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37과
축복을 돌려줌
김태정 목사창세기 32:3-33:20약 113분 분량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33:10상)
본문은 <야곱 이야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분수령이자 절정에 해당하는 곳이라 할 만 합니다. 극적인 “만남”과 심오한 “변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 속에는 새로움 뿐만 아니라 “회복”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만남”의 결과였습니다. “야곱과 하나님의 만남”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하게 하였고, “에서와 야곱의 만남”은 원수를 형제로 회복시켜주었습니다. 갈등과 긴장이 변하여 용서와 화해로 용해되고 있습니다.
혹시 “에서와 하나님의 만남”은 없었을까요? 그의 태도가 너무나 돌변해 있기 때문에 던져보는 질문입니다만, 화자는 이 대목에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 역시 “야곱과 하나님의 만남”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빈손으로 형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그가 훔친 “아버지의 축복”을 되돌려줌으로써, 화해의 근거를 마련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화자는 일련의 제의적 용어들을 구사함으로써, “희생 제사를 통한 대속”이라는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드러나고 있습니다. ‘야곱’의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새롭게 다가와 있게 된 것입니다. 관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는 비단 한 개인 이스라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스라엘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그 모든 자들에게도 해당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를 단순히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섭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화자는 후대의 교훈을 위해서 또 다른 요소를 더하고 싶은 듯합니다. 다름 아닌 “야곱의 씨름”이 그것입니다. 일견 낯설기도 하고 신비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 에피소드를 구태여 소개하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야곱’과 ‘이스라엘’의 두 이름이 갖는 동질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야곱’은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변하였으며 무엇이 변하지 않았습니까?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새로운 에피소드의 핵심 내용은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만나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야곱 이야기>의 벽두에 살펴보았듯이 전체 <야곱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13개의 장면 중에서 열한 번째로서 세 번째 장면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도표 참고):

그런데 앞의 여러 에피소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본문의 범위와 단락 또한 결정하기가 간단치가 않습니다. 본문의 시작과 관련해서는 앞 과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 없어 보입니다만, 이번에도 결말 부분이 학자들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결말을 정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해당 구절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6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17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33:16-17).
18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33:18-20)
결론만 정리하면, 논란의 핵심은 33:17을 이야기의 결말로 삼고 나머지 부분 33:18-20을 새로운 이야기 단위로 볼 것인지, 아니면 33:18-20까지를 포함해서 이야기의 결론으로 삼을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두 단락 모두 지명과 관련해서 기원론적인 언급으로 끝을 맺고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이야기의 결말로 삼기에 적절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의 핵심은 두 번째 단락 33:18-20의 내용이 과연 ‘세겜’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앞의 이야기에 대한 결론으로 보아야 할지에 있습니다. 이 질문과 관련해서 18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세겜’은 ‘야곱’의 전체 여정(旅程) 중의 한 장소로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이어지는 19-20절의 내용은 새로운 이야기라기보다는 이 여행 이야기를 조금 상세하게 덧붙여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식의 서술 방식은 <창세기>의 다른 여행 이야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이기도 합니다(참고. 12:6-9; 35:16-22). 따라서 이 단락의 문학적 기능은 34장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에피소드를 연결해주는 일종의 전이구절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나(12:6-9) <야곱 이야기>의 결말 부분(35:16-22)에서처럼, 이번의 경우에도 18-20절의 내용을 포함시킴으로써, ‘야곱’이 방랑생활의 최종 목적지이자(27:45; 30:25; 31:3, 13)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돌아오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숙곳’이 약속의 땅에 밖에 있는 지역이라면, ‘세겜’은 그 땅 안에 있는 지역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그가 이 땅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은 “벧엘의 서원”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강한 암시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야곱’이 약속의 땅 밖에서 상주하는 것으로 설정하다면, 신학적인 관점에서도 이야기의 적절한 절정으로 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래저래 “지리에도 신학이 있다”는 이론이 다시 한 번 재확인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이론을 증명이라도 하듯 화자는 ‘야곱’이 ‘세겜’에 도착하여 제단을 쌓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행동을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하자말자 보여주었던 행동(12:5-9; 13:3-4)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를 매장하기 위하여 ‘가나안’ 지역에 땅을 샀던 것처럼(23장), ‘야곱’ 역시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3:18-20의 내용을 이런 식으로 이해할 때, 단조롭기도 하고 흥미진진함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 구절이야말로 “야곱의 귀향”과 관련해서 아주 적절하고 인상적인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결론은 조만간 그 땅에서 일어날 사건을 예고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창세기>의 여타 이야기에서 자주 만나는 화자의 수사적 기법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참고. 4:25-26; 9:18-29; 32:1-2). 본문은 일곱 개의 장면으로 세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본문의 구조나 각 장면의 주제는 바로 직전의 에피소드의 그것들과 아주 흡사하다는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첫 두 장면을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장면들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할 뿐만 아니라, 두 이야기에서 절정은 모두 다섯 번째 장면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 한 일입니다. 이야기의 두 주인공이 어색한 만남을 하고 있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또한 위에서 밝힌 것처럼, 이 두 이야기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시적 유사 반복을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과 주제에 있어서도 이전의 이야기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32:3에서 ‘에서’를 가리켜 “그의 형 에서”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이전의 이야기들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 25, 27장). 또한 ‘야곱’이 그의 종들에게 지시하는 말 중에서 그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다”는 언급(32:4)이나, 또 그에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다”는 언급(32:5) 등도 이전의 이야기들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그의 형 ‘에서’가 40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그를 만나려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두려워 떨고 있는 모습은(6-8절), 이전에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참고. 27:41-45). 그리하여 ‘야곱’이 떨며 기도하는 중에 “이전에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떠나라고 명령하였다”(9절)고 말하고 있는 대목도 직전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바입니다(참고. 31:4, 13; 28:13-15). 이어지는 내용 중에서도 “그가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강을 건넜으나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다”는 언급(10절)은 그가 오래 전에 형을 피해 고향을 떠나던 이야기에서부터(28장) 외삼촌 집에서 지내면서 마침내 크게 번성하기까지의 모든 이야기(30-31장)를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12절에서 ‘야곱’이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벧엘의 언약”(28:13-14) 뿐만 아니라 “이삭의 축복”(28:3-4)까지 기억나게 해줍니다. 그리고 ‘야곱’이 그의 형을 달래기 위하여 준비한 엄청난 분량의 선물을 통해서(13-21절) 그가 속죄 받아야 할 잘못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27장). ‘야곱’의 아내들과 자식들의 목록(32:22; 33:1-2)을 통해서도 이전에 ‘라반’과 함께 있을 때의 일을 상기시켜주고 있는가 하면(29:15-30:24), 그가 형 앞에 엎드려 절하고 있는 모습은 이전에 ‘이삭’의 축복을 연상케 합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겠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27:29). 물론 이러한 ‘이삭’의 축복은 원래 ‘야곱’이 아니라 ‘에서’를 위한 것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본문 이야기 내내 ‘야곱’은 스스로를 ‘에서’의 종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야곱’이 천사와 힘든 씨름을 벌이면서 요구했던 것이 축복이었습니다만(32:26, 29), 정작 형에게 선물을 주면서 하는 말은 “형을 위해서 준비한 그 자신의 축복”이라는 것이었습니다(33:11). 이처럼 그는 교묘한 말로 이전에 형으로부터 훔친 축복을 되돌려 주려하고 있습니다(참고. 27:35). ‘세일’이라는 지명(33:16)도 ‘에서’의 외모 즉 “털이 많다”(세일)는 의미로 이전의 이야기를 통해서 익히 알려져 있는 이름이기도 하며(참고. 27:11, 23), 본문의 결말을 예고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즉 그는 후에 이곳에서 거주하게 될 것입니다(36:8-9). 그리고 ‘가나안’이나 ‘밧단 아람’(33:18) 등과 같은 지명들도 ‘이삭’과 ‘야곱’ 이야기에서 등장한 바 있으며(28:2, 5-7),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예고해 주기도 합니다(35:6, 9). 본문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고 있는 ‘벧엘’(33:20) 역시 ‘야곱’이 나중에 이곳에서 다시 제단을 세우는 이야기(35:1, 3, 7)를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상관관계를 살펴볼 때, <야곱 이야기>는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고,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부차적인 일련의 에피소드들뿐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본문의 형식이나 내용 외에도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요소는 또 있습니다. 이 역시 <창세기> 화자가 그동안 즐겨 사용해 오던 수사적 기법으로서, 예컨대 핵심 단어들에 대한 언어의 유희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음 문장에서 세 개의 단어들은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의 대표적 사례가 될 것입니다: “야곱(bqo[}y, 야코브)이 얍복(qBoy, 야보크) 강가에서 씨름할새(qb'a, 아바크)”(32:24-25).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대목에서도 흥미로운 언어의 유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동사 “(하나님과) 다투다(hr;c, 사라)”(32:28)에서 파생한 단어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브니엘’(laeWnP, 페누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인데(32:30-31), 화자는 이 단어에 대해서도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야곱’이 형을 만나서는 하나님의 “얼굴”(!ynIP, 파님)을 대하는 듯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33:10), 이전에 그가 하인들을 에서에게 보내면서 했던 당부 가운데 이미 ‘브니엘’의 등장을 예고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ynIP, 파님)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32:20). 또한 ‘야곱’은 ‘에서’와 대화할 때면 언제나 스스로를 “주의 종”(db,[, 에베드)으로 지칭하고 있는데(32:4, 10, 18, 20), 이 또한 그 자신의 이름 ‘야곱’(bqo[}y, 야코브)에 대한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어의 유희의 또 다른 형태로서 “철자 바꾸기”(anagram)를 들 수 있습니다. 즉 이야기 전체의 핵심어 중의 하나인 “은혜” 또는 “은총”(@j, 헨)으로서(32:5; 33:5, 8, 10, 11, 15)이 “예물”(hj'n]m, 민하)(32:13, 18, 20, 21; 33:10)이나 “무리(떼)”(hn<j}m, 마하네)(32:7, 8, 10, 21; 33:8)와 “철자 바꾸기”의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이처럼 단순히 철자만 그 순서를 바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티브 또한 역순(逆順)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야곱 이야기>의 전체 구조와 형식에서 보았듯이, 일곱 번째 장면에 해당하는 본문(32-33장)은 세 번째 장면(27장)과는 교차대구의 관계에 있습니다. 즉 세 번째 장면이 형제간의 갈등과 분리를 소재로 삼고 있다면, 일곱 번째 장면에서는 그 반대 요소인 만남과 화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속여 빼앗았다면(27:19-29), 이번에는 그것을 되돌려주고 있습니다(33:11). 앞의 이야기에서는 ‘이삭’이 ‘야곱’의 형제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만(27:29), 이곳에서는 형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는 ‘야곱’입니다(33:3). 그리고 흔히 “‘벧엘’의 환상”(28:11-22)과 “‘브니엘’에서의 천사와의 씨름”(32:22-32)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려합니다만, 전자(前者)의 사건은 오히려 “‘마하나님’ 사건”(32:1-2)과 더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두 장면은 상호 교차대구의 관계 외에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여러 부분에서 어휘나 용어들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구조와 관련해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 이야기의 전체 일곱 개의 장면 중에서 핵심이 되며, 중앙에 위치한 네 번째 장면(32:24-32)에 관한 것입니다(위 도표 참고). 모두들 동의하고 있는 바처럼 이 장면은 여러 가지 점에서 문제점들을 노정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1) 자료의 출처; (2) 핵심 주제; (3) 문학적 통일성; (4) 애매모호한 진술.
우선 이 단락의 출처와 관련해서는 <야훼 전승>에 속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핵심 단어로 꼽을 수 있는 “건너다”(rb'[, 아바르)나 또는 “얼굴”(!ynIP, 파님) 등이 이 단락에서도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32:17, 21-24, 31-32; 33:3, 10, 14). 본문 전체의 자료적 성격에 대해서는 자료와 편집 부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단락의 주제는 어떠합니까? <야곱 이야기>에서 또 다른 핵심어 중의 하나는 “축복”입니다(32:26, 290). <야곱 이야기> 전체적으로 본문 에피소드와 쌍을 이루고 있는 세 번째 장면(27장)에서는 ‘야곱’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그 축복을 얻어내고 있는데 반해, 이 장면에서는 그 축복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야곱’이 “천사”를 만나는 모습은 앞으로 그가 형을 만날 일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장면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용어는 “대면” 즉 “얼굴”과 관련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32:30)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33:10하)
무엇보다도 이 단락에서 들려주고 있는 기념비적인 사건은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일 것입니다. 그 스스로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시작과 결말은 이러합니다. 형의 축복을 거짓으로 가로 채었던 ‘야곱’이 형을 다시 만나는 문제를 놓고 깊이 고민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한 사람(실은 하나님 자신)이 그를 찾아왔고, ‘야곱’은 그를 붙들고 죽기 살기로 씨름하며 축복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 사람은 ‘야곱’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라고 하면서, 축복을 허락하고 떠나갑니다. 이 이야기의 주제가 <족장 이야기> 전체의 주제와 무슨 상관이라도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입니다. 인간의 계획이나 방법이나 뜻과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자유입니다. 이 장면에서 ‘야곱’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임의대로 자신의 방식과 시간표에 따라 조절하고 통제하는 인물로서의 ‘야곱’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절름발이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단락과 본문의 다른 장면과의 문학적 통일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과연 이 단락이 다른 자료에서 취하여 삽입한 것은 아닐까요? 본문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사실은, 이 단락은 그 자체로서 전형적인 민담(民譚)이나 <영웅설화>의 구성(plot)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이야기의 핵심 장면은 옛 이름이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는 부분인데, 두 주인공의 대화를 중심으로 이를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은 시적 유사 반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물으심(27절)
(2) 야곱의 대답(27절)
(3)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심(28절)
(1)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을 물음(29절)
(2) 하나님의 대답(29절)
(3)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로 바꿈(30절)
그리고 이 단락의 구성이 전형적인 <영웅설화>의 구성을 닮고 있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소재나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식의 구성은 기독교 시대 이전의 민담이나 영웅담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서, 따라서 이 단락의 내용을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전하고도 독립된 이야기 단위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대의 편집적 삽입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 점을 인정한다 하드라도, 원 자료를 크게 수정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장면은 다시 다음 세 개의 장면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구조를 통해서 화자의 주된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단락의 초기 전승의 형태와 관련해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예컨대, 혹자는 악마적 대적자가 강으로부터 주인공을 기습 공격하는 다른 유사한 민담들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본문의 초기 전승에 대한 힌트를 얻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야곱’이 대면한 상대는 ‘하나님’(엘로힘)이지 그 지역의 어떤 “신”은 아닙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야기 중에서 ‘야곱’이 실제 무엇을 경험했는지에 대한 진술 또한 분명치가 않습니다. 진술 자체가 다소 애매모호하고 신비에 싸여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가 꿈을 꾼 것인지, 기도 중에 환상을 본 것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한 가지 확실해 보이는 것은 그가 실제 싸움을 했다는 것이며, 이는 그가 환도 뼈로 인해서 절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32: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 자체는 어딘가 신비에 쌓여있습니다. 사실 모든 하나님과의 만남 자체가 항상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자료와 편집. 가장 오래된 “자료비평”의 입장에 따르면 본문은 거의 대부분 <야훼 전승>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는 논의는 Wenham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도서 1, 289쪽.
그러나 이후 학자들마다 자료의 구성을 놓고 다양한 이견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혹자는 지극히 적은 일부(33:18-20) 만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엘로힘 자료>라고 하는가하면, 또 다른 학자는 아예 그 부분마저 <엘로힘 자료>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후 “자료비평” 진영에서 <엘로힘 자료>설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는 듯합니다. 예컨대, 33:5, 10, 11 등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엘로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33장 대부분의 자료(33:1-17)가 ‘엘로힘’ 기자의 손길이 미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오히려 최근에는 <야훼자료>설이 다시 설득력을 얻어 32:3-33:17의 본문을 <야훼 전승>으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 출처가 의문시 되고 있는 33:18-20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는 이 본문이 적어도 <야훼 자료>는 아닐 것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엘로힘 전승>으로 모두들 인정하고 있는 35:1-5의 본문에 따르면 ‘야곱’이 ‘세겜’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반해, 그가 ‘밧단아람’으로부터 ‘가나안’에 도착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33:18의 구절은 <사제 자료>에서 온 것으로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비평> 분야에서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만으로 자료의 출처를 구분하는 일은 더 이상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으므로, 35:1-5의 본문을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엘로힘 자료>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따라서 33:18-20의 본문을 하나님의 이름만으로 특정 전승에 귀속시키는 것 또한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 본문은 어느 자료에도 속하지 않는 어떤 독립적이고 별도의 전승에서 유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용어나 어휘들, “장막을 치다”, “제단을 쌓다”, “이름을 부르다” 등은 <야훼 전승> 특유의 표현들로 규정하게 합니다(참고. 12:7, 8; 13:18; 22:9; 26:17, 20-22, 25). 더 나아가서 이 구절이 보여주고 있는 문학적인 기능 즉 이야기의 결론과 동시에 다음 이야기에 대한 예고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창세기>의 다른 <야훼 전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술 방식과 아주 흡사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탐색(32:3-6)
‘야곱’이 형을 만나기 위하여 첫 번째 취한 행동은 하인들을 형에게 보내서 그의 기분을 탐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들을 보내면서 자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필요 이상으로 겸손하며 장황하기까지 합니다. 형을 “내 주”로, 그리고 자신을 “주의 종”으로 부르고 있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4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를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32:4-5)
‘야곱’의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두 사람의 관계 즉 ‘에서’가 ‘야곱’을 섬기는 자가 되리라는 이전의 예언(25:23; 27:40)을 되돌려 놓으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형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외삼촌의 집에 머물면서 모았다고 하는 재물이나 재산의 목록입니다. 이들 목록을 보면 <아브라함 이야기>나 <야곱 이야기>의 이전의 에피소드를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만(12:16; 30:43), 이 부분에서 ‘야곱’이 의도하는 바는 형 앞에서 자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은혜”를 얻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은혜” 또는 “호의”로 번역하고 있는 이 히브리어 단어는 ‘헨’(@j)으로서 <야곱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33:8, 10, 15). 이 단어는 다른 곳에서 동사형으로 사용되면서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다”(33:5, 11).
‘야곱’의 간절한 소망은 형과 화해를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 단락은 독자들로 하여금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과연 그의 계획은 성사될까?” 이러한 독자들의 긴장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온 소식이라는 것이 희망적이기는 보다는 오히려 두려움만 더욱 가중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32:6)
사자(使者)들이 전해주는 소식은 ‘야곱’은 물론 독자들에게도 애매모호함만 더해줄 뿐입니다.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 것이 ‘야곱’을 공격하기 위함인지, 동생의 충성 맹세를 받아들일 요량으로 오는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만일 동생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면 사전에 알리지 않고 할 일이지, 왜 이들 사자들에게 미리 계획을 알려주어 동생으로 하여금 준비를 하도록 하는 것입니까? 무력에 있어서는 동생을 압도한다는 우월감에서 사전에 자신의 의도를 알려줌으로써, 동생의 두려움이나 초조함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래저래 궁금증과 긴장감만 더해갈 뿐입니다.
2. 준비(32:7-21)
두 번째 장면은 ‘야곱’이 두려움에 떨면서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여 그의 형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화자는 ‘야곱’이 취하고 있는 행동을 세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방어체제 구축(7-8절); (2) 기도(9-12절); (3) 형을 위한 예물 준비(13-21절).
방어체제 구축(7-8절). <성경>은 때때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의 감정을 설명하거나 서술하기보다는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상상해 보게 하거나, 느껴보도록 유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화자는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야곱’의 내면 세계를 오히려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7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32:7-8)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는 표현은 지극히 이례적인 것으로서, 예컨대 전쟁에서 패배를 당한 자가 경험할 수 있는 “극도의 공황 상태”에 대한 묘사로 볼 수 있습니다(참고. 삿 2:15; 10:9; 삼상 30:6). 그러나 ‘야곱’은 두려움 때문에 생각이 마비될 정도는 아니었나 봅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에서’의 공격으로부터 최소한의 것들은 지키기 위해서 일단의 조치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두 진영”으로 나누어 한쪽은 공격을 받더라도 나머지 한 쪽은 피신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야곱’의 행동을 묘사하면서 언어의 유희(遊戱)나 “철자바꾸기” 등의 수사적 기법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야곱’이 나눈 “두 진영”(군대)은 그가 직전에 묵었던 장소 ‘마하나임’(즉 “두 진영”)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32:1-2). ‘마하나임’은 문자적으로 “두 진영(군대)”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천사들 즉 하나님의 “군대(진영)”(!yIn"j}m', 마하나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두 자음(字音) “ㅎ”과 “ㄴ”은 “은혜” 또는 “호의”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헨’(@j)을 연상하도록 함으로써, ‘야곱’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그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일 것인데,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기도(9-12절). 예배자의 가장 간절한 감정은 기도 가운데서 드러나는 법입니다. 따라서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전체 에피소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핵심 단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웨스터만’(Westermann)은 이 단락을 <창세기> 31-33장의 절정으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웨스터만은 이 부분을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규정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에 따르면, 11절이 원래의 기도문이며 나머지 9-10, 12절은 후대에 삽입 및 확장한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보는 이유는 “야곱이 또 이르되”(9절상)는 통상의 기도문에서는 불필요한 진술로서, 편집자의 손길이 느껴지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설명에 대해서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Longacre’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기도문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기도자의 정서적 분출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장치로서, 현재 본문의 상황을 바로 그러한 시점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9절이나 1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약속”의 내용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할 만 한 정당한 사유가 없습니다. 이들 약속은 <족장 이야기>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이기 대문입니다.
9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32:9-12)
‘야곱’의 간절한 기도는 그가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에서부터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9절상).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장황하게 수식어를 동원하고 있는 경우는,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 경우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특히 인간이 하나님을 부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야곱’이 지금 최대한의 수식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행하신 그 모든 일들을 상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에게도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즉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움은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9절하)에 순종한 결과 때문이라는 점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인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 자신의 해설을 덧붙인 것으로서 원래 하나님의 말씀(31:3)과는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32:9하)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31:3)
‘야곱’이 원래의 말씀에 추가로 덧붙인 부분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대목입니다. 추측컨대,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들에게 해주신 은혜를 은연중에 강조하면서, 그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대해주셨음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자 함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10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즉 그가 이곳에서 고백하고 있는 바는, 지팡이 하나로 시작했던 그의 방랑생활이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야 할 정도로 많은 소유를 거느린 부자가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고백,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는 <구약>에서 흔히 만나는 감상적인 기도의 전형(典型)으로 볼 수 있습니다(참고. 삼하 7:19; 창 19:19; 24:12; 시편의 기도들).
‘야곱’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아마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엄청난 “은혜”와 “호의”가 이제 내가 형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게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과연 그는 이제 기도의 핵심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형이 나를 죽이려 합니다. 나를 구해주십시오.” 형이 동생을 죽이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편에서 보자면 상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창 4:2-14). 그것도 무방비 상태의 여자나 어린 아이들을 잡아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께서도 아주 싫어하시는 범죄 행위로서 <율법>이나 <선지자>들이 하나 같이 금하고 있는 것들입니다(출 22:22; 신 14:29; 호 10:14; 말 3:5).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의 가족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신다면, 이는 그분의 속성에 심각한 타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이 주장하고 싶은 바도 이런 것일까요?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그는 하나님의 신실함에도 타격을 가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2절).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야곱’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그의 후손이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라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이 후손에 대한 약속을 언급하면서 그의 아버지 ‘이삭’이 죽음 일보 직전에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으로 살아나게 되었으며,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 ‘이삭’의 후손들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28:14). 그런데 지금 내가 잡혀 죽는다면 이 모든 약속은 어떻게 되며, 당신의 명예로운 이름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물(13-21절). 기도만으로 부족하다고 느꼈음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듣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그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마치 이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두었던 것 같은 모습입니다. 무엇입니까?
13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14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16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17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20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21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32:13-21)
형에게 줄 일련의 예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상당히 서두르고 있는 모습니다. 동양 사회에서 지위가 낮은 자가 그보다 지위가 높은 자를 만나러갈 때 예물을 가지고 가는 일은 하나의 관습이자 예의에 속한 일이라 특별히 문제 삼을 것도 없어 보입니다만, 그가 왜 이렇게 하고 있는지 그 동기가 분명치 않습니다. ‘야곱’ 스스로 앞에서 밝힌 바처럼, 이런 행동을 통해서 ‘에서’의 종임을 선언적으로 보이려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참고. 왕하 17:3; 호 10:6). 또는 이전에 형으로부터 훔친 축복을 되돌려주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참고. 33:11; 수 15:19; 삿 1:15). 아무튼 그의 동기가 무엇이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20절상).
그러나 그의 이런 행동은 그토록 열렬하게,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드리던 모습과는 전혀 딴 판입니다. “기도 따로, 행동 따로”의 철학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불신(不信)의 증거로 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칼빈’(J. Calvin)의 주장처럼, ‘야곱’의 기질로 설명해야 할까요? 즉 ‘야곱’은 기질 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참고. 신 20:3-4). 화자는 이런 궁금증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침묵”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되묻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이럴 경우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살아가면서 믿음과, 두려움과, 의심이 하나로 뒤범벅되어 본 적이 없는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러 ‘모리아’ 산에 오를 때에도 지금의 ‘야곱’과 유사한 내적 갈등을 통과하고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22:5).
‘야곱’은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예물”(hj'n]m, 민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은혜”(@j, 헨)와 두 개의 동일한 자음(字音)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로서 선물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거나 “환심을 사기 위한 수단”일 것이며(참고, 43:11; 삿 3:15), ‘야곱’ 역시 형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예물을 준비하고 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32:5; 33:8, 10). 그러나 “예물”(hj'n]m, 민하)은 또 다른 의미도 가지고 있는데, 희생 제물 특히 “소제”(cereal offering)로 번역하기도 합니다(레 2:1-14). 이런 점에서 ‘야곱’의 예물을 희생제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그가 한 말-“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rp'K, 카파르) 후에...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רצה, 라차흐)”-중에서 등장하고 있는 두 가지 핵심 단어는 <레위기>의 배경에서 볼 때, “속죄”(atonement)를 통한 “구속”(redemption)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예: 레 1:4). “구속” 즉 구원은 다른 말로 “화해” 또는 “화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야곱’ 실제 ‘에서’를 만나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33:10하)라고 말했을 때, 그는 형과의 화해를 하나님과의 화해와 같은 수준에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참고. 마 5:24; 요일 4:20). 화해란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결과를 “하나님과의 화평(화목)”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야곱’이 준비한 예물의 내용을 보면 형이 아니라 일국의 왕에게나 합당할 정도의 예물 수준에 해당합니다(14-15절). 그가 준비한 모든 가축들의 수가 도합 550에 이를 정도입니다. 다시 한 번 예물의 성격에 대한 화자의 시사점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각 가축 떼를 종류 별로 다섯 무리로 나누어 하인들로 하여금 이끌게 하고, 그들이 누군지, 그리고 누구의 소유인지 ‘에서’가 물어볼 때 다음과 같이 똑 같은 대답을 하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18절). ‘야곱’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이와 같은 공손한 대답을 다섯 번에 걸쳐 듣게 되었을 때 형의 심정에 무슨 변화라도 생기게 될까요?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화자는 두 번째 장면의 마지막에서 다시 한 번 ‘야곱’의 “예물”을 놓고 제의적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즉 그가 준비한 “예물”은 형의 진노를 달래기 위한 일종의 “속전”(ransom)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도 간혹 “속전”을 지불함으로써 사형을 대신하게 하는 법이 알려져 있습니다: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부과하면 무릇 그 명령한 것을 생명의 대가로 낼 것이요”(출 21:30). 따라서 ‘야곱’의 “예물”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화자는 두 번째 장면을 시작하면서 소개했던 두 단어 “예물”과 “무리”를 다시 한 번 언급함으로써, 이 장면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21절). 과연 ‘야곱’의 “예물”이 ‘에서’의 진노를 달랠 수 있을까? 아니면 한바탕 난리가 일어날 것인가? 이 두 단어 자체만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예단(豫斷)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3. 渡江(32:22-23)
단 두 절로 이루어진 세 번째 장면은 ‘야곱’이 어떻게 그의 가족을 이끌고 ‘얍복’ 강의 빠른 물살을 건너게 되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22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32:22-23)
이 강은 ‘요단 강’의 지류(支流)로서, 사해(死海) 북쪽 25킬로미터 지점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요단’과 합류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의 가축 떼들은 먼저 강을 건넜을 것이며, 그의 아내들과 자식들만 뒤에 남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장면은 두 가지 점에서 의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왜 대낮이 아닌 한 밤중에 강을 건너고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 그가 가족들과 함께 강을 건넌 후, 그 혼자 다시 돌아와 강 반대편에 혼자 남아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24절상). 화자는 이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만, 추측컨대 현재 그가 겪고 있는 복잡한 심리 상태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두려움과 불안함 등이 뒤엉켜 제대로 잠도 잘 수 없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도 없고... 이런 상황에서 나라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4. 대면 1(32:24-32)
네 번째 장면의 자료와 그 성격에 관해서는 앞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만, 이 장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스터리 일색입니다. 대답보다 질문이 더 많은 단락입니다. 시작부터 그렇습니다:
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32:24-25)
왜 지금 ‘야곱’은 다시 강 이쪽에 홀로 와 있을까? 어떤 책임감의 발로였을까? 어쩔 줄 몰라 불안해하는 심리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단순히 그가 천사의 공격을 받았을 때 아무도 그 곁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일까?
적어도 ‘야곱’의 편에서 보자면 그는 지금 “어떤 사람”으로부터 불시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건 “씨름”(qb'a, 아바크)을 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두 번 등장하고 있는데,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얍복’(qBoy, 야보크)과 ‘야곱’(bqo[}y, 야코브)에 대한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천사가 야곱과 씨름하다”는 문장을 이들 음성학적 관계만으로 재구성해보면, “천사가 야곱을 야곱하다”는 표현이 됩니다. 이 두 사람의 씨름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씨름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습니다. 물론 이 동사가 “껴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만(참고. 29:13; 33:4), 여전히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지금 ‘야곱’이 상대하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궁켈’(Gunkel)이나 ‘폰 라드’(von Rad) 및 ‘웨스터만’(Westermann) 등은 그가 가나안의 “강(江)의 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원전(原典)도 ‘야곱’이 “강(江)의 신”과 싸우는 이야기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주장이 일부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본문 중에서 ‘야곱’이 새벽이 되기 전까지 이 사람을 이겨 떠나려고 몸부림치는 대목은 고대의 전설이나 민담에서 흔히 취하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Eisfeldt가 올바로 관찰한 바 있듯이, 본문 이야기는 나중에 ‘야곱’이 상대하고 있는 자가 ‘엘’ 즉 ‘가나안’의 최고의 신임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의 이름이 ‘엘’이라고 해서 반드시 ‘가나안’의 신과 동일시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인간들과 대면하고 있는 미확인 대적자는 다름 아닌 ‘야훼’(주) 자신이거나 또는 그의 천사이며, <창세기>에서는 ‘야훼’(주)를 종종 ‘엘’과 동일시 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참고. Wenham, 295쪽).
화자는 그를 단순히 “한 사람(남자)”(vya, 이쉬)으로만 확인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나중에 ‘야곱’은 그가 하나님(엘로힘)인 줄 알게 되고(32:30), <호세아서>는 그를 천사라고 확인해주고 있기는 합니다만(호 12:5), 이곳에서 화자가 그를 단순히 “한 사람(남자)”로 부르고 있는 것은 ‘야곱’의 입장에서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를 방문하고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스스로 어떤 기적을 베풀지 않는 한, 유한한 인간이 이를 알아볼 수 없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그를 방문한 세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으며(창 18-19장), ‘기드온’ 역시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가 하나님의 천사인줄 몰랐습니다(삿 6장). ‘마노아’와 그의 아내도 ‘야훼’의 천사를 단순히 인자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만 알았을 뿐입니다(삿 13장). 이처럼 <구약>에서 하나님이나 천사와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습니다.
화자는 두 사람의 싸움이 새벽까지 계속되었다고 전합니다(24절하). ‘야곱’이 그를 공격한 자가 누군지 금방 알아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한 밤중에 그를 만났으니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겠지요. 한편 ‘해밀턴’(Hamilton)은 밤새 싸움이 계속된 것을 두고 ‘야곱’의 체력이 보통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유약하고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었던가요?). 참고: ‘해밀턴’, 330쪽.
비록 이십 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독자들은 ‘야곱’이 우물을 덮고 있던 돌을 옮긴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참고. 창 29:10).
이처럼 끈질긴 싸움의 결과는 어떻게 결판이 났습니까? 이 싸움에서 누가 이겼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도 화자는 계속 침묵과 신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독자들의 편에서는 해답을 25절에서 찾을 수 있겠으나, 이 문장은 <히브리 성경>에서는 주어와 목적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지 않습니다. 원문을 직역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그가 그를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그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그가 씨름할 때 그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더라”(25절). 다만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이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주어를 “어떤 사람”으로 그리고 목적어를 ‘야곱’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상의 난점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 이 문장의 주어를 초자연적인 존재로 인정할 때, “그가 ‘야곱’을 이길 수 없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인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일종의 신성모독이라고나 할까요. ‘야곱’의 편에서도 놀라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허벅지 관절을 단순히 만졌을 뿐인데도 그것이 어긋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화자가 이 사람의 행위를 묘사하면서 도입하고 있는 히브리어 동사 ‘[g'n’(나가)는 일반적으로 “만지다”, “닿다”, 또는 “대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이보다 더 강력하게 “세게 치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예컨대, ‘사탄’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욥’을 시험해야 한다면서 그가 가진 모든 소유를 치라고 할 때, 이 동사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욥 1:11; 2:5).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이와 유사한 강도를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곳은 수 9:19, 삼상 6:9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25절에서 가장 신비한 부분은 “허벅지 관절”(#K &rey:, 카프 야레크)이 과연 정확하게 신체의 어떤 부위를 지칭 하는가 일 것입니다. 화자는 24절에 이어 25절에서도 언어의 유희를 이어가고 있음을 봅니다. 즉 “관절”(#K, 카프)은 “씨름”(qb'a, 아바크), ‘얍복’(qBoy, 야보크), ‘야곱’(bqo[}y, 야코브) 등에 이어서 유사한 발음을 지니는 두 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qb/bq/bq/kp).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의 여러 곳에서 “허벅지”(야레크)는 성기(性器)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허벅지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이나(창 46:26; 출 1:5), 맹세나 서약을 할 때 상대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음으로써 그것이 삶과 죽음과 관련된 가장 강력하고 엄숙한 것임을 확증하기도 합니다(창 24:9). 그리고 “관절”(카프)은 “홈통” 또는 “구멍” 등을 뜻하는데, 이 역시 성기(性器)와 연관시켜보자면 “음낭”(陰囊)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이 낯선 사람이 ‘야곱’의 고환(睾丸)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신명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 한 사람의 아내가 그 치는 자의 손에서 그의 남편을 구하려 하여 가까이 가서 손을 벌려 그 사람의 음낭을 잡거든, 너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릴 것이고 네 눈이 그를 불쌍히 여기지 말지니라”(신 25:11-12). 마지막으로 난해한 대목은 이 싸움의 결과에 관한 진술입니다: “어긋났더라”([q'y, 야카). 문자적으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벗어나다”, “매달다”, 또는 “분리시키다” 등입니다만, 정확하게 어떤 상태를 묘사하는 것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아무튼 ‘야곱’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싸움을 포기하기는커녕 더 집요하게 상대를 물고 늘어지고 있으며, 상대로 하여금 마침내 입을 열어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내려하고 있습니다. 상대가 날이 밝자 떠나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32:26)
우리는 그가 왜 애초에 ‘야곱’을 공격했으며, 그리고 왜 지금 떠나려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양식비평의 대가 ‘궁켈’(Gunkel)이 소개한 이론이 한 때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 장면 속에는 ‘우르’(Ur) 문학의 이야기 형식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야곱’을 공격하고 있는 자는 낮에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밤에만 힘을 발휘하는 “밤의 마왕”이거나 또는 “강(江)의 정령(精靈)”입니다. 설령 ‘궁켈’(Gunkel)의 이론을 인정하고, 또한 최종 본문이 일련의 발전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즉 최종 본문 속에 남아있게 된 “새벽”에 관한 언급이 기능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해밀턴’(Hamilton)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고 있는 “새벽”이나 ‘얍복강’ 등의 단어가 ‘야곱’의 기질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고 기발하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즉 “새벽”이 낮과 밤의 중간 시점에 존재하고, ‘얍복강’이 가나안 땅과 이방인의 땅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마치 ‘야곱’이 기질적으로 거룩함과 추함 사이를 ‘요요’(yoyo)처럼 왔다 갔다 하는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를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규정하고 있기도 합니다(고전 3:1-3).
이 사람이 날이 새기 전에 그곳을 떠나려고 하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야곱’은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즉 한밤중에 누군가를 만났으나 아침에 되어서야 비로소 그 정체를 확인하게 된 경우를 말하는데, ‘레아’와의 만남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혼 첫날 밤 함께 한 여자가 사랑하는 ‘라헬’인줄 알았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레아’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놀라움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보라, 이 자가 레아가 아닌가!” 어쩌면 이번에도 그와 꼭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고, 다시 한 번 놀라움으로 외치게 될 것입니다: “보라, 이 자가 하나님이 아닌가!” ‘야곱’이 ‘에서’로 변장하여 아버지를 속일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변장하는 일쯤이야 왜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을 보지 않는 것이 신상에 유익할 것인데, 아무도 하나님을 보고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끈질김으로 말하자면 ‘야곱’ 아니겠습니까? 상대방이 거부하고 있고, 싸움 중에 상처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막무가내입니다. 한사코 그를 붙잡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집요함 때문에 그 사람의 정체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벽이 다가오자 아래 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듯이 ‘야곱’은 이 정체모를 사람에게 축복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가 원하는 축복의 내용이 무엇인지, 왜 이 시점에서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분명치 않습니다만, 아마도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얻을 수 없거나 구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두 번에 걸쳐 축복을 얻어낸 바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이처럼 끈질기게 매달림으로써 얻어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추측컨대, 그가 원하는 축복 중에는 상대방이 가진 완력(腕力)이나 힘도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인즉, 이제 곧 형과 그가 이끌고 오는 사백 명의 무리와 맞서야 하는 상황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장면에서 보여주고 있는 ‘야곱’의 행동은 경건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적어도 당장은 ‘야곱’의 요청을 무시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대답 대신 그의 이름을 물어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32:27상)
이 질문은 훗날 ‘모세’가 하나님에게 물었던 질문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 이보다 더 유사한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눅 8:30). 이 두 경우 모두에서 보듯이 묻는 자는 상대가 누군지 몰라서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위 두 경우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상대에 대해서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그의 상대가 누군지 모르고, 이 사람 또한 ‘야곱’이 누군지 잘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상대방의 질문에 대해서 ‘야곱’은 아마도 자기 이름을 알려주는 것 이상의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예컨대 자신의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 그리고 이름에 걸 맞는 자신의 기질(참고. 27:36) 등에 대해서 마치 “고해성사”(告解聖事)라도 하듯 술술 쏟아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제 그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있습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32:28)
이제 그는 더 이상 ‘야곱’이라는 이름에 늘 따라 붙어 다니던 불명예스러운 별명들, 즉 “발꿈치를 잡는 자”라든지 또는 “속이는 자” 등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어진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창 25:26; 27:36). 여기서 “다시는...부르지 않을 것이다”는 <히브리 성경>에서는 일종의 관용적 표현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예레미야>나 <에스겔> 등에서 일종의 영적 비유를 위하여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렘 3:16);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렘 23:7);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렘 31: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렘 16:14);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겔 18:3); 특히 <예레미야>의 다음 구절은 창32:28과는 구문론적으로 거의 동일한 표현으로서, 호칭과 관련해서 부정문에 이어 긍정문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그 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그들이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렘 3:16-17). 새로운 이름과 관련하여 더 상세한 설명은 Hamilton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새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새로운 이름은 새로운 미래, 새로운 운명, 그리고 새로운 성품과 직결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전에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그리고 ‘사래’가 ‘사라’로 이름이 바뀔 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야곱’이 한 개인의 이름이라면 ‘이스라엘’은 한 민족, 한 국가의 이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이름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습니다: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28절하). 이 구절에 따르면, 화자는 마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기원을 그날 밤에 있었던 한 특별한 사건에서 찾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지명이나 사람 이름의 기원과 관련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름의 기원을 주로 음성학적 유사성에서 찾아야지 어떤 역사적 사건과 정확하게 연계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점 ‘이스라엘’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 이곳에서도 일종의 음성학적 유희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이 문장에서 등장하고 있는 두 단어, ‘이스라엘’(laer:c]y)과 “다투다” (hr;c, 사라)는 그 발성(發聲)에 있어 아주 가깝게 들립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에 따르면 화자는 ‘이스라엘’을 “다투다”와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의미도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엘)이 다투시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는 유대인들의 신학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으며, 그 원래의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하나님(엘)이 다스리시다”(שׂרר, 스르), “하나님(엘)은 의로우시다”(ישׁר, 이스르), 또는 “하나님(엘)께서 고치신다”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설명들이 옳든 그렇지 않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야곱’의 새로운 이름은 그가 취한 행동에 방점(傍點)을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쟁투하였고 사람들과도 싸워 이겼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이름과 관련해서 ‘야곱’의 모든 허물들이 덮여 졌다든지, 또는 앞으로 그의 체질이나 기질이 변할 것이라는 무슨 특별한 보장을 주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야곱’이 하나님이나 사람들과의 거래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시사해주고 있는 의미, 즉 온갖 불리하고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투지나 집요함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로부터 끝내 받아내고야 마는 기질을 연상해 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새로운 이름은 이전의 이름에서 풍기는 것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야곱’이나 ‘이스라엘’ 모두 일종의 “거래”나 “흥정” 등을 연상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새로운 이름은 무슨 영광스러운 훈장이라기보다는, 싸움의 결과로 얻은 선물 내지는 보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새로운 이름은 후손들을 위한 교훈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교훈일까요? <신약>에서도 이와 유사한 교훈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함께 찾아봅시다.
네 번째 장면의 결말은 그 시작만큼이나 신비롭습니다: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32:29)
‘야곱’이 떠나려는 사람을 붙잡고 이름을 알기를 청하였으나, 그는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합니다(사실 28절에서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 암시해준 바 있습니다). 자기 이름이 남용되는 것이 싫었음일까요?(참고. 삿 3:17-18; 출 20:7). ‘야곱’을 축복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처음 야곱을 찾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 어두움 가운데서 홀연히 사라져버립니다. 우리는 그가 ‘야곱’에게 무엇을 축복해 주었는지 알 지 못합니다.
‘야곱’은 그가 원하던 대답은 얻지 못했지만, 그곳을 ‘브니엘’(laeWnP) 즉 “하나님의 얼굴”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32:30)
사실 ‘야곱’이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한 것은 이번으로 세 번째입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이를 새로운 이름으로 그가 머물던 장소를 기념합니다: ‘벧엘’(28:19); ‘마하나임’(32:2); ‘브니엘’(32:30). 그러나 이번에는 지난 두 번의 경우와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현현이 모두 천사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만, 이번에는 하나님과 직접 얼굴을 “대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는 죽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화자나 야곱 모두 강조하고 있는 바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기적적인 일임에 틀림없습니다(참고. 출 33:20; 사 6:5). 그러나 ‘야곱’은 지금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핵심 단어 중의 하나가 “얼굴”(!ynIP, 파님)입니다. 지금 ‘야곱’의 (환희)의 고백 중에서도 바로 이 단어가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의 고백은 지난 밤 그가 하나님에게 드렸던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11절). ‘야곱’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형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형의 얼굴을 대면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고백은 그의 기도의 응답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환호를 다른 말로 표현해보자면 이런 것이겠지요: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서도 살아남았거늘, 어찌 형의 얼굴을 대면하고 살아남지 않을 수가 있을까보냐?”
이 모든 일이 끝나자 찬란한 아침 해가 기다렸다는 듯이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32:31)
마치 그에게 인생의 새 아침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이름으로 새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이름만이 아닙니다. 새로운 걸음걸이(즉 저는 걸음) 역시 나머지 그의 일생동안 함께 할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이름이 새로운 운명을 예고해주는 것이라면, 새로운 걸음걸이는 하나님과의 대면을 늘 기억나게 해 줄 것입니다. 새로운 이름은 그가 하나님과 힘써 싸운 결과 얻은 보상이라면, 새로운 걸음걸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남겨주신 육체의 표적입니다. 새로운 이름이 그의 강인함과 끈질김으로 얻어낸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새로운 걸음걸이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앞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존적(自存的)인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依存的)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늘 기억하라는 뜻일까요? 사실 인간의 실존이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야곱’의 새로운 신체(저는 다리)는 그 자신의 생활 방식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식습(食習)까지 바꾸어놓았습니다: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32:32)
그러나 이 새로운 식습에 관한 기원론적 언급은 <성경> 전체적으로 이곳이 유일합니다. 둔부의 힘줄이 정확하게 신체의 어떤 부위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훗날 유대교에서도 이와 관련된 어떠한 금지 조항도 찾을 수 없어 이 구절을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다만,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뀔 때 “할례” 의식을 행한 거친 것처럼, 이 관습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택을 상기시켜주는 하나의 관습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마치 유월절을 기념할 때마다 무교병(無膠餠)을 먹은 것처럼, 특별히 이 부위를 먹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조상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것을 기념하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과 축복을 기억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32절의 기원론적 언급과 관련해서 간과할 수 없는 흥미로운 사실은 이 구절은 단순히 이야기의 후기(後記)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25절과 함께 각기 두 번에 걸쳐 “허벅지 관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동시에 네 번째 장면에 대한 수미상관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브니엘’과 관련된 또 다른 기원론적 언급(25절과 30절)이 그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두 번의 기원론적 언급이 교차대구적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봅니다(아래 참조):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32:25)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32:30)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32:31)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32:32)
5. 대면 2(33:1-15)
본문의 핵심어는 “얼굴” 또는 “대면”이라고 했습니다. 다섯 번째 장면은 전체 이야기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두 번째 대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밤에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했던 ‘야곱’은 이제 아침이 되자마자 그의 형 ‘에서’와 운명적 만남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야기의 절정에 걸맞게 화자는 이 단락의 첫 세절에서 일부러 이야기 속도를 늦추면서,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묘사도 반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1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33:1-3)
마침내 형의 모습을 바라보는 ‘야곱’! 이 운명적인 순간을 보다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함인지 화자는 ‘야곱’이 “눈을 들어 보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화자에게 있어, “눈을 들어 보았다”는 표현은 단순한 사실 언급 이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고. 22:4, 13; 24:64.
그가 본 것은 형과 그와 함께 오고 있는 장정 사백 명입니다. 이 정보는 그의 하인들이 이미 그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만(32:6), 어떻게 멀리서 이 숫자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어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야곱’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세 무리로 나누어 자신이 덜 중요하게 여기는 순서대로 앞장서서 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배치가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 어떻게든 임박한 위기를 모면해 보거나 아니면 적어도 최소화 해 보려는 ‘야곱’의 안간힘일까? 그렇다면 이 장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잔꾀에 능한 ‘야곱’의 진면목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전과는 달라진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Hamilton). 즉 이번에는 그 자신이 가장 앞서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즉 높은 자를 알현할 때 신분이 낮거나 덜 중요한 사람부터 먼저 나아가는 것처럼, ‘야곱’ 역시 형과의 만남에 예의와 격식을 갖추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가족 구성원을 배열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확답도 얻지 못합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야곱’ 자신이 선두에 서서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브니엘 사건” 이전이었더라면 아마도 그는 가장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을 것입니다(참고. 32:16, 18, 20). 그는 이제 두려워 떨던 이전의 ‘야곱’이 아니라, “브니엘의 씨름” 한 판으로 하나님과도 싸워 이길 수 있는 용맹스러운 ‘이스라엘’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달라진 모습은 또 있습니다. 몸을 일곱 번씩이나 굽혀가면서 형 앞에 나아갑니다. 이는 종이 주인에게 보이는 존경과 순종의 표시이거나(창 23:7, 12; 42:6; 43:26, 28; 37:7, 9, 10), 또는 인간이 하나님이나 천사들을 만났을 때 보이는 행동입니다(창 18:2; 19:1; 22:5). 그러나 ‘야곱’이 보여주고 있는 행동에서 우리는 그 이상의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지금 형에게 엎드려 절하고 있는 ‘야곱’의 행동은 이전에 ‘이삭’이 ‘야곱’을 ‘에서’인 줄 알고, 축복해주면서 들려주었던 예언을 연상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27:29상). 다시 말하자면 이 장면이 상징하고 있는 바는, ‘야곱’이 이전에 속임수로 빼앗았던 축복을 이제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있다고 보자는 것이지요. ‘야곱’이 보여주고 있는 행동은 “사필귀정”(事必歸正) 바로 그것인 것이지요.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서’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33:4)
화자는 모든 수식어를 배제한 채, 여섯 개의 동사만으로 형제간의 만남을 지극히 간단명료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제야말로 화자의 진정한 의도를 더 강렬하게, 더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두 형제는 마침내 화해를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도 화자는 마지막까지 대답을 유보함으로써, 긴장을 더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즉 ‘야곱’은 그의 형이 자신을 맞으러 나올 때까지만 해도 형의 진심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점 독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서’가 “달려 나와, 안고, 목을 맞추며, 입을 맞추는 대목”은 <성경>에서 친척들의 만남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표현입니다(예: 29:11, 13; 45:14, 15; 46:29). 그러나 ‘에서’의 진심은 마지막 표현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울었다.” 두 형제가 얼싸안고, 마주보며, 울 때, 지난날의 그 모든 원환과 미움과 복수심이 봄눈 녹듯 녹아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에서’는 진심으로 ‘야곱’을 용서한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야곱’ 역시 형의 진심을 비로소 알게 된 것 같습니다. Hamilton은 ‘에서’가 ‘야곱’을 만나는 장면을 ‘아론’이 ‘모세’를 만나는 장면과 흥미롭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전날 밤 낯선 자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은 것처럼, ‘모세’ 역시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거의 죽음을 당할 뻔했습니다(출 4:24-27). 두 경우 모두 먼저 싸움을 거는 쪽은 ‘야훼’입니다(본문에서는 이 점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만, <출애굽>에서는 이점이 암시되어 있을 뿐입니다만). 그리고 이 싸움이 일어난 시기는 ‘야곱’의 경우 ‘가나안’으로 귀향하던 중이었던 것에 반해, ‘모세’의 경우는 ‘이집트’로 돌아가던 도중이었습니다. 싸움 도중 하나님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셨고(32:25), ‘십보라’는 ‘모세’(또는 ‘게르솜’)의 발을 쳤습니다(출 4:25). 두 싸움의 경우 모두 형(‘에서’와 ‘아론’)이 먼저 동생(‘야곱’과 ‘모세’)을 만나러 나아옵니다(창 33:4; 출 4:27). 두 경우 모두 만났을 때 형이 동생에게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순서 또한 비슷한 것이, 동생은 하나님과의 힘든 씨름 도중 상처를 입게 되고, 새롭게 변화를 받게 되고, 이후 형과의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는 방식입니다. <신약.>에서는 이와 병행 되는 이야기가 없습니까(참고. 눅 15:11-32)?
집으로 돌아오는 동생을 맞으러 뛰어나와 붙잡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에서’는 마치 <누가복음>의 “탕자 이야기”의 아버지를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눅 15:11-32).
용서와 화해에 이어 비로소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신분이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먼저 안부를 묻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에서’가 동생의 아내들과 자식들의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왜 동생이 다리를 저는 것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는지가 궁금하긴 합니다만):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33:5상)
비록 형이긴 하지만 이번에도 ‘야곱’은 모든 격식과 예의를 갖추어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33:5)
스스로를 “종”으로 그리고 형을 향해서는 “주”로 부르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참고. 33:5, 8, 13-15).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자식들은 하나님의 “은혜”(또는 “은총”)의 선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단어는 이곳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고 있으며(참고. 32:5; 33:5, 8, 10, 11, 15), 그 의미와 상징하는 바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은혜”가 등장하는 회수는 모두 17번인데, 그중 삼분의 일 정도가 본문에서 등장하고 있으며, 그것도 모두 ‘야곱’의 입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가 자식들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은혜”라고 하는 데에는, “축복”과 관련해서 ‘에서’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Wenham). 그는 어쩌면 하나님의 축복보다는 하나님의 용서에 더 방점을 찍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어지는 행동을 통해서 이전에 그가 훔쳤던 그 축복을 되돌려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6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33:6-7)
‘야곱’의 모든 식구들이 순서대로 나아와 ‘에서’에게 절하고 있는 모습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즉 이 장면은 다시 한 번 ‘이삭’의 예언을 연상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27:29상). 즉 ‘야곱’은 말과 행동을 통해서 “에서의 축복”을 되돌려줌으로써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 애쓰고 있다는 말입니다.
형제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다소 대조적입니다. 형은 지금 상당히 기분이 들떠 있는 모습이며, 반면 동생은 다소 심각하고도 극진하게 예우를 갖추고 있는 모습입니다.
8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9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10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11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33:8-11)
형은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동생이 가지고 온 “예물”에 대해서 기분 좋게 물어보고 있습니다: “이 모든 떼(hn<j}m, 마하나)가 웬 것이냐?” 그러나 그는 이 떼들이 “예물”(hj'n]m, 민하)인 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동생의 하인들을 통해서 익히 들었기 때문이지요(32:5). ‘야곱’은 차분하고, 솔직하게 “은혜”(@j, 헨)를 입기 위해서라고 답합니다. 이 대화는 다시 한 번 본문 특유의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혜”(@j, 헨)(32:5; 33:5, 8, 10, 11, 15); “예물”(hj'n]m, 민하)(32:13, 18, 20, 21; 33:10); “무리(떼)”(hn<j}m, 마하네)(32:7, 8, 10, 21; 33:8).
‘에서’가 은혜를 구하는 동생의 선물을 받아들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순간 그는 동양 특유의 겸양의 미덕을 보이는 듯합니다. 동생의 의도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도 동생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생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Hamilton은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과 ‘소돔’왕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왕이 전쟁의 노획물 중 일부를 그의 몫으로 인정하여 돌려주려 하자, “소돔 왕이 나를 부자로 만들었다”는 말을 듣기 싫어 그의 제안을 거부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14:23). ‘에서’의 거절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동생을 대하는 ‘에서’의 태도는 아주 부드럽고 은근합니다. 그가 동생을 부르는 호칭에서 이점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 동생아.” ‘에서’ 역시 그의 동생만큼 지난 20년 동안 이렇게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분노와 증오에서 용서와 화해로 말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여기서 그만둘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열기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야곱’은 열심히 형을 설득하려 하고 있습니다. 형을 대면한 일을 두고 하나님을 대면한 것으로 비유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브니엘) 위에 “에서의 얼굴”(브니에서)를 겹쳐놓고 있습니다. ‘야곱’의 요지는 제의적인 암시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그는 형이 용서의 증표로 예물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 때 동사 “받다”(רצה, 라카흐)는 제의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을 받으신다”는 의미를 지닙니다(레 1:4; 7:18; 19:7).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희생제물을 받으시고 속죄의 은혜를 베푸시듯, ‘에서’ 또한 ‘야곱’의 예물을 받고 은혜의 증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이전에 도난당했던 “하나님의 축복”을 되돌려 받는 길임을 설득하면서, 그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이 동사의 히브리 원형은 rx'P(파차르)로서, “밀다” 또는 “강요하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만일 형이 그의 제의를 거절한다면 형의 진심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침내 ‘에서’는 ‘야곱’의 예물을 받아들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싸워 이긴 것처럼, 형과도 싸워 이긴 것입니다(참고. 32:28). 그러나 두 싸움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 싸움이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하나님과의 싸움이었다면, 이번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되돌려주기 위한 사람과의 싸움이라는 점입니다.
‘에서’는 ‘야곱’을 용서하고 그의 예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내어줄 것 같은 태도입니다. 동생에게 그가 살던 ‘세일’ 땅으로 함께 가서 살자고 제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33:12)
사실 형제간의 동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며, “동행하다”는 말 속에 친밀함이나 동료애 등의 의미가 담겨있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된 <성경>적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창 22:6).
그러나 ‘야곱’은 이를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의 태도가 얼마나 조심스럽고 정중한지는 그가 매번 형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15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33:13-15)
‘야곱’이 형의 초정을 거절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13절에 드러나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마치 긴 여행에서 올 수 있는 가족과 가축들의 안위를 염려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그의 진정한 의도였을까요? 혹시 그 자신에게 속은 적이 있는 형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von Rad)? 사기꾼이 가장 겁내고 싫어하는 것이 사기 당하는 것이라는 속설이 이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형이 언제 태도를 돌변할지 모르고, 두 가족이 함께 삶으로써 생길 수 있는 새로운 갈등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을까요(J. Calvin)? 그 동기가 무엇이든 ‘야곱’의 태도에서 신학적 이유를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야곱’이 “그 땅”에 돌아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지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서’가 살고 있는 ‘세일’ 즉 ‘에돔’ 땅은 약속의 땅은 아닙니다(참고. 31:3, 13; 32:9). 이 모든 가설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야곱’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함과 불확실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훗날 ‘이스라엘’과 ‘에돔’ 사이의 관계가 가장 좋았을 때조차도 무언가 서로를 미심쩍어 하고 의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야곱’의 태도가 바로 이런 관계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지요.
‘야곱’의 태도는 겉으로는 매우 정중해 보이지만 실은 음흉하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형과 함께 가지 않고 나중에 가겠다고 하나 과연 언제 올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으니 말입니다(14절). 설령 온다하더라도 그의 온 가족이 함께 할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에서’는 동생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은 듯합니다. 동생의 수고와 걱정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서 돌보고 호위할 사람들을 남겨두겠다고 합니다(15절). 그러나 ‘야곱’은 이 제안마저 완곡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인지 또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인지 여전히 알 길은 없습니다(하나님께서는 여러 차례 ‘야곱’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31:3; 32:9). 이번에 ‘야곱’이 거절하고 있는 명분은 이미 충분한 은혜(즉 호의)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다는 뜻이겠지요. 이렇게 하여 ‘야곱’은 이번에도 형 즉 사람과의 대화에서 그가 원하는 것을 얻어냄으로써, ‘이스라엘’ 즉 “이기는 자”(32:28)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6. 분리(33:16-17)
결국 두 사람은 각자의 길로 떠나고 있습니다:
16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17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33:16-17)
이 장면은 <족장 이야기>의 다른 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별의 장면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13:11); ‘야곱’과 ‘라반’(31;55). 이들 이별 이야기와 관련해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이들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선택(選擇)과 유기(遺棄)”라는 신학적 암시가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이점 ‘야곱’과 ‘에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화자도 이점을 강조라도 하듯, 형과 동생이 각기 남과 북을 향해서 더욱 멀어져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숙곳’이 만일 오늘날의 ‘요단’강 동편에 위치한 ‘Tel Deir-alla’라고 한다면, ‘야곱’은 형을 따라 남쪽 ‘세일’ 땅으로 가는 대신, ‘얍복’강 동북 방향으로 2 마일 정도에 위치한 곳으로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훗날 그들의 아버지 장례식 때 잠간 만날 경우(35:29)를 제외하고 나면, 이들이 걸어가는 상반되는 방향은 그들이 살아가게 될 상반된 운명을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구절의 구문(構文)도 두 사람의 운명적 선택을 반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세일로) 돌아가고 에서는...그러나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두 문장의 강조점은 무엇입니까?
‘숙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야곱’이 이곳에서 상당 기간 동안 살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적어도 그의 자녀들이 장성할 때까지(34장)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17절의 또 다른 기능은 ‘숙곳’에 대한 기원론적 의미를 밝혀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숙곳’은 다른 곳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수 13:27; 삿 8:5-6, 8, 14-16; 시 60:6; 108:7.
7. 결말(33:18-20)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이 단락은 본문의 결론일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34장에 대한 예고 내지는 서막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형과 헤어진 이후 ‘야곱’의 여정(旅程)에 관한 것입니다:
18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33:18-20)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중간 중간에 이곳에서처럼 그의 여정을 소상하게 밝혀주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12:5-9; 13:1-4; 26:22-25). 이런 정보는 결론으로서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만, 실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밧단-아람’을 거쳐 마침내 약속의 땅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서 그가 처음으로 한 행동은 그의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23장), 땅을 사고, 제단을 세웠습니다. 바로 이점이야말로 <야곱 이야기>의 결론으로서 <야곱 순환>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성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 모든 방랑 생활의 끝에 마침내 그곳에 이르렀고,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도다.” <야곱 이야기>의 결론으로서 이보다 더 적절한 진술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머문 곳은 ‘세겜’의 도시 ‘살렘’이었습니다. 여기서 ‘세겜’은 사람 이름이지 다른 곳에서처럼 ‘세겜 땅’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참고. 12:6; 35:4). 물론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사마리아 오경>의 번역을 따라, “야곱이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로 번역하면서, 이렇게 된 것은 야곱의 기도가 응답받은 결과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참고. 28:21). 그러나 18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합니다: “야곱이 ‘세겜’ 성읍 ‘살렘’에 이르러...” 물론 히브리 단어 “살렘”(שׁלם)을 “평안히”로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구약> 어디에도 명사형 ‘살렘’을 “평안히”와 같은 부사나 동사형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성경> 여러 곳에서 “X의 성읍”이라 할 때, X는 주로 그 성읍에 사는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지, 지명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습니다(예: 24:10; 민 21:26-27; 22:36; 삼상 15:5).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고대 사본들은 한 결 같이 ‘살렘’을 지명(地名)으로 확인하고 있으며, 오늘로 치자면 ‘Tel Balata’에서 동쪽 3마일 지점에 위치한 ‘살림’과 동일한 지역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살렘’을 지명이 아니라, “평안히”로 해석한다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은, 이런 표현을 통해서 화자의 수사적 기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34장에서 곧 밝혀지겠지만, ‘야곱’ 가족에게 그 성읍은 평안은커녕 재앙의 도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일종의 역설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이곳에서 취한 첫 번째 행동은 땅을 구입하는 것이었습니다(19절). 이 장면은 “살렘”이라는 도시 이름에 걸 맞는 평화스러움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이 장면을 이전에 ‘아브라함’이 ‘헷’ 족속으로부터 땅을 사는 장면과 비교해 보면 유사성과 차이점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매장지로 쓰기 위하여 이전에 낯선 소유주들과 끈질긴 협상 끝에 그 땅을 산 것이라면, ‘야곱’은 그냥 장막을 취기 위하여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그 땅을 샀으며, 지불한 대가도 은 사백 ‘세겔’이 아니라(23:16) 일백 ‘크시타’였습니다. 두 사람이 땅을 사는 것과 관련해서 보여주고 있는 이런 미묘한 차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진술로 보입니다. 두 이야기에 등장하고 있는 화폐 단위 ‘세겔’과 ‘크시타’의 차이가 분명치는 않지만, 만일 후자가 전자에 비해 그 단위가 낮은 것이라면, ‘야곱’은 그의 할아버지에 비해 훨씬 적은 값으로 그 땅을 산 것이며, 이는 ‘하몰’의 아들들이 ‘헷’ 족속에 비해 관대하였거나 또는 ‘야곱’이 이들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야곱’이 더 큰 액수를 지불했다면, 이는 그가 할아버지보다 더 넓은 땅을 구입했다는 의미로서 그의 재산 정도도 할아버지에 비해 더 컸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 땅에서 합법적으로 자신의 소유 땅을 갖게 되었으니, 그가 취한 두 번째 행동은 이전에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그 땅에 제단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12:7-8; 13:18; 22:9; 26:25). 이 모든 경우 “(단을) 세우다”는 행위와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어 동사는 ‘hn:B’(바나)입니다만, 이곳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bx'n:,’(나차브)입니다. 이 두 동사가 의미론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 동사는 “벧엘 에피소드”를 연상시켜 주기에 충분합니다: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나차브)..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나차브)...”(28:12-13). 두 이야기가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28장과 33장을 연결시켜줄 수 있는 대목은 또 있습니다. 즉 33장은 28장에서 제기한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첫째, ‘야곱’은 ‘벧엘’에서 그가 “평안히”(!/lv, 샬롬) 돌아올 수 있는가를 물었는데(28:21), 과연 그는 “살렘”(שׁלם) 즉 “평안의 도시”로 돌아왔습니다. 둘째,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께 약속한 바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가 평안히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928:20-21). 과연 그는 제단을 세우고 그 단의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 즉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El, the God of Israel)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의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 즉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El, the God of Israel)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이 상징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얍복’강에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제 비로소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인정이요 고백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의 모든 후손 즉 ‘이스라엘’로 불리는 모든 족속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선언적 의미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아직 ‘벧엘’에는 도착하지는 않았고, 그가 이전에 서원한 것들을 지켜야 하는 일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제단의 이름을 이렇게 부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과시하면서, 동시에 “벧엘의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에서' 피하기
자책과 두려움. 진퇴양난(進退兩難). 미국 산 쇠고기 파동으로 재협상 요구를 받고 있던 이 명박 대통령이 처한 상황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난 군중의 요구대로 재협상에 성공했다 해도, 이번에는 미국 측으로부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재협상하자는 역공(力攻)을 받게 될 것이 자명할 뿐만 아니라, 국제통상 관례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기이한 일을 해버렸으니 국제적으로 한국의 위상이나 신뢰도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재협상 요구를 무시하자니 자신은 물론 이 정부의 운명을 걸어야 할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날이 새면 형과 운명의 재회를 해야 하는 ‘야곱’의 처지 또한 이대통령과 다르지 않습니다. 뒤로 돌아가자니 그곳에는 외삼촌 ‘라반’이 있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갈르엣’이라 불리는 곳에서 외삼촌과 함께 “증거의 돌무더기”를 세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고 서약했습니다. ‘갈르엣’은 그러니까 앞으로 두 사람의 영역을 구분하는 일종의 경계선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 이 경계선을 넘을 경우 그것은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로 간주한다는 언약이었습니다(32:52). 그래서 그는 결코 뒤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냥 오던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는 달리 대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누가 있습니까? 이십 년 전 자기 때문에 인생에 큰 낭패를 당한 형이 있습니다. 형은 그를 죽이려고 작정하고 있었고, 그는 죽음의 위험을 피해 그곳을 도망쳐 나온 바 있습니다. 당시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약속한 말이 있습니다: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27:45). 과연 ‘야곱’은 ‘라반’의 집에 머무는 동안 어머니로부터 무슨 전갈이라도 받았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그가 아는 한에 있어서 형 ‘에서’는 여전히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형은 그가 떠나온 이후 세력과 재력이 오히려 왕성해져 있습니다. 그자가 지금 사백 명의 장정을 이끌고 나를 만나러 오고 있습니다. 다시 도망갈까? 그래도 형을 만나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정말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성공 여부는 불투명할 수밖에 없고, 오히려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일이 그냥 자동적으로 해결될 때까지 내버려 둘 수도 없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야곱’에게 줄 수 있는 조언은 무엇일까?
문제를 더 이상 악화시키지 말고 지금 당장 직면하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그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사람이 책임지는 것에 대해서 병적인 장애를 가질 때 “노이로제”나 또는 “성격 장애”가 된다고 합니다. M. S. Peck. 「아직도 가야 할 길」. 신승철∙이종만 역. 서울: 열음사, 1991.
이 두 부류의 환자는 일견 비슷한 것 같지만 실은 삶의 문제를 대함에 있어 전혀 상반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노이로제의 경우는 너무 책임을 지려하는 하면, 성격 장애자는 응당 져야할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노이로제 환자는 세상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 자기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성격 장애자들은 세상에 그 책임을 돌리려 합니다. 두 부류의 환자는 말투에서도 당연히 차이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노이로제 환자는, “내가 꼭 해야 하는데”, “내가 할 도리였는데”, “내가 해서는 안 되었는데” 등의 말투를 보인다고 합니다. 반면 성격 장애자들은,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이렇게 해야만 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등의 말투를 자주 사용한다고 합니다. 노이로제 환자는 참으로 자기 책임이 아닌데도 책임을 지려함으로써 죄책감에 휘말리게 되고, 그 반면에 다른 영역에서는 자신을 위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펙’(M. S. Peck) 박사의 오랜 임상 경험에 따르면, 이 두 부류의 정신 질한 중에서 노이로제가 그래도 상대적으로 치유가 더 쉽다고 합니다. 그가 지금 ‘야곱’의 증세를 어떻게 진단할지 궁금합니다.
‘야곱’은 지금 자신이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를 놓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두려워 떨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 상황은 불과 며칠 전에 외삼촌을 대할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에도 그는 외삼촌을 피하여 야간도주를 하다 외삼촌의 추격으로 그와 대면하는 상황에 놓인 적이 있습니다(31장). 그가 야간도주를 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외삼촌과 마주 대하여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고 가리는 것이 두렵고 귀찮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술수에 능한 외삼촌 ‘라반’에게 또 걸려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요? 그러나 정작 그를 대면해서는 오히려 태도가 돌변합니다. 그의 지난 잘못을 따지고, 나무라는 등 공세를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또 다른 두려움의 대상인 ‘에서’ 앞에서는 어쩐 일인지 당당하기는커녕 비굴함과 아부로 일관하고 있음을 봅니다. ‘에서’는 더 이상 형이 아니라 “주(主)”이며, 자신은 그의 동생이 아니라 “종(從)”이라고 비하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두 상황에서 어쩌면 이렇게 대조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일까요?
‘쉐익스피어’의 작품 중에 나오는 한 대사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양심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든다네.” 그렇습니다. ‘야곱’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나 봅니다. 그는 ‘라반’ 앞에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피해자였으며, 그가 모은 재산만 하더라도 20년 동안 노예처럼 일한 당연한 대가로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형 앞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형은 그가 지난 날 어떻게 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형 앞에서 주눅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지금 그의 양심이 그를 고소하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까?
적어도 화자의 입장에서 볼 때, 32장에서 가장 핵심 단어는 ‘에서’입니다. 이곳에서 그의 이름은 무려 아홉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야곱’이 이곳에 오기 전에 해결했어야 할 가장 큰 숙제는 다름 아닌 ‘에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대도 그는 이 숙제를 지금까지 차일피일 미루어왔습니다. ‘에릭 포름’(E. Form)은 <소유와 존재>에서 진정한 행복과 사이비 행복의 차이는 “그 대가를 먼저 지불하는 것과 나중에 지불하는 것의 차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펙’ 박사도 풍부한 정신 상담 경험을 통해서 “즐거운 일은 나중에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충언하고 있습니다. <마쉬멜론 이야기>의 핵심도 이와 같은 것으로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가장 나중에 먹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 모든 충고의 반대 코스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계속 미루어 두었던 인생의 가장 큰 숙제를 이제 시험 전날 당일치기 하듯 제출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스트레스 받을까봐 ‘에서’라는 이름을 들먹이는 것조차 싫었는데, 이제 ‘하란’으로부터 ‘가나안’으로 돌아오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조금씩 그의 귓전에 ‘에서’라는 이름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마치 ‘엘리야’의 시종이 지중해 하늘 끝 저편에 손바닥 크기 만 한 구름 조각이 하나 떠 있다고 보고했던 것처럼(왕상 18:44), 처음에는 아주 희미하고, 잔잔하게 들리고 있었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가까이 올수록 ‘에서’의 이름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에서! 에서!” 마침내 ‘얍복’강에 이르자 그 이름은 천둥소리가 되어 그의 고막을 뒤흔들어놓고 있습니다: “에서! 에서!” 지중해 하늘의 손바닥 만 한 구름 한 조각이 마침내 천둥과 벼락을 동반한 폭우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에서’라는 천둥과 폭우가 과연 ‘야곱’을 통째로 날려버리게 될까요?
그러나 ‘야곱’이 ‘에서’의 폭풍에 직면하기 전에 먼저 그를 만나 준 자가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hn<j}m, 마하네)였습니다. ‘야곱’은 이들과의 만남을 기념하여 그 장소를 ‘마하나님’(!yIn"j}m), 즉 “두 군대”로 칭한 바 있습니다(32:1-2). ‘마하나님’은 “두 군대” 또는 “두 진영(무리)” 등을 의미합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이처럼 큰 무리의 군대가 아니라, 단순히 천사 한 명만을 보낸다 할지라도 그분의 메시지는 분명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인즉 에서가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그런대도 하나님은 지나치게 많은 군대까지 보내어 과소비(過消費)를 하셨던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두려워하고 있었을 그에게 말입니다.
과연 이 만남이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무슨 유익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제 ‘에서’는 그가 만날 인생의 폭풍우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변신하여 축복의 사자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라도 가지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불쌍한 ‘야곱’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하란’에서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은 물론, 불과 며칠 전의 그 엄청난 “대면”조차도 전혀 기억해내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전히 두려움으로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제는 형을 두려움 없이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야곱’은 말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도저히 형을 만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
이로부터 수 천 년이 지난 후,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해주셨던 바로 그 약속입니다. 그러나 나 역시 오늘의 ‘야곱’은 아닙니까? 과거의 실수나 실패로 자책하고, 괴로워하면서, 내 인생의 ‘에서’를 헤쳐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를 두렵게 하는 이름은 무엇입니까? ‘에서’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입니까? 책임을 나의 탓으로 돌리든(그래서 노이로제를 앓든), 또는 세상의 탓으로 돌리든(그래서 성격 장애자가 되든) 끊임없이 적절한 이유나 변명을 찾는 대신 하나님의 약속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 1:14)
위기와 기도. 사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속수무책 앉아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보내어 형의 기분을 알아보고 있으며, 형의 진노를 달래고, 용서와 은혜를 얻어내기 위해서 기꺼이 예물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암시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그의 이런 행동은 이스라엘의 제의를 상징하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희생제물을 통한 대속(代贖)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형에게 바치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소나 양이 아닙니다. 이전에 그가 훔친 “에서의 축복”입니다.
형에게 그 “축복”을 되돌려준다는 것은 어떤 상징을 갖습니까? 이전에 이들의 어머니 ‘리브가’는 두 형제의 출생과 관련해서 예언을 받은 바 있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25:23). 즉 ‘에서’가 ‘야곱’을 섬기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향해서 “에서의 축복”을 주어버린 것입니다: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27:29). 이렇게 해서 “형의 축복”은 그 주인이 바뀌어 “동생의 축복”이 되어버렸고, 따라서 ‘에서’가 ‘야곱’을 섬기게 될 기구한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이 자신을 종으로, 형을 주인으로 부르면서 예물을 바치려 하는 이 장면은 엇갈린 그 운명을 되돌리고 있는 하나의 상징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성의가 받아들여졌습니까? 현재로선 알 길이 없습니다. 그가 접한 유일한 정보는 형이 사백 명의 장정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형은 과연 나를 용서했을까? 용서했다면 왜 그처럼 많은 장정들을 데리고 오는 것일까? 나를 해치려고 오는 것은 아닐까? 왜 아무 전갈도 보내지 않는 것일까? 그의 두려움과 초조함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커져버렸습니다. ‘얍복’강에 도달했을 때만 해도 단순히 막연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면, 지금은 공포로 거의 초죽음 상태입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한다지?”
그가 절망 가운데 취하고 있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가족과 모든 소유를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의도에 대해서 화자의 설명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한 무리가 공격을 받으면 나머지 한 무리만이라도 무사히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지요(32:7). 아니 무슨 위기관리가 이 모양입니까? 싸울 준비를 하기는커녕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전쟁이 나면 가용(可用)한 모든 재원을 총집결시키는 것이 전략의 기본이거늘, 오히려 힘을 둘로 분산시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피해의식에 충만한 지휘관이라면 이런 식으로 전쟁에 임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은 참으로 역설이자 해학(諧謔)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자는 지금 ‘야곱’이 불과 며칠 전에 겪었던 “마하나임 에피소드”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하나임’은 두 진영 또는 두 군대입니다. ‘야곱’은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의 두 군대를 만났고, 하나님께서 그와 늘 동행할 것이며, 그의 힘이 되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막강한 힘에 기대고 의지해야 할 시점에, 반대로 자기 자신의 연약한 힘에 의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둘로 나누어 자신을 더욱 무력하게 만들고 있는 모습이 실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모습이 어디 ‘야곱’ 뿐이겠습니까? 선택의 기로나 위기의 순간에 나는 과연 누구를 찾습니까?
‘야곱’은 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조치를 다 취했습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습니다. 뭐가 더 남았습니까?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십중팔구 다음과 같이 충고할 것입니다: “기도해야지! 모든 것이 실패하고, 더 이상 시도해 볼 만한 것이 없으니 말이지.” 과연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태도는 기도에 대한 모독입니다! 기도는 모든 것이 실패했을 때, 더 이상 나은 대안이 없을 때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바울’ 사도는 기도에 대해서 무어라 말합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러나 ‘야곱’의 지금 처지는 그렇게 한가하지를 않습니다. 오늘날 회자(膾炙)되는 기도에 관한 금언(金言) 아닌 금언을 받아들여, 난생 처음으로 기도에 나서고 있습니다. 처음이란 함은, 적어도 <성경>에 기록되기로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말입니다. 화자는 지난 일곱 장에 걸쳐 ‘야곱’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한 번도 그가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이 말은 그가 종교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축복 등과 같은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영역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종교적인 말이나 행동은 기도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했고, 분에 넘치는 약속과 축복을 받았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에게 어떻게 응답했는지에 대해서는 화자는 침묵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벧엘’에서조차도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에 대해서 기도가 아니라, 그 자신의 약속 즉 서원(誓願)으로 응답했을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동안 ‘야곱’이 보여주었던 영성의 한계이자 치명적인 결함이 아니었을까요?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종교인일지언정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에 관해서, 기도에 관해서, 그리고 선교에 관해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종교적 기념물이나 기념비를 세우고, 종교적 이름들을 여기 저기 가져다 붙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서 정작 하나님과는 대화를 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금 ‘야곱’이 처해 있는 것과 같은 진퇴양난의 상황으로 나를 이끌어가야 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지 않을까요? 그때까지 그냥 기다리겠습니까? 그리고 그 때 가서 필사적으로 기도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 기도를 하되 제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그나마 ‘야곱’의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될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오늘날 우리 기도의 교본(敎本)으로 삼을 만 한 것입니다. 첫째, 그는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32:9). 둘째, 그는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점을 고백하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32:10상). 이는 한 세리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셋째, 그는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감사의 내용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과거의 행적과 지금 함께 해주시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32:10하). 넷째, 그는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정직하게 간구를 드리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32:11). 다섯째, 그는 자신의 간구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32:12). 좋은 기도를 배우는 유일한 길은 좋은 기도를 듣고 따라하는 것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최근 나의 기도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구체적이고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습니까?
소와 양. 과연 하나님께서 ‘야곱’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까? 그런데 ‘야곱’의 기도를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면 한 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만일 기도를 “우리의 부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야곱’의 기도에 특별한 문제점은 없어 입니다만,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야곱’의 기도로부터 무엇인가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음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름 아닌 ‘야곱’의 응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그의 기도에는 “주님,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런 기도야말로 ‘유진 피터슨’(E. Perterson) 목사님이 말하는 “응답하는 기도”입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즉 그가 땀이 피가 되도록 드렸던 기도는 “응답받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형에게 나아가기 전에 기도하는 대신에 먼저 자신의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32:7-8). 기도하는 중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구상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형의 적개심을 돌려놓을 수 있을까?” 그리고 기도를 마치자마자 처음 자신이 세워놓았던 그 계획을 수행합니다(32:13-20). 결국 그의 기도는 자신이 세워놓은 계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나는 어떠합니까? 내 인생의 ‘에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보다 그를 더 무서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저런 고민과 계획 가운데 하나님에게 가지고 가서 승낙을 받으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보다는 오히려 ‘에서’를 더 두려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늘 말씀을 통해서 그분과 대화하고, 음성을 들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야곱’처럼 종교인으로 남는 선택을 하지는 않습니까? 최근 하나님의 응성에 응답해 본 적이 있었다면 나누어 봅시다.
대개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록에는 우리가 하기 싫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버리기가 아까운 것들도 많습니다. ‘야곱’도 기도 중에 혹시 무엇인가를 버리라는 음성을 들었을까요? 가장 버리기 쉬운 것이 그나마 “소유”(possession)인 듯합니다. 그가 가진 각종 가축 550 수(首)를 준비하여, 이들을 다섯 개의 무리로 나누어, 가장 먼저 암염소 이백 마리를 하인들로 하여금 이끌게 하고, 그들이 누군지, 그리고 누구의 소유인지 ‘에서’가 물어볼 때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라고 지시합니다: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18절).
그러나 대속(代贖)의 대가로 이백 마리의 암염소만으로 충분할까요? 만일 형이 만족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요? 그래서 뒤이어 이십 마리의 숫염소를 따라가게 합니다.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하도록 시킵니다.
이십 마리의 숫염소 뒤에는 다시 이백 마리의 암양을 보냅니다.
암양 뒤에는 다시 숫양 이십입니다.
그 뒤에는 젖 나는 낙타 삼십과 새끼들입니다.
다음에는 암소가 사십입니다.
그리고 황소가 열입니다.
다시 암나귀가 이십입니다.
마지막으로 숫나귀가 열입니다.
이 모든 소유를 버리는 한 가지 유일한 목적은 형으로부터 용서와 화해를 받아내는 것입니다: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20절). 이들 모두를 앞서 보내고 이제 ‘야곱’은 혼자 밤중에 남게 됩니다.
가축들을 보낸 것만으로는 영 안심이 안 됩니다. 아침이 밝아오자 밤새 구상해 두었던 또 다른 계획을 실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족들을 뒤따라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들 모두를 한 무리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세 무리로 나눕니다. 먼저 두 여종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 그리고 ‘레와’와 그의 자식들, 마지막으로 ‘라헬’과 ‘요셉’ 순입니다. 이 순서를 통해서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군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만, “소유”(possessiom)에 이어 사랑하는 “사람”(person)들조차 포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그는 사실상 자신이 가진 무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형의 용서를 얻어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아직 포기하지 못한 것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자신인 것이지요. 그가 아끼고, 애착을 갖고, 사랑하던 그 모든 소유와 사람들을 다 떠나보냈지만 여전히 ‘얍복’강가에 최후까지 남겨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그는 여기서 두려움에 떨며 그 자신과 힘든 씨름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에서’라는 괴물을 피하기 위하여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나의 모습은 아닌가요? 매 주일마다 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찬송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사랑하고 의지하여 주 만 따라 가겠네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그러나 실제 부르고 있는 노래는 이런 것이 아닙니까? “내게 있는 모든 염소를 드리네.” “그것으로 안 되면 모든 양을 드리네.” “그래도 안 된다면 황소를 드리네.” “그리고 그것으로 안 되면...” 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을 포기할 용의는 있습니다: “시간”(Time); “재물”(Treasure); “은사”(Talent).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을 드리는 데에는 늘 실패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때가 오겠지요. 하나님께서 이 밤중에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그와 인격적으로 만나, 그와 씨름하면서, 그를 굴복시키고, 그 결과 환도 뼈를 탈골시켜, 나머지 인생을 반 불구자로 살아가게 하신 것처럼, 나에게도 그러한 때가 오겠지요. 그분께서 진정 나를 사랑하신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극한상황까지 가야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소명이 항상 내 자신의 계획과 생각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나야 합니까?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는 않습니까? 지금 ‘야곱’처럼 내 자신의 계획을 수행하느라 그나마 얼마 되지도 않는 나의 자원을 여러 무리로 나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와 연합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각오를 한 번 피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 만나기
‘야곱’의 일생에서 “얍복강의 씨름”만큼 극적인 사건이 있었을까? 사실 이것은 씨름이라기보다는 목숨을 건 일대 회전(會戰)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사건은 극적인 만큼이나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왜입니까?
적어도 이 사건에서만큼은 하나님은 ‘야곱’의 보호자가 아니라 원수가 되어 그와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야곱’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외삼촌 ‘라반’이 그의 원수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의 형 ’에서’가 원수가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하나님이 그의 원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늘 그의 편이었고, 문제가 있을 때 마다 도움을 요청하면 친절하게 도와주었으며, 한편으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갈 때에는 ‘야곱’ 자신의 계획대로 살아가면서 무시할 수도 있었던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조금도 두려할 필요가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두려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이용해 왔던 것이겠지요. 오늘 나처럼 말입니다!
아뿔싸, 그런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싸움을 걸어오다니! 하나님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었단 말인가? 무한정 이용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말인가? 이제 ‘야곱’이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의 공포는 극에 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는 <나니아 연대기>의 한 대사를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아슬란은 결코 온순한 사자가 아니야.” 만일 ‘야곱’도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이 사건은 그런 점에서 일생일대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명목적인 종교인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 변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거듭나는 순간이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야곱’이 이제까지 한 번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망나니 같은, 불순종한, 철부지였을 뿐입니다. 예컨대, 식당이나, 극장이나, 미술관이나, 기타 공공장소에서 부모의 주의나 경고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떠들고 주변을 소란하게 하는, 가정에서 절제와 순종의 훈련이라고는 받아본 적도 없는 어린 아이들과 같다는 것이지요. 이들이 한 번도 부모의 사랑하는 자식이 아닌 적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과연 ‘야곱’은 이 사건으로 거듭났을까요?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사건은 ‘야곱’에게 두 가지 중대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입니다. 그의 이름과 그의 신체에 말입니다. 그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되었고, 정상적인 걸음걸이가 “절름발이”가 된 것입니다. 나는 “얍복강의 씨름”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야곱’과 같은 변화를 겪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결 같습니까? 만일 그대로라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고독과 두려움.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설 때 겪게 되는 체험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 아무도 나를 도와 줄 자가 없다는 느낌. 지금 ‘야곱’처럼 말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32:24상). 이럴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두려움은 고독이라는 나무의 열매라고나 할까요. ‘야곱’ 또한 두려웠습니다. 형이 사백 명의 장정을 이끌고 나에게 오고 있습니다. 해칠 마음으로 오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이를 알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가 두려움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에서’의 큰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힘을 여러 군데로 분산시켰습니다. 더 끌어 모아도 부족한 판국에 말입니다. 이것이 두려움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두려움은 더 큰 두려움을 잉태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처음부터 싸우기보다는 지는 쪽을 선택하게 됩니다: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32:8). 두려움은 용맹이나 담대함보다는 비굴한 양보를 선택하게 합니다. 그가 나눈 여러 무리의 가축 떼나 식구들은 모두 회전(會戰)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뇌물성 짙은 선물입니다: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주리라”(32:20하).
이 계획이 과연 먹혀들까요? ‘야곱’은 스스로도 자신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혹시 나를 받아주리라”(32:20)고 말하고 있는 대목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아침이 오는 것이 지금처럼 두려운 적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사막의 밤은 길고, 추워서 천막 안에서 잠자는 것 외는 딱히 할 일도 없을 터인데도, 지금 ‘야곱’은 그야말로 안절부절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를 떠나보낸 후 혼자 말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32:24). 이제 20년 전 ‘벧엘’ 이후 처음으로 다시 그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그의 시선과 생각을 흩어놓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칠흑 같은 이 밤에 그가 응시할 수 있게 된 곳은 단 두 곳, 어두운 밤하늘과 자신의 어두운 영혼뿐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절호의 기회입니까? 무엇을 위한 기회라는 말입니까?
육신의 싸움. 강도나 짐승의 공격을 받기에 절호의 기회라는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누군가 그를 공격해옵니다. 무엇을 노렸을까요? 재물이나 소유를 노린 단순 강도나 도적일까? 아니면 자기 생명을 노린 자객일까? 지금 이것저것 따지고 물어볼 겨를도 없습니다. 그저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무조건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화자가 “어떤 사람”(vya, 이쉬)으로 칭하고 있는 이 한밤의 침입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호세아서>는 이 자를 “천사”라고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호 12:4). 그러나 여전히 이 사람의 정체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정말 천사라면 <창세기>의 화자는 다른 곳에서처럼 분명히 “야훼의 천사”라고 밝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자는 ‘아브라함’이 ‘마므레’ 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 찾아왔던 그 자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창 18). 그 때 ‘아브라함’을 찾아왔던 자들은 세 명이었는데, 이 중 둘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천사들이었고, 세 번째 인물 즉 ‘아브라함’과 대화를 나누었던 자가 하나님 자신이었을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받은 바 있습니다(창 18:1). 흥미롭게도 많은 학자들은 ‘야곱’을 공격하고 있는 이 자를 성육신한 예수님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가 누구든 이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야곱’이 그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그가 ‘야곱’을 먼저 공격해 왔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야곱과 씨름하다가”(32:24하). 간혹 이 장면을 ‘야곱’이 밤중에 열심히 기도 중에 하나님을 찾고 있는 모습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려는 입장도 있기는 합니다만, 적어도 이 구절에 대해서만큼 문자적인 해석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날 밤 ‘야곱’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야곱’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야곱’이 그를 붙잡고 자신을 축복해 주기 전에는 절대 보내줄 수 없다고 떼를 쓰고 있기는 합니다만, 먼저 ‘야곱’에게 싸움을 걸어온 쪽은 “어떤 사람” 즉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싸움을 걸어온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만, 결과를 놓고 볼 때 ‘야곱’의 항복 즉 육체적이고 영적인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나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습니까? 내가 세워놓은 계획대로, 내 생각대로 무엇인가 하려 했는데, 하나님이 어느 날 불시에 찾아와서 싸움을 걸어온 경우 말입니다. 모르긴 해도 거의 매일처럼 하나님께서는 나의 대적자가 되어 나와 힘든 싸움을 벌이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싸움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아니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동안 힘든 싸움을 벌였는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32:24). 황혼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입니다! 단순한 놀이도 이렇게 오래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야곱’이 무슨 힘으로 이토록 오래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는지 경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나 같으면 쉽게 항복하고 말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요? 과연 나라면 “내 뜻”을 쉽게 포기하고 하나님께 항복했을까요? 오히려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집요하게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나 태도나 생각을 바꾸기보다는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헨리 나우웬’(H. Nouwen)이 지적한 바대로, 인간은 변화와 이동을 싫어하는 존재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아, 무슨 소리! 사람들은 개혁과 혁명을 늘 원하지 않소? 과연 그럴까요? <혁명만이 변화인가?>라는 책에서, “혁명의 문제점은 그것이 지나치게 과격하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미미하다는데 있다.” 혁명이 바꾸어 놓는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역사와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지혜로운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혁명이 바꾸어 놓는 것이 있다면 새로운 권력층과 새로운 소외 계층의 탄생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왜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이 없을까요?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의 본성” 말입니다.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제반 사건이나 현상들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할 때, 이 “죄”라는 요소를 배제한 그 어떤 분석도 결코 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죄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싸우기를 마다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7장은 “죄의 본성”에 대한 탁월하고도, 고전적인 교재(敎材)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이 때문에 <에베소서>에서도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의 원수였고 진노의 자녀였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의 원수가 되어 싸우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에게 하듯이 말입니다.
이 싸움에서 누가 이겼습니까? 적어도 지금까지의 판세로 볼 때 ‘야곱’의 판정승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상황이 하나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야곱’이 원체 완강하기 때문입니다. 항복은커녕 이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좀 비겁하고 치사한 편법을 사용하고 맙니다. 즉 씨름을 하다가 안 될 것 같으니까 반칙을 한 것입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32:25).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까? 그분이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야곱’의 항복을 받아내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비록 ‘야곱’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방식대로 그분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힘든 싸움에서 관절이 탈골되어본 적이 없습니까? 내 자신의 뜻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탈골을 경험해 본 적은 없었습니까? 모아둔 재산이 그냥 날아가 버렸다든지, 잘 다니던 직장에서 그냥 밀려나왔다든지, 질병으로 죽음의 고비를 맞이했다든지 등의 인생의 “탈골”을 경험해 본 적은 없었습니까? 필자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나와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좋은 계기가 된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시편>의 시인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영혼의 기도. 잘 나가던 싸움에서 상대의 반칙(?)으로 지게 된 ‘야곱’. 상황이 완전히 돌변해 버렸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돌변한 상황에서 그의 태도 또한 돌변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싸워왔습니다만 그 힘이 무기력하게 된 지금, 상대방의 온정과 자비에 기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32:26). 옴짝달싹 못하고, 땅에 퍼지고 앉아, 상대방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애원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런 그의 모습이 가련하고 측은해 보입니까? 연약한 패배자로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비로소 하나님에게 의존할 줄 아는 원래의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중입니다(J. M. Boice). 자신의 의지나 능력을 접어두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해하시면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그것도 안 되면 말고 식이 아니라 죽기 살기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야곱’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얍복강 혈투”의 마지막 장면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절름발이”가 되어 형 ‘에서’를 만나러 나아가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아주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왜 입니까?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신의 계획이나 뜻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그리고 온전한 육체가 아니라 불구자가 되어 형을 만나러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 모든 변화를 주도했습니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일 것입니다. ‘야곱’이 한 일이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야곱’이 누굽니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자, 흥정이나 싸움에서 결코 지기를 싫어하는 자가 아닙니까? 이번 혈투에서도 역시 그의 본성은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항복을 거부했고, 관절이 탈골이 되어 패배가 확실해졌는데도 상대를 가지도 못하게 붙들고서는 그로부터 축복이라도 받아내겠다고 떼를 쓰고 있습니다. 육체의 싸움에서는 졌지만, 정신적인 싸움에서는 이기고야 말겠다는 것이지요.
과연 그는 원하는 것을 받아냈습니까? 두 사람의 이어지는 대화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32:27-28). 하나님이 그를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부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참으로 역설적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이스라엘의 어원(語源)과 관련해서는 앞에서 충분히 다룬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과연 그는 사람들과의 싸움이나 흥정에서 항상 이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는 패배했습니다. 형을 속여 그의 축복을 빼앗는 데는 성공했습니다만 형의 신뢰와 선의를 얻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늙고 쇠약한 아버지를 속이는 데에도 역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만, 자신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말았습니다. 외삼촌을 속여 큰 재물을 얻는데 성공했습니다만, 이후 그와는 원수처럼 경계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싸움은 어떻습니까? 그는 분명히 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내고 맙니다: “그 사람이...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32:29하). 성공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얍복강 혈투”의 아이러니는 이런 것이 아닐까요? “죽으면 살리라.”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신약>에서도 이와 유사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즉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사람들이 낮출 것이요, 스스로 낮아지려는 자는 반대로 사람들이 높이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새로운 이름은 그가 하나님과 힘써 싸운 결과 얻은 보상이라면, 새로운 걸음걸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남겨주신 육체의 표적입니다. 새로운 이름이 그의 강인함과 끈질김으로 얻어낸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새로운 걸음걸이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앞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존적(自存的)인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依存的)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늘 기억하라는 뜻이겠지요. 사실 인간의 실존이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3. 에서 만나기
‘알렉산더’ 왕이 지중해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할 당시의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그가 ‘팔레스타인’의 지중해에 연해 있는 ‘두로’(Tyre)를 공략하고 있을 때 군수물자와 병력이 부족하여 ‘예루살렘’으로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당시 ‘예루살렘’의 제사장이었던 ‘야두스’(Jaddus)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은 ‘알렉산더’의 적국 ‘페르샤’의 ‘다리우스’ 왕에게 이미 충성 맹세를 한 바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알렉산더’는 불같이 화를 내며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위해 쳐들어옵니다. ‘예루살렘’은 풍전등화의 신세가 되었고, 제사장 ‘야두스’는 두려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야두스’의 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알렉산더’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를 맞이하러 나가되, 도시의 백성들을 대동하고, 자신은 흰옷과 제사장의 복장을 근엄하게 차려입고 나가라는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Josephus).
‘야두스’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성문을 열고 ‘알렉산더’를 맞이하러 나갑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도시를 초토화시킬 줄 알았던 그가 어찌 된 일인지 말에서 내려 제사장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가하고 부하 장수가 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그가 마케도니아에서 정벌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어느 날 밤 꿈에 제사장 복장을 한 사람이 나타나서 이번 전쟁에 크게 승리하여 아시아 지역을 정복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예언을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신 것으로 믿었고, 이제 그 앞에 실제 하나님의 제사장이 서 있으니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심정으로 그렇게 한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두려움 가운데 ‘알렉산더’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제사장 ‘야두스’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알렉산더’의 마음을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혹시 나에게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까?
용서와 화해. 이와 유사한 일이 지금 ‘야곱’과 ‘에서’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창 33). 지난 이십년 동안 ‘에서’는 오직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왔습니다. ‘야곱’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두려움 가운데 형이 살고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달리 다른 곳으로 갈 만 한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이번 귀향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형의 심사를 알아보기 위하여 하인들을 보내 보기도 했고, 재물과 가축과 가족들을 무리로 나누어 그에 앞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두려움은 가시지 않고, ‘얍복’강가에서 홀로 고민하며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 만남은 ‘야곱’에게 두 가지 큰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그리고 멀쩡하던 다리가 절름발이로.
달라진 것은 또 있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입니다. “얍복강 혈투”는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32:30). 이 싸움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대도 멀쩡하게 살아남았습니다. 그렇다면 형을 만나는 일쯤이야 뭐가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변화가 ‘야곱’에게만 일어났을까? ‘에서’는 어떨까? 그 역시 ‘알렉산더’처럼 이미 변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변화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에서’가 왜 사백 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오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혹시 있을지도 모를 전투를 대비했음이 아닐까요? 아무튼 이들의 어미 ‘리브가’의 예언은 결국에는 맞아 떨어졌습니다. ‘에서’의 분노는 식었고, 차분해 졌으며, 오히려 동생을 향한 애틋한 사랑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입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야곱 이야기>에서 아마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자, 절정으로 보아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우니라”(33:1-4).
무엇이 그렇게 감동적입니까? 그동안 무리의 맨 뒤에서 끌려가다시피 따라가다가 갑자기 앞으로 달려 나가는 ‘야곱’의 모습, 그것도 몸을 일곱 번 씩이나 굽히며 나아가고 있는 점, 이런 동생을 맞아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입 맞추고 있는 형의 모습, 급기야는 서로 껴안고 울고 있는 모습, 이 모든 것들이 실로 감동적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지요. 두 사람 모두에게 결코 있을 수 없는 모습이나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서로를 향한 적개심이나 질투심 그리고 라이벌 의식 등일 것입니다. “두 나라가 어미 뱃속에서부터 서로 싸우고 나누어질 것이며,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창 25:23)던 “리브가의 예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리고 “이삭의 축복”, 즉 “그가 형제들의 주가 되겠고, 형제들이 그에게 머리를 숙일 것이라”(칭 27:29)는 예언은 또한 어떻게 된 것입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이들 예언과는 정 반대가 아닙니까? 형이 아니라 동생이 형에게 엎드려 절하고 있는가 하면, 형을 향하여 “내 주여”하며 부르고 있으며, 그리고 자신을 “주의 종”으로 칭하고 있으니 말입니다(33:5-8).
두 사람은 지금 지난 그 모든 일들은 다 잊어버린 듯합니다. 아니면 일부러 그 모든 기억들을 묻어버리려고 애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를 잊으면 미래도 없다는 금언도 지금 이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사람은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는 듯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혹시 과거의 일로 지금도 서먹서먹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고 있는 동료나 이웃은 없습니까?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들은 없습니까? 나로 말미암아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미와 아직. ‘야곱’은 진정 달라진 것일까? 정말 이전의 ‘야곱’이 아니란 말인가? 그는 정말 거듭난 것일까? 그렇습니다. 그는 거듭났습니다. 그는 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대답이 이렇습니까?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다고 해서 그의 지나간 과거가 모두 사라졌다거나, 그의 이전 기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옛 ‘야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때로는 ‘이스라엘’이 되었다가 때로는 ‘야곱’으로 돌아가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야곱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창세기> 33-50장에서 화자가 ‘야곱’을 지칭할 때 늘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의 옛 이름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이름이 등장하는 회수를 보면 ‘야곱’이 45회, 그리고 ‘이스라엘’이 23회입니다. 이점 ‘아브람’의 경우와 두렷한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바뀐 이후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화자가 의도적으로 ‘야곱’과 ‘이스라엘’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실제 그가 형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용서와 분에 넘치는 은혜를 받은 후에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언행을 보면 다시 이전의 ‘야곱’으로 되돌아 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전의 ‘야곱’이 새 ‘이스라엘’을 이기고 있다고 해야 되겠지요.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첫째, 형이 받지 않겠다는 예물을 억지로 떠맡기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한 차례 거부 의사를 밝힌 바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충분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33:9). 그러나 그가 동생의 예물을 사양하는 이유는 더 큰 데 있습니다. ‘야곱’ 스스로도 고백했듯이, ‘에서’는 이미 모든 과거지사를 잊고 그를 진심으로 맞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마치 <누가복음>이 소개하고 있는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과도 같습니다(눅 15:20). 그는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용서와 화해를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참고. 레 19:17-18; 시 133; 잠 17:9, 17; 마 5:21-26; 요일 4:12-21). 그런데도 ‘야곱’은 막무가내입니다. 떠맡기다시피 예물을 주어버립니다(33:10-11). 그의 이런 행동은 동양 특유의 미덕으로 보아 크게 나무랄 수만은 없겠습니다만, 어쩐지 믿음직하지가 못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형의 호의를 물질로 보상해 보겠다는 동기가 저변에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저래 ‘야곱’은 독자들의 신뢰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둘째,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가 다시 이전의 거짓말과 임기응변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은 동생과 동행하여 고향에 가서 함께 살고 싶어 합니다(33:12). 그러나 ‘야곱’은 이 친절한 제안에 대해서 거짓말로 화답하고 맙니다. 그는 분명히 지금 당장 형과 동행하지는 못하지만, 나중에 뒤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33:13-14). 아무 것도 모르는 형은 동생의 신변을 염려해서 호위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가겠다는 제안까지 했습니다만, ‘야곱’은 이 제안마저 거절합니다(33:15). 이미 그는 마음속으로 딴 생각을 하고 있었고, 결국 처음 계획대로 ‘가나안’의 ‘세일’이 아닌 ‘숙곳’으로 가서 그곳에 정착하고 맙니다(33:17). ‘에서’는 또 한 번 속았습니다. 나중에 동생이 다른 곳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량없이 마음 좋은 ‘에서’, 그래서 늘 당하기만 하는 ‘에서’, 그럼에도 뒤끝이 없는 ‘에서’, 친절하고 쉽게 용서할 줄 아는 ‘에서’, 거짓말을 잘 할 줄 모르는 우직한 ‘에서’. 도대체 누가 진정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지 독자들마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세상은 누구를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까? 나는 어떻습니까? 과연 세상 사람들이 감당치 못하는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숙곳과 세겜. 셋째, ‘야곱’의 문제는 단순히 거짓말 한 번으로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선택한 정착지와 관련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는 형을 따라 사해 남쪽 ‘세일’ 땅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한동안 ‘얍복’강 근처의 두 지역 ‘숙곳’과 ‘세겜’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33:17-20). 두 장소에 대해서는 첨부한 지도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어디에 살든 그것이 문제가 될 것이 있습니까? 화자는 ‘야곱’의 선택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무어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역시 그에게 구체적으로 어디서 살아야 한다고 요구하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야곱’이 아직 ‘하란’의 ‘라반’ 집에 있을 때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면서 자신을 “벧엘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신 적이 있기는 합니다(31:13). 그리고 ‘야곱’ 역시 그 당시 ‘벧엘’에서 “돌 제단”을 세우고, 다시 돌아오게 되는 날에는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십일조를 바치겠다는 맹세를 한 바 있습니다928:20-22). 그렇다면 그는 ‘숙곳’이나 ‘세겜’이 아니라, ‘벧엘’로 돌아갔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화자는 ‘야곱’이이 ‘숙곳’에 정착한 것과 관련해서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33:17). ‘야곱’이 이곳을 선택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 듯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겜’은 어떻습니까? 그나마 훨씬 나아진 모습입니다(33:18-20). 이 지역은 적어도 위치상으로는 ‘요단’ 서편의 ‘가나안’에 속할 뿐만 아니라, 비로소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33:20하). 이런 모습은 그가 ‘벧엘’을 떠난 이후 처음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은 그가 있을 곳은 못 된다는 것이 이어지는 에피소드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의 딸 ‘디나’가 이 땅의 추장 ‘세겜’에게 부끄러운 일을 당한 후,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35:1).
“얍복강의 혈투” 이후 ‘야곱’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두 정체성 모두에 충실하려는 모습입니다. 특히 ‘세겜’에서 하나님의 제단을 쌓고 살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마치 ‘소돔’에서 의롭게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롯’과도 같습니다. 왜 ‘롯’은 “아브라함 공동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편이 훨씬 쉽게 사는 길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왜 ‘야곱’은 “에서 공동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구약>은 “지리에도 신학이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땅히 살아야 할 장소가 있으며, 마땅히 살아내야 할 삶이 있습니다. 살아야 할 공간은 “교회”일 것이며, 살아야 할 삶은 “성령 충만의 삶”일 것입니다. ‘야곱’이나 ‘롯’이나 모두 엉뚱한 곳에서 올바른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군들 ‘야곱’이나 ‘롯’과 같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7장>은 ‘야곱’과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갈등과 투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장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1-24).
해답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 해답을 알고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야곱 이야기>의 구성을 살펴보고, 본문이 차지하는 문학적 기능과 이와 대칭을 이루는 장면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2. 본문은 <야곱 이야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분수령이자 절정에 해당하는 곳이라 할 만 합니다. 왜 그러한지 토의해 봅시다. 신학적 주제나 모티브등을 이끌어내 봅시다.
3. <얍복강 혈투>는 적어도 이야기의 구성상의 측면에서 볼 때, 이야기의 흐름에서 일탈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 에피소드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 당위성은 무엇입니까?
4. ‘이스라엘’이 갖는 이중성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유사합니까?
5. 나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