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새로운 탄생(1):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2:23-25약 6분 분량
사람 속에 있는 것
문학과 역사
흔히 “니고데모 강론”(the Nicodemus discourse)로 잘 알려진 본문에서 강론의 실질적인 내용은 3:1-21에 국한할 수 있습니다만, 일견 주제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내용이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서론(2:23-25)
침례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3:22-36)
서론은 일종의 배경설명으로서, 마치 2:1이 1장과 2장의 다리 역할을 했던 것처럼, 2장과 3장을 연결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서론>은 “니고데모 강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3장은 예수님과 예수님 간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대화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는 12절에서 끝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13-21절은 그 양식에 있어 일종의 묵상으로서, 그 내용은 “인자”와(13절), 그의 “죽음과 부활”(14-15절),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복음의 축복”(16절)과,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복음의 저주”(17-21절)에 대한 선언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사람 속에 있는 것
우리나라 영화중에 <좋은 놈, 나쁜 놈, 추한 놈>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오래 전에 ‘헐리웃’에서 만든 영화 <The good, the bad, the ugly>에서 그 모티브를 따온 것 같은데, 아무튼 두 영화 모두에서 세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하여 제목에서 드러나고 있는 역할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의 믿음에도 “좋은 믿음, 나쁜 믿음, 추한 믿음”이 있을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믿음”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에 대한 반응이라고 한다면, 화자는 그동안 세 번에 걸쳐 “표적”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첫 번째 표적은 “가나의 잔치”에서 보여주신 “포도주의 표적”입니다. 비록 이 표적을 그날 잔치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처 알아채지도 못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를 알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은 또 다른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채찍의 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화를 내며 그가 무슨 권위를 이런 행동을 하는지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23절).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표적”에 대하여 여러 가지 다른 반응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의 “믿음”에서부터, ‘예루살렘’ 사람이 보여주고 있는 “믿음”,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전적인 불신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수준이나 정도가 다양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에도 “좋은 믿음”이 있는가 하면 “나쁜 믿음” 내지는 “추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어떤 믿음이 “나쁜 믿음” 또는 “추한 믿음”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의 믿음일 것입니다. 왜 그럴까?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라”(24-25절).
사람의 마음. 하나님이 사람의 속을 들여다볼 때 무엇이 보일까?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분명하게 해두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속을 아신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우리가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바와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듯이,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끔찍한 연쇄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서 그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평소에는 아주 조용하고 선한 이웃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처럼 끔찍한 일을 저지를 줄 전혀 몰랐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 한 은행 직원이 회사 돈 수백억을 횡령하여 국외로 도피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가족 모두를 내팽개치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평소 그는 아주 착실하고 근면한 사원으로서 주변 사람들과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내 주변에서 비일비재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수없이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한 결 같은 한탄을 쏟아냅니다: “저 친구 정말 그럴 줄 몰랐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정말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외는 아무도 사람의 속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생각을 살피시며(롬 8:27),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행 15:8).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우리와 다른 그림을 그리신다 해서 전혀 놀랄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란 고작해야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뿌연 형체 정도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실 때 실제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성경>이 대해서 어떻게 답하고 있는지를 알면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와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29-32)
마음의 행로. 정말 우울하고 음침한 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우리는 그 대답을 모르지 않습니다. 멀리 <에덴 이야기>까지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주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6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28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주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 24, 26, 28)
사도는 사태가 얼마나 심각하다고 판단했던지 준엄한 하나님의 포기 결정을 세 번에 걸쳐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결정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절대적 자유의지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우리 편에서 보자면 전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그렇습니다. 소극적 직무태만에 이은 적극적 범죄의 결과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찾아서 하게 된다는 역사적 교훈입니다.
십자가의 표적. 바로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예수님은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오늘 하나님께서 나와 여러분을 통해서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내 속이 정말 이럴까? 내가 정말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새삼스럽게 놀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표적 믿음”은 과연 “나쁜 믿음”일까? 나쁘다거나 추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믿음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의 능력을 단순히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것은 단지 각성의 문제가 아니라, “중생” 즉 “거듭남”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단지 새로운 시각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중생”은 개인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선물이자 은혜인 것입니다. 아무도 스스로를 태어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입니다. 나의 “믿음”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과연 그분은 나의 믿음에 대해서 뭐라 하실까요?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