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십자가(8): 장례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9:38-42약 13분 분량
본인이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주말이면 본인 집으로 찾아와 전도하던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자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금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먹을 것을 들고 찾아오곤 했습니다. 처음 한 두 번은 예의 상 반갑게 맞아주긴 했으나, 계속 오는 것이 싫었습니다. 하지만 내색은 할 수 없어, 더 이상 오지 못하게 하려고 이런저런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며 그들을 귀찮게 했습니다. 때로는 얼굴을 붉히며 논쟁도 하고, 또 때로는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러기를 수개월, 그 부부의 열심 때문이었던지 결국에는 우리 부부는 침례를 받고, 등록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 공개적으로 간증도 했습니다. 물론 그 부부에게 감사한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지요.
침례를 받던 그날 주일 아침 교회에 나오기 전, 집에서 잠간 꿇어 앉아 기도를 했습니다. 오래 동안 원(願)은 있었으나 결코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흡연 습관을 끊고 싶다는 기도였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는 아직도 담배가 반쯤 남아있는 담배 갑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집을 나섰는데,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지금까지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사실 이것은 지극히 미미한 외적 변화에 불과한 것이고, 내 안으로 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안개처럼 뿌옇게 내 앞을 가리던 그 무엇이 깨끗하게 사라진 느낌이었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내 속에 한 가지 불만 같은 것이 생겨났습니다. 뭐 이런 것이지요: “도대체 그동안 한국에서 수십 년을 살았는데, 나에게 이들 부부처럼 예수 믿으라고 말한 사람이 왜 한 사람도 없었더란 말인가. 대한민국의 그 많은 예수쟁이들은 다 어디로 갔더란 말인가? 도대체 이 사람들 교회에서 무엇을 배운다는 말인가?”
그래서 나는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결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내가 아는 것을 절대로 혼자 간직하고 살지는 말아야지. 증거하고 알려주어야지.
당시 교회의 분위기도 그랬습니다. 주일 예배는 흥분과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예배는 늘 일종의 축제였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초청의 시간이 되면, 서로들 달려 나와 결신(決信)이나 재 헌신의 간증을 하려 했고, 나머지 교인들은 박수로 그런 사람들을 환영하고 격려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다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수요 기도회나 기타 구역 모임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모였다 하면 서로들 자기 간증 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이 모임이 그냥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고, 밥 먹고 즐기는 모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따분하게 성경공부만 하는 모임도 아닙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모임입니다. 어떤 이는 자기 인도자의 권유와 도전으로, 잘 운영해오던 비디오 가게를 처분해버렸습니다. 팔리는 비디오 중에 음란 비디오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팔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교인은 담배와 도색 잡지를 가게 진열대에서 치워버렸습니다. 잡화 가게에서 이들이 가게의 주 수입원인데도 말입니다. 또 있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어떤 부부는 그동안 일주일에 6일을 일했는데, 그 교회에 온 이후로 5일만 일하고 금요일은 전도의 날로 정해, 전도 대상자를 찾아 다니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것이 교회이고, 교회의 힘입니다. 교회는 죽은 사람들의 무덤이 아닙니다.
이 교회에서 교인들의 이런 모습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거나, 예배나 구역 모임에서 점잖 빼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배겨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그냥 두지를 않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그 사람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고 진단하려고 합니다. 마치 의사 앞에 앉은 환자처럼,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내면세계나 신앙 상태에 대해서 수시로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까지 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숨기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과연 이런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나 ‘니고데모’라면 어땠을까요?
나는 기질 상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나 ‘니고데모’입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나는 마치 무슨 열병이나 집단 체면에 걸린 듯한 교회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거나 싫어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앙(신학이 아니라)의 기초를 그 교회에서 닦은 것을 참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 교회 덕분에 거듭난 교인이라면 당연히 열정과 꿈을 가지고 다소 요란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입니다만. 처음의 결심과 열정이 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그저 조용하고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목사라고 하는 신분이 참 좋다는 생각도 듭니다. 젊은 시절의 객기로 목사가 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이제는 나를 아는 사람치고 내가 목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굳이 복음을 전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나의 존재 자체가 증거고 증언이 되는 셈입니다. 때로는 그저 침묵하는 것조차도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아, 저 사람은 아주 점잖은 목사로구나”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받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유익이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전해야 하는 일이 직업이 되다 보니, 늘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그동안 나는 성경을 떠나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가르치고 설교해야 하니 남들보다 독서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독서는 새로운 지식을 얻는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독서를 더할수록 지식도 따라 늘어갔습니다. 물론 지식과 신앙의 깊이가 반드시 비례해 왔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숨어서 예수 믿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대한민국이라는 자유세계에 살게 된 것도 큰 축복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만일 북한이나 미얀마, 또는 이슬람 국가에 살았더라도 이렇게 드러내놓고 예수 믿는다고 자랑할 수 있었을까? 내 기질로 볼 때, 아마 결코 그렇게 살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환경 탓이나 하며 체념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가끔 생각나면 혼자서 조용히 기도나 독서하는 것으로 자위(自慰)하며 살았겠지요. ‘요셉’이나 ‘니고데모’도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기질적으로 좀 더 적극적인 사람이라면, 다른 형태로 신앙을 드러내려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예컨대, 정의사회 구현 운동이라든지, 불우이웃 돕기 등과 같은 성경적 교훈과 맥을 같이 하는 윤리ㆍ도덕 활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영역에서는 내가 굳이 예수님의 “숨은 제자”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숨어 사는 제자. ‘요한’ 화자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를 “숨은 제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숨어서 예수님을 믿는 자라는 뜻이겠지요. 가능한 일일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기도도 혼자서, 예배도 혼자서, 성경공부도 혼자서 하는 교인이라는 뜻이겠지요. ‘니고데모’에 대해서 찾아보았더니, <요한복음>에서 세 번 등장하는 것이 전부입니다(3:1; 7:50; 19:39).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네 복음서 모두에 등장하고 있습니다(마 27:57; 막 15:43, 45; 눅 23:50-51; 요 19:38). ‘요한’ 화자가 이들 두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한 번 볼까요?
우선 ‘요셉’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19:38상). 썩 좋은 평가는 아닌 것처럼 들립니다. 오히려 그에 대하여 상당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 왜 그렇게 살지?”하는 책망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니고데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를 소개하면서,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38절).
꼭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소개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까? 사람의 약점이나, 과거 한 때 잘못한 행위를 들추어내면서 사람들 앞에 소개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화자의 심보가 정말 고약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소개 바람에 두 사람은 교회에서 두고두고 “숨어서 예수 믿는 자”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달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 생전에 유대 공회원들 가운데서 숨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12:42). 이런 사람들을 향한 ‘요한’ 화자의 평가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숨기고 사느냐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기 본문에도 기록하고 있는 바처럼, 두려움 때문입니다. 동료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38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적 소수(小數)의 편에 선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가 있지 않고서는 참 힘든 일인가 봅니다. 특히 그 사회가 사상적으로나 이념적으로 획일화 되어있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다른 생각, 다른 종교, 다른 세계관은 지탄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요한’ 화자는 또 다른 이유 때문에 “두더지 교인”이 된 사람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12:43). 칭찬이 듣고 싶다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에게나 있겠습니다만, 이런 마음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거나 부유한 사람일수록 더 심한 모양입니다. 예컨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는 그 사회에서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공회원이었고, 돈도 많았습니다.
‘마태’는 ‘요셉’을 ‘아리마대’의 부자로 칭하고 있습니다(마 27:57). 그는 예수님 시체를 감쌀 깨끗한 세마포를 가져왔고, 시체를 넣어둘 새 동굴 무덤도 자기 소유였습니다(마 27:60). ‘니고데모’는 시체에 뿌릴 몰약과 침향을 무려 일백 파운드나 가지고 왔습니다(39절). 이게 얼마나 많은 분량인지 비교를 위해서, 이전에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뿌린 향료의 양이 얼마였던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지 한 파운드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예수님 때문에 사회적 죽음을 자초하려 했을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니 지금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 두 사람, 숨어 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죽어서 지낸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간혹 살아있다는 표시를 보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공관복음>은 ‘요셉’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자”로 그리고 있고(막 15:43; 눅 23:51), “선하고 의로운” 자로 치켜세우기도 합니다(눅 23:50). 그리고 예수님을 저주하는 공회의 결정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눅 23:51). 물론 그가 회의장에서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숨은 제자라 해도 제자는 제자입니다. 어찌 선생님을 죽이자는 결의에 동의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설령 그가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은 숨겼겠지요.
과연 이들을 “거듭난 자”로 볼 수 있을까?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에 있었던 그 유명한 한 밤중의 대화에서 ‘니고데모’는 과연 거듭남의 체험을 했을까? 사실 그날 대화의 주제는 “거듭남”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것이 알고 싶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고, 예수님도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는지를 알려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지 “거듭남”의 신비로움에 대해서 말해주었을 뿐입니다. 사실 그날 밤중의 대화는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돌아갔습니다. 초저녁에 와서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거듭남의 신비는 ‘안드레’와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안드레’ 역시 예수님과 한 밤중의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돌아옵니다. 다음날 아침, 형을 찾아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자랑하며 형을 그분에게로 데리고 갑니다(참고. 1:37-42). ‘사마리아’의 여인도 한낮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리고 마을로 되돌아옵니다. 이번에는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니며 외쳐댑니다: “동네 사람들아,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나와 함께 그분을 만나러 가보자.” 탕녀(蕩女)에서 성녀(聖女)가 되는 아주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제자입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숨어사는 두 제자”에게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경천동지(驚天動地)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이 어둠 속에서 마침내 빛 가운데로 당당히 걸어 나온 것입니다. 누가 이들을 소심하고 겁 많은 제자라 하겠습니까?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는 그 일을 자청하고 나섭니다. 예수님께서 죽었으니 이제 남은 절차는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지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빌라도’에게 가서 죄인의 장례식을 치러야 하겠으니 시체를 내려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습니까?
‘유대’인들이 했어야 합니다. 예수의 다리를 꺾어 빨리 죽게 해 달라고 했으니, 이제 그를 끌어내려 장사지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유월절을 앞두고 시체를 만지는 그 부정(不淨)한 일을 누가 하려 하겠습니까? 나도 부정해지는 판에... 예수님의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면 열두 사도들? 이 사람들 모두 지금 어디서 무엇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사랑하던 그 제자”는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십자가 아래에서 그분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숨어사는 두 제자”를 도와 함께 장례식을 치렀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런데 마치 유체 이탈 화법을 쓰듯, 자신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화자는 예수님의 장례를 언급하면서 왜 하필 이 두 사람을 내세우고 있는 것일까요? 이 모든 일을 목격하고 기록한다는 본인조차 빼버린 채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일까요? 교회 회중 앞에서 이들을 공개재판이라도 하자는 것이었을까요? 그래서 교회가 안아야 할 “주홍 글씨”를 대신 이들에게 뒤집어씌우자는 것이었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화자 ‘요한’이 작성한 설교문은 어떠해야 할까요? 제가 여기 본문의 기록에 ‘카텐자’를 붙여보았습니다. 그 내용이 설교라기보다는 차라리 간증이나 고백에 가깝습니다. 그의 설교는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회중 여러분, 이 사람들 한 번 보세요. 예수님 살아계실 때는 내내 숨어 지내다가, 돌아가시고 나니 어슬렁어슬렁 나타나 장례식 한 번으로 생색을 내려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양심의 가책이라도 좀 덜어보자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여러분,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평소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물론 이 사람들, 평소 예수님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했을 것입니다. 이 점 나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빌라도’ 역시 그를 존경했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들 예수님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좋은 일 한 번 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동안 진 빚의 일부라도 갚을 수 있겠거니 생각했을 수도 있지요. 생색을 내고 있다고 생각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빌라도’ 역시 좋은 일 한 번 크게 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어!” 그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한 것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 이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거듭난 자만이 그분의 제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과연 그 두 사람은 거듭났을까요? 난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지금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지금 나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이것은 나의 간증이요 고백입니다. 내 가슴을 비수처럼 찔러오는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내가 평소 그렇게 경멸하던 “숨어 사는 제자”가 보여준 담대함과, 헌신과, 그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자칭 사도라고 하는 나도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이 사람들이 보여주었다는 사실이 나를 한 없이 부끄럽게 합니다. 이들이 자신의 사재(私財)를 털어 예수님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 그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이 사람들이 <성경>의 예언을 응하게 하는 동안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나는 정말 제자일까요?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