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새로운 성전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2:13-17약 7분 분량

“기적”과 “표적”의 관계는 <가나의 잔치>에서 보듯이, 각기 수단과 목적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목적은 하나이겠습니다만, 그것을 이루는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의 행동 즉 “성전 숙정(肅靜)”은 기적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곳에서 드러나는 표적은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담론(談論) 즉 대화를 통해서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성전 숙정” 사건은 그 자체로서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뒤이은 예수님의 설명을 통해서, <복음서>의 주제가 드러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주제란 다름 아닌 “기독론”, 즉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인가?”입니다.
1. 포도주와 채찍
결혼식은 엄숙한 언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흥겨운 잔치이기도 합니다. “가나의 잔치”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맛보기 위해서 오늘날의 예식장 결혼을 떠올린다면, 과녁은 완전히 빗나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전통적인 결혼 풍습을 그려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필자는 나름대로 “가나의 잔치”를 한 번 그려보았습니다.
마당 여기저기에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축하객들이 둘러앉아 먹고, 마시고, 떠들고, 노래하며,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철판 양구이가 등장하고, 주거니 받거니 포도주가 오가며, 신랑 친구들은 신랑 다리 거꾸로 매달아 놓고 즐거워하고 있고, 또 한 편에서는 어디서 빌어 왔는지 속칭 ‘가라오께’를 틀어놓고 신나는 노래 한 마당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필자 또래의 연배라면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노래들, “돌아와요 부산항”, “소양강 처녀”,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이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비틀거리며 예수님에게 다가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뭔가 이야기를 건네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이 예수님, 당신 말이야... 끄으윽.” 이거 큰 일 내겠습니다.
그런대도 손님들은 도무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포도주가 다 떨어져가면서 속 타는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님도 주인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여흥 속에 파묻히고 맙니다. 본인도 취했으니 주인의 걱정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잔치를 일주일씩이나 치렀다고 하니 과연 멋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예배는 어떻습니까? 예배는 제사이기도 하지만 축제입니다. 신나게 노래 부르고 춤추는 잔치입니다. 박수치고 흔들고 하는 축제 한 마당인 것이지요. 말씀의 선포와 회개의 눈물이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용서의 감격이 있고, 결단과 헌신의 간증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라면 예배가 끝이 났는데도 사람들이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웁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아무에게도 말 못한 간증 거리를 나누느라고 말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멋진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지금 유월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고 있는 예배는 어떤 모습입니까? 눈을 감고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완전히 아수라(阿修羅)장입니다. 비둘기, 염소, 양들이 울어대는 소리, 여기저기 어지럽게 늘려있는 짐승들의 배설물, 이들 희생 제물들을 한 푼이라도 싸게 사기 위해 열심히 흥정하고 있는 모습, 환전상인들, 그리고 이 모든 소요와 어지러움 뒤에서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에 침을 튀기며 돈을 세고 있는 ‘사두개’인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 여기에 왜 와있는지, 그리고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유도 알지 못하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관행일 따름입니다. 외견 상 이 장면은 “가나의 잔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마치 그 잔치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아직 술이 덜 깬 상태로 다음 날 성전에 예배드리러 모여든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까? 지난 밤 마시다 남은 포도주를 여기까지 들고 와서 계속 마시고 있습니까? 얼굴은 여전히 홍조를 띄고 있고, 입에서는 술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까?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고,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를 노래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금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고 있습니다. 지난 밤 느긋하게 손님들과 정답게 환담을 나누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팔소매 걷어붙이고, 두 눈 부릅뜨고, 채찍 휘두르며, 포효하고 있습니다. 술이 확 깨는 장면입니다. 상들은 엎어지고, 짐승들은 놀라 달아나고, 잡상인들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며 성전을 빠져나갑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정신이 버쩍 들었을 사람들이 있었을 터인즉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내심으로, “야, 이거 호락호락하신 분이 아니구나. 말랑말랑한 분인 줄 알았더니, 앞으로 공과 사를 좀 구별해야겠구나.”
우리가 예수님을 연상할 때마다 두 가지 극단적인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하나는 아주 유순하고, 얌전하여 사람들과 좀처럼 논쟁을 벌이지 않는 화해주의자로서의 예수님입니다. 그는 진정 상한 갈대도 꺾지 않는 자상하고 인정 많은 분이십니다. 그 자신 모든 시험과 고통을 겪으신 관계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히 4:15). 우리가 아무리 잘못해도 그저 초지일관 “오냐, 오냐” 하십니다. 대개 이러다가 사람들은 할아버지 무릎 위에 앉아 수염 뽑는 못된 망나니처럼 되어갑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기도를 드릴 때에도 자는 듯, 꿈꾸는 듯, 의식 몽롱합니다.
또 다른 극단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아주 엄격하고, 까다로운 분입니다. 허점이 없습니다. 웃거나 농담을 하는 법도 없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준 일이 없으니, 피해를 입는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피해를 받을 경우 법적 대응도 불사할 각오입니다. 기도와 성경공부는 하루도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이처럼 늘 성난 예수님을 연상하는 순진한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습니다만, ‘바클레이’(W. Barclay)는 본문의 제목을 “성난 예수”로 삼고 있습니다.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예수님에 대한 수식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만, 본문의 신학적 주제를 잘 파악한 제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평소 예수님을 어떻게 대합니까? 늘 의식 몽롱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그분과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을 정도로 진지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닙니까? 술에 취해 있을 때가 깨어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많다 할지라도, 적어도 깨어있을 때만큼은 맑고 진지한 자세로 예수님과 대화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안드레’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진지한 태도 때문에, 예수님과의 단 한 번의 대화로 임자를 알아보았고, 극적인 인생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전도서>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전 3:1)고 말합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전 3:2). 그리고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습니다(전 3:8).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을 이토록 격노하게 만들었습니까? 다른 분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성전에서 이처럼 혈기를 부려도 괜찮은 것입니까? 이처럼 발작에 가까운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아덴’의 신전에서 예수님처럼 발작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행 17:16). 두 사람이 보여주고 있는 발작에 가까운 분노는 그 동기가 “사랑”이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 말입니다.
선교의 진정한 동기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즉 하나님을 위한 질투와 열심 때문입니다. 선교의 동기도 바로 이런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17절). 바로 이 열심 때문에 주님은 채찍을 들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참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지금 몰아내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성전일까? 예배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이들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세우고 완성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새로운 성전, 새로운 예배, 온전한 성전, 온전한 예배를 세우기 위해서 그분은 오신 것입니다. 빛이 몰아내고 있는 어두움은 모든 “유대주의적 패러다임”입니다. 즉 종교라고 하는 제도와 관습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위선과 거짓들입니다.
그리고 새로 세워야 할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그분의 육체 즉 그분 자신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말하는 것이라”(19, 21절). ‘유대’인들에게 성전이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듯이, 우리에게도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성전 외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었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을 만날 방법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새 성전은 어디 있습니까? 내가 곧 성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그리고 내가 허물어야 할 옛 성전은 무엇입니까? 나를 시기하게 하고 질투 나게 하며 분노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