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와 아브라함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8:48-58약 9분 분량
망언(妄言)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미친 소리” 내지는 “헛소리”입니다. 그리고 망동(妄動)은 “미친 짓”을 말합니다. 최근 우리가 들어본 가장 대표적인 망언을 꼽으라면, 일본이 방위백서에서 발표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일 것입니다(물론 이 주장은 2005년부터 계속 해오던 것이긴 합니다만).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망동은 일본의 극우파 교수 한 사람과 의원 세 사람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울릉도를 방문하겠다고 인천 공항을 통한 입국 시도(試圖)를 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순신 장군의 후손 중 한 사람이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이미 알고 있었다”거나, 또는 “이순신 장군이 8.15 조국 광복의 날을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필경 그 사람 또한 온전하지 못하다 할 것이다.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자식이 아비보다 먼저 태어날 수가 없고, 수백 년 뒤에 일어날 일을 예견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은 어떻습니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58절). 이 역시 망언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주장은 실은 “나는 하나님이야”하고 선포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살고 있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제 격이라”고 말을 합니다. 과연 경건한 ‘유대’인들, 오직 “유일 신” 신앙으로 똘똘 뭉친 종교적 열성분자들이 이런 사람을 그냥 가만히 놔 둘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분노와 적대감으로 가득 차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3절). 도대체 네가 누구이기에 이처럼 미친 소리를 지껄이느냐는 것이지요. 금방이라도 잡아 죽일 것 같은 기세입니다.
아브라함. 지금 예수님과 반대자들 간의 논쟁은 가히 점입가경(漸入佳境) 수준입니다. 각기 서로를 비난하고, 정신이 온전한가를 물으며, 서로의 혈통에 대해서 논쟁하고 있습니다. 혈통에 관한 논쟁의 핵심 인물은 단연 ‘아브라함’입니다. 이 논쟁도 예수님께서 먼저 自招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강론 때문이었습니다. 반대자들은 “우리가 언제 노예라도 된 적이 있었단 말인가?”하고 당장 반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은 이곳 8장에서만 무려 열한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그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곳은 여기뿐입니다.
반대자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하지만, 예수님의 평가는 재미있습니다. 한 번은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37절상). 긍정적인 평가입니다. 그러나 또 한 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39절하). 부정적인 평가인 셈입니다. 즉 예수님의 두 평가는 상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평가는 각기 진실의 양면을 보여주고 있다하겠습니다. 진실의 양면이란, ‘아브라함’은 역사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실존적인 인물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즉 육신과 혈연의 계보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계보로 보자면, 그는 영적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자, 이스라엘 개개인의 전형(典型)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참고. 롬 4). 즉 그는 내 아버지이자 곧 내 자신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전형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전형이라는 말을 바꾸어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인격과 신앙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이름은 ‘아브라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평가인 즉은 이들 반대자들은 전혀 ‘아브라함’적이 않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창세기>와 <히브리서>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소명(召命)과, 믿음과, 그리고 소망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즉 <아브라함 이야기>는 그의 소명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의 소명을 단 두 개의 단어로 요약한다면, “떠나라”와 “가라”입니다. 여기서 “떠나다”는 “버리다”는 뜻인데, 이는 절교(絶交) 내지는 단절(斷絶)을 말합니다. 또한 “내려놓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브람’이 버리고,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입니다. 불교 용어를 빌자면 “출가”(出家)인 셈이지요. 이전에 내 존재와 삶의 의미를 규정해주던 그 모든 친숙한 것들과의 이별을 의미합니다. 그의 이름 ‘아브람’마저도 이제 곧 버리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되기 위해서 말이지요. 이를 <신약>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아브람’의 이전 이름이 지나가고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16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19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막 1:17-20)
여기서도 어부들은 “버렸고”(즉 “내려놓았고”), 또 “따라갔습니다.” 어부(漁夫)가 사도(師徒)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마가’는 이들이 무엇을 버렸는지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족과 평생직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가 그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와 같은 소명을 받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그분의 백성이 되라고 하실 때, 나로 하여금 내 있는 곳에서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이고 공간적인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집착하던 그것들,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하던 그것들, 취미나 습관, 지위나 명성, 심지어 사랑하는 친구나, 가족이나, 공동체마저 떠나라는 소명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소명은 떠나고, 버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버리고 그냥 그렇게 살아라”가 아닙니다. 어디론가 “가라”고 말합니다. 어디로 가야합니까?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라면, 그저 “하나님께서 보여줄 땅”이라는 것이 그가 아는 전부였습니다. ‘바울’의 경우라면 ‘헬라’ 세계가 그가 가야할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바울’이 무슨 나침반이나 지도나 여행 매뉴얼이라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믿음”뿐이었습니다. 본인은 여기서 “믿음”을 “창조적 개척정신”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창조적 개척정신”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8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 11:8-9),
이처럼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지고 소명을 좇아간 것은,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10)
소망이 그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는 뜻이겠지요.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에 안주하지 않고, 모든 것이 갖추어져있는 ‘하란’의 풍요에 연연하지 않고, 가족과 친지들을 뒤로 하고, 소망을 항해 이동해 갔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소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절).
하지만 지금 이들 반대자들은 어떠한가? 예수님의 요지인 즉은, 악을 쓰고 덤벼들고 있는 이들 모습에서 ‘아브라함’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종교적, 사회적 명예나 특권들을 단 한 치도 떠날 생각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하지만 이거 너무 나간 것 아닌가요? ‘아브라함’의 믿음과 소망을 칭송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고, 또 보고 기뻐하였다니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때”를 바라고 즐거워했다면 모를까, “예수의 때”를 바랐다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반대자들의 질문, 즉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3절)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으로 볼 수도 있을까요? 하지만 그것이 무어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그분께서 무어라 하셨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떤 대답을 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그들의 질문은 그냥 허공에 매달려 있을 뿐일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에 아무런 구체적인 영향력을 주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어차피 망언으로 끝나게 될 뿐이었습니다. 즉 공허한 소리가 될 것이며, 예수님의 행위는 망동(妄動)이 될 것입니다. 기막힌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마치 지뢰밭에서 지뢰를 밝는 일이 너무 쉽듯이,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곳곳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지천으로 늘려있습니다. 단지 몇 가지만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은 “영존하는 말씀”이고, “만물의 주인”이며, “세상의 빛”이고, “생명의 떡”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고, “선한 목자”이며, “참 포도나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아는 것으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름을 아는 것과 그 사람을 아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대학에서 본인의 강의를 들은 학생이라면 내가 누구인지, 내 이름이 무엇인지, 내 직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나를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유대’인들이 물었던 그 질문,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는 그냥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까? 왜냐하면 이 질문은 내가 답변해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예수께서 반대자들의 질문을 되받아 오늘 나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물으신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살아생전에 그분의 제자들에게도 똑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진정 의미 있는 질문은 “당신은 누구십니까?”일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유일한 질문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답변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느니라.” 이것이 우리가 들어야 할 유일한 대답입니다.
이제 내가 예수님에게 들려주어야 할 대답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의미 있는 유일한 대답은 “나는 아브라함이니 이다”가 아닐까요?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