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죽지 않을 병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4약 9분 분량
늘 곁에 두고 읽는 <성경>이 때로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성경>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이야기들이 오늘날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평생 살아도 한 번 경험할까 말까 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니 <성경>을 읽을 때, “아, 이것이 내 이야기구나”하며 감격하고 흥분하기보다는, “뭐,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 때는 그랬겠지. 그런데 오늘 나에게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거야” 하며 오히려 시큰둥해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또 어떻습니까? 예컨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과연 나는 이 약속을 얼마나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내가 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주셨으며, 무엇인가 찾을 때마다 눈에 보였으며, 문을 두드릴 때마다 그 문이 열립디까? 그렇지 않았기에 우리들 대부분에게 이 약속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나마 불신하고 돌아서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가련한 ‘마리아’와 ‘마르다’도 하나님을 불신하고 돌아설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마리아’와 ‘마르다’라 해도 이번만은 달라야 합니다. 그야말로 “하루가 여삼추(如三秋)”같은 심정으로 주님이 오시기를 애타게 기다렸건만, 결국 오라비는 죽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견딜 만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 늦으시는 것이겠지.
그런데 심부름을 보냈던 사람이 돌아와서 한다는 이야기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전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오라비가 죽어버렸는데 이 무슨 한가한 말입니까!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더 한심한 노릇은 오라비의 병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했답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아파 죽은 것이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굳이 불교 용어를 빌지 않더라도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우리 인생이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니 말입니다. 괜스레 하나님의 영광을 들먹여서 하나님의 명예와 신뢰에 오히려 오점(汚點)을 남기게 되어버렸습니다.
예언(豫言)과 예언(預言). 처음 보는 영화나 소설의 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관객이나 독자가 없듯이, 단 한 번 밖에 없는 내 인생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그리고 어떻게 결말이 날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닥치는 온갖 일상사(日常事)들이 아무런 의미나 목적도 없으며, 특히 하나님의 영광과는 더더욱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모든 일들의 과정이나 결말을 알고 싶어 합니다. 특히 시련이나 환난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나 영화를 중도에 그만두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호기심(好奇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중요한 원동력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언(豫言)에 귀가 솔깃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얼마나 모순된 태도입니까! 도대체 누가 예언(豫言)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의 현자(賢者)들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예언을 하려들지 말라. 그것이 맞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며, 틀리면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모순된 태도는 또 있습니다. 우리는 예언(豫言, foretell)은 듣고 싶어 하나, 예언(預言, forthtell)은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가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전자(前者)가 미래를 위한 예고라면, 후자(後者)는 오늘을 위한 경고 내지는 권고입니다.
<성경> 속의 모든 <예언서>들이 이 두 기능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만, 강조점은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豫言書>라기보다는 <預言書>로 봄이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설교의 강조점이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이듯이, 선지자들 역시 예고를 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설교도 이와 같습니다. 때로는 이스라엘을 향한 미래의 심판에 대해서, 또 한편으로는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그렇다면 ‘나사로’의 질병에 대한 예언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랍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사로’의 두 누이도 이번만큼은 그들의 주님이 틀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심정으로 그들의 서운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21, 32절).
그들은 이렇게 따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셨나요? 우리 오라버니가 부활할 것이라고 하셨나요? 당연히 그렇겠지요. 당연히 그 말씀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주님은 충분히 그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영광을 보려면 우리 역시 모두 죽어야만 가능한 일 아닌가요? 너무나 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두 자매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미래의 일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미래에 보게 될 그 영광스러운 날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미래가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지금 당장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큰 위로가 되지는 못한다는 불만이겠지요. 약속과 현실은 이처럼 너무나 멀게만 느껴집니다.
하지만 주님은 주님대로 답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화의 단절을 느끼고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이전에 ‘니고데모’와 이야기할 때에도 이런 기분이었겠지요. 지금 주님은 미래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일이 하나님의 주(主) 되심을 선포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주(主) 되심이란 이런 것입니다. “되어라”하매 그대로 되는 것을 말합니다. “있어라”하매 없던 것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장만큼 이 사실을 웅장하게 보여주고 있는 곳도 드물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이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사실 우리가 이곳에서 목격하게 될 장면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라 부르는 한 존재는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의 생명체는 단순한 유기물질과 무기질로 분해되고 와해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 2절에서 보는 단순한 물질일 뿐입니다. 비인격적이며, 인격적인 의사소통이나 대화가 전혀 불가능한 상태의 물질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형체도 없고 질서도 없는 이 물질을 상대로 명령하고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어라”; “나뉘라”; “열매를 맺어라”; “번성하라”; 등등. 그가 명령하심에 그대로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주되심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통제 하에 놓여있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피조물 두 번째 ‘나사로’가 창조될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어 남겨놓은 아무 형체도 없는 그 물질로부터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단순한 소생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입니다. ‘나사로’를 이루고 있던 그 물질들이 다시 조합되고, 연결되고, 복잡해지고, 생기를 부여받아 새로운 한 인간이 탄생되는 것을 말합니다. 땅의 티끌로부터 ‘아담’이 탄생하였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여기서 그칠 수 없습니다. 이전의 ‘나사로’가 사라지고 새로운 ‘나사로’가 재창조되었으니, 그에 걸 맞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존재가 ‘유대’ 당국자들에게 얼마나 큰 부담과 골칫거리가 되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과 함께 그도 역시 잡아 죽이려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일회성(一回性)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항구적인 빛을 비추게 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 그렇다면 지금 예수께서 함께 언급하고 있는 “아들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나사로’의 질병이 “하나님의 영광” 뿐만 아니라 “아들의 영광”이기도 하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새삼 새롭게 덧붙일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이니, “하나님의 영광”은 당연히 “아들의 영광”이 되어야 할 것이 때문입니다.
‘요한’ 화자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이점을 강조해 왔습니다. 예컨대, ‘가나’에서 첫 번째 표적 사건을 기록한 후 화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2:11). 예수님 스스로도 “아들의 영광”과 관련해서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11:40).
아들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만유의 주(主)가 되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참고. 1:2). 그러기에 ‘갈릴리’ 바다에 몰아치던 바람과 파도를 향해서 그분께서 “잠잠하라”하셨을 때, 바람과 바다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히브리서>의 말대로 “그분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참고. 히 1:2).
이처럼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시기에 ‘나사로’가 아프다는 전갈을 받고도 이틀을 더 지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음으로 끝날 병이 아니다”(4절상). 즉 죽음이 ‘나사로’ 인생의 주인이 될 수가 없다는 선언입니다. ‘나자로’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지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만이 앞으로 일어날 일의 전부는 아닙니다.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줄 또 하나의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곳에서 그 일이 무엇인지 암시를 받은 바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7:39후);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
여기서 그분의 영광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분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일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분의 죽음도 포함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2:16).
‘나사로’의 부활은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초래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적개심이 ‘나사로’의 일로 해서 극에 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이 일을 아셨고, 그 길을 향해서 걸어가셨습니다. ‘도마’의 결단은 이점에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주과 함께 죽으러가자”(16절하).
우리는 모든 일의 진행과 결말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내 존재나 내 모습, 그리고 나에게 닥친 여러 가지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이나 그리스도의 영광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내 인생의 결말이 어떻게 끝날지에 대해서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끝에 대해서 이렇게 큰 소리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1:55)
즉 내 인생이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죽음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전 15:57).
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까? ‘바울’ 사도는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렇다면 나의 존재는 그 자체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있습니까? 내일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말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