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님의 기도 (2): 아들의 권세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7:1-2약 9분 분량
우리나라의 경우 대통령의 권한으로 임명할 수 있는 새로운 직위나 직책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가깝게는 비서실장에서부터 국무총리와 장ㆍ차관급 인사들, 기타 정부 각 부처 산하기관장에 이르기까지 무려 수천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들 중 중요한 직책들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청문회를 통해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후보자의 적격성(適格性) 여부를 심사하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청문회를 바라보는 일반 시민의 심정은 청문회를 왜 하나 싶을 정도입니다. 청문회를 통해서 드러나는 후보자들의 면면(面面)이 하나 같이 실망스럽기가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 대부분에게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는 과거 전력(前歷)이 있는 바, 위장 전입이나 탈세, 그리고 병역 관련 의문점들입니다. 청문회의 원래 취지가 해당 직책에 대한 전문성이나 신념과 철학 등을 알아보자는 것이었는데, 우리나라 청문회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오직 후보자의 전력과 비리(非理)를 캐내는 일이 주 임무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이런 전력을 가진 후보들이 어떻게 운 좋게 청문회를 통과하여 원하는 자리에 오른다 해도, 조직 구성원들에게 영(領)이 설 리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낙하산 인사의 경우에 더욱 심각합니다. 처음부터 정통성을 상실해 버렸으니, 새로운 사업은커녕 부하 직원들의 비위 맞추기에 더 급급하게 되어버립니다. 예컨대, 공기업의 사회의 통념을 벗어난 과도한 후생 복지 정책 남발(濫發)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니니, 남의 돈으로 인심이나 쓰자는 심사인지 모르겠습니다.
흔히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만, <성경>은 그 반대라고 말합니다. 자리를 주기 전에 먼저 그를 시험해 보라고 충고합니다. 전문성도 도덕성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가 어떤 조직을 맡게 되면, 조직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적으로도 큰 재앙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어물전 망신을 꼴뚜기가 시킨 꼴입니다. 반대로 전문성과 도덕성 및 책임감을 갖춘 지도자가 책임을 맡게 되면, 일차적으로 본인 자신이 큰 명성을 얻게 됨은 물론, 임명권자나 더 나아가 그 직분 자체에 대한 위엄(威嚴)과 권위(權威)가 세워질 것입니다.
예컨대, 장관은 법으로 보장된 권위와 책임을 적절하게 수행함으로써, 자신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당 부처(部處)와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의 권위를 세우고, 영화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사든, 장로든, 목사든, 자격을 갖춘 자가 맡을 때만이, 본인은 교회의 명예와 권위가 제대로 서게 됩니다. 본인도 교회도 하나님도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만유의 왕. 지금 성자(聖子)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구하고 있는 “아들의 영광”도 결국 그분이 받은 직분 내지는 권세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아들이 받은 영광스러운 직분은 과연 무엇입니까?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는, 다른 어떤 존재도 감히 감당하지 못하는 영광스러운 권세를 주셨습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가 그것입니다(2절). 다시 말하자면 아버지는 아들을 “만유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참고. 빌 2:9-11)!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선물입니다.
아버지의 선택은 과연 적절했습니까? 왕은 무엇보다 통치하는 자이며, 그 나라에 속한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 백성의 목숨도 왕의 것입니다. 왕은 백성의 목숨을 임의로 좌지우지(左之右之) 할 수 있습니다. 왕은 주인이며 백성은 노예입니다. 그러므로 백성이 왕을 위해 사는 것이지, 왕이 백성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에 이르러 자신들도 주변 왕국처럼 왕을 갖기를 원했을 때, ‘사무엘’이 한사코 이를 말린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인 이스라엘이 왕을 갖는 순간 왕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기에 한사코 말린 것입니다. 이점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라는 북한에서 과연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유의 왕, 그리스도는 이들 왕과는 다릅니다. 김정은과도 다릅니다. 군림하고 빼앗는 왕이 아니라, 섬기고 주는 왕입니다. 본문에서 “주다”(divdwmi, 디도미)라는 ‘헬라’ 단어가 이곳 2절에서 세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차이를 강조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권세를, 이제 아들은 세상 “만민”, 즉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2절).
영광의 직분. 아들이 나누어주려는 이 권세를 가지고 나누어주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오직 아들만이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영광스러운 권세란 무엇일까? 이곳에서 화자는 그 권세를 생명 즉 “영생”(永生)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왕을 달라는 이스라엘에게 ‘사무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충고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왕은 이웃 국가들의 왕과 달리 백성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주기 위해서 권세를 가지고 통치하는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이 선물은 아들이 누려야 할 권리이자, 행사해야 할 책임이기도 합니다. 만일 아들이 이를 제대로 행사한다면 아들과 아버지 모두에게 영광이 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아들과 아버지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1절과 2절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즉 아들이 만민(萬民)에게 줄 영생을 통해서 아들과 아버지가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그러니까 2절은 1절의 이유이자 근거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인과율(因果律)에 따르면,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따라서 서막(序幕)에서 이미 선언했던 바처럼, 세상의 생명은 생명 되시는 말씀 즉 아들로부터 와야 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참고. 1:4). <사도행전>에서도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 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윤리․도덕적으로나 전문성에 있어 이 아들을 능가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이름을 줄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아들이 곧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딘 가에 불을 붙이려면 다른 무엇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불씨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이 자격을 가진 자가 없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자격이 없는 자를 아들이라고 무턱대고 낙하산식으로 내려 보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요즘 우리나라에서 아들을 후임 목사로 세우는 교회가 많다고 하는데...).
은혜의 비극. 그런데 아들이 영생의 권세를 행사하는 방식이 아주 이상야릇합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2절). 아들이 만민을 다스리는 왕의 권력을 가졌으나, 그분의 생명을 나누어받을 자는 만민이 아니었습니다! 그중의 일부에게만 해당된다고 합니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 국한한다는 것입니다(강조를 위하여 밑줄로 표시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는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잔치에 모두 오라고 초청해놓고, 그 중 일부만 연회장에 들여보낸다? 무료입장이라고 해놓고 정작 입구에서는 입장권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기극(詐欺劇)입니다. 이게 전형적인 ‘슈퍼 갑(甲)’의 횡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밭에 숨겨둔 보화는 어떻습니까? 그 보화를 모두가 가져가기를 바란다면 그냥 아무데나 버려두면 될 일이지 굳이 땅 속에다 숨겨놓는 심보는 무어냐는 것입니다(참고. 마 13:44). 천국이 마치 복권 당첨되는 것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어쩌다 운 좋은 사람만 발견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과연 이것을 좋은 소식이라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슬픈 소식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혹자는 이 같은 역설을 두고, “은혜의 비극”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초청은 그야말로 공허한 초청으로 끝나버릴 것이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감히 누가 이 신비한 이중성(二重性)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은혜와 비극, 즉 선택(選擇)과 유기(遺棄)의 이중성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초청이나 선택은 우리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단어들이 아닐까?
나는 초청을 수락할 수도 있고, 반대로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도 그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나를 초청 인사에 포함시킵니다. 그러니까 초청은 늘 거절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초청은 초청이 아니라, 무슨 고지서(告知書)나 영장(令狀)이 될 것입니다. 고지서나 영장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초청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쪽을 선택하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누누이 들어왔던 터이지만,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요소가 있다면 바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J. Stott).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 하겠습니다.
최고 권력자의 문제는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 이상을 행사하려는데 있습니다. 왕이나 대통령은 법에 보장된 권력만 행사할 때 비로소 정의로운 지도자가 되는 법이지요. 이는 하나님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정 하나님 되기 위해서, 스스로를 제한하고 억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言約)이라는 틀 속에 자신을 구속(拘束)하고 제한하셨습니다. 언약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스스로 맹세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대하는 그분의 방식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제우스’가 아니라, ‘야훼’ 즉 언약의 하나님이며,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이 영생의 권세를 행사하는 방식도 일방통행 적이거나, 독재적이 아닙니다(우리는 이런 사람을 혐오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아무 조건 없이 주시지만, 강요하지 않습니다. 요즘 언어로 비유하자면, 그분은 ‘슈퍼 갑(甲)’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을(乙)인 것처럼 행동하십니다.
나의 권세. 적어도 아들의 편에서 보자면 그가 맡은 직분은 엄청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분에 넘치는 지위를 맡으라고 권할 때, 내가 갖게 되는 기분을 상상해 보면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예수님에게 분에 넘치는 직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만).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습니까?
나는 어떠합니까? 이 땅에서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일을 주신 적이 있을까?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내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리고 그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가 나에게 있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허풍을 떨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풀며, 무엇을 맨다는 것입니까? 가장 포괄적으로 이해하자면, 이것은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즉 “관계 맺기 말입니다. 제자 삼는 일이 그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고, 결혼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이웃을 섬기고 돕는 일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능력을 많이 상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왜일까? 교회만이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자꾸만 다른 일을 하려하기 때문은 아닐까? 윤리ㆍ도덕적으로 옳게 보이는 일을 놓고 세상과 경쟁하려하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도 할 수 있는 그 일을 교회가 가로채려하기 때문은 아닐까? 과연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