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님의 기도 (1):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7:1-5약 10분 분량
아들을 영화롭게
(요 17:1-5)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기도문”은 주님의 기도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제자기도문”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는 주님께서 드렸던 기도가 아니라,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지에 관한 일종의 표준 기도문으로써,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참고. 마 6:9-13). 그런 점에서 <요한복음> 17장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주기도문”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을 향하여 긴 설교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이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와 간구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본문을 “대제사장의 기도”로 부르기도 합니다. 기도 내용의 대부분이 제자들과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아론’이나 선지자 ‘모세’의 모습이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명기>의 마지막 두 장은 각각 <모세의 노래>(32장)와 <모세의 기도>(33장)를 모아놓고 있는데, 이들은 ‘모세’의 고별 설교가 끝난 후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다락방 고별 설교도 축도와 기도와 예언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요한’ 화자가 예수님을 ‘모세’에 이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선지자로 그리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제자들을 향한 긴 고별 설교가 있은 후에, 그분은 이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와 간구를 시작합니다. 그분의 기도를 함께 따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참으로 대담하고 격정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가식(假飾)도 없으며, 정직하고, 숨김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오직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서만 있을 수 있는 대화답게 친밀하고, 단순합니다. 도대체 어떤 대화가 이와 같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면 나의 기도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먼저 구함. 아들은 아버지를 향하여, “마침내 그 때가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기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요한’ 화자를 통해서 이 “때”에 대해서 누누이 들어온 바 있습니다. 알다시피 <요한복음>에서 이 “때”는 이야기를 시작에서부터 절정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자 엔진과도 같은 기능을 해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그 의미를 결코 놓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 “때”를 “영광의 때”와 동일 시 하고 있습니다. 그 “때”를 “영광”과 결부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이 “영광” 또한 <요한복음>의 핵심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복음서의 핵심 단어들은 거의 대부분 책의 서막(序幕)에서 마치 폭죽 터지듯 등장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반론(反論)이나, 이의(異意)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먼저 언급하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1절하). “나의 영광”이 우선이며, 아들의 영광 없이는 아버지의 영광도 가능하지 않다는 듯한 태도입니다. 주님의 기도가 과연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요? 주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하라고 가르쳐주신 소위 주기도문과는 전혀 상반된 태도입니다. 주기도문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를 곤란하게 만드는 문제는 또 있습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기도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5절). 그분은 지금 어떤 영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천국에서 아버지와 누렸다는 아들의 영광은 과연 어떤 영광이었을까? 성육신 사건으로 천국에서 그분이 누리던 영광에 무슨 흠집이라도 생긴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이 땅에 계실 때의 예수님의 영광이 천국에서 누리던 예수님의 영광과 무슨 차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제자들이 보고 믿었다는 아들의 영광은 또 무슨 영광이라는 것인가?
그 혼인 잔치 이야기는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 제자들이 표적을 통해서 본 것은 아버지의 영광이었으며, 그렇기에 그들은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결론입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할까? 어떻게 아들이 한 때 누리던 아버지의 영광을 성육신 사건으로 내려놓았다가, 이처럼 표적 사건을 통해서 다시 찾아서 보여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 그분이 간구하고 있는 “아버지의 영광”은 도대체 어떤 영광이라는 말인가?
아버지의 영광.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헬라’ 단어, “영광”(dovxa, 독사)은 원래 어떤 “견해”나 “생각” 내지는 “평가”를 의미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의미가 영어 단어에 그대로 보존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올바른 생각”이나 “정통적인 견해”를 뜻하는 ‘오소독스’(orthodox)나, “다른 생각이나 견해”를 뜻하는 ‘헤테로독스’(heterodix), 그리고 “반대(상충)되는 견해”를 나타내는 ‘파라독스’(paradox) 등이 그것입니다. 이후 이 단어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어, “좋은 생각이나 견해” 즉 “칭송”(praise), “명예”, “명성” 등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왕이나 거룩한 존재에 대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다면, 의미하는 바는 당연히 그 존재가 지닌 어떤 궁극적인 속성이나 본질을 칭송하고 칭찬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노래가 그것입니다:
8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10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시 24:8, 10)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에게만 속한 고유한 속성이나 본질을 그대로 인정하고 평가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기도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4절).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그분은 자신이 하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제자들은 “아들의 영광”을 보았으며, 이는 곧 “아버지의 영광”을 보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아들을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온전히 간직하고 계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분의 기도를 들어봅시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5절). 성육신 이전에 아들이 누리던 영광과 지금 여기서 그분이 보여주고 있는 영광이 다르지 않고서야 어찌 이 같은 요청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영광의 회복. 예수님께서 창세전에 그분이 누리던 영광을 이해하기 위해서, 광복(光復)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광복이라 함은 말 그대로 “빛을 회복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광복절”이라 함은 대한민국의 빛을 회복한 날이라는 뜻입니다. 즉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을 회복한 날이라는 뜻입니다(이것은 단순히 해방(解放)과는 다른 것이라고 오래 전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의미를 예수님에게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에 거하셨던” 예수님께서 무엇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고,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로 지상에 계셨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갈릴리’ 주변을 걸어 다니실 때, 제자들이 보았던 그 모습과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순교 직전에 그 모습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스데반’이 과연 무엇을 보았다는 말일까? ‘스데반’을 죽이는데 참여했던 ‘바울’도 같은 경험을 했으니, 그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그는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행 9:3). 사실 그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냥 빛에 둘러 싸였을 뿐입니다. 누가 감히 빛을 볼 수 있을까!
<계시록>은 이 빛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계 1:13-16).
이게 과연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찬란한 빛에 대한 ‘히브리’적 표현일 뿐입니다.
누가 빛을 정면으로 마주 대할 수 있을까? <계시록>의 화자는 이렇게 에둘러 말합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계 1:17상). 감히 마주 볼 수조차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시내’산 정상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도 그 광채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거늘, ‘스데반’도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영광을 회복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어떻게 제대로 온전하게 묘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화자가 서막에서 그분을 “빛”으로 비유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아들이 간구하고 있는 그분의 영광도 바로 이와 같은 영광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회복의 전제. 이처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찬란한 영광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강렬하게 간구하고 있는 그분의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를 과연 온당하다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내 모습과는 정 반대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늘 이렇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더 오래 여기 머물게 하옵소서.”
한사코 여기를 떠나고 싶어 하는 그분의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일까? 작가 ‘필립 얀시’는 그의 책 <내가 알지 못하던 예수>에서 그분의 심정을 우주복을 입고 우주를 유영(遊泳)하는 우주인의 심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몇 년을 잠수함 안에서 근무하고 있는 잠수부의 심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학위와 연구를 위해서 수 년 간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보았던 나로서는 이 같은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때가 묻고 남루하며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이 땅에서 살아가야 했던 예수님의 심정을 말입니다. 그분은 지금 그 옷을 벗어 던지고, 눈부시게 빛나는 영광의 새 옷을 입고, 아버지가 앉아계신 그 영광의 자리에 함께 앉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심정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 반대입니다. 그분은 창세 이전의 그 영광을 회복하고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가 있다 하겠습니다. 기도의 근거는 이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4절).
그러니까 그분의 기도는 책임을 다 한 자 만이 구할 수 있는 당당하고도 당연한 권리 청원(請願)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요구는 무례하거나 오만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분의 요구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혼자만이 누리고 싶은 영광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5절하).
아버지 없는 아들이 있을 수 없고, 아들 없는 아버지 또한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아들이 영화롭게 되지 않고서는 아버지가 영광을 받을 수 없고, 아버지가 영광을 받지 못한다면 아들이 영광은 무의미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고백이자 선언입니다.
나도 이처럼 당당하고 확신에 찬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주님의 기도와 나의 기도가 불가분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수밖에 없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겠지요. 그분의 약속을 물고 늘어지면 되지 않을까? 주님께서 한 가지 비법을 우리에게 말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4).
이 약속이 믿기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나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내가 받은 선물을 당당하게, 담대하게, 때로는 건방지게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누려야 할 영광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