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4. 네 번째 기적(4):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6:10-15약 9분 분량
오천 명을 먹이심
(6:10-15)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서구사회에서처럼 기부 문화가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은 참 고무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영화배우 신영균 씨가 평생 모은 재산 500억 원을 후진 양성과 영화 산업 진흥을 위해 내어놓았다는 소식은 우리 모두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습니다. 평소에 동료나 후배들로부터 지독한 구두쇠라는 비난을 받았다는 그 분이 이런 엄청난 금액을 사회에 환원했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평소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할 말이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2010년도 대종상 특별상을 그분에게 수여한 것도 그분의 아름다운 나눔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한 자연인이 이처럼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진대, 하나님의 교회가 이런 일에 무심하거나 소심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수백억의 재산이 아니라, 불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가지고서도 수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지체 장애자가 아니라면 머리가 하는 일을 몸이 모르거나 따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일은 네 <복음서>가 모두 소개하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기적 외에는 달리 이를 설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이 사건을 묵상하면서 감동을 느껴보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당시 이 사건을 목도했던 ‘유대’인 무리들이 받았을 그 충격이나 감동은 전해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덤덤했다고나 할까요. 솔직히 신영균 씨에 관한 소식보다 더 감동적이지는 못했습니다. 오래 동안 너무 많이 들어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전혀 새로운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덤덤한 느낌은 비단 이번 이야기뿐만 아니라, <성경>의 다른 부분을 읽더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엄청난 기적에 대해서 큰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내 잘못만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도하는 ‘요한’ 화자의 방식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야기란 원래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원칙을 따라 절정을 향해서 점진적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나아가야 하는 법이거늘, 화자는 장황하게 주변적인 묘사로 시간을 끌다 절정에서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기적의 배경이나 동기 그리고 기적에의 초청 등에 대해서 느리고 아주 세세하게 기록하면서, 정작 기적의 발생 그 자체에 대해서는 단 한 줄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전체 열다섯 절 중에서 기적 그 자체에 대해서 과연 몇 절이나 할애하고 있는지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 한 절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11절).
이것이 끝입니다
왜 네 <복음서>는 모두 한 결 같이 이야기의 절정을 이처럼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마는가? 후대의 독자들을 위해서 보다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일 수는 없었을까? 하지만 바로 여기에 절정(絶頂)의 역설이 있다 하겠습니다. 절정은 짧고 함축적일수록 더욱 극적으로 다가오는 법입니다. 대부분의 <성경> 이야기들이 이와 같습니다. 이야기의 반전이나 절정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건이나, 주인공의 행위에 대해서 가능한 한 짧고 간단하게 처리해버리고 맙니다. 대표적인 사례를 <타락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의 절정, 즉 인류의 구속(救贖)이라는 대 서사시의 단초를 제공한 ‘아담’의 반역에 대해서 화자가 단 세 개의 단어만을 동원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도 먹었더라”(창 3:6하).
‘요한’ 화자 역시 이야기의 대가(大家)입니다. 그는 사실적인 묘사에도 지극히 능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절제(節制)의 미학도 통달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기적의 발생에 관한 그의 설명은 다른 세 <공관복음>의 그것보다 더욱 짧고 간단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무리를 돌아가며 떡을 나누어주었다”고 상대적으로 소상하게 전하고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아예 그러한 설명조차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그 모든 떡을 일일이 무리에게 직접 나눠주셨다는 느낌을 받도록 의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11절을 꼼꼼히 다시 읽어봅시다).
그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들의 원대로 주었다”는 설명은 무엇인가요? “그들이 배부르게 먹었다”는 말은 또 무엇입니까?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기적의 의미를 축소시키려는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요? 아닌 게 아니라 당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그와 같은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예컨대, 그날 실제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날 모두가 나눈 식사는 “성만찬”이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다”는 설명에 근거한 주장입니다. 물론 이 단어가 원어(原語)로 ‘유카리스테오’(eujcaristevw)로서, 성찬식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유카리스트’(Eucharist)가 여기서 유래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그날 예수께서 나누어 준 떡은 식사가 아니라 성찬을 위한 떡 조각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리가 “배불렀다”는 것도 문자적인 배부름이 아니라, 일종의 영적인 황홀감을 의미한다는 주장입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주장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날 보이신 행동, 즉 자신과 제자들이 지니고 있던 지극히 미미한 분량의 식사, 즉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조차 기꺼이 나누어 먹으려 하는 그 행동에 무리들이 감동을 받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양식을 서로 내어놓아 모두들 흡족하게 나누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화자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읽은 독자라면 이와 같은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할 하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도도하고도 당당한 “열역학 제 일 법칙”을 잠시 유보시키고, 새로운 창조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그가 누구이기에, 모든 것이 소멸되고 사라지는 막강한 ‘엔트로피’의 법칙을 거슬러, 다섯 개와 두 개가 수천 수 만 개로 증가시킬 수 있을까?
이 세상의 어떤 지도자가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다 주었는데도 여전히 그 양이 줄기는커녕 처음보다 더 많이 남아있을 정도로 무한한 자원을 소유할 수 있을까?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는 표현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가나’의 혼인잔치도 이와 같지 않았던가? 그날 잔치 집에 모인 하객들이 일곱 항아리에 넘치도록 가득 찬 양질의 포도주를 마셨던 일과 너무나 닮지 않았는가?
과연 어떤 종교 지도자가, 어떤 정치 지도자가 이토록 무한한 자원을 가질 수 있겠으며, 이토록 자애롭고 전능할 수 있을까?
무리의 반응. 하지만 무리는 바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육감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유대’인이 아닙니까? 크고 작은 그 모든 일들을 항상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체질화 되어있는 족속 아닙니까? ‘유대’인이라면 아무리 무지해도 그 정도는 본능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유전자를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의 반응은 기대했던 대로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14절).
이들이 말하는 “그 선지자”는 수천 년 전 ‘모세’가 예언했고, 이스라엘이 오늘날에도 기다리고 있는 종말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신 18:18)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랑하는 동안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백성을 초자연적으로 먹이신 사건을 기념하며 제정한 것입니다. 그 배경은 또 광야 지역 곧 ‘모세’가 앞으로 올 “그 선지자”에 대해서 말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기적을 체험한 이 무리가 이제 예수님 안에서 <신명기>의 그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고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 선지자” 즉 “두 번째 모세”가 틀림없다는 것이지요. 민족 해방을 기념하는 그 날 그 자리에서 무리가 열광하며, 그를 자신들의 영웅으로 만들려고 환호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닌 게 아니라, <성경>도 ‘그리스도’가 오면 이날처럼 배고픔과 굶주림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시 132:15).
이날 그들이 목도한 장면은 바로 이 <성경>의 약속이 영락없이 성취되고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열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바로 “그 선지자”가 됨이 마땅할 것이며, 자신들의 왕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싫다는 데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하고 있습니다(15절).
예수님의 반응.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셨습니다: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15절후). 어떤 사본은 “뒤로 도망갔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 화자는 무리의 “오해”와 예수님의 “숨기심”이라는 대조의 기법을 통해서 오히려 드러내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그 선지자”이자 “이스라엘의 왕”임에 틀림없다는 선언입니다. 이들 무리가 전혀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이들을 피하여 자신을 숨기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리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 두 가지 관점에서 답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무리가 가진 “반쪽짜리” 지식입니다. 반쪽 지식은 온전한 지식이 아니며,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우리네 경구도 따지고 보면 “반쪽짜리” 지식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탄’이 ‘아담’에게 일러준 지식도 “반쪽짜리” 지식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그 선지자”이자 “이스라엘의 왕”임에 분명합니다만, 무리가 알지 못했던 타이틀이 더 있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자 “(하나님의) 어린 양” 즉 “희생 제물”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왕은 왕으로 등극하기 전에 먼저 죽음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놓아야 합니다(막 10:45).
이들 무리가 <성경>에 대해서 반쪽짜리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은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리의 열광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답변은 무리의 잘못된 동기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동기가 잘못되면 거룩한 목적이 타락하고 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한 기꺼이 그분을 지지하고, 환영할 것입니다. 그분을 내 목적을 위하여 활용하고 이용할 수 있는 한 왕으로 모시고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리는 더 많은 떡이 필요했으며, 그 때마다 예수님을 환영하고 지지할 것입니다. 정치적 해방과 자유가 필요했으며, 그 때마다 예수님을 왕으로 세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 없습니다.
내 속의 그리스도. 나는 이들 무리와 얼마나 다릅니까? 나는 위로가 필요할 때는 없습니까? 큰 어려움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는 없습니까? 힘이 빠져 있을 때 안식과 평안이 필요할 때는 없습니까? 그 때마다 나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고 간구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진정 나의 힘이요, 위로요, 즐거움이자 기쁨입니다. 내 진정 사모하는 구주가 되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행여나 그분께서 나에게 오셔서 자신이 지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갈 2:20)? 나더러 이 시대의 그리스도가 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롬 8:29)? 나더러 무리에게 떡을 먹이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눅 9:13)?
여전히 그분을 나의 왕으로 구주로 열렬히 환영하시겠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