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님의 기도 (3): 영생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7:3약 8분 분량
2014년 대한민국의 4월은 그야말로 “잔인한 달”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 교회의 수난절은 지난 한 주간으로 끝이 났습니다만, 이 땅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어둡고 긴 고난의 터널은 그 끝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세월 호”의 충격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분노하고, 좌절하고, 수치스러워하고, 또 두려워하면서 대한민국의 민낯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이 문제의 원인을 찾기 바쁘고, 돌을 맞아야 할 누군가를 찾아 나섭니다. 선장(船長)과 승무원, 선주(船主)와 선사(船社), 학교와 교사, 정부와 국회, 공무원과 대통령이 바로 그들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향해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들을 던집니다.
도대체 모두들 왜 그랬을까? ‘요나’처럼 먼저 빠져 나온 선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와 같은 대재난(大災難) 앞에서 왜 모두들 허둥지둥, 우왕좌왕했던 것일까?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었을까? 재난 발생 시에 기댈 매뉴얼이 없었기 때문일까? 있기는 하나, 작정하고 실전(實戰)에 임하듯 제대로 된 훈련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훈련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훈련을 늘 다음으로 미루어두었기 때문일까? 아, 이 무슨 부질없는 질문! 이제 곧 모두들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말 것을.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듯…
이제 나는 이 문제를 영적(靈的)인 영역으로 옮겨오고자 합니다. 영적인 영역에서 나에게 닥치는 재난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과연 언제, 어떻게 찾아오는 것일까? 나는 지난 한 주간 침통하고 우울한 가운데, 이 문제들을 곰씹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세월 호” 침몰을 통해서 드러난 대한민국의 민낯이 실은 나 자신의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찬송가 “물 위에 생명 줄 던지어라”(500장)의 가사를 기억해 내며, 바로 내가 이 세상에서 “세월 호”의 선장 이 준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바다에서 “교회”라는 배를 타고 항해해 가고 있는 선장 말입니다.
선장은 배 안에 탄 모든 생명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선장의 존재 이유와, 보람과, 자랑과, 즐거움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는 이 일을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그가 만약 자신이 하는 일이 싫었다면 명예스러운 선장의 제복과 모자를 다 내팽개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처럼 엄청난 명예를 걷어찰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모든 국가마다 어느 누구도(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선장 석(席)이나 기장 석에 앉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선장이나 기장(機長)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과 영예와 기쁨은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 승객들이 표하는 감사의 인사말이어야 할 것입니다.
피 흘림 위에서. 세상의 선장인 나도 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누릴 수 없는 명예로운 특권과 소명이 나에게 있습니다. 세상에 생명을 전하고 지키는 것 말입니다. 세상의 끝 날까지 또는 내 항해가 끝나는 날까지 이 소명은 계속될 것입니다. 나는 생명 즉 영생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또한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 재난용 매뉴얼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나는 선장 이 준석 대신에 배를 몰았다는 왕초보 3등 항해사가 아닙니다. 주님은 그 재난이 어떤 형태로, 어떻게 올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익히 예언하신 바 있습니다(참고. 요 15:18-20, 25; 16:1-2, 20-22; 마 24).
그러나 정작 나는 항해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이 시대의 ‘요나’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세월 호” 선장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생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솔선수범하여 끝까지 책임지는 희생을 토양으로 해서 피어난 꽃과 같다고 말합니다(참고. 4절).
<히브리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하). 물론 이 피는 우리 주님의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17-19세기 영국이 제국(帝國)을 건설할 때, 뱃사람들에게 제 1원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배가 침몰하면 여자와 아이들을 가장 먼저 탈출시키고, 그래도 구명보트 자리가 남으면 남자들을 탈출시키고, 마지막에 선원들이 탈출한다고 합니다. 이 원칙을 어기면 그 자리에서 총살을 했고, 선원들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려 침몰하는 갑판에 정렬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 <타이타닉>을 통해서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갑판에 둘러앉아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를 연주하던 승무원들의 애절한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 영화에서 마지막까지 배를 지킨 선장은 “영국인답게 행동하라”(Be British)며 선원들을 격려했고, 침몰하는 배와 함께 선장과 선원은 전원 사망했습니다.
인간을 짐승과 구분 짓는 가장 뚜렷한 구분은 무엇일까? 금치산자(禁治産者)와 정상인을 구별하는 잣대는 무엇일까? 문명(文明)과 야만(野蠻)을 가르는 가장 뚜렷한 경계는 무엇일까? 책임감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에는 위기 때마다 종종 책임 있고 힘센 사람들이 먼저 도망치는 불명예스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6.25 전쟁 때 권력층 자녀는 피신가고 서민층 청년들이 전쟁터에 나가 싸웠다고 합니다. 지금도 고위 공직자 아들 중에 군대 면제 비율이 일반인 평균을 훨씬 웃돌고 있다 합니다. 어느 힘 있는 지방 실력자는 하루 5억 원짜리 황제 노역으로 감옥까지 면제 받을 뻔했습니다.
100년 전 영국 선원보다 못한 나라가 문명국임을 자부할 수 있을까? “세월 호”에서도 선장과 항해사, 기관사, 조타수가 일찌감치 떠나고 갓 입사한 말단 신참 박지영 양이 끝까지 배를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책임자들은 도망가고, 보호받아야 할 약자들이 줄줄이 희생되는 나라를 과연 문명국이라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마땅히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졌습니다. 주님은 복음을 진정 복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부활이 진정 모든 이의 부활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 책임을 다하셨던 것이지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하나님께서도 하실 수 없는 일들이 꽤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외람되지만 그분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그분의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지켜보는 것이 아닐까? 세상은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스스로를 구원해 보라고 조롱했습니다. 아무렴은 아들이 죽는데 어찌 아버지가 수수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아들은 물론 아버지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생명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잘못된 전제(前提)는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세상 즉 이스라엘은 아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 즉 자신들의 하나님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은 아니라”고 일축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야훼’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닙니까! 그들의 온 <성경>에 도배가 되다시피 한 이름이 아닙니까! 입만 열었다 하면 불러대던 이름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들이 정녕 알지도 못하는 신(神)의 이름을 불러댔다는 말이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대답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3절을 곰곰이 묵상해 봅시다. 이 구절의 강조점은 어디에 있을까? “유일하신 참 하나님”일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일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마치 폭죽 터지듯 최소한 열아홉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공관복음 전체적으로 12회 정도만 등장하고 있는) “영생”, 즉 구원은 바로 이 이름을 떠나서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는 것이 화자의 주장입니다(3절을 1-2절에 대한 괄호적인 설명이라고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단어는 단순히 지적(知的) 지식이나 정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는 안다고 하지 않고 “(무엇에) 관해서 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로 ‘헬라’적인 배경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적 배경에서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나 만남”입니다.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에게 자신은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했을 때, 이는 남자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되기. 피의 보상금으로 받은 재물은 함부로 쓸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천안 함 피격으로 전사한 장병들의 부모는 정부와 국민들이 보내준 보상금과 후원금을 모두 모아 재단을 만들어 사회 복지와 장학금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윤 중사의 어머니는 자신이 받은 보상금을 함대 기관총 만드는데 보태라고 해군에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이분들은 진정 피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 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 합니다. 예컨대, 지난 날 베트남이나 중동 열사(熱砂)의 땅에서 파월 장병으로 또는 근로자로 파견된 남편이 벌어 보내준 돈으로 흥청망청 다른 남자와 놀아나다 패가망신한 여자들도 많았습니다. 남편이나 지식이 흘린 피를 우습게 여겼던 것이지요.
나는 진정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것일까? 그분의 피의 보상으로 받은 영생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요나’나 이 준석 선장처럼 살아도 사는 것이 아는 비겁하고 한심한 도망자로 아까운 세월이나 축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생이 단지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영원한 생명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누려야 할 그 무엇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하).
오늘 이 잔인한 부활절을 맞아 내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해봅니다: “나는 진정 영생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가? 내가 받은 피 값을 거룩하고 고상한 곳에 사용하고 있는가? 그리하여 날로 그리스도가 되어가고 있는가?”
주님, 간절히 바라옵건대, 나를 이 깊은 어둠에서 구원하여 주셔서, 다시 한 번 독수리 날개 치듯 날아오르게 하소서. 다시 한 번 내게 주신 소명을 일깨워주시옵소서. 내게 주신 그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또 나누게 하옵소서.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되게 하소서. 나를 영화롭게 하셔서 주님을 또한 영화롭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