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맹인과 그리스도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2:3약 8분 분량
(요 1-7절)
‘요한’ 화자는 기적 이야기를 들려줄 때, 항상 그 이야기의 배경부터 상세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 이야기를 읽어갈 때, 각 이야기의 배경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적인 핵심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절망”이라는 단어입니다: 흥겨운 잔치 중간에 포도주가 다 떨어져버린 혼주(婚主)의 절망(2:3), 아들이 병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왕의 신하인 아버지의 절망(4:47), 38년을 속수무책 앉은뱅이로 살아가고 있는 한 병자의 절망(5:5), 먹을 것이라고는 오직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는 오천 명이 넘는 무리의 절망(6:9),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밤중 갈릴리 호수 위에서 요동치는 고기잡이 배 안에 갇혀 떨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절망감(6:16-19).
화자는 이야기의 정말적인 배경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보조 장치도 함께 도입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그날이 흥겨운 잔치자리였다든지, 안식일이었다든지, 그곳이 ‘예루살렘’ 성전 이었다든지, ‘유대’인의 명절이었다는 등의 대조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왜 이렇게 하고 있는지 의도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종교나, 성전이나, 종교인들이 그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깨뜨리고 변화시키는데 있어 얼마나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며, 무관심한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입니다.
맹인과 제자와 이웃들. 여기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의 상황은 절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가 아닌가요? 이 사람은 영화 <블랙>의 여주인공 ‘미셀’의 처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미셀’ 역시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요, 벙어리요, 귀머거리였습니다.
왜 이 두 사람에게 절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당치 않은가? 두 사람은 절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예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정상인으로 태어났으나 나중에 시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빛과 어두움이 무엇인지 구별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본능적으로 원하는 것을 먼저 구하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이 맹인이 가장 절실하게 원했던 것은 아마 衣食住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평하는지 보면 알 것입니다: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8절하). 그의 부모가 버젓이 살아있었는데 왜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만, 아무튼 그는 시력(視力)을 구했던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구했던 것입니다. 태어난 후 그날까지 계속해서 그런 상태로 살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점에서 완벽한 맹인이었으며, 그의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이웃은 그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시켜주는데 무슨 도움이라고 되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부모도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데, 이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웃에게 그는 거지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먹을 것만을 던져주면 그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맹인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줄 힘도, 관심도 없었다 해야 할 것입니다. 맹인의 처지는 이들 이웃 때문에 더욱 절망적으로 비취는 것입니다. 곁에 누군가 있으되, 있으나 마나 한 상황이야말로 절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이들은 한 술 더 떠서, 맹인을 아예 죄인 취급하고 있습니다: “랍비며,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절). 도움을 줄 수 없다면 그것으로 지나치면 그만일 것을 왜 멀쩡한 사람 죄인 취급하는 심사는 또 무엇인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하기야 이 사람들 지난 번 ‘사마리아’에서도 비슷한 행태를 보인 바 있습니다. 당시 그들 곁으로 한 여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도 짐짓 모른 체 하며 그냥 스쳐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늘의 눈에 그 여인도 필경 죄인으로 비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나 이 맹인에게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도움은커녕 절망감만 더해줄 뿐입니다.
기왕 제자들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그냥 덮어두고 넘어갈 수는 없을 듯합니다. 화자 역시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서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합니다. 하나는 질문의 내용과 관련해서입니다. 이들의 질문인 즉은 인생의 고통이나 질병의 원인과 의미에 대해서 알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우리 모두의 인식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고통과 질곡을 죄와 연관 지으려 합니다. 예컨대, “내가 죄가 많아 내 자식들이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식 말입니다. 세상만사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관점에서 바라보려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욥’의 세 친구들처럼, 이 세상에서 우연이란 절대 일어날 수가 없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많은 일들이 마치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도 크게 죄악 된 사고는 아닐 것이라고 <성경>은 지지하고 있는 듯합니다(룻 2:3; 4:1).
또 다른 하나는 질문자들의 태도와 관련한 것입니다. 화자가 고발하고 있는 제자들의 태도란 과연 무엇입니까? 뭐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질병의 원인에 대해서 한가하게 신학적 논쟁이나 하고 있을 때인가? 그 시간에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그를 도울 생각은 왜 하지 않는 것인가? 자기들이 할 수 없다면 선생님에게 이 사람을 고쳐줄 수 없느냐고 사정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명색이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유대’ 공동체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정녕 애통해하면서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교회는 없는 것인가? 정녕 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의 이웃도, ‘예루살렘’ 성전도, 예수 공동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냥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맹인과 그리스도. 절망은 우주의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태초의 그 혼돈과 무기력으로 되돌려놓으려 합니다. 절망의 아들은 자포자기(自暴自棄)입니다. 누가 이 절망과 허무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 절망을 이기려고 감히 시도라도 해 보겠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이 맹인 이야기를 앞선 장면과 나란히 다시 한 번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절망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절망으로 성전(聖殿)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의 집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가장(家長)이 가출(家出)을 해버린 것이지요. 아내와 자식들을 내버렸습니다. 바야흐로 “세상의 빛”이 낙조(落照)처럼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이 맹인을 지나치게 됩니다. 아닙니다. 지나친 것이 아니라 그 맹인 앞에 섰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보았고 그리고 섰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처럼 이 만남도 그야말로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우연의 조우(遭遇)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이번에는 도망가는 신세입니다. 절망과 허무와 배신감을 안고 피해 달아다는 상황입니다. “내가 다시는 주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겠노라”하며 숨어버린 선지자 ‘예레미야’가 처했던 그 상황입니다(참고. 렘 20:9).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 앞에서 멈추어 섭니다! 할렐루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까? “그 어떠한 절망도 하나님을 좌절시킬 수는 없다.” 그 절망이 ‘바리새’인들의 미움과 배척 때문이었건, 제자들과 이웃의 무관심 때문이었건, 맹인의 상태가 어떠했든, 하나님의 계획과 관심을 좌절시킬 수는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주의 블랙홀과도 같은 강력한 흑암의 세력이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삼킬 수는 없다는 선언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누구를 버리고 누구를 취하시는가? 왜 성전과 ‘바리새’인들은 내버리면서 보잘 것 없는 한 맹인은 구하시는가? 무엇이 필요한지 조차 알지도 못하는 이 맹인, 예수가 누군지 알지도, 찾지도 않았던 이 맹인을 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무어라 말합니까?
15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 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지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5-16, 18)
오직 하나님의 ‘헤세드’, 즉 그분의 긍휼만이 그 답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질병의 원인이나 의미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있다면 맹인의 고난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히 4:15)
‘헤세드’는 늘 행동을 수반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고난에 대한 값싼 처방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것이니 잘 참고 견뎌내야 한다는 식의 처방 말입니다. 이와 같은 처방은 아주 경건하게 들리지만, 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물론 고난이나 질병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것들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것이라 생각하고, 고난의 의미나 목적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 자체가 실은 고난의 연속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열자(列子)는 “인생에서 고통을 빼고 나면 남는 시간이 과연 얼마인가”라고 묻습니다. 석가도 사해(四海) 중에서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욥’도 “인생은 고난 가운데 났나니 불티가 날음과 같다”고 장탄식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사실은 그 모든 고난 중에서, 내가 “하나님,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절규할 때야 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서 나와 함께 절규하고 계신다는 믿음일 것입니다. 오늘 이 맹인이 겪게 될 기적도 결국 그의 믿음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관심어린 ‘헤세드’의 징표로 기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하).
이 맹인은 실은 “내 버린 자”의 상징입니다. 절망의 상징입니다. 가족도, 이웃도, 교회도, 목회자도 거절하고 돌보지 않은 자입니다. 안동 우리 집에 살고 있는 식구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로 행운아였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만나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그의 인생은 이제 180도 달라질 것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빛만 보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나도 이전에 맹인이었습니다. 그 때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내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절망과 무기력과 무의미의 늪에서 벗어나, 활기차고 목적 있는 삶을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