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1-3약 11분 분량
우리 부부는 지난 두 주 동안 상당히 우울하게 보냈습니다. 제 아내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아주 불쾌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을 향한 우리 두 사람의 정성과 성의가 무시당하고 배신당했다는 생각 때문에 처음 한 동안은 분노로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분노가 점차 시간이 갈수록 모든 것이 귀찮고 소용없다는 일종의 허무감으로 발전하고 의욕상실증에 빠져버렸습니다.
우리가 기울인 정성이나 노력이 때로 매끄럽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상대를 불쾌하게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 모든 것이 실은 복음 전도라는 동기도 깔려있었는데 결과가 이렇게 끝나버렸으니 허탈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지요. 내가 예수님만 아니었더라면, 내가 전도자만 아니었더라도, 굳이 이런 일을 겪을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입니다. 딴에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그분 지시에 따라 해본 것뿐인데 영 실망스럽다는 생각이지요. 아직도 내 기분은 여전히 우울하고 잔뜩 찌푸려져 있습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닙니다만 이번에는 특히 후유증이 크고 오래가는군요.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들. 사랑은 이처럼 상처받기가 쉬운 가 봅니다. 특히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세 남매도 같은 심정일 거라는 심증이 갑니다. 이들도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따랐던 자들이었으니 말입니다.
이들 남매는 예수님 당시나 초대교회 시대에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던 믿음의 영웅으로 통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네 복음서가 모두 한 결 같이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겠습니까(참고. 마 26; 막 14; 눅 10:38-42; 요 12:1-2)!
특히 ‘마리아’의 헌신과 사랑은 예수님마저 감동을 시켜서, 예수님께서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마리아’가 한 일을 함께 들려주라고 당부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무슨 일을 했는지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이곳에서 더 이상 상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아름다웠고, 순전했으며, 성경공부에 열정적이었으며, 가진 것을 아낌없이 주님에게 내어놓았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에 비해 다소 부정적으로 비취기는 합니다만, 그녀 역시 봉사하고 섬기는 일에 있어 탁월함 그 자체였다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무리들을 위한 식사 준비는 항상 ‘마르다’ 소관이었습니다. 다만 열정이 지나쳐 왕왕 우선순위를 놓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성경공부나 예배 시간 중에도 그는 그 일에 열중하지 못하고 부엌으로 넘나들며 식사 준비하는 일에 더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아무도 자기를 도와주러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기도 해서 예수님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연 섬김의 여왕이었습니다. 우선순위만 제대로 되었더라도 그녀는 완벽 그 자체였다 할 것입니다.
‘나사로’는 어떻습니까? 신기하게도 이들 남매가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에서 ‘나사로’가 대화하는 장면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했는지, 예수님께서 그에게 무어라 말했는지 등에 대해서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침묵의 증인임에 분명합니다(J. M. Boice). 그는 죽었다 살아난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존재와 삶 자체가 복음의 능력이자 증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살아난 것을 보았으며, 대제사장들은 바로 그 일 때문에 그를 예수님과 함께 잡아 죽이려고 모의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한 사람들. 그런데 이들 남매는 자신들만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짝사랑을 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역시 이들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당사자들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절). 그들은 서로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토록 총애하던 한 사람이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가혹하게도 말입니다. 그들이 이 고통과 악고(惡苦)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을까요?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오라비가 죽은 지 나흘 뒤에 비로소 알았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나에게 닥치는 온갖 시련과 고통의 의미를 어찌 내가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오든, 왜 오든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우리가 결코 놀라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담대한 사람이라면 아마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욥 5:7). 이어령 박사님의 말대로 어차피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생명의 요람”과 “죽음의 유택”(幽宅) 사이에 걸쳐 있는 다리와 같은 것이라면, 어찌 그 다리가 요동치며 불안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면 그 시련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하나의 도구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 왕이 그랬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아마도 그는 시련을 통해서 <성경>을 더욱 더 잘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시련은 그에게 있어 “위장된 축복”이었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나의 유익뿐만 아니라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도 가끔 허용하시는 듯합니다. 절망하거나 당황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를 학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시련에 놀라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절). 시련이 하나님의 영광, 즉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때문에 놀라워할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혹시 내가 겪고 있는 시련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습니까? ‘마리아’와 ‘마르다’가 이를 어찌 알았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우리는 ‘나사로’를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하며 풍성한 은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날 누군가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이나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환난 중에 기뻐합시다.
이와 같은 때에. 환란이나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성취하려고 의도했든,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자주 자신을 향하여 이렇게 묻습니다: “혹시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나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생각이 신학적으로 옳든 그르든, 만일 우리가 고난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려 할 때, 인격이나 신앙의 성숙에 분명 유익이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은 “축복의 가면” 내지는 “위장된 축복”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감옥이나 병상에 누웠을 때, 싫든 좋든 가장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대개 이 시기에 <성경>을 가장 많이 읽게 될 것입니다. 그 일 외는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월남 이상재 선생을 항일 독립 운동가에서 기독교 민족 계몽 운동가로 바꾸어놓은 것도 그분께서 감옥에 갇혔을 때 읽은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무슨 일이 생깁니까?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비로소 하나님과의 대화가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나는 듣습니다. 동시에 내가 말하고 그분이 듣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내 문제가 그분 앞에 드러나게 됩니다. 비로소 기도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나자로’의 두 누이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들은 지금 자신들의 문제를 예수님에게 가지고 온 것입니다. 환난 날에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예수님에게 찾아온다는 것 말입니다. 나도 과연 이들 두 여인이 했던 것처럼 하고 있는지 물어볼 일입니다. 나는 아플 때나 어려울 때 누구를 찾습니까? <시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하지만 대단히 안타깝게도 대개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그분에게 달려가지 않습니다. 별 도움이 되지 않거나 관심도 없는 주변 사람들을 찾아 나섭니다. 불평이나 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백성의 특징은 지도자를 향해서 불평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도자는 백성과 함께 불평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바로 이것이지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모세’를 향해서 불평을 내쏟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들처럼 할 수 없습니다. 대신 그는 ‘야훼’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참고. 출 15:25). ‘유다’ 왕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산헤립’이 보낸 대사 ‘랍사게’로부터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는 모독에 찬 글을 받아들었을 때, 그는 그 서신을 ‘야훼’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울부짖습니다(참고. 사 37:14). 침례 ‘요한’의 제자들도 그들의 선생이 목이 잘려 죽었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예수님에게 전했습니다(참고. 마 14:12).
우리를 위한 모범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닙니다”(히 4:15상). 왜냐하면 “그분이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기” 때문입니다(히 5:7). 우리가 환난 날에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왜 들으시나? 내가 그분을 잘 알고 있기 때문도 아니고, 내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내가 그분께 무엇인가 드려서 그 대가로 받을 수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마리아’나 ‘마르다’도 예외가 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믿음과 희생에 대한 보상이 없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 하겠습니까! 믿음이란 결국 어느 날 불의에 닥칠 재난 대비용 보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신앙생활을 마치 예수님이나 또는 주변의 누군가를 위해서 해주고 있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사실 나도 그런 적이 있기는 했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한 목사님이 시무하던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교인이라고는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던 교회라 사정이 하도 딱하게 보여 그냥 우리 부부라도 나가 앉아 있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심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의협심이 발동한 것으로 해두겠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지금 인편을 통해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는 두 자매의 모습을 주목해 봅시다: “주여, 보시옵소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절).
그들의 기도는 참 복잡 미묘하게 들립니다. 상당히 당황스러워하고 있으며, 무엇인가 절실히 간청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보시옵소서”가 이 같은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듯합니다. 비록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빨리 와서 고쳐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도 겉으로는 전혀 그런 내색이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간청을 말하는 대신에,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이 한마디로 당시 그들의 심정을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해지는 것은 있습니다. 지금 이들이 구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에 기초한 그 무엇이 아니라(희생이나 봉사 등), 주님의 사랑에 근거한 그 무엇일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시편>의 약속을 익히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내 기도는 어떠합니까? 사실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내가 드리는 무수한 말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기도를 들으시는 것보다, 내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간절한 심정을 보고 계실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고통이나 질병이 물러나고 사라졌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 하루라도 빨리 나를 에워싸고 있는 어려움이 해결되었으면 하는 애절한 마음 말입니다. 내 모든 자랑을 내려놓고, 오직 그분의 사랑에만 의지하는 그 마음 말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기가 어려워집니다. 확신이 없습니다. 이를 누가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사도도 아니고, 대 부흥사도 아니며, ‘나자로’는 더욱 아닙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고, 헌신했으며, 희생했던 ‘마리아’와 ‘마르다’. 예수님께서도 지극히 사랑하셨던 ‘마리아’와 ‘마르다’가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라비가 죽기 전에 빨리 주님께서 오셔서 살려주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그들의 오라비가 죽든 살든 적어도 그들이 알고 있는 주님은 최소한 즉시 달려오는 성의(誠意) 정도는 보여주기를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빨리 달려오기는커녕 오히려 이틀을 더 지체하며 마치 ‘나자로’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그들의 오라비는 죽고 맙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항상 한 발 늦게 도착하십니다. 아무리 급하다고 기도해도 그분의 응답은 때를 놓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 인생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무수히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나는 기도해야 하나요? 사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가 원했던 것처럼 즉각적으로 달려와서 고쳐주신다면, 이 세상에서 질병이나 고통이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무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놀랍게도 우리가 안심하고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즉각적으로 응답해주시기 때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즉각적으로 응답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지각에 뛰어난” 분이시기에 우리가 안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다”함은 그분의 지혜와 지식이 우리의 이해와 상상을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모든 이해와 상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평강”이 때로는 우리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지키실 것이기에 우리가 안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자로’를 사랑하셨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도 사랑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분께서 나도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