은 곳에 두려움과 꾸밈이 많습니다. 꾸밈 즉 가식이 많은 곳에 자유와 환희가 없습니다. 생명과 능력이 없습니다. 무기력만 남을 뿐입니다. 나는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 종교가 무엇이든, 기독교이든 아니든,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종교적 가르침 밖에 없습니다. 경건과 거룩과 영성과 이 모든 것들을 다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기쁨”이 없습니다. 포도주 없는 잔치처럼 말입니다. 화자가 기적의 발생과 관련해서 다시 한 번 특유의 대조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물과 포도주의 대조가 그것입니다. 물과 포도주는 각기 ‘유대’교와 복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는 종교와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물이 종교적 정결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포도주는 기쁨과 환희를 상징합니다. 물이 잔치에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없듯이 종교 또한 삶에 아무런 기쁨도 줄 수 없습니다. “여섯 개의 물 항아리”가 전달해 주고 있는 이미지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숫자 “여섯”은 화자가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즐겨 사용하는 완전수 “일곱”에서 하나가 빠진 숫자입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며, 무미건조한 종교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다시 물어봅시다. 나는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까? 정답은 “나에게는 아무 종교도 없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 속에 오직 “성령의 충만” 만이 있을 뿐입니다.
3. 기적과 표적.
이 주제에 대해서는 별도 심도 깊은 강의가 필요하여, 다른 적절한 시간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연습과 토의
1.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 이 구절과 관련해서 내가 이끌어낼 수 있는 적용은 무엇입니까? 나에게도 과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의 항아리에 채울 예수님의 기적은 어떤 것이 있을까? 나는 단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해 본 적이 있는가? 없었다면 왜 없었을까? 내가 원하는 기적은 어떤 유형인가? 내가 원하는 기적의 한 형태를 적고, 그것이 과연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를 다음 한 주 동안 관찰하고, 그 결과를 적어 나누어봅시다.
2.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절). 이 구절을 통해서 이끌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적용은 무엇입니까? (* 바보들의 적용: “그래, 잔치에는 역시 포도주가 최고야.”) 내가 마시는 하나님 나라의 포도주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3. “물과 포도주” 그리고 “종교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