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십자가(7): 옆구리를 찔리심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9:31-37약 11분 분량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꾼으로 불리는 조희팔이 최근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무려 수 조원의 사기를 치고 중국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에 그의 최 측근이 중국 공안 당국에 검거되어 한국으로 압송되면서 그의 죽음을 놓고 다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에게 사기를 당한 수백 명의 피해자들은 그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어 관 속에 누워있는 모습까지 수년 전에 공개되었음에도 이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워낙 희대(稀代)의 사기꾼이라, 장례식 장면도 다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해대책위원회는 조희팔이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믿으며, 그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 여부를 놓고 사회적 문제가 된 사례는 또 있습니다. 천 경자 화백의 경우입니다. 얼마 전 그분의 추도식이 열렸습니다. 그분의 명성으로 본다면 추도식의 규모가 사회장(社會葬) 정도는 되었어야 한다는 생각인데, 아주 조촐했습니다. 그런데 이 추도식이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천 화백이 과연 죽었는지, 죽었으면 언제 죽었는지, 그리고 그 묘지는 어디 있는지, 일반에게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천경자 화백이 누구입니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삼대 미술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입니다. 그런대도 그녀의 죽음은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천 화백을 마지막까지 모시고 있었던 그녀의 장녀입니다. 그런데 이 딸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도무지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도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도 그의 죽음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참고. 고전 1:23). ‘유대’인의 분노는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다른 이도 아닌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요설(饒舌)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성경>에서도 “십자가에서 죽는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단언하고 있지 않습니까(신 21:22-23)! 그러니 이단(異端)도 이런 이단이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시 ‘헬라’인, 즉 이방인들은 그분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다고 합니까? 역시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의 신화(神話)에는 신의 아들이 죽는 일 따위는 결코 없습니다. 신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존재 아닙니까? 그러니 만일 예수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죽지 않았어야 하며, 정말 죽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성경>에서도, ‘헬라’인의 <신화>에서도, 이방인의 이성(理性)의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주장이 설 자리는 없어 보입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당시 교회 안에는 영지주의(靈知主義)라 부르는 이단 사상이 침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이원론(二元論)의 한 아류로서, 예수님께서 인성(人性)과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속된 육체를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육체가 없으니 죽음도 당연히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당시 ‘요한’ 공동체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로 구성된 공동체였다고 가정해 볼 때, 교인들의 믿음은 이래저래 위기적 상황에 처해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두텁다 해도, 그리고 아무리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설교자가 훌륭한 설교를 전한다 해도, 그 때나 지금이나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는 일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쉬운 법입니다. 선동가(煽動家)의 잠언에 이런 말이 있다 합니다: “거짓말도 계속 들으면 진리로 들리는 법이다.” 악마의 유혹도 그렇겠지요? ‘아담’이 단 한 번의 유혹으로 ‘사탄’에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은 그럴듯하면서도, 집요했을 것이라는 것이 본인의 추측입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점점 존재감을 상실해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요한’ 화자는 이미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기록한 바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19:30). 그것도 다른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목격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참고.19:26).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직접 보았다는데. 그러나 그는 같은 이야기를 또 하고 있습니다. 마치 책의 부록을 쓰듯, 또 다른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피와 물. 군인들의 기이한 행동과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터져 나온 “피와 물”에 관한 기록이 그것입니다. 이 내용은 일견 불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 <공관복음>에는 없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과연 그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의 의도와 관련해서 추측해 본다면, 사실 이 장면은 앞 장면과 시적(詩的) 반복 내지는 유사병행(類似竝行)을 이루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앞 장면의 요점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봅시다. 두 곳입니다: (1)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내가 목마르다 하시고”(28절); (2) “그의 영혼이 떠나가시니라”(30절).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장면에서도 화자의 의도는 동일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분은 정말 죽었다; 둘째, 그분이 죽은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화자는 그 피와 물이 그냥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이들 무지한 군인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서 터져 나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미 확실하게 죽어있었음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만일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기색이 있었더라면, 군인들은 예수님의 다리를 꺾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그들을 보낸 것은 예수님의 다리를 꺾으라는 것이었지,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옆구리를 찌른 것은 나름대로 확인 사살을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창으로 찔러 확인사살까지 했으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즉 예수께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죽었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군인들도 확인했고, 화자 자신도 이 사실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는 이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만일 그분이 진정으로 죽지 않았다면, 부활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지도 않았는데 무슨 부활이 있겠습니까!
사실 그분의 부활을 놓고 역사적으로 온갖 억측과 이론들이 난무해 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컨대, 그분은 잠시 졸도했을 뿐이며, 동굴 무덤 속의 냉기(冷氣)에 다시 깨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한 것처럼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즉 그분은 소생(蘇生)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화자는 힘주어 말합니다: “그분은 정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정말 부활하신 것이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돌아가신 예수님 옆구리에서 터져 나온 “피와 물”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매혹적인 해석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혹자는 물과 피가 교회에서 중요한 두 가지 의식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물은 침례(浸禮)를, 그리고 피는 성찬(聖餐)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으니, 이와 같은 해석은 나름대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에서 “피와 물”을 교회를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했다는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럴 듯하지만 잘못된 해석입니다.
더 기막힌 해석도 있습니다. 즉 ‘하와’가 ‘아담’의 허리 즉 갈비뼈에서 나온 것처럼, 교회도 두 번째 ‘아담’ 그리스도의 허리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해석은 ‘알레고리’, 즉 풍유적(諷諭的) 해석의 한 전형(典型)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런 식의 해석에 환호합니다. 경건하게 들릴 뿐만 아니라, 신비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물론 ‘요한’ 화자를 포함해서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을 이처럼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 대가(大家)들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후대의 독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약>저자들이 <구약>을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것이 해석학적으로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 해석이 <신약>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을 해석함에 있어, <신약>이 해석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만 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요한’ 화자는 로마 병정들이 보여주는 이상한 행동(한 일과 하지 않았던 일)은 <구약>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로 그는 <구약>의 두 본문을 인용하면서, 이들을 순전히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화자가 인용하고 있는 <성경>의 두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 하도다”(시 34:20);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슥 12:10상). 이 두 본문이 정확하게 어떤 역사적 배경 하에서 기록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화자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豫表)하고 있다고 단언합니다. 자의적(恣意的)이고 독단적인 해석임에 분명하지만, <신약>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 본문은 각각 부정적이며, 긍정적인 측면에서 군인들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군인들이 하지 않았던 행동에 대해서, 그리고 <스가랴>는 그들이 실제 취했던 행동에 대해서입니다. ‘빌라도’의 명을 받은 군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적의 다리와 함께 예수님의 다리도 꺾으려고 왔던 것이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처음의 의도와는 정 반대로 행동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이 성취되는 방식이 참으로 아이러니 그 자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들 군인더러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라고 했던가요? 따지고 보면 원인 제공자는 결국 ‘유대’인들이 아닙니까? 그것도 율법을 지키고자 했던 열렬 ‘유대’인들 말입니다. 그들이 먼저 나서 십자가에 있는 시체들의 다리를 꺾어 치워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참고. 31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율법은 다름 아닌 유월절에 관한 규례입니다. <신명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2-23).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의 요청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로마의 관례에 따르면, 십자가형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는 곧바로 끌어내리지 않고 그대로 몇 날이고 십자가 위에 두어, 독수리 떼들이 와서 파먹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랬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빌라도’에게 와서 시체들의 다리를 꺾어 죽음을 재확인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빨리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리가 부러지면 온 몸을 지탱시켜주는 횡격막이 아래로 늘어져 힘을 쓸 수가 없어 더 일찍 사망에 이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이며 신앙적인 것입니다. 이제 막 유월절이 시작되려는 시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로마인들보다 더 고상하고 진보된 민족이라 해야 합니까? ‘스펄전’ 목사님도 “인간의 양심이 죽은 곳에서 종교적 양심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유대’인들의 이러한 모습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자비가 아니라, 위선이고, 자가당착(自家撞着)입니다. 이율배반(二律背反)도 이런 이율배반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그 율법을 주신 자를 죽인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음모의 희생양. <스가랴>의 예언은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중요한 증거로 채택했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이나 <계시록>에서도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스가랴>는 “찔린 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후회와 애통 가운데서 그렇게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회나 애통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은총과 성령을 부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참고. 슥 12:10). <마태복음>이나 <계시록>에서도 그 “찔린 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애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인자(人子)가 다시 올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애곡이 뉘우침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추측건 대, <마태복음>이나 <계시록>에서 강조점이 종말에 있을 “최후의 심판”에 있다면, <요한복음>에서는 “현재의 구원”에 방점(傍點)을 두고 있는 듯합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유월절을 완벽하게, 그리고 영원히 성취시켰을 뿐만 아니라(참고. 히 9:25-26), 두 번째 출애굽을 통해서 “종말의 소망”을 완성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들리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요 3:14). 두 번째 출애굽이 첫 번째와 다른 점은 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유월절의 양”으로 짐승이 아닌 자신을 바쳤다는 사실입니다(참고. 히 9:12).
이 마지막 유월절의 가장 큰 비극이자 아이러니는 정작 하나님의 어린 양을 드린 자들은 그 피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세운 음모의 희생양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를 보고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화자가 이미 선언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