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에필로그(1):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2:37-43약 10분 분량
믿을 수 없는 불신
(요 12:37-43)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히는 것과 같은 절망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참고 설명하고 또 설명하는 데도 알아듣지를 못할 때가 그런 경우입니다.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이 경우만이 아닙니다. 내 연구실에는 칠판이 하나 있습니다. 대학원생 각자가 매일 수행할 실험 계획을 적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그래서 출근하면 가장 먼저 그날의 하루 계획을 적는 것으로 시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매 주 토요일에는 주간 모임을 통해서 한 주를 정리하고 다음 주 계획에 대해서 발표합니다. 그리고 매 주 화요일에는 전 세계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발표한 연구 논문을 읽고 발표하는 모임도 가집니다.
나는 학생들의 발표나 계획을 근거로 연구의 진도나 진행 방향을 알 수 있고, 더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있어 좋습니다. 물론 가장 큰 유익은 학생 본인에게 있음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수시로 논문을 발표해야 하고, 또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학위 논문도 써서 제출해야 하는 당사자로서는 아무 계획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낼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외국의 경우와는 달리, 그냥 자신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면 졸업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학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졸업한 제자들이 취업을 한 후, 나중에 찾아 와서는 한 결 같이 재학 시절 중의 이와 같은 경험과 습관이 큰 도움이 되더라고 회고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태도나 방법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찾아서 수행함에 있어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없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동료나 상관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때에는 정말 흐뭇하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재학 중에는 이 일이 잘 안됩니다. 물론 몸에 습관으로 굳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간혹 한 번 씩 잊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내가 먼저 가서 물어보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잊고 지나치는 일이 거의 매일처럼 반복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매일처럼 뒤따라 다니면서 앵무새처럼 같은 주문을 반복할 수 있겠습니까? 피차 얼마나 귀찮고 짜증나는 일입니까?
처음에는 좋은 말로 하다가, 점차 짜증 섞인 잔소리로 변하고, 그러다가 고함이 터져 나옵니다. 이럴 때 마음 약한 여학생은 눈물을 글썽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면 다시 마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고무줄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듯,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기억상실증이 반복됩니다. 아, 좋은 습관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지루한 일인지요! 끈기와 인내와 열정이 없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가슴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금언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 이 단락에서 전해오는 화자 ‘요한’의 심정이 바로 그와 같다 하겠습니다. 적어도 본인에게는 그렇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그는 지금 두 번에 걸쳐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자신의 심정을 직접 드러내면서 이스라엘의 불신을 성토하고 있고(참고. 37-43절), 또 한 번은 예수님의 절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의 답답한 심정을 대신 분출하고 있습니다(참고. 44-50절).
하나님의 주권. 사실 우리의 화자는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믿음과 불신의 문제를 마치 동전의 양면을 번갈아 보여주듯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기적설화>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의 탁월한 문학적 솜씨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됩니다.
그는 먼저 이스라엘의 불신에 대해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결론인즉은, 이스라엘의 불신은 참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집요하고도 끈질기다는 것입니다. 매일처럼 일 일 계획 쓰는 일을 잊어버리는 내 제자들만큼이나 집요하고 끈질기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답답하였던지 그는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 하며”(37절).
이스라엘의 불신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도 아닌 이스라엘의 불신을 말입니다. ‘헬라’인들도 만나보기를 원하는 그분을 이스라엘이 배척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현대인들이 복음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도 없고,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그 많은 기적들을 한 번이라도 체험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교회나 교인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그 복음을 듣고 체험할 기회도 거의 없으니, 세상의 불신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달라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과 같은 시대를 살았고, 예수님과 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었으며, 종말에 대한 같은 소망을 지니고 있었으며, 예수님의 하나님이 바로 자신들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달라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는 달랐습니다. 그것도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라, 다름을 인정할 수 없어 죽여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로 달랐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인정할 수 없어 죽였던 것만큼이나 밉고 꼴 보기가 싫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이처럼 한사코 믿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앞에서 우리는 공회 지도자들의 불신과 관련해서 인지부조화 이론이나, 진영논리, 그리고 선택적 노출 등으로 이해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불신의 원인이나 책임을 이스라엘의 편에서 찾아 보려했습니다.
하지만 ‘요한’ 화자는 그게 아닙니다. 그는 우리와는 정 반대편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편에서 그 대답을 찾고 있습니다. 그 대답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불신은 기적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으며, 그 기적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신 것이라는 대답입니다. 예수님이 거부당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이지요.
그 근거로 화자는 그 유명한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40절, 사 6:10).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가 과연 이 본문을 예수님에 관한 예언으로 이해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은 아닙니다. 그리고 과연 ‘요한’ 화자가 <성경>을 올바르게 인용하고, 해석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문제의 핵심은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적어도 ‘요한’ 화자에게 있어서, 이 본문만큼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는 구절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화자의 인식은 극단적인 운명 예정론으로 비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자신도 일찍이 그렇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 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6:44).
이처럼 역사가 하나님의 계시라면 적어도 ‘유대’인들에게는 역사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 화자나 ‘바울’ 사도의 <성경> 인용도 이와 같은 역사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비단 이 두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실은 이스라엘 모두의 역사관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역사란 항상 목적을 지닌, 즉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일어나는 필연일 뿐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그 유명한 선언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역사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 단순한 과거의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있어 “역사란 그의 이야기”(History is His story)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세 가지 구분만이 있을 뿐입니다. 흔히 ‘타낙’이라 부르는 그들의 <성경>은 <오경>과 <예언서>와 그리고 <성문서>의 ‘히브리’어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성경>에는 소위 말하는 <역사서>가 없습니다.
신실한 소수, 침묵의 다수. 여기서 다시 한 번 ‘요한’ 화자가 인용하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절규를 재인용해 봅시다: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38절). 이들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당연히 “아무도 없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화자는 이스라엘 모두가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소수의 충성된 무리”(the faithful minority)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무리 속에는 공회의 지도자들도 포함되어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42절). 어쩌면 이들 중에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도 포함되어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이 누구든 여기서 “신실한 소수”는 이미 이스라엘 일반 대중에게는 친숙한 개념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가 ‘아합’과 ‘이사벨’을 피하여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서 절망가운데 절규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4).
그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하셨습니까? “아니야,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신실한 백성 칠천 명을 남겨두었어”(왕상 19:18)라고 말합니다.
칠천 명은 당시 이스라엘 전체 인구수로 볼 때 지극히 미미한 숫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상징적인 숫자로서, “고작 칠천 명”이 아니라 “무려 칠천 명”이나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필요하고도 충분한 숫자라는 것이지요. “관리 중에도 믿는 자가 많다”는 ‘요한’ 화자의 전언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침묵하는 다수” 이스라엘은 도무지 핑계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불신은 이스라엘의 책임으로 돌려야 한다는 암시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있었다고 해서 “인간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둘은 양자택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동전의 양면의 관계에 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은 것입니다.
‘요한’ 화자가 신실한 소수를 거명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믿음과 희생에 관한 교훈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지자 ‘엘리야’의 경우에서 보듯, 역사 전반을 두고 신실한 자는 항상 소수에 속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 누구나 소수에 속하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침묵하는 다수에 속하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관리들 역시 그랬나 봅니다. 그들도 공동체로부터의 추방, 즉 “사회적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42-43절).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믿음의 대가는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는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의 평가를 더 선호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주님이 내 이름을 불러줄 것임을 기대하고 살아갑니다.
과연 그 일이 일어날까? 과연 내 기대대로 이루어질까? 그런 나에게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가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막 8:38);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눅 12:9).
이 말씀은 듣기에 따라서 현세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들이 훗날 예수님으로부터 받게 될 무슨 보복처럼 들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브루스 밀른’의 말대로,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제자란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즉 현세에서 주님을 부인하거나 침묵하는 사람을 어찌 하나님의 백성이라 인정할 수 있겠느냐는 강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서>는 이를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나는 어느 쪽입니까? 침묵하는 다수에 속해 있습니까? 아니면 소수의 남은 자들에게 속해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