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성경>에 대하여(1): 목적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5:39약 9분 분량
최근 한국 교회에 큰 별이 하나 졌습니다. “사랑의 교회” 옥 한음 목사님이 소천(召天)하셨습니다. 본인이 기억하기로, 옥 목사님은 한국 교회에서 “제자훈련”이라는 용어를 처음 탄생시킨 장본인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분과는 오랜 지기였던 홍 정길 목사님께서도 추도식에서 그분을 회고하면서, 옥 목사님은 “교인들의 손에 <성경>을 들려준 목사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정말 의미심장합니다. 당시 비교적 탄탄한 교회로부터 담임목사 제의를 받았으나 쉬운 길을 버리고, 교인 아홉 명으로 개척 교회를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일대 일의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을 고집하면서 지금의 교회로 키워놓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성경>을 교인의 손에 들려준다는 말은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일 같지만, 그분이 개척할 당시만 해도 한국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마치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 교회의 상황처럼, 성경 해석이나 설교 등은 오직 목회자의 고유한 권한이고 책임이라는 인식이 만연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위 “평신도”가 “평신도”를 가르치고 말씀을 전하는 등의 사역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옥 목사님이 하신 일은 가히 선지자적 이었다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의 손에 <성경>을 들려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교인들로 하여금 목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바라보게 했다는 것이지요. 필자는 인격에 있어서나 사역에 있어 감히 옥 목사님의 신발 끈을 푸는 일조차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만, 항상 바라기는 나의 제자나 이 교회 식구들 모두의 손에 <성경>을 들려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이야말로 선지자로 자처하는 모든 목회자라면 마땅히 품어야 할 이상이고 꿈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침례 ‘요한’을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부르는 것도 그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자신이 아니라, <성경>을 제대로 바라보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교인들이 <성경>을 제대로 바라볼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이 질문은 결국 <성경>의 궁극적인 목적과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목적과 관련해서 <신약>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곳을 찾는다면 다음 구절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다시 말하자면 <성경>은 무슨 역사적이거나, 고고학적이거나, 과학적이거나, 신학적인 지식이나 “정보”(information)를 제공해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인적(全人的)인 “변화”(transformation)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성경>의 “문학과 역사”는 “교훈과 적용”에 앞설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성경>을 통해서 해당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정보나 지식을 얻을 수 있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성경>의 원래 의도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구절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기원(起源)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즉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언급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 관한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물론 이 구절에서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신∙구약>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경>의 목적과 관련해서, <요한복음>의 첫 번째 긴 강론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을 천명하고 계십니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요 5:39후).
여기서도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당시 ‘유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율법>이나 <예언서>를 읽을 때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과 그리스도. 그러나 과연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과연 <신약>의 빛 아래서 <구약>을 읽는 일이 가능했을까요? 다시 말하자면 <구약>의 모든 본문을 ‘그리스도’를 위한 소위 “모형론”(模型論)으로 해석하는 일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오늘날 <신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야 이와 같은 해석은 하등 문제될 것이 없는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완성된 <신약>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 자체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의 모든 기자들이 <신약>의 빛 아래에서 <구약>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소위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신 바처럼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만(39절상)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내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이 실패한 원인을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열심만으로는 안 된다는 또 다른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역시 열심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겠지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無知)”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라 해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비극적 유월절 이후 이 두 사람은 상실한 마음을 안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걸으며 그날 일어난 그 모든 일들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했습니다만 “올바른 지식”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참고. 눅 24:14-15). 중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동행하고 있었음에도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변장하셨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누가’는 두 사람의 무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 24:16)
‘누가’의 보고(報告)는 참으로 역설적이며, 해학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들의 영적 무지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도했으면서도,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두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었으며, 그와 함께 수년을 동거동락(同居同樂)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음에도, 그들의 눈은 여전히 가리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참으로 기이하고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처지는 실은 오늘 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그분이 매일 나의 삶에서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경>을 들려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라도 ‘엠마오’의 두 제자가 어떻게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한 원인에 대해서 나중에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볼 일입니다만,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예수께서 그들의 닫힌 눈과 마음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보다 먼저 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들이 눈과 마음이 열릴 수 있도록 먼저 열어 보여주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 <성경>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먼저 알려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변장한 모습을 바꾸어 그들이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신에 그분은 <성경>을 “열어” 보여주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성경>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맛본 자라면, 더 알고 싶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과연 두 사람은 <성경>을 더 알기를 원했고, 예수님은 이들과 객주에 들어가 밤을 새워가며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눅 24:31상)
그들의 눈만 밝아졌습니까? 계속되는 이들의 고백과 간증을 들어봅시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말합니다. 지식은 들음에서 났으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였고, 올바른 지식은 마음을 감동시켰으며, 마음의 감동은 입으로 고백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던 길을 그대로 갔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스스로 대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참고. 눅 24:33-35).
열린 계시, 열린 해석.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어떻게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 질문이 다소 이상하게 들립니까? 그렇다면 질문의 내용을 조금 바꾸어봅시다:
“예수님은 도대체 어떻게 <성경>이 자기에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을까?”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어떤 방식으로 묵상하고 이해하셨기에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에 대해서 그토록 확신에 찬 발언을 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구약성경>의 주인공 ‘이스라엘’을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었을까? 예컨대, 선지자 ‘이사야’가 노래하던 “종의 노래”를 어떻게 자신의 노래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어떻게 <구약>의 그 모든 예언이나, 약속이나, 권면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당시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토록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했음에도 발견하지 못한 자기 정체성을 예수님은 어떻게 그처럼 과격하고도 철저하게 수용할 수 있었을까?
이 모든 질문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고 믿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성경공부 방식을 따를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단순, 명료합니다. 즉 그분이 하신 것처럼, <성경>의 그 모든 예언이나, 약속이나, 권면을 나를 통해서 성취시키려 하면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어찌 내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으며, 사도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본질에 있어서가 아니라 인격이나 사역에 있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
오늘 하나님이 내 앞에서 <성경>을 펼쳐 보이실 때, 내 눈이 열리고, 내 가슴이 뜨거워진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알고 싶고, 찾기를 원하는 그 “소명”(召命)이 바로 이 순간 나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소명은 그야말로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한 것”이지 “내 나라와 내 의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소명의식의 가장 출발점은 채무감(債務感)에서 비롯됩니다. ‘바울’ 고백도 바로 이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내 가슴은 무엇으로 뜨겁습니까? 내가 찾는 소명은 무엇이며, 그것을 찾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찾읍시다. 그러면 열릴 것입니다. <성경>은 마치 백화점에 상품을 진열해 놓듯 이미 성취된 하나님의 계시들을 진열해 놓은 전시대가 아닙니다. 내가 <성경>을 열 때마다 그분의 계시는 늘 새롭게 열립니다.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경>은 끝나고 닫힌 책이 아닙니다. “현현”이나 “감동”으로서의 계시는 끝났지만, “조명”의 계시는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열린 마음으로, 기대하는 마음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살아서 역사하시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계시를 주실 것입니다. 이제 결단하고 헌신합시다. 그리고 나에게 소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