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5과
새 질서(2): 새로운 성전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2:13-22약 41분 분량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2:17후)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후)
“기적”과 “표적”의 관계는 <가나의 잔치>에서 보듯이, 각기 수단과 목적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목적은 하나이겠습니다만, 그것을 이루는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의 행동 즉 “성전 숙정(肅靜)”은 기적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곳에서 드러나는 표적은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담론(談論) 즉 대화를 통해서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성전 숙정” 사건은 그 자체로서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뒤이은 예수님의 설명을 통해서, <복음서>의 주제가 드러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주제란 다름 아닌 “기독론”, 즉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인가?”입니다.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16절)과 사흘 동안에 새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그분의 약속(19절)은 그리스도 사역의 본질, 즉 “구속”과 “계시”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둘은 각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기존의 성전은 없어지거나 사라질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전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책을 통해서 그분이 마치 성전과 예배를 거부하고 멸하기 위해서 오신 것처럼 보입니다만, 새 성전에 대한 그분의 약속을 통해서 보듯이, 오히려 그들을 세우고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핵심 주제가 종말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신학적 주제와 더불어 교훈은 없을까요? 특히 “가나의 잔치”와 구별되는 분위기 등을 중심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형식과 구조. 본문의 구조적 특징은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고대의 두 폭 짜리 그림이나 서판(書板)과 같은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입니다(이러한 구조를 ‘diptych’라 부릅니다). 오늘날 호텔이나 관공서 입구의 회전문과 유사합니다. 회전문은 여러 개의 문이 한 개의 기둥에 고정되어 번갈아 돌아갑니다. 때로 각 문은 그 무늬나 색깔이 달라 회전할 때마다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본문의 구조도 그와 같습니다. 문이 두 개 달린 회전식 구조로서, 각 문은 하나의 단락을 이루고 있는데, 두 단락은 일종의 시적 병행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각 단락의 구조와 내용을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회전문
(1)예수님의 행위(14-15절)
(2) 예수님의 담론(16절)
(3) 제자들의 회상(17절)
두 번째 회전문
(1) 유대인들의 행위(18절)
(2) 예수님의 담론(19절)
(3) 유대인들의 오해(20-21절)
(4) 제자들의 회상(22절)
자료와 편집. 이 두 단락은 형식에 있어 이처럼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만, 처음부터 동일한 전승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 소개하고 있는 성전 숙정(肅靜)에 관한 내용은 <공관복음>에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각기 별개의 기록이기는 하나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단락, 즉 예수님과 ‘유대’ 당국자들 사이의 대화에 관한 기록은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교 연구를 위하여 각 단락과 내용 상 유사한 <공관복음>의 기록과 나란히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14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요 2:14-16)
15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막 11:15-19)
성전 숙정에 관한 이 내용은 두 복음서에서 모두 그 기록 목적이 일종의 경구(驚句)를 위함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은 처음부터 별개 자료집 속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해줍니다. “대화” 기록의 출처에 관한 단서를 얻기 위해서 두 복음서의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8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18-21)
27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 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29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요한의 세례가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로 서냐? 내게 대답하라. 31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 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그러면 사람에게로 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33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막 11:27-33)
이 두 기록 역시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어 동일한 출처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마가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대화는 그 주제가 성전 숙정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권위”에 관한 것으로서, 같은 복음서 내에서 이어지고 있는 내용, 예컨대 “가이사에서 세금을 바치는 문제”(막 11:13-37) 등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이나 <마가복음> 모두 두 개의 단락이 각기 다른 출처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질문은 성전 숙정에 관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 간의 상관관계에 관한 것으로서, 성전 숙정이 예수님의 생애에서 과연 한 번 있었는가 아니면 두 번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는 이 사건은 단 한 번뿐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난 시기도 <요한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바처럼 예수님의 공생애 첫 주간이 아니라, 마지막 주간에 있었다는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관복음>의 기록이 적어도 연대기적으로는 정확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각 복음서의 화자는 서로 다른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이 사건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의도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추측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도 <요한복음>과 유사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예로, 예수님께서 ‘나자렛’을 방문하는 사건을 “갈릴리 사역”의 시작으로 그리고 있습니다(참고. 눅 4:16-30). ‘누가’에게 ‘갈릴리’는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서 ‘갈릴리’의 신학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추후 별도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성전 숙정(13-17절)
하나의 사건 또는 에피소드를 기록함에 있어 항상 배경에 관한 사실적이거나 대조적인 서술은 ‘요한’ 화자의 독특한 수사적 기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배경에 관한 서술을 통해서 신학적 주제를 암시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도 예외는 아닙니다. 단락의 첫 구절은 바로 배경 설명에 해당합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13절)
“유월절”을 두고 왜 구태여 “유대인의 유월절”이라 부르고 있는지 그 의도를 추측해 보는 것도 해석상 유익한 작업이 될 것입니다. 단락의 주제를 파악하는 일에 일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성전 숙정 사건이 일어난 실제 시기와 관련해서 일련의 의문점들을 제공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우선 화자가 “유대인의 유월절”이라 호칭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유월절”에 대한 그의 적대감이나 경멸감 같은 감정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화자 당대에 교회는 더 이상 이 축제를 지키지는 않았던 것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유대’적 축제는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되었고 완성되었음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가 말하는 “유월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정확히 어느 시점의 “유월절”인지에 관한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은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애 거의 마지막 시기에 일어난 것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공생애 초기부터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다고 볼 수 있을까? 이어지는 다른 본문을 통해서 볼 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요한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네 번의 “유월절”은 예수님의 전체 사역기간을 계산하는데 아주 좋은 산술적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참고. 2:1, 23; 3:22; 4:1).
이어지는 장면은 화자가 <요한복음> 서막의 구체적 예로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서, 다시 한 번 화자의 특유의 빛과 어두움의 대조를 통해서입니다. 즉 ‘로고스’의 빛이 그 방향을 바꾸어 어둠 속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14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14-16절)
빛이 처음 보여주는 모습은 성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14절). 구태의연(舊態依然)함 바로 그것입니다. 즉 빛이 몰아내어야 할 구시대의 종교적 작태를 말합니다. 빛의 기능은 더러운 것을 태우고, 불결한 것을 소독하고, 시들어가는 것을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태우고 소독할 때에는 맹렬함과 치열함으로, 그리고 소생시킬 때에는 온유와 온화함으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보이고 있는 모습은 온유와 온화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는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처럼 분노의 채찍으로 어둡고 더러운 성전을 태우며, 소독하고 있습니다. 상인들과 짐승들을 몰아내고, 돈을 쏟아 버리며, 상을 뒤엎어버립니다(15-16). 이 장면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어느 누구 한 사람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서 반발하거나 대항하는 자가 없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주목해 볼 만 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분노하고 있는 대상이 예배나 예배 객들이 아니라, 예배나 종교의 이름으로 경제적 이득을 챙기는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동기는 무엇이며, 화자가 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머레이’(G. R. Beasley-Murray)는 다음 네 가지로 그 의미를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거룩”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성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즉 예배를 위한 상거래는 “거룩”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선지자 ‘스가랴’의 환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날에 만군의 여호와의 집에 다시는 장사치가 있지 아니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취하신 이 행동은 종말의 성취, 즉 하나님께서 성전과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게 될 궁극적인 종말의 성취를 드러내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종말이 성취되는 방식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즉 종말은 단순히 거룩한 성전을 구현함으로써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종말은 예수님께서 성전의 장사꾼들을 몰아내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행동이 가져다 줄 결과, 즉 그의 행동이 야기 시킨 사람들의 미움과 질시로 인하여 맞이하게 된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신약>은 여러 곳에서 <시편>의 “고난 받는 의인”(시 69:9)을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죽음을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구속을 위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셋째, 진정한 예배에 관한 미시지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주의 전을 위한 열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거룩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곧 진전한 예배를 가로막은 일체의 장애물들을 제거함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넷째, 새로운 질서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이는 다시 한 번 종말론의 새 질서와 상통하는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성전으로부터 모든 희생 짐승들을 내쫓아 버리는 행동이 보여주는 이미지입니다. 그분은 옛 질서 속의 예배를 거부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취 즉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새 예배를 예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양과 염소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써 단번에 이루어진 그 제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2. 표적(18-22절)
‘유대’ 당국은 “성전 숙정”이 주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했을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와서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절)
이들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단락의 주제로 독자들을 이끌어 갈 것입니다만, 첫 번째 단락이 화자 자신의 서술을 통해서 그렇게 했다면, 두 번째 단락에서는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해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두 단락의 문학적 관계에 대해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문학과 역사>.
이 질문의 핵심 단어는 “표적”입니다. “가나의 잔치”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이 단어가 이곳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질문인 즉은, 예수님의 행동이 주는 진정한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 “표적”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나 권위와 불가분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통해서 선지자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데 “표적”을 요구하는 오랜 관습을 가지고 있습니다(참고. 신 18:20-22; 13:1-5). <공관복음>에서도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만(막 8:11; 눅 23:8-9; 마 12:38-40),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유일한 표적은 “부활의 표적”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
예수님의 대답은 그 양식에 있어 수수께끼 또는 우화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응 방식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것임이었음에도, 당국의 지도자들은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일으킨다”는 말이 그렇습니다. 이어지는 ‘유대’인들의 질문은 전형적인 “오해”에 속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20절)
이들의 오해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데에 따른 것입니다. 대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대화 상대가 보여주는 이와 같은 “오해”는 예수님께서 추가로 해설이나 설명을 덧붙여 주십니다만(예. 3:4-12), 이곳에서는 화자 자신이 직접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절)
이와 같은 화자의 설명은 예수님 자신의 설명(19절)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표적”과 그 성취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즉 “성전을 허무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새 성전을 사흘 만에 짓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허무는 일”을 성취할 것이며, 예수님은 그것을 사흘 만에 세우는 일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화자의 이와 같은 설명은 부활절 이후의 경험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와 새롭게 함 즉 재창조를 경험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영속적인 교제가 가능하게 됩니다. 당연히 새 시대의 새로운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화자는 다시 한 번 이 에피소드의 목적에 관한 진술로 이야기를 끝맺고 있습니다. “표적”과 “믿음”에 대한 언급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절)
“가나의 잔치 이야기”를 “표적”과 “믿음”에 관한 언급으로 마무리했던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참고. 2:11). 차이가 있다면 전자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기적”이 표적의 역할을 했다면, 이번에는 예수님의 “대화”가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주목할 만 한 사실은,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이 부활 이후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이라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보다 구체적으로는 <시편>의 한 구절로서 17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교훈과 적용
1. 채찍과 포도주
결혼식은 엄숙한 언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흥겨운 잔치이기도 합니다. “가나의 잔치”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맛보기 위해서 오늘날의 예식장 결혼을 떠올린다면, 과녁은 완전히 빗나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전통적인 결혼 풍습을 그려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필자는 나름대로 “가나의 잔치”를 한 번 그려보았습니다. 마당 여기저기에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축하객들이 둘러앉아 먹고, 마시고, 떠들고, 노래하며,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철판 양구이가 등장하고, 주거니 받거니 포도주가 오가며, 신랑 친구들은 신랑 다리 거꾸로 매달아 놓고 즐거워하고 있고, 또 한 편에서는 어디서 빌어 왔는지 속칭 ‘가라오께’를 틀어놓고 신나는 노래 한 마당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필자 또래의 연배라면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노래들, “돌아와요 부산항”, “소양강 처녀”,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이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비틀거리며 예수님에게 다가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뭔가 이야기를 건네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이 예수님, 당신 말이야... 끄으윽.” 이거 큰 일 내겠습니다. 그런대도 손님들은 도무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포도주가 다 떨어져가면서 속 타는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님도 주인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여흥 속에 파묻히고 맙니다. 본인도 취했으니 주인의 걱정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잔치를 일주일씩이나 치렀다고 하니 과연 멋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예배는 어떻습니까? 예배는 제사이기도 하지만 축제입니다. 신나게 노래 부르고 춤추는 잔치입니다. 박수치고 흔들고 하는 축제 한 마당인 것이지요. 말씀의 선포와 회개의 눈물이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용서의 감격이 있고, 결단과 헌신의 간증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라면 예배가 끝이 났는데도 사람들이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삼삼오오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아무에게도 말 못한 간증 거리를 나누느라고 말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멋진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지금 유월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고 있는 예배는 어떤 모습입니까? 눈을 감고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완전히 아수라(阿修羅)장입니다. 비둘기, 염소, 양들이 울어대는 소리, 여기저기 어지럽게 늘려있는 짐승들의 배설물, 이들 희생 제물들을 한 푼이라도 싸게 사기 위해 열심히 흥정하고 있는 모습, 환전상인들, 그리고 이 모든 소요와 어지러움 뒤에서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에 침을 튀기며 돈을 세고 있는 ‘사두개’인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 여기에 왜 와있는지, 그리고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유도 알지 못하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관행일 따름입니다. 외견 상 이 장면은 “가나의 잔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마치 그 잔치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아직 술이 덜 깬 상태로 다음 날 성전에 예배드리러 모여든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까? 지난 밤 마시다 남은 포도주를 여기까지 들고 와서 계속 마시고 있습니까? 얼굴은 여전히 홍조를 띄고 있고, 입에서는 술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까?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고,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를 노래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금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고 있습니다. 지난 밤 느긋하게 손님들과 정답게 환담을 나누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팔소매 걷어붙이고, 두 눈 부릅뜨고, 채찍 휘두르며, 포효하고 있습니다. 술이 확 깨는 장면입니다. 상들은 엎어지고, 짐승들은 놀라 달아나고, 잡상인들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며 성전을 빠져나갑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정신이 버쩍 들었을 사람들이 있었을 터인즉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내심으로, “야, 이거 호락호락하신 분이 아니구나. 말랑말랑한 분인 줄 알았더니, 앞으로 공과 사를 좀 구별해야겠구나.”
우리가 예수님을 연상할 때마다 두 가지 극단적인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하나는 아주 유순하고, 얌전하여 사람들과 좀처럼 논쟁을 벌이지 않는 화해주의자로서의 예수님입니다. 그는 진정 상한 갈대도 꺾지 않는 자상하고 인정 많은 분이십니다. 그 자신 모든 시험과 고통을 겪으신 관계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히 4:15). 우리가 아무리 잘못해도 그저 초지일관 “오냐, 오냐” 하십니다. 대개 이러다가 사람들은 할아버지 무릎 위에 앉아 수염 뽑는 못된 망나니처럼 되어갑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기도를 드릴 때에도 자는 듯, 꿈꾸는 듯, 의식 몽롱합니다. 또 다른 극단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아주 엄격하고, 까다로운 분입니다. 허점이 없습니다. 웃거나 농담을 하는 법도 없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준 일이 없으니, 피해를 입는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피해를 받을 경우 법적 대응도 불사할 각오입니다. 기도와 성경공부는 하루도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이처럼 늘 성난 예수님을 연상하는 순진한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습니다만, ‘바클레이’(W. Barclay)는 본문의 제목을 “성난 예수”로 삼고 있습니다.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예수님에 대한 수식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만, 본문의 신학적 주제를 잘 파악한 제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평소 예수님을 어떻게 대합니까? 늘 의식 몽롱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그분과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을 정도로 진지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닙니까? 술에 취해 있을 때가 깨어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많다 할지라도, 적어도 깨어있을 때만큼은 맑고 진지한 자세로 예수님과 대화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안드레’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진지한 태도 때문에, 예수님과의 단 한 번의 대화로 임자를 알아보았고, 극적인 인생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전도서>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전 3:1)고 말합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전 3:2). 그리고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습니다(전 3:8).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을 이토록 격노하게 만들었습니까? 다른 분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성전에서 이처럼 혈기를 부려도 괜찮은 것입니까? 이처럼 발작에 가까운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아덴’의 신전에서 예수님처럼 발작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행 17:16). 두 사람이 보여주고 있는 발작에 가까운 분노는 그 동기가 “사랑”이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 말입니다. 선교의 진정한 동기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즉 하나님을 위한 질투와 열심 때문입니다. 선교의 동기도 바로 이런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17절). 바로 이 열심 때문에 주님은 채찍을 들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참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지금 몰아내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성전일까? 예배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이들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세우고 완성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새로운 성전, 새로운 예배, 온전한 성전, 온전한 예배를 세우기 위해서 그분은 오신 것입니다. 빛이 몰아내고 있는 어두움은 모든 “유대주의적 패러다임”입니다. 즉 종교라고 하는 제도와 관습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위선과 거짓들입니다.
그리고 새로 세워야 할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그분의 육체 즉 그분 자신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말하는 것이라”(19, 21절). ‘유대’인들에게 성전이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듯이, 우리에게도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성전 외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었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을 만날 방법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새 성전은 어디 있습니까? 내가 곧 성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그리고 내가 허물어야 할 옛 성전은 무엇입니까? 나를 시기하게 하고 질투 나게 하며 분노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훈과 적용을 위하여 묵상해 봅시다.
2. 채찍과 혁명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혁명가인가? 이 질문은 성전에서 보여주고 있는 예수님의 행동을 근거로 나름대로 행동 지침을 마련해 보려는 행동주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중요한 질문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정치․사회 분야는 물론 종교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진보와 보수의 논쟁을 촉발시키기에 충분한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분명 위험한 급진주의 혁명가로 보였을 것이며,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 그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던 정치적인 급진주의자 “열심당원”(the Zealots)들에게는 우유부단한 수구 보수주의자로 비췄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은 기독교 역사 전체를 통해서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전도서>의 깨달음을 다시 한 번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온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누구나 <성경>이나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성경> 본문으로부터 의미를 뽑아내는 것”(exegesis)이 아니라, “본문에 자신의 사상을 집어넣은”(eisgesis) 결과가 아닐까? 과연 예수님은 혁명가인가? 그렇다면 그는 어떤 종류의 혁명을 원하셨을까? 이 질문에 답변은 우리가 “혁명”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혁명과 변화.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바 혁명은 정치․사회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만일 혁명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예수님은 혁명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분은 한 번도 이런 방식의 혁명을 가르친 적도, 스스로 행동으로 보이신 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러한 혁명의 문제점을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혁명의 문제점은 그것이 지나치게 과격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지나치게 과격하지 않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혁명의 문제점은 완벽한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기득권층을 만들어 낼 뿐임을 인류의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전도서>의 가르침도 바로 이것입니다.
왜 동일한 일이, 동일한 사건이,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일까? 인간이 지닌 공통적인 속성 때문입니다. 인간이 지닌 변치 않는 한 가지 속성 때문입니다. 무엇일까요? “죄”라는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 현상들의 원인을 분석하고자 할 때, 이 “죄”라고 하는 요인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분석은 틀린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열렬 정치 결사체인 “열심당원”의 실패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해방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그 땅에 실현시키려 했습니다. 급진적인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무력과 폭력을 사용하는 것도 불사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들을 ‘시카리’ 즉 “살인자들”(cut-throats; assasins)이라 불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주후 66년에 시작된 “유대 전쟁”도 이들이 ‘로마’에 대항해서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예루살렘’은 주후 70년에 ‘로마’ 장군 ‘디도’(Titus)에 의하여 멸망을 맞이하였으나,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열심당원”들은 항전을 계속하다, 주후 74년 ‘마사다’(Masada) 요새에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 이 요새는 이스라엘 민족의 성지(聖地) 남아있습니다.
일부학자들은 예수님을 이들 “열심당원”들과 연계해서 생각하려 합니다. 사실 연결고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이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하였다고 선포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헤롯’ 왕을 “여우”로 부를 정도로 그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습니다(눅 13:32). 당국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때에 그분의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붙인 것도 그를 “열심당원”과 한 패로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마 27:37). 아닌 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 중 적어도 한 사람은 “열심당원”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 중 일부는 칼을 지니고 다니기도 했습니다(눅 22:38; 요 18:10).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현 상황에서 가장 민감한 날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보여주신 행동은 ‘로마’ 당국의 눈에는 선동적인 행동으로 보였을 것이고, “열심당원”을 포함한 급진 ‘유대’인들에게는 저항과 항전을 독려하는 혁명의 메시지로 인식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날도 아닌 민족 해방의 날 “유월절”에 성전과 예배를 거부하는 듯한 행동을 하였으니,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선동은 모든 정치․사회혁명에서 단골 메뉴입니다. 아, 선동이란 얼마나 달콤하고 짜릿한 것인지! 선동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메뉴는 누구나 거부할 수 없는 소위 “거대 담론”일 것입니다. 예컨대, 현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거대담론은 “민족 화해”, “통일”, “인권”, “자주”, “평등”, “사회 정의”, “복지” 등등일 것입니다. 선동가들은 입으로는 화해와 용서와 연합의 거대담론을 외치지만, 실제 행동은 늘 분열과 갈등을 조장시킵니다. 그들의 단골 메뉴 속에는 기득권층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와, 원한 등이 교묘하게 어우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전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행동은 현 상황에 대한 적개심이나 원한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체제 전복을 꿈꾸는 “열심당원”들에게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열심당원” 사이에는 일맥상통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번도 무력과 폭력을 지지해 준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오히려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마 26:52).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권면하십니다(마 5:44). 그리고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5:9). 마귀의 유혹을 받을 때나(마 4:8-10), ‘빌라도’ 앞에 섰을 때에도(요 18:36), 정치적 쟁점이 될 만 한 일체의 발언은 자제하셨습니다. 혹자는 예수님께서 ‘시몬’과 같은 “열심당원”을 그분의 제자로 삼은 것을 두고 정치적인 혁명을 꾀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주님은 ‘시몬’만 제자로 삼은 것이 아니라 ‘마태’와 같은 당대의 기득권자도 함께 제자로 삼으셨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예수님을 정치․사회적 혁명가와 동일시하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패러다임 혁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현실주의자” 또는 “기득권 옹호론자”로 낙인찍지 않습니다. 그분은 당대의 정치․종교 체제나 질서를 옹호하거나 두둔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지 않았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사두개’인들을 대제사장으로 부르지도 않았으며,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독사의 자식”으로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혁명”을 말씀하셨고, 그분을 따르는 모두에게 급진적 “혁명”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혁명”이란 과연 어떤 종류의 혁명입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그 해 봄에 그분과 함께 붙잡힌 또 한 사람의 “혁명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 이름은 ‘바라바’입니다. 그는 “열심당원”의 일원으로서, 당(黨)의 신조에 따라 창과 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 했던 자입니다. ‘로마’의 패권주의, 인종 차별, 불의와 독재를 몰아내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이었습니다. 이러한 그가 사로잡혔을 때,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당연히 살인 및 국가 전복죄였습니다.
예수님과 ‘바라바’가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만, 만일 이들이 만나 현실 정치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면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을까? ‘바라바’의 주 관심사가 무엇이었을지 추측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매불망(寤寐不忘) 조국의 해방과 독립입니다. 현실에 대한 그의 진단도 이런 그의 꿈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예수님께서는 ‘바라바’의 현실 진단에 대해서 많은 부분 동의하고 인정하셨을 것입니다. ‘로마’가 자랑하던 “법과 질서”에 대해서도 그것이 신성하다거나 정의롭다고 두둔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부패하고 타락했음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며, 조만간 “십자가의 처형”을 통해서 그 점이 더욱 분명하게 보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시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로 권력이 양분되어 있는 현 ‘유대’ 종교 체재에 대해서도 견해를 같이 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법과 정의를 세우고 실천하는 일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일에 더 연연해하고 있다는 ‘바라바’의 분노에 공감을 표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유대’교가 정말 자신의 안위에만 급급했을까? 대제사장 ‘가야바’가 이를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49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11:49-50)
‘바라바’의 현실 인식과 진단은 이처럼 정확했으며, 예수님 또한 그와 견해를 달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현실이라고 하는 환자를 바라보는 두 의사의 진단은 일치했습니다만, 치료를 위한 처방이 다르다는 점이 결정적 차이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바라바’에게 주시는 충고를 한 번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바야, 네 진단은 정학무오하구나. 정치와 종교는 정말 거듭남의 혁명이 필요한 것이지. 그런데 말이지 자네는 어떠한가? 자네는 혁명이 필요 없는 사람일까? 자네는 그대로 두고 다른 것들만 전부 바꾸자고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타협이고 양보가 아닐까? 나는 진정 진보주의자이지 수구 골통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대로 두고 내가 변화시킨 새로운 나라나 정치나 종교가 과연 새롭다고 할 수 있을까? 다시 타락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있을까? 그곳에서는 인권유린이나, 인종차별이나, 독재나, 타락과, 부패가 없을까? 과연 자네가 ‘로마’ 제국이나 ‘가이야바스’보다 더 정의롭고, 더 선공후사(先公後私)하는 인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유대’인들이 ‘로마’인들보다 더 정직하고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더 근면하고 성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노예가 주인보다 덜 타락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더 인정이 많고 신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의인은 없으며, 한 사람도 없다네. ‘바라바’야, 내가 온 것은 ‘로마’ 제국을 변화시키려고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온 것이라네. 사람이 변해야 사회가 변하기 때문이지. 사람의 혁명 다음에 세상의 혁명이 오기 때문이지. 그리고 혁명이란 뒤집어엎고, 갈아치우고,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바꾸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네.”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성전이나 예배를 멸하려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에, 그들의 성전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채찍으로 내쫓으신 것은 성전도, 예배도, 예배드리러 온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분께서 뒤엎고 내쫓으신 것은 진리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온갖 거짓이었습니다. 빛 가운데서 행해지던 온갖 어두움의 행태들이었습니다.
소명. 한편 ‘바라바’는 진보와 혁명의 이름으로 세상을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인 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그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는 무엇일까요?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를 놓아주랴? 예수냐 빌라도냐?”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영웅 ‘빌라도’를 풀어주라고 고함쳤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를 풀어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만일 그가 자신의 이념에 충실하다면, 십중팔구 다시 칼을 들고 ‘로마’ 혁명을 외치고 다닐 것입니다. 세상은 혁명의 구호로 시끄러웠을 것이고, ‘로마’는 다시 칼을 들고 그를 붙잡으려 나설 것입니다. 종국에는 강하고 힘센 칼이 약한 칼을 멸하고 말 것입니다. “유대 전쟁”과 “마사다의 최후”에서 보듯이 말입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풀어주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 역시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다면, 십중팔구 “복음”의 혁명을 외치고 다닐 것입니다. 세상은 아무 칼도 없고, 창도 없으며, 열심당원도 없는 그로 인해서 시끄럽게 될 것입니다. ‘로마’는 이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그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나 ‘바라바’나 종국에는 죽음이라는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타인에 의한 죽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나 요구 사항은 다른 것입니다. ‘바라바’는 우리의 인생을 그에게 바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우리 인생을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이용하겠다고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겠다고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통제하고 움직여야 되겠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라바’를 요구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만 아니라면, 내 인생을 누가 주관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외칩니다: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우리에게 주소서.” 나는 누구를 원합니까?
3. 채찍과 표적
영화 <Black>은 처음부터 캄캄한 화면을 배경으로 ‘나래이터’의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얼마나 참고 견딜 수 있습니까? 한 달, 한 시간, 일 분?” 이 영화의 여주인공 ‘미셀’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자, 벙어리요, 귀머거리였습니다. 그녀가 지닌 입이나 두 눈과 귀는 대화나 사물을 인식하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무용지물들입니다. 이러한 그녀가 세상을 향해서 소통하고, 세상을 인식하고, 지식을 받아들이고, 인생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 즉 온전히 한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이런 식의 질문은 그 영화를 관람한 사람들에게나 적합한 것이지, 정작 ‘미셀’ 자신은 무엇이 필요한지 조차도 모른 채 오로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시하이’라 부르는 한 선생님이 “빛”으로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이 영화는 짐승 같은 ‘미셀’이 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그와 같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철학에서 중요한 두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와 “만일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를 인식할 수 있을까?”입니다. 이 두 질문을 철학적 용어를 빌자면 각기 “존재론적 질문”과 “인식론적 질문”이라 부르는데, 철학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물어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이런저런 다른 태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소위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라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탐구나 연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자신할 것입니다. 반대로 신령하다고 자부하는 자라면, 소위 “내적 음성” 등과 같은 특별한 체험을 강조할 것입니다. 또 한 편, 적지 않은 무리의 사람들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 할 것입니다.
과연 이성(理性)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 믿을 만 한 도구가 될 수 있을까? 은밀하게 들려오는 소위 “내적 음성”은 과연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단순히 내 마음 깊이 자리하고 있는 간절한 기대나 욕망의 표출이 아니라고 어떻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기적은 그 자체로써 과연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으며, 믿음에 이르게 하는 힘이 있을까? 이들 안내판들을 사용하는 것은 마치 ‘미셀’이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을 인식하기 위해서, ‘시하이’를 제쳐두고, 자신의 입과 두 눈과 귀를 사용하려는 것과 같은 모습은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세포를 관찰하기 위해 망원경을 들이댄다든지, 아니면 현미경으로 우주의 천체를 관측하려는 시도와 같은 것은 아닐까? <성경>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태도나 방식에 따라 인류를 크게 세 무리로 나누고 있습니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2-23절상)
유대인의 표적. 그 첫 번째가 ‘유대’인입니다. 이들은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표적”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으며, 그분의 계시를 분별해 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방금 ‘예루살렘’ 성전 내 “이방인의 뜰”에서 보여주신 과격한 행동도 실은 하나의 “표적”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그들이 가지고 다니던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동을 <성경>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시편>의 예언을 성취시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17절; 참고. 시 69:9).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이미 그들이 원하는 표적을 확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가진 <성경>에 의존하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표적을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다른 많은 기적들 즉 표적들을 행하셨습니다만(23절), 이들 ‘유대’인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무슨 다른 표적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유일하게 남은 한 가지 표적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 역시 믿지 않을 것입니다. 유일하게 남은 표적이란 바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 ‘유대’인들이 스스로 <성경>을 잘 안다고 하니 예수님의 이 말씀도 <성경>에 비추어 제대로 해석하고자 했다면, 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 중에 아무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20절).
우리는 이 구절에서 <복음서> 화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오해”라 부르는 수사적(修辭的) 기법을 만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이러한 오해가 여럿 등장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에 대한 ‘니고데모’의 오해가 있으며(3장), “생수”(生水)에 관한 ‘사마리아’ 여인의 오해도 있습니다(4장).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이들처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이러한 오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예컨대,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이후 예수님께서 “내게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4:32),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하며 서로에게 묻고 있습니다(4:33).
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까? 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제쳐두고 표적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하나님을 만나려 했던 것일까? 가장 명백한 대답은 이것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와 무식입니다. <성경>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안에 무슨 말씀이 있는지, 제대로 한 번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듣지 않고 배우지 않았으니, <성경>을 알 리가 없습니다. <성경>을 모르니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모르니,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적 지식에 자신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즐겨 찾는 가장 편리하고 손쉬운 도구가 바로 표적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분의 영광과 능력을 더 높일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신령한 방법입니까! 그냥 밀어붙이면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헬라인의 지혜. “하나님의 묵시”가 없으면, 즉 <성경>을 모르면 나타나는 또 다른 의존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미셀’이 ‘시하이’를 만나기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들 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표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지요. 왜 그처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느냐는 것이지요. 즉 이성적이지 않다,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정말 하나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듣습니까? 아니면 나의 음성에 귀 기울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나무라고, 화내고 있습니까?
<성경>에 대한 무지는 결국 <성경>에 대한 거부로 나타납니다. ‘미셀’이 ‘시하이’를 만나고 난 뒤에도 한참동안 그를 밀어내고 거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하이’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의 감정과 판단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엎어지고, 넘어지고, 다치고, 불에 데고, 주변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사람들이 달려와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미셀’의 모습은 <요한복음>의 서막의 한 구절을 연상시켜줍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9, 11). ‘미셀’은 ‘시하이’가 정확히 누군지 알지 못했으며, 그래서 그를 거부하였고,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그에게 대들고,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미셀’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물인데, ‘시하이’ 선생은 이런 그녀를 억지로 그 물속에 내던져버립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예수님 역시 그렇게 하셨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결코 듣고 싶지 않은 그 말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성전이 사라질 것이라”는 폭탄선언이 그것입니다. 그토록 화려하고, 장엄하며, 그들 삶의 목적이자 수단이었던 그 성전이 사라진다니! 이는 정말 아이러니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말씀이 그들에게는 가장 듣기 싫어했던 내용이었으니 말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내가 하나님에게 나아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말씀을 듣고 싶어 합니까? 내가 무엇을 기대하고 고대하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므로,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부분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올바른 치료는 정확한 진단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이는 당연한 것이지요. 그것이 무엇일까?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씀은 아닐까요? 내가 가장 숨기고 싶은 부분은 아닐까? 내가 가장 하기 싫어하는 사역은 아닐까? 암 환자가 끝까지 의사의 암 선고를 듣기 싫어하듯 말입니다. 결국 나는 <성경>을 덮어버립니다. 그분의 말씀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작정합니다. ‘미셀’처럼, ‘유대’ 지도자들처럼 말입니다. 치유받기를 거부하는 것이지요. 이런저런 합리적 이유를 대면서 말입니다.
나는 왜 하나님에게 화를 냅니까? 내가 정해놓은 계획이나 규범 안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나는 왜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왜 듣지 않으려 합니까?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왜 듣고 싶지 않습니까? 그분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기 때문은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허물어야 할 성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
‘예루살렘’의 성전이 그리스도를 대체하려고 하는 한, ‘헬라’의 철학이 ‘시날’ 평원의 ‘바벨’ 탑으로 기능하는 한, 이들 모두는 허물어져야하고 사라져야 할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베드로’ 사도 역시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성전 숙정>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님과 ‘유대’인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을 중심축으로 이야기가 반복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대 위에는 이들 외에 제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중요한 인물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사용한 도구는 무엇이었습니까? 이들이 어떻게 빛을 볼 수 있었습니까? 이중 구조로 이루어진 본문의 두 단락은 각 단락의 끝에 이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17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절)
이들 제자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천둥과도 같은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성경> 없이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조차도 <성경>을 통해서 이해하고 해석했던 것입니다. 훗날 <사도행전>의 ‘베뢰아’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볼 수도, 들을 수도,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 우리는 ‘미셀’과 무엇이 다릅니까? ‘미셀’은 결국 어둠 속에 있는 모든 인류의 자화상이 아닐까요? 하지만 ‘미셀’은 ‘시하이’를 통해서 어둠에서 빛을 보았고, 짐승에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시하이’가 먼저 그녀를 찾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도적이고 주권적인 사랑과, 포기하지 않는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맛볼 수 있으며, 더불어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은 누구 덕분입니까?
연습과 토의
1. <성전 숙정 이야기>의 신학적 주제는 무엇입니까? <가나의 잔치>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2. 성전(聖殿)과 교회는 어떻게 다릅니까? 오늘날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지순례(聖地巡禮)에 대한 나의 생각은 어떤 것입니까?
3. 본문으로부터 “채찍”을 중심으로 일련의 교훈들을 이끌어낸 바 있습니다: “채찍과 포도주”; “채찍과 혁명”; “채찍과 표적.” 이들 각각이 주는 교훈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4. 내가 찾아낼 수 있는 구체적인 적용점은 무엇입니까?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