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부활(1): 아직 어두울 때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20:1-10약 11분 분량
역사(歷史)와 사기(史記) 즉, 역사 기록은 분명 다릅니다. 역사를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본다면, 역사 기록은 주관적이며, 선별적이고, 또한 의도적입니다. 역사가는 모든 역사적 사실을 낱낱이 다 기록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여러 사실들 중의 일부를 선별해서, 자신의 목적에 맞도록 배합하고 배열해서, 그의 청중이나 독자들에게 들려줍니다. 따라서 <성경> 이야기 속에 내가 궁금해 하는 내용들이 빠져 있다고 해서, 그 이야기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고 한다거나, 또는 <성경>의 역사 기록을 기초로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역사 기록에 관한 무지(無知)를 드러내는 짓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야기>는 차원이 다릅니다. ‘요한’ 화자(본문에서 “그 다른 제자”로 등장하는 인물)는 이곳에서 자신의 <부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면서 이례적(異例的)으로 그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이야기의 끝 부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물론 이 진술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록 목적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부활 이야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부활을 믿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의 이야기는 재판정에서의 진술처럼 누구에게나 분명하고 명쾌하여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부활 보고서”를 작성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보고서가 아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도 기존의 그것과는 정 반대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가 보아도 단순하고 명쾌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만들어야 할 텐데, 평범한 독자라면 그의 <부활 이야기>를 읽고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 할 수도 있겠습니다. 도무지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변증하고 변론하려고 이 글을 쓴 것 같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나마 주의 깊은 독자라면 복선(伏線)이나 암시(暗示) 같은 것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그의 <부활 이야기>는 운전에 비유하자면, 오히려 역주행(逆走行)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는 마치 태초의 <창조 이야기>를 닮은 모습입니다(우리는 본 복음서의 서막도 태초의 창조 이야기의 서술 패턴을 따르고 있음을 관찰한 바 있습니다). 창조는 어둠과 혼돈과 공허 가운데서 시작한 바 있습니다(창 1:2). 이것은 창조 직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마다, 육일 간에 걸쳐 빛과 질서와 그리고 충만함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재창조 이야기” 즉 <부활 이야기>도 이러한 패턴과 유사합니다. 그는 네 개의 에피소드를 선별하여 시간대 별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즉 새벽 어두움 가운데서 시작하여, 아침에 이어 저녁, 그리고 일주일 후의 이야기로 나아갑니다. 그 절정은 물론 일주일 후의 에피소드에서 나타납니다.
<부활 이야기>의 서막(序幕)은 “안식일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열리고 있습니다(1절). 그렇습니다. 아직 어두울 때라고 말했습니다. 달리 표현해 보자면, “어둠침침하여 사물에 대한 식별(識別)이 어려울 때”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살인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 증언을 한답시고, “그 사건이 있던 시각은 어둠침침하여 누가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을 때였는데”라고 말하는 식입니다. 잘 보이지도 않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증언을 할 수 있다는 말일까요? 그러니까 이 사람의 증언은 처음부터 신뢰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증인은 자신의 증언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모습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여인이 어두움 가운데서 본 것이라고는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뿐이었음에도,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다”고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이 결론은 지나치게 비약적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당황한 ‘막달라 마리아’는 과연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기나 했을까요? 그리고 “빈 무덤”이 과연 그의 결론을 지지해줄 수 있을까요? 어떻게 “빈 무덤”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디론가 옮겨갔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증언 자체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증인 자신이 더 문제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여인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인의 증거는 증거로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기에 더하여 이 여인은 지금 홀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증언으로서의 효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적어도 두세 사람의 일치된 증언이 있어야 합니다(참고. 신 19:15).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이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그날 어둔 새벽에 동굴을 찾아갔던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니었다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마가복음>은 ‘막달라 마리아’ 외에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도 함께 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막 16:1-3). 만일 <마가복음>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안을 한 번 들여다보고는 다른 여인들보다 먼저 그 자리를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 여인이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보고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 16:7).
그러나 화자의 관심사는 누가 무덤 동굴에 갔느냐에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 문제라면 공동체 안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두들 아는 정보를 굳이 상기시킬 필요성은 없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공동체의 설교자는 회중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들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화자의 관심사는 ‘막달라 마리아’가 두려움에 떨며 전하는 빈 무덤에 대한 묘사에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전했습니다: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당시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강력한 암시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는 도둑이나 또는 대적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굴해갔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견 ‘요한’ 화자가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를 <부활 이야기>의 증거로 채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많은 학자들이 이 견해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논증에 관해서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 ‘프랭크 모리슨’의 <누가 돌을 옮겼는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 즉 “빈 무덤”에 관한 증언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소극적 증거가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즉 “빈 무덤”의 증언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나돌던 이른 바 “도난 설”(참고. 마 28:13-15)에 대한 강력한 반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체 도굴은 로마 시대 당시 사형에 준하는 범죄행위였다고 합니다. 이를 금하는 로마 황제의 칙령의 복사본이 ‘나사렛’에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현실이 이러한대 과연 누가 사형을 무릅쓰고 시체도굴을 감행했겠는가?” 이것이 화자가 던지는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회의론자들은 부활을 쉽게 믿는 자들을 매도할 때, 무엇이든지 쉽게 믿는 순진무구한 종교적 촌뜨기라거나, 또는 자기네 종교를 퍼뜨리기 위하여 당치도 않는 부활 이야기를 꾸민 아주 교활한 음모자라고 규정해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듯이, 정작 부활을 가장 먼저 부인하고 믿지 못하겠다고 했던 자들이 ‘막달라 마리아’나 사도들과 같은 단순하고 무지한 ‘갈릴리’ 촌뜨기들입니다. 그러니 부활은 이들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이른 바, “음모 설” 또한 설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화자는 그의 변론에 힘을 더하기 위한 목적인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빈 무덤의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를 듣고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동굴로 달려가서 본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두 사람이 달려가는 과정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예컨대, “그 다른 제자”는 왜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동굴에 먼저 도착했는지, 왜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가 오기를 기다렸는지, 동굴 안에 세마포가 놓였다는 사실을 왜 ‘베드로’에게 알려주지 않았는지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3-5절).
중요한 사실은 두 사람이 발견한 것이 단순히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수의(壽衣)와 머리를 쌌던 두건(頭巾) 그 이상이라는 점입니다. 즉 이것들이 그냥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시체를 싸고 있던 형태 그대로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6-7절). 이 장면은 소위 “도난 설”에 대한 또 다른 반증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중세 신학자 ‘크리소스톰’(Chrysotom)은 반듯하게 놓여있는 예수님의 수의와 머리 두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면, 힘들여 수의와 머리 두건을 벗겨, 그것들을 원래의 모습대로 가지런히 놓아두고 떠나는 수고는 왜 했겠는가?” 지당한 말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시체는 가져가면서 값비싼 몰약과 침향은 왜 두고 갔을까?”
맞습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의 화자는 가지런히 놓인 수의와 두건을 부활의 증거로 사용하고 싶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점을 백 퍼센트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즉 빈 무덤 안에 남겨진 수의와 두건의 상태가 부활의 증거로서 그렇게 중요했다면, ‘베드로’는 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그 다른 제자”가 보고 깨달았던 의미를 ‘베드로’는 왜 놓쳤던 것일까? 누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 질문과 관련해서, 화자의 의도가 더 단순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즉 적어도 수의와 두건에 관한 한, 그가 방점(傍點)을 둔 것은 그것들의 상태가 아니라, 예수님이 더 이상 그 안에 둘려 싸여 있지 않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은 주님께서 죽음의 수의를 영원히 벗어던지고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른 제자”가 뒤에 남겨진 수의와 머리 두건만 보고서 주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그는 아마도 자신이 직접 기록한 ‘나사로’의 소생(蘇生)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을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이야기를 부활을 예고하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한 바 있습니다. 죽어 썩어가던 ‘나사로’가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에 되살아나서 동굴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상태는 수의와 두건을 그대로 두른 채였으며, 따라서 이 세상에서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것들을 풀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그것들로부터 빠져 나왔으니, 부활의 표적으로 받아들이기에 결코 주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너무나 간단명료한 이 사실이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실제 단정하게 정리된 수의와 머리 두건을 먼저 발견한 이는 자신이었건만 그 앞에 벌어진 장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 표적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종의 불가사의(不可思議)였습니다. 같은 불가사의라도 “그 다른 제자”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불가사의입니다. 즉 그는 세마포와 머리 두건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는 믿었습니다(8-9절)!
그런데 여기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두 구절이 있습니다(8-9절). “그 다른 제자”가 보고 믿었다고 해 놓고서는 곧바로 그들(즉 제자들)이 <성경>을 제대로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토를 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믿음이 아직은 미숙하고 불완전한 수준에 머문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불필요한 주장일 뿐입니다. 여기사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제자들의 “믿음의 결여”가 아니라, “<성경>에 대한 “몰이해”(沒理解)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제자들이 ‘메시아’의 사역과 관련하여 <성경>의 예언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은 ‘엠마오’의 두 제자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눅 24:25-27, 32),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참고. 눅 24:44-47). 당연히 “그 다른 제자”와 ‘베드로’도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9절에서 복수형 “그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그 다른 제자”가 이해하고 있는 것을 ‘베드로’를 포함한 나머지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서막의 마지막 표현 역시 흥미롭습니다. 즉 두 제자가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입니다(10절). 엄청난 사실을 목도했음에도 그냥 집으로 돌아가다니요! ‘베드로’야 그 의미를 몰랐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다른 제자”는 이럴 수는 없습니다. 물론 집으로 돌아가 그가 모시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빈 무덤”에 관하여 보고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제자들에게도 체험담을 나누었을까요? 행여나 그랬다 하더라도, 과연 다른 제자들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을까요? 이들이 누굽니까?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고서도 믿지를 못했던 자들이 아닙니까(눅 24:36)!
이런 제자들에게 굳이 말도 안 되는(?) 주님의 부활을 믿도록 강요하기보다는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란 자신의 믿음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가 과연 언제 올까요? 언제 쯤 그 일이 가능하게 될까요? 남은 부활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만, 그 가능성을 점쳐 보자면 처음 서막의 분위기만큼이나 희미하고 어두울 것이라는 전망이 듭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곧 불가능을 믿는 것이기에, 적어도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부활의 역설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가능한 일은 꿈꾸지 않습니다. 아니 꿈 꿀 필요가 없습니다. 가능하니 그냥 실천에 옮기면 실현될 것입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만, 이 말은 조건적입니다. 즉 “실현 가능한 꿈은 이루어진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부활은 그것을 믿는 안 믿든 얼마나 멋지고 황홀한 일인가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하니 말입니다. 혹시 우리의 화자가 이점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즉 “당신은 부활을 원합니까? 당신은 진정 부활을 필요로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