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지체되는 사랑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5-6약 9분 분량
적어도 우리의 상식으로 11장 5절과 6절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 동생 나사로를 사랑하셨으나,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즉 예수님께서 세 남매를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연유인지 즉시 달려가지 않고 그 계시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지체하셨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암시하고 있는 사뭇 다릅니다. 즉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세 사람을 사랑하셨으므로,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즉 예수님께서는 세 남매를 사랑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도움을 오히려 더 늦추셨다는 것입니다. 아주 납득하기 어려운 훼괴한 논리입니다. “필요할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금언을 무색하게 만드는 논리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는 새로운 논리를 개발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날 때부터 고아원에서만 자란 아이에게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아무리 가르쳐보아야 크게 감동을 받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냉소(冷笑)만 돌아올 것이 뻔해 보입니다. 사소하고 시시한 일들은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으니 특별히 신경 써서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중요하고 대단한 일은 누가 나서서 선뜻 도움을 준 적도 없으니 크게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인생이 그러려니 하며 그저 참고 기다리며 살 뿐입니다. 괜스레 헛된 소망을 가졌다가 십중팔구 상처만 받게 될 터이니 그냥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오래 동안 혼자 살면서 터득한 것입니다. 그러니 언감생심(焉敢生心) “기도의 응답”이니, “하나님의 도움”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감히 꿈이나 꿀 수 있었겠습니까? 입에 올리는 자체가 거북하고 어색할 뿐이지요.
이런 아이에게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그분이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고, 또 지체 없이 달려온다 한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설령 이 아이가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크게 달리 생각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가 오래 동안 출석해 왔던 교회가 고아원과 같은 분위기였다면 말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지만 만약 그가 <나사로 이야기>의 결말을 다 알고 있다면 어떨까? 여전히 같은 생각일까? 즉 그리스도께서 머뭇거리거나, 지체하고 있는 것이 이들 세 남매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또는 다른 일로 바빠서 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할까?
아닌 게 아니라, <누가복음>은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 무심하고 거만한 한 재판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눅 18:1-8). 이 재판장은 사람은 물론 하나님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아주 거만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수시로 찾아가 괴롭히는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재판장이 여인의 기도를 들어줄 리가 없습니다. 이 재판장은 오직 자신의 일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인의 요구는 집요합니다. 매일처럼 찾아와서는 울고 매달립니다. 재판장은 하는 수 없어 여인의 요청을 들어줍니다. 여인의 요청이 옳다거나, 그 처지가 딱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괴롭고 귀찮아서 들어주었을 뿐입니다(5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심은 하나님도 이 재판장과 같다고 말하기 위해서입니까? 우리는 그렇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인의 집요함을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1절).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7절).
그분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오래 참고 지체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경> 속의 말씀일 뿐입니다. 그리고 어쨌든 재판장은 여인을 한동안 기다리게 했던 것은 사실 아닙니까! 우리 대부분이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도 이점에서 재판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거의 매번 늦거나 응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우리의 일에 무관심하지 않다면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를 시작할 때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필경 늦거나 아예 응답조차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예측할 때가 많습니다. 일의 결말을 모르니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마리아’와 ‘마르다’가 원성어린 목소리로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는 것도 일의 결말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들은 이미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한 채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행여나 하나님께서 다른 일로 너무 바쁘셨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실 이 말은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의 거짓 선지자들을 조롱하며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왕과 왕비를 포함해서 온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로 타락해 있을 때,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에게 도전장을 냅니다. ‘야훼’ 하나님과 ‘바알’ 중에서 누가 참 신(神)인지 하나의 표적을 통해서 가려내보자는 도전이었습니다.
표적이란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매달아 놓고, 그 위로 불이 내리도록 기도해서 누가 불로 응답하는지를 가려내자는 것입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으나 아무 응답이 없자, 그들은 제단 위로 올라가 뛰놀기도 하고, 큰 소리로 부르기도 하고, 심지어 칼과 창으로 몸을 찔러 피를 흘리기도 했습니다. 하루 종일 그렇게 했으나 ‘바알’은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 때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이야”(왕상 18:27).
‘바알’이 너무 바빠 기도를 들을 시간이 없는 것 아니냐는 조롱이지요.
물론 ‘야훼’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적어도 ‘엘리야’에게 그분은 무관심하지 않았고, 기도를 들어주지 못할 만큼 바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도 같은 생각일까? ‘마리아’나 ‘마르다’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엘리야’ 당시의 ‘바알’ 선지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엘리야’로부터 받았던 그 수모(受侮)와 굴욕을 되갚아 주려 하지 않았을까? “때는 이 때다”하며 말이지요.
나에게도 이와 유사한 경험이 없지 않습니다. 학위를 받고 귀국은 했으나 한 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해, 나와 아내와 두 아이는 시골 아버님 댁에서 육 개월 가량을 얹혀살아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놀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내 아버님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습니다. 한심하게 보였겠지요. 식사 시간만 되면 내가 기도하는 모습에 언짢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무슨. 일자리도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판에.” 내심 이런 불만이셨겠지요: “너의 그 하나님이 어디 갔느냐?”
당시 내 모습이 영락없는 ‘바알’ 선지자로 비췄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알’ 신이 되어버린 셈이지요. 나의 기도에 아무런 응답조차 없는 그러한 신(神)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늦거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실 수 있다고 말했다면, 내 아버님께서 어떻게 받아들으셨을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실은 나도 그 문제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환경. 정말 이야기 속의 두 자매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체하고 계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실의와 원망이었습니다(21, 32절)! 하지만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사랑하고 계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또한 세 남매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대도 정작 어려움 앞에 서면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왜 이토록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까? ‘보이스’ 목사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환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반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환경을 해석해야 한다.” 이분은 우리가 쓰고 있는 안경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색안경을 쓰고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색안경을 쓰기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예컨대, 그분에게는 붉은 색이 붉은 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흰색으로 보입니다. <이사야>의 말입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이처럼 하나님의 눈이 적백(赤白) 색맹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붉은 색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붉은 색안경을 쓰고 붉은 색을 바라보자니 당연히 흰색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분께서 쓰고 계신 붉은 색안경은 물론 그리스도라는 안경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는 그리스도의 피로 물든 안경이라 보면 되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운명은 멸절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안경을 통해서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처한 환경이나 주변도 이 안경을 통해서 둘러보면 어떨까? 필경은 다른 모습, 다른 색깔로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려 하지 않을까?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의미나 목적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까? 당장은 무엇인가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해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태도나 훈련은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인지하고 있듯이, 훈련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체질이 되며, 체질은 운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대부분의 덕목(德目)들, 즉 용기니, 인내니, 믿음이니 소망이니 하는 것들은 그저 땅에서 솟아났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즉 정 반대의 상황, 결코 바랄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하고 헤쳐 나온 결과 우리의 인격으로 축적되고 형성된 그 무엇인 것이지요. 예컨대, 용기는 두려움을 통해서, 인내는 시련을 통해서, 믿음은 의심을 통해서, 그리고 소망은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서 얻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체되는 것이 이처럼 결과적으로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께서 항상 한 발 늦게 도착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 65:24)
선지자는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신속하게 응답받고 있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구절은 다분히 공허한 시적 수사(修辭)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질적인 예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라 물위를 걸어보겠다고 나섰던 상황을 <마태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마 14:30-32)
화자의 의도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베드로’가 물에 빠진 것은 주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바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절박한 상황에서 주님은 지체한 것이 아니라,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구원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익사하기를 기다려, 나흘 쯤 뒤에나 물속으로 들어가 건져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마리아’와 ‘마르다’는 기도의 응답을 그토록 오래 기다려야 했으며, 왜 ‘베드로’의 기도는 즉각적으로 응답을 받았는지 우리가 알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다르며,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며, 그분의 시간표가 우리의 시간표와 다르다는 점일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