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부전자전(父傳子傳)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8:37-47약 8분 분량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두고 종종 “태생적인 한계” 때문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사실 태생적 한계는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O 型”의 피를 가진 부모 사이에서 탄생하는 자녀들은 모두 “O 型”의 피만 가지게 됩니다. 다른 혈액형은 결코 나올 수가 없습니다. “멘델의 법칙”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가 행한 완두콩 실험과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네 선조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경험을 통해서 ‘멘델’의 “유전 법칙”(遺傳法則)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이 금언을 일반화 한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요? 개는 개를 낳고, 원숭이는 원숭이를 낳으며, 사람은 사람을 낳는다. 이것은 과학이고 원리 선언입니다. 간혹 백인 부모 사이에서 흑인이 탄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전히 그 자식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기왕에 “유전 법칙” 이야기가 나왔으니 태생과 관련한 또 다른 우리네 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 즉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속담이 그것입니다. 이 속담에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가 베여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엄연한 과학적 사실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환경의 영향이나 지배를 받는 것이 사실이나, 유전적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본인도 나이 들어가면서 내 모습이나 기질이 어쩌면 이전의 내 부모님을 그토록 빼닮았을까 하고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모습이나 체질이나 기질이 그러하다면 행동 방식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행동이란 결국 체질이나 기질이 바깥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한 것이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에 있었던 한 밤중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그가 신학이나 종교적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가진 그 모든 지식과 종교적 체험과 이성적 판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자격 목록을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런 저런 자격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혼자만의 신념이 아니라 ‘유대’인 모두의 신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그런 신념을 가지고서는 단 한 발자국도 자기에게 다가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니고데모’의 태생적 한계가 있습니다. 즉 ‘유대’인이라고 하는 태생적 한계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가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즉 신앙이나 불신은 지식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태생의 문제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즉 “거듭남”이 그 대답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거듭남”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만, 우리는 ‘니고데모’에게 잘못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믿는 바에 지극히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그는 진정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에서 모순(矛盾)을 팔던 상인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을 팔면서, 동시에 세상의 어떤 창도 막을 수 있는 창도 가지고 있다고 광고해대는 사기꾼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모순의 자식들. 그러나 지금 예수님과 맞붙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이들 ‘유대’인들은 그와 같은 “창과 방패”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합니다. 안타깝게도 스스로를 기만(欺瞞)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믿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모든 축복들도 자신들의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칭송을 들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창 15:6). 자신들 역시 그러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첫 반응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과 행동이 초(楚)나라 상인의 “창과 방패”와 같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스스로 종교인이라고 말은 하면서, 살의(殺意)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를 잡아 죽일 궁리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믿으나 하나님의 아들은 잡아 죽여야겠다는 것입니다. 모순도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누가 언제 물어보아도 나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나 역시 이들 ‘유대’인들처럼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그렇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될 법한 일입니까?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써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나의 이율배반적이고 자기모순적인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은 너무 쉽습니다. 당시에도 예수님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도 내가 그분을 내 속에서 지우고, 없애버려도 그분은 아무 말씀도 없습니다. 그냥 그분은 묵묵히 당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매일처럼 죽이고 또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주장들마저 부인하고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철석같이 믿는다고 말합니다. <사도신경>을 앵무새처럼 암송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분의 말씀이 내 속에 거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에 거하는 가장 일차적이고 초보적인 단계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다음으로 삶의 현장에서 그 말씀을 살아내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중요한 결정이나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마다, 행동의 지표로 삼아야 할 기억나는 말씀이 없습니다.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선 칼처럼 내 혼과 영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주어야” 할 텐데, 불신자의 영혼은 고사하고 내 영혼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리트머스 테스트” 하나 해 봅시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금언은 <성경>의 어느 책에 등장하고 있습니까? 내가 증오와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때, 떠올려야 할 그분의 말씀은 무엇이며,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대형교회의 비리와 부조리를 질타하고 있는 소형교회 교인이 기억해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 사회적 대 재난이나 참사가 있을 때마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원성과 저주를 퍼부어대기를 좋아하는 대한민국 시민이 기억해야 할 말씀은 무엇일까요?
이들 질문에 단 하나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면 과연 나는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주장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고 항변한다면, 그런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 하였느니라”(39-40절).
이들이 ‘아브라함’을 닮지 않았다면, 그들의 아버지는 누구라는 말입니까? 이들과 함께 예수를 죽이고 없애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나는 또한 누구의 자식입니까?
마귀의 자식들. 진실은 때로 참혹하고, 불편하며, 고통스럽습니다. 예수께서 드러내는 진실인 즉은 이들 반대자들의 행동이 실은 전혀 모순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반대자들의 생각, 즉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아버지라는 생각은 다만 착각일 뿐이며, 실은 다른 아버지의 자식들이라는 진단입니다. 다른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니 당연히 그 아버지의 기질과 행태를 따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이고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44절상).
부전자전이라는 것이지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연한 인과율(因果律)입니다. 마귀는 어떤 존재일까? 예수님은 그에게 두 가지 타이틀을 헌정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살인의 원조”이며 다른 하나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즉 그의 이름은 “살인자”요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적절한 타이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이름은 곧 그의 인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의 아비”로서 마귀의 가장 탁월한 전술 중의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하나님과 대등한 지식과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치명적인 전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존재 자체를 아예 믿지 않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자식에게 “네 아버지는 원래부터 없다”고 가르치겠습니까! 그런대 마귀는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마귀는 역사와 현실 속에서 실재하는 인격체가 아니라, 단지 상상 속의 가공적인 인물일 뿐이라고 믿게 만듭니다: “마귀 따위는 없어!”
그래서일까요? ‘가롯 유다’는 마귀가 자기 속에 들어와 예수를 팔아넘기도록 꾀었다는 사실을 잘 분간하지 못했습니다(13:27).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교회에 내는 헌금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도록 부추긴 자가 마귀인 줄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행 5:3). 마귀는 ‘가인’의 분노와 질투를 적절히 활용하여 동생 ‘아벨’을 죽이도록 유도했습니다(창 4:7-8). ‘에덴’ 동산에서 ‘하와’는 자기가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해주는 주가 마귀가 아니라 뱀인 줄로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창 3:4, 13). 이스라엘의 왕 ‘아합’도 선지자 ‘미가야’의 말을 듣지 않고, ‘시리아’와의 전쟁에 나가 결국 ‘길르앗 라못’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에도, 마귀 때문이었음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왕상 22:21-23).
안타깝게도 그날 초막절에 모여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모의하던 그 무리들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오래된 마귀는 오늘 지금도 여전히 살아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는 누가 뭐라 해도 ‘아브라함’의 자식이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란 말이지. 그러니 어떻게 말할까, 어떻게 행할까 개의치 말게나. 그냥 마음가는대로 하게나. 어차피 영생은 따 놓은 당상이니 말일세.”
두 본성. 과연 그럴까요? 만일 이 말이 거짓으로 들린다면 나는 ‘사탄’의 음성을 인식하고 분별할 줄 아는 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났다 해서 옛 본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로 하여금 성령의 본성과 싸우게 합니다. 더욱 거세게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곤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 적어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진단만 내릴 뿐 처방은 없습니다. 해답은 당신의 몫입니다! 다음 설교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