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必死則生, 必生則死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2:24-26약 16분 분량
군사 독재 정권 시절에 대학에서 소위 운동권에 몸담았던 학생들 중 상당수가 현재 국회나 사법부에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거나, 아니면 교사가 되어 전교조에서 일종의 정치교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 대한 동기를 물어보면, 그 자리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고 자신의 이상과 정신을 이루기 위해서였다는 대답을 종종 듣게 됩니다.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 필부필부(匹夫匹婦)로 살면서 이런 저런 세상의 부조리나, 부정과 부패, 무사안일과 무능력, 그리고 소위 사회 지도자급 인사들의 권력 남용과 타락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좌절하고 분노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소위 높은 지위나 위치에 올라 이 세상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결국 억울해서 출세해야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동안 억울해서 출세를 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을 터인데, 세상은 크게 변한 것 같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더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대한민국만큼 소위 ‘블루컬러’ 범죄가 많은 곳도 드물 것입니다. 언필칭 사회 지도층에 속한다는 사람들의 범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비리나 뇌물 스캔들이 신문이나 방송을 장식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우리의 영웅들이 선택하는 대학의 학과들은 소위 인기 학과들 즉 법대나, 의대나, 상경 대학들입니다.
그러니까 통계적으로 보자면 이들 영웅들이야말로 이 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게 해온 주범의 노릇을 해 온 것입니다. 우리의 일그러진 영웅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사실 의사나 변호사들의 탈세는 더 이상의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선진국에서는 탈세를 살인에 버금가는 중죄(重罪)로 다루고 있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탐욕은 탈세를 넘어 살인까지 불사하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개 이들 소위 출세했다는 사람들의 인생 유전을 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수석은 도맡아하며, 그 성적으로 자신의 전공이나 적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법대나 의대에 지원합니다. 졸업 후 일정한 자격시험이나 국가고시를 거쳐 안정된 수입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노력한 결과에 따른 당연한 보상을 받은 것이니 칭찬받고 박수를 받아야 합니다. 한 우물을 열심히 판 결과일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입니다. 목적을 이루었으니 그 정도에서 만족하고 보람되게 살면 좋을 텐데, 그 이상을 원하기 시작합니다. 즉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재력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집니다. 정치야말로 그와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적합한 영역일 것입니다. 수 없이 많은 이익단체들이 국회의원을 상대로 로비를 벌이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 영향력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이 좋아 로비이지 우리나라에서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지는 로비가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입니다. 대개 로비라는 것이 다수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다행이겠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자신만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반칙과 불법이 판을 치게 됩니다.
그나마 이것이 드러나지 않으면 다행이겠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대개의 경우 언론에 알려지고,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가, 재판을 받아, 결국 감옥행으로 끝이 납니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출세는 수많은 경우 감옥행으로 마감하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려다 자신이 바뀌어버린 것이지요. <성경>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를 든다면 ‘모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구하겠다는 그의 동기는 순수했지만, 열정이 지나쳐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 도피로 끝나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도피자로, 살인자로, 실패자로 여생을 보냈겠지요. ‘가인’처럼 말입니다.
영광의 원리. 이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모세’뿐이겠습니까! ‘예루살렘’을 보고 절망하고, 통곡하시던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께서 왜 통곡하셨고 분노하셨습니까? 그 도시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그분의 꿈이었고, 비전이었으며, 소명이었던 것이지요.
‘존 스토트’ 목사님은 “비전은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분노가 없는 사람은 실패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비전은 환상이고 상상입니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는 것을 보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지금 현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현재의 모순, 지금의 내 모습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성경>도 “내 백성이 꿈이 없어 망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족>의 “목회 서신”에서 본인은 현재의 불만을 해결하는 방식에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참고. 제 1권 2호). 예수님은 ‘모세’와는 달랐습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네 이놈들 내가 가서 모두 쓸어버리리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요량이었다면 공회에 들어갔겠지요. 그러나 그분은 말(馬) 대신 당나귀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이방인들을 보고 느닷없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24절).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을 가진 자의 태도로 보기 어렵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분은 이방인들이 찾아온 것을 놓고, “그 때”가 왔으며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23절). 당나귀와 영광, 죽음과 영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궁합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은 궁합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23). 아주 불쾌하고 어리석다는 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내가 살아 있어야 일이 되는 것이지 죽고 나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죽은 호랑이보다 살아있는 강아지가 더 낫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시편>의 시인도 “음부에서 주를 찬양할 자가 누가 있나이까”하고 반문(反問)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희생시켜서 성취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상 없다는 선언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을 개혁하고 바꾸기는커녕 개인의 목표도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방법을 택하는 것이 성공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즉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죽이고 희생시키는 것 말입니다. 즉 나 아닌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희생시키면 됩니다. 그 사람을 충동질하고 부추기면 됩니다. 그 일환으로 단체나 조직을 만들어 그럴듯한 구호를 내세우며, 끊임없이 타도할 적을 만들어 대중의 증오심과 적개심을 유발합니다. 희한하게도 사람들은 여기에 잘 속아 넘어갑니다. 공산혁명이 이와 같은 사례의 전형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경우 이들 지도자들은 혁명이 성공했을 때에는 앞 다투어 영광의 자리를 누리려 하지만, 실패했을 경우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밀알의 DNA, 즉 “영광의 원리”가 그분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우리 모든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어록(語錄)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인류의 보편적 지혜를 담고 있는 금언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임전훈(臨戰訓)에도 등장하고 있는 말입니다. 불과 13척의 전선(戰船)을 이끌고 그 유명한 명량대첩(鳴梁大捷)을 이끌어내기 전에 휘하 장병들을 독려하며 하신 말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우리 역사를 조금만 돌아보아도 이처럼 의로운 죽음을 자초한 분들은 부지기수(不知其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수시로 언론과 방송에서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의로운 행적에 대한 보도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의인들의 면면도 각양각색입니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평생을 염소나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한 할머니에서부터, 유명 연예인이나 체육인 및 사업가나 학자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이분들의 사상이나 종교적 배경도 이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합니다. 무교에서부터, 불교나, 천주교, 그리고 기독교 등 전체를 망라하고 있습니다. 이들 개개인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주는 밀알들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의로운 한국인들은 국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십 년 전 미국의 젊은이들이 평화봉사단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봉사와 희생의 본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대한민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국제 협력단”을 위시한 이런 저런 기관의 이름으로 오대양 육대주에 흩어져 거룩한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활동도 단순한 종교적 선교에서부터, 의료지원, 우물 파주기, 집지어주기, 학교나 도서관 지어주기, 등등 실로 다양하고 광범위합니다. 개중에는 취업을 위한 소위 ‘스펙’ 쌓기로 참여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대부분 그들의 동기는 순수합니다. 나는 바로 이들과 이들의 활동이야말로 미래 한국의 큰 자산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우리의 활동이 지난 세기 열강의 제국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내 것을 강요하고 남의 것을 빼앗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누고, 섬김으로써 세계의 지도자로 부상(浮上)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스스로 낮아짐으로써 높임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대한민국, 특히 청년 한국의 DNA는 지배하고 군림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을 부러워할지언정, 두려워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세계 여러 가난한 나라에서 우리를 배우고 친구가 되고자 속속 방문하고 있습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만 하더라도 그분의 직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이나 갈등, 그리고 지원과 격려가 필요한 곳에는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그의 공적으로 그분은 올해 서울평화상을 받게 됩니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오히려 외국에서 더 잘 알려져 있는 의로운 죽음도 있습니다. 매년 일본에서 열리고 있는 한 추모행사가 그것입니다. 김수현이라 불리는 한 한국인 대학생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추도식입니다. 이 학생은 일본 견학 여행을 하는 중에 한 전철 선로에 빠져 죽음 직전에 있던 한 일본인을 구출하고 대신 열차에 치어 죽었습니다. 한국에서 기리지 않는 죽음을 일본에서 기리고 있다는 사실이 다소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무상이 아닌 유상. 그러면 이들 밀알들이 자신들이 행한 숭고한 행적에 대하여 받는 보상은 과연 무엇일까? 이순신 장군이나 김수현 학생처럼 단순히 후세 사람들의 추앙이나 칭송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할까?
그것도 없는 것보다야 백배 낫다는 생각입니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으니 ‘가롯 유다’로 후세에 길이 기억되기보다는 ‘마리아’로 기억되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이완용으로 기억될 것인가, 아니면 안중근 의사로 남을 것인가의 차이보다 더 크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의 칭송보다 더 큰 보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이 받게 될 보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를 섬기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서 높이실 것이다”(26절). 참 흥미롭고 놀라운 약속입니다. 특히 이 구절의 후반이 그렇습니다.
매년 스승의 날이면 울산에서 과일 농사를 하는 한 부부가 본인이 재직하고 있는 학과의 교수님들 앞으로 과일 한 상자씩을 보내줍니다. 그 부부의 아들이 우리 학과 출신으로서 지금은 졸업하여 모 기업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졸업을 한 지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잘 교육시켜 좋은 곳에 취업하게 해주어 고맙다는 표시이겠지요. 이것이 부모의 심정일 것입니다. 내 자식에게 잘해주는 사람, 특히 내 자식이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힘이 되어주고 함께 어려움을 겪은 사람을 어찌 모른 체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아버지, 즉 하나님도 같은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 아들과 함께 고초를 겪었으며, 그 아들 때문에 이유 없이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예수님의 아버지께서는 그냥 모른 체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중에 아들을 높이는 그 자리에 내 이름도 함께 부르며 높여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높여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황송하게도 나를 존경한다는 말입니다.
혹자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이렇게 비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천국에서 무슨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글쎄요. 나도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이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천국에서의 보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니, 어떤 형태로든 오늘의 행위와 행적에 대한 보상과 평가가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치사하고 쩨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우리 학과 교수님들 중에서 울산에 사시는 그 부모님에 대해서 아무도 치사하다느니, 쩨쩨하다느니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천국의 법칙과 세상의 법칙이 늘상 다른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땅에 떨어지는 밀알”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파할 때 나도 아파한다는 말입니다. 그분께서 분노하고 슬퍼할 때 나도 동참한다는 말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당하는 억울함이 있습니까? 교회나 목장을 생각할 때마나 한숨이 나옵니까? 어느 한 사람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답답함이 있습니까? “내가 왜 이 따위 보잘 것 없는 일에 시간과 돈과 정열을 바쳐야 해?” 이런 짜증과 분노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땅에 떨어지는 밀알”이 되고 있는 중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중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나를 흠모하고 높여줄 준비를 하고 계신 겁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엄청난 약속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내 마음에 깊이 와 닿지는 않습니다. 이는 마치 미래에 내가 받게 될 수십 내지 수백 배의 배당금을 보고 지금 내가 받는 월급의 절반 이상을 뚝 떼어 보험이나 적금에 가입하라는 달콤한 유혹처럼 들립니다. 그 약속이 아무리 사실로 드러난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 그 많은 돈을 따로 떼어놓을 여유가 없습니다. 현실이 너무 각박합니다. 평소 젊어서부터 지속적인 운동을 하는 것이 건강은 물론 장수(長壽)에도 좋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스클럽에 가보면 대부분 나이 든 사람들입니다. 즉 건강한 내일을 위해서 오늘 땀을 흘리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평소 나눔이나, 희생이나, 섬김이나, 봉사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늘 하는 사람들로 한정되어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가수 김장훈과 서경덕 교수는 매년 거금을 들여 미국 뉴욕의 타임스퀘어에 독도 광고를 올립니다. 그 일도 모자란다고 생각했음인지 김장훈 씨는 수시로 수억 원의 재산을 복지재단이나 공익재단에 내놓습니다. 그리고 서경덕 교수는 한국형 뮤지컬 <명성황후> 제작에도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었습니다. 지금은 국내외적으로 유명하게 되었지만, 그 뮤지컬이 처음 제작될 때만 하더라도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이 전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일종의 사명감으로 그 일에 매달렸습니다.
남이 아닌 자신. 도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러는 것일까? 미래의 보상이나 칭송을 기대하며 그랬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한두 번으로 족하지 않을까? 아무리 대의명분이 있는 일이라 해도 그처럼 힘든 일을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선한 일은 늘 하는 사람이 하는 것일까?
이들에게 물어보면 그 일이 즐겁고 기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 말에 따르면, 행위에 따른 보상이 즉각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일 천국에서가 아니라, 바로 오늘 내 안에서 천국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축 늘어져 있던 내 인생에 생기가 돌고, 활기가 넘쳐나고, 새로운 계획과 도전이 끊임없이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우리 누구나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원하는데, 그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희생이니 봉사니 하는 것들이 결국은 자기중심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누구나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이기적이지 않은 존재가 없습니다. 우주의 모든 별들조차도 그 힘 즉 중력(重力)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늙어 피부가 아래로 처지는 것도 지구의 중력이 아래로 즉 그 중심을 향하여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항상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분의 영광, 그분의 이름에 늘 예민하게 반응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을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으로 구분하려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입니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스캇 펙’(M. S. Scott) 박사님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나가려는 의지.”
이분의 정의에 따르면, 우선 사랑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정신적 성장이 그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인격적 성숙과 성장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일방적이 아니라 순환적 과정입니다. 타인의 성장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통해서 나 자신의 한계를 성공적으로 극복해 갈 수 있으며, 이전보다 엄청난 존재로 성장해 나갑니다. 이것이 나 자신을 확대해 가는 과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나는 이미 이전의 내가 아닙니다. 고도로 성숙한 부모가 되어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남을 사랑하는 것과 자신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적 발전에 기여했으니 같은 인간인 나의 성장에도 기여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남을 사랑할 수가 없으며, 자기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녀가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자라도록 훈련시킬 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정신적 발전을 위해서 자신의 정신적 발전을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자기 훈련을 포기하면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훈련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분의 정의에 따르면, 사랑에는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을 하나의 의지적 행동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행동은 단순히 욕망과는 다릅니다. 사랑은 그래서 사랑이라는 행위로 표현되는 만큼만 사랑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의지는 또한 선택을 내포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나는 내 아내를 반드시 사랑해야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가는 그녀를 사랑하기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의지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한 남자에서 남편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두 아이의 애비로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내 인생의 외연(外延)이 그만큼 확대된 것이었습니다.
필요가 아닌 성례. 이것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성례(聖禮)와도 같다 할 것입니다. 성례란 침례와 주의 만찬을 포함하고 있는데, 솔직히 우리는 이들 성례가 우리의 구원에 필요해서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거듭나기만 하면 됩니다. 성례와 주의 만찬이 우리의 구원에 필요해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례는 왜 행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명령이므로? 맞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우리의 인생을 너무 무미건조하게 만듭니다. 매사에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무슨 컴퓨터와 같은 존재로 나를 전락시켜버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행하도록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잿빛 하늘과도 같은 우리 인생에 색깔을 칠해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무성(無聲) 흑백영화와 입체음향 천연색 영화의 차이를 압니다. 사실 두 영화의 내용은 똑 같습니다만, 두 여화를 대하는 우리의 반응이 다릅니다. 우리는 입체음향 천연색 영화를 감상하면서 우리의 지성과 감성은 흥분하고 역동하며 환호합니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이 해마다 유월절을 행하는 것은 ‘야훼’ 하나님의 이름과 행위를 기억하고, 회상하고, 결단하고, 재 헌신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받는 구원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분이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적 있습니다. 우리의 성례가 바로 그러한 목적으로 제정된 것입니다.
오늘 내가 행할 성례란 다름 아닌 “하나의 밀알”로 썩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성례입니다. 무미건조한 내 인생을 활기차고 의미 있게 만드는 성례입니다. 그것이 내 구원에 필요해서가 아니라 매일 매일의 무의미와, 허무와, 상실로부터 벗어나게는 해 줄 것입니다. 즉 매일의 삶에서 나를 구출하고 구원해 줄 것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