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6:28-33약 8분 분량
마침내 제자들은 선생님의 강의를 이해하게 된 것일까요? 거듭 강조하거니와 <다락방 강론>은 그 형식에 있어 아주 조악(粗惡)하다 하겠습니다. 대개의 경우 강의나 연설은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락방 강의에서 그와 같은 형식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해보입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제들이 여기저기 뒤섞여서 산발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 또한 강론의 일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본문을 읽다보면 주님의 강의는 이제 막바지 결론에 이른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들의 확신에 찬 탄성(歎聲)이 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29-30절).
마침내 사도들의 눈이 밝아진 것처럼 보입니다. 새벽이 찾아온 것이지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들이 지금 무엇을 믿게 되었다는 것인가요?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 즉 예수님의 신적 기원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답변인 즉은, 이제야 비로소 그들의 선생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게 된 데에는 예수님의 비유가 아니라, 평이하고도 직설적인 설명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참고. 29절). 직설적인 설명이란 이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28절).
하지만 이게 무어가 그렇게 새로웠을까? 그동안 선생님과 함께 지내면서 수없이 반복해서 들어왔을 내용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갑자기 이날따라 이 말씀이 새롭게 들렸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사도들은 그동안 무슨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녔단 말인가! 이 새로운 깨달음이 어디서 왔을까? 혼돈과 어둠과 공허 가운데서 전전긍긍하던 그들의 마음속으로 갑자기 한 줄기 섬광(閃光)이라도 비춘 것일까?
이제야 믿나이다. 사실 아무나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나 태도는 ‘니고데모’ 수준에 머무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인류가 본받을 만 한 위대한 스승 정도이지, 하나님의 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가 여러 스승 중의 한 사람은 될지언정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도들의 고백은 탁월하다 할 것입니다. 어디서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잠시 접어두고,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장면을 회고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한낱 낯선 ‘유대’인 남자에 불과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대화를 거듭할수록 여인의 태도는 달라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를 “메시아”로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대화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여인의 간증을 들어보지요: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4:29). 그렇습니다. 이 남자가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던 나의 과거지사(過去之事), 즉 나의 결혼 이력을 훤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다니엘’은 어떻습니까? 그 역시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 어디서 이런 믿음이 생긴 것일까요? 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1:50). 이 말씀은 ‘나다니엘’이 물어보고 싶었을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즉 “나에 대해서 어떻게 그토록 잘 알고 있는지요?”에 대한 답변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도들의 환호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들이 왜 환호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29-30절). 무슨 말씀인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마음속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분은 자신들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알고는 싶은데,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저 가슴 속에만 묻어두었던 것들을 먼저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어찌 이런 분을 하나님께서 보낸 자로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너희가 흩어지리라. 그런데 제자들의 이와 같은 판단에 예수님은 감동을 받았을까요?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당신은 하나님께서 보낸 자가 틀림없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얼마나 감동을 받았을까요? 그분께서는 마치 선문답을 하듯 ‘니고데모’를 향해 이렇게 대꾸하십니다: “당신은 거듭나야 해.” 일종의 동문서답인 셈입니다. 정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이런 식입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와 같은 판단 기준을 가지고서는 내 있는 자리로 한 발자국도 다가올 수 없어.” 전혀 감동을 받지 않았다는 인상입니다.
‘니고데모’는 과연 무슨 근거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자로 판단했을까요? ‘헬라’인은 지식을 구하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했으니, 그 역시 ‘메시아’에 걸 맞는 일련의 기준들을 마련해놓고 있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지금 이곳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니고데모’나 제자들에게나 공통적인 태도가 하나 있습니다. 즉 이런 것입니다: “내가 관찰해 보니, 내가 판단해 보니, 또는 내가 생각해 보니.”
과연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세상이 그리스도에 관한 일련의 규범이나 평가 기준을 마련해도 괜찮은 것일까? 정작 예수님 그분은 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실까? ‘요한’ 화자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23-25)
한 마디로, 세상이 어떤 기준을 어떻게 마련하든, 예수님 자신은 아무런 관심이나 흥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인생들의 환호에 우쭐해 할 것도 없고, 그들이 나를 버리고 떠났다 해서 좌절할 것도 없습니다. 제자들의 확신에 감동은커녕, 그 확신에 찬 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31-32절상).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뭐 이런 뜻이 아닐까요? “마침내 나를 믿게 되었다니! 착각은 자유일세. 자네들의 그 확신이 산산이 흩어지고, 너희 무리 또한 뿔뿔이 흩어지는 시간이 올 걸세.” 사도들은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선생님께서 <스가랴>를 인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눈치라도 챘을까요?: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 13:7).
그러므로 그 날이 현실로 닥쳤을 때, 사도들이 마침내 믿게 될 사실은, “내가 그토록 분명하게 여겼던 그 믿음, 확신에 찬 그 믿음이 실은 자기 과신(過信)이었거나 허세(虛勢)에 불과했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사도들이 혹시 숫자의 힘을 믿고 큰소리를 쳤던 것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혼자 있을 때보다 무리 속에 섞여 있을 때 나도 모르게 힘이 솟고 큰 소리가 나는 법이기도 하지요. 예컨대, ‘다윗’이 하나님께서 시키지도 않았던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도 왕국의 힘이 숫자에서 온다고 은연중에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심도 교회의 규모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수시로 홀로 있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홀로 있을 때의 내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이다.” 나는 왜 수시로 홀로 있을 필요가 있을까?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32절하).
내가 의도적으로 홀로 있기로 작정했든, 또는 타의로 홀로 내버려지게 되었든, 홀로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도 수시로 혼자 있기를 즐겨했고, 이제 곧 타의에 의해 홀로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분과 가장 가까이 계실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전에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 하셨느니라”(8:29).
역사적으로 영국이 한 때, 유럽 대륙으로부터 의도적인 분리와 고립 정책을 펼친 적이 있었는데, 이를 “명예의 고립” 또는 “영광의 고립”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치적 분쟁이나 전쟁의 위험에 빠지지 않고 국가의 안보와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나도 이처럼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평화 즉 ‘샬롬’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 있다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그 비결이란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명예의 고립”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33절).
제자들은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겠으나”, 홀로 남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넘어지겠으나, 곧바로 회복하여 일어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신뢰가 아닌 용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제자들에게 환난을 사도록 요구하겠으나, 주님은 그들에게 평안을 값없이 선물할 것입니다. ‘갈릴리’의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던 주님의 그 평안 말입니다. 주님의 평안은 가만히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평안은 싸워서 무찌르고, 쳐부수고, 이기고, 짓밟아서 쟁취하는 평안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얻는 평안입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하).
나는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을까요?
나의 칼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칼은 무엇일까요?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