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9과
사라와 아비멜렉
김태정 목사창세기 20:1-18약 36분 분량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17절).
<소돔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본문의 이야기 역시 <창세기>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17장에서 하나님은 ‘이삭’이 탄생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아브라함’과 더불어 “할례의 언약”을 수립하셨으며, 당연히 이야기는 ‘이삭’의 탄생을 다루고 있는 21장으로 곧바로 연결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화자는 더 이상 직선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지 않고, 일견 불필요해 보이기까지 하는 <소돔 이야기>로 제 자리 걸음을 시작하면서 또 다른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서론에서 밝힌 바처럼 본문 이야기는 앞에서 다룬 바 있는 “이집트 에피소드”와는 여러 가지 점에 있어 문학적으로 유사(또는 반복) 병행을 이루고 있어, 화자가 교훈을 위해서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관성은 비단 두 이야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즉 대부분 간과하고 있는 관전 포인트가 있는데, 그것은 본문이 현재의 문맥 안에서 갖는 의의나 의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본문은 앞선 <소돔 이야기>와는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본문은 과연 전체 <아브라함 순환>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앞에서 제기했던 바와 똑 같은 일련의 질문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본문이 <창세기> 전체를 흐르는 대 주제 “언약”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이나 국가나 민족들에 대한 축복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 그리고 좁게는 바로 직전의 <소돔 이야기>와는 어떤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질문들을 가지고 읽어갈 때, 이야기는 보다 흥미진진하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문의 교훈과 적용을 찾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대화를 예사롭게 읽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이방인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책망하고 훈계하는 부분과, 이런 질책에 대해서 언약의 백성 ‘아브라함’이 우물쭈물 거짓과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는 모습 등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줄로 믿습니다.
문학과 역사
구조와 단락. 본문의 구조적 특징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여러 다른 이야기에서 보는 바처럼 대화(dialogue)와 해설(narration)이 번갈아 나타나면서, 전체적으로 아홉 개의 장면이 대칭 구조(또는 느슨한 형태의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이 그랄에 가다(1절)(해설)
2.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말하다(2절상)(대화)
3.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다(2절하)(해설)
4. 하나님이 아비멜렉을 꾸짖다(3-7절)(대화)
5. 아비멜렉이 종들에게 경고하다(8절)(해설)
6.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꾸짖다(9-13)(대화)
7. 아비멜렉이 사라를 돌려주다(14절)(해설)
8.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말하다(15-16절)(대화)
9.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함(17-18절)(해설)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처음 두 장면과 마지막 두 장면은 나머지 장면들에 비해서 다소 느슨하게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야기 전체에서 번갈아 나타나고 있는 두 양식, 즉 대화와 해설에 맞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와 일곱 번째 장면은 각각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였다가 되돌려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호 균형 잡힌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네 번째 장면과 여섯 번째 장면 역시 공통적으로 “꾸짖음”이라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전자에서는 하나님이 ‘아비멜렉’을 꾸짖고 있는 반면, 후자에서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꾸짖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칭 구조의 중심에 ‘아비멜렉’의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고, 이는 앞선 모든 장면에서 이루어진 행위로 말미암아 야기된 것이며, 뒤이어 등장하는 나머지 장면들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으로 자료비평학자들은 본문을 <엘로힘(E) 자료>로 분류하고 있다고 서론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요약에 해당하는 18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엘로힘’이 아닌(3, 6, 11, 13, 17절) ‘야훼’를 사용하고 있다 하여, 혹자는 이 구절만큼은 <야훼(J) 전승>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엘로힘 자료>의 문학․신학적 상수들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이름으로 ‘엘로힘’(םיהלא)을 사용하고 있는 점(18절); (2) 여종을 나타내는 단어로 המא를 사용하고 있는 점(17절); (3)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으로 꿈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3, 6절); (4) 흔히 <야훼 전승>으로 인정받고 있는 다른 이야기인 12:10-20의 본문과 내용 상 유사 병행을 이루고 있다는 점(Wenham, 68쪽, 참고도서 2). 그러나 이에 반하는 다른 주장들도 충분히 있음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참고: 아래 각주).
그러나 보다 최근에는 본문이 그 내용에 있어 12:10-20의 이야기와 너무 유사하다는 이유로, 두 이야기가 각기 독립적인 전승이 아니라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기도 합니다. 즉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앞에 나오는 내용을 모방하고 수정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2절), 만일 <이집트 에피소드>를 알지 못한다면 그의 이러한 행동은 전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라’와 사전 약속이 되어있었다고 말하는 점(13절) 역시 앞의 이야기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번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에서 해결하지 못한 일련의 질문들에 대해서 해답을 마련해주고 있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어, “왜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사라’를 데려 간 ‘바로’ 왕에게 재앙을 내리셨을까?” 하나님과 ‘아비멜렉’의 대화가 그 대답입니다(3-7절). 무엇입니까?
더 나아가 “왜 ‘아브라함’은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였을까?”에 관한 대답 역시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한 것은 실은 반쪽짜리 진실로서, ‘그랄’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없기 때문이라는 자가 진단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설명을 종합해 볼 때, 결국 두 본문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만, 각각의 전승에 관해서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두 이야기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크지는 않지만, 대략 두 가지 견해가 상존하고 있습니다. 핵심적인 차이는 두 자료가 원래 하나의 전승에 속한 것이었는지, 또는 다른 전승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전자의 견해에 따르면, 20장은 원래 가장 오래되고 중심이 되는 12:10-20의 내용을 확장시킨 것이긴 하지만, 시기적으로는 <야훼 자료>가 본격적으로 출현하던 때보다 앞서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편 후자의 견해에 의하면, 20장은 처음부터 <야훼 전승>의 일부가 아니라, <야훼 자료>를 보충하는 후대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Wenham, 68쪽(참고 도서 1). 그러나 본문 이야기의 끝에서(20:18) 하나님의 이름 ‘야훼’를 사용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본문이 <야훼 전승>의 일부라는 전자의 견해에 더 무게를 둘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두 이야기가 그 내용에 있어서나 전승에 있어 깊은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은 별개로 하드라도, 본문을 <엘로힘 전승>으로 보는 전통적인 입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다른 근거들 또한 상당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15장에서 보듯이, 꿈이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으로서 등장하고 있는 곳도 <엘로힘 자료>가 유일한 것만도 아닙니다. 더 나아가 “여종”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두 전승에서 각기 다른 단어 המא(<엘로힘 자료>)와 החפשׁ(<야훼 자료>)를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 또한 설득력이 약한 것이, 두 단어가 실은 다른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즉 두 단어는 여종을 의미하는 동의어가 아니라 각기 다른 신분의 여자를 지칭하는 다른 단어라는 사실입니다: המא-첩; החפשׁ-여종.
그러나 “만일 본문이 <엘로힘 자료>가 아닐 수도 있다면, 어째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엘로힘’이 그렇게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신학적인 답변이 가능한 것이, ‘야훼’라는 이름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이름으로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나(3, 6절) 또는 이방인들과의 대화에서(13절) 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기 때문에 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이름 ‘엘로힘’(즉 하나님)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주장입니다. <요셉 이야기>에서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집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야훼’ 대신에 ‘엘로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41:25, 28). 더 나아가 추측컨대, 출애굽 사건 이전의 족장들은 ‘야훼’ 하나님을 몰랐을 것이므로(출6:3), <족장 이야기>에서 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다고 하드라도 20-22장에 걸쳐 ‘엘로힘’ 하나님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필요할 것인데, 즉 적어도 이 부분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나머지 내용들과는 다른 전승 자료가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위가 어떻게 되었든, 이들 자료들은 <아브라함 이야기> 속으로 잘 용해되어 현재의 본문으로 완성된 것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지금까지 관찰해 왔던 바처럼, 본문 이야기는 12:10-20의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으나, <아브라함 이야기>의 다른 에피소드들 특히 <소돔 이야기>(18-19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휘나 표현, 및 유사한 신학적 개념들을 다수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Wenham, 69쪽(참고도서 1).
이중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본문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부르고 있는 것이 그의 행동에 비하면 영 어울리지 않습니다만(7절), 앞선 <소돔 이야기>에서 그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두 이야기는 나름대로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비밀과 계획을 계시를 통해 알게 되는 특권을 누리는 자를 말하는데, ‘소돔’의 멸망과 관련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씀해 주셨고(18:17-18), 이를 알게 된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서 그 유명한 선지자적인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본 바 있습니다(18:23-32). 그리고 구문론적으로도 본문은 앞선 <소돔 이야기>와 불가분의 연결을 이루고 있는 것이, 화자는 본문 이야기를 “아브라함이 그곳을 떠나”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본문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입장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장면 1: 이주(1절)
화자는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아브라함이 그곳을 떠나 ... 그랄에 거주하게 되었다”(1절)고 언급함으로써, 앞선 <소돔 이야기>와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일종의 연결고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전에 ‘가나안’에서 ‘아브라함’이 가뭄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해 내려갔던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집트’로 내려갈 당시 ‘아브라함’의 여행을 묘사하면서(12:9-10) 화자가 사용했던 것과 꼭 같은 한 쌍의 동사, “이사하다”(나사, צסנ)와 “거하다”(구르, רוג)를 이곳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왜 이사를 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전과는 달리 ‘가나안’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고, 그 지역 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본문이 <소돔 이야기>와 모종의 연결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아브라함’이 떠난 장소는 ‘마므리’임이 분명해 보입니다(18:1). ‘가데스’는 ‘가나안’의 남쪽 경계를 이루는 지역인데 반해, ‘수르’는 그보다 훨씬 동쪽에 위치한, ‘이집트’ 국경에 가까운 ‘시나이’ 반도의 북서 쪽 사막 지역 어딘가를 지칭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주한 ‘그랄’은 이 두 지역 사이가 아니라 그보다는 북쪽 어디쯤일 것이라고 합니다: Hamilton, 59쪽(참고 도서 4). 아무튼 이곳에서 소개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여정은 매우 복잡하여, 정확하게 밝히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물론 정착 이후에도 여전히 이민자로 살아갔을 것이라는 점은 이전과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아내 ‘사라’가 이집트에서처럼 왕궁으로 보내지는 일과 같은 위기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에 따라 그곳 왕 ‘아비멜렉’이 그녀에게 접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니 말입니다.
2. 장면 2-3: 퇴보(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집트’의 위기가 반복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2절상)
이 설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두 본문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다르게 설명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두 사건이 전혀 다른 시기에 일어난 별개의 것인가?
두 견해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진다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만, ‘해밀턴’은 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Hamilton, 59쪽(참고도서 4).
그에 따르면 두 이야기에는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기근에 대한 언급이 없고(참고, 12:10 이후),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참고, 12:11). 물론 그동안 25년의 세월이 흘러 ‘사라’의 나이 90이나 되었으니(20:2), 더 이상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유지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이집트’에서는 남의 아내를 빼앗아 가는 부도덕한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평가를 내렸던 ‘아브라함’이, 이곳 ‘그랄’ 인들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것도 화자의 침묵을 통해서 드러나는 차이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내면 동기에도 일단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집트’에서 그가 취한 행동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면, 이곳에서는 우발적이고 충동적으로 행동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물론 이전에 유사한 일로 교묘한 술책을 꾀해 본 적이 있는지라 이번에는 특별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행동을 보였다고 해서, 두 에피소드가 동일한 하나의 사건을 다룬 것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의심은 남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이 보여준 신앙의 여정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후 2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격적으로 많이 성숙했을 것이고, ‘소돔’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간구하는 “의로운 선지자”의 행보도 보여주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신앙의 아킬레스건은 있는 법, 위기 상황에서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자 누구겠습니까? ‘아브라함’ 역시 우리 모두처럼 이전의 실수로부터 배우지 못했을 뿐입니다.
단순히 거짓말 한 번 한 것으로 끝났으면 좋았겠는데, 무고한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게 되었다는 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2절하)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도한 셈입니다. 참고로 간음은 성경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고대 근동지방에서도 죽음으로 다스리는 큰 범죄였습니다(레 20:10; 신 22:22).
3. 장면 4: 현현(3-7절)
세 번째 장면에 이르러, 꿈속에서 ‘아비멜렉’이 하나님을 만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법정에서 일어나는 재판과도 같습니다. 먼저 피고를 향한 재판관의 논고가 있자, 곧바로 피고가 이에 항변하는 진술을 하고, 이어서 재판관의 최후 선고가 내려집니다:
논고: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3절).
피고진술: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4-5절).
최종판결: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6-7절).
이전에 ‘이집트’에서 ‘바로’ 왕이 같은 행동을 했을 때, 하나님은 그 땅에 역병을 내려 왕으로 하여금 ‘사라’가 어떤 여자인지 깨닫도록 하셨다면, 이곳에서는 꿈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계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셨으며, 재판을 받는 쪽도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자신을 계시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창세기>에서는 꿈을 통한 계시가 본문 외에도 세 번이나 소개되고 있습니다: (1) ‘라반’의 꿈(31:24); (2) ‘이집트’ 관원들의 꿈(40:5); (3) ‘바로’ 왕의 꿈(41:1). 이 모두 일종의 경고로 볼 수 있으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꿈이나(단 4:1), ‘요셉’의 꿈(마 2:13), 그리고 ‘빌라도’의 아내가 꾼 꿈(마 27:19) 등과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들 본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바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그분의 계시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더욱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경건한 왕 ‘요시아’는 ‘이집트’의 왕 ‘느고’가 받은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한 결과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대하 35:22)!
화자가 ‘침묵’을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을까? 하나님의 계시는 ‘이스라엘’의 전유물이 아니며, 간음은 고의든 아니든,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이든 예외 없이 심각한 범죄 행위임을 말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은 지나치게 편파적이고, 과도합니다. ‘아비멜렉’의 항변은 충분히 근거가 있고 정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처럼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지도 않습니다: “맞습니다. 내가 그 여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결혼한 여자인 줄도 몰랐고, 잠자리를 함께 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억울한 피해자에 불과합니다.”
제 삼자가 보더라도, 비난과 처벌을 받아야 할 자는 ‘아비멜렉’이 아니라 ‘아브라함’입니다. 의로운 자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비멜렉’입니다. 이 부부는 한 통속이 되어 거짓말을 했고, 그들의 이웃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 더욱 한심스럽게도 가장 심각한 신성모독의 죄까지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심각하게 타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이 던지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질문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고대국가에서 왕은 곧 국가입니다. 따라서 ‘아비멜렉’의 범죄는 곧 온 백성의 범죄입니다(4, 7-9절). ‘이스라엘’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제사장의 죄는 온 백성에게 미치며(레 4:3), 왕들이 잘못해도 심판은 나라 전체에 미치게 됩니다(삼하 24; 열왕기).
그렇습니까?
이 질문은 아이러니요 해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왕의 간구는 ‘소돔’의 멸망을 앞두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렸던 위대한 중보의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이 되어버렸습니다. 당시 ‘롯’을 위하여 간구하던 ‘아브라함’의 역할을 ‘아비멜렉’이 맡고 있으며, ‘아브라함’이 ‘롯’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당시 ‘롯’과 그의 가족이 ‘소돔’ 사람들 때문에 멸망당할 위기에 놓였다면, 이번에는 ‘아브라함’ 때문에 ‘그랄’ 사람들이 모두 멸망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의 항의를 달리 표현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잘못한 것으로 의로운 이방인이 벌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화자의 분노가 있고, 곡자들의 연민과 동정이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대답도 독자들이 기대하는 바와 같습니다: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6절상). 즉 그가 비난받을 만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을 다 알고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덧붙여 새롭고도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주십니다: “(내가)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6절하). ‘아비멜렉’이 ‘사라’를 범하지 않은 것은 무슨 높은 도덕적 원리에 따른 것도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헌신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종판결은 계속됩니다. 남의 여자를 되돌려 보내라는 것입니다. 만일 듣지 않으면 온 집안이 멸절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판결은 단순히 경고나 위협의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미 성취된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비멜렉’에게 속한 모든 여인들의 태를 다 닫으셨기 때문입니다(17-18절). ‘아비멜렉’에게 남은 선택은 한 가지밖에 없어 보입니다. 순종하여 진심을 증명해 보이고, 선지자 아브라함의 기도를 받아 생명을 건지는 일이 그것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창세기>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아브라함’이 선지자로 치켜세움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소돔 이야기>에서 그는 ‘모세’나 ‘사무엘’이나 ‘예레미야’나 ‘아모스’ 등에 버금가는 위대한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선지자(אי, 나비) 칭호를 받기는 이곳이 처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하는 행위는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요청을 받는 것과 유사한 경우입니다(욥 42:8).
과연 이 사람이 이런 호칭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과연 그에게 기도의 능력이 나타날 것인가?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해 봅시다. 이어지는 단락은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4. 장면 5: 경외(8절)
전체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한 다섯 번째 장면의 분위기는 두려움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가 그 원인입니다. 이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즉각적인 순종으로 이끌어 갑니다.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온 식구들을 불러 모으고, 겪었던 모든 일을 다 알려주고, 그들 역시 크게 두려워하게 됩니다.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는 선지자(?)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방인 ‘아비멜렉’과 그에게 딸린 온 식솔들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두려워했던 상대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11절). 이와 유사한 경우를 ‘요나’에게서도 발견합니다. 정작 하나님을 두려워 한 자는 선지자 ‘요나’가 아니라, 그의 고백을 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욘 1:10).
이제 보니 ‘아브라함’의 판단은 자의적이었으며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5. 장면 6: 질책(9-13절)
이 장면에 이르러 ‘아브라함’의 역할은 완전히 역전되고 있습니다. <소돔 이야기>에서 그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따지고 추궁하는 자였습니다만, 여기서는 오히려 ‘아비멜렉’으로부터 추궁을 당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오래 전에 이집트에서 ‘바로’ 왕에게 당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뻔 하게하였느냐.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창 20:9, 10).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12:18, 19).
두 사건에서 만나는 수사적 질문은 <에덴 이야기>의 모티브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창 3:13). 하지만 이후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로’와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대하는 태도나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부분에 있어 지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로’가 모든 책임을 ‘아브라함’에게만 돌리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비멜렉’은 자신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가 대화 중간 중간에 죄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도덕률에 대해서 나름대로 양심에 쫒아 살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아비멜렉’은 자신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를 염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에 반해, ‘바로’의 관심사는 오직 그 자신뿐입니다. 이로 미루어 ‘아비멜렉’은 <성경>의 기준에서 볼 때 선한 왕임이 분명합니다(시 72; 사 11:1-5). 더 나아가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답변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것에 비해서, ‘아비멜렉’은 그에게 변명할 기회를 허용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참고, 10절).
이처럼 관용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나름대로 수준 높은 도덕적 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아비멜렉’과는 대조적으로 ‘아브라함’의 말과 행동은 수준 이하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스스로를 저주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내세우는 첫 번째 변명은 우리가 알다시피 잘못된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11절)
‘아브라함’의 생애는 지금까지 축복과 성공의 연속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14장), 하나님의 친구로서 그분의 가장 깊은 생각까지 알게 되었습니다(17, 18장). ‘이집트’에서 ‘사라’ 때문에 지금과 비슷한 위기에 놓이기도 했어나, 하나님의 은혜로 오히려 큰 재산을 얻어 무사히 빠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이전과 유사한 상황에서 갑자기 두려움에 휩싸였다는 변명은 ‘아비멜렉’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거부감과 역효과를 주게 될 것입니다. 그의 두 번째 변명은 어떻습니까?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12절)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반쪽짜리 진실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는 사실을 왜 진작 밝히지 않았느냐는 질책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근친결혼이라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했으니 이 또한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근친결혼을 금지하는 <레위기>의 법은 족장 시대보다 훨씬 이후에 제정된 법이라, ‘아브라함’은 이 법의 규제를 받을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래저래 그는 이 두 번째 변명을 통해서도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는 셈입니다. 세 번째로 이어지는 변명 역시 정당성을 확보하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13절)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참으로 한심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는 곳마다 아내를 누이라 속여야 할 정도로 불신과 두려움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에게 있어 ‘사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반려자나 언약의 동역자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요 수단에 불과합니다. 반면 그의 이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더 이상의 언급이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대화를 듣고 난 후, 아브라함에 대한 나의 평가는 어떤 것입니까?
6. 장면 7-8: 보상(14-16절)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설득시킬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아브라함’의 과거 역사를 모두 알고 있는 독자라면 모두 그로부터 등을 돌렸을 것입니다. 선지자는커녕 이웃에 사는 것조차 꺼리게 되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아비멜렉’만이 ‘아브라함’에게 대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호의를 베풀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14-16절).
그는 ‘이집트’의 ‘바로 왕’이 그랬던 것처럼(12:16) 후하게 보상해 주고 있습니다. 당나귀나 낙타 등은 없었지만, 대신 엄청난 액수의 돈을 주었습니다. 은 천개는 정확하게는 천 ‘세겔’(shekel)로서, 한 ‘세겔’이 12그람에 해당됩니다. <신명기>는 신부에 대한 결혼 지참금으로 최대 50 ‘세겔’까지 주도록 허용하고 있으며(신 22:29), 고대 ‘바벨론’ 노동자의 한 달 보수가 약 반 ‘세겔’이었다고 합니다. 이로 미루어 ‘아브라함’이 받은 은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상의 성격이 ‘바로’와는 다릅니다.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준 선물은 ‘사라’와 결혼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만, ‘아비멜렉’의 경우는 그야말로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일종의 피해 보상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사실을 알았을 때, 분노하며 즉각적으로 ‘아브라함’을 국외로 추방시켜버렸습니다만, ‘아비멜렉’은 선한 말로 뉘우침의 기색까지 보이고 있습니다(우리는 앞에서도 두 왕의 차이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 뉘우침 속에서 ‘사라’에 대한 명예회복의 목적도 포함되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베푼 호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기 나라 땅에서 살도록 초청까지 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대가족과 하인들과 가축을 지닌 부자로서 조카 ‘롯’과 함께 살기에는 땅이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이 역시 피해 보상용입니다! 이방인 사이에도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있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흔치 않는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는 ‘아브라함’에 대한 서운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라’에게 ‘아브라함’을 가리켜 남편이 아닌 오라비로 칭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에 가시가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모든 선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을까요? ‘아비멜렉’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7. 장면 9: 중보(17-18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17-18절).
이 마지막 장면은 전체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애매하게 침묵으로 처리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경과하였을까?” 이야기가 진행되는 속도로 미루어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만, 실은 꽤나 시간이 경과했던 것 같습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리고 간 이후 병이 들었다는 언급이나, 그의 아내와 모든 여종들의 자궁이 닫혀서 아무도 출산을 못하게 되었다는 언급 등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덧붙여 ‘아비멜렉’이 ‘사라’를 범하지 못한 이유도 분명하게 드러난 셈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그가 ‘사라’를 데리고 간 이후부터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 앞에서 무죄하다고 항변한 것도 그 자신의 의지나 선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아프게 하여 범죄 하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자들의 ‘태가 닫혔다’는 언급은 또 다른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데, 약속의 아들 ‘이삭’이 불법적인 방식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장면에서 이야기의 분위기는 완전히 역전되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야기 내내 두 인물을 지극히 대조적으로 그려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는 자요, 기회주의자이며, 거짓말쟁이요, 일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인데 반해, 이방인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정의롭고,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누가 더 의로운 자입니까? 누가 누구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까? 이 장면은 ‘언약’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교훈과 적용
본인의 아내는 오래 동안 당뇨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이 질병은 그 자체로는 크게 걱정할 병은 아니라고 합니다만, 합병증이 더 무서워 매사에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음식에서부터 휴식이나 운동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조절하고 계획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몸이 피로하거나 감기라도 걸렸다 싶으면 큰 병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하여 덜컹 겁부터 냅니다. 그러나 나는 전혀 다릅니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병으로 병원에 가본 적이 없는 관계로 건강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도 않을뿐더러 건강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면서도, 이를 지키기 위해서 특별하게 계획을 세워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법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무슨 병이든 하나라도 가진 사람이 건강한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는 역설이 있나 봅니다.
신앙의 영역에 있어서도 이런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했던지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늘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마므리’ 언덕이 싫었을까요? 남쪽으로 내려가 ‘그랄’에 정착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인’이 되어 살았으면 그만일 텐데, 이들 이방인들에 대한 무슨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음일까요? 이십년 전 겪었던 이집트의 위기가 다시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초(自招)한 것입니다.
역시 문제의 발단은 아내 ‘사라’때문입니다. 2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육체적인 매력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화자는 이곳에서 그 점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웃 사람들에게 아내를 누이라 속입니다. 이번에는 발칙하게 ‘사라’도 夫唱婦隨입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2절상);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5절상). 단순히 거짓말 한 번 한 것으로 끝났으면 좋았겠는데, 무고한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게 되었다는 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2절하).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도했으니 말입니다. 간음은 <성경>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고대 근동지방에서 죽음으로 다스리는 큰 범죄입니다(레 20:10; 신 22:22). 왜 이런 일이 또 발생하는 것일까? 혹시 화자가 실수로 같은 이야기를 재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동일한 실수를 어찌 두 번씩이나 반복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그동안 보여준 신앙의 여정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2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격적으로 많이 성숙했으며, 바로 직전 <소돔 이야기>에서는 의로운 선지자의 행보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신앙의 ‘아킬레스건’은 있는 법, 위기 상황에서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자 누구겠습니까? ‘아브라함’역시 나처럼 이전의 실수로부터 배우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는「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행동 방식을 보인 것뿐입니다. <구약>은 이처럼 신앙의 성숙과 퇴보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홍수 이야기>에서 의로운 ‘노아’는 홍수 후에 술이 취해 하체를 드러내어 아들의 조롱을 받은 바 있습니다(9:20-23). 탁월한 지도자 ‘모세’는 이성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민 20:1-13). ‘다윗’의 간음이나 살인에 대해서는 재삼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삼하 11).
<신약>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베드로’의 실수나(마 26:69-75), ‘바나바’가 거짓 교리에 빠진 것이나(갈 2:13), ‘고린’도 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특히 ‘교린도’ 교인들은 성도였으며 동시에 온갖 종류의 음행과 탐욕과 거짓과 분쟁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교회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신앙인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이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장탄식으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9, 24).
그는 지금 자신 속에서 두 개의 본성이 그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장탄식을 놓고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습니다. 한편에서는 회심하기 이전의 경험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가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회심 이후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전자를 주장하는 편에서의 논리는 ‘바울’ 같은 대 사도가 어찌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도 죄의 문제를 놓고 이런 고통을 겪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보드라도 후자일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헨리 나우웬’ 박사도 이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드아드르 나누에’ 「헨리 나우웬과 영성」. 유해룡 역.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03.
무엇보다도 먼저 영적 생활은 측정하기가 어렵다. 실용주의 경향을 가진 미국인들은 영적으로 진보하는 것을 어떤 형식이나 양으로 측정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영적 진보가 불완전에서 완전을 향하여 직선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양 끝에서 서로 붙들려 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경향이 있다.
신앙생활은 마치 “요요”(yoyo) 운동과 같은 것이지요. 또는 “시이소”(seesaw) 운동이기도 합니다. 시이소 놀이에서는 내가 올라가면 상대는 내려가고, 내가 내려가면 상대는 올라갑니다. 시이소의 양쪽 끝에 나와 하나님이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면 아주 흥미로워집니다. 내가 그분을 높이면 나는 낮아집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과 지혜가 높임을 받게 되며, 상대적으로 나 자신의 모습은 연약하며, 어리석고, 추악하게 보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낮아지면 내가 높아지게 되는데, 이 때 나타나는 병리적 현상은 스스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입니다.
혹시 ‘그랄’에 와서 ‘아브라함’이 이런 자만에 빠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이웃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평가를 들어봅시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11절상). 그가 무슨 근거로 자기 이웃에 대하여 이런 형편없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설령 그의 평가가 옳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으니, 내 스스로 살 방도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영웅적 자질은 그의 인격이나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화자는 그동안 강조해 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19:29상). 정작 ‘아브라함’ 자신만이 이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이나 경외심이 없기는 그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영역에서 늘 경계해야 할 자는 ‘그랄’ 인과 같이 영적으로 무지하거나 어린 아이가 아닐 수도 있음을 교훈하려는 듯이 보입니다. 이들 소위 무지한 이방인들은 대개 아주 겸손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인정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상대는 영적 거장이요 영웅들입니다. 누구든 이런 평가를 받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자신이 무슨 큰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스스로를 높이려는 유혹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저 높은 강단 위에 서서 영적인 어린 아이들을 향해서 훈계하고 질타하고 호통을 칩니다. 때로는 확신이 지나쳐 무아지경 가운데서 독단과 독선으로 사람들을 경멸하면서 그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아브라함’ 역시 불신에서 독단으로 나아가는 것을 봅니다: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11절하).
아비멜렉. 과연 ‘아브라함’의 판단이 옳았던 것일까?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중에서 누구를 의로운 사람으로 추천할지 추측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비멜렉’을 꾸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3절). 하지만 나의 추측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항변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4-5절).
백번 천 번 이유 있는 항변입니다. ‘아비멜렉’ 당시 관습에 의하면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고, 억울한 피해자에 불과합니다.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오히려 ‘아브라함’과 ‘사라’입니다. 두 사람은 한 통속이 되어 거짓말을 했고, 그 결과 왕과 그 나라 전체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 더욱 한심스럽게도 우리 모두가 가장 심각한 범죄 행위라고 여기는 신성모독까지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심각하게 타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딜레마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아브라함’과 맺었던 약속 때문에 더욱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같은 백성들조차 언약의 백성이라 하여 용서해 주는 것은 물론, 후손과 땅까지 공급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와 같은 불공평한 정의 앞에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냉소합니다: “저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비멜렉’ 같은 의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겠다.” 이런 냉소가 오늘날에도 팽배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냉소가 나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 ‘요나’가 탔던 배가 풍랑을 만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아비멜렉’의 의(義)가 소위 인본주의적 의일 뿐이라고 자위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의로움이 인본주의의 의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내가 그토록 자랑하고 집착하는 신본주의적 의는 그야말로 한심한 수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고작해야 수시로 거짓말 하고 약삭빠른 그의 백성은 용서하시고,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이방인을 심판하는 수준이란 말인가?” ‘아비멜렉’의 질문도 이처럼 불공평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도전이자 항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4절)? 그는 지금 자기 백성들의 운명도 함께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선한 왕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왕의 간구를 듣고 있노라면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왕이 그의 백성을 위해서 간구하며 묻는 이 질문은 이전에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서 간구하며 물었던 그 질문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나이다. 세상을 심판 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18:25). 두 사람의 처지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이’ ‘롯’을 위하여 간구하는 ‘아브라함’이 되고, ‘아브라함’이 ‘롯’의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얼마 전까지 ‘소돔’을 위해서 그처럼 열렬하게 간구하던 선지자 ‘아브라함’이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세상에 있으나 마나 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큰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다니 말입니다. 화자의 해학과 조롱이 번뜩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가 아니라 ‘아비멜렉’의 기도에 응답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6절). ‘아브라함’이 대화를 들었더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야말로 뭐 밟은 기분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어떡합니까? 선지자이자 모든 민족의 아버지가 제 역할을 못했으니, 하나님께서 직접 ‘아비멜렉’의 꿈에까지 나타날 수밖에요. 구차하고 번거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본성 상 의인과 악인을 함께 처벌하실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이렇게라도 하셔야만 했습니다. ‘아비멜렉’도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렴 저런 비겁하고 야비하고 위선적인 인물의 잘못은 덮어두고 나를 처벌할 수는 없었겠지.” 그렇습니까?
하나님. 그렇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비멜렉’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도 하나의 충격입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찌니라”(7절). 당장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오고갔을까? “오, 주님, 저는 도저히 이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누구이기에 이런 의로운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겠습니까? 먼저 저의 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제보다 훨씬 더 고상하고, 인격적이며, 거룩한 자입니다. 어찌 저더러 이런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라고 하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틀립니다. ‘아브라함’이 옛날 ‘이집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같은 죄를 반복한다고 해서 달리 생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선지자요 의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죄는 용서 받았고, 깨끗이 사라졌으며, 다시는 기억되지 않았습니다. 다시는 그의 실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울’ 사도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를 의인으로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특히 <히브리서>에서는 그를 믿음의 영웅으로 칭송하면서 그의 생애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예로 들면서도, <히브리서> 11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네 번의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8절); (2)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9절); (3)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11절); (4)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17절).
‘이집트’나 ‘그랄’에서 저질렀던 끔직한 실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유쾌한 일이 아닐까요?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