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 때가 옴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2:20-23약 8분 분량
“미녀일수록 더 자주 열등감에 빠진다.” 이 말은 무슨 잠언 집에서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백설 공주의 계모(繼母)를 생각하며 본인이 만들어 본 말입니다. 이 계모는 단 하루라도 거울이 그녀에게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화가 나고 불안합니다.
말하고 글 쓰는 것을 평생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도 이 계모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늘 청중이나 또는 독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하며 말을 하고 글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의 중에는 행여나 학생들이 잘 알아듣지 못했을까 하여 수시로 질문을 하거나, 질문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는 아주 맥이 빠져버립니다. 질문은커녕 자기들끼리 소근 대며 웃고 낄낄거릴 때에는 화가 치밀어 아예 그들을 강의실 밖으로 쫓아내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미녀에 대한 예의는 아름답다고 칭찬해 주는 것이고, 선생에 대한 예의는 경청하고, 수시로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입니다. 내가 가장 자랑하고 뽐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으면, 서운함을 넘어서 화가 나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어느 한 분야에서 평생을 두고 연구를 했는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느끼는 기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학 교수는 연구 결과를 해당 학술지 등에 논문으로 발표를 합니다. 그 학술지가 세계적으로 유명할수록 내 연구 결과를 인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나를 알아주는 학자들이 늘어갑니다. 이렇게 지명도가 올라가면, 다른 학자들이 발표하는 논문에 대해서 평가를 해달라거나, 또는 내 분야에서 최근 일어나고 있는 연구 방향이나 경향 등에 대해서 총설(叢說)과 같은 글을 써달라는 요청이 오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아예 해당 학술지의 편집위원이 되어 달라고 위촉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본인에게는 아주 자랑스럽고 흐뭇한 일이지요. 세상이 나를 인정하고 알아주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여기 저기 교회에서 설교 요청이 들어오면 사실 싫다는 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설교하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평생을 살았는데, 어느 누구로부터도 설교 요청을 받아 본 적이 없다면 솔직히 인생을 헛살았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요? 이는 마치 개업은 하였으나, 아무도 주문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기분은 어떨까요? 교회를 다닌 지 십 수 년이 넘었는데도 주변 어느 누구로부터도 예수가 누군지 설명 좀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본 적이 없다면 말입니다.
예수를 뵙고자. 여기 ‘헬라인’ 몇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계 ‘헬라’인이 아니라 그야말로 순순한 이방인들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 온 목적은 예배였다고 말합니다(20절).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온 것이지요. 예배라고 한다면 당연히 만남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과 예배를 받는 하나님 간에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를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그 무슨 헌신이나, 결단이나, 희생으로 생각합니다만, 실은 그 반대인 경우가 더 정확하다 할 것입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것이며, 그러므로 예배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지요.
한 예로, 예배 시간에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주셨던 것처럼, 허무와 무의미 속에서 죽어있던 나를 소생시키시며,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양식과 치료제를 제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예배 시간에 일어납니다. 따라서 그 말씀을 제대로 받아먹은 자라면, 당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롭게 헌신하고 결단하는 자리로 나아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섬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나는 어제 살던 모습 그대로 오늘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음식을 집어삼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분이 주는 음식을 늘 내뱉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먹지 않으려는 아이와 먹이려는 부모 사이에 늘 싸움이 있듯이, 나와 그분 사이에도 늘 이기고 지는 싸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기는 쪽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감격이 없고, 새롭지가 않습니다. 먹은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 배고픈 상태로 왔다가 여전히 배고픈 상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먹지 않으려는 것은 그 음식이 맛이 없기 때문입니다. 맛이 없는 것은 어머니가 음식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즉 설교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 더 큰 원인은 다른 가공 음식들에 더 길들여져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영양가가 있고 없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말씀도 정말 재미없습니다. 그게 그 소리 같고, 늘 윤리․도덕적 교훈이나 잔소리 같고, 따분하고 지루합니다. 그리고 실제 살아가는 일에는 별 상관도 없고, 도움도 되지도 않습니다. 이런 음식을 누가 먼저 와서 먹겠다고 조르겠습니까! 진실로 배가 고파 뱃가죽이 등바닥에 달라붙을 정도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갈 때까지 가 본 사람이 아니라면, 잘 찾지 않는 책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 5:3)고 했을까요?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으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라고 했을까요? 지금 이들 ‘헬라’인 예배자들은 몹시 배가 고픈 것입니다. 그들은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21절). 그들은 자청해서 먹을 것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요 축복인 것이지요! 누가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지금 이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 모두는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우리와는 달리 예수께로 직접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뵙기를 원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듯이 직접 찾아가면 될 일을 가지고, 그분의 제자들에게로 갑니다. ‘빌립’과 ‘안드레’입니다. 왜 하필 이 두 사람인가는 문제의 요지는 아닐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지난 번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사도들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로 등장한 바 있습니다.
항상 대답할 준비를. 아무튼 이 두 제자의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화자는 그들이 “예수께 여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22절). 글쎄요, 화자가 여기서 무슨 큰 의미를 드러내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교훈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이 장면을 음미해 보기로 합시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아마도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어볼 요량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통해서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빌립’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가 어떤지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자기가 나서서 설명해 주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동료 ‘안드레’를 찾아갑니다(참고 1:44; 6:5-9).
그런데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만일 이들이 나에게도 같은 요청을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들이 나에게 예수를 만나기를 원한다든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만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기다렸다는 듯이 청산유수(靑山流水)로 그들의 갈증과 목마름을 해결해 줄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그러나 평생을 교인으로 살았는데 아무도 나에게 예수에 대해서 물어보는 자가 없다면, 내가 마땅히 대답해 줄 것이 없다면, 나는 정말 교회 헛 다닌 것은 아닐까요? 이 두 제자가 자신들의 선생님께서 이방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몰랐던 것처럼 말입니다. 평소 선생님의 가르침이나 행동을 통해서 충분히 대답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들의 상상력은 빈약했습니다. 공부를 잘 못한 것이 아니라, 상상하지를 않았습니다.
상상은 모험을 낳습니다. 상상은 도전을 낳습니다. 상상은 심약하고 소심한 나를 뻔뻔하고 건방지게 만듭니다. 상상은 창조하게 합니다. 상상은 공상(空想)을 현실이 되게 합니다. “아직”을 “이미”로 만들어줍니다.
그 때가 옴. 예수님께서 지금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때가 왔도다”(23절). “온 세상이 그를 따르고 있다”고 절규하던 ‘바리새’인들의 예언이 기막히게 적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참고. 19절). 그를 만나고 싶어 찾아온 ‘헬라’인들을 보자, 예수님의 가슴은 요동치고 폭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아니던 그 때”가 이제 마침내 왔고 이제 지나가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마침내 이 책의 중심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때”는 단순히 시간상의 한 시점만을 의미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 기자는 복음서의 중심적인 위기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위기는 20장 중반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이 때란 단순히 시간상의 한 시점만을 의미할 수는 없습니다. “인자가 자신의 원래의 영광을 얻게 되는 그 때”(23절)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신 분, 그리고 자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자신이 먹을 양식으로 삼았던 그분, 바로 그분이 더할 수 없는 순종의 한 행위를 통해서 아버지께 최종적으로 영광을 돌리실 바로 그 때가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의 이러한 행위에 대한 답으로 아들을 영광으로 관 씌우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때를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준비함도 없이, 그저 세월이 지나기를 기다려왔던 것은 아닙니다. 항상 그 나라를 가르쳤고, 전했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앞당겼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선생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무슨 재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한 가지 처방을 내려줍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