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도 잃지 않기를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7:11-16약 11분 분량
<다락방 강론>의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먼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기도로 시작하고 있습니다(참고. 1-5절). 그리고 제자들을 위한 기도가 이어지고 있는데, 구체적인 기도 내용에 앞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하여 다시 한 번 상기해 보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를 한다는 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는 마음과 같이 본능적인 것이라 무슨 이유를 찾을 필요가 있겠습니까만, 적어도 세 가지 이유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 주님은 제자들이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기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진정 사랑한다면 아버지의 소유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제자들을 바라볼 때마다 아버지 생각과 모습이 떠올랐나 봅니다.
둘째, 주님은 또한 제자들이 “나의 것”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제자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소유라는 말입니다.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내 것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신적인 기원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주님은 제자들이 그분을 “영화롭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사도들이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해주었을까? 무엇보다도 그들이 아들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들에게 영광이 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이들이 누군가 하면, 세속적 기준에서 보자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학벌이 높은 것도, 돈이 많은 것도, 언변이 유창한 것도, 성품이 고상한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구원의 대열에서 제외되어야 하거나, 대열 안에 포함시킨다 하더라도, 서열 상 가장 밑바닥에 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자들을 구원의 대열에 포함시켰다는 사실 자체가 그분에게 영광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지요.
만일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의 대열에 파묻혀 그냥 세월을 축내며 살아갔다면 영광은커녕 주님을 오히려 욕되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살았던 “구원 이후”의 삶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즉 이 사람들은 “주님의 것”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분신(分身)”으로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가리켜 청출어남(靑出於藍)이 될 자들이라고 예언하시기도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4:12).
성도의 견인. 이들 제자들을 위하여 아들이 아버지에게 드리는 첫 번째 간구는 무엇이었을까? 지금과 같은 상황, 즉 조금 후면 그토록 사랑하는 제자들을 두고 떠나야만 하는 시점에서, 이분이 드려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간구는 무엇이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별을 앞두고 나누는 인사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면 어렵잖게 대답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안위(安慰)와 안녕일 것입니다. 즉 제자들을 이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보전”하는 일, 즉 지키는 일입니다(11하, 12, 15절). 그렇습니다. 구원(救援)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들의 구원을 위한 기도라니요! 이상하게 들립니다. 이들이 다시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최근 “세월 호 대참사”로 속칭 “구원파”가 다시 한 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정확히 모르긴 해도, “구원파”는 구원(救援)에 관하여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주장만으로 볼 때, 구원파의 주장은 “구원파” 만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이는 ‘칼빈’의 오대 강령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파의 주장은 그 자체로서 지극히 성경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동안 여러 차례 그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그리고 이곳 다락방 강론에서도 어김없이 성도의 견인에 관한 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1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파의 주장이 문제가 되는 것은 “구원, 그 이후”에 관한 교리가 이단적이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들 교리에 관하여 설명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주님께서 드리는 중보의 기도는 분명 사도들의 “구원, 그 이후”에 관한 염려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구원이란 하나의 점(點)이 아니라 선(線)이구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 과정이로구나!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구나! 계곡에서 발원(發源)한 물이 시냇물을 만들고, 시냇물은 강을 만들고, 강은 바다를 이루듯 구원은 그렇게 흘러가는 물과 같은 것이구나. 바닷물이 역류하여 다시 계곡으로 되돌아올 수 없듯이, 구원도 그와 같은 것이로구나! 주님의 중보의 기도를 들으면서 이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와 같은 깨달음과 관련해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기도의 한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아버지”로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 복음서를 통 털어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부르고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호칭이 다소 어색하게 들리는 것은 양립하기에 어려운 두 단어가 나란히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과 “아버지”가 그것입니다.
“거룩함”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세상과는 분리된 그분의 “초월적”(超越的)이고 “타자적”(他者的)적 존재감입니다. 반편 “아버지”롤 통해서 드러나는 이미지는 친밀하고, 다정다감한 “내재적”(內在的)인 존재감입니다. 이와 같은 호칭은 하나님의 이중적 존재 방식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결국 예수님 자신의 존재 방식에 대한 자기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제자, 즉 교회의 존재 방식 역시 그러해야 함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중생활은 정말 어렵고 고통스럽습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을 초월해야 한다고 하니 말입니다. 눈은 위를 바라보고 있는데, 몸은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으니 정말 괴롭습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습니다만, 결혼생활에서 배우자 몰래 딴 살림 차려 사는 사람을 상상해 보면 그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늘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나를 볼 때, 늘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한 체 하는데, 실은 행동은 그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같은 자기모순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절규를 들어봅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2-25).
모순도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현실에서는 죄를 섬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해놓고 실은 받은 것이 아니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니 말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바울’의 이와 같은 장탄식(長歎息)은 그가 구원 받기 이전에 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모르긴 해도 속칭 “구원파”도 같은 주장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탓이 아닙니다. 그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그는 진정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처럼 자기모순을 똑똑히 인식할 수 있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인 것이지요. 세상이 그를 가만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으르렁 거리며 그를 유혹하고, 위협합니다. 영하(零下)의 겨울 바다로부터 구조된 사람을 육지에 그냥 올려다 놓는다 해서 살아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바다 속에 있을 때보다 더 빨리 얼어 죽어버릴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두면 그 다음부터 스스로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태어남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신 후에, 거듭났으니 이제부터 스스로 혼자 힘으로 살아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태어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말이지요. 끊임없는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아이를 키워 본 경험이 있는 세상의 모든 부모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장탄식 끝에 그냥 지나치듯 이렇게 말하는 곳이 있습니다: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상). 왜 감사할까? 그 유명한 답변이 곧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이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해를 위해서 두 구절의 순서를 바꾸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12절상);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절).
이 기도는 아들이 제자들을 세상에서 안전하게 지켰던 것처럼 아버지도 이들을 안전하게 지켜달라는 읍소(泣訴)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무슨 수로 이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까? 아들의 기도 속에 그 해답이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참담하게 들리겠습니다만, 이 기도는 마치 아버지가 그 방법에 대해서 모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들이 아버지에게 묘수(妙手) 하나를 일깨워드리고 있는 듯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지켰다! 바꾸어 말하자면,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했고, 그 지식으로 살아가게 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도 같은 방식대로 하시면 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내 기쁨을. 제자들이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아는 지식”으로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 아들이 떠난 후에도 동일한 지식으로 세상 속의 매일의 삶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간구일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과 대적하여 이김으로써 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탈출이 아니라, 대적(對敵)입니다. 즉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데려가 달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15절).
그리하여 예수님이 기대하는 세상 속에서의 제자들의 모습은 “기쁨”입니다. 승리의 기쁨이겠지요. 그것도 그냥 기쁨이 아니라, “나의 기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13절). 이전에 “평안”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단순한 평안이 아니라 “나의 평안”을 준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14:27).
세상이나 우리 스스로가 기대하는 교회의 모습은 흔히 사랑이나, 거룩함이나, 일치와 연합 등일 것일 텐데, 주님께서 교회로부터 “기쁨”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사실 <신약>은 “기쁨”의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약> 속에 이 단어가 “기뻐하다”(caivrw)는 동사형으로 72번, “기쁨”(cara)이라는 명사형으로 60번이나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 합니다. 특히 이 단어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교회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터져나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주변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환경”(環境)은 문자 그대로 “빙 둘러싸고 있는 경관(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이 환경을 돌아보았을 때 무엇이 보였을까? 부활하신 주님이 모습? 아닙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환경 즉 세상 속에서 주님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다는 말이겠지요. <성경>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합니다(참고. 고후 4:18).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그렇다면 어디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 지금 주님께서 “나의 기쁨”을 강조하고 계심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 즉 환경을 돌아보면 기뻐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컨대, “세월 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에서 “기쁨”이라는 단어는 완전히 실종되어버린 느낌입니다. 공공장소나 대중 집회나 예배 시에 어느 누구도 “기뻐하라”고 권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랬다간 대중의 뭇매를 맞을 것이 뻔합니다. 위로를 말할지언정 기쁨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나서서, “이제 그만 되었으니 기뻐하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말하는 순간 그는 공공(公共)의 적(敵)이 될 것이 뻔합니다. 아직도 실종자를 다 찾지도 못한 상황에서 말이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나(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참고. 살전 5:16-18).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나의 기쁨”을 세상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내 속에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밖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내 안에서 나와 끊임없이 교제하면서, 그분의 기쁨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교회가 있는 이유도, 교회가 살아갈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