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유일한 계시: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6:7약 14분 분량
나를 보았거늘
‘유대’인 부모들은 자녀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날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는 대신에 무슨 질문을 했느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이들 부모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듣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질문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해 본 외국인 교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좀처럼 질문을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나도 지난 30여 년 동안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해왔습니다만, 회고해 보면 수업 시간 중에 학생들로부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 듯합니다. 내가 너무 강의를 잘했기 때문이었을까? 질문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책에 있는 모든 내용들을 속속들이 알차게 가르쳤기 때문일까? 설사 그랬다고 하더라도 나는 실은 충실한 전달자의 역할을 한 것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그저 일방적으로 책에 있는 내용들을 가르쳤을 뿐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아무리 열심히 배웠다 하더라도 그 책에 있는 내용 이상은 결코 접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대개 질문이 없다는 것은 관심이나 호기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도, “말을 물 가로 데리고 갈 수는 있으나 물을 먹게 할 수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볼 때, 무슨 일에든 관심이나 호기심을 갖는 다는 것은 아주 좋은 습관이며, 자기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결론을 정해놓고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공격적으로 질문하는 자가 아니라면 말입니다(국회 청문회에서 나오는 질문들이 대개 이런 유에 속합니다). 건강한 질문은 자기뿐만 아니라, 이 질문을 듣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끼치게 됩니다. 만일 그들도 동일한 관심을 보인다면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사도들의 오해나 질문은 역설적으로 후대에 많은 유익을 끼쳤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강의를 듣고 있는 사도들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선생님의 강의를 진지하게 듣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수업 시간 중에 보여주는 태도는 영 실망스럽기만 합니다. 예컨대, 선생님의 간절한 초청을 끝까지 거부하고 어둠 속으로 빠져 나간 ‘가롯 유다’는 그렇다 치더라도, ‘베드로’는 자기 기만적인 헌신과 열정으로 선생님의 핀잔을 들었으며, ‘도마’는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 길”이 어디 있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 이번에는 ‘빌립’ 차례입니다. 그의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전에도 한 차례 이 사람의 기질에 대해서 겪어본 적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는 장면에서였습니다. 그는 아주 논리적이며, 합리적이고, 계산에 능한 사람으로 보입니다(현대판 논리실증주의자라 할 수 있을까요?). 그는 그날 그 자리에 모인 사람 모두를 먹이는데 최소한 이백 ‘데나리온’ 가치의 떡이 필요하다는 견적(見積)을 예수님에게 올린 바 있습니다(6:7). 물론 예수님이 이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 물어보았던 것이라고 ‘요한’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만(6:6).
그러나 그가 그날 경험했던 바는 자신이 올린 견적서가 아무 쓸모가 없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이성(理性)이나 논리로써 선생님의 이성과 논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랬던 그가 다시 지금 이 자리에서 그 특유의 기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보지 못하면 믿을 수 없다는 기질 말입니다. 그의 입장을 대변해 보자면 뭐 이런 것이겠지요: “그 자꾸 이상하고 어려운 말씀 하시지 말고,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하나님을 보여만 주신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그들이 하나님을 이미 보았다고 하는데, ‘빌립’은 그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나자로’의 기적”을 포함해서 그동안 보아왔던 그 많은 기적이나 선생님의 말씀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나 봅니다. 예수님도 그에 대한 실망감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의 기억력이나 이해력은 정말 한심한 수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의 요구는 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철학 사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즉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라는 주장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선언은 그 자체로써 하등 나무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내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겨야 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겠으며, 한 번도 가본 적도 없는 곳에 어떻게 사업 투자를 할 수 있겠으며, 사건 현장을 한 번도 방문하지도 않고 어떻게 수사(搜査)를 할 수 있겠으며,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사람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어떻게 수억 원의 돈을 계좌이체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신앙의 영역에서도 같은 원리를 적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온갖 이단들이 난무하는 오늘날, “맹목적(盲目的) 신앙”은 경계 대상 제 1호가 되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맹목적 신앙이란 문자 그대로 보지도 않고 믿는 태도를 말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 화자가 소개하고 있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참고 9장). 그는 한 번도 예수님을 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말만 믿고 시킨 대로 한 결과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맹목적 신앙의 표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로서, 신앙의 전체 영역으로 일반화시키기는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누가 ‘빌립’의 요청을 한심하다거나 어리석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충고에 지극히 충실하고 사려 깊은 자로 오히려 칭찬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질책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보는 것의 한계. 과연 ‘빌립’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출애굽” 당시 ‘이집트’의 ‘바로’ 왕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는 한 번의 기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한 번만 더, 이번 한 번만 더, 하다가 열 번까지 갔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열 번에 걸쳐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시험했다는 말입니다. 본인은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과연 그가 열한 번째의 기적을 보았다면 마음을 바꾸어 이스라엘을 떠나게 했을까? 즉 다시 한 번 더 기적을 목격했다면 생각이 바뀌었을까?”
아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그가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정해놓은 결론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버렸다는 말입니다. 마치 색안경을 쓰듯, 전제(前提)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자신을 포함해서 주변의 어느 누구도 그의 색안경을 벗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치명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마음을 바꾸는 일은 아예 불가능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지요: “그는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렸고, 하나님도 그의 마음을 닫아버렸다.” 그에게는 달리 선택의 기회조차 아예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또 한 번의 기적을 더 본다 한 들 달라질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는 것으로 그동안 없던 믿음이 생길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으로 끝나고 말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보는 것”, 즉 관찰이나 연구나 탐색의 한계가 있다 하겠습니다. 아, 믿음이란 보는 것이 만들어내는 그 무슨 결과물이 아니었던 것이로구나!
우리의 가련한 ‘빌립’! 그 역시 부지불식간에 보는 것의 한계를 스스로 노정(露呈)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한 번 만이라도 보기만 한다면 선생님의 말을 믿을 수 있겠다고 외치고 있습니다만, 이는 결국 그동안의 그 모든 경험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음을 자인(自認)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여전히 새로운 체험이 필요하다고 은연중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도 ‘바로’ 왕처럼, “이번 한 번만 더” 하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설령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더라도, ‘빌립’은 애초에 불가능한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는 지금 ‘모세’의 기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두 사람 모두 경천동지하는 기적들을 수없이 목도했던 장본인들이며, 어느 누구보다도 지근(至近)의 거리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요구에 어떻게 대답하셨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내 얼굴을 보고 살아남은 자가 없다”는 대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보면 믿겠다는 주장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지한 것인지요. 무식하면 용감해지는 모양입니다.
믿는 것이 보는 것. 그런데 무식하기로 치자면 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무엇인가 새롭고 큰일을 시도하려 할 때, 중대한 선택을 앞두고 있을 때, 나도 부지불식간에 ‘모세’나 ‘빌립’처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 하나님 아버지, 무엇인가 좀 보여주시든지 아니면 한 마디로라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믿고 실행에 옮길 수 있겠나이다.” 결정해야 할 일이 중차대할수록, 일이 힘들수록, 나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집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예컨대 이런 약속 말입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 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히 13:5; 신 31:6; 수 1:5).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경> 속의 말씀일 뿐, 어찌 초자연적인 환상이나 꿈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단 한 번의 체험만으로도 모든 의심이나 불신을 다 날려버릴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단 한 번의 체험으로 <성경>의 그 모든 약속들을 다 믿을 수 있을 터이니, 예수님 편에서 보자면 훨씬 남는 장사가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빌립’의 간절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창문 즉 “유일한 계시”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7절). 바로 직전에 ‘도마’가 “그 길”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그를 향해서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에게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6절). 이 두 선언은 실은 같은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즉 “내 말을 믿으면 보게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히브리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증거를 찾음으로써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았거늘. 하지만 ‘모세’나 ‘빌립’은 오늘 우리에 비하면 훨씬 나은 조건 하에 있었습니다. ‘모세’는 비록 뒷모습으로나마 하나님을 볼 수 있었고, ‘빌립’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직접 보았습니다. “독생자”(movnogenhv", 모노게네스)란 말 그대로 “유일한 자식”을 뜻합니다만(참고. 눅 8:42; 9:38; 히 11:17), ‘요한’ 화자가 의미하는 바는 이보다 심오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는 “스스로 태어난”, “유일한”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요한’ 화자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즉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신 모습이자, 마음이자, 흉금이자,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빌립’은 하나님을 (한 번 더)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기 어려우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서라도 믿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세’나 ‘빌립’은 행운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뒷모습도, 예수님도, 그분의 기적도 본 적이 없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며,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그분의 말씀, 즉 <성경>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믿음의 근거이자 통로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과연 <성경>만으로 충분할까? <성경>은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즉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나 목표와 관련해서 <성경>은 그 자체로써 필요하고도 충분하다는 선언입니다. 더 이상 무슨 새로운 체험이나, 환상이나, 꿈이나, 계시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잠깐! 나는 지금 <성경>으로 <성경>이 옳음을 증명하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 전형적인 순환논리(循環論理)의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듯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성경>에 기초한 믿음의 위기와 위험이 있기도 하다는 사실을 솔직히 부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연 <성경>의 자기주장에 대해서 절대적인 신뢰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는 ‘모세’나 ‘빌립’보다 훨씬 더 위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믿음이나 소망에 대해서 묻는 세상에 대해서 대답하고 변론할 준비가 되어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한 번만 보여주면 믿겠다는 그 세상을 향해서 말입니다.
21세기 빌립에게. 오늘날 내 주변에는 너무나 많은 ‘빌립’이 살아가고 있으며,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 주님께서 ‘빌립’을 대하던 방식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 즉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을 향해서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참고. 9절). 그리고 이어서, “그래도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표적은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참고 11절; 10:38; 5:36).
내가 21세기 ‘빌립’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선 그분의 말씀을 들려주는 일입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으니, 그리스도의 말씀 즉 <성경>을 들려주고, 전해주고, 가르치면 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우리를 향해서 우리가 가진 소망에 대해서 묻는 세상에 대해서 항상 대답할 준비를 하라고 권면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표적을 보여주면 될 것입니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표적, 즉 “그리스도의 흔적”을 몸으로 보여주는 일말입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몸으로 보여주는 일을 그렇게 극적이거나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땅 밑으로 내려가거나 하늘로 올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따라 해야 할 일은 그분의 탄생도, 공적사역도, 죽음도, 부활도, 승천도 아닙니다. 이 모든 일들 중에서 내가 본받아 따라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해야 할 그 모든 일들을 불필요 한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가장 주목을 적게 끌었던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지극히 인간적인 그의 일상생활들일 텐데, 이들이야말로 내가 손쉽게 따라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예컨대, 먹고, 자고, 목수일 하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형제들과 화목하게 어울리며, 그리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 말입니다. 일견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것들 말입니다.
우리는 천사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닙니다. 천국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영계(靈界)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냥 인간이지 영과 육체가 따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사역이 있고, 육적인 사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설파했던 대로, 예수님께서 “이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영역이 없다는 것입니다.
‘에릭 포름’은 “가장 비범한 사람은 가장 평범한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일상-하나님의 신비」에서도 저자 ‘마이클 프로스트’는 우리가 그냥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참으로 비범한 통찰력을 발휘하여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시대에 진정한 기적이란 지극히 자연적이고 평범한 “훈련과 의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되 미혹되지 않으며, 귀로 듣되 귀먹지 않으며, 맛을 보되 먹히지 않고, 손을 대되 더럽혀지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시대 우리나라에서 정절을 지키고 정직하게 사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적입니다. 사업하는 기독교인이 제대로 세금 내며 살아가는 것도 기적에 속합니다. 급한 데 새치기 안 하는 것도 기적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늘 교회는 사람들 보고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보고 가는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 행동은 믿지 말고 내 말만 믿으라고 강변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궤변입니다.
복음은 재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로마서>는 선언하고 있습니다(롬 1:17). 재창조 즉 구원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육신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본인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학생들이 “아! 과연” 하면서 따라해야겠다는 학생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나는 축복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베풀며, 비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명예나 부를 챙기지 않으며, 분쟁이나 분열을 조장하기보다는 화합과 협력을 추구하며,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며, 꿈과 비전을 보여주며 살아갈 때 제자들이 행여나 하고 따라해 보지 않을까요?
이것은 정말 엄청난 증거가 아닙니까?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어라”(고전 11:1)고 말합니다. 나도 세상을 향해서 이와 꼭 같은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나를 보았거늘 어찌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고 말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