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0과
이삭의 출생
김태정 목사창세기 21:1-21약 48분 분량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1-2절)
마침내 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그동안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자 핵심이기도 합니다. 이 아들이 없이 땅과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화자가 아들의 탄생과 관련해서 세 번에 걸쳐 하나님의 약속을 반복하고 있는 것도 이 탄생이 지니는 신학적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지키셨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가 이 탄생에 담겨있습니다. 지금 이 위대한 탄생을 목격하고 있는 당사자들 즉 ‘아브라함’과 ‘사라’가 보여주고 있는 웃음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웃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냉소; 조소; 실소.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 두 사람이 그동안 보여주었던 웃음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말도 안 되는 약속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설령 ‘사라’가 기적적으로 임신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안전하게 출산할 수 있으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지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7절)
냉소와 조소가 섞인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말한 사람이 없었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기적만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그 기적이 일어났고, 우리의 여주인공 ‘사라’는 난생 처음으로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웃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파안대소라고 한다면 다소 과장된 것일까요?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6절)
그러나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한 사람의 즐거움은 다른 사람의 질시와 한숨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법이지요.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한 가족 구성원이 그런 태도와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는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이스마엘’이 이복동생 ‘이삭’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사라’의 눈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언약의 상속자로서의 ‘이삭’의 지위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번 일은 그동안 부인과 여종 첩 사이의 오랜 갈등과 긴장이 수면 위로 부상하면서 폭발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아내의 요구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는 수 없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게 됩니다.
‘사라’의 요구가 지나치다 싶기도 하지만, 이 두 번째 일화 역시 무대 등장인물들의 의지와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신비롭게 섭리해 가는 수단으로 삼고 계신 것을 봅니다. 가족의 불화, 이별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언약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알아볼 일입니다.
본문 이야기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 사도가 율법과 복음의 상관관계에 대한 우화적 해석으로 유명하게 된 일화이기도 합니다.
문학과 역사
본문 속에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1) ‘이삭’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1-7절); (2) 그가 젖을 떼는 이야기(8-21절). 그리고 각각의 내용은 나름대로 시작과 결말을 갖춘 독립적인 구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구성과 관련해서 첫 번째 일화는 평범하게 시간대 별로 진행되고 있으며, ‘사라’의 노래를 제외하고 나면(6-7절), 특별히 극적인 요소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1. 에피소드 1(1-7절)
(1) 이삭의 탄생(1-2절)
(2) 작명(3절)
(3) 할례(4절)
(4) 아브라함의 나이(5절)
(5) 사라의 노래(6-7절)
그러나 ‘이삭’이 젖을 떼는 장면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두 번째 일화는 아래에서 보듯이 보다 정교하면서도 훨씬 극적인 구성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2. 에피소드 2(8-21절)
(1) 서론(8절)
(2) ‘이스마엘’의 추방을 요구하는 사라(9-10절)
(3) 아브라함의 짜증과 분노(11절)
(4) 하나님의 명령(12-13절)
(5)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14절)
(6) ‘하갈’과 ‘이스마엘’의 절규(15-16절)
(7) 천사의 이야기(17-18절)
(8) 물을 발견함(19절)
(9) 결론(20-21절)
아무튼 두 일화는 각각 전체 <아브라함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임에 틀림없고, 지난 이야기들과는 불가분 연장선상에 놓여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삭’의 출생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약속하신 것이 마침내 이루어진 사건으로 볼 수 있으며, 참고: 13:16; 15:4-5; 18:10-15; 특히 17장.
마찬가지로 ‘하갈’과 그의 아들이 쫓겨나는 이야기 역시 ‘이삭’의 탄생과 출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8-10절). 그리고 이 둘을 쫓아내라고 요구하고 있는 ‘사라’에 대해서 주저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 역시 그의 지난 행적을 잘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장면은 아닙니다. 참고: 16장 및 17:18
그리고 주저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사라’의 요구가 정당한 것임을 확인시켜주는 장면에서도(12-13, 18절), 지난 이야기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17:19-20). “하나님께서 그 어린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는 언급에서도(21절), 비록 이름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이 아이는 ‘이스마엘’이 분명합니다(참고, 16:11). 마지막으로 “아이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활 쏘는 자가 되었다”는 언급은(20절하), 그의 운명에 대해서 언급하신 하나님의 예언이(16:11)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전통적으로 자료비평학자들은 1-2절과 6-7절의 전승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절만 하드라도 학자에 따라 세 전승(E, J, P) 중에서 두 가지 자료가 섞여 있다고 주장할 정도인데, 본문 속에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두 이름(‘야훼’와 ‘엘로힘’)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편의 상 단순하게 하나님의 이름에 따라 자료를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2절상(야훼 자료); (2) 2절하(사제 자료); (3) 6-7절(야훼 또는 엘로힘 자료). 그리고 ‘이삭’의 탄생에 관한 본문은(3-5절) 내용 상 17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사제자료>로 구분할 수 있으며, <창세기> 17장은 전통적으로 사제자료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참고, <창세기 1>.
두 번째 일화는(8-21절) 내용 상 ‘사라’와 ‘하갈’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16장 이야기와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엘로힘 자료>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만으로 자료의 성격을 구분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야훼’의 이름이 두 번 나타나고 있는 1절을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구절에서는 모두 ‘엘로힘’ 일색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승의 구분은 표현이나 내용 등의 상관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본문의 전승과 관련하여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보다 최근의 자료비평학자들은 <엘로힘 자료>가 <야훼 자료>를 확장한 것이거나 또는 ‘야훼’ 기자가 사용한 자료 중의 하나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두 번째 일화 전부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혹자는 본문 전체를 <야훼 자료> 또는 <야훼-엘로힘 자료>로 보기도 합니다. ‘베스트만’(Westermann)은 1-7절을 최종 편집자의 작업으로 보고 <야훼 자료>와 <사제 자료>를(3-5절) 그 속에 포함시켰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첫 번째 일화의 중간 부분에 해당하는 이 구절은(3-5절) <사제 자료>가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것으로서, 내용 상 17장 이야기의 결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사제 자료>인 3-5절이 <야훼 자료>에 속하는 두 본문 1-2절과 6-7절 사이에 끼어 있어 이야기를 연결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가설입니다.
그의 이러한 분석은 나름대로 다양한 자료들이 함께 연결되어 있는 본문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될 수는 있습니다만, 지나치게 복잡한 이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Wenham은 다소 입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본문의 주 저자는 ‘야훼’ 기자이며 <사제 자료>와 <엘로힘 자료>를 적절히 삽입 내지는 재편집함으로써, <아브라함 순환>의 전체적인 주제를 살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야훼’의 이름을 두 번에 걸쳐 반복하고 있는 1절과, 약속에 관한 언급을 드러내고 있는 13절과 17-18절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1절)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13절)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17-18절)
신학과 신앙
1. 에피소드 1: 이삭의 탄생(1-7절)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으며, 화자는 이 사실을 시적 유사반복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1절)
‘사라’가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약속은 두 번에 걸쳐 주어진 바 있습니다(17:16-21; 18:10-15). 이 사실을 마치 재확인이라도 하듯 이곳에서는 아이의 탄생을 두 번에 걸쳐 유사반복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전 두 번의 경우에는 ‘사라’가 없었거나(17:19), 또는 몰래 엿듣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18:12). 그러나 정작 아이의 탄생을 알리는 이 장면에서는 대조적으로 ‘사라’가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삭’이 태어난다는 사실은 단순히 ‘사라’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사건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받은 그 모든 약속 즉 땅과 후손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후손이 없이는 땅은 고사하고 큰 민족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라’를 방문하신 것입니다. 화자가 1절 전반부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ד(파카드)로서, 방문하다, 세다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화자는 이 두 번의 반복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개입 즉 기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방문하실 때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죄를 심판하시기 위한 목적이거나(예, 출 20:5; 32:34) 또는 반대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라’를 방문하신 목적은 이중 후자에 속한 것으로서, ‘한나’ 이야기나(삼상 2:21) ‘엘리사벳’ 이야기와(눅 1:68)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두 여자 모두 하나님의 방문을 받고는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자는 ‘사라’가 임신한 사실을 두고 ‘아브라함’이 늙은 나이에 아들을 두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2절)
이러한 표현 역시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참고, 17:16; 18:10-14). 특히 화자는 ‘아브라함’의 나이를 강조하면서, 이전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했던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17:17);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18:12). 빈정거리고 조소를 보이던 ‘사라’가 이제는 정 반대로 화자의 조롱을 받고 있는 모습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년 이 맘 때면”이라고 약속하셨던 그 시점에 정확하게 맞추어 ‘이삭’을 주셨습니다(17:21; 18:14).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이 ‘그랄’에서의 사건이 있기 이전일까 아니면 이후일까? 만일 17:21의 시점으로부터(“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21:2의 시점까지(“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일 년의 기간이 된다면, 그리고 18:10의 시점으로부터(“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이삭’의 탄생 시까지(21:2) 아홉 달의 시간이 있다면, 그리고 ‘이삭’이 20장의 사건이 있은 직후 태어났다면, ‘사라’는 ‘그랄’에 있을 때 이미 임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약속을 지켜주신 덕택에 ‘아브라함’은 생애 두 번째로 자식의 이름을 지어주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 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3-4절)
이전에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에도 이름을 지어주긴 했지만, ‘사라’를 통해서 낳은 아들을 ‘이삭’으로 명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그가 태어난 후에 지은 이름이지만, ‘이삭’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17:19). 이런 점에서 이 장면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아브라함’의 순종을 동시에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고, 특별한 자손입니다. 그리고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웃다’인데, 이 웃음의 주인공이 진정 누구인지는 애매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인가, ‘사라’인가, 또는 아브라함인가?” ‘이스마엘’의 이름에는 기원과 설명이 있었지만(16:11), ‘이삭’의 경우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이삭’의 탄생과 관련해서 한 가지 특기할 만 한 점은, 25년이나 기다려 얻은 아들을 보는 ‘아브라함’의 감정에 대해서 화자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토록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아들이라면, 그리고 불가능한 꿈이 이루어 진 것이라면, ‘아브라함’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줄 만도 한데, 오히려 태어 난지 팔 일 밖에 안 되는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세’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출 4:24-26).
그러나 이러한 ‘아브라함’도 한 때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17:17).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화자가 대신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5절).
백세에 아들을 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우리의 화자는 ‘사라’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질문에 대신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6절)
지금 ‘사라’는 기쁨과 경탄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절제되고 무미건조하던 감정이 이곳에 이르러 갑자기 폭죽처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라’가 기쁨에 겨워 던지는 수사적 질문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경외하고 묵상하도록 요청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7절)
이 질문에 우리는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 답은 “아무도 없었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나이 90에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예언하셨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입니다(17:16; 18:12-15)!
2. 에피소드 2: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8-21절)
그러나 ‘사라’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갈’과의 해묵은 갈등과 긴장이 마침내 이곳에서 파열음을 내며 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갈’과 그의 아들은 광야로 내쫓겨 그곳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화자는 이 단락에서 한 번도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거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브라함 순환>의 주된 소재는 아니라는 암시일 것입니다. 이처럼 <창세기> 화자는 종종 이야기의 본류(本流)에서 벗어나 지류(支流)를 다루는 식의 해설 기법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셋’의 계보를 시작하기 전에(4:25) <가인 이야기>를 삽입한 것이나(4:17-24), ‘셈’의 계보를 다루기 전에(10:21-32; 11:10-26) ‘야벳’과 ‘함’의 후손들을 다루고 있는 점(10:1-26) 등이 그렇습니다. <아브라함 순환> 중에서도 ‘데라’의 가계나(11:27-32)나 <롯 이야기>(13-14, 19장) 등도 <아브라함 이야기>가 다 끝나기 전에 일찌감치 마무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이스마엘 이야기>도 이쯤에서 대충 마무리 짓고 <이삭 이야기>에 집중하려는 화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갈’과 ‘이스마엘’이 비록 택한 백성은 아니라 할지라도, 화자는 여전히 연민과 따뜻한 마음을 보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앞의 이야기에서도(16장) 본 바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모유를 먹는 시기가 당시 근동 지역에서는 요즈음보다는 훨씬 길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유아 사망률이 현저하게 높았을 것이 분명한 고대 사회에서 아이가 서너 살이 되어 젖을 떼어도 좋을 정도로 건강하게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분명 크게 경사해야 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에 걸 맞는 큰 잔치를 베풀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8절)
그러나 이 잔치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 ‘아브라함’의 후계자가 될 것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또 다른 아들 ‘이스마엘’이 한 집에 살고 있는 한, ‘이삭’의 지위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라’의 두려움과 분노를 촉발시키는 한 사건이 터지고 맙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9-10절)
“사라가 본즉”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서두는 우리 독자들이 이 사건을 ‘사라’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고해주는 듯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하갈’에 대한 태도에 있어 화자와 ‘사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라’는 ‘하갈’을 두 번씩이나 “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에 비해, 화자는 적어도 “애굽 여인”이라고 불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사라’가 목격하게 된 것은 종의 아들이 자기 아들을 ‘희롱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라’가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어지는 그녀의 주문은 지극히 타당하고 정당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9절의 의미가 사본에 따라 다르게 번역되고 있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를 밝히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희롱’으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 동사 어근은 ‘차하크’(qj'x)로서, 구약에서 13회 등장하고 있으며, ‘칼형’(단순 능동형)과 ‘피엘형’(능동형 강조)으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전자(前者)의 경우로 사용될 때는 웃다 또는 비웃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들에게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때 의심하며 비웃었으나(창 17:17; 18:12-15), 정작 그 약속이 성취되었을 때 ‘사라’는 기쁨으로 웃기도 했습니다(창 21:6). 반면 이 동사가 후자(後者)의 경우로 사용될 때는 크게 세 가지 다른 의미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1) 농담하다, 놀리다(창 19:14).
(2) 가지고 놀다, 노리개(장난감)로 삼’: (a)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창 26:8); (b)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창 39:14); (c) “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 왔기로”(창 39:17).
(3) ‘놀이를 하다’, ‘장난치다’, ‘희롱하다’: (a)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출 32:6); (b)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삿 16:25); (c)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창 21:9). 그러나 <칠십인(LXX)>이나 <벌게이트(Vg)>에서는 창 21:9을 번역하면서 목적어, ‘이삭’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도 이 전통에 따르고 있는데, RSV, NRSV는 ‘이삭’과 “장난치는지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NASB, NIV, KJV 등은 “사라가 (이스마엘이) 조롱하는 것”을 보았다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해석의 관건은 ‘이스마엘’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볼 것인지 또는 중립적으로 볼 것인지에 달렸는데, 독자의 편에서는 적어도 ‘사라’의 입장을 따르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어 보입니다. 즉 ‘이스마엘’은 ‘이삭’의 후계 구도를 위협하는 것으로서 결코 한 집안에 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여종과 그 아들”로 비하하면서 이들을 내쫓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사라’의 태도나 행위는 결코 칭찬받을 만한 것은 못되겠지만, ‘사라’의 최대 관심사는 ‘이스마엘’이 어떤 행동을 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인가에 있는 것이니만치, 그녀의 요구는 정당한 면이 있다고 보여 집니다: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러한 논리 역시 법적으로 하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유산 법에 따르면 첩의 아들이라도 상속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라’의 요구는 일종의 위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의 요구에 대해서 매우 괴로웠고 마음에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11절)
직역하자면 ‘아브라함’은 기분이 매우 언짢았으며 불쾌했다는 뜻입니다. 우선 ‘사라’가 ‘이스마엘’을 종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도 못마땅할 뿐 아니라, 요구 사항도 당시의 관습법을 무시하는 초법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라’는 요구하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추방시킬 권리는 없습니다. ‘해밀턴’, 제 2권, 80쪽(참고도서 4).
더 나아가 사랑하는 아들과 생이별을 할 생각을 하니 더욱 가슴이 무겁기만 했을 것입니다. 화자는 ‘히브리’어로 단 8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11절의 문장을 통해서 아주 절제 있게 ‘아브라함’의 기분과 ‘이스마엘’에 대한 연민의 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에 대해서는 동일한 감정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누구의 편을 드실 것인가? ‘사라’의 편입니다. 비록 그녀의 동기가 잘못된 것이긴 했어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12-13절)
우리는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하갈’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갈’에 대해서 ‘사라’가 그랬던 것처럼 여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에 대해서는 두 번씩이나(12, 17절) 단순히 청소년을 뜻하는 아이(רענ; 나아르)로 부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이 단어는 스스로 사물을 판단하며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청년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1) 열일곱 살의 ‘요셉’(37:2); (2) ‘아브라함’의 하인(18:7); (3) ‘소돔’ 성의 젊은이들(19:4).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하갈’에게는 ‘이스마엘’이 그냥 한 아이가 아니라 그들의 자식(ךלי, 옐레드)입니다(14-16절).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사라’의 편을 드시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편으로 ‘이스마엘’이 장성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스마엘’을 더 이상 가족의 구성원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내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해밀턴’은 이 장면을 ‘가나’의 혼인 잔치와 흥미롭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요 2:5). ‘해밀턴’, 81쪽(참고도서 4).
지난번에도 아내가 시킨 대로 했다가(16:2) 이 지경이 되었는데, 이번에 또 아내의 말을 들어야합니까? 가족사에 관한 한 남편의 고유한 권리에 해당하는 것을 아내가 주도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까? 이전에는 순순히 아내의 말을 들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기분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해보는 질문입니다(11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내의 요구사항이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내 자식 ‘이스마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이런 속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하셨던 약속을(17:20) 재차 반복하시면서 그의 마음을 달래주고 있습니다. 추방당하는 ‘이스마엘’도 한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13절). ‘이스마엘’에게는 이 약속은 단순히 한 집안의 유업을 물려받지 못하는데 대한 보상의 차원을 뛰어넘는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나라를 이루는 것과 한 집안의 유업을 이어받는 것과의 차이를 안다면 더 이상의 비교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갈’도 이 약속의 자리에 함께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나중에 광야에서 동일한 약속을 받게 됩니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18절). 이들은 비록 쫓겨나지만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 속에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들 모자는 ‘가인’처럼 패자이자 동시에 승자이기도 합니다. ‘이스마엘’과 ‘하갈’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배려는 실로 ‘아브라함’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떠나보내는 ‘아브라함’의 마음의 일단을 이어지는 장면에서 읽어낼 수 있을 듯합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14절)
아침에 일찍 일어나 먼 길을 떠나는 아들과 아내를 위하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이들을 아내의 어깨 위에 얹어주는 모습, 그리고 머뭇거리는 태도로 아들을 이끌어 아내의 손에 쥐어주는 모습 등이 그의 슬픔을 잘 드러내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14절의 정확한 해석을 놓고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만일 <칠십 인 역>의 번역을 따른다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하갈’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해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동사의 목적어로 “떡과 물 한 가죽”과 함께 ‘이스마엘’도 포함시켜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떡과 물 한 가죽부대와 그 자식을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가게 하매” Wenhamd은 이러한 해석이 논리적으로나 성경적으로 부당하고 무리가 있음을 세 가지 관점에서 논증하고 있습니다: (1) 당시 아이는 이미 십대의 장성한 청소년으로서 어미의 등에 업힐 나이가 아니었다(17:25; 21:12); (2) 천사가 광야에서 나타나 ‘하갈’에게 아이를 손으로 붙들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이는 처음부터 어미의 손에 이끌려 나간 것이지 등에 업혀 떠난 것이 아니다(18절); (3) 여자가 물 한 가죽과 떡과 그리고 십대의 아이를 동시에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해석이 지니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LXX>의 번역 자체에 있습니다. 즉 ‘히브리’ 원문에 대한 정확한 번역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한글 개역>은 <마소라 사본>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대부분의 영어 번역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몇 가지 종류의 영어 번역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Early the next morning Abraham took some food and a skin of water and gave them to Hagar. He set them on her shoulders and then sent her off with the boy...(NIV); (2) So Abraham rose early in the morning, and took bread and a skin of water, and gave it to Hagar, putting it on her shoulder, along with the child, and sent her away...(RSV); (3) And Abraham rose up early in the morning, and took bread, and a bottle of water, and gave it unto Hagar, putting it on her shoulder, and the child, and sent her away...(KJV). 이 세 번역 중 KJV만 제외하면 의미는 분명합니다. 다만 KJV의 경우 ‘the child’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동사 ‘give’의 목적으로 처리하면 의미는 앞의 두 번역과 일치하게 됩니다.
‘사라’는 이들을 ‘추방하라’고 요구했지만 ‘아브라함’은 떠나보냅니다. 화자가 이 동사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아브라함’의 내심을 읽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는 분명 이들에 대한 예우치고는 지나치게 인색하고 쩨쩨한 것임에 분명합니다(참고, 신 15:12-18).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신 15:12-13).
특히 광야에서 배회하게 될 ‘하갈’의 형편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14절후). 하갈이 절망적으로 방황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동사는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아내와 함께 낯선 땅을 “두루 다녔다”는 뜻으로 사용한 동사이기도 하고(창 20:13), 길 잃은 짐승 떼를 묘사할 때에도 사용하고 있으며(출 23:4; 욥 38:4; 시 119:176; 사 53:6; 렘 50:6), 길 잃은 사람을 의미하기도 하며(창 37:15; 시 107:4; 사 47:15), 술 취하여 방황하는 모습을 그릴 때에도 사용하고 있습니다(욥 12:25; 사 19:14; 21:4; 28:7).
이어지는 구절에서 보다 생생하게 그 상황을 보게 됩니다: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15-16절)
더 이상의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장면입니다. 자식이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사용되고 있는 것도 독자의 동정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합니다. 흔히들 ‘하갈’이 ‘이스마엘’을 떨기나무 아래 “두었다”는 표현을 “내버리다” 또는 “유기하다”라고 잘못 해석함으로써 이 아이가 아직 어렸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나, 다소 지나친 해석임에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열일곱 살 된 ‘요셉’을 그의 형제들이 구덩이 아래로 던져 넣을 때에도 같은 동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 37:20, 22, 24). <구약>의 다른 곳에서 이 동사가 사람을 목적어로 사용할 경우에는, 대부분 죽은 시신을 무덤 안에 내려놓는 다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참고: 삼하 18:17; 왕하 13:21; 렘 4:19; 참 37:24; 렘 38:6.
이로 미루어 이 장면을 재현해 보자면, ‘하갈’은 기진맥진 쓰러져 가는 아들을 떨기나무 아래로 데려다놓고 절망 가운데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고독감, 절망감, 이별의 슬픔, 등등 이 모든 표현들이 이 장면을 묘사하는데 동원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모자에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일 것입니다. ‘하갈’의 울부짖음은 일종의 기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달리 표현하자면, “부디 내 자식을 죽이지 마시기 바랍니다”가 될 것입니다. 해밀턴은 ‘하갈’의 이 울부짖음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기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눈 인물들로 ‘아담’, ‘가인’, 그리고 ‘아브라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아담’은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가인’은 불평과 저항으로, 그리고 ‘아브라함’은 질문의 형태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만, ‘하갈’의 경우처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호소로 나아오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기도로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해밀턴’, 83쪽(참고도서 4).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셨을까? 화자와 천사가 동시에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17-18절)
그런데 흥미롭게도 천사는 하나님께서 ‘하갈’이 아니라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칼빈’은 이에 대해서 이번 사태를 야기 시킨 장본인으로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하갈’ 아니라 ‘이스마엘’이기 때문에 그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Wenham, 85쪽(참고도서 2).
물론 전체 이야기를 통해서 어느 누구도(화자도, ‘사라’도, ‘아브라함’도,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고 단지 ‘노예의 아들’ 또는 단순히 ‘아이’로 부르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아이가 우는 소리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은 이전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 아이의 장래에 관해서 말씀하신 약속을 회상해 볼 때, 충분히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이 기도하기도 전에 먼저 나타나셔서 절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것을 봅니다.
이전에 ‘하갈’이 ‘사라’와 다툰 후에 쫓겨나 광야에서 배회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먼저 나타나셔서,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16:8)고 물으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하갈아 무슨 일이냐?”고 물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대답이 필요 없는 수사적 질문을 던지실 때에는 항상 그분의 초자연적인 계획이나 계시가 이어질 것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8절).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는 두 번씩이나 한 적은 있지만 ‘하갈’에게는 처음입니다. ‘하갈’의 기분이 어떠했을지 추측해 보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 필요한 것도 제공해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19절)
이 샘은 이전부터 늘 그 자리에 있었을 터였지만 ‘하갈’의 눈에 지금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초자연적인 계시 즉 기적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후에 ‘아브라함’도 이런 기적적인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22:13).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왕하 6:17, 20).
이처럼 생생한 장면 묘사를 마지막으로 화자는 ‘이스마엘’의 나머지 생애를 간략하게 요약함으로써 이야기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20-21절)
이 결론이 기능하는 바를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이야기의 다음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해 주는 것이고, 다음으로 이전에 다룬 바 있는 유사한 이야기(16장)와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적어도 본문은 이전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스마엘’의 이름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의 체질이나 성격 및 그와 관련한 약속이나 운명과 관련하여 본문의 결론은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의 호전성이나 기질 등과 관련해서 본문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없지만, “그가 사람 중에 들 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16:12)는 예고는 본문 20절에서 성취되고 있다는 암시를 받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스마엘’이 살게 될 ‘바란’ 광야는 ‘시나이’ 반도 동쪽에 위치한 사막 지역으로서 남으로는 홍해까지 펼쳐져 있고(신 1:1) 북으로는 ‘가데스’ 또는 Beer-sheba까지 뻗어있습니다(민 13:3, 26). 이 지역은 일부 ‘이스마엘’의 후손들의 이름으로 거명되고 있기도 합니다(25:18).
마지막으로 ‘하갈’이 아들을 ‘이집트’ 여인과 결혼을 시켰다는 사실을 이 여인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약속에 대한 믿음과 헌신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물론 혹자는 아들을 이방인 ‘이집트’ 여인과 결혼시켰다는 사실을 놓고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폄하하기도 하나, 반드시 그렇게 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당시 자녀의 결혼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아버지의 책임 소관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하갈’의 행동은 분명 책임 있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그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취한 행동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이집트’ 여인과 결혼시켰다는 점도, 훗날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 그의 고향 ‘메소포타미아’까지 사람을 보내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또한 여간 책임 있는 행동이 아닌 것이지요. 즉 아들을 아무하고나 결혼시킬 수 없다는 어머니의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남편과 떨어지긴 했지만 아버지를 대신해서 집안의 전통을 따라 아들의 결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이삭의 탄생
웃음.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 <전도서>의 말입니다(전 3:4).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어 이 순간은 분명 웃어야 할 때입니다. 실현될 것 같지도 않던 약속을 기다리느라 지쳐서 만성이 되다시피 한 냉소나 조소나 실소가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을 단번에 날려 보내는 환한 웃음 즉 파안대소를 보여야 할 때입니다. 마침내 한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이름도 다름 아닌 ‘이삭’ 즉 ‘웃음’이라, 그들이 마땅히 웃어야 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한 아들이 자연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약속의 아들이 기적적으로 태어났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기적을 가능케 한 주인공이 누구인지 놓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1-2절).
화자는 세 번에 걸친 반복으로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단순히 약속을 지키셨을 뿐만 아니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시편 기자의 말대로,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습니다(참고, 시 33:9). ‘요한’ 화자가 표현하고 있는 바대로, 그분의 말씀이 어느 날 육신이 되어 그들 가운데 거하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요(참고, 요 1:14).
그러나 지난 25년 동안 이 약속을 들을 때마다 두 사람이 보여주었던 반응은 이런 보상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냉소와 조소와 실소! 이 두 사람의 내면세계를 단적으로 드러내주었던 대표적인 단어들입니다.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약속 앞에 어느 누구인들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설령 ‘사라’가 기적적으로 임신을 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 나이에 출산을 한다는 것은 또 다른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라’ 자신도 이점을 시인합니다: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7절).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말한 사람이 없었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기적만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그 기적이 일어났고, 우리의 여주인공 ‘사라’는 난생 처음으로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웃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파안대소라고 한다면 다소 과장된 것일까요?: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6절).
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약속은 없습니까? 설령 있다고 해도 이런 기적은 나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절망하고 위축하게 만들 소지가 큽니다. 성공 세미나나 관련 책들을 대할 때 우리가 갖게 되는 보편적인 반응이 이러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까?” “나에게 그 일이 일어나기에는 나는 너무 늙었어.”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야.” ‘이삭’의 탄생과 그 부모들의 웃음은 바로 이런 나를 향한 비웃음은 아닐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나이가 많아 아무 할 일도 없다고 체념하고 살아가는 나에게도 ‘사라’에게처럼 할 일을 주신다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체력과 건강도 또한 주실 것임이 분명합니다. ‘사라’는 임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출산도 할 수 있었고(그 나이에 출산은 정말 힘 드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낳아서 기를 수 있는 힘도 주셨습니다(아이를 기르는 일 역시 노인네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또 다른 걱정거리가 없지 않습니다. 그 걱정은 늘 서두르는 나의 속성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긴 합니다만. 응답이 없는 기도를 몇 년 동안 계속해서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고 맥 빠지는 일입니다. 필경 ‘사라’처럼 냉소와 비웃음으로 끝날 것이 뻔합니다. 과연 ‘사라’나 ‘아브라함’이 약속의 아들을 놓고 기도라는 것을 하기라도 했는지 의심스럽긴 합니다만, 이들의 비웃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약속을 거의 잊어버릴 때 쯤 해서 아들을 주신 듯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삭’은 기도의 응답이라기보다는 ‘뜻밖의 선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뜻밖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자면 한 치의 어긋남이나 서두름이 없이 정확하게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17:21);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18:10);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8:14).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나는 실망하고 돌아서며 그분을 욕합니다. 스스로 기적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말입니다. 나는 기적을 원하는데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즐거워하고 웃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사라’는 웃을 수 있었지만, 나에게도 과연 웃일 일이 일어날까?
더 큰 웃음. 대답을 찾는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성탄절을 생각해 봄이 어떨지요? 그래도 이날만큼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해 하려는 듯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선물을 나누기도 하고, 그냥 집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밖으로 나가 함께 식사를 나누거나, 좋은 공연을 보거나, 거리를 활보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게 합니다. 적어도 이날 하루만이라도 이런 식으로 즐겁게 보내지 않으면 일 년 내내 큰 상실감에 빠져 지낼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두 한 “위대한 탄생” 또는 “뜻밖의 탄생”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말입니다. 대충 비교해 보아도 약속의 씨앗이자 “웃음”의 씨앗이기도 한 ‘이삭’의 탄생은 또 다른 약속의 씨앗 ‘그리스도’의 탄생과 너무나 흡사한 점이 많습니다. 첫째, 거듭 말하지만 이 두 사람은 모두 약속의 “씨앗”이자 “아들”입니다. 둘째, 이 두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 ‘이삭’의 탄생에서처럼,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해서도 구약에서 수없이 예언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예: 창 3:15; 사 7:14).
그런데 그 예언이나 약속이 정작 실현되기까지에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적어도 25 년을 기다려야 했다면,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구약>의 예언대로라면 수백 년 내지 수천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셋째, 이 두 사람의 어머니 모두 아들의 탄생에 대해서 비슷한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약속을 신뢰하는 정도에 있어서 ‘마리아’가 ‘사라’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낫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창 18:12);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 18:1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넷째, 이 두 본문에서 이미 선언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지만, 이 두 탄생은 모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의 결과입니다. 다만 두 기적을 비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더욱 놀랍고 큰 기적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어미 ‘사라’의 생식 기능을 회복시켜주기만 되지만, 예수님의 탄생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사실 때문에 ‘이삭’의 탄생은 믿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예수님의 탄생은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하나님이자 인간이신 예수님의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탄생 모두 그것을 지켜보는 자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사라’와 마찬가지로 ‘마리아’ 역시 큰 웃음으로 아들의 탄생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 1:46-47). 기뻐하고 있는 사람은 ‘마리아’뿐만 아닙니다. 천사들도 기뻐하고 있으며 이 소식을 듣는 모두가 이 즐거움에 동참하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
여전히 나는 늙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자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미지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하민회의 씨의 다음과 같은 글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아래 글은 조선일보 2006년 5월 32일자의 時論에 실린 하민회의 씨의 글을 요약하여 옮긴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선발 공모에 2만 명이 넘는 응모자가 몰렸다. 성별과 연령은 물론 직업도 다양했는데, 가장 세인의 눈길을 끈 응모자는 67세의 모 그룹 명예 회장님이었습니다. 최고령자임에도 불구하고 체력과 어학 실력은 물론 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적임자라는 생각으로 도전장을 냈다고 한다.
아름다운 시니어의 모습이다.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고 했다. 최근 들어 부지런히 인생의 1막을 살아온 장년층이 또 다른 도전으로 2막을 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본다. 환갑의 나이에 요트 한 척으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하며 독도 알리기에 나서는가 하면 청년기 때보다 더 큰 인기로 승승장구하는 장년층 여배우들도 있다.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인 레블론은 60세의 수잔 서랜든을 모델로 내세웠다.
사회적인 인식이 변하면서 노년층을 지칭하는 용어도 달라졌다. ‘노인’, ‘황혼’이라는 말이 흰 머리를 미화시킨 표현인 ‘실버’(silver)로 바뀌었고, 최근에는 연장자, 선배란 의미의 ‘시니어’(senior)라 불린다. 심지어 ‘애플(APPLE)족’이라는 활동적이고(active), 자부심이 강하고(pride), 안정적으로(peace) 고급문화(luxury)를 즐기는 경제력(economy) 있는 노인층을 뜻하는 마케팅 용어까지 등장했다.
헬스클럽과 좋은 식당이 가까운 지역에 살며 많은 이들과 교류하며 지내기를 원하는, 경제력을 갖춘 우리 시대의 시니어는 더 이상 주변인이 아니다. 노련하고 숙련된 기술뿐 아니라 젊은이에게는 부족한, 어려움을 잘 견디는 인내심과 큰 흔들림 없이 관조할 줄 아는 여유를 가진 그들은 어느새 사회 속에 무게감 있는 존재로 자리자기 시작했다.
(중략)
아름다운 시니어가 되려면 용감하게 나이의 벽부터 넘어야 한다. 미국 UCLA 신경학자 ‘조지 바트조키’스에 의하면, 중년이 되어야 뇌에 들어오는 직접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가공해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극대화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주간지 TIME은 얼마 전 인간의 인지 기능이 50-60대에 절정에 이른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현대여성의 의상에 일대 혁신을 일으킨 디자이너 ‘코코 샤넬’ 역시 일흔 살부터 절정기를 맞았다.
외모를 잘 관리하는 것 또한 아름다운 시니어로 가는 길이다. 정기적인 운동으로 체력을 키우는 것 못지않게 몸매나 외모도 가꾸어야 한다. 시니어 ‘몸짱’은 드문 현상이 아니다. 탄력 있고 깨끗한 피부를 위해 의료적인 도움을 받는 일에 거부감을 보이거나 쑥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외모는 곧 자신감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기여하고 싶은 일에 대한 목표를 세우는 것 역시 아름다운 시니어를 만든다.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열정이 생긴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시니어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 편향된 인식과 사고가 팽배할수록 균형을 잡아주는 성숙한 눈이 있어야 하고, 그 몫은 시니어의 것이다.
여전히 경제활동에 자신 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방관하고 묻혀 지내며 끌려 다니는 시니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미국 일리노이 본사가 있는 대형 농기구 제조업체 ‘디어 앤 컴퍼니’의 4만 6000여 근로자 가운데 35% 이상이 50살 이상이다. 70살이 넘은 이도 적지 않다. 나이든 이들이 피로를 느끼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투자한 덕분이라고 한다.
2005년 말 현재 우리나라에 60세 이상 노인 인구는 전체 13.4%, 이미 고령 사회로 접어들었다. 젊음과 열정을 가진 아름다운 시니어가 많아져야만 희망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라’나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기억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2. 하갈과 이스마엘
불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한 사람의 즐거움은 종종 다른 사람의 질시와 한숨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다른 사람 아닌 한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일어난다면 문제는 참으로 심각해집니다. 동생이 태어나게 되면 형이나 누이는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고의로 응석을 부리거나, 부모가 안 보는 틈을 타서 동생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필자의 큰 아들 달우는 동생 학우가 태어났을 때, 우리가 안 보는 틈을 타서 자고 있는 학우 머리를 깔고 앉아 숨도 못 쉬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스마엘’도 같은 심정이었을까요? 더구나 ‘이삭’은 친 동생도 아닌 이복동생이 아닙니까? 그가 동생에게 정확하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만일 그가 동생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일련의 행동을 했다면, 그 동기는 분명 질시와 원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어렵잖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나에게 쏟아졌던 모든 관심이 동생에게로 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느 누군들 이런 일을 너그럽게 참고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마저도 이제 더 이상 나에게 관심이 없으신 것일까? 이제 겨우 15-16세의 미성년 아이가 견디기 힘든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을 했든, 또는 그냥 함께 장난치며 놀았던, ‘사라’에게 비친 모습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언약의 상속자로서의 ‘이삭’의 지위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첩의 자식과 놀고 있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일로 해서 오래 동안 내연되어 오던 가족 구성원 사이의 갈등과 긴장이 드디어 수면 위로 드러나고 맙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10절하).
철없는 아이가 한 행동을 가지고 너무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입니까? 매정하고 표독한 것입니까? 특히 이번 일에는 ‘이스마엘’도 그렇지만, ‘하갈’은 더더욱 아무 잘못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모두 내쫓으라는 요구는 분명 월권행위이고, 칭찬받을 만한 행동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모든 갈등도 다른 사람 아닌 자기가 주도해서 비롯된 것임에도 일말의 자책감도 없어 보이기에 해보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 어느 여인이, 첩이 아니라면, ‘사라’를 두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동병상련의 분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별. 집안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가장 곤혹스러운 자는 말할 것도 없이 남편입니다. 곤혹스러울 뿐만 아니라 짜증스럽기까지 합니다: “도대체 이들이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당연히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이번 일에 관한 한, 하나님마저도 ‘사라’의 편입니다. 이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어라”(12절하).
하지만 ‘아브라함’의 근심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마음속에 회의나 원망이 생기는 것도 바로 이런 시점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일정 기간 동안 나름대로 섬겨왔고, 그분의 인도를 받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을 때, 이처럼 뜻밖의 경우를 만나게 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든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해야 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알고 싶고 따지고 싶은 것이 당연지사입니다.
돌이켜보면 버리고 양보하는 일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 ‘아브라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땅 문제를 놓고 조카 ‘롯’과 분쟁이 생겼을 때 좋은 것들을 먼저 양보하였으며(13장), 그런 싸가지 없는 조카가 위기에 빠졌을 때 나 몰라라 하고 내버려 두지 않고 달려가 구해주기도 하였으며(14장),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댁’에게 십일조를 드렸으며(14:20), 전쟁에서 얻은 포로와 노획물들도 모두 ‘소돔’ 왕에게 그저 주어버렸습니다(14:23). 훗날 ‘소돔’의 파멸을 예고하려 왔던 천사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해주면서,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도록 끈질기게 간구하기도 하는데(18정), 이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조카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선하게 살아가는 데 대한 보상이나 대가는 무엇입니까? 대단히 실망스럽게도 더 큰 고통과 슬픔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14절상). 우리는 이 장면에서 ‘아브라함’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야 하는 남편의 마음, 늙어 막에 겨우 얻은 아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동시에 읽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어딘지 이 구절이 주는 분위기는 참으로 처량하면서도, 애절하게만 느껴집니다. 마지못해, 주저하면서, 한편으로 ‘사라’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같은 종류의 이별은 아니더라도 아들을 잠시나마 멀리 떠나보내야 했던 경험을 해 본 부모라면 지금 ‘아브라함’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수년 전 필자의 작은 아들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어린 나이에 캐나다 유학을 떠날 때, 인천 공항에서 이 녀석을 떠나보내면서 눈물이 울컥 치솟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이후 이 녀석이 쓰던 책이며, 책상이며, 그의 사진을 볼 때마다 늘 애틋한 마음으로 그를 생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몇 년 후 이 아이가 귀국하여 군대에 가 있게 되었을 때는 오히려 마음은 한결 푸근하였습니다. 먼 외국보다야 그래도 가까운 국내가 더 낫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 이들은 꼭 떠나야만 하는가? 그냥 함께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의 대소사에 대해서 거의 대부분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요. 우리가 나름대로 이런저런 이유를 대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 위안 정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 경우도 회자별리(會者別離)일 뿐이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따라서 인생의 제반 문제에 대해서 그 이유를 알고자 하기 보다는 그 때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을 쌓아가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섭리. 가족 간의 불화와 갈등, 이별과 슬픔 등과 같이 인생에서 우리가 싫든 좋든 만나게 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신비롭게 섭리해 가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큰 걱정과 슬픔 가운데서도 그저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행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마도 그분을 신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 사건을 예로 들어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갈 3-4장). 본문의 사건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분명 문학 비평에서 볼 때, 우화적(allegorical) 해석의 전형임에 틀림없으나,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율법과 복음은 각기 행위와 은혜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순전히 인간적인 의지나 계획 및 행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사라’나 ‘이삭’은 모두 초자연적인 은혜의 산물이자 결과입니다. 율법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고, 종교가 있는 곳에 의식과 규례와 제도가 난무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있는 곳에 용서가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나온다”는 단순한 ‘인과의 법칙’은 그 유명한 ‘파스퇴르’의 실험을 통해서도 입증된 바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생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님과 함께 계셨으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1-4).
‘요한’이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는 단순히 세상의 지혜자나 스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생명의 원천이자, 궁극적인 권위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따르고 받아들여야 할 많은 지혜와 권위가 있지만, 오직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다고 요한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변화 산에서 겪었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 사건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야고보’와 ‘베드로’와 함께 이 산 정상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목도하게 되었는데, ‘베드로’는 이 영광스러운 사건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한 세 개의 초막을 짓자고 제안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위하여, 나머지 둘은 각각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입니다(마 17:4). 일종의 기념비를 세우자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 제안을 묵살하시며 말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하).
지금 ‘베드로’가 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기 의지에 따라, 자신의 방식대로, 자기가 정한 시간에 주님을 따르고 섬기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세 경우를 차례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며,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도다 하시고(눅 9:57-58)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눅 9:59-60)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1-62)
‘아브라함’ 역시 이 사람들처럼 자신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나타나셔서,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문을 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직장을 떠나라, 가족을 떠나라, 재물을 버려라. 어느 한 가지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문임에 틀림없습니다.
토의 문제
1.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일이 기적적으로 나에게 일어난 적이 있습니까?
2. 이루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그런데 환경이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나이나, 재능이나, 돈이나, 또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잘 안 되는 일은 없습니까?
3.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지극히 작은 예를 하나 들어 적용한 바를 나누어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