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3과
제 3과: 빛의 증인들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9-51약 70분 분량

예수의 증인들
(1:19-51)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1:36-39)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神的)인 기원에 관한 장엄한 서막이 은은한 여운을 남기면서 끝나려고 하자, 이제 무대의 막이 서서히 걷히면서 장면은 이 땅의 시끌시끌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등장하고,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무대가 하늘에서 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땅의 이야기와 하늘의 이야기가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두 세계를 연결해주는 주체는 ‘로고스’입니다. “하늘과 땅이 그에 의해서 연결 된다”는 것이지요.
이제 전개될 이야기는 당연히 ‘로고스’의 지상(地上) 사역에 관한 것이라야 할 것입니다. 그의 가르치심과 행하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 제 3부는 주로 그의 행하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적설화”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화자는 <기적 이야기>를 ‘로고스’에 대한 사람들의 증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증거”는 실은 <요한복음> 전체의 큰 주제이자 모티브라고 앞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책의 서막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한다면, 이어지는 두 번째 단락은 계시에 대한 증거 또는 증인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증인이란 다름 아닌 침례 ‘요한’과 첫 사도들로서, ‘안드레’, ‘베드로’, ‘빌립’, 그리고 ‘나다니엘’입니다.
이 점에서 본문을 <요한복음>의 두 번째 서막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1장을 책 전체의 서론이라고 한다면, 서막이 18절에서 끝난다기보다는 51절에서 끝나는 것으로 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내용상으로도 1장의 두 단락(1:1-18; 19-51)은 상호연관이 있습니다. 예컨대, 1:6-8 및 1:15에서 침례 ‘요한’에 대한 화자의 진술이 있었고, 이어지는 단락에서는 보다 상세하게 그의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먼저 요약하고, 핵심 주제를 파악해 봅시다.
문학과 역사
1. 자료와 편집
이야기로서 본문의 형식과 내용적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인바, (1) 반복과 (2) 연속성의 결여입니다.
반복. 우선 아래 두 구절은 명백하게 불필요한 반복처럼 보입니다: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하더라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일관성. 그리고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를 주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이러한 반복과 부자연스러운 흐름은 학자들로 하여금 본문에 대한 자료비평 내지는 편집비평 작업을 유도했으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불트만’(Bultman)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야기의 흐름을 보다 매끄럽게 하기 위하여 본문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를 주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 하니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28 이 일은 요한의 침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이야기의 흐름은 분명 이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본문을 재구성함으로써, 불필요하게 된 구절들(22-24, 27, 32절)에 대해서는 마땅한 설명이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편집비평학자들은 재구성한 본문이 원 자료이고, 나머지는 후대의 편집적 삽입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2. 단락과 구조
“서막”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본문의 주제가 “증거”라고 했으며, 증인은 다름 아닌 침례 ‘요한’입니다(참고, 6-8, 15절). 따라서 본문은 ‘요한’이 상대하고 있는 대상에 따라 네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증거(19-28절)
1) 소극적/부정적 진술(19-24절)
2) 긍정적/적극적 진술(25-28절)
2. 청중들을 향한 증거(29-34절)
3. 일단의 제자들을 향한 증거(35-50절)
4. 결론적 선언(51절)
본문의 구성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화자가 본문의 각 단락을 마치 <창세기> 1-2장에서 7일에 걸친 “창조와 안식”의 패턴과 유사병행(類似竝行)의 관계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일련의 사건들이 일주일에 걸쳐 연대기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에 의한 첫 번째 창조의 시작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 즉 재창조의 시작을 시적 유사반복의 관계로 마치 두 폭의 병풍을 펼쳐보이듯이 나란히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본문의 각 단락과 “서막”에서 침례 ‘요한’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 부분들과의 연관성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선 “그가 증언하러 왔다”(7절상)는 언급은 본문 전체를 지배하는 핵심 사상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그는 이 빛이 아니라”(8절상)는 부정적인 진술은 본문의 첫 번째 단락(19-24절)에서 보다 길게 설명이 덧붙여지고 있습니다. 또한 침례 ‘요한’에 대하여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8절하)라고 소개하고 있는 부분은 본문의 세 번째 단락(35-50절)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전체의 구성(plot)과 관련해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하나씩 펼쳐가면서 절정을 향해서 진행해 가는 방식입니다. 특히 증거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호칭이 어떤 절정을 향해서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놓칠 수 없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어린 양(29절)
(2) 하나님의 택한 자(34절)
(3) 랍비(38절)
(4) 메시야(41절)
(5) 하나님의 아들(49절)
(6) 이스라엘의 왕(49절)
(7) 인자(51절)
즉 화자는 본문을 통해서 시종일관 그가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반복해서 사용하게 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타이틀을 마치 폭죽을 터뜨리듯 한꺼번에 모두 등장시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51절)을 두 단락을 이어주는 전이구절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51절)
3. 배경과 역사
“서막”에서도 보았듯이, 화자는 이곳에서도 침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일관된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증인으로서의 역할이 그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르고 있는 방식을 통해서 본문의 배경이나 당시 내포독자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 대해서도 무엇인가 시사해 주려는 암시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본문에서 등장하고 있는 두 무리의 증인들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점입니다. 화자가 침례 ‘요한’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무엇이며, 그리고 예수님의 첫 사도들(‘안드레’, 무명의 제자, ‘빌립’ 및 ‘나다니엘’)의 고백을 통해서 강조하고자 바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강조는 당시 내포독자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 대해서 어떤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까?
신학과 신앙
1.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증거(19-28절)
침례 요한. 첫 번째 단락의 내용은 <요한복음>에서 유일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서 <공관복음>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유대’인 지도자들과 침례 ‘요한’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19-23절)
우선 대화의 초점은 ‘요한’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과연 그는 누구인가?” 이 질문과 관련해서 화자가 이 대화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점이 무엇인지 가름해보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두 가지로 답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부정적인 진술을 통해서, 그리고 또 한 번은 긍정적인 진술을 통해서입니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침례 ‘요한’에 대해서 가장 궁금해 하는 바는, 우선 “그가 과연 누구인가?”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비단 이들 종교 지도자들의 관심사만은 아니었습니다. 화자는 실은 그의 독자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당시 공동체 안에서도 아주 민감하고도 중요한 신학적 질문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론>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상세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만, ‘요한’에 관한 많은 오해가 있었고, 이를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입니다.
화자가 부정적인 진술을 통해서 ‘요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방식은 각별합니다. 그것도 제 삼자가 아닌 ‘요한’ 자신의 고백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부정적인 진술은 역설적으로 그가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그 어떠한 추측도 개입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네가 ‘엘리야’인가?”하는 것인데, 이 질문에 대한 배경은 <말라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말 4:5). “종말의 날”에 하나님께서 보내시기로 약속한 인물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역시 “아니라”입니다. 이는 ‘요한’이 자신을 ‘엘리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도래를 준비하는 자로 믿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혹시 예수님을 그 ‘메시아’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이어지는 그의 고백을 통해서 볼 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시 ‘엘리야’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은 그가 ‘메시아’에게 기름 붓는 일을 행함으로써 ‘메시아’를 ‘이스라엘’에 드러내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Beasley-Murray). 참고도서 1, 24쪽.
그러나 화자는 ‘요한’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을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세 번째 질문에서 등장하는 “선지자”에 관한 기원은 <신명기>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신 18:15, 18). “선지자”의 등장은 적어도 <신명기>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인식하고 있었던 “선지자”는 <출애굽>이나 <여호수아>에서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다시 한 번 능력과 기적을 행하며, 그 땅을 정복해 줄 그런 인물일 것입니다.
‘요한’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긍정적이고 결정적인 단서는 이 단락의 마지막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는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라는 언급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화자는 ‘요한’ 자신의 직접적인 고백을 통해서 이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다만 “소리”일 뿐이라는 강조가 지니는 메시지 또한 각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화자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추측해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즉 그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입니다. 오히려 이 단락에서 ‘요한’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등장시키고 있는 세 인물, ‘그리스도’나, ‘엘리야’나, “(그) 선지자”는 ‘예수’에게 부쳐주어야 할 호칭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침례. ‘유대’ 지도자들의 두 번째 관심은 ‘요한’의 독특한 사역, 즉 “침례”에 관한 것입니다:
24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를 베푸느냐(24-25절)
사실 이 두 절은 앞선 단락과는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앞 단락의 주제는 ‘요한’의 정체성과 관련한 것이었는데, 갑자기 “침례”에 관한 주제로 옮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요한’이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메시아’도 아니라는 사실과 그가 침례를 주는 문제 사이에 아무런 연결 고리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요한’의 침례 문제를 끄집어내고 있는 것은 그가 과연 그 일을 수행할 자격이나 권위를 갖추고 있는가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할례”나 “침례”를 주관하는 사람은 ‘바리새’인과 같은 공동체 내에서 권위와 명망을 갖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요한’의 침례를 보고 적개심이나 의문을 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화자가 이번에는 침례 문제를 끄집어내고 있는 것 또한 <요한복음>의 배경이나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화자 당시 공동체 내에서 침례를 주는 자의 자격과 관련해서 일련의 논쟁이나 갈등이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입니다. 이점 현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즉 질문인 즉은 “오늘날 교회에서 아무나 침례를 줄 수 있는가?”입니다(참고. 마 28:19-20).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요한’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26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26-27절)
그의 대답인 즉은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침례(또는 세례)와는 다른 것입니다. 즉 그가 행하던 침례는 ‘메시아’의 출현을 대비하는 일과 연관된 것입니다. 당시 ‘메시아’는 아직은 사람들 사이에서 열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제 조만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주어진 사역을 성취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26절은 31절과는 별개로 그 자체로서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기는 합니다만, 의미상 31절에서 끝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위에서 살펴본 바처럼, ‘불트만’(Bultmann)이 재구성한 편집적인 작업에 따르면, 이 두 절은 의미상 전후 구절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아래 구절 참고)
26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31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 하니라
이러한 재구성에 따르면 ‘요한’ 자신조차도 ‘메시아’의 정체성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예수님의 침례 시 있었던 특별한 현상으로 인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2. 백성을 향한 증거(29-34절)
두 번째 장면에서 청중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절)
이 구절에서 ‘요한’의 청중들이 누구인지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이튿날”에 대한 언급은 그동안 ‘요한’과 대화를 나누던 일단의 무리들은 이미 떠나고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지금 그의 증언을 듣고 있는 새로운 청중은 그를 잘 알고 있는 일반 ‘유대’인들로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이 증언은 두 번째 단락 전체의 내용 및 36절과 연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32-34절의 내용에 의하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는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후에 드러나게 될 사실로서, 그분께서 침례를 받으러 나아오실 때까지는 ‘요한’ 자신도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불트만’이 재구성한 본문을 다시 참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학과 역사>.
30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30-34절)
그렇다면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할 때, 마음속에 그리던 이미지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마도 하나님의 양 무리를 인도하고, 적들로부터 보호해주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스리는 자로서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게 있어 예수님이야말로 막강한 힘을 지닌 “하나님의 양”이며, 그가 맡은 임무는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구원하는 일입니다(참고. 마 3:7-12). 따라서 “요한 공동체” 내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이나 사역과 관련해서 이와 같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만, “하나님의 양”에 대한 의미가 다소 수정되고 있는 것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양”이 구원의 역할을 수행하되 “유월절의 양”으로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는 점입니다(참고, 19:31-37).
‘요한’의 증거는 34절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화자나 문맥에 따르면 “하나님의 어린 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다 구별해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이 용어를 일반적으로 허용하던 한계 이상으로 보다 폭넓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첫 아들”로 부르고 있으며(출 4:22), <사무엘하>에서는 ‘다윗’의 후손 또한 하나님의 “첫 아들”로 부르고 있습니다(삼하 7:14). 특히 이 구절은 <시편>에서 “메시아적 해석”을 시도하여 유명하게 된 구절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참고. 시 2:7; 89:26). 더 나아가 ‘유대’ 문학에서는 “의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일컫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요한’이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국한해서 이해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사도들의 증거(35-51절)
장면은 다시 바뀌어 무대 위에는 ‘요한’과 그의 두 제자만이 보이고 있습니다:
35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5-36절)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36절)는 침례 ‘요한’의 외침은 단순한 선언이라기보다는 그의 두 제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두 사람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37절)
여기서 “따르다”(ajkolouqevw, 아콜루데오)는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일 것입니다만, 이는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임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침례 ‘요한’을 따르는 무리들이 적지 않았을 당시 “요한 공동체”의 삶의 자리에서 이 진술을 재조명 볼 때, 그 의미가 더욱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사람들이 따라야 할 자는 침례 ‘요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가 어떤 모습으로, 예수를 따라갔는지 분명치 않습니다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곧바로 관심을 보이면서 묻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38절상)
“무엇을 구하느냐?”입니다. 이 질문은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은 실로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신학자 ‘불트만’(Bultmann)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에게 나아오는 자라면 받아야 할 첫 번째 질문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라면 가장 우선적으로 분명하게 해두어야 할 질문이다.”
예수님과 두 제자의 대화를 담고 있는 38-39절의 나머지 부분은 상대적으로 다소 애매모호합니다. 그분을 따르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예수님의 거처에 대해서 묻고 있습니다: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38절하)
예수님 역시 자신이 계신 곳을 알려주는 대신 직접 그곳으로 초정하였으며, 그곳에서 “열시”까지 함께 머물며 대화를 나눈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39절)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함께) 거하다”(mevnw, 메노)는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보듯이(14:2-3, 23), 상당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다소 불분명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세 사람이 함께 거하면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침묵의 역설”이 더 돋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열 시”라는 시간에 대한 언급은 이 두 사람이 예수님과 밤새 대화를 나누며 함께 지내면서, 그 결과 침례 ‘요한’의 선언이 진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임을 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안드레’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가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만,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화자가 <복음서>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 “예수께서 사랑하던 제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을 ‘세베대’의 아들 ‘요한’으로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혹자는 이 사람을 ‘빌립’일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두 사람이 항상 짝을 지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6:58; 12:21-22).
두 번째 단락은 ‘안드레’의 돌변한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주된 목적일 것입니다만, 그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 명시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정상적인 흐름에서 볼 때 그 다음날로 보는 것이 논리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다른 단락에서처럼 “이튿날”이라는 시간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41(이튿날)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41-42절)
빛이 세상에 비취었고, 그 빛은 침례 ‘요한’에게 전달되었고, 침례 ‘요한’은 제자 ‘안드레’에게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였고, ‘안드레’는 그의 형 ‘베드로’에게 자신이 체험한 이 빛을 다시 전해주고 있습니다. 39-42절 사이에서 ‘베드로’의 이름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 처음에 그를 ‘시몬 베드로’로 명명하였다가 다시 ‘시몬’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어떻게 ‘게바’로 알려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사도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을 것이나, ‘헬라’어 배경을 가진 교회에서는 그를 ‘시몬 베드로’로 불렀을 것으로 보입니다. ‘시몬’의 새로운 이름 ‘게바’를 이곳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은 그가 어떻게 이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데 있는 것이지, 그가 언제부터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알려주고자 함은 아닐 것입니다.
새 단락은 다시 새로운 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언급하지 않은 날까지 포함시킨다면 이날은 “다섯째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3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43-46절)
다섯째 날에 일어난 일은 예수께서 ‘빌립’을 찾아 사도로 부르신 것과, ‘빌립’이 다시 ‘나다니엘’을 찾아 예수께로 초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빌립’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곳은 <요한복음>이 유일한데(6:5-8; 12:21-22; 14:8-10), <공관복음>에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그 이름만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다니엘’은 이곳 외에는 아예 그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학자들은 열두 사도 중에서 ‘바돌로매’를 그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빌립’의 증언에 대해서 ‘나다니엘’이 보이고 있는 부정적인 태도는 이해할 만 한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머무는 ‘나사렛’은 ‘갈릴리’에서조차 크게 주목받지도 못한 곳일 뿐만 아니라, <구약>은 말할 것도 없고 <미드라쉬>나 또는 <탈무드> 등에서도 ‘메시아’와 관련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거주지가 ‘나사렛’이라는 사실은 그분이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과 함께,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크게 훼손시키는 것이며 거침돌로 작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빌립’이 ‘나다니엘’에게 한 대꾸는 그냥 “와보라”가 전부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생이나 거주지가 그의 “성육신”에 과연 거침이 되는지 여부는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다가오는 ‘나다니엘’을 향해서 예수님은 먼저 그의 참 모습을 진단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절)
예수님의 진단인 즉은 ‘나다니엘’이 순진무구하며 아무런 속임수를 모르는 진정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속임수와 사기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원조(元祖) 이스라엘 즉 ‘야곱’을 연상시켜주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창 27:35). 원조 이스라엘이 사이비 이스라엘로, 그리고 사이비의 후예가 진정한 이스라엘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이스라엘의 참 모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2).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은 ‘나다니엘’에게 기쁨보다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앞섭니다. 처음 만나는 자신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느냐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듣기 전에 더욱 놀라운 말을 듣게 됩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절)
그의 놀라움은 당연한 것입니다. 자신의 지난 행적까지도 꿰뚫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자가 아니라면 이런 이만한 신통력을 보여줄 수가 없겠지요. ‘나다니엘’의 생각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의 반응이 이를 확인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우리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하나님의 아들의 초능력을 증명하는 구절로 이해해야 할까?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의 지혜나 통찰력과 관련해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참고. 왕하 6:8-12; 겔 8:1-18; 21:21-23). 예수님의 지혜는 이들 선지자를 능가한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말씀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향하여 ‘나다니엘’의 고백은 이스라엘의 <지혜 전승>의 배경 하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전승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은 곧 “이스라엘의 왕”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계시”를 받은 자로서 사람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는 자를 말합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지혜와 지식을 소유한 “이스라엘의 왕”의 전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예수는 ‘솔로몬’을 능가하는 더 위대한 자입니다. ‘나다니엘’이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나다니엘’의 고백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0절)
즉 그가 경험한 예수님에 관한 진실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며, 더 크고 더 많은 표적들이 그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 임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화자는 이에 덧붙여 한 가지 상징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51절)
이 상징은 그 배경에 있어 “야곱의 꿈”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만, 아주 복잡합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의 침례를 연상시켜주고 있는가 하면, 또 한편 광야에서 그분의 시험을 예고해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공관복음>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인자”라는 단어를 도입함으로써, 묵시적이며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야곱의 꿈”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사닥다리를 통해서 ‘야곱’ 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으며, 이 사닥다리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곳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모습은 예수님이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접촉점이 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네가 보게 되리라”는 말은 예수님의 사후 일어날 미래의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막 14:62에서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인자”의 전 사역을 총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출생과 침례와 기적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부활 이후의 사역 전체를 총괄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점이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또 다른 차이점이기도 한데, 인자의 계시와 관련해서 <공관복음>이 강조하는 바가 점진적이고 미래적인 것이라면, <요한복음>은 성육신과 함께 처음부터 완벽하게 드러난 것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침례 요한과 유대교
유대교.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나 <사도행전>에서처럼(행 1:22; 10:37; 13:24) 침례 ‘요한’의 사역을 “복음의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막 1:1). 복음에 대한 가장 완벽한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복음의 시작을 예수님에 대한 침례 ‘요한’의 증언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화자는 복음의 시작을 “두 번째 창조”(또는 구속)의 시작으로 보려든 듯, ‘요한’의 사역의 시작을 <창세기> 1장의 “원 창조”의 첫날과 나란히 대비시키고 있기도 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은 “세상”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그 세상”을 대표하며, 특히 복음과는 별도로 체계화된 기존의 종교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칼 바르트’(K. Barth)의 말대로 “종교는 불신앙”이라는 사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종교의 악마적인 힘을 보게 될 것이지만, 사실 교회는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을 고수하는 관리인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자격 있는 검시관들을 침례 ‘요한’에게 보내어 묻습니다: “네가 도대체 누구냐?” 이들의 전통 속에는 ‘요한’의 사역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체계가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대답을 통해서 그의 사역을 자신들의 틀 속 어딘가에 둘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틀 속 어딘가에 둘 수 없을 때, 그는 이단(異端)으로 분류될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어느 누군가를 어떤 틀 속에서 규정하지는 않습니까?
침례 요한. 과연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자신을 어떤 존재로 알리고 있으며, 화자는 그를 어떤 인물로 드러내기를 바랍니까?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나 역시 침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 직업, 내 소명은 다른 그 무엇에 앞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대 위임령”(the Greatest Commission)이라 부릅니다(참고. 마 28:19-20).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을 불러 선택하실 때에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5:16). 부언하자면 구원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이며, 우리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에게 그분에 대해서 증거하도록 소명을 주셨다는데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선남선녀들은 모두 자신의 정체성에 철저하게 충실하게 살다 간 사람들이었고, 교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 때문에 폭발적인 성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의 성장과 관련해서 사도 ‘바울’이나 ‘예루살렘’의 열두 사도들을 떠올리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평신도”들이었습니다. 평신도들의 지위나 직함도 아주 다양합니다: “유명한 평신도”; “무명의 평신도”; “가난한 평신도”; “부유한 평신도”; “노예 평신도”; “로마 자유 시민 평신도”; “백부장 평신도”; 등등. 이들 모두는 실로 비공식 선교사들이었으며, 오늘 우리 모두의 직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공식 교육을 받거나, 지위나 직함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소위 전임 사역자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며, 나는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알리고 있습니까? ‘요한’은 이 질문에 대해서, 이중적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부정적인 진술을 통해서, 그리고 또 한 번은 긍정적인 진술을 통해서입니다. ‘요한’은 우선 일련의 부정적인 진술을 통해서 ‘유대’ 종교 즉 세상이 제시하려고 하는 세 가지 기준 모두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약속된 메시아도 아니다”; “나는 야훼의 두려운 날을 알릴 엘리야도 아니다”(말 4:5); “나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릴 모세와 같은 선지자도 아니다”(신 18:15-18). 우리는 이들 각 인물이 당시 세상에서 의미했던 바가 무엇인지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들 종교의 틀 속에 ‘요한’을 집어넣을 만 한 위치는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서서히 드러나게 될 것이지만, 사실 이 엄청난 직함들은 다른 사람 아닌 예수님에게만 적합한 것임을 당시 ‘요한’을 위시한 어느 누구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요한’의 부정적인 자기 진술을 통해서 효과적인 증거를 위한 중요한 단서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나는 그 빛도 아니며 사람들이 지닌 제반 문제들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빛을 반사하는 달이나 지구는 될 수 있을지언정 태양 자체는 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둘째, 예수님이 그 빛이요 해답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합니다. 세 번째, 그 빛을 드러냄에 있어 빛의 열기도 함께 반사하고 반영해야 할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도(道)를 전할 때 열정과 열심과 그리고 질투심을 가지고 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주의 전(殿)을 위한 열심이 나를 삼키는도다”(2:17). 흔히 복음은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그 결과까지 수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건물 경비 인이 건물에 불이 나는 것을 보고 화재경보기만 울려놓고 자신은 그냥 앉아 있는 것으로 책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전도의 결과는 물론 전하는 자에게 달린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도를 전하기만 하고 수수방관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릴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주를 향한 열심과 투기심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든 복음을 듣는 자가 반응하여 믿을 수 있도록 이런저런 방법이나 수단을 동원하게 될 것입니다. 정해놓고 지속적으로 중보의 기도를 한다든지,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려 한다든지,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할 것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다음 순서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형편이 지금 어떠한지, 내 취미가 무엇인지, 내 가족의 형편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도 수시로 차 순위에 올 때가 많습니다. 이러다가 종종 아내나 남편과 충돌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심하면 배우자로부터 이혼하자는 요구도 받기도 합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필자의 장모님이 위급하여 병원 응급실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갔을 때에는 장모님은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우리 부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우리는 병원에서 그날 밤을 새며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저녁 학교에서 성경공부가 계획되어 있던 날이라, 부득이 아내와 처남을 남겨두고 부산에서 대구의 학교로 되돌아와 성경공부를 계획대로 마쳤습니다. 공부가 늦게 끝난지라 그날은 집에서 자고 다음날 부산의 병원으로 갈 작정을 하고 있었는데, 저녁 늦게 아내가 울면서 전해온 소식은 장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다시 허겁지겁 병원으로 갔습니다만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뒤였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한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을 리 만무입니다만 병실에 들어오는 나를 바라보는 아내와 처남 가족의 눈빛은 원망과 경멸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날 처남이 나에게 한 말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김 서방은 무슨 예수를 어떻게 믿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절대 그런 예수를 믿을 수 없네.” 사실 이런 말을 듣기 전에 나는 이미 자괴감과 함께 심한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꼭 그렇게 까지 했어야 했나 싶어서 말입니다. 성경공부 한 번 거른다 해서 누구 한 사람 뭐라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도 크게 나무라거나 실망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 당시의 가슴 아팠던 추억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그 일을 무슨 무용담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굳이 이유를 댄다면, 당시 나는 내 일이나 가족의 일보다 타인의 필요를 더 우선으로 여기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회고를 해 보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와 유사한 일을 경험해 본 적은 없습니까? 직장이나 가족의 일을 제쳐 놓고 예수의 일에 미쳐 돌아다녀 본 적이 있습니까? 전하고 가르치는 그 일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동안 고통과, 흥분과, 감격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내 자신의 문제가 어느새 사라지고 없어지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없었다면 나는 한낱 종교인으로 살아왔을 뿐입니다. 침례 ‘요한’을 이런저런 명칭과 호칭으로 종교의 틀 속에 가두어두려 했던 그 “유대교인”에 불과합니다. ‘버클리’에 살던 당시 한 부부의 도움으로 주님을 알고 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한국에 그 많던 예수쟁이들 그동안 다 무엇하고 있었을까? 나한테 아무도 예수 믿으라고 집요하게 달라붙던 사람 하나 없었으니 말이지.” 도대체 자기 자신을 어떤 존재로 규정하고 있었기에 복음을 들었어도 전하지 못하고, 복음을 배웠으나 가르치지 못하는 종교인이 되어버렸단 말인가!
침례 ‘요한’은 과연 어떤 존재였습니까? 이제 긍정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리”입니다. 그 자신의 입으로 다시 한 번 정의를 내려 보자면, 그는 다만 보이지 않은 소리일 뿐입니다. 아무도 소리를 볼 수는 없습니다. 단지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왕의 입성을 알리는 전령이 어떻게 생겼는가는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소리입니다. 침례 ‘요한’도 이 사실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의 다음과 같은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니”(3:30). 그는 사람들이 자기가 아니라 왕을 기억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나는 무슨 소리를 외쳐대고 있습니까?
요한의 침례. 그런데 침례 ‘요한’은 소리에 불과하지 않았습니다. 침례를 주지 않았습니까?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왜 ‘요한’은 침례를 베풀었습니까? ‘유대’인들의 질문도 이것이었습니다.
물로 씻는 것은 영적인 청결을 의미하는 매우 보편적이고 오래된 상징입니다(L. Newbegin). 그것은 ‘유대’교에서도 정규적인 의식의 일부였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침례를 통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남을 상징할 뿐 아니라, 이를 통해서 비로소 공동체의 한 회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W. Barclay). 그러나 ‘요한’의 침례는 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행하는 침례와도 다른 것입니다. 그가 행하던 침례는 ‘메시아’의 출현을 대비하는 일과 연관된 것이었습니다(26, 31절). 당시 ‘메시아’는 아직은 사람들 사이에서 열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제 조만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주어진 사역을 성취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요한’ 자신조차도 ‘메시아’의 정체성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예수님의 침례 시 있었던 특별한 현상으로 인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건은 다름 아닌 성령의 강림이었습니다. 그의 침례는 실재에 대한 상징이요, 표적이었습니다.
2. 침례 요한과 세상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부터 그분의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복음의 확장과 교회의 성장이 우리가 증인의 역할을 잘 수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21).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고, 전도 외에 구원을 얻을 다른 방법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좋든 싫든 일평생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꼬리표를 스스로 떼어내 버리기를 원치 않는다면 끊임없이 고민하고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증인이 될 수 있을까?”일 것입니다.
대 원칙. 우리는 침례 ‘요한’의 증거를 통해서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 위한 하나의 큰 원칙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자기소개에서 드러난 바 있는 원칙입니다. 즉 “나는 그 빛이 아니라”는 증거를 말합니다. 항상 자신의 업적이나 성취를 먼저 내세운다든지, 또는 자신의 필요를 먼저 고려하는 자라면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만유인력의 법칙이 우주의 모든 별들에 작동하듯,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필요보다 나의 필요가 우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두 본성이 항상 내 안에서 갈등하고 충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롬 7장). 스트레스도 결국 나의 본성이 성령의 본성을 누르고 이기려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스콧트 펙’(S. M. Peck) 박사도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스트레스의 원인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미루기 때문에 오는 질병”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스트레스를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겠다고 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찬물을 끼얹고 계십니다.
57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57-62)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고 하니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망대 짓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도, 경비가 얼마나 드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망대를 짓는 어리석음에 대해서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그 경비란 “제자도의 대가”를 말하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왜 믿는지, 그리고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믿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의 이 경고를 과연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필요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전혀 고려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까? 고려해도 괜찮다면 언제쯤이나 나의 필요가 다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그렇습니다. 내가 인식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필요한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늘 채워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정말 이런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정직한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하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기 때문입니다. 없는 간증을 꾸며내서 할 수는 없기 때문이겠지요.
전도는 입으로. 그렇다면 무엇을 간증해야 합니까? 이것은 효과적인 증인이 뒤기 위해서 물어야 하는 두 번째 질문이 될 것입니다. 침례 ‘요한’의 “나는 그 빛이 아니라”는 증거는 실은 그 자체로써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의 출발점이나 접촉점은 될 수 있을지언정, 실은 이 증언이 드러내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빛이 무엇인지, 그 빛이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려주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 위한 두 번째 대 원칙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증거는 입으로.” 다시 말하자면 말로써 그 빛에 대해서 설명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필자의 경험도 그렇습니다. 복음을 말로 전하려고 할 때 대단한 용기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도 극복해야 할 장애들입니다. 요즈음도 간혹 역이나 지하철 등에서 확성기를 크게 틀어놓고 예수님을 전도하는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만, 한 결 같이 짜증스러워하거나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립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믿는 나조차 곤혹스러워하며 그 자리를 얼른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최면(催眠)을 겁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니야. 저 방법이 못마땅할 뿐이야. 복음은 입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지.”
지당한 생각입니다. 우리 모두는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야 할 책임과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주변에 그윽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해야 합니다. 침묵은 때로 웅변보다 더 효과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전체 진리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왜 때로 침묵하는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면 침묵은 그냥 침묵일 뿐이며, 아무리 선하고 거룩한 행동도 그냥 선하고 거룩한 행동일 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필자의 옆집에 사는 백 석환 교수님은 간혹 그의 연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 연구원은 아주 탁월하며 신실합니다. 항상 백 교수보다 1 시간 전 쯤에 출근하여 30분 정도 <성경>을 읽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사실 오늘날 이런 그리스도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필자도 이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원이 그의 지도 교수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단 한 번이라도 그가 늘 만나서 대화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한 적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백 교수님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알고 있다면 그의 연구원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외에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소위 “삶으로서의 전도”가 갖는 함정과 맹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 웨슬리’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기록에 따르면, 그는 거듭나기 수년 전부터 이미 교회에서 목사로서 설교를 해 왔습니다. 당연히 그의 목회 사역은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부흥집회를 위해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으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는 미국 ‘조지아’(Georgia)에서 배를 타고 영국으로 오게 되는데 선상에서 일단의 ‘모라비안’(Moravian) 기독교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도중에 배가 큰 풍랑을 만났을 때에 이들이 보여준 잠잠한 태도에 ‘웨슬리’는 마음에 큰 도전과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그가 회심을 체험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바꾸어 놓은 것은 <성경> 즉 <갈라디아서>였습니다. 그가 회고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의 한 작은 교회에서 누군가 읽어주는 ‘마르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듣고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고, 이 일로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기독교 선교사(宣敎史)에서 가장 위대하고 탁월한 전도자의 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증거는 입으로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을 만난 자는 누구나 예외 없이 항상 입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그 믿음을 숨기고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에 관한 이야기에서 보면 그가 눈을 뜬 후 예수님을 만나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요 9:38). ‘사마리아’ 여인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과 대면 초기에는 그를 단순히 한 ‘유대’인으로 알았습니다만(4:9), 대화가 진행될수록 그를 그녀의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한 인물일 수도 있다고 믿기 시작하다가(4:12), 나중에서는 그를 선지자로 부르고 있습니다(4:19). 마침내 그녀는 ‘메시아’를 알아보았고, 동네로 달려가 이웃들에게 외칩니다: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야”(4:29).
전도의 내용. 침례 ‘요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단순히 “나는 그 빛이 아니라”는 선언으로 자신의 증언을 끝낸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빛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왔는지를 분명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다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증거가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이 있다면 다음 세 가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예수가 누구인가?”를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지 다른 누구의 증인이 아닙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30절). 이어서 그는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34절). 바로 이 대목을 우리의 증거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증거 가운데서 그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 자신이라는 메시지야말로 복음의 핵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단순히 한 인간에 불과하다면, 그의 죽음은 단순히 영웅적인 자기희생의 한 본보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이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 그를 좇아 선하고 아름다운 사회사업가가 되도록 자극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결코 “대속의 죽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으며, 예배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증거는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바로 그 메시지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스스로를 정의하기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하셨습니다. 또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14:9).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한 원인도 예수님의 이러한 자기 정체성에 관한 선언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5:18).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우리 백 교수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모릅니다. 왜 모를까요? 들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못 들었을까요? 아무도 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증거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가 무엇을 했는가?”입니다. 이 증거 또한 첫 번째 증거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그가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은 결국 하나님이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침례 ‘요한’의 증거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절).
그 당시나 지금이나 신실한 ‘유대’인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린 양”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도 이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하). 즉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이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희생제물이 될 수 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성경>은 그렇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공의와 분노를 만족시키기 위한 희생양이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역시 모릅니다. “죄”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윤리∙도덕적인 죄를 연상하는 것이 고작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죄는 그보다 더 본질적이고 신학적인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거부하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죄”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사람들은 극렬하게 저항합니다. 내가 무슨 도덕적으로 크게 잘못한 게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려 할 때,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이 죄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 거론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제시해야 할 세 번째 증거는 무엇입니까? “예수를 어떻게 알아보고 개인적으로 믿을 수 있을 것인가?”입니다. 침례 ‘요한’은 어떻게 그가 가리키고 있는 이 사람이 예수인줄 알게 되었을까요? 다시 한 번 그의 간증을 들어봅시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증거하였노라(33-34절).
무슨 말입니까? 성령이 그 해답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에게 그분의 성령을 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의 삶 속에서 함께 살아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말은 예수가 누구이며, 무엇을 했는가를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예수로 하여금 내 삶에 들어오도록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증거 하는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초청. 그렇다면 어떻게 그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께서 내 안에서 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요한복음>에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대답은 “영접” 즉 “믿음”입니다. <계시록>에서도 같은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초청은 두 단계에 걸쳐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복음(즉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 문을 여는 것”(즉 영접하는 것)입니다.
관심이 있는 자라면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하면 그 일이 가능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구원이 필요한 죄인입니다. 나를 위하여 당신이 희생양으로 돌아가신 것을 압니다. 이제 내 마음을 열고 당신을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나를 깨끗하게 하시고 영원토록 내 삶의 주인이 되어주십시오. 아멘.” 이처럼 간단한 것입니다.
행여나 이런 고백을 여태 드리지 않았다면, 당장 하십시오. 우리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소속되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고백을 이미 했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다른 사람이 이와 같은 헌신의 고백을 하도록 초청한 적이 있었는가?” 없었다면 아직 인생의 진정한 희열을 맛보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의 즐거움에 동참하실 것을 강력하게 권합니다.
3. 침례 요한과 사도들
수 년 전 한 보험 회사 직원이 필자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화재 및 도난 보험 상품을 얼마나 열렬하게 홍보를 해대든지, 그 열의에 넘어가 거금 백이십만 원을 지불하고 3 년 만기 보험에 가입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보험은 소멸성이라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끝나버렸습니다.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계약 기간 중에 집에 있던 귀중품을 도난당하여 보상을 요구했습니다만, 그 설계사는 복잡한 보험 약관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이리저리 지불 불가 이유를 대기에 그나마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3년이 지나 다시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와서 계약 기간을 연장하겠느냐고 묻기에 호통을 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팔기에만 열중했지 고객 관리는 엉망이었던 이 친구가 지금도 그 회사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 적어도 한 가지만은 칭찬 받아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처음 만나는 상대를 어떻게 해서든 설득을 해서 자사(自社) 상품을 팔고야 마는 그 열정과 헌신입니다. 상품을 마치 책 읽듯 소개만 하고, 살 테면 사고 말 테면 말라는 식이라면 영업사원으로서는 자격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회고해 보면 필자의 지난 시절이 이와 같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현재 근무하는 대학에 처음 부임하여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일념에서 “사 영리”(四 靈理) 전도지를 한 묶음 수업시간에 들고 들어가서는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일사천리로 학생들에게 읽어주고는 그 결과가 어떻든 나는 할 일 다 했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걸어 나오곤 했으니 말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든 않든 나는 그래도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용기 있게 하지 않았느냐는 다소 우쭐한 기분에 그랬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그런 기분이 안 드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일들로 해서 갬프스 성경공부가 시작되었고, 그들과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학생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으며, 그 중 일부는 전임 사역자가 되어 지금도 사역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첫 전도자로 등장하고 있는 침례 ‘요한’은 어떤 마음으로 전도를 했을까? 그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이곳 본문에서 효과적인 증거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지, 우리의 역할 모델로 삼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도 이전에 필자가 학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전하기만 하고 그들이 믿든 말든 개의치 않았는지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우선 우리는 서막의 선언을 통해서 그가 세상에 왜 왔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6-8절).
이 구절에 따르면 그가 온 목적이 이중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일차적이고 구체적인 목적은 그가 예수님에 대한 증인으로서 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세 번째 단락은 바로 이 두 번째 목적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증거”는 “회심”(悔心)을 낳고, “회심”은 다시 “증거”를 이어가는 식입니다. 마치 핵반응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듯 이 일도 그렇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삼일에 걸쳐서 말입니다.
제자에게. “증거-회심”이라는 연쇄반응의 첫 번째 주자가 침례 ‘요한’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회심의 사례는 침례 ‘요한’의 두 제자, 즉 ‘안드레’와 이름이 거명되지 않은 또 한 사람의 제자의 회심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 제 삼 일째입니다. ‘요한’은 그의 두 제자와 함께 이전에 그가 침례를 주던 그곳에서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35절). 혹시 예수님께서 ‘유대’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의 금식과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막 돌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참고. 마 4:1-11; 막 1:12-13; 눅 4:1-13).
‘요한’은 그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6절). 이것은 단순한 소개나 선언이라기보다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에 가깝다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지금 두 제자에게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믿도록” 강권(强勸)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따르고 행동에 옮기는 법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믿고 있는 사실을 같이 믿고 따르도록 강권하는 것은 제자를 향한 애정의 발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상). 그의 증언은 “얘들아, 한 번 믿어봐, 좋을거야” 정도가 아닙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왜입니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두 제자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37절).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이 두 학생은 선생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그리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솔직히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순종”입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굴욕적인 항복이나, 자기 판단을 포기한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행동을 연상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교인들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컨대, 목사에게 순종하라는 설교에 대해서 성도들이 보이는 반응은 냉소 아니면 코웃음입니다. “너나 잘하세요.”
이런 태도는 성숙한 자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철부지 아이들이나 보일 수 있는 반응인 것이지요. <성경>은 여러 곳에서 지도자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경>에서도 그렇고, <여호수아>는 책 전체의 주제가 아예 리더십에 대한 순종입니다. <신약>은 어떻습니까? <갈라디아서>나 <히브리서> 등에서도 한 결 같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침을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히 13:17). 순종은 권위주의에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권위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권위에 대한 순종은 그 자체로서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두 가지 권위를 세워놓으셨습니다: 부모와 스승. 김연아, 박태환, 김소연, 손미경, 그리고 박세리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상상해 보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안드레’와 또 한 사람의 제자도 이제 곧 순종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선생님의 말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따라 간 결과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들 두 사람은 처음 한 동안은 일정 거리를 둔 채 그냥 예수님을 뒤쫓아 간 것처럼 보입니다. 권투시합으로 치자면 탐색전을 벌였다고나 할까요? 어쩌면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이러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객관적인 검증과 탐색 작업을 거쳐야지 덮어놓고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단 탐색작업이 끝났으면 결단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탐색전은 1-2회전에서 끝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임자를 알아 모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로빈 후드>의 ‘리틀 존’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숲 속에서 좀도적질을 일삼던 그가 ‘로빈 후드’를 만나 한 차례 격투를 벌인 끝에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머리 숙여 그의 부하가 되겠다고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서유기>의 저팔계는 어떻습니까? <삼국지>의 장비는 또 어떻습니까?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입니다. 대개 소인배가 항상 머리 굴리고(시체 말로 “통 박” 굴린다고 함), 빠져나갈 길을 준비해 두고 하다가, 종국에는 자기 꾀에 빠져 자멸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온 우주의 창조주이고, 이 세상의 구원자이시며, 마지막 날의 심판자로 오실 분인가? 이 질문에 대한 탐색 작업이 끝났으면, 심각한 정신장애자가 아니라면, 온 생애를 걸어 그를 사랑하고 좇아야 할 것입니다. <벤허>의 저자 ‘루이 윌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가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성경>을 연구하고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탐색 작업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도서관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부인하고 모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공부의 목적이자 결과입니다. 회심이 증거보다 먼저입니다. ‘안드레’와 또 한 사람의 제자도 이와 같이 성경공부를 통해서 깨어진 것입니다. 그것도 저자 직강(直講)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들은 밤이 새도록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39절).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습니다. 의심과 절망으로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기에 가슴이 뜨거워져서 오던 길을 되돌아 예루살렘으로 달려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게 했을까?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그렇습니다. 주님과의 만남 즉 성경공부였습니다. 귀향의 감격보다는 형 ‘에서’를 만나야 한다는 공포와 불안으로 떨고 있는 ‘야곱’이 어떻게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되었을까? 성경공부 즉 주님을 붙들고 씨름한 결과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할 수가 없고,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분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형에게. 그러나 이러한 기적은 마른하늘에서 날벼락 치듯 그냥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들음과, 증거와, 그리고 강권함”이 합작하여 이루어낸 것입니다. 예컨대, 이 두 사람이 그날 종일토록 예수님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다가, 객관적으로 분석만 하다가 기적적인 변화를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따르는 일에 부담을 느껴 늘 일정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역사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혹시 사랑하고 순종하는 일에 막연한 두려움이나 부담감이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내 문제를 털어내 놓기가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근처에 얼씬대기만 했는데도 이런 엄청난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이지요. 그분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먼저 묻고 계십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 질문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주도적인 은혜의 초청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예수님을 믿겠다고 따라오는 자라면 누구든지 들어야 할 초청의 질문입니다. 아담도 범죄 이후 처음으로 받은 질문이 이와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나는 예수를 왜 믿으려 하는가? 그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고 원하는가?
예수님을 찾게 되는 동기와 이유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과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뒤따라갔던 것일까요?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동기나 이유로 예수님을 찾든, 예수님을 만난 결과는 항상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는 두 사람에게 “와서 보라”고 대답하신 예수님께서도 결국 이 같은 결과를 기대하고 계신 것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일어났던 바로 그 일입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말자 ‘안드레’가 달려 나와 그의 형 ‘베드로’를 찾고 있는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격과 흥분으로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42절). 마침내 그도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비취었고, 그 빛은 침례 ‘요한’에게 전달되었고, 침례 ‘요한’은 제자 ‘안드레’에게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였고, ‘안드레’는 가장 먼저 형 ‘베드로’에게 이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생명의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불가사의한 현상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불가사의함이 그것입니다. 무덤덤하고, 복음 전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함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규정함이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나는 정말 살아있으며, 빛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증명해 보입시다. 우선 내 가족에게 그렇게 해 보입시다. “좋은 소식”을 가장 먼저 들어야 사람이 있다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내 가족이 어찌 내 신변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알아채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 전도에 무슨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겠습니까? ‘안드레’는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 사도로 삼으시고, 제자 훈련을 시키기도 전에 이미 가족 선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잠간, 우리가 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롯’입니다. 그가 왜 가족 전도에 실패했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입니까? 두 가지로 요약해 봅시다.
동료에게. 우리 가족은 대대로 기독교 집안이라 전도를 할 수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다고요?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증거를 시작해야 할까요? 필자와 아내는 미국 ‘버클랜드’ 교회에서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학위를 마치고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짧은 일 년 동안이었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새사람이 된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이전에 우리가 살던 ‘밴쿠버’였습니다.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에 이전에 가깝게 지내던 분들에게 작별인사도 할 겸 들린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수년 동안 우리와 잘 알고 지내던 선후배 및 동료들이 딴 사람이 되어 돌아온 우리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중 우리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두 가족은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을 해왔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변하게 했는지 알고 싶고, 자신들도 그렇게 변하고 싶다는 것이겠지요. 사실 이분들은 오래 동안 교회를 다니고는 있었으나, 회심의 경험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함께 모임을 시작한 지 불과 이주일 만에 이들 얼굴에는 안도와 기쁨의 기색이 나타났고, 이어서 간증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이분들은 교회의 장로와 권사의 직분을 맡아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지금도 종종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을 경험한 후 ‘아라비아’에서 홀로 사색과 명상의 시간을 가진 후 가장 먼저 만난 사람들이 ‘다메섹’과 ‘예루살렘’의 친지 및 동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가 변화된 모습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회심의 경험을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동료 ‘유대’인들과 가장 먼저 나누었습니다. 이후 사도의 선교 여행은 어디를 가든 그 지역에 있는 ‘유대’ 회당을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빌립’은 어떻습니까? 그가 회심을 체험하는 과정은 ‘엠마오’의 두 제자나 침례 ‘요한’의 제자 ‘안드레’가 겪었던 것과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습니다. 즉 먼저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예수님과의 일대 일 성경공부를 통해서 였습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3-45절). ‘빌립’이 회심을 경험한 이후 가장 먼저 보이고 있는 반응이 무엇입니까? 친구 ‘나다니엘’을 찾은 것입니다. 그 역시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무슨 특별한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가족 다음으로 가장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평소 나를 잘 알고 있는 직장 동료, 학교 친구, 사업상 만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내 가족이 내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갈 수 없듯이, 이들 또한 달라진 내 모습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필경 그들은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올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하며 우물쭈물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이제 막 복음의 포도주가 내 안에서 발효를 시작하여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데, 이를 억누르고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발산하고, 자랑하고, 터뜨려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불가사의하게도 이를 계속 누르고 참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스트’가 든 밀가루 반죽을 냉동고 속에 오래 가두어두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스트’는 모두 죽어버리고, 부풀어 오르던 빵은 다시 사그라져 버립니다. 신자의 삶에서 이런 현상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까? 대개 예수님을 처음 믿고 교회를 출석하게 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을 찾아 자기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설명하고 간증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때로는 격한 논쟁을 벌여가면서까지 가족이나 주변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려 합니다. 아주 왕성한 복음 전도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감격이나 흥분이 사라지면서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만나는 사람들도 주로 교회 내의 지체들로 제한되고, 관심사도 자연스럽게 교회 내의 사역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러는 동안에 그는 서서히 복음 전도자에서 교인으로 변해갑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은 편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내에서도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교제나, 교육이나, 봉사나, 행정 등 말입니다. 사실 교회에 대해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나마도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겠지요. 또는 보상심리가 작동한 결과라고 한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어차피 누가 하든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모든 교인들이 왕성하게 복음 전도나 선교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부터입니다. 또 다른 형태의 보상심리로 보아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복음이나 복음 전도에 대한 무관심이 교회의 모순이나 비리, 또는 비효율성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대개 이런 사람은 <성경>이나 교회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나 행정 그리고 나아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비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스스로 정의로운 성도가 되는 것이지요. 한 예를 들어봅시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아주 값비싼 향유를 쏟아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어주자, ‘가롯 유다’가 그녀를 꾸짖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 하였느냐”(요 12:5). 그는 ‘마리아’를 비난하고, 가난한 이웃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정의로운 자의 편에 서고 있습니다. 이처럼 정의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가롯 유다’가 과연 평생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살다 갔습니까?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민족이니, 자유니, 해방이니, 인권이니, 사회 정의니 하며 거대담론을 펼치기 좋아하는 소위 혁명가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의 위선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과연 자신이 말하는 대로 살다 갔습니까? 해방신학의 진원지였던 남미 제국이 지금 기독교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까? 복음 전도는 그 동기가 애정과 관심 그리고 안타까움입니다. 무슨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정의는 복음의 결과인 것이지 동기는 아닐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은 체험이 아닙니다. 복음은 한 역사적 인물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복음 전도는 내가 듣고 본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침례 ‘요한’이 그랬고, ‘안드레’가 그랬으며, 지금 ‘빌립’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났다”; “와서 보라.” 와서 “나를 보라”가 아니라 “그를 보라”입니다. 우리는 ‘빌립’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만남”이 “지식”을 낳고, “지식”이 “회심”을 낳으며, “회심”은 “전도”를 낳고 있는 증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의 관심사는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이 왜 나사렛에서 나와야 하는가?” 그의 관심사는 주변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을 향하여 돌진해 오는 복음의 창끝을, 마치 권투 선수가 상대방의 주먹을 요리조리 피하듯, 다른 주변적인 질문들로 빠져나가려 할까? 왜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태어났나요? 꼭 교회를 나가야 합니까? 예수님 이전에 살다 간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왜 세상이 이토록 악하고 불공정한 것입니까? 예배를 ‘예루살렘’ 한 곳에서만 드려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곳 ‘세겜’ 땅은 왜 안 됩니까? 이순신 장군은 과연 구원받았나요? 술은 마셔도 괜찮습니까? 우리 아버지 제사는 어떻게 됩니까?
이들 질문 모두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에 관한 질문, 즉 “나는 누구이며,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를 걱정하고 계신데, 나는 지금 세상과 다른 사람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 대단한 박애주의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데, 나는 지금 복음이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며, 교회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면서 핏발을 곤두세웁니다. 나는 정말로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다니엘’의 위선을 간파하시고, 정곡을 향해서 돌진해 들어오십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절).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배 장소 등과 같은 주변적인 질문들로 자꾸 대화의 주제를 흐리게 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4:16)고 하면서 여자가 정신이 번쩍 들게 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나다니엘’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니, 당신이 나를 어떻게 알아보고?” ‘나다니엘’의 질문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예수님은 더욱 기절초풍할 말씀을 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절).
마치 보지도 않았는데도 다 알고 있다는 식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을 예수님의 초능력을 증명하는 구절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의 예지(叡智)나 통찰력과 관련해서 이와 유사한 에피소드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왕하 6:8-12; 겔 8:1-18; 21:21-23). 아무튼 ‘나다니엘’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비로소 그는 예수님을 일대 일로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그동안 예수님에 관한 호칭 중에서 가장 절정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그의 고백이 기쁨에서 우러나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충격과 당혹 가운데서 터져 나오는 것인지는 그렇게 중요치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인가?” 그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나에게 과연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나도 ‘나다니엘’과 같은 고백을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없다면 그분을 만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있다면 내가 알고 있는 친구들이 나로 말미암아 이런 고백을 하게 해 본 적은 있습니까?
4. 영광의 그리스도
더 큰 일. 결혼 생활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은 언제일까? 대부분 결혼식과 결혼 첫날밤으로 꼽을 것입니다. 혹자는 결혼 내내 한 번도 그런 순간은 없었다고 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대답하든 두 경우 모두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했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혼은 완성이 아니라 이루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부가 살아가면서 결혼식이나 첫날밤의 감격과 흥분보다 “더 큰 일”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혼생활에서 장차 일어날 “더 큰 일”은 무엇일까요? 자녀를 출산하는 것입니까? 전셋집에서 내 집을 장만하는 것입니까? 작은 집에서 큰 집으로 옮기는 것입니까? 직장에서 승진을 하는 것입니까? 가계 수입이 증가하는 것입니까? 자녀 결혼시키는 것입니까?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상대를 알아가는 즐거움입니다. 함께 살아갈수록 서로를 더 잘 알고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상대에 대한 배려와 애정이 더 깊어지게 되는 것 말입니다. 물론 현실은 그 반대의 경우, 즉 실망과 미움의 골이 깊어지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만, 어느 경우든 결혼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더 큰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역사적으로 한 국가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이스라엘 교회의 탄생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신부 이스라엘과 신랑 ‘야훼’의 결혼이라는 ‘알레고리’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출애굽”은 그 자체로서 시작이었지 끝은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더 큰 일”이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많은 일들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셨으며,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에 기초한 장막 예배를 제정하셨으며, 새로운 땅에 대한 희망과 약속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이른 바 “더 큰 일”을 위해서 마련한 장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장치를 통해서 그들의 신랑을 더 알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불행하게도 결혼 첫날밤, 즉 “출애굽”의 감격보다 더 큰 감격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고 답보와 정체를 거듭하다 결국 자멸의 길을 걸어가고 말았습니다. 결혼이 파경에 이른 것이지요. 결혼은 이루어가는 것이지 그것으로 종착역에 골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다니엘’은 조금 전 충격과 감격으로 예수님에게 놀라운 고백을 드린 바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그의 간증과 고백은 실로 완벽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치고 이보다 더한 지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50절). “더 큰 일”이란 게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51절). 더욱 알쏭달쏭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무엇이며, 언제 열린다는 것인지,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한다는 말은 또 무엇이며, 언제 그 일이 일어난다는 것인지, 그리고 누가 그 일을 보게 된다는 말인지, 또 “인자”(人子)는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나다니엘’이 제대로 다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들 질문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이 이런저런 설명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만, 적어도 한두 가지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더 큰 일”은 미래에 분명하게 일어날 것이며, 그 일을 보게 될 사람은 ‘나다니엘’ 혼자가 아니라 다수(多數)가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인자”와 관련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인자의 영광. 예수님의 말씀은 일견 <창세기>의 “야곱의 환상”을 연상시키는 듯합니다만(창 28:12),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연결 짓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인자”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다니엘의 환상”에 더 가깝다 하겠습니다: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다니엘’이 본 환상은 “인자”의 영광입니다. <신약>에서 “인자”는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부르시는 호칭입니다. ‘메시아’와 같은 의미입니다. ‘다니엘’은 이처럼 엄청난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 알지는 못했겠습니다만, <계시록>은 이와 같은 일이 역사의 종말에 궁극적으로 “인자”에 의해서 성취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장면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그 눈은 불꽃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 19:11-16)
이 장면은 “인자”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만, ‘나다니엘’은 이 장면을 목도하기 위해서 죽기만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버금가는 “큰 일”들을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통해서 곧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이 땅 위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과 먹고 마시면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리고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지금 그가 경험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나다니엘’은 앞으로 化石처럼 정체되고 무미건조한 삶이 아니라, 생기발랄하며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나다니엘’ 한 개인에게만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 즉 신약의 모든 聖徒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신부는 첫날밤의 경험과 같은 과거의 추억만을 먹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성도가 과거의 구원의 감격만을 먹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해병대 구호와도 같은 구호만을 외치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면 족합니다. 같은 간증을 갈비탕 우려먹듯, 고장 난 녹음기처럼 들려줄 수는 없습니다. 늘 새로운 간증과 고백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10:10하).
지금 나에게 “더 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아니라면 어떻게 하면 그 일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신약>의 성도라면 침례 ‘요한’과 같은 선지자나 선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위해서 <성경> 66권 모두를 샅샅이 다 꿰뚫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풍성한 삶 즉 “더 큰 일”을 경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순종뿐입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해보면 됩니다. 침례 ‘요한’이나 ‘안드레’나 ‘빌립’이나 ‘베드로’나 ‘나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해 보았습니까? 아니면 평소 때처럼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까? <성경>만 줄기차게 읽었습니까? 기도만 열심히 했습니까? 스님이나 수도사가 수행을 하듯 말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화자는 이 주제를 어떻게 발전시켜가고 있습니까?
2. 본문에서 침례 ‘요한’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점은 무엇입니까? 그에 관한 부정적인 진술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요한 공동체”의 삶의 자리는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3. 제 1장 전체에서 드러나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호칭 모두를 알아보고, 각각에 대해서 그 의미를 음미해 봅시다.
4. “만남-회심-증거”의 순환이 본문의 신학적 주제를 이어가는 방식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오늘 나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5. 본문 중에서 나에게 가장 감동을 준 한 구절은 무엇입니까? 암송해 보고, 왜 감동을 주었는지 나누어 봅시다.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