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진리와 사랑과 자유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8:30-36약 10분 분량
이 단락에서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膾炙)되는 <성경>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2절).
이 구절이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는 “자유”에 관한 선언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는 모든 인류가 가장 받고 싶고 누리고 싶은 선물 목록 제 일 번입니다. 신체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가난과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외세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표현과 결사의 자유, 사업이나 연구에 있어서의 자유, 시험으로부터의 자유 등. 역설적으로 어느 누구도 자유에 대한 욕구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자유에 대한 간절한 욕구는 우리 모두 무엇인가에 구속(拘束)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폭군이 과연 누구인지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 없을 때조차도 좌절이나, 불만이나, 불편함 때문에 괴로워할 때가 많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억압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싶습니다. 할리우드에서 만드는 거의 모든 영화의 주제도 자유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존 스토트’ 목사님은,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복음을 자유라는 용어로 제시하는 것”이라고까지 했겠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예수님도 공적 사역을 처음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한 주제가 바로 자유였습니다: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바울’ 사도 역시 “그리스도의 자유”에 대해서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이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주저하거나, 힘들어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유는 <성경>이 약속하는 위대한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존 스토트’ 목사님의 제안대로, 오늘날 복음이나 구원에 대해서 막연한 불편함이나 거북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자유”라는 단어로 다가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과연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을까? 지나치게 좁은 의미로만 사용해 왔던 것은 아닐까? 그런 감이 없지 않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우리가 그동안 이 단어를 너무 좁은 의미로만 사용해 왔다고 지적하고, 아주 포괄적으로 새롭게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유에는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자유-해방과 탈출.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는 우리가 이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것입니다. 즉 해방과 탈출입니다. “구속(拘束)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지요. 예컨대, 대한민국이 일제 36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얻은 것이 바로 이 자유입니다. 광복절은 바로 이 자유를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유월절도 그러합니다. ‘이집트’의 구속으로부터 해방과 탈출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이제 우리의 눈을 영적인 영역으로 확대해 봅시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이집트’의 ‘바로’ 왕, 즉 구속자(拘束者)는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죄”(Sin)와 그로 인한 죄책감이라는 데 이의(異意)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죄를 의인화(擬人化)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11).
우리는 죄인들일 뿐만 아니라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며, 우리의 양심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얼굴을 붉히는 유일한 동물이며,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비와 죄 사함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물론 다른 사람마저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두 사람은 나무 뒤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나무 뒤에 숨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붕 위에 올라가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유(용서)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4)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사 그의 아들의 모습으로 내가 사는 세상으로 들어오셔서, 내가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내 대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용서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를 구속하던 폭군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Self)이었습니다. “나 자신”이라 함은 곧 “자기중심성”을 말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내 마음과 뜻에 포로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은 마치 지구 중력(重力)처럼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짓누르고 있다 하겠습니다.
“나 자신”(Self)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없을까? 하나님께서 두 가지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의 두 계명이 그것입니다. 하나는 그분을 죽도록 사랑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들 계명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나 자신”(Self)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새로운 구속 즉 하나님과 이웃에 구속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이 순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즉 “나 자신”을 가장 윗자리에 놓고 나의 자율성을 선포하며, 이웃과 하나님을 눈에 띄지 않는 뒷자리 어딘 가에 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자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지 살펴보면, “자기중심성”이라는 죄가 얼마나 인간의 보편적인 현상인지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 사랑”; “자기도취”; “자기주장”; “자기선전”; “방종”(self-indulgence); “자기만족”; “자화자찬”; “자기 연민”; “이기주의”; “완고함”(self-will).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권능으로 이 순서를 바꾸셨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은 우리 안에 새로운 인격 즉 하나님의 양자(養子)의 인격을 내 안에 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이 새로운 인격이 내 속에서 변화를 시작했으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변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말입니다. 나는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있으며, 지금도 하고 있습니까?
세 번째 우리를 구속하던 폭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을 항상 괴롭혀 왔던 보편적인 두려움들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미지의 것”; “신비”; “핵으로 인한 멸망”; “질병”; “사별”; “노쇠”; “죽음.” 이뿐 만이 아닙니다. 고대의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두려움들조차 지금까지 살아남아 활개 치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부적”(符籍)을 갖고 다니며, 승강기나 고층 건물에서 4층과 13층을 아예 없애버리는가 하며, “오늘의 운세”는 여전히 주요 일간지에 한 자리를 버젓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심리적인 마비 상태를 가져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곰팡이와도 같아서 어두운 데서 가장 잘 자라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이 모든 두려움들이 놓여 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것들이 그기에 있는 것을 볼 때 두려움의 권세는 사라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체험하신 세 가지 중요한 사건들, 즉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그 모든 폭군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유-광복과 독립. 그러나 우리의 자유는 단순히 해방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더 큰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라는 동전의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자유를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새로운 구속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속되어야 할 더 큰 자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우리의 광복절(光復節)은 단순히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독립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광복”은 문자 그대로 “빛을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빛이 세상에 비추는 것은 세상이 원래 지니고 있어야 할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대한민국 광복절의 의미와 목적은 대한민국이 원래 가지고 있는 그 자존(自尊)과 정체성(正體性)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일단 소수 민족이 차별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그 민족은 자존감과 존엄성을 누릴 자유를 갖게 됩니다. 나라가 자유롭지 못할 때는 독립국의 지위가 거절되고, 언론이 자유롭지 못할 때는 진리가 부정되며, 민족이 자유롭지 못할 때는 자존감이 부인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도 단순히 ‘바로’ 왕의 구속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아닙니다. 새로운 주인 ‘야훼’ 하나님에게 구속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왕 같은 제사장 나라”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출애굽의 목적이자 이스라엘의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속(救贖)이라 부릅니다(그동안 억압과 관련하여 사용해 왔던 동일한 한글 발음을 지니는 용어 拘束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구속(救贖)이란 “구원하여 속한다”는 의미로서, “일정한 대가를 원 주인에게 지불하고, 새로운 주인의 소유로 삼는 행위”를 말합니다.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의 몸값으로 지불한 것은 “양의 피”였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구속(救贖)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한 측면에 불과합니다만, 자유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중요한 빛을 제공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유. 그렇다면 인간의 적극적인 자유란 무엇입니까? 즉 “내가 무엇을 위해서 자유롭게 되었는가?”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란 하나님이 만드시고 의도하신 대로 진정한 “내 자신이 되는 자유”를 의미해야 합니다. 이는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은 내 인생의 목적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 원리를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유”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완전하며 절대적인 자유임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이 전혀 자유롭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자유라는 것이 분명 무엇이든지 절대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분이 거짓말을 할 수도 없으며, 시험을 하거나 시험을 받으실 수도 없으며, 악을 참으실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참고. 히 6:18; 약 1:13; 합 1:1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유는 완전한 것입니다. 자신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하실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리스’ 신화속의 신들과는 달리, 하나님에게는 독단적이거나, 변덕스럽거나, 일시적이거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이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자멸(自滅)이며 자기부인(自己否認)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를 그의 참 자아(自我)이신 스스로의 존재 안에서 찾으십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것이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자유, 무제한적인 자유라는 것은 실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것이라면(실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도 거의 확실하게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유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의 자유는 진정한 우리 자신이 되는 자유입니다.
물고기를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고기의 자유는 그가 물속에 있을 때만 가능해집니다. 물은 물고기가 자신의 물고기다움, 물고기로서의 정체성과 성취와 자유를 맛볼 수 있는 유일한 환경입니다. 물이 주는 제한 속에 자유가 있습니다. 시민으로서의 자유는 어떻습니까? 정당한 국가 권력에 순종하고 순응하는 데서부터 온다고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롬 13:1-7).
그렇다면 나는 어떻습니까? 나의 물은 무엇이며,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나를 나 되게 하는 고유한 영역은 어디 있는 것일까? 사랑의 구속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구속합니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나는 자유롭기 위해서 섬겨야 합니다.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나는 사랑 안에서 나를 잃어버려야 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림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나는 어떻게 내 자신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질문을 달리해 봅시다: “나는 정말 제자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