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라반 이야기>의 다섯 번째 에피소드를 끝으로 ‘라반’은 더 이상 무대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야곱-라반 이야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야곱 이야기>에서 주인공 ‘야곱’에 비해 ‘라반’은 조연에 불과하지만, 그의 역할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두 인물은 인격적 특성에 있어서나, 윤리∙도덕적 차원에서나 난형난제(難兄難弟)의 라이벌이자 숙명의 앙숙입니다. 두 인물 모두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점 <창세기>의 독자들이 교훈과 적용을 위해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야곱’의 편에서 보자면 ‘라반’이 그의 반면교사가 되어야 했습니다. 화자의 의도도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즉 ‘라반’은 ‘야곱’의 인격과 신앙적 성숙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장애물이며, 환난과, 연단이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그러나 ‘라반’의 존재는 ‘야곱’이나 현대 독자들에게 단순히 윤리∙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족장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주제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대화의 내용이나 화자의 진술 등을 통해서 이를 확인해 보기 바랍니다. 특히 화자는 이야기의 시작과 결말에서 “현현”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首尾相關으로 처리함으로써, 이 주제를 더욱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들 관점이 본문의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야곱-라반 이야기>의 네 번째 에피소드의 범위나 단락과 관련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었듯이, 이어지는 다섯 번째 에피소드 역시 그 시작 부분에 비해 마지막 부분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에피소드의 결론을 정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해당 구절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경야하고(31:54)
라반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31:55)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32:1)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님이라 하였더라(32:2)
다섯 번째 에피소드의 결말로 어디가 가장 적절할까요? 31:54는 어떻습니까? 31:54와 31:55 사이에 하루 밤이라는 시간 차이가 있고, 31:55에서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에 생각해 볼 수 있는 방안입니다. 이 구절(31:55)은 분명 새로운 장면을 시작하기에 충분한 요소를 담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반드시 새로운 ‘에피소드’의 시작으로 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물론 이 장면(31:55)이 없다면, 31:54는 이야기의 결말로 어딘지 미흡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즉 이곳에서는 '야곱'이 탈출하고, ‘라반’이 그를 좇아가며, 이후 ‘라반’이 그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등을 보여주어야 할 것인데, 만일 31:54에서 끝이 난다면 이들 장면들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미완성의 마무리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31:55를 앞 장면에 포함시킨다면 이야기는 그런대로 적절하게 끝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32:1은 어떻습니까?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야곱’이므로, 이야기의 마지막을 그에 관한 언급으로 끝맺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31:55와 32:1이 서로 교차대구의 관계로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라반이... 돌아갔더라”(31:55); “야곱이 진행하더니”(32:1). 이런 형식적 관계에 주목하면서 혹자는 32:1상을 에피소드의 결론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Blum). 그러나 이어지는 후반절(32:1하),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났더라”를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물론 이곳에서부터 새로운 명사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하고 있어 다른 에피소드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나, 곧 이어 대명사 “그”가 등장함으로써 앞 이야기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그렇게 볼 수만은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32:1하)은 이어지는 구절(32:2)과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두 구절(32:1-2)을 이번 에피소드의 결말로 볼 수 없는 주 된 이유는 문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 내용에 있습니다. 즉 이곳에서 화자가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자”(&a;l]m, 말라크) 즉 천사는 ‘야곱’이 ‘라반’을 피해 도망치는 이야기와는 사실상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용상 32장의 나머지 이야기와 더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즉 ‘야곱’은 그의 사자(&a;l]m, 말라크)들을 그의 형에게 보내었으며(32:4, 7), 그의 진영을 둘로 나누었는데(32:8, 9, 11, 22; 33:8), 이는 문자적으로 “두 진영”을 뜻하는 ‘마하나님’(32:2)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얍복’ 강에서 “어떤 사람” 즉 “초자연적인 인물”과 씨름을 하기도 했습니다(32:24-34). 이렇게 볼 때, 32:1-2는 이번 에피소드의 결말로서보다는 오히려 다음 이야기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논리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오히려 정반대의 논리를 펼칠 수도 있습니다. 즉 이 두 구절을 다음 이야기를 암시하거나 예고해주는 일종의 결말로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창세기> 화자는 한 이야기를 끝낼 때, 수시로 다음 이야기를 예고하거나 암시하는 내용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기법을 <태초의 이야기>나 <요셉 이야기> 및 <야곱 이야기>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30:43-31:1의 결말은 31:2-32:3의 내용을 예고하고 있는가하면, 33:18-19의 결론적인 선언은 34장의 내용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났음을 알리는 또 다른 형식적인 특징으로서, 이야기의 끝에 등장인물의 고백이나 설명을 담은 선언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님이라 하였더라”(32:2).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이와 유사한 마무리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1)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30:24); (2)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31:1); (3)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34:31)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일곱 개의 장면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혹자는 이중 다섯 번째 장면 즉 ‘야곱’과 ‘라반’이 대면하고 있는 장면(25-44절)을 <야곱 이야기> 전체의 절정으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이래저래 이번 이야기는 <야곱-라반 이야기>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등장하는 일부 내용들은 지나간 이야기에 대한 전제가 없이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이유 때문인데, 예를 들자면 “야곱이 레아와 라헬과 결혼한 이야기(4-17절, 26-50절), ”야곱이 라반을 섬긴 이야기“(6-13, 37-42절), ”그가 고향을 멀리 떠나와 있다는 사실“(3, 18, 30, 49, 52:32:3)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앞선 이야기 내용들을 생략하지 않고서는 이번 에피소드의 내용 또한 임의로 삭제할 수 없다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결국 이번 에피소드는 <야곱-라반 이야기>의 한 부분이면서 동시에 골격을 유지시켜주고 있기도 합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야곱-라반 이야기>의 대칭적 구조에서 볼 때, 이번 에피소드는 ‘야곱’이 ‘라반’의 집을 떠나는 이야기로서, 그가 이전에 '라반'의 집을 찾아오던 이야기(29장)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를 통해서 일련의 모티브나 표현들 또한 짝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정착할 즈음에 그가 결혼과 관련해서 당해야 했던 “속임수의 모티브”는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속임수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즉 이번 에피소드에서 '야곱'은 옛날 그가 이곳에 도착할 당시 ‘라반’에게 당했던 그 속임수에 대해서 회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라반’의 집을 떠나면서 그 자신이 새로운 속임수를 통해서 이전에 당했던 것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다고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를 통해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훔치다” 또는 “도적질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가나브’(bn”G)가 그 의미를 잘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공히 등장하고 있는 또 다른 핵심 단어들은 “입맞추다”(29:11, 13; 31:28; 32:1)와 “품삯”(29:15; 31:7, 41) 등입니다. 그리고 “돌”도 두 이야기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앞 이야기에서 ‘야곱’은 “돌”을 굴리고 있는데(29:3, 8, 10), 이번 이야기에서는 “돌”을 세워 “무더기”를 만들고, 그것을 ‘갈르엣’(d[el]G, 갈레드) 즉 “증거”로 삼고 있습니다(31:47-48). 그리고 전체적인 <야곱 이야기>의 대칭 구조에서 볼 때, “마하나임 사건”(32:2-3, 즉 그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 그곳을 하나님의 군대로 불렀던 사건)은 벧엘 사건(28:12, 17, 19)과는 병행 관계에 있습니다.
비록 이번 이야기가 <야곱-라반 이야기>에만 국한된 것 같지만 실은 그 이상입니다. 즉 <야곱-에서 이야기>에 대한 참고 본문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컨대,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31:13)는 구절은 이전에 ‘야곱’이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당시를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28:10-22). 그리고 이번 에피소드에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31:3, 5, 29, 42, 53)는 표현 역시 ‘야곱’ 언약과 관련된 특징적인 수사(修辭)로서, 당시의 상황을 마찬가지로 돌아보게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번 이야기 전체가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의 땅 즉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대 전제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31:3, 18, 30, 49, 52-32:2). 그런 점에서 이번 이야기는 27장과도 비교를 해 보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의 유사성은 무엇입니까? ‘야곱’과 ‘라헬’의 행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야곱’은 그의 아버지를 속여 유업과 축복을 훔쳐 고향을 떠난 바 있습니다. ‘라헬’ 역시 그녀의 아버지 몰래 ‘드라빔’ 즉 집안의 축복과 번영을 상징하는 우상을 훔쳐 달아나고 있습니다. 공통점은 또 있습니다. 두 사람의 아버지에 관한 묘사가 그것입니다. 즉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눈이 멀어 작은 아들을 큰 아들로 착각했던 것처럼, ‘라헬’의 아버지 ‘라반’ 또한 딸의 작은 딸의 거짓말에 마치 장님처럼 속아 넘어갔다는 점입니다. 흥미롭게도 화자는 두 이야기에서 이들 아버지의 행동을 같은 단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vv'm, 마샤쉬)”(27:22상); (2)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vv'm, 마샤쉬)”(31:34);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vv'm, 마샤쉬)”(31:37). 이 동사는 “만지다”, “더듬다”, “더듬어 찾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단순히 <야곱 이야기> 뿐만 아니라, <족장 이야기> 전체의 문맥과도 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야곱’은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란’ 땅에서 처음으로 소명을 받았던 것처럼 역시 같은 땅 ‘밧단-아람’에서 유사한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31:3). 구문론의 관점에서 볼 때도, 그가 받은 소명은 ‘아브라함’이 받았던 소명과 유사합니다. 하나의 명령문에 이어 하나의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등장하는 단어들 또한 거의 같은 것들뿐입니다: “가라”; “족속”; “네 조상의 땅”; “내가 지시하는 땅”. 물론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아비의 땅”으로 돌아가는 귀향이지만, ‘아브라함’의 경우는 “아비의 땅”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가는 것의 차이입니다. 또한 이번 이야기는 24장의 <이삭 이야기>와도 비교를 해 볼 만합니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는 그녀의 아버지 ‘브두엘’과 그녀의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합니다. 이때에도 그녀의 오빠 ‘라반’은 동생이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책략을 꾸미고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를 끝으로 '라반'은 더 이상 <창세기>에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돈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나그네 ‘야곱’과 함께 하셨으며(31:5, 9, 42), 그럼에도 화자는 이 주제를 <요셉 이야기>에서 본격적으로 부각시킬 때까지(39:2, 21, 23) 오히려 자제하고 억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라빔’을 찾는 ‘라반’의 모습은 ‘요셉’이 몰래 넣어준 “잔”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44:1-3). 이런 사례들을 통해서 볼 때 이번 에피소드는 <족장 이야기> 전체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으로 “자료비평”의 입장은 본문이 거의 대부분 <엘로힘 전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부 <야훼 전승>에서 취한 자료와 18절을 <사제 전승>에서 가져온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전체 이야기 중에서 어디까지를 <야훼 전승>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합니다. 이번 에피소드가 주로 <엘로힘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본문에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 때문일 것입니다(7, 9, 11, 16, 19, 24, 42; 32:2, 3). 그리고 “꿈을 통한 계시”라든지(10, 11, 24절), “벧엘의 서약”에 관한 언급(13절; 참고. 28:18, 20-22) 등도 본문이 <엘로힘 전승>임을 지지해 주는 근거가 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엘로힘’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야훼”도 나타나고 있어(3, 49절) <야훼 전승>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이야기의 말미(末尾)에 등장하고 있는 ‘야곱’과 ‘라반’이 언약을 맺는 부분에서(44-54절) 이야기가 불필요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자료가 섞여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전통적인 자료비평의 입장 내에서도 더욱 세분화되고 다양한 견해들이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Wenham, 268쪽.
그러나 보다 최근의 자료비평적 입장은 31장 전체를 <야훼 전승>에 속한 것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로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창세기>의 이전 이야기들이 거의 대부분 <야훼 전승>에 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자료 내에서조차 상반되는 견해들이 등장하고 있는 사실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로써, ‘야곱’이 부자가 된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고 하는가 하면, 반대로 ‘야곱’의 재능 때문이었다고 시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상반된 견해가 공존하고 있는 것은 두 자료가 공존하고 있는 증거로 보기보다는, 화자 특유의 다양하고도 풍성한 설화 스타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반론은 또 있습니다. 즉 등장인물들이 대화중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훼’가 아니라 ‘엘로힘’을 오히려 더 빈번하게 거명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런 사실 또한 본문의 자료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들 즉 ‘야곱’의 아내들이 처해있었던 이방적인 환경이나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이 전적으로 <야훼 전승>에 속한 것이라는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에 대해서는 Wenham의 저서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Wenham, 269쪽.
신학과 신앙
서론(2절)
새로운 이야기는 달라진 ‘라반’의 태도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31:2)
이러한 변화는 이미 직전 ‘에피소드’의 결말에서부터 그 싹이 움트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31:1). 이러한 언급은 분명 ‘야곱’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완전한 결말을 보기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편에서 볼 때, 그의 사촌들이 하는 이 말은 그들의 아버지 ‘라반’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며, 이는 그동안 ‘라반’이 보여준 행태에 근거해 볼 때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탐욕과 허위로 가득 찬 인물, 그가 ‘라반’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화자는 이곳에서 ‘야곱’의 많은 재물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언급이 없습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해 보도록 유도하고 있는 듯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야곱’이 그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화자는 지금 ‘야곱’의 눈으로 현재의 상황을 보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장인이나 사촌 형제들에게 달갑지 않은 인물이 되었으며, 자신을 지지해 줄 아무런 친족도 주변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두려워졌고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제 1막: 현현(3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야곱’이 형을 피해 도망할 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에게 나타나십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3절)
모르긴 해도 ‘야곱’은 아마 이 순간 자신의 절실한 필요 때문에 하나님의 현현 즉 그분의 음성에 대해서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이 명령은 여러 면에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 그분이 하셨던 그 말씀과 흡사한 데가 많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12:1-2).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명령은 약속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은 오래 전 ‘벧엘’에서 이미 하신 약속이기도 합니다(28:15).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순종을 전제로 그 약속을 재확인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약속-명령-약속의 재확인”은 성서 신학의 중요한 한 패턴이기도 합니다. 즉 은혜에 대한 순종의 반응은 더 많은 은혜를 가져온다는 것이지요.
제 2막: 설득(4-16절)
두 번째 장면은 ‘야곱’과 그 아내들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화는 성경적 기준에서 볼 때 필요 이상으로 길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의 내용이 상당히 중요한 무엇인가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특히 ‘야곱’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라반’과 그의 아들들이 한 편이 되어 자신을 적대하고 있는 이 시점에 자기편이 되어 줄 누군가를 만들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당면하고 있는 상황을 길고 상세하게 아내들에게 설명해서 설득을 시켜 자기편을 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믿을 만한 사람은 아내들뿐이라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아내들과의 대화 곳곳에서 자신의 행동과 그 동기에 대해서 이전에 화자가 설명한 바와는 사뭇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연 ‘야곱’은 단순히 그의 과거지사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서 간추려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내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사실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입니까? 적어도 아내들을 설득시켜, 고향과 아비 집을 떠나 남편을 따라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동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정당하다는 점을 확신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과연 아내들이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어쩌면 여우 굴을 피해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지도 모를 남편과의 동행을 결심하고 나설 것일까? 바로 이점이 두 번째 장면의 핵심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선 이들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장면의 배경이 아주 이례적입니다:
야곱이 사람을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4절)
즉 ‘야곱’이 아내들을 “들”로 불러내었다는 점인데, 이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였겠지요. “들”에서는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이 훨씬 어려울 테니까 말입니다(참고. 신 22:25). 여기서 화자가 ‘야곱’의 아내들을 거명하는 순서가 흥미롭습니다: “라헬과 레아”. 여전히 ‘야곱’에게 ‘라헬’이 우선입니다.
‘야곱’이 아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동안 ‘라반’이 자신을 어떻게 대했으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지에 관한 것인데, 각기 다른 내용으로 세 번에 걸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어라 말씀하셨는지 마지막 결론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야곱’은 자신에게나 아내들에게 있어서 분명한 사실을 먼저 언급함으로써, 설득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5절상). 아내들을 설득하려 하면서 그들의 아버지를 비난하는 것으로 시작하게 되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곧바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5절하).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아버지가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점을 은연중에 알리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에 서셨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객관적인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아내들에게 들려줌으로써, ‘야곱’은 대화를 이어갈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보다 공개적으로 그의 장인을 비난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사례를 열거하기 전에 먼저 아내들도 인지하고 있고 공유할 수 있는 사실 한 가지를 더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동안 한 일에 대한 호소입니다: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6절)
당연히 이어질 대화의 내용은 ‘라반’의 대조적인 행위일 것입니다. 성경적 기준에 서 볼 때 공공의 비난을 받아 마땅한 행동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7절)
애초에 지킬 의사도 없는 약속을 한 번도 아니고 열 번씩이나 반복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품삯(tr,Kic]m, 마스코레트)은 <야곱-라반 이야기>의 핵심 단어이기도 합니다(29:15; 30:16, 32, 33; 31:7, 41). 그러나 ‘야곱’은 곧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행위를 ‘라반’의 행위와 대조시킴으로써, 다시 한 번 그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각인시키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교묘하게도 ‘야곱’은 그의 결혼식 날 ‘라반’이 자신을 속였던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아마 두 아내 모두로부터 동의가 필요한 시점이라 이처럼 예민한 사안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신에 그는 가장 최근의 사례를 주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8절)
그러나 그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조차도 이전에 화자가 들려주던 바와는 사뭇 다릅니다(참고. 30:31-42). 이전 이야기에서 화자는 양과 염소 떼 모두에 대해서 언급하였으나, 여기서 ‘야곱’은 염소 떼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이야기에서는 화자는 ‘야곱’이 어떻게 했는가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었던 것에 비해, 이곳에서 ‘야곱’은 그 모든 일의 결과가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이야기에서 화자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야곱’과 ‘라반’ 사이에 맺은 언약의 핵심은 ‘야곱’이 돌본 가축 떼들 중에서 반점이나 줄무늬가 있는 것들은 모두 ‘야곱’의 소유로 인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야곱’은 두 차례의 계약, 즉 점 있는 떼와 줄무늬가 있는 떼에 대해서 두 번의 계약이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첫 번째 계약은 점 있는 짐승을 야곱의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첫 번째 계약 조건을 바꾸어 줄무늬가 있는 짐승이 나타나면 이들이 ‘야곱’의 소유가 된다는 내용을 담은 것이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약 변경이 있었다는 암시입니다.
과연 어느 쪽 이야기가 더 신빙성이 있습니까? 솔직히 30장에서 들려주는 화자의 이야기가 없다면 ‘야곱’의 행동과 그가 맺은 계약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화자는 여기서 그의 독자들이 이미 30장의 내용을 익히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야곱’의 버전을 들려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두 이야기에서 화자와 ‘야곱’이 각기 다른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즉 ‘야곱’의 이야기는 상당히 의도적인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과연 그와 함께 하셨다고 강조함으로써, 그의 아내들을 설득시키고 감동시키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그가 강조하려는 바는, “아무리 라반이 계약 조건을 바꾸고 꼼수를 쓰도, 행운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라반’의 운명이 계약 조건을 바꾼다고 해서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지요: “점 있는”(dqon, 나코드) 짐승과 “줄무늬 있는”(dqo[, 아코드) 짐승의 차이가 ‘히브리’ 단어에서 철자 한 자의 차이 뿐이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사실 ‘야곱’의 편에서 보자면 그가 ‘라반’의 가축을 돌보던 6년 동안 그와의 계약 조건을 바꾸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계약과 관련해서 ‘야곱’이 그의 아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와 화자가 들려주고 있는 것(30:25-31:1)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이야기에서 강조하려고 하는 핵심은 이어지는 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9절)
그의 이 말은 ‘라반’의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불평하며 했던 말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31:1상). 여기서 하나님의 행동과 관련해서 ‘야곱’의 단어 선택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빼았다”(lx'n, 나찰)는 단어로서, “구원하다” 또는 “구출하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에서 이 단어는 31:16의 용례를 제외하고 나면, “누군가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출해 내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32:11; 37:21-22). <출애굽기>에서는 “노예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3:8; 5:23; 6:6).
반면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의 행동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 빼았다(jq'l, 라카흐)는 단순히 “취하다”(take)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라반’의 가축을 취하여 ‘야곱’에게 준 것이 아니라, ‘라반’의 가축들을 구출하여 ‘야곱’에게 줌으로써 그 짐승들에게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야곱’은 아내들에게 하나님의 현현 즉 꿈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10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 11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3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10-13절)
화자는 3절에서 이 꿈에 대해서 이미 언급한 바 있으며, 따라서 ‘야곱’이 이곳에서 그의 아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동일한 꿈에 대한 추가 설명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새롭게 더하고 있는 내용은 10절과 12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양 떼를 탄 숫양”에 관한 두 번의 진술이 그것입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 화자가 3절에서 소개하지 않은 내용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꿈의 핵심 내용과 관련해서 이 두 구절을 삭제하는 것이 문장의 흐름 상 더 무난할 것으로 보입니다. 10-13절의 본문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 ‘야곱’이 언제 이 꿈을 꾸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화자가 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야곱’은 꿈을 꾼 후 곧바로 그의 아내들에게 그 내용을 말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10절에 따르면, “양 떼가 새끼를 밸 때에”, 즉 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의문은 꿈의 내용과 관련해서 본문과 3절이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꿈의 핵심 내용이 ‘야곱’의 귀향과 관련된 것이라면, ‘야곱’의 이야기(10-13절) 중에서 이와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내용, 즉 “양 떼를 탄 숫양이 다 얼룩지고 점이 있고 아롱진 것"(10, 12절)이라는 두 번의 진술을 삭제해버린다면 두 본문이 최소한의 일치를 보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이어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지금 아내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없는 사실들을 덧붙여 과대포장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고 만일 그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양 떼를 탄 숫양과 관련한 진술이 하나님의 현현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질문과 관련해서 자료비평 진영에서는 이 두 구절을 후대의 편집적 삽입의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그 출처가 전혀 다른 독립적인 자료가 아니라 원래의 <엘로힘 자료>의 본문이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 결과로 보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료비평적 설명을 인정한다 하드라도 또 한 가지 미심쩍은 점은, 현현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벧엘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는 부분은 이야기의 마지막이 아니라 처음부터 밝혔어야 했던 내용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10-13절의 구성과 배열은 지극히 의도적인 것이라는 입장 또한 상당히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즉 이곳 본문의 형식과 구조는 다른 <족장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계시나 현현을 소개할 때 사용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게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본문은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꿈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하나님의 신탁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1) 10절: “내가 꿈에 눈을 들어보니...하는지라”(참고. 28:12-13상; 15:12, 17); (2) 11-12절: “꿈에 대한 설명”(28:13하-15; 15:13, 15, 18-21); (3) “이어지는 명령”(28:20-22).
<창세기>에서 “내가 꿈에 눈을 들어보니”라는 표현은 이제 그가 보게 될 꿈의 내용이 상당히 중요한 것임을 시사해 주는 것입니다(참고. 22:4; 24:64). 그가 본 것은 “양 떼와 짝짓기를 위해서 올라타는 숫양은 모두 얼룩무늬가 있거나 점이 있거나 또는 아롱진 것들”이라는 것인데, 이는 꿈의 핵심 주제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아래 각주 참조),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색 있는 숫양은 원래 '야곱'이 맡아 기르던 무리 중에는 없었던 것입니다(30:35).
‘야곱’이 보았다는 하나님의 사자는 <창세기>에서 “야훼의 천사”로 더욱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21:17; 28:12; 32:2). 그런데 천사가 꿈에 나타나 그에게 전해주는 이야기라는 것이(12절) ‘야곱’ 자신은 이미 보았고 그의 아내들에게 들려주었던 것입니다(참고. 8절). 천사는 그 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무 설명도 없이 그저 다시 한 번 들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아내들에게 이미 했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말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즉 그는 아내들에게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9절)고 말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얼룩무늬가 있거나 점이 있거나 또는 아롱진 것들” 모두는 자신의 육종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 결과임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것을 보실 때, 직접 개입하셔서 그들을 구출하신다는 것입니다(16:13-14; 29:32; 31:42; 출 2:25; 3:7, 9, 16).
아내들을 설득하기 위한 마지막 호소로 ‘야곱’은 ‘벧엘’의 서원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는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나올 때,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서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무사히 그를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하나님은 그의 주가 될 것이며, 그곳에서 그분을 섬길 것이라고 말입니다. 과연 그때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오랜 객지생활에서 지켜주셨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신다면, '야곱'은 이유 불문하고 그가 서원했던 바대로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또 그렇게 할 때 더 많은 축복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아내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요지도 이런 것입니다. 그의 귀향은 서원을 지키는 것이며, 소명을 이루는 것이고, 동시에 더 많은 축복을 얻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야곱’의 설득은 주효했습니까? 아내들은 그의 생각에 동의하며 행동을 같이 하기로 작정했습니까? 그들의 반응은 민첩했고 단호했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아버지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14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15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16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14-16절)
분깃과 유업은 ‘레위’족속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지파에 속한 자라면 당연한 권리로 주장할 수 있는 땅을 말하지만(신 10:9; 12:12), 딸에게는 해당 없는 사항이었습니다(민 27:1-11). 그러나 이 두 사람이 기대하고 있는 것은 결혼 지참금 정도일 것입니다. 아마 그것조차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개 결혼 지참금은 부유한 아버지가 딸의 결혼 시에 내어놓는 것이 상례입니다. 가난한 가족의 경우는 딸을 “노예-아내”로 팔 수도 있는데(출 21:7-11), 그럴 경우에는 결혼 지참금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라헬’이나 ‘레아’ 모두 결혼 할 때 몸종을 딸려 보냈을 정도니 상당한 정도의 결혼 지참금을 이미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아버지가 자신들을 팔고 돈을 다 먹어버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혹시 신랑이 신부의 아버지에게 결혼 기념으로 주는 선물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대개 이 선물은 나중에 신부의 아버지가 결혼 지참금 속에 포함시켜 딸에게 주는 것이 상례라고 합니다. 혹시 이것을 '라반'이 혼자 먹어치웠다는 뜻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결혼 선물로 ‘라반’에게 제공했던 것은 재물이 아니라 그가 십사년 동안 제공했던 노동력이었음을 상기할 때, 두 사람의 주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애매합니다.
오히려 이들의 말을 단순히 ‘야곱’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즉 그들의 아버지가 남편을 여러 차례 속여 품삯도 주지 않고 노예처럼 부렸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이들은 남편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라반’의 재물을 빼앗아(구출하여) 남편에게 주었으니, 이제 남편 뜻대로 하라고 격려하고 나섭니다.
제 3막: 탈출(17-21절)
탈출은 아주 급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화자의 설명은 매우 서두르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야곱’이 얼마나 더 지체했는지에 대해서 언급조차 없습니다. 아내들의 동의를 얻은 마당에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습니다. 온 가족과 재물을 낙타들 등에 태우고 황급히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17절)
그러나 화자는 이 부분에서 갑자기 속도를 늦추면서 ‘야곱’의 소유에 대해서 상세하고 느릿느릿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18절)
화자는 왜 이처럼 이야기 속도를 늦추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야곱’이 이사하는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아닐까요? ‘야곱’은 그동안 많은 재물을 모아 ‘라반’을 떠나는 일이 이전에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오는 일보다 더 어렵게 된 것이 분명합니다. 화자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 “그 모은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하란’으로부터 ‘가나안’으로 이사하던 장면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12:5). 이 동일한 표현은 훗날 ‘야곱’이 ‘이집트’로 이주해 올 때의 모습을 그릴 때도 등장하고 있으며(46:6), 그리고 ‘야곱’의 후손들의 출애굽과 관련된 예언에서도 역시 등장하고 있습니다(15:14). ‘야곱’을 ‘가나안’에서 ‘밧단-아람’으로 보낸 자는 ‘이삭’이었는데, 이제 ‘야곱’이 다시 돌아갈 즈음에 당시 등장했던 두 지명들이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야곱’은 이제 이전에 왔던 그 길을 따라 그대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라반’에게 알리지도 않고 도망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라반’은 지금 양털을 깍으러 나가고 집에 없습니다: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19절상)
화자는 이어 ‘라헬’이 아버지의 신물(神物)인 ‘드라빔’을 훔쳤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그녀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32-35절). 도대체 이 물건은 무엇이며, 왜 이것을 훔쳤을까? 이 단어는 <구약>에서 열다섯 번 등장하고 있으며, ‘힛타이트’ 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때로 이 단어는 “가족 우상”으로 번역하기도 하며, 이곳에서는 그냥 “신”으로 부르고 있습니다(30, 32절). 이로 미루어 ‘드라빔’은 가족을 보호해주는 신으로 가족 구성원들이 숭배하던 신의 형상을 한 물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혹자는 이 물건이 신이 아니라 조상들의 얼굴을 새긴 조각물로서 후손들이 경배하고, 필요시 자문까지 구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 크기는 낙타 안장 아래에 숨길 정도로 그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나(34절), 사람의 키 크기 정도 되는 ‘드라빔’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삼상 19:13, 16). 이방 사회에서나 때로는 이스라엘에서조차도 ‘드라빔’은 가정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만, <구약>의 기록에 따르면 점이나 주술 등에 사용되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분명 미래에 대한 예언의 능력을 갖춘 것으로 인정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라헬’이 ‘드라빔’을 훔쳤을까요?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설명 중의 하나는, “조상의 형상을 새긴 드라빔을 가진 자는 가계의 상속권도 물려받을 수 있다”는 ‘누지’(Nuzi)식 관습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다소 의심스럽긴 하지만, 설령 사실이 그렇다 할지라도, 상속을 상징하는 물건을 훔친 것만으로도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고 믿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 나라의 모든 백성들은 집안에 예배의 대상을 두고 있었으며, 외국으로 나갈 때는 그들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상 기대할 수 있는 바는, 한 집안의 가장은 자식들에게 이들 신물들의 복사품이나 모조품을 만들어주어 가지고 다니게 했을 것이며, 집안에 함께 거주하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의 신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35:2-4). 그래서 ‘라헬’의 경우 급하게 도망을 치는 상황이니 아버지의 신물을 그냥 훔쳐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달아나는 마당에 이 신물은 왜 필요했던 것일까요? 혹자는 이 물건이 출산을 보장해 준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또는 무사 탈출을 위한 일종의 부적 내지는 수호신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훔쳤다면, ‘야곱’은 ‘라반’의 마음을 훔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20절)
화자는 여기서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히브리 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가 도망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아람 사람 라반을 속였다.” 여기서 속이다(bn"G, 가나브)는 훔치다 또는 도둑질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26절에서도 같은 의미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그러니까 ‘라헬’이나 ‘야곱’은 함께 ‘라반’을 속인 자들이 된 셈입니다. 그리고 ‘아람’ 사람(yMir'a, 아람미)이라는 표현을 ‘라반’(@b;l)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 또한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습니다. ‘라반’이 ‘라헬’ 대신 ‘레아’를 결혼 첫날밤에 들여보냄으로써 ‘야곱’을 속인 것과 관련해서, 속이다는 의미의 또 다른 동사 ‘라마’(hm;r)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아람’ 사람(yMir'a, 아람미)에 대한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언어의 유희는 역시 유사한 숫자의 ‘히브리’ 철자를 포함하고 있는 다른 동사, 도망치다(jr'B,바라흐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 4막: 추격(22-24절)
제 3막에서 화자가 시사하고 있는 바는, 속임수와 거짓말의 달인(達人) ‘라반’은 그의 딸 ‘라헬’로부터 한 번, 그리고 사위 ‘야곱’으로부터 또 한 번, 도합 두 번 속임을 당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떠난 지 삼일 후에야 ‘라반’은 이 사실을 알고 분노로 숨을 헐떡이며 ‘야곱’을 추적하러 나서고 있습니다:
22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23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22-23절)
‘야곱’이 떠난 삼일 후에 ‘라반’이 뒤따라갔으므로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10일이 걸려야 할 것입니다. ‘유프라데스’ 강에서 ‘길르앗’까지 대략 480 킬로미터이니, 가축 떼를 이끌고 가려면 십일 이상이 소요될 거리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십일은 대략적인 숫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은 이야기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24절)
그래서 ‘웨스터만’(Westermann)혹자는 이 구절과 함께 29절은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으로서, 이야기의 주제와도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내용이므로, 무시해버려도 괜찮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궁켈’(Gunkel)의 입장은 다릅니다. 그에 따르면, 만일 이 꿈이 아니었더라면 ‘라반’이 나중에 ‘야곱’을 그렇게 관대하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24절은 <야곱 이야기>에서 중요한 모티브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티브란 하나님의 섭리(개입)를 말하는 것으로서, ‘야곱’도 아내들과의 대화중에 여러 차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셔서 ‘라반’으로 보호해주셨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5, 7, 9절). 따라서 24절은 그런 점에서 상당히 의도적인 진술로 볼 수 있습니다.
제 5막: 대결과 언약(25-54절)
대결(25-44절). 그러나 ‘라반’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향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비난의 강도나 길이에 있어서 이번 장면은 <창세기> 내에서 가장 격렬하고 긴 장면 중의 하나로 꼽을 만합니다. 하지만 법적 분쟁과도 같은 긴 다툼을 통해서 ‘라반’과 ‘야곱’의 상대적인 위치나 지위가 근본적인 변화를 거치게 될 것입니다. 즉 무대의 첫 장면에서 ‘라반’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신의 조카이자 사위이며 자기의 권위 아래 있는 ‘야곱’을 불러 세워 야단을 치고 있습니다(26-30절).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야곱’은 ‘라반’과 대등한 자격으로 언약을 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이제 한 가장으로서, 그리고 독립적인 한 개인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입니다(45-54절).
첫 장면의 내용은 ‘라반’의 불평과 비난을 담은 것입니다:
26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27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28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 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 29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30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26-30절)
‘라반’의 불평은 대략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조카를 떠나보내는 공식적인 이별 행사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며(26-30절상), 다른 하나는 ‘야곱’이 자신을 속여 몰래 도망쳤다는 것입니다(27상, 30절하). ‘라반’의 이 말은 짐짓 딸과 조카를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서운함을 토로하는 듯하지만, 실은 분노와 실의, 비난과 달콤함을 담은 그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설득과 위선의 대가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를 당황하고 난처한 입장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13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라반’의 대화는 처음과 끝의 두 문장이 모두 비난성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라반’의 분노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네가 어찌 이렇게 하였느냐”(26절상); “어찌 내 신을 도둑질 하려느냐”(30절하). 이와 같은 비난 섞인 질문은 <창세기>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친숙한 표현이며(3:13; 4:10; 12:18; 20:9; 26:10),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이전에 ‘야곱’이 결혼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라반’을 비난하면서 꼭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다는 점입니다(29:25). 그러나 지금 ‘라반’은 자신의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가장과 위선의 절제로써 대화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그의 위선은 차라리 예술적인 경지에 까지 이르고 있음을 봅니다: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27절). 이처럼 달콤한 말과 함께 부드러운 책망도 곁들이고 있는데, 이 책망도 “손자들과 딸들에게 이별의 키스를 하지도 못하게 한 것”(28절)에 관한 것이고 보면 감히 반박할 근거를 찾을 수 없게 만듭니다. 어느 누가 아버지로서 딸과 손자들에게 이별의 키스를 못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호소에 이어 슬쩍 비난을 비수처럼 찌르고 있습니다: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28절하).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분노를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내면서 협박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29절상). 하지만 그는 곧바로 이어서 자신의 꿈을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29절하), 그의 위협 섞인 책망은 그 효과가 다소 반감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 꿈 때문인지 몰라도 ‘라반’은 지금 난생 처음으로 ‘야곱’의 처지와 행동을 이해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30절상). 그러나 그의 이해심은 여기까지입니다. 꿈에 만난 하나님 때문에 억지로 참고 견디려 했지만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결국 그는 본심을 드러내고 맙니다: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30절하).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물론 그가 다른 말로 ‘야곱’을 질책할 때에도 상대를 존중하거나 예의바르게 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 비난은 아주 단도직입적이며 무례한 것입니다. 조카를 지금 도둑으로 몰아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경고가 무서워 억지로 참기는 했으나 결국 그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안중에도 없다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상대를 잘못 골랐습니다. 그의 신을 훔친 자는 ‘야곱’이 아니라 그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라반’이 이 장면에서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독자들의 눈에도 당황스럽고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기도 합니다. 짐짓 달콤한 말로 상대를 설득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비난과 책망도 모자라 도둑으로 몰아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과 관련해서 화자는 교묘한 “언어의 유희”(woed play)로 ‘라반’의 갈등하는 내면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Wenham, 275쪽.
‘야곱’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 역시 격분하여 외삼촌에게 대들고 있습니다. 긴장과 갈등은 그래서 더욱 고조되고 있습니다:
31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32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31-32절)
그의 대답은 변명이나 항변이 아니라 오히려 반격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는 ‘라반’이 그의 딸들을 자신으로부터 “빼앗아 가려”(lz'G, 가잘)한다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 동사는 “무력으로 빼앗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드라빔’을 훔쳤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너무 자신만만한 나머지 그의 일행 중 어느 누구라도 그 짓을 했다면 사형에 처해도 좋다고까지 선언하고 나섭니다. 그리고는 ‘라반’이 데리고 온 “형제들”(친척들)로 하여금 훔친 물건을 찾아보라고 합니다. 비록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성전의 물건을 훔치는 자는 사형에 처하기는 했지만, 일상적인 절도 행위에 대해서도 같은 규정을 적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야곱’은 자신도 알지 못한 채, 그가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독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야기는 아주 극적인 절정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들 형제들이 ‘라헬’이 진범임을 밝혀낼 수 있을까? ‘야곱’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 화자는 이들 질문과 관련해서 ‘야곱’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언급함으로써(32절하),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절정에서 화자는 이러한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기 위해서 서술의 속도를 오히려 늦추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런 기법은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에서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7:18-24; 22:9-10; 44:12.
그는 긴장을 금방 사라지게 하는 대신 해결의 실마리를 최대한 늦춤으로써, 오히려 긴장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33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34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매, 35라헬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찾아내지 못한지라(33-35절)
즉 화자는 ‘라반’이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는 장면부터 먼저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아’의 장막에서 나올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다분히 위협 섞인 어조로 “라반이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갔다”고 말함으로써, 여전히 결정적인 순간을 최대한 늦추고 있습니다. 마침내 34절에 이르러서야 더 이상 미루지 못하고 ‘라헬’이 ‘드라빔’을 말안장 아래에 넣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극에 달해 있던 긴장이 눈 녹듯 사라지려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긴장은 심술궂게도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라헬’이 그처럼 엄숙하고 거룩한 ‘드라빔’ 즉 ‘라반’의 “신”을 숨긴 장소가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엉덩이 아래라니! 그것도 거의 생리대 수준 정도로 전락해 버리다니 말입니다! 지독한 해학(諧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래부터 ‘드라빔’이라는 것이 그처럼 아무 보잘것없는 물건이었음을 화자가 지금 드러내려 하는 것이 아닐까요?
잃어버린 ‘드라빔’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찾아다니는 ‘라반’의 행동은 마치 이전에 ‘야곱’의 아비 ‘이삭’이 보여주던 행동과 흡사합니다. 당시 ‘이삭’은 아들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하여 손으로 ‘야곱’의 온 몸을 구석구석 더듬었으나 ‘야곱’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처럼(27:21), 지금 ‘라반’ 역시 이곳저곳 딸들의 장막을 마치 손으로 더듬듯 “두루 찾아다니고 있으나” 무위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화자는 ‘이삭’의 “손을 더듬는” 행위와(27:21) ‘라반’의 “두루 찾아다니는” 행위(31:34, 37)를 묘사하면서 동일한 동사 어근 ‘vv'm’(마샤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진실을 알지 못한 채로 ‘야곱’을 축복하였고 이후 그 축복은 영원히 그의 것이 되었던 것처럼, ‘라반’ 역시 딸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가 찾던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이번에도 ‘야곱’은 자신의 축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이곳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야곱’과 ‘라반’의 게임에서 결국 ‘라반’은 철저한 패배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쩌면 ‘야곱’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공격이 될 수도 있었을 도둑질에 대한 혐의도 결국 무혐의로 끝나게 되어버렸으니, ‘라반’의 분노는 이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화자도 이러한 그의 신세를 한탄이라도 하듯 세 번에 걸쳐, “보라, 그가 찾지 못하였도다”하며 크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야곱’의 반응을 살펴 볼 차례입니다. 혐의가 다 풀린 것을 확인한 그는 득의만만하다 못해 ‘라반’을 꾸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난 일들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36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37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집안 물건 중에서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여기 내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둘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38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40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41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42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36-42절)
사실 그는 이런 불평을 처음부터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만, 참고 견디었습니다. 이제 모든 혐의가 풀린 지금 봇물 터지듯 쏟아내는 그의 말은 이전보다 훨씬 큰 파괴력을 가지고 ‘라반’을 압도하고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전전긍긍하며 몸 둘 바를 모르고 서 있을 ‘라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실로 전체 <야곱-라반 이야기>의 절정이 바로 이 부분, 특히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42절).
‘야곱’의 대화는 유사 평행과 대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 허물이 무엇이니까
내가 무슨 죄가 있나이까(36절)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38-39절)
이런 형식적인 특징으로 해서 일부 학자들은 ‘야곱’의 대화가 주로 시(詩)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으며, 사실 평행법은 ‘히브리’ 산문에서도 수사적 강조를 위해서 흔히 등장하는 기법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경우야말로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20년에 걸쳐 억눌려온 좌절과 분노를 이런 식으로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내 허물이 무엇이니까? 내가 무슨 죄가 있나이까?” 지금 ‘야곱’이 분노하며 그의 외삼촌에게 던지는 이 질문은 훗날 ‘요셉’이 동일한 형식으로 그의 형들에게 따져 묻던 질문이기도 합니다(50:17). 그를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서린 질문인 것이지요. 여기서 “허물”([v'P, 페샤)은 일차적으로 재물과 관련한 범죄 행위를 말합니다(출 22:9), 그러나 <구약> 전체적으로 보다 넓은 의미로 “사악한 행위”과 연관시켜 사용하고 있습니다(예. 암 1:3, 6, 9, 11, 13). 즉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범죄행위를 일컫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의미하는 바는 이런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큰 범죄를 저질렀기에, 그처럼 불이 나게 나를 쫓아 추격해 왔습니까? 이 동일한 동사를 다른 곳에서는 “군인이 퇴각하는 적을 맹렬하게 쫓는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삼상 17:53; 렘 4:19).
그렇게 해서 당신이 내가 훔쳤다고 주장하는 드라빔은 고사하고 당신의 소유로 주장할 만 한 그 어떤 것이든 찾아내기라도 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도적질이라면 내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이 더 비난 받아 마땅한 것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이 인정하듯이(30:27), 지난 20년 동안 당신의 가축이 그토록 많이 늘어나게 된 것이 누구덕분입니까? 내가 어느 한 마리라도 낙태시킨 녀석이 있었으며, 내가 작아먹은 녀석이 있었습니까?”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하드라도 전통적인 고대 근동 법에 따르면, ‘야곱’의 책임은 아닐 것입니다. <출애굽>에서도 이와 유사한 규례를 두고 있습니다: “10사람이 나귀나 소나 양이나 다른 짐승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죽거나 상하거나 끌려가도 본 사람이 없으면, 11두 사람 사이에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여호와께 맹세할 것이요 그 임자는 그대로 믿을 것이며 그 사람은 배상하지 아니하려니와, 12만일 자기에게서 도둑맞았으면 그 임자에게 배상할 것이며, 13만일 찢겼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증언할 것이요 그 찢긴 것에 대하여 배상하지 아니 할지니라”(출 22:10-13).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자신의 책임이 아닌 일에도 변상을 해왔으며(39절), 몸이 으스러지도록 일만 해왔습니다(40절). 40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중동 지방에서 낮밤의 일교차가 어떠한지 정확하게 기술해주고 있습니다. ‘라헬’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7년이 불과 며칠로 여겨질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 자체가 수월한 것은 아니었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타향에서 힘든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조용하고, 유약하며, 늘 집에서만 지내기를 좋아했던 ‘야곱’, 그리고 그의 어머니 '리브가'에게는 애완용 푸들과도 같았던 그가 이처럼 힘든 세월을 견디며 눈물의 빵을 먹어가면서 점차 그의 터프 가이 형 '에서'와 맞상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장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외삼촌을 향한 비난과 책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 아내들에게 들려주었던 ‘라반’의 비리를(7절) 이제는 그 비리의 주인공 면전에 직접 대고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가 열 번이나 '야곱'의 품삯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41절). 그러나 그의 비만은 단순히 비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된 부분에 이르러서는 지난번과는 달리, 보다 상세하게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점은 7절과 42절을 비교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31:7)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31:42)
이곳에서 그가 사용하고 있는 문체나 표현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있었던 다른 중요한 사건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돌려보내다”(jl'v, 샬라흐)는 종종 이집트의 왕 ‘바로’가 이스라엘을 “쫓아내거나” 또는 “내보내는” 것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출 3:20). 사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출애굽에 대해서 처음으로 약속을 하실 때, 이스라엘을 결코 “빈손으로” 내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출 3:21). <신명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신 15:13-14). ‘야곱’이 노예와도 같은 생활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을 가지고 외삼촌의 집을 떠나는 이 일은 <출애굽>이나 <신명기>에서 그의 후손들이 나중에 경험하게 될 일을 예고하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표현은 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내 고난을 보셨다”는 언급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나고 있습니다. ‘레아’도 이와 유사한 발언을 한 바 있습니다(29:32). 그러나 <오경> 전체적으로 볼 때, 고난이라는 단어를 이집트에서의 고난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곳은 위의 예에서처럼 <출애굽>과 <신명기> 두 곳 뿐입니다. 물론 <시편>에서는 개인적인 고난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고(시 9:13; 25:18; 31:7; 119:153), <애가>에서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야곱’의 이 마지막 발언은 훗날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자신의 지난 생애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주는 대목을 연상시켜주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창 45:7),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마찬가지로 ‘야곱’의 이 마지막 발언 역시 단순히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하란’에서 ‘야곱’의 전체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해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적어도 그동안의 <야곱 이야기>에 대한 절정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즉 그의 발언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외삼촌의 온갖 술수와 음모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부지하고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은 환란과 고난에서조차도 그의 백성을 부유하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직 ‘라반’에게 무슨 할 말이 남아있을까요?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처량한 불평이 고작이었습니다. 독안에 든 쥐의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43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44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43-44절)
이제 그는 그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던 그 모든 것들, 즉 딸들과 손자들과 가축 떼들 모두를 양보하고 포기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그는 지금 단순히 화가 나서 모든 것을 포기하듯 내뱉듯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만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그의 말 속에 절절이 베여있습니다. 무려 다섯 번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내 것”이라는 표현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딸들과 손자들을 이방인의 손에 딸려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더욱 괴롭습니다: “과연 이 친구가 내 혈육들을 어떻게 대할지 그게 걱정이구나.”
그동안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나 <이삭 이야기>에서 보아왔듯이(21:22-24; 26:26-31), 대개 그 땅에 사는 이방인들이 족장들과 어떤 계약을 맺으려 할 때는, 자신들이 족장들에 비해 부족하거나 열등함을 느낄 때 였습니다. 지금 ‘라반’도 같은 심정인 듯합니다. ‘야곱’으로부터 무엇인가 두려움을 느껴 자신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야곱’에게 언약을 맺자고 먼저 제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문맥 상 언약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약은 여성 명사인데 문장의 동사는 남성 형으로서 구문론 상 일치하지 않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이라고 하며, 또는 돌무더기를 세우는 일이라고 하기도 하며, 또는 “우리가 기념비나 돌무더기를 세우자”는 말을 대신하는 표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언약(45-54절). 두 사람의 처지가 이제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손아래 사람이자 노예였던 ‘야곱’이 외삼촌이자 주인이었던 ‘라반’과 대등한 입장이 아니라, 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계약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제 5막의 나머지 장면(45-54절)은 두 사람이 사이에 언약을 맺고 증거를 남기는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적어도 문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언약 수립과 관련해서 불필요한 반복이 나타나고 있어 상이한 자료가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비평적 입장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살펴 본 바처럼 일치되는 견해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45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46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47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48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49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50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51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52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53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54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45-54절)
언약 수립과 관련해서 ‘야곱’이 먼저 행동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가 한 일은 돌기둥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45절). 그는 이전에 ‘벧엘’에서도 그렇게 한 바 있으며(28:18), 나중에 다시 ‘벧엘’에서 ‘라헬’을 기념하며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35:14, 20). 이처럼 ‘야곱’은 세 번에 걸쳐 그의 생애의 전환점마다 돌기둥을 세우는 일로 시작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기둥(hb;Xem, 맛체바)이 연상시켜주는 중요한 한 단어가 있는데, 그 유명한 ‘미스바’(hP;x]m)가 그것입니다. 두 단어는 철자 한 자만 다를 뿐입니다. 이 단락에서 “돌기둥”의 역할은 ‘라반’이 요구하고 있는 바, 두 사람 사이에 맺은 언약에 대한 증거의 기능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어서 돌무더기를 또 다른 언약의 증거로 삼고 있습니다(46절). 그렇다면 돌무더기는 왜 또 필요한 것입니까? 이 역시 증거를 위한 것이라면 말입니다. <구약>의 여러 곳에서 무덤이 있는 곳에 (돌)무더기를 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수 7:26; 8:29; 삼하 18:17). ‘압살롬’의 기념 비석 역시 이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삼하 18:18). 그런데 언약에 대한 증거로서 두 개의 증거 비를 세우는 것이 불필요해 보입니다만, 이곳 본문에서는 무려 여덟 번에 걸쳐 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더기”(lG, 갈)라는 단어는 “증거의 무더기” 즉 ‘갈르엣’(d[el]G)(47, 48절)에 대한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본문에 의하면 돌기둥이나 돌무더기는 같이 증거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 둘이 다 필요한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히브리’ 이야기 특유의 중첩과 반복의 기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첩과 반복은 중요한 대목을 강조하기 위해서 화자가 즐겨 사용하는 기법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참고. 41:32). <구약>은 종종 증거가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증인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신 19:15). 그리고 고대 근동 지방의 문헌에도 언약 수립과 관련해서 다수의 증인들, 해나 달, 여러 신들을 증인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런 배경 하에서 볼 때, ‘야곱’이 이처럼 중요한 언약을 체결함에 있어 돌기둥과 돌무더기의 복수 증인을 채택하고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특히 ‘라반’과 같은 신뢰하기 어려운 상대와 계약을 맺을 때는 더욱 이중 삼중의 장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 돌무더기를 세운 사람은 ‘야곱’ 자신이 아니라 “그 형제들”입니다(46절). 여기서 그 형제들이 의미하는 바는 아마도 ‘야곱’의 자식들이거나 또는 ‘라반’의 자식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화자가 특별히 이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 언약이 단순히 ‘야곱’과 ‘라반’ 사이에 맺어지는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민족적인 차원의 것임을 강조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참고. 레 24:14, 16, 23; 신 21:21). 이들 모두가 돌무더기 곁에서 언약의 식사를 함께 나누었다는 언급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참고. 46절하).
이야기의 흐름은 48절에서 다시 ‘라반’의 대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야곱’에게 “돌무더기”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 증거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돌무더기가 증거가 된다 하여 ‘갈르엣’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두 번째 증거로서, 망대를 뜻하는 ‘미스바’(hP;x]m)를 추가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오경>에서는 “망대”를 뜻하는 ‘미스바’(정확하게는 미츠바) 대신에 “기둥”을 뜻하는 ‘맛세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미스바’는 분명 “(야훼께서) 살피시다(hp;x, 차파)”에 대한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미스바’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단어로서 ‘길르앗’ 땅에 있는 ‘미스바’ 지역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문맥에 따르면 분명 “돌기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우리는 앞에서 돌무더기와 돌기둥에 대해서 다룬 바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돌기둥은 때로 “신전”(神殿)으로 간주되기도 했는데, ‘라반’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49절).
무엇을 보살펴 달라는 것입니까? 지금 ‘라반’의 걱정거리가 무엇입니까? ‘야훼’께서 보살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야곱’이 그의 두 딸을 학대해서도 안 되고, 또 다른 여자들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50절상). 그의 이 요구는 아이러니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이 두 아내를 갖게 된 것이 과연 누구의 책임이며, 자기 딸을 마치 노예처럼 부려먹은 자가 누구입니까? 그러니까 ‘라반’이 요구하는 바는 이런 것입니다: “가 행하는 것은 따라 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 것만 따라 하라.” 그는 이러한 요구에 더하여, 엄포성 발언을 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즉 그의 요구가 제대로 관철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어주실 것이라는 점입니다(50절하). 물론 하나님께서 약자나 여인들의 권익을 보호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은 <구약>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도 합니다(창 16:7-14; 21:8-21; 출 22:23-24).
그의 발언이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두 사람이 언약의 징표로 삼았던 돌기둥과 돌무더기가 그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51절). 그리고 ‘야곱’의 주도적인 행동에 동의한다는 표시로 자신이 이 두 기념물을 세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51절). 그러나 여기까지 ‘라반’의 대화를 들어보면 돌기둥과 돌무더기에 대한 두 사람의 의도와 생각은 동상이몽이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라반’은 지금 자신의 희망과 요구 사항과 관련해서만 이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라반’은 대화의 말미에 이르러 비로소 ‘야곱’이 기대하던 증거의 내용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즉 돌기둥과 돌무더기는 ‘라반’의 딸들의 신변 보장과 안전에 대한 증거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야곱’의 땅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증거 또한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52절).
이 약속을 하면서 그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라반’이 거명하는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은 아닌 듯합니다. 화자는 이를 의도적으로 강조하려는 듯, 두 사람의 기도문을 구별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53절). 이 구절에 따르면 ‘라반’은 적어도 두 가지 신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들 주어에 수반되는 동사형 또한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라반’은 다신론자였을 개연성이 커 보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야곱’은 “이삭이 경외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여기서 끝나고, 고대 사회의 통상 관례에 따라(출 24:5-11; 신 27:6-7), 언약은 희생 제사를 지내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54절).
제 6막: 귀향(55절)
도피와 분노의 추격으로 막을 열었던 제 5막은 상호 타협과 양보에 이어 우호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 가운데 언약이 성사됨으로써 그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제 작별의 입맞춤과 축복의 기도로 두 사람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제 7막: 결론과 예고(32:1-2)
이 마지막 장면은 ‘야곱’이 자신의 고향 ‘가나안’을 향해서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하나임’이라 부르는 한 장소에서 그가 경험하게 되는 특별한 사건은 그동안 ‘라반’ 밑에서 지낸 그의 전 생애를 요약하면서 동시에 앞으로 그가 겪게 될 ‘에서’와의 조우(遭遇)를 예고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1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님이라 하였더라(32:1-2)
그동안 본문 전체를 통해서 화자가 핵심적으로 강조해 온 신학적 주제가 있다면, “야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3, 5, 9, 42절). 본문 에피소드는 그 첫 장면을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현현으로 시작하였고, 이제 에피소드의 마지막도 새로운 또 한 번의 현현으로 이전의 약속을 재확인해주는 장면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마지막 장면은 이전에 ‘야곱’이 ‘벧엘’에서 경험한 바와 아주 유사한 환상이기도 합니다(참고. 28장). 두 장면에서 공히 “만남”([g'P, 파가)과 “하나님의 천사”(28:12)를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 사실을 잘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의 현현은 각각 그가 ‘가나안’을 떠날 때와 다시 돌아올 때에 체험한 것입니다. 또한 그가 환상을 본 장소를 언급하고 있다는 공통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벧엘’이 “하나님의 전(展)”이라면, ‘마하나임’(!yIn"j}m)은 “두 진영”을 의미합니다. ‘마하나임’은 <여호수아>에 따르면 ‘갓’ 지파의 땅에 있는 “레위인의 성”으로서(수 13:26; 21:38), 훗날 ‘이스보샛’ 왕국의 수도가 되기도 했으며(삼하 2:8-9), 그리고 “압살롬”의 반란 시에 ‘다윗’이 도피한 곳이기도 합니다(삼하 17:24). 이 지역의 정확한 위치는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본문이나 다른 관련 구절들을 통해서 추측컨대 ‘얍복’강 북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벧엘의 계시” 때와는 달리 “마하나님의 계시”에서는 계시의 구체적인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훈과 적용
<성경>에서 숫자 “3”이나 “7”은 완벽함이나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로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함이나 온전함에 이르는 과정은 인내와 좌절을 늘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인내를 배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환난이라고 <로마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숫자는 그와 같은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야곱’이 그의 삼촌 ‘라반’의 집에 머문 시간이 3년도 아니고, 7년도 아니며, 이 둘을 합한 10년도 아니고, 이 둘을 곱한 연수에 가까운 세월이었습니다.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원래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을 하고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과 며칠 잠시 동안의 폭풍우를 피해 있다가 돌아갈 요량이었습니다(27:44). 이 며칠이 ‘라헬’과의 결혼을 위해서 7년으로 늘어났으며, 그리고 외삼촌에 속아 ‘라헬’이 아들 ‘요셉’을 나을 때까지 다시 7년을 더 기다리며 노예처럼 일해야 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진정한 아들이라 생각하는 ‘요셉’이 태어나자 다시 한 번 삼촌에게 간청을 해 봅니다. 고향으로 가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삼촌이 ‘야곱’과 같은 보배를 선뜻 보내 줄 리가 만무합니다. 이래서 다시 한 번 6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번에는 스스로 자청한 면이 없지 않은데,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충분한 재산을 모아야겠다는 결심이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계시. 아무튼 20 년의 세월이 흘러갔고, 이제는 정말 떠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단지 아들 ‘요셉’이 태어났고, 충분한 재물을 모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화자는 두 가지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 하나는 오늘날까지 많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기 위한 지침 내지는 표지판으로 즐겨 사용하는 것입니다.
즉 “주변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그 환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촌들의 질시와 미움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31:2). 이들이 왜 이처럼 달라진 태도를 보이는지는 이전 에피소드의 결말 부분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31:1).
‘야곱’이 과연 정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이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난 20 년을 자기들 밑에서 노예로 살던 자가 이처럼 큰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박탈감이나 상실감이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곱’이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는 질문은 분명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이제 떠나야 할 때가 왔나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분명해.” 이런 생각은 비단 ‘야곱’ 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자주 애용하는 표지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런 방식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가 상황을 통해서 짐작하고, 예측할 수 있는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애매모호하지도 않았으며, 무슨 스무 고개 문제 풀이 식으로 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성령의 세밀한 음성”을 통해서 알려준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방식, 초자연적이고도 직접적인 계시, 즉 “현현”을 통해서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31:3상). 이 계시는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으며, 전혀 애매모호하지도 않으며,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기도나 금식에 돌입해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명명백백하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점이 하나님의 뜻이 갖는 가장 뚜렷한 특징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이처럼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는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에 있어서는 마치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친 것 같지만, 실은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31:3하). 그가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을 통해서,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익히 들어오던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20 년 전 ‘벧엘’에서 이미 그 자신도 직접 들었던 바로 그 계시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갖는 또 다른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감각이나 육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한 것은 바로 이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직접적인 계시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당신은 (당신을 향한 특별하고도 은밀한?) 하나님의 계획과 음성을 어디서 듣습니까? 이 질문은 과연 온당하기나 한 것입니까?
대단히 급진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기독교인 개개인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는 점에서, 위 질문은 온당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숨겨놓은 비밀스러운 계획이나 뜻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기도나 금식을 통해서 그것을 찾아내려고 필사적인 몸부림을 칠 필요도 없어진 것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에게 운명처럼 정해놓은 그 무엇이 있지 않으니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자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혹자는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설령 그렇다 하드라도 그가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을 알게 된 것은 그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이고 주권적인 개입에 의해서였습니다.
설득.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라고 해서, 반드시 주변의 모든 여건이나 상황이 자동적으로 마치 봄날 눈 녹듯 다 사라지고 없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바로 이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나 계시와 관련해서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너무나 자주 범하는 실수이기도 합니다. ‘기드온’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바로 이러한 식의 표지판, 즉 “양털 뭉치” 표시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삿 6:36-40).
혹시 ‘야곱’에게도 이런 표지판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곳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계시에도 불구하고 그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들을 설득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과연 아내들이 자기 말을 믿고 순순히 따라 나설 것인가? 특히 ‘레아’에게 있어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아내로서 사랑과 대접을 해준 적이 없었는데, 이제 느닷없이 아비 집을 떠나 나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할 때 쉽게 따라와 줄 것 같지가 않습니다. 바로 이 문제를 놓고 ‘야곱’은 ‘기드온’이 그랬던 것처럼 소위 “양털 뭉치” 테스트를 해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가 아내들을 설득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도 돌려놓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이에 대해서 화자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야곱’은 ‘기드온’과는 달리 표지판을 요구함이 없이 곧바로 아내들을 설득하는 작업에 나서고 있습니다. 마치 계시는 계시고, 상황은 상황이라는 식의 태도처럼 보입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야곱’은 ‘기드온’의 “양털 표지판”이 전혀 필요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기드온’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려 하니 이런 저런 핑계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것을 가능한 한 피해보고 싶은 생각에서 표지판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야곱’은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없는 표지판이라도 만들어서 가야 할 판입니다.
지금 그가 아내들을 설득하고 있는 장면을 보면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는 이 장면에서 잔재주와 설득의 대가의 진면목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우선 두 아내들을 자신의 가축 떼가 있는 들로 불러냅니다(31:4). 아무도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는 이들을 불러낸 진정한 의도나 목적에 대해서는 언급함이 없이, 주변적인 이야기들로 먼저 대화를 시작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 외삼촌을 성심성의껏 섬겼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삼촌은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31:6-7). 그러나 외삼촌의 비리와 관련해서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개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지난 20 년 동안 내내 나와 함께 하셨고, 나를 지켜주셨을 뿐만 아니라, ‘라반’의 음모와 계획을 무위로 돌리셨으며, 그의 가축들을 빼앗아 나에게 주어 나로 하여금 큰 부자가 되게 해주셨다”(31:5-10). ‘야곱’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작일 뿐입니다. “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아내들의 마음속에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할 즈음에, ‘야곱’은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드러냅니다. 이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들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입니다(31:11-13). 과연 ‘야곱’의 변론은 적절했으며 솔직했습니까?
반드시 그렇게 볼 수만은 없을 듯합니다. 그는 아내들을 설득함에 있어, 그들을 당황하게 할 수 있는 미묘한 부분은 의도적으로 빠뜨린 것이 사실입니다. 그가 처음에 ‘라헬’을 사랑하여 그와 결혼하려 했으나 ‘라반’이 속여 ‘레아’를 대신 첫날밤에 들여보냈다는 사실이라든지, ‘라헬’과 결혼하기 위하여 다시 7년을 더 노력 봉사를 자원했다든지, 그리고 그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 실은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도망쳐 나온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는 모두 빼버렸습니다.
이런 내막을 알고도 아내들이 과연 따라 올까요? 특히 고향에 돌아가면 다시 형에게 붙잡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이런 곤란한 이야기 대신에 하나님께서 그동안 어떻게 그를 인도하셨고 보호하셨는지를 강조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것입니다. 그런대도 화자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합니다. ‘야곱’의 두 아내들 또한 남편의 말에 확신을 얻고 함께 가기로 작정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아비를 비난하며, 남편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31:14-16). 더 이상 무엇을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요?
탈출. 그러나 이곳을 탈출하기 위하여 아내들을 설득하는 일과 사악하고 집요한 ‘라반’의 마수(魔手)를 벗어나는 일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이전에도 ‘라반’은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가나안’에 데리고 가려 할 때에도 이런저런 구실을 대며 방해한 전력이 있습니다. ‘야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지난 20년 동안 교묘하게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술수를 부려왔습니다. 때로는 거짓과 유혹으로 때로는 은근한 협박으로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러니 ‘야곱’이 떠나려고 할 때마다 ‘라반’은 그를 붙잡아 두기 위하여 온갖 그럴 듯한 이유와 핑계를 고안해 낼 것이 뻔합니다. 따라서 ‘야곱’은 외삼촌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몰래 도망치는 것이 훨씬 쉽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일 년 중 가장 바쁜 계절을 택합니다. 모두가 양 털 깎는 일로 새벽부터 저녁까지 눈코 뜰 새 없는 시기를 택하여 가족과 가축들과 재산을 정리해서 몰래 도망쳐 나옵니다(31:17-18).
추격. ‘라반’이 이를 알게 된 것은 삼일 후였습니다(31:22). 분노와 배신감으로 치를 떨며 식솔(食率)들을 거느리고 급히 추격전을 벌인 지 일주일 만에 ‘야곱’이 진행하고 있는 ‘길르앗’ 지역 근처에 이르게 됩니다(31:23). 얼마나 급하게 추격해왔는지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대결. 아니나 다를까! ‘라반’은 ‘야곱’을 보자 말자 원망과 비난부터 쏟아냅니다. 그의 분노는 이해할 만합니다. 외삼촌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비로서도 권위가 형편없이 실추 당했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속이고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 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31:26-28).
이 얼마나 감동적인 말입니까! 상대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습니다. 상대로 하여금 몰래 도망쳐 나온 것에 대해서 자책감을 느낄 정도의 호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두 딸과 손자들과 ‘야곱’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과연 ‘라반’의 말에 감동을 받았을까요? 이들의 표정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야곱’은 말 할 것도 없고 그의 두 딸들조차도 얼굴은 땅을 향한 채, 이맛살을 찡그리며, 지겹다는 표정으로 이 노인의 일장 훈시를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추운 겨울 날 교정에 일렬로 서서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있는 중고등학생들처럼 말입니다. 그것도 장장 한 시간이 넘도록 말이지요. 그러나 ‘라반’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상대의 표정을 통해서 그들의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이내 어조를 바꾸어 분위기를 주도해가려 합니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31:29-30). 감동적인 연설과 호소로 상대의 마음을 돌려놓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번에는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이어서 협박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 합니다. 이는 오늘날의 깡패들이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수법이기도 하지요. 과연 비열하고 야비한 인간 ‘라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카와 딸과 손자들 앞에서 이 짓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일말의 두려움은 있었던지, 지난밤에 그가 꿈에 만났던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야곱’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쏟아내고 맙니다. 이것은 분명 ‘라반’을 향한 해학이자 조롱입니다! 안 되는 줄을 알면서도 내 뱉어 버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심사는 어디 ‘라반’ 뿐이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이 조그만 한 실수 또는 의도적인 불순종이 때로는 자신의 입지를 지극히 난처하게 만들기도 하고, 협상에서 불리한 자리에 놓이게도 합니다. ‘라반’의 실수는 또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을 뿐만 아니라, ‘야곱’을 도둑으로 몰아갔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집의 (수호) 신을 훔쳐갔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부분이 두 사람 사이의 입장이 완전히 역전되는 단초를 제공해 주게 될 것입니다. ‘야곱’은 외삼촌에 대하여 격분했고, 그로 하여금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내 보라고 초청하면서, 죽음의 저주까지 자청하고 나서고 있습니다. ‘라헬이 한 짓을 모르니 이처럼 큰소리치는 것도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애처로운 ‘라반’, 그가 찾는 물건이 ‘야곱’의 진영에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찾지를 못하고, 처지는 급전직하(急轉直下) 수세로 돌아서고 맙니다. ‘야곱’이 어찌 이 순간을 놓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즉각적으로 공세로 돌아서며 ‘라반’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봇물이 터지듯, 그는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과 불평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그가 받았던 모든 것들을 일시에 되돌려주기라도 할 듯한 태도입니다(31:38-41). 그러나 결코 냉정을 잃지 않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그동안 외삼촌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해 왔는지를 열거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보호하셨으며, 개입하셨는가에 관한 언급으로 이야기의 결론으로 삼고 있는 것이 그 점을 반영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31:42). <족장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흐르는 예의 친숙한 모티브가 다시 한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언약. 우리의 애처로운 ‘라반’, 아직도 무언가 할 말이 남아 있을까요? 무엇이겠습니까? 마치 고양이에 쫓겨 궁지에 몰린 쥐처럼 절규하며 마지막으로 쏟아내는 말이 있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31:43). 이처럼 반복되는 표현을 통해서 지금 그의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군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떡합니까? 속이 쓰리고 아프지만 인정하고 양보하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어 보입니다. 결국 그는 ‘야곱’과 언약을 맺자고 제의하고 있습니다(31:44-49). 그의 권리를 인정하면서, 이제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하겠다는 뜻인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 장면에서 다시 한 번 크게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언약의 조건이라는 것이 실은 전혀 필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31:50). 도대체 ‘야곱’으로 하여금 결혼을 두 번이나 하게 한 장본인이 누구였습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고통과 괴로움을 준 자가 누구이기에 앞으로 서로의 경계를 넘어 해치지 말자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야곱’은 이런 언약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다시는 결혼할 일은 없을 것이며, 지긋지긋한 이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당에 다시는 이 땅을 밟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이 모든 조건을 수락하고 언약을 맺습니다. 적어도 ‘라반’에게는 다소간 위안과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귀향. 기다림과 절망, 술수 대 술수, 도피와 추격, 대면과 충돌 등으로 숨 가쁘게 달려오던 이야기가 이제 잠시 숨고르기를 하면서 긴장과 갈등을 누그러뜨리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숙명의 앙숙인 ‘야곱’과 ‘라반’은 이제 양보와 타협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화평의 언약을 체결하고, 증거의 비를 세우고, 함께 식사를 나누며, 작별의 입맞춤과 상대를 위한 축복의 기도를 마지막으로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31:55). 어딘가 허탈하고 찜찜한 모습의 ‘라반’과는 달리, 고향 ‘가나안’을 향해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야곱’의 모습은 한결 즐겁고 가벼워 보입니다. ‘야곱’의 진중에서 흥겨운 찬송과 노래가 절로 흘러나올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를 이제는 만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절정을 맞으며,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막을 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끝이 난다면, 이번 에피소드의 핵심 주제도 <족장 이야기>의 여러 다른 에피소드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언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자신만의 유익을 위하여 술수와 거짓말로 살아가고 있을 때에나, 그와는 반대로 타인의 술수와 거짓말과 폭거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에나 할 것 없이, 한 결 같이 그의 곁에서 그를 지키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그가 외삼촌의 폭거와 압제를 벗어나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벧엘의 언약”(28:15)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과 예고.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그가 거쳐야 할 세 가지 관문 중에서 이제 두 개를 넘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마지막 하나 남아있는 관문이야말로 가장 힘든 것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난 20년 동안 풀지 않고 그냥 미루어두었던 크나큰 숙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의 형 ‘에서’ 문제입니다. 그가 형으로부터 훔쳐 달아난 하나님의 축복을 백배 사죄와 함께 되돌려 주든지,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기 전에는 형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동안 이 문제를 놓고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지만, 이제 막상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다시 기분이 우울해지고 있습니다. 과연 ‘야곱’은 아무 탈 없이 형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벧엘의 언약”은 앞으로도 유효할 것인가? 과연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해 오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함께 하실 것인가? 이것은 비단 ‘야곱’ 혼자만의 고민거리일 수가 없고 독자 모두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화자는 이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기대하는바 단언적이고 명시적인 대답은 없습니다만, 대신에 다음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질문에 대해서 무언가 암시를 주려는 것 같습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님이라 하였더라”(32:1-2). “하나님의 사자”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만, “벧엘의 언약”을 상기시켜 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귀향길에 함께 하실 것이며,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현현”은 이야기의 시작과 마지막을 수미상관처럼 에워싸서 <족장 이야기> 전체를 흐르는 신학적 주제를 다시 한 번 극적으로 드러내면서, 앞으로 있을 ‘에서’와의 조우(遭遇)를 예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야곱’의 생애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좌절과 실망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뿐만 아니라, 지난 20년의 힘든 세월 동안에도 역시 함께 하셨습니다.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이 기쁨은 20년 전 그가 들었던 “벧엘의 약속”이 성취된 결과로써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과연 ‘야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도 아내와 자식들과 많은 재산을 모아서 굴욕과 노예의 땅을 탈출하여 몽매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의 귀향은 먼 훗날 그의 후손들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벗어던지고 자유의 땅 ‘가나안’으로 탈출하는 “출애굽 이야기”를 예고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이 세상의 ‘라반’과 같은 존재 때문에 힘들고, 지치며, 좌절과 절망 가운데 쓰러져 있지는 않습니까? <히브리서>는 영적인 이스라엘, 즉 ‘야곱’의 후손인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연습과 토의
1. 다섯 번째 에피소드의 핵심 주제는 무엇이며, 화자는 이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주제 파악을 돕는 내용이나 형식적 특징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2.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출애굽>의 ‘모티브’가 예고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특히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이를 확인해 봅시다.
3. 나의 영적 지도는 어디입니까? ‘가나안’입니까 아니면 ‘하란’입니까? 내가 누려야 할 언약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