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1과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김태정 목사창세기 21:22-34약 28분 분량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27절)
선교사나 부흥사라고 해서 전도나 부흥집회만으로 세월을 보낼까? 오히려 가족을 돌보고, 생업을 꾸려가며, 대부분의 시간을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닐까? 식사하기, 출근하기, 잠자기, 운동하기, 여가 즐기기, 잔디 깎기, 세차 하기, 아이 보기, 교통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기, 잡담하기 등등. 족장 ‘아브라함’의 삶 역시 흥분과 모험과 위기의 연속만은 아니었음을 봅니다. 우물 하나를 놓고 이웃과 티격태격 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모두 소위 거룩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거나 중립적인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는 별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놓고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를 기대하거나 기도하지 않습니다. 너무 시시콜콜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취업이나 입학시험 등,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들을 놓고는 그분께서 함께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분이 오시지 않을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 모임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도 그분을 으레 늦게 도착하는 귀빈처럼 여기고 초청합니다. 또 장래의 계획이나 꿈을 놓고 기도합니다. 그분이 처음부터 관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까? 만나는 시간이나 장소나 상대가 늘 정해져 있는 것입니까? 친구와 어울려 피자를 먹고 있을 때에도 그분은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연인과 영화를 보고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우리 집에서 증축 공사를 하고 있는 인부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인도에서 온 힌두교도 학생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언가를 나에게 말씀하십니까? 아랍권 국가에서 온 무슬림교도 학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고작 우물 하나를 놓고 이웃과 갈등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조차 하나님께서 개입하실까요? 본문 에피소드가 전체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갖는 신학적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교훈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문학과 역사
구조와 단락. 이 짧은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점들을 노정하고 있습니다. 전후 다른 이야기들과 신학적 주제에 있어서나 연대기적인 면에 있어서 상관관계가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내적인 일관성도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 때에”로 시작하고 있는 본문의 서두는 정확하게 언제인지가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다. 앞의 이야기와 구태여 연결시켜보자면, ‘이삭’이 태어날 때이거나 또는 젖을 뗄 시기였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아비멜렉’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20장과 시기적으로 연결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이 다루고 있는 내용도,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인 땅이나 후손이나 모든 민족에 대한 축복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특히 ‘이삭’과 관련한 두 번의 에피소드, 즉 그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와(21:121) 그를 번제로 드리는 이야기(22장)를 분리시켜주는 기능만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34절)
이야기로서 본문은 하나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22-33절), 두 등장인물 사이의 대화와 화자의 간단한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화와 해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면 다음처럼 11개의 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22절상서론
(2) 22절하-23절‘아비멜렉’의 첫 번째 대화: “언약을 맺자”
(3) 24절‘아브라함’의 동의
(4) 25절해설: 우물을 둘러싼 갈등
(5) 26절‘아비멜렉’의 두 번째 대화: “내가 알지 못하노라”
(6) 27절‘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언약을 수립함
(7) 28절‘아브라함’이 일곱 암양을 따로 구별함
(8) 29절‘아비멜렉’의 세 번째 대화: “암양은 무엇 때문인가?”
(9) 30절‘아브라함’의 대답
(10) 31-33절‘브엘세바’의 기원
(11) 34절‘아브라함’이 ‘블레셋’에 머뭄
아주 짧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잡기가 가장 어려운 부분이 24절에서 25절로 넘어가는 곳입니다. ‘아비멜렉’이 언약을 맺자고 제안하자(23절),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다음(24절), 느닷없이 새로운 주제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25-27절)
‘아브라함’이 제기하고 있는 이 문제가 과연 ‘아비멜렉’이 언약을 맺자고 제안하기 이전에 발생한 것인가? 아니면 그 이후에 발생한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아비멜렉’이 언약을 맺자고 제안하는 이유가 바로 이 문제때문인가? 다시 말하자면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이 두 사람 사이에 맺고자 하는 언약과 무슨 인과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자료와 편집.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본문이 적어도 한 개 이상의 전승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히 ‘브엘세바’의 이름과 관련해서 한 가지 이상의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적어도 28-29절에 의하면 이 이름은 ‘일곱’(עבשׁ; 세바) 암양 새끼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만, 31절에 따르면 ‘맹세’(עבשׁנ; 니세바)와도 분명하게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28-29절),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31절)
두 개의 전승이 섞여 있는 방식에 대해서도 이견들이 있습니다. 참고: Wenham, 91쪽(참고도서 1).
예로써, 혹자는 <엘로힘 전승>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이야기에 <야훼 전승>으로 분류될 수 있는 32-34절이 추가된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혹자는 <엘로힘 자료>와 <야훼 자료>가 같이 섞여 있다고도 주장합니다. 후자의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로는 ‘궁켈’을 들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맹세와 서원과 관련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22-24절, 27절, 31절 등은 <엘로힘 자료>로, 그리고 우물을 둘러싼 갈등이나 일곱 양, ‘브엘세바’의 이름 등과 관련된 25-26절, 28-30절, 32-34절 등의 본문은 <야훼 자료>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한편 ‘세테르’(Seters, J. van)는 ‘궁켈’과 입장을 같이하면서도 추가 설명을 더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25-26절, 28-30절상 등은 가장 오래된 <야훼 전승>의 한 형태로서 20장에서 등장하고 있는 이야기의 속편으로 볼 수 있으나, 반면 22-24절, 27절, 31절하-34절은 야훼 기자가 후대에 삽입한 내용들입니다. 한편 ‘웨스터만’(Westermann)은 <이삭과 아비멜렉의 언약>(26:26-31)이 내용적으로 본문과 유사병행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26장은 ‘브엘세바’에 관한 더 오래된 설명이다. ‘브엘세바’의 어원을 설명하고 있는 두 절은(26:32-33)은 <이삭과 아비멜렉의 언약>(26:26-31)의 내용에 추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머물면서 나무를 심고,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그곳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다는 내용은(21:33-34)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21:22-32, 21:31절하)에 덧붙인 것으로서, 여기서도 ‘브엘세바’의 어원에 관한 설명은 부차적인 후대 삽입으로서, 26:32-33에서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1:25-26, 28-31절상에 상응하는 내용이 26장에는 없으므로, 이 자료는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21장에서 가장 오래된 자료는 22-24, 27절 등이며, 나머지 25-26절, 28-31절상 등은 후대의 삽입으로 볼 수 있으며, 33-34절은 별도의 독립적인 <여정 이야기>에서 취한 것일 수도 있다.
본문에 대한 자료비평과 관련하여 이처럼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본문의 역사에 대한 불확실성을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르나’(Sarna)와 같은 학자는 이런 자료비평적 연구 결과들을 비켜가면서 오히려 본문에 대한 문학비평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본문은 예술성이 뛰어나며 따라서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들과 아주 잘 어울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로써,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이름은 본문에서 각기 일곱 번씩 등장하고 있으며, ‘아브라함’은 일곱 암양 새끼를 취하고 있으며, ‘브엘세바’가 갖는 의미 중에 ‘일곱 샘’이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그 내용에 있어 역시 동일한 두 주인공이 등장하고 있는 앞선 이야기를(20장) 배경으로 깔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독자들은 ‘아비멜렉’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으며, 그가 ‘아브라함’을 젊잖게 대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유사한 내용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즉 ‘아비멜렉’의 부하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훔친 일이 그렇고, 우물을 뺏은 일과 ‘사라’를 훔친 일에 대해서 ‘아비멜렉’이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항변하는 일이라든지, 나중에 훔친 것을 돌려주는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양과 가축으로 ‘아브라함’에게 보상을 해 주는 것이나, ‘아브라함’이 언약의 증거로 양을 내놓는 일에 있어 동일한 동사, ‘취하여 주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점에 있어서도 화자의 뛰어난 수사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이야기의 서론은 ‘아비멜렉’ 왕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와 언약을 맺기를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22-23절)
‘아비멜렉’은 20장을 통해서 독자들에게는 이미 친숙한 인물이라, 화자의 편에서 새삼 소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의 군대 장관으로 소개하고 있는 ‘비골’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비골’의 이름과 관련하여 그 어원을 밝히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습니다만, ‘아나톨리아’(지금의 소아시아 터키 지역)와 연계 짓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설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비멜렉’과 그의 백성을 ‘블레셋’ 족속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 족속은 해양 족속으로 ‘크레테’를 거쳐 이 땅에 정착하게 된 ‘아나톨리아’나 또는 ‘에개 바다’로부터 건너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에피소드가 일어난 시점에 관해서도 애매모호하게 단순히 “그 때에”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때가 과연 언제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혹자는 ‘이삭’이 젖을 뗄 때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그보다는 조금 뒤인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날 날 떼였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후자의 입장을 취할 경우 20장의 이야기와 시간적으로 큰 간격이 없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군대 장관을 거느리고 ‘아브라함’을 찾아 온 동기나 목적이 무엇이든, 그 지역 사회에서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아브라함’의 위치와 영향력을 실감나게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비멜렉’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2절하). 이 고백이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만났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족장들과도 함께 하셨을 뿐만 아니라(26:3; 28:15; 31:3; 46:4; 39:3), ‘모세’나(출 3:12), ‘여호수아’나(수 1:5, 17; 3:7), ‘다윗’(삼하 7:3) 등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언약은 내용 상 축복과 저주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오경>의 공식을 따르자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과응보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성공은 하나님의 축복, 즉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어떤 특정 국면을 보고 이런 고백을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아브라함’의 삶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발견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재 진행형으로 사용하고 있는 동사의 형태가 이를 증거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무튼 ‘아비멜렉’은 지금 ‘아브라함’을 사실 상 축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비멜렉’이 과연 ‘아브라함’으로부터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브엘세바’ 즉 “맹세의 우물”이 벌써부터 암시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동사의 원형은 ‘세바’(עבשׁ)로서, ‘일곱 우물’, ‘맹세의 우물’을 뜻하는 ‘브엘세바’(עבשׁ ראב)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이야기의 결말이나 결론에 등장하는 어떤 이름이 실제 등장하기 전에 사전에 암시하거나 예고해 주는 식의 수사적 기법은 <창세기>에서 자주 만나는 기법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맹세해 달라는 것입니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요약하자면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23절)
즉 소극적으로는 거짓되이 행하지 말라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친절하게 대해 달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좋은 이웃이 되자는 요청인데, 거창한 외교적 표현을 빌자면, 상호불가침 또는 평화 공존의 언약을 맺자는 요구일 것입니다. ‘아비멜렉’으로 말하자면 ‘사라’의 일로 ‘아브라함’을 후대한 적이 있으므로(20:14-16), 이런 요구를 할 근거나 자격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비멜렉’은 지금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들에 대해서도 그 언약을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미래에 대한 그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들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는 늙은 ‘아브라함’의 장래가 그렇게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았을 터인데도 말입니다. 이전에 ‘사라’의 문제로 ‘아브라함’을 꾸짖던 ‘아비멜렉’을 연상해 보면(20:9), 이정도의 믿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방인 ‘아비멜렉’이 윤리․도덕의 영역은 물론, 믿음의 영역에 있어서조차도 하나님의 백성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모습은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반응을 통해서도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24절)
‘아브라함’의 반응은 ‘아비멜렉’의 요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내가 맹세하지요.” 지극히 짧고 퉁명스러운 대답입니다. 앞에서 ‘아비멜렉’의 다소 장황하면서도 정중한 외교적 언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아브라함’은 이처럼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상대방이 느끼는 것처럼 큰 확신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상대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두 사람의 대화를 비교하면서 가지게 되는 일련의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해설이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25절)
이 구절에 대한 「마소라」사본의 번역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강제로 빼앗아간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여러 차례 책망하매.” 이 번역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 ‘아비멜렉’에게 따지고 책망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왜 그렇게 퉁명스러웠는지를 짐작케 하는 설명이 됩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자신을 향한 비난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26절)
분명히 이유 있는 항변입니다. 이전에 ‘사라’가 결혼한 줄도 모르고 아내로 삼기 위하여 데려 갔던 경우와 마찬가지로(20장), 이번에도 고의성은 전혀 없습니다. 두 에피소드에서 모두 ‘아비멜렉’에게서 무슨 의도적인 악의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브라함’도 그의 해명에 안심을 하는 모습입니다. 주도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27절)
고대 근동에서 언약을 맺을 때 서로 선물을 교환하는 일은 관례였습니다만(왕상 15:19; 사 30:6; 호 12:2), 여기서는 ‘아브라함’만 선물을 내놓고 있습니다. 추측컨대 이 언약을 통해서 더 큰 이득을 보게 되는 쪽은 ‘아브라함’이거나, 아니면 상대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출 23:33; 신 7:2), ‘가나안’ 주민들과 언약을 맺거나,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은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조항들입니다(레 20:26). 이를 근거로 본문이 <오경>보다 상당히 오래된 전승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구체적인 언약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23절의 내용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는 바는, 상호협력 내지는 평화적 공존을 위한 세부 조항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조항 속에는 당연히 땅에 대한 소유권도 인정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약 당사자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까지 계약은 유효하다는 선언도 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우물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이 없었던지, ‘아브라함’은 이에 대해서는 별도 행동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28-29절)
그러나 우리는 그의 행동에 질문이 많습니다: “일곱 암양 새끼는 과연 무슨 의미인가? 기왕에 언약을 위해서 이미 내놓은 양과 소와는 어떻게 다른가? 원래 이들과 함께 선물로 주려고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나중에 내놓은 것인가? 아니면 추가로 더 내놓는 것인가? 그리고 왜 하필 일곱 마리인가? 황소 두 마리는 왜 안 되나?” 불행하게도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분명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기로는 ‘아비멜렉’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29절). 다소 당황스럽다는 기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서도 ‘일곱’을 언급함으로써 곧 등장하게 될 ‘브엘세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30절)
이 대답을 통해서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 집니다. 즉 일곱 암양 새끼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별도로 내놓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단순히 협력적 평화 공존이라는 일반적인 언약만으로는 어딘지 부족하고 불안합니다. 그가 애써 파놓은 우물 사용권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이 모든 계약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곱 암양 새끼는 이러한 그의 의지가 담긴 표지입니다.
이제 비로소 그 우물이 있던 장소, 즉 ‘브엘세바’에서 ‘맹세’와 함께 우물 사용권을 위한 언약을 체결하기에 이릅니다. 이 구절에 이르러,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장소를 연상시키는 ‘맹세’와 ‘일곱’(עבשׁ, 23, 24, 28, 29, 30절) 및 ‘우물’(ראב, 25, 30절) 등의 단어가 하나의 단어 ‘브엘세바’로 통합되어 드러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31절)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32절)
맹세는 언약의 핵심 사항입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비록 단 한 개에 불과하지만, 자기 소유로 주장할 수 있는 우물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멜렉’과 ‘비골’이 만족해하며 그 장소를 떠났다는 사실은 이런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32절에 등장하는 ‘블레셋’ 족속은 연대기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이들이 그 땅에 처음 등장한 것은 주전 1200 년경이기 때문입니다. 후대 화자의 손길이 엿보이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즉 <창세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블레셋’ 족속도, <구약>의 다른 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후기의 진짜 ‘블레셋’ 족속들처럼, ‘애게’ 바다를 통해서 ‘가나안’으로 이주해 왔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비골’의 이름이 ‘아나톨리아’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면 이런 주장은 더욱 힘이 실릴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나머지는 신학적 결론에 이은 ‘해피 앤딩’입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33-34절)
신학적 결론이라 함은 ‘아브라함’이 ‘에셀’ 나무를 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언급은 ‘아브라함 순례’의 의미 있는 결말이자 새로운 에피소드를 위한 출발의 기능을 해 왔음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12:7-8; 13:18). ‘에셀’ 나무는 키가 10여 미터나 자라는 큰 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베두인’ 사막 지역에서 사람들이 그늘을 위해서 심으며, 가축 떼들이 그 잎을 먹기도 한다고 합니다. 구약에서 때때로 상록수는 생명과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하기도 합니다만(시 1:3; 렘 17:7-8), ‘아브라함’이 왜 이 나무를 심었는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혹자는 나무를 심는 일을 제단을 쌓는 일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이곳에서 두 행위가 나란히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럴싸한 주장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는 이 장소를 거룩한 성소로 꾸미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감사와 헌신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부르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 즉 영생하시는 하나님(엘 올람)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호칭은 차라리 ‘가나안’ 신에게 더 적절한 것 같기도 합니다만, 실은 ‘아비멜렉’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계시 된 바 있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2절하)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23절상)
두 사람의 언약이 당대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까지 미치게 하자는 ‘아비멜렉’의 제안을 통해서 이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약이 체결되고 후손들에까지 반영구적으로 그 우물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게 된 ‘아브라함’의 입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런 호칭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진술은 그가 그 땅에서 오래도록 평화롭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간접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동안 오래 동안 지체되어 온 그 땅에 대한 약속이 마침내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오랜 세월에 걸친 평화와 안정’은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기도 합니다(레 26:6-12; 슥 8:4). 그러나 이것은 폭풍 전야의 고요함일 뿐이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일상: 왕과 족장
예수님 당시 유대주의자들에게는 모든 대상이 ‘성(聖)과 속(俗)’의 두 가지 범주 안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간; 장소; 사람; 짐승; 음식; 일; 민족; 시대; 등등. 구약 성경도 이런 이분법적인 이념을 지지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예배는 항상 정해진 시간과 날과 달에 정해진 장소에서 드려야 했으며, 정해진 희생 제물을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음식도 정해 진 것만 먹어야 하며, 정해 진 일만을 정해진 기간에만 해야 하는데, 이는 그들이 구별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에서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십중팔구 “전도와 선교”라는 판에 박은 대답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고,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유언처럼 남기셨다고 하니, 반박이나 재론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따라서 식사하기, 출근하기, 잠자기, 운동하기, 여가 즐기기, 잔디 깎기, 세차 하기, 아이 보기, 교통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기, 잡담하기 등등의 일들은, 성경공부나 예배 또는 선교와 전도 등에 비하면 시간 낭비이거나, 아무리 선의로 봐준다고 해도 우리 인생에 있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최소한의 일 정도밖에는 되지 않아 보입니다. ‘거룩한 사역’을 위한 보조 수단 정도라고나 할까요. 예를 들어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버는 것도 선교나 교회 헌금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런 것입니까?
그런데 신학자 ‘월터 브루거만’(W. Brueggmann)은 다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산문 일색의 무미건조한 세상에서 시를 창조하는 것이다.” 종교적 이분법에 익숙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풍유에 가까운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산문이란 무엇이며, 시란 또 무엇입니까? 그가 말하는 산문이란 정해진 공식으로 짜여 진 세상을 지칭하는 것이며, 한편 시란 그보다 더욱 풍성한 어떤 것, 즉 오늘날 너무나 흔한 표준 공식을 훨씬 뛰어넘는 것을 가리킵니다. 시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온갖 상상력과 가능성으로 열려 있습니다. 흥분과 모험과 때로는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창조적 발상이 들어 있습니다.
‘브루그만’은 진정한 ‘기독교 영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주의자나 기독교 근본주의자처럼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통합적인 세계관’을 갖는 것을 의미해야 합니다. 이 말은 과연 무슨 의미입니까? 이러한 주제와 관련해서 탁월한 두 저서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1) Michael Frost, Eyes Wide Open(Australia: Albatross Books, 1999), 「일상, 하나님의 신비」(IVP 역간, 2002); (2) Eugene H. Peterson, Christ Play in Ten Thousand Places: A Conversation In Spiritual Theology(USA: IVP, 2005), 「현실, 하나님의 세계」(IVP 역간, 2006).
‘유진 피터슨’은 그의 저서에서 이점을 가장 포괄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이 드러내고 암시하듯,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과,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활동하신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신학적인 용어를 빌자면, 피조세계와 역사와 공동체를 통해서 계시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는 실은 신학적인 용어로 하나님의 ‘일반계시’라고 부르는 것들이지요.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한 대로, 전 우주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영역이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나 역사를 거창하게 묘사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합니다. 즉 극적이고도 초자연적인 권능으로써만 일하시는 분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굉장한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죽음이나 질병과 같은 인간의 연약함을 초월하는 거룩한 체험을 동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칩니다: “주님, 제게 초자연적인 권능을 주지 않으시렵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아브라함’이 우물을 놓고 ‘아비멜렉’과 티격태격 싸우거나 이의 소유권을 놓고 서로 계약을 맺는 일과 같은 시시콜콜한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설마 이런 일에 개입하실 리가 만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이런 초자연적인 능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능력을 완성시키기는 것이라고 ‘프로스트’는 강조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들은 선문답과도 같은 불교의 시 한 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구절절 지혜가 깃든 이 시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잘 일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초심지가 성자에게 애처롭게 말했다.
제게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죽은 아이를 보노라면, ‘일어나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병든 사람을 볼 때면, ‘당장 나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꼬부랑 할머니를 만나면, ‘똑바로 서세요!’라고 선포하고 싶습니다.
아, 슬프도다. 나는 낙원에 있는 죽은 막대기 같은 존재입니다.
스승님, 제게 초자연적인 권능을 주지 않으시렵니까?
게으른 자의 한심한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개 훈련을 통해서 실력을 쌓지 않은 자들일수록 요행수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나 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성자는 화를 내듯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나와 그토록 많은 세월을 함께 했건만,
아직도 철이 덜 들었느냐?
네가 나를 안지가 이렇게 오래 되었건만,
아직도 깨닫지 못했는가?
잘 들어라, 나는 이 땅에서 80 평생을 살았지만,
한 번도 죽은 아이를 살린 적이 없고,
한 번도 병든 자를 낫게 한 적이 없으며,
한 번도 노인의 등뼈를 바로 편 적이 없다.
냉엄한 운명 아래
아이들은 죽고,
사람은 병들며,
늙은이는 스러지게 마련이지.
본인 역시 30 년이 되도록 한 번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소위 말하는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병든 자에게 안수하여 낫게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이 성자는 초자연적 능력을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적 능력을 완성시키는 편이 훨씬 낫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자연적 능력이란 경건의 훈련을 의미하는데, 눈으로 보되 미혹되지 않고, 귀로 듣되 귀먹지 않으며, 맛을 보되 먹히지 않고, 손을 대되 더럽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기적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시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기적을 구한다고?
내 말을 들어라.
가서 물을 긷고, 장작을 패고
돌을 쪼아라.
그게 기적이 아니냐?
이 땅에서 5년, 50년, 80년을 살되
그 누구도 속이지 않고 저주하지 않으며
살인을 하지 않은 자가
참으로 복된 자로다
예수님의 산상 수훈과 무엇이 다릅니까? 오늘날 순결을 지키고 정직하게 사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006년도 월드컵 기간 중, 한국이 16강에 오르기 전까지 대한민국 대부분의 도시는 ‘소돔’과 ‘고모라’ 그 자체였다는 신문 보도가 있습니다. 이 기간 중에 콘돔 판매량이 급증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축구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폐쇄적 민족주의에 빠져 광란의 축제를 보낸 것이지요.
지극히 평범한 것에 충실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비범한 사람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기초과학에 충실한 국가에서 노벨 수상자가 더 많이 배출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통합적 기독교 세계관을 갖는다는 말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조차도 영적인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면서 늘 그 속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놀고 계신 것을 발견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늘 가까이 있고,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산문 일색의 구태의연한 공식, 즉 하나님이 종교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일하신다는 고정 관념을 버리고, 모든 피조세계와 역사와 그리고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놀고 계시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교회 식구들뿐만 아니라, ‘아비멜렉’과 같은 이웃과도 그런 것이겠지요. 삶이란 관계를 맺는 것이지 무슨 역할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며, 또한 그분은 언제나 관계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족장 ‘아브라함’에게 ‘아비멜렉’ 왕은 어떤 존재였을까? 질문을 조금 달리해 봅시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질문을 확대해 봅시다: “‘아비멜렉’ 왕에게 ‘아브라함’은 어떻게 비쳤을까?”;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
이 두 질문은 다른 것 같지만 실은 동일한 것입니다. ‘프로스트’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쫓는 우리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가 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전도나 선교를 말할 때,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 지나치게 집중해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데에만 집중하게 되면, 다른 사람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분이 나그네나 병자나 감옥에 갇힌 자 속에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 즉 타인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알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틀에 박힌 생각과 고정관념으로 바라볼 때는 도저히 그럴 것 같지도 않은 이외의 인물을 통해서 자극받고 감동받을 수만 있다면, 그런 사람들을 그리스도처럼 대할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리라 생각해 봅니다. 간디는 분명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인도에서 오래 선교사로 일했던 ‘스탠리 존스’는 예수님이 간디를 통해서 인도에 오셨다고 발언 한 바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50년이 지나도록 할 수 없었던 일을 ‘간디’의 시련과 투옥을 통해서 이루어냈고, 이것이 인도 사람들의 눈을 십자가로 향하게 했다고 그는 말합니다. 십자가의 희생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극적인 예시이기 때문입니다.
2. 언약: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을 통해서 언약과 약속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계시하려 했을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2절하)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23절상)
만일 ‘아브라함’이 이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눈치 채기라도 했더라면, 한 이방인의 이와 같은 고백을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제가 안동의 ‘우리 집’에 갈 때마다 늘 놀랍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종인이가 저렇게 신나게 하나님을 노래하며, 두 손을 꼭 쥐고 열심히 기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나를 볼 때마다 좋다고 붙들며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희들끼리 서로 도와가며 살아갈 수 있을까?
말도 행동도 제대로 잘 못해서 가족들조차 내다버린 저런 장애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하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아비멜렉’이 지금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되었다네. 당신 후손들도 그렇게 되리라 확신하네”
불행하게도 ‘아브라함’은 아직 그렇게 큰 영성을 소유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후손들을 위해서 언약을 맺자는 제안에 대해서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듯합니다. 오히려 우물 문제를 놓고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25절). 그리고는 언약을 맺는 자리에서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구별하여 우물의 소유권에 대한 언약은 별도로 다루자고 선수를 치고 있습니다(27-30절). 그러나 ‘아비멜렉’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흔쾌히 인정하면서(자신은 비록 그런 문제가 있었는지도 알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아브라함’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고 있습니다. 즉 우물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해주었다는 말입니다. 맹세로써 그렇게 했습니다. 도덕성은 말할 것도 없고, 너그러움과 관용으로 따져보아도, 앞에서 ‘사라’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보다는 한 수 우위에 있습니다.
아무튼 이 언약이 의미하는 바는 비록 작은 한 우물이긴 하지만, ‘아브라함’은 비로소 그 땅에서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재산이 생겼습니다. 자식에 대한 약속과 함께 그 땅에 대한 약속 역시 이제 서서히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언약의 두 당사자도 서로 흡족해 하면서 서로 헤어집니다. 이 언약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새롭게 깨달은 바가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아,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는구나. 저런 이방인 ‘아비멜렉’을 통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구나. 그가 나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았구나.”
연습과 토의
1. ‘브엘세바’의 언약은 <아브라함 순환: 언약>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2. 이웃에게 그리스도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3. 그리스도인으로서 통합적 세계관을 갖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