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38과
디나와 히위 족속
김태정 목사창세기 34:1-31약 58분 분량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2절)
제 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25절)
위 두 구절은 <야곱 이야기>의 열두 번 째 에피소드를 마치 수미상관처럼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그 땅의 이방인 추장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유린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디나’의 형제들이 ‘세겜’ 족속과 그 성읍에 대한 대학살과 약탈로 끝맺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성경>이 그리고 있는 가장 추악하고 사악한 사건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사건 그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모든 등장인물들이 보여주고 있는 태연함과 정중함, 그리고 그 이면에 맹수의 발톱처럼 감추고 있는 교활하고 음흉한 태도가 독자들은 물론 화자 자신마저 당황하게 하고 있습니다. ‘세겜’과 그 아비는 물론, ‘야곱’과 그 아들들 모두 하나 같이 야비하고, 위선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히려 한 수 위에 있습니다.
과연 화자는 왜 이 이야기를 <야곱 이야기> 속에 굳이 포함시키려 하는 것일까? 단순한 실수였을까 아니면 의도적이었을까? 의도적이라면, 본문의 문학적이고도 신학적인 기능과 역할은 무엇일까? 인접하고 있는 전후의 다른 에피소드들과 무리 없이 연결되고 있는가? 연결고리로 삼을 만 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전체 <족장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기에도 충분한가? 그렇다면 어떤 병행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족장 이야기>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 하나님의 언약과 섭리에 대해서 화자가 암시하고 있는 바는 무엇일까? 등장인물들을 통한 교훈은 무엇일까?
<야곱의 귀향>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야곱 이야기>의 열두 번째 에피소드는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으며, 전체 <야곱 이야기>의 두 번째 장면과 형식적인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도표 참고):

본문의 범위와 단락을 정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혹자는 이야기의 시작을 이곳이 아니라, ‘세겜’이 처음 언급되는 33:18로 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지난 과에서 이미 다룬 바 있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33:18-20은 이곳이 아니라 열한 번 째 에피소드에 포함시킴이 마땅하다는 점을 37과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예컨대, 이 단락은 이어지는 열한 번 째 에피소드의 결론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34장의 에피소드를 예고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락의 마지막은, 그동안 <창세기>의 다른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이미 친숙한 “수사적(修辭的) 질문”이 등장하고 있는 구절까지로 그 범위를 어렵지 않게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의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34:31). <창세기>의 화자는 종종 이와 유사한 수사적 질문을 마지막에 둠으로써, 이야기의 극적 종결을 삼고 있습니다: (예) 27:45; 29:14; 30:24; 37:35; 42:38; 45:28.
본문 이야기는 크게 네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이야기에서 보는 것처럼 비교적 정교한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처음과 마지막 장면은 그 양식에 있어 주로 해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처음 장면의 핵심 내용은 ‘세겜’이 ‘디나’를 유린한 후, 그녀를 자신의 집에 강제로 억류시킨다는 해설로 이어가다가, 마지막 구절(4절)에서 아비에게 결혼을 승낙해 줄 것을 요구하는 대화로 끝맺고 있습니다. 한편 네 번째 장면은 ‘야곱’의 자식들이 ‘세겜’ 성읍으로 쳐들어가 그곳에 사는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과 가축들까지 모두 유린하는 모습을 그린 후, 아비에게 돌아와 자신들의 행동을 퉁명스럽게 정당화하는 대화(31절)로 끝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장면은 그 양식에 있어 주로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화의 내용은 ‘세겜’과 ‘디나’의 결혼과 관련한 두 종족 간의 약정에 관한 것들입니다. 이 두 장면은 문자적으로나 관념적으로 모두 대칭적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 장면의 마지막은 모두 타 종족과의 결혼 약정에 포함된 조건들을 승낙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데, 두 번째 장면에서는 ‘야곱’의 아들들이 제시한 조건을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승낙하고 있다는 해설로(18-19절), 세 번째 장면에서는 ‘하몰’과 ‘세겜’이 전해주는 결혼 약정을 ‘세겜’ 성읍의 주민들이 승낙하고 있다는 해설로 마감하고 있습니다(24절).
이처럼 본문은 구조적으로 아주 정교하고 잘 짜여 있음에도, 왜 <야곱 이야기> 속에 포함되어야 하는지는 금방 알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지난 이야기를 끝으로 ‘야곱’은 형과 화해를 이루었고,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35:1-16)에서 ‘야곱’은 마침내 그의 여정을 처음 시작했던 ‘벧엘’로 돌아와 정착함으로써, <야곱 이야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듯 보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 이야기는 사족(蛇足)이거나 또는 전체적인 주제에 크게 기여하는 것 같지도 않다는 말입니다. 본문 이야기가 <야곱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이며, 그 기능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들 질문에 답하기 전에, 본문이 현재의 위치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밝히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문은 결코 우연히 이곳에 있게 된 것도 아니고, 이야기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야기의 전후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본문 이야기는 앞선 에피소드의 내용을 전제로 시작하고 있으며, 다음 이야기(35장)를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본문 이야기의 무대로 등장하고 있는 ‘세겜’은 이미 앞선 에피소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33:18-20),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의 등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 사이의 가족 관계는 ‘야곱’이 ‘레아’와 결혼하여 아들 여섯과 딸 한 명을 낳았다는 지난 이야기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참고. 29:31-30:24). 딸의 수치(羞恥)를 대하는 ‘야곱’의 태도 또한 흥미롭습니다. 딸이 이방인에게 강간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동요하거나, 분노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 역시 지난 이야기를 통해서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디나’는 ‘야곱’이 사랑하는 ‘라헬’의 자식이 아니라, 그가 혐오하는 ‘레아’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런 무관심은 훗날 ‘요셉’이 죽었다는 보고를 듣고 보여주는 심한 충격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는 ‘디나’의 친 오빠들 즉 ‘레아’의 자식들이 여동생의 수치에 대해서 격렬하게 분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관점이 하나 있는데, “할례”의 필요성에 관한 것입니다. ‘디나’와의 결혼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인데(34:15), 이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이미 천명한 바 있는 사안(事案)입니다(창 17:10). 특히 “모든 남자는 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언급(34:15)은 <창세기> 17:10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 구절 외에도 본문에는 남자의 할례에 관한 언급이 34:17, 22, 24등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 구절 역시 <창세기> 17:10, 12의 구절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관찰들을 통해서 볼 때, 본문(34장)은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들을 전제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자료들과도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본문이 <창세기>의 한 부분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화자는 이례적으로 ‘디나’의 출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30:21), 이례적이라 함은 <성경>에서 딸의 출생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디나’의 출생에 관한 언급은 그가 이후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다음 두 구절은 일종의 병행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창 30:21)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창 22:23)
즉 전자의 경우 ‘디나’가 34장에서 이야기의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면, ‘리브가’는 24장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34장은 이야기의 서술 방식에 있어서도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들과 아주 유사합니다. 즉 33:18-19에서 관찰한 바대로, ‘야곱’이 ‘세겜’에 정착하여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밭을 사는 장면은 바로 본문 이야기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점에 있어 본문의 마지막 장면 역시 같은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34:30)
‘야곱’이 복수를 두려워하며 말하고 있는 이 장면은 그가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벧엘’로 다시 거처를 옮기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참고. 35:1-5). 특히 아래 구절은 ‘야곱’의 두려움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35:5). 이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야곱’의 참혹한 복수극을 펼쳤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를 질책하는 이 장면은, <창세기>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흔히 “야곱의 축복”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유언에서 유독 이 두 아들에 대해서만큼은 그들의 행적을 저주하는 장면을 예고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49:5-7). 결론적으로 이러저런 관찰들을 통해서 볼 때, <창세기>의 화자는 책의 마지막 편집 과정에서 34장이 책 전체의 구성이나 주제와 조화나 일치를 이루도록 노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파악하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화자의 이러한 편집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일말의 단서들을 어떻게 찾아볼 수 있을까?
그러한 시도 중의 하나로 본문을 26장과 비교해 보는 것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야곱 순환> 내에서 34장의 <디나와 히위족> 이야기는 26장의 <이삭과 아비멜렉> 이야기와는 일대 일의 대응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장은 언뜻 보아, 주변의 다른 이야기들과는 별 상관도 없고 오히려 이야기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모두 그 땅의 주민들과 얽힌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26장의 ‘블레셋’ 족속; 34장의 ‘세겜’ 족속. <이삭과 아비멜렉> 이야기에서는 ‘리브가’가 ‘아비멜렉’ 왕에게 잡혀 가기 직전이었다면, <디나와 히위족> 이야기에서는 ‘디나’는 ‘세겜’에게 실질적으로 겁탈 당하고 납치를 당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족장들은 위기에서 아무런 용기와 담대함을 보여주고 있지 못합니다. ‘이삭’은 아내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그리고 ‘야곱’은 딸이 당한 수치에 대해서 용기 있는 처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 모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채 무사히 그곳을 피해 나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크게 재물까지 모아서 나옵니다(26:31, 13; 34:28-29; 35:5). 34장과 26장과의 관계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 26장에 대한 <문학과 역사> 부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도 이와 유사한 경우를 두 번이나 경험한 바 있습니다(12:10-20; 20:1-18). <족장 이야기>를 <족장 순환>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구성상의 “순환과 반복”의 패턴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34장이 <족장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충실히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면, <디나 이야기>를 통해서 화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지속적이고 일관된 신학적 메시지가 있습니까? 우리는 그 단서를 <벧엘의 현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20년 전에 ‘가나안’을 떠나면서 ‘벧엘’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한 바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브라함 언약”을 재확인시켜주셨습니다. 다름 아닌 땅과 후손과 그리고 축복에 관한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하나님의 임재 또한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28:15). 이 때 ‘야곱’은 다음과 같은 말로 하나님 앞에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28:20-21). 이후 ‘야곱’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속에, 많은 자식들과 재산과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야곱’도 자신의 약속을 지켰습니까? 그가 가나안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직 ‘벧엘’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제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 할 즈음에, 재앙이 몰아닥친 것입니다. ‘세겜’의 능욕과 ‘디나’의 수치에 겹쳐, 자식들의 잔인한 복수극까지 겹쳐,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살고 싶다던 그의 꿈은 이제 무위로 끝나게 될 판이었습니다. 피는 피를 부르는 법. 이번에는 ‘세겜’ 편에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야곱’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인가?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그분의 언약을 이루어내실 것인가? 이번에도 죄악이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칠 것인가? <디나와 히위 이야기>는 이들 질문에 답하기 위한 또 하나의 장치이자 소재(素材)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자료비평” 학자들은 이 본문이 다루기가 매우 까다로운 부분이라는 데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오경>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본문 중의 하나라고 하기도 합니다. 본문의 분석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26절과 27절 사이의 연결이 어색하다는 점입니다. 즉 이 부분에서 이야기는 직선적인 흐름을 보이지 않고, 이전의 내용으로 되돌아가고 있거나, 불필요한 반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이 수시로 역할을 바꾸어가며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하몰’이 말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세겜’이 말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들 ‘히위’ 족속과 담판을 벌이고 있는 상대도 어떤 곳에서는 ‘야곱’이 등장하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그의 아들들이 되기도 했다가, 또 다른 곳에서는 ‘시므온’과 ‘레위’가 되기도 합니다. 당연히 두 개의 상이한 자료가 혼재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편의상 두 자료를 <A 자료>와 <야훼 자료>로 구분하여, 전자를 <하몰 전승> 그리고 후자를 <세겜 전승>으로 명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1) <하몰 전승>: 1-2상, 4, 6, 8-10, 13-18, 20-25, 27-29절
(2) <세겜 전승>: 2하-3, 5, 7, 11-12, 19, 26, 30-31
이러한 구분 방식에 대해서 초기 자료비평 진영 내에서 대체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져 있긴 했지만, 여전히 다양한 견해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Wenham). 예컨대, <A 자료>가 <사제 자료>에 속한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엘로힘 전승>에 더 가깝다는 주장도 있기도 합니다. 본문에 대한 보다 상세한 자료비평적 연구는 Wenham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유린 1(1-4절)
흔히 34장 전체의 주제나 제목을 “디나의 수치(羞恥)” 또는 “디나의 유린(蹂躪)”으로 붙여놓고 있지만, 이 제목에 걸 맞는 본문은 첫 번째 장면뿐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장면은 전체 이야기의 배경 역할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야기의 주된 무대이자 절정은 또 다른 “유린” 즉 ‘히위’ 족속에 대한 ‘시므온’과 ‘레위’의 복수로서, 첫 번째 에피소드는 네 번째 에피소드의 원인이자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화자는 첫 번째 장면을 ‘디나’가 누구인지에 관한 긴 진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1절)
‘디나’에 관한 이러한 진술은 그 자체로서 상당히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야곱 이야기>에서 ‘디나’가 등장하는 유일한 에피소드입니다. 이곳 외에 그녀의 출생과 관련해서 딱 한 번 등장한 적은 있습니다만(29:21), 그나마도 이름만 간락하게 등장했지 다른 남자 형제들처럼 이름 각각에 대한 기원론적인 부가 설명은 전혀 없었습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디나’를 소개하면서, 먼저 “레아의 딸”이라고 밝혀두고 있습니다. 우선 한 인물을 아버지의 계보가 아니라 어머니의 계보를 따라 소개하고 있는 것 자체가 <구약>의 배경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구약>에서 이 외에 여섯 번이 알려져 있습니다: 삼하 3:3, 4(2회); 대하 24:26(2회); 에 9:29. 그리고 ‘디나’를 ‘레아’와 연관시키고 있는 곳도 본문 전체 이야기 내에서 이 곳뿐이며, 나머지 장면에서는 모두 그녀를 단순히 “야곱의 딸”(3, 7, 19절), “그의 딸”(5절), “그들의 누이”(13, 27절), 또는 “우리 누이”(31절) 등으로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화자의 복선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야곱이 혐오하는 아내) 레아의 딸 디나”. “사정이 이러할진대 이 딸이 수치를 당했음에도 분노는 고사하고 별 감정의 요동도 보이지 않은 아비의 태도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아비의 태도가 이 모양이니, ‘레아’가 낳은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아비를 대신하여 스스로 법의 집행자가 되어 무자비한 피의 복수를 벌인 것 역시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디나’의 행동에 대한 묘사 역시 애매모호하기만 합니다. 그녀의 행동이 무슨 비난 받아 마땅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평가가 없다는 것이지요. 혹자는 ‘디나’의 행동을 ‘레아’가 ‘야곱’을 유혹하러 그의 침소에 들어가는 행위(30:16)와 비교하면서 저주를 자초하는 짓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디나’가 그 땅의 남자들을 만나러 나갔다면 모를까 동성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다는 표현은 다분히 가치중립적인 진술로 보입니다. ‘디나’는 집 안에서만 갇혀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유스럽게 바깥출입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점 ‘리브가’나 ‘라헬’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리브가’는 아비를 위하여 우물가에 물 길으러 자주 나갔던 것으로 보이며(24:16), ‘라헬’은 아비의 양떼를 치러 들로 나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29:6).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굳이 ‘디나’의 행동을 결과론적으로 평가하자면, 그의 처신은 위험을 자초하는 위태로운 것으로 보입니다. 함께 어울리던 ‘세겜’의 처녀들이 남자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렸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화자의 초점은 ‘디나’에게 있다기보다는 바람둥이 ‘세겜’에게 있어 보입니다: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2절)
‘세겜’이 ‘디나’의 동의하에 잠자리를 함께 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화자는 세 개의 강력한 동사를 동원하여 ‘세겜’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취하여”(jq'l, 라카흐); “눕히고”(bk'v, 샤카브); “욕되게 하고”(hn:[;, 아나). 특히 이 문장에서 등장하고 있는 “보고, 취하다”는 등장인물의 참을 수 없는 욕정이나 탐욕과 관련하여 <창세기> 화자가 즐겨 쓰는 표현입니다. 예컨대, ‘하와’는 동산 중앙의 한 열매를 “보고, 취하여” 먹었으며(3:6), 사람들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취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6:2). 처음에 욕정이 먼저 생기고, 그것을 억제하지 않았을 때 행동이 뒤따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입니다.
이처럼 강력하게 ‘세겜’을 비난하던 화자가 갑자기 그의 이면(裏面)을 보여주면서 다소 동정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마치 독자들의 동정심을 유발이라도 하려는 듯한 태도입니다: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3절)
화자의 진술에 따르면 마치 ‘세겜’이 욕정을 참지 못하여 충동적으로 ‘디나’를 겁탈하기는 했지만, 사후 이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문자적으로 이해하자면, “그의 영혼이 디나를 원하였다”입니다. 처음에는 완력으로 ‘디나’와 소통했지만, 나중에 진심을 실어 그녀와 소통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세겜’의 이런 모습은 ‘다윗’의 아들 ‘암논’과는 지극히 대조적입니다. ‘암논’은 그의 누이 ‘다말’을 겁탈한 후 그녀를 극도로 미워하여 내쫓아 버립니다(심하 13:15-17). 그런데 ‘세겜’은 오히려 ‘디나’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정욕이 변하여 사랑이 된 것이라고 할까요. <에덴 이야기>는 이와는 반대의 경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3:16). 즉 ‘하와’는 ‘아담’에 대한 사랑이 타락 이후 (그를 가지려는) 정욕으로 변하게 될 것이었습니다(Hamilton).
그는 진정 ‘디나’와의 결혼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이르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4절)
아버지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아내려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삼손’과도 같습니다: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삿 14:2).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 ‘삼손’이 이방인의 딸을 원하고 있었다면, 이방인의 아들 ‘세겜’은 하나님의 딸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는 다르지 않습니다. 간청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퉁명스럽게 명령조로 말하고 있는 점이 그렇습니다. 화자는 ‘세겜’의 대화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친숙한 동사 “취하여”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즉 그는 아비로 하여금 ‘디나’를 “취하여” 아내로 삼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자의 묘한 여운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2. 설득 1(5-19절)
두 번째 장면은 본문에서 가장 긴 부분을 차지하며, 대부분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용은 ‘세겜’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 간의 약정에 관한 것입니다. 이 장면의 분위기는 대부분의 약정 의식이 다 그러하듯 모든 등장인물들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엄숙하고, 정중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을 살펴보면 이러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은 ‘세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13절), 둘째, ‘세겜’은 ‘디나’를 인질로 사로잡고 있다는 것입니다(17, 26절).
화자는 ‘야곱’이 딸의 수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를 먼저 보여줌으로써 두 번째 장면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5절)
화자가 여기서 강조하고자하는 바는 두 가지로 보입니다. 하나는 “그의 딸 디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더럽혔다”입니다. 앞 장면에서 화자는 ‘디나’가 “레아의 딸” 임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만, 이곳에서 강조점은 ‘디나’는 어쨌든 그의 딸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 아닌 그의 딸이, 다른 사람 아닌 이방인에게, 다른 일도 아닌 겁탈을 당했는데, ‘야곱’이 보여주는 반응은 어떠해야 할까요? ‘다윗’은 그의 딸 ‘다말’이 같은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니 그냥 상상에 맡기겠습니다(삼하 13:21). 그러나 ‘야곱’의 모습은 실로 개탄스러운 것입니다.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들에 나간 아들들이 돌아오기 만을 기다렸을 뿐입니다. 그의 행동을 두 가지로 요약하자면, 무관심과 비겁함입니다. 이런 장면 친숙하지 않습니까?
이러는 사이 ‘하몰’과 ‘세겜’이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야곱’을 방문합니다: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6절)
그러나 화자는 이곳에서 ‘하몰’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혹시 두 아비의 태도를 대조하려는 의도가 아닐까요? ‘하몰’이 자식의 문제를 놓고 모든 것을 이야기하려고 온 것에 비해서(이것이 정당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야곱’은 딸의 문제를 놓고 그의 아들들이 올 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모습은 흥미로운 대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한심한 아비의 모습은 들에서 돌아와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난 뒤 보여주고 있는 그의 아들들의 태도와도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7절)
‘다윗’이 그의 딸 ‘다말’이 겁탈 당했을 때 보여준 태도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이들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것이 들에서 돌아온 이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설령 ‘야곱’이 들로 사람을 보내어 아들들에게 사건의 개요를 대충 전했을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유유뷰단하고 비겁한 그의 행동은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화자는 적어도 가족이 당한 곤경에 대해서 반응하는 태도에 있어서만큼은 ‘야곱’보다 그의 자식들을 한 수 위에 두고 있습니다. ‘세겜’의 행동은 어떤 기준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범죄 행위이며, 수치스러운 일입니다(신 22:21; 수 7:15; 삿 19:23-24; 20:6; 삼상 25:25; 삼하 13:12). 화자는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야곱의 딸을 강간한” 것이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가 ‘야곱’의 옛 이름과 새 이름을 함께 거명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 아비의 소극적인 자세를 비난하면서, 동시에 ‘야곱’의 아들들은 아비와는 대조적으로 그들 누이의 명예 못지않게 이스라엘의 명예에 대해서도 지극한 관심과 애착을 보여주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스라엘에 있어 민족과 국가의 차이는 미미한 것이라는 것이겠지요.
적어도 ‘디나’의 수치를 바라보는 입장에 있어서 두 아비는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니다:
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연하여 하니 원하건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8절)
‘하몰’은 아들들의 분노에 크게 개의하지 않는 듯, 정중하지만 아들의 범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아들의 혼인 문제를 다시 거론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사과의 말도, 그들이 ‘디나’를 억류하고 있다는 말도 없습니다. 아들이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고만 말합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종족 간의 혼인의 대가로 아주 매력적인 보상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9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10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주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 하고(9-10절)
아주 관대하고 너그러운 제안입니다만, 이스라엘 편에서는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제안임에 분명합니다. <신명기>는 타 종족과의 혼인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신 7:3). 이러한 입장은 이후 다른 책에서도 재확인되고 있습니다(수 23:12; 스 9:14). ‘하몰’은 그의 제안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유익이 일인지 따져보라고 충고하기도 합니다: (1) 평화 공존; (2) 자유 왕래; (3) 토지 매매.
다시 언급하건대, ‘하몰’의 제안은 아주 타협적이며, 실익이 되며, 진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先占)하고 있는 쪽은 ‘야곱’이 아니라 ‘하몰’입니다. 두 당사자들이 알고 있고, 독자들도 나중에 알게 될 사실 즉 ‘디나’가 이들에게 붙잡혀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세겜’도 그의 아비에 이어 공세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아비에게 자신의 문제를 위임한 상태였는데, 왜 지금 이 자리에 그가 끼어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문학과 역사):
11세겜도 디나의 아버지와 그의 남자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리니. 12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주리라(11-12절)
그는 참을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를 지금 당장 받으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비가 제시한 것 외에 결혼 지참금으로 백지수표를 위임할 수 있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결혼 지참금은 합법적인 결혼 외에도 ‘디나’의 경우처럼 혼전 관계에 대해서도 합법적인 결혼을 위해서 필요했으며, 이 경우 신부의 아버지는 임의로 그 액수를 정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출 22:16-17). 물론 <신명기>에 따르면 오십 ‘세겔’을 넘지 못했습니다(신 22:29). 그는 혼수 외에도 예물을 더할 용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거절하기 어려운 엄청난 물량 공세임에 분명합니다.
이스라엘과 그의 아들들은 ‘세겜’의 제안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세겜’의 열렬하고도 공세적인 제안에 이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르게 역 제안을 내놓고 있습니다. 같이 맞장구를 치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이들의 제안은 ‘세겜’의 그것과는 달리 진심이 아닌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13절)
거짓말의 구체적인 실체는 나중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만, 지금 이 구절은 나중에 이들이 저지를 끔찍한 범죄 행위에 대한 충격을 다소 완화시켜줄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속임수”(hm;r]m, 미르마)와 관련하여 화자가 사용하고 있는 이 단어는 <야곱 이야기>에서 두 번째 등장하고 있습니다. 처음은 ‘이삭’이 ‘에서’에게 ‘야곱’이 행한 일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바 있습니다: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26:35). 야곱 역시 이와 연관된 동사를 사용한 바 있기도 합니다: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29:25).
이 장면에서 ‘야곱’의 아들들은 ‘압살롬’과 비교해 볼 만 합니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의 누이(‘디나’와 ‘다말’)가 겁탈을 당하는데, 모두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여 그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창 34:2; 삼하 13:14). ‘야곱’의 아들들이 복수를 위하여 술책을 도모하지만, ‘압살롬’은 이 년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다말’은 상대방의 폭력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항했지만(삼하 13:12), ‘디나’의 경우에는 그러한 언급이 없습니다.
아무튼 ‘야곱’의 아들들이 이방 종족 간의 결혼에 대해서 내놓은 역 제안의 주된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14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15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16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17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14-17절)
‘하몰’과 ‘세겜’의 관심사가 주로 경제적인 것에 있었다면, 이들의 관심사는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종교적인 문제입니다. 이들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성경>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과의 결혼을 “수치”(hP;r]j, 헤르파)로 간주하며, 조롱과 멸시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는 합니다(예: 무자식, 30:33; 노예, 수 5;9; 군사적 열세, 삼상 17:26; 간음, 잠 6:33). ‘야곱’의 아들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사례는 “아브라함 언약”의 규례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17:10).
그러나 이 두 경우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이곳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요구하고 있는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할례를 개종의 표시로 요구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오직 결혼을 통해서 두 족속이 동화되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약정 정도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이방 족속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은 할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회심을 통해서입니다. <신명기>도 이점을 분명히 하면서, 이들 모두의 생각이 틀렸음을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4).
만일 ‘하몰’과 ‘세겜’이 할례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결혼은 성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점 ‘야곱’의 아들들이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만(17절), 과연 그렇게 될까요? 적어도 17절에 따르면,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마치 ‘야곱’의 아들들이 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실은 정반대입니다. ‘디나’을 억류하고 있는 쪽은 ‘하몰’과 ‘세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몰’과 ‘세겜’은 이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친절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18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19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존귀하였더라(18-19절)
화자는 이 결정을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이 ‘세겜’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는 이도 ‘하몰’이 아니라, ‘세겜’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족속 중에서 가장 먼저 할례를 받은 자이며,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화자의 말대로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아주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겜’은 이제 ‘디나’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습니다.
3. 설득 2(20-24절)
세 번째 장면은 두 번째와 마찬가지로 주로 대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화의 내용은 ‘하몰’과 ‘세겜’이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이스라엘과의 결혼에 관한 약정을 소개하면서, 이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목적이니만치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 성문에 이르러 그 고을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20절)
이 지역의 지도자 ‘하몰’은 도시 성읍 안에 있는 공공장소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있습니다. 이 장소는 <성경>에서 공공 집회 목적으로 종종 언급되는 곳입니다(신 22:15, 24; 렘 7:2; 암 5;10).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고을 사람”은 단순히 마을의 지도자급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장로회보다는 그 규모가 모임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토로하게 될 문제는 단순히 두 집안의 결혼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결혼 약정 속에 포함되어 있는 토지 사용권과 같은 주민 모두의 이익이 걸린 중대한 사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몰’이 마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약정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1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만하니 그들로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22그러나 우리 중에 모든 남자가 그들의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23그리하면 그들의 생축과 재산과 그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 말대로 하자 그리하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리라(21-23절)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이 장면을 두 번째 장면의 대화(9-12, 14-17절)와 비교해 보는 것도 아주 흥미로울 것입니다. Hamilton은 이 차이를 두 장면의 대화에 대한 구문론적인 분석을 통해서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Hamilton, 366쪽.
우선 주목할 만 한 사실은, ‘하몰’과 ‘세겜’은 이 약정이 애초에 자신들 때문에 비롯된 것임을 전혀 밝히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즉 ‘세겜’이 ‘디나’에게 빠져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오히려 종족 상호 간의 결혼이 전체적으로 유익이 된다는 점을 먼저 부각시키고 있습니다(21절). 그리고는 약정의 전제 조건인 할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22절). 마지막으로 다시 약정을 통해서 얻게 될 경제적 이익에 대해서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지역에서 땅을 구입하고 소유할 수 있다고 했던 애초의 계약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습니다. 대신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가축과 재산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계약이 성사 된 것도 ‘디나’가 자신들에 의해서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어쩔 수 없이 승낙할 수밖에 없었던 일종의 불평등 계약이었음을 밝히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몰’이 이처럼 애초의 계약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것을 두고 단순히 외교적인 처신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국가 간의 교섭에는 소위 이면계약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 어차피 불리하게 맺은 약정 부분은 숨기고,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다소 부풀려 자국민에게 공지하는 것이 관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몰’의 경우도 동료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그로 인해 얻게 될 경제적 이득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 매매에 관해서 양보를 한 사실을 누락시킨 점이나, 이스라엘의 가축과 재산이 자신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한 점 등은 거짓 보고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몰’은 성읍 사람들을 속였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스라엘과 거짓 계약을 한 것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칼빈’도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이들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몰’과 ‘세겜’은 이 약정에 얽힌 개인적이고도 진정한 동기는 감춘 채, 일련의 다른 유익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어떤 이유를 대건 거짓이고 잘못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의 거짓은 실은 인류모두의 보편적인 질병으로서, 권력을 가진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모든 일들을 사사로운 유익을 위해서 수행하고 있지만 실은 공익과 공통 선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하몰’과 ‘세겜’이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이중 플레이는 나중에 자신의 동족들이 당하게 될 끔직한 운명의 충격을 오히려 완화시켜 주는 기능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의 말속에도 극적인 아이러니가 드러나고 있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향해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화평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21절). 더 나아가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모든 소유를 다 차지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23절). 그러나 불과 며칠 만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이스라엘이 오히려 그들을 유린하고 모든 재산을 약탈해 가게 될 것입니다(28-29절).
이러한 임박한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들은 ‘하몰’과 ‘세겜’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24절)
화자가 강조하고 있는 바는,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남자”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나중에 ‘시므온’과 ‘레위’의 기습 공격을 받았을 때 대항하여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모든 남자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4. 유린 2(25-31절)
마지막 장면은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첫 장면과 교차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 장면 모두 대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장면은 아들(들)이 그 아비에게 대한 질문으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4절);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31절). 두 장면의 핵심 주제는 불법적 유린에 관한 것입니다. 첫 장면이 ‘하몰’의 아들 ‘세겜’이 ‘디나’를 유린하는 것이라면, 마지막 장면은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족속을 유린하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신명기>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강조라도 하듯, 두 장면에서 등장하고 있는 어휘들 또한 동일합니다. 예컨대, ‘세겜’이 ‘디나’를 “취한” 것처럼, ‘시므온’과 ‘레위’ 또한 칼을 “취하고”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 ‘디나’는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왔으며”, 마지막 장면에서는 감금 상태로부터 “나왔습니다”. ‘세겜’의 행동이 화자의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시므온’과 ‘레위’의 행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정당한 복수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세겜’ 족속은 이스라엘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할례를 받습니다:
제 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25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들이 수술의 후유증으로 가장 고통스럽고 거동이 불편할 때 이들 모두를 죽여 버립니다. 대학살입니다. 단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성읍의 모든 남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 현대 독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화자 자신도 큰 충격을 받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화자는 이 충격의 와중에서도 대학살의 주인공 ‘시므온’과 ‘레위’가 ‘디나’의 친 오빠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교묘하게 이들이 왜 그런 식으로 행동했는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아비가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겠지요. 적어도 이 경우를 놓고 보면 아비보다는 친 오빠가 훨씬 가족 사랑에 충실하고 있는 모습니다. ‘야곱’은 ‘레아’ 뿐만 아니라, ‘디나’마저 미워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시므온’과 ‘레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독자들이 대학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안, 화자는 새로운 정보를 한 가지 더해주고 있습니다: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26절)
즉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디나’는 ‘세겜’의 집에 강제로 억류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누이를 ‘세겜’의 집에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 사실은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만, 독자들은 이 장면에서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시므온’과 ‘레위’는 그동안 위협 가운데, 그리고 불리한 조건 하에서 ‘세겜’과 협상을 진행해 온 것입니다.
이점을 감안한다면, ‘시므온’과 ‘레위’의 행동을 칭찬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정당화 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이 두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야곱’의 나머지 아들들의 행동은 역겨움 그 자체입니다. 이들은 마치 ‘하이에나’와 같습니다. 남이 다 이겨놓은 전쟁에 뒤늦게 참여하여 재물들을 노략질 하고, 자녀들과 아내들을 포로로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27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28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29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27-29절)
이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 또한 냉소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짧고도 해학적인 진술을 통해서 이들 형제의 겉과 속을 절묘하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수려한 말과 추악한 행동, 허울 좋은 종교적 이상과 재물에 대한 현실적 탐욕, 종교를 빙자한 거짓과 위선. 이 모든 행동을 단순히 그들의 누이가 겁탈 당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리고 있는 복수극과 유사한 경우가 <민수기>(25; 31:1-9)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두 내용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들이 빼앗은 노획물의 목록을 보면 ‘아브라함’이 ‘사라’의 문제로 이집트를 빠져 나올 때 가지고 나왔던 목록과 거의 흡사합니다(12:16). 다시 한 번 동일한 모티브를 보게 되는데, 즉 족장이 자신의 잘못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큰 부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는 ‘야곱’과 그 자식들이 서로를 향해서 열띤 비방을 주고받고 있는 장면으로 것으로 극적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30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31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30-31절)
‘야곱’은 자식들이 자기에게 화를 끼쳤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피해 정도가 아니라(수 7:25; 삿 11:35; 삼상 14:29; 잠 11:17, 29; 15:27), 개인적으로나 또는 국가적으로 큰 재앙을 의미합니다. 그가 이처럼 자식들을 비난하는 데에는 상대방의 복수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에서가 나를 죽일 것이라”고 두려워 한 바 있습니다(32:11). 그의 심약함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얍복강의 경험”이나 “형과의 만남” 등이 이번에도 별 소용이 없는 듯합니다. ‘야곱’의 이러한 두려움을 하등 비난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가 자식들을 비방하고 있는 이유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는 자식들의 살육이나, 할례를 남용한 것이나, 상대와의 계약을 파기한 것 등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비난하고 있는 것은 자식들이 자기 이름을 욕되게 했다는데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딸이 겁탈 당했기 때문도 아니고, 이들 족속들과의 결혼 때문도 아닙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자신의 인기나 명예뿐입니다.
아비의 비난에 대한 ‘시므온’과 ‘레위’의 반응 또한 분노와 질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은 ‘디나’를 가리켜 “아버지의 딸”이라 부르지 않고, “우리 누이”로 부르고 있습니다. 가족 간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대목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들은 누이를 이렇게 부름으로써, 그녀의 진정한 보호자는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들임을 자청하고 나섭니다. 누이를 창녀처럼 대한 사람은 ‘세겜’만이 아니라, 아버지도 마찬가지라고 선언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실 딸이 겁탈을 당했을 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만있다가, 사후에 ‘세겜’으로부터 물질적인 지원을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자라면 아비가 아니라 포주라고 봐야 하는 것이지요. 아비를 향한 이런 비난은 ‘세겜’을 향한 것이기도 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야곱의 집.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신뢰 받는 개인이나 기관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언론과 방송은 여전히 최상위 그룹에 속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과연 이들 기관은 그토록 신뢰할 만할까? 사례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2008년도 상반기 한국 사회를 무법천지까지 몰고 갔던 촛불집회도 따지고 보면 MBC의 <PD 수첩>의 한 방영에서 촉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송은 실은 왜곡, 과장, 및 일부 허위 보도였음이 밝히 드러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후 MBC가 보여준 태도였습니다.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대신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수차례 대책회의라는 것을 가져 논의한 내용들을 일부 소개해 보면 이러합니다: “PD 수첩 내용에 실수가 있었다고 인정하는 순간, MBC에 대한 실망과 공격이 이어질 수 있다”; “PD 수첩 내용에 대한 사내 심의에 착수하는 것 자체가 보도가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우리 패를 먼저 보여주기보다 검찰의 패를 보고 난 후에 결정하자”; “오역(誤譯) 등의 문제를 발표하지 말자”; “검찰 수사에 대비해 실전을 방불케 하는 시뮬레이션이 있어야 한다.” 참고: 조선일보, 2008년 7월 10일자(A1, A3, A27면).
이건 대책회의가 아니라 범죄 집단 회의 수준으로 보입니다. 언필칭 진실과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사람들의 실체가 이런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개인적으로든 단체적으로든 치부를 한사코 숨기려 하는 본능과 유전인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창세기> 34장의 <디나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백성이 위선과 거짓과 음흉함과 잔인함 일색으로 무대 전체를 도배하고 있습니다. 아마 <성경> 내에서 이스라엘의 치부를 이곳만큼 더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는 곳도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정상적인 작가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삭제해 버리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화자는 이 사악하고 추악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그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이야기가 <성경> 속에 포함될 수 있었을까? ‘보이스’(M. Boice) 목사님의 말대로,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성경>의 신뢰성이 담보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사코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오히려 미화하려는 인간과는 달리,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드러나는 사실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에 어떤 불이익을 미칠지에 대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다시 한 번 <성경>이 어떤 책인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과연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화자는 모든 등장인물 개개인의 삶에 심오한 인생의 교훈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등장인물 모두를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가 주는 첫 번째 교훈을 위해서 직전의 이야기 마지막 부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33:18-20). ‘야곱’은 형과 헤어져 ‘벧엘’로 간 것이 아니라, ‘숙곳’을 거쳐 ‘세겜’에 정착하기에 이릅니다. 그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동기와 관련해서 화자는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33:17).
보다 단도직입적으로 화자의 입장을 대변해 보자면 이런 것이겠죠. 즉 그는 ‘벧엘’로 가서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숙곳’과 ‘세겜’에서 자신을 위한 “야곱의 집”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형을 따라 ‘세일’ 땅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마치 ‘롯’이 삼촌 ‘아브라함’과 함께 ‘마므레’에 살지 않고 ‘소돔’으로 간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같은 동기로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세겜’과 ‘소돔’은 기회의 도시입니다. 문명의 화려함이 있고, 명성과 사교를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반면 ‘벧엘’이나 ‘마므레’는 오직 촌티 나는 종교와 예배만 있을 뿐입니다. 돈벌이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왜 ‘세겜’에서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땅을 샀는지 알 만 합니다(33:19). 따라서 ‘야곱’이 왜 ‘벧엘’이 아닌 ‘세겜’에 눌러 앉기로 작정했는지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한 때는 ‘벧엘’로 돌아와 살겠다고 맹세한 바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급할 때 이야기였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내 집이 아니라, 내 마음이 있는 곳이 내 집이지.”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즉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말입니다. 안식과 편안함을 느껴야 하는 곳이 가정임에는 분명합니다. ‘야곱’도 지금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 아닌, ‘세겜’에서 더 큰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믿을 만 한 것입니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예레미야’는 이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아쉽지만 우리 마음 가는대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선호 여부가 결정의 최종 변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결국 ‘야곱’도 그의 마음이 있는 ‘세겜’ 땅의 “야곱의 집”에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벧엘’ 즉 “하나님의 집”에서 살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한 사건을 통해서 뼈저리게 배우게 될 것입니다.
나는 왜 지금 이곳에 살고 있습니까? 이웃이 좋아서입니까? 수준이 비슷한 이웃 말입니다. 자녀 교육에 좋기 때문입니까? 질 높은 문화와 예술을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까? 이것이 전혀 잘못된 것이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상한 이유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야곱’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영적인 요소도 거주지를 선택하는데 고려의 대상으로 삼았습니까? “이곳에 더 좋은 교회가 있기 때문에”, “이곳이 신앙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서 더 좋기 때문에”, “이곳에서 나의 소명과 비전을 더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기 때문에.”
2. 디나의 유린
본문의 두 번째 교훈은 ‘디나’의 유린과 관련해서입니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은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져 있는 일화이자 교훈입니다. 그런데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이나 이사를 다니면서 아들의 의견이나 생각을 물어보았다는 이야기는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어머니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맹자가 아주 어릴 때 일이라 자기 견해를 제시하고 말고 할 게재가 아니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맹모삼천의 또 다른 교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자녀 교육은 아이들이 어릴 때 아주 강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평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습관이나 덕목을 체질화 하고, 자신의 인격으로 만드는 일과 관련해서는 조기교육의 중요성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자라 자기의식을 가지기 시작하면 무조건적인 주입은 더 이상 먹혀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항과 거부를 받게 됩니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는 자의식 때문에 부모의 ‘멘터링’(mentoring)을 고맙게 생각하기 보다는 쓸모없는 잔소리로 여기게 됩니다. 사실 이 때부터는 부모는 전문적인 지식이나 식견을 제시해 주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이야기하기 보다는 도움을 요청할 때 조언을 해 주는 식으로 그 방법도 바꿀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필자를 비롯한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결혼을 한 후에 며느리나 사위를 맞게 될 때 시작하려 합니다. 자식들이 청소년이 되도록 주로 “오냐, 오냐”로만 일관하다가, 결혼하여 법적인 성인이 되고 난 뒤 갑자기 인생과, 가정과, 효도, 등등에 대해서 가르치려 하니 갈등과 충돌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지요. 다시 한 번 ‘롯’을 도마 위에 올려놓아야겠습니다.
‘소돔’이 멸망할 것이라는 복음과 종말의 소식을 가족들에게 알렸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은 냉소였습니다: “아닌 밤에 홍두께처럼 난데없이 종말은 무슨.” 왜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한 번도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본인은 물론 자식들에게도 모범을 보인 적도, 가정교육도 시켜본 적이 없던 아비가 어느 날 느닷없이 신앙교육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당연히 우습게 보이는 것입니다. “너나 잘 하세요.” 뭐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 직장이나 이웃에게 평소에는 한 번도 복음을 전하거나 가르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증거 하겠다고 나서면 십중팔구 정신 나간 사람으로 인식되기 십상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필자로부터 <성경>을 배웠던 한 제자가 대학 졸업 후 군대를 다녀와, 인생의 진로 문제로 필자를 찾아왔습니다. 본인의 희망은 필자처럼 학자의 길을 걷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대학원에 진학하여, 졸업 후 외국 유학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끈기 있게 앉아 공부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고, 부모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 중에서도 아무도 어떤 일을 끈기 있게 해 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어, 과연 이 길을 가는 것이 적성에 맞는 것인지 아닌지 판단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학생은 어릴 적부터 제대로 끈기나, 노력이나, 극기, 등과 같은 참으로 중요한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컨대, 가장 싫어하는 음식을 가장 먼저 먹는 습관이나, 가장 하기 싫은 일을 가장 먼저 하는 것이나, 숙제를 먼저 하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나, 식당 같은 공공장소에서 마구 떠들며 돌아다니지 않고 끝까지 한 곳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것이나, 식사를 할 때에도 남이 먹기도 전에 혼자서 마구 게걸스럽게 쩝쩝거리며 먹어치우는 대신에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식탁 매너를 숙지하게 하는 것이나, 줄 서서 기다리며 인내를 배우는 것과 같은 지극히 초보적인 시민 의식을 체질화 하는 훈련을 별로 접해 보지 못한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하려고 하니 몸이 뒤틀리고, 머리가 아프고, 자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필자가 이 제자에게 충고한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첫째는, 좀 늦긴 했지만 우선 대학원에 진학하여 2년 동안 자신의 적성과 체질을 파악하는 기회로 삼아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혹시 이번에도 중도에 그만두고 달아날 수 있으니 ‘멘터’를 곁에 두고 수시로 점검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필자 말대로 해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가 보듯이 ‘야곱’은 자녀 교육과 관련해서는 낙제 아버지로 평가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에게 있어 인생에 있어 중요한 선택의 동기는 늘 영적이기보다는 세속적입니다. 우리는 그가 ‘벧엘’이 아닌 ‘세겜’을 선택했을 때 이점을 본 바가 있습니다. 물론 그가 ‘숙곳’과 ‘세겜’에서 제단을 세우는 등 종교적인 사람이 되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보기는 합니다만(33:20), 종교와 믿음의 차이는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종교는 사람이 만들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이지요.
‘디나’를 포함한 그의 모든 자식들이 아버지의 동기와 가치관을 모를 리 없을 것입니다. 특정 자식들에 대한 편애(偏愛)에 대해서야 익히 알려져 있는 바이고, 나머지 자식들에 대해서는 미움보다 더 무서운 무관심으로 일관했습니다. 아들들에 대한 태도가 이러할진대 유일한 딸 ‘디나’에 대해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에게 ‘디나’는 자신의 딸이라기보다는 꼴도 보기 싫은 아내 ‘레아’의 딸일 뿐입니다(1절). 이런 아이가 그 지역의 또래 친구를 만나러 나가 불한당의 왕자 ‘세겜’에게 강간 및 구금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분노는커녕 놀라는 기색도 없습니다.
딸이 이런 변을 당한 것까지 온통 ‘야곱’의 책임으로 돌릴 수야 없겠지만, 사후 이를 대하는 자세나 태도는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나 이스라엘로서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문제는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는데 있습니다. 불의에 대하여 분노할 줄 모르고 항거할 줄 모른다는 것이지요. 도대체 왜 그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체질적으로 심약(心弱)한 때문일까? 자신의 문제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일까? 영적 무지나 무관심 때문일까?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야곱’에 대해서는 그렇다 치고, 오늘날 필자를 비롯한 많은 현대판 아버지들이 어디서 실패하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대충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오늘날 아버지는 너무 바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녀들이 부모의 훈계나 훈련을 싫어하여 반발하는 것이 두려워, 어떤 원칙이나 계획이 없이 거의 무방비로 내버려둔다는데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가지 진실은 교육 받기를 즐거워하는 피교육자 없다는 것입니다. 코치의 역할은 선수들이 싫어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강의를 해야 할지 휴강해야 할지 학생들에게 물어보고 강의하는 선생 없습니다. 자식들에게 물어보고 훈련과 훈계를 시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매를 아끼면 아이를 버리게 된다”는 영국 속담도 있습니다. <잠언서> 말대로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합니다. 유리를 자르려면 다이아몬드가 필요합니다.
효과적인 ‘멘터’가 되는 길은 다소 험난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누구나 처음부터 ‘멘터’가 될 목표를 세우고 인생을 시작하는 경우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신의 영역에서 일정 부분 전문성과 인격성을 갖추게 되었을 때, ‘멘터링’의 기회가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지요. 그러나 부모가 되는 것은 이와는 다소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교육 단체나 일부 교회 등에서 “부모 되기” 또는 “아버지 학교” 등을 통해서 ‘멘터’로서의 부모의 역할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는 있습니다만, 여전히 우리 대부분의 인식은 부모는 거저 되는 것인 줄로 인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누구든 효과적인 ‘멘터’가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두 가지 가장 큰 난관은 바로 자신의 “게으름”과 “일관성의 부재”일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지금 누구를 교육하고 훈계하며 훈련시키고 있습니까? 없다면 계획은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말해 봅시다.
3. 히위와 이스라엘
영적 훈련과 훈계가 절실한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역시 ‘소돔’이나 ‘세겜’과 마찬가지로 극도로 사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세 번째 교훈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이 악하다는 것은 지금 필자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현대판 “디나의 유린”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나 부녀자에 대한 유괴나 납치 그리고 성폭행 등은 지금 우리 사회의 일상사가 되어버린 지가 오래입니다.
이 세상이 악하다고 말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악한 것을 악하게 보지 않고 그것을 수용하거나 타협하는 태도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예레미야’의 진단을 경청해 보아야겠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선지자는 여기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32).
혹시 ‘디나’의 문제도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요?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자신을 너무 무방비로 내던져 둔 것은 아니었을까요? 지나치게 도발적인 치장이나 복장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가지 말아야 할 야간 퇴폐 업소를 찾아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이런 식의 문제 제기는 본문의 핵심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습니다만, 적어도 ‘소돔’이나 ‘고린도’나 ‘세겜’과 같은 도시에서 하나님의 자녀 즉 이스라엘로 살아가는 데에는 적절한 처세술은 아닌 것만은 분명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뱀처럼 지혜롭게, 비둘기처럼 순결하게”라는 모토를 주셨습니다. 적어도 사건 당일의 ‘디나’는 비둘기처럼 순결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뱀처럼 지혜롭게 처신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거듭 밝히지만 ‘디나’가 어떻게 처신했든, 그것이 ‘세겜’의 행동을 결코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디나’는 문제의 원인 제공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은 아니며, 오히려 피해자입니다. ‘세겜’이 ‘디나’의 동의하에 잠자리를 함께 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2절). 더구나 화자는 아주 강력한 언어를 동원하여 ‘세겜’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세겜’은 ‘암논’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순간적인 충동으로 ‘디나’를 겁탈하기는 했지만, 사후 이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기특합니까? ‘암논’을 보세요. 그는 누이 ‘다말’을 겁탈한 후 이전보다 오히려 그녀를 더 미워하여 내쫓아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세겜’은 지금 ‘디나’와 결혼까지 하면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듯이 보이지 않습니까(4절)?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순정남(純情男)의 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그 흔한 유감의 표시도 없습니다. 오히려 ‘삼손’처럼 그 아비에게 명령하듯 ‘디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4절). 후안무치(厚顔無恥)라고 할까요? 그 아비 ‘하몰’은 어떻습니까? 그 아들에 그 아비입니다. 아들을 꾸짖기는커녕 그와 한 통속이 되어 ‘야곱’을 찾습니다. ‘하몰’이 ‘야곱’을 만나 처음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죄송합니다. 얼마나 상심이 크셨습니까? 못난 자식 때문에 선생님과 따님에게 큰 죄를 지었습니다. 염치없는 줄 알지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사과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아들과 ‘디나’의 결혼을 요구했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그의 아들이 ‘디나’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8절). 그리고 잔뜩 깔보고 무시하는 태도로 큰 시혜를 베풀듯 구미(口味)가 당기는 몇 가지 당근을 제시하고 있습니다(8-10절). 일종의 결혼 예물인 셈이지요.
‘하몰’과 ‘세겜’은 그 도시의 상류 사회를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높은 교육 및 지적 수준, 정치적 지위, 그리고 문화적 소양 등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야곱’과 같은 뜨내기들과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야곱’과 같은 천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은 선하고 고상한 사람들입니다. 이들 소위 사회 지배계층의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윤리∙도덕수준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대도 어느 사회든 소위 “화이트 컬러” 계층의 범죄에 대해서는 더 관대한 법입니다. 왜냐하면 법의 심판이나 집행을 하는 자들이 바로 자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는 실은 동서고금의 변하지 않는 진리인 셈이지요. 그 도시 상류 사회가 이러할진대, 나머지 계층에 대해서야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악함과 추악함은 ‘히위’ 족속 즉 이방인의 전유물입니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히위’와 이스라엘 중 어느 쪽이 더 사악하고 가증스럽습니까? ‘야곱’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그의 자식들은 어떻습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이야기 속의 어떤 인물들보다 더 추악하고, 가증스러우며, 무자비합니다. 어째서 그러한지 증명해 보일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두어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이들에게 나름대로 칭찬받을 만 한 구석이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명예를 존중하고 수치에 대해서 분노할 줄 안다는 점에서 그들의 아비보다는 낫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도가 지나쳤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니라, 그 이상이었습니다. 명예의 복수를 할 참이었다면, ‘세겜’ 하나 잡아다 족치는 것으로 끝나야 했습니다. 그런대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을 포함한 도시의 모든 남자들을 다 잡아 죽였습니다(25절).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했고, 하나님의 언약을 무자비한 복수극에 활용했습니다.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가증스러움의 극치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히위’와 이스라엘이 상호 결혼을 통해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속였습니다(14-17절). 물론 처음부터 전혀 그럴 의사나 의지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들 모두를 잡아 죽일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히위’의 모든 남자들은 이들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할례를 받았으나, 돌아온 것은 무참한 죽음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아파서 꼼짝도 못하고 있을 때 기습 공격을 받아 그렇게 되었습니다(25절). ‘시므온’과 ‘레위’는 자신들의 말대로, ‘세겜’이 ‘디나’를 창녀같이 대우했기 때문이라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 하고 있지만(31절),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언약을 창녀처럼 우롱했다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광란의 복수극을 펼치고 있을 때 나머지 형제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들은 마치 ‘하이에나’와 같습니다. 이 녀석은 사자가 힘써 먹이 감을 잡아 놓으면 그 때에서야 슬슬 나타나서 가로채려 합니다. 이들 나머지 형제들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린 아이와 부녀자들만 남아 두려움으로 벌벌 떨고 있는 이 시체 더미의 성읍에 ‘하이에나’처럼 용맹무쌍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장면을 비춰보아야겠습니다: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음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를 사로잡고, 집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27-29절).
화자는 마치 현미경으로 세균을 바라보듯 이들의 행위를 세밀하게, 반복해서, 그리고 집요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분노를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함치고 있는 듯합니다: “보라, 이 치사하고, 야비한 하나님의 백성을! 보라, 강탈하고, 유린하고, 노략질하며, 도적질하고 있는 자들이 ‘세겜’이 아니라 이스라엘인 것을! 이들이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하고 있느냐고? 아 글쎄, 자기들 누이를 이 사람들이 더럽혔기 때문이라나!”
사도 ‘바울’은 화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마치 이 장면에 해설을 달듯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9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9-12)
나는 어떻습니까? 종교와 경건 뒤에 진정한 내 모습을 숨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소명의 이름으로 탐욕이나 미움을 감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선교의 이름으로 저주와 해악을 끼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4. 하나님
대개 한 국가나 가정이 외부로부터 오는 위기를 만나면 일치단결하여 극복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 점에서 외환(外患)은 내우(內優)를 해결하는 순기능의 역할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가정은 어떠했을까? “디나의 문제”로 가족 구성원이 한 마음으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을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야곱’과 그의 자식들 간에 화해가 아니라 갈등과 분열은 더욱 골이 깊어졌습니다. 아비는 자식들 때문에 명성과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비방하고 있는가 하면(30절),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그러한 아비가 무책임하고, 무관심하며, 자신 밖에 모르는 몰염치한 자라고 맞받아치고 있습니다(31절). 제대로 된 “하나님의 가정”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무언가 해결의 실마리를 잡아가는 것 같던 ‘야곱’의 인생이 다시 꼬이는 시점입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얍복’ 강에서 형과의 만남을 앞두고 두려워 떨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을 주셨고, 그 덕분에 그는 담대하게 ‘가나안’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결국 형과 극적인 화해를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32-33장).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하는 것이 지난 에피소드의 줄거리였다면, 이번에는 그처럼 담대하던 이스라엘이 다시 ‘야곱’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딸의 비극을 앞에 놓고 분노는커녕 침묵과 무기력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가해자 ‘세겜’과 그의 아비 ‘하몰’의 기세와 위세에 눌려 맞서기는커녕 두려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며, 그들이 제시하는 경제적 보상 내지는 예물 공세 앞에 윤리∙도덕적 원칙은 맥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장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이런 모습은 자식들을 화나게 만들었으며 가정의 분열을 가속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앞으로 있을 <요셉 이야기>를 예고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다시 한 번 ‘야곱’ 가정의 분열과 갈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셉’의 비극을 놓고 이번에는 입장이 바뀌어 ‘요셉’의 배 다른 자식들의 무관심에 대해서 ‘야곱’이 분노하며 절규하고 있습니다. ‘얍복’ 강을 건너 형과 극적인 화해를 이루어내었던 이스라엘이, 이번에는 자식들과의 분열과 갈등으로 ‘야곱’이 되어 ‘얍복’ 강 건너편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나중에 보게 될 것이고, 지금 이 순간 ‘야곱’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면, “비겁함”, “유약함”, “무원칙”, 그리고 “무소신”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긴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그는 다시 한 번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큰 부자가 되어 그 땅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그들의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속의 물건을 노략한지라”(28-29절). 보상치고는 참으로 희한(稀罕)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이야말로 <족장 이야기>에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중요한 모티브라는 사실은 현명한 독자라면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즉 ‘야곱’이나, ‘아브라함’이나 ‘이삭’ 모두 한 가장으로서 자기에게 딸린 가족 구성원 특히 여자 구성원을 보호하고 지켜내는 영웅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비겁하고, 이기적인 실패자였음에도 불구하고(12;10-20; 20; 26:6-14), 크게 번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야곱’은 소위 “아브라함의 언약” 즉 “너를 미워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아브라함의 언약” 뿐만 아니라, “야곱의 언약” 즉 ‘야곱’이 “평안히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28:15, 21)도 역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연약함이나 실패와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무슨 억지이고 궤변이란 말입니까? 인생의 번영과 번성이 노력이나 정의로운 행동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니! 그렇다면 힘들게 세상을 정의롭게 살아가야 할 필요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악한 자가 번성하고 의로운 자가 고통 받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라면, 공의의 하나님은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왜 그분은 이러한 세상의 악고나 불평등에 대하여 침묵하고 계시는가? 혹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세상사에는 무관심한 것이 아닌가? 20 세기 대표적인 지성이었던 ‘버트란트 러셀’(B. Rusell) 경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무신론자로 남기로 결정하였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는 한 가지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세상이 악한 것만큼이나 자신도 악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보다 더 부패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선한 하나님께서 나에게 대해서도 왜 그토록 오래 침묵하며 참고 계신지를 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혹시 죄가 더한 곳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 하심은 아닐까요(롬 5:20)?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도 신학적인 기능과 역할은 무엇입니까? 직전과 직후의 에피소드들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연결고리로 삼을 만 한 요소들을 발견해 봅시다.
2. 본문이 <족장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기에도 충분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반복적이고 공통적인 요소들은 무엇입니까?
3. 각 등장인물을 평가하고, 교훈을 이끌어내 봅시다.
4. 다음 한 주를 위한 나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