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6:22-26약 7분 분량
오늘날 우리는 수 없이 많은 비밀 번호를 가지고 삽니다. 은행 계좌에서부터 아파트 출입문, 휴대폰, 컴퓨터, 온라인 회원, 등등 모두 비밀 번호가 없으면 사용할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비밀번호는 자물쇠와 열쇠의 관계에서 보듯이, 각 경우에 꼭 들어맞는 비밀번호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나의 비밀번호를 가지고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겠으나, 예컨대, 한 개의 은행 계좌에 필요한 비밀번호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러 개를 동시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 몸도 그렇습니다. 우리 몸에는 수없이 많은 신진대사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들 대사를 원활하게 해주는 수없이 많은 효소 즉 생체 촉매들이 있지만, 각각의 대사에 맞는 촉매는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물쇠와 열쇠의 원리”(the rock & key principle)라 부릅니다.
우리의 몸이 그렇다면, 영혼도 그러하다고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일찍이 고백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당신을 위해서 우리를 지었은즉, 우리가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까지 우리 영혼에 쉼이 없나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영혼의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는 단 하나, 즉 하나님밖에는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다른 것으로 열려고 시도할 때마다 실패와 좌절만을 겪게 될 뿐이라는 고백인 것이지요.
떡을 찾아서. 왜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까? 그 전날 배가 터지도록 먹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왜 그가 또 필요한가요? 그분을 찾아서 무엇을 얻어내겠다는 말입니까? 내 영혼의 안식에 꼭 필요한 바로 그 열쇠를 얻기 위함일까요? 아니면 그로부터 또 다른 빵을 얻어먹기 위함일까요?
이들 무리가 무엇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 나섰든, 그들은 지금 ‘어거스틴’의 고백을 행동으로 재확인시켜주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전날 배터지도록 먹었던 물고기와 보리떡은 단 한 끼의 식사에 그칠 뿐이었다는 것이지요. 영원한 만족이 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먼저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은 이례적인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은 빛이 먼저 찾아와 비추지 않으면 그대로 어둠으로 남아있으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둠이 먼저 빛을 맞으러 나아오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의미, 즉 “표적”을 읽지 못하는 무리가 어찌 예수님을 먼저 찾아 나설 수 있다는 말입니까!
<로마서>도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0-11)
<로마서>의 진단인 즉은, 지금 이곳에서 가당치도 않은 지금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도 이들이 기적의 의미 즉 “표적”을 읽었을 리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먼저 예수님을 찾으러 나선 것일까요? 그리고 이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지금 본문 이야기 속에는 여러 개의 배가 등장하고 있어, 이야기 내용을 파악하는데 다소 애매모호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대충 정리해 보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전날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먹던 날, 호수 이쪽 편 나룻 터에는 배가 한 척밖에 없었으며, 다음날 제자들만 그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즉 ‘가버나움’ 쪽으로 건너간 줄로 알고 있는데, 지금 이곳에는 예수님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분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래서 배를 타고 예수님을 찾아 나섰는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분은 이미 ‘가버나움’에 와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놀라 묻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25절).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퉁명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거기에다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절).
예수님은 이처럼 별 가치 없는 질문에 대해서는 엉뚱한 대답으로 즉답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별로 친절한 선생님 같지 만은 않습니다. 그런데 대개 그 엉뚱하고 퉁명스러운 말씀 속에는 보석같이 빛나는 진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즉 무리들이 왜 예수님을 그렇게 열심히 찾고 있는지 그 동기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표적과 떡. 그 동기는 순전히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찾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떡과 물고기를 먹이신 것도 이들이 먹을 것이 없는 것을 보시고 측은히 여겼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먹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가 고프기 마련인 법, 다시 배를 채워 줄 예수님을 찾는 것이 왜 잘못이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무리는 지금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떡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들어봅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만일 무리가 기적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주님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떡을 찾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떡을 주신 것은 그들을 측은히 여겼기 때문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기였지, 표적 즉 “기적의 목적”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기적은 실패로 끝났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기적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된 말씀을 하셨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즉 “표적”을 보이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단연히 거부하시지만, 동시에 기적이“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적이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5:36).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기적의 증거에 대해서 일관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 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10:25)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10:37-38)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떡이 아니라 나를 구하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즉 기적의 떡을 맛보았으니 나를 맛보라는 것이지, 떡을 위하여 그분을 찾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요? 떡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수단과 목적을 혼돈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그분을 맛보고,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나의 직업이자 내 삶의 목적입니까? 아니면 내 인생의 필요와 목적을 위한 수단(手段)으로 그분을 활용하고자 합니까?
제자 되기 원함. 이 동일한 질문을 나에게 한 번 적용해 봅시다. 즉 누군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나를 이용하고자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이 나라 국회의원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신과 모멸과 혐오의 대상입니다. 설마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느 신학자보다 더 깊이 있는 신학적 통찰력을 지닌 작가였다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이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해도, 그분의 삶을 따르고 싶다.” 그분이 제자가 되고 싶다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 심오한 영향을 받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떡을 위하여 예수를 찾는 자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분의 종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종으로 삼겠다는 말은 아닐까요? 그분의 제자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제자로 삼겠다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삶의 헌신이나 결단이 필요 없습니다. 여차 하면 그냥 보따리 챙겨 떠나면 그만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떡과 물고기”의 의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강의를 하셨을 때 무리는 말할 것도 없고,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참고. 66절).
우리가 그분을 종으로, 그분을 나의 제자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데도 왜 인생에 만족이 없을까? 내 마음대로 그분을 부리고 있는데도 왜 안식과 만족이 없는 것일까? 설령 있다 해도 그것은 잠깐, 조금 후면 다시 새로운 필요를 찾아 나서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 무리처럼 떡을 주신 자가 아니라, 떡으로 만족하고 살려 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내 영혼의 문을 열려고 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는 진정 하나님을 맛보아 알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